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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배경 이야기: 서론(질문, 대답, 설명) 1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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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10-11 06:40 조회2,0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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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배경 이야기: 서론

(10월 1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9분)

 

연구 범위: 요 1:1-5, 창 1:1, 요 1:9-13, 3:16-21, 9:35-41, 마 7:21-23, 요 17:1-5

 

기억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첫째 주에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설명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았다. 이번 주는 요한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독자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복음서의 시작으로 가 볼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종종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글의 첫 단어와 문단에서 제시한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적 흐름을 보여주는 주제이며 창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음서의 서두에 기록된 이런 설명 덕분에 독자들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 곧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알고서 이 책을 읽는다. 독자들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디에서부터 이 장엄한 주제를 시작하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주제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역사적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이번 주 교과는 요한복음 1:1-18의 서론에서 시작하여 그 주요 주제를 정리하며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시며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느끼기: 높으신 주님이 낮아지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다. 

행하기: 말씀의 빛을 따라서 믿으며 삶을 통해 믿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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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씀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요 1:1)

*답: 그는 본질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명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요 1:14)

*답: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고 임마누엘, 곧 성소제도의 실현을 뜻한다.

4.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의 중요한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요 1:9)

*답: 빛의 증언을 받는 여부로 시작된다.

5. 요한복음에서 믿음이 명사가 아닌 동사로 사용되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답: 믿음은 지식이나 사상만이 아니고 생활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까?(요 1:3, 14)

*답: 창조와 육신이 되셔서 나타내셨다.

7.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깨닫는다.

 

결론: 요한은 거대한 우주적 흐름을 보여주며 가장 중요한 진리를 묘사한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는 하나님 사랑의 신비한 역설이며,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삶에서 믿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한다. 

 

10월 13일(일) 태초에 –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1-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는가?

[요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답: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하나님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다. 

 

요한복음은 이 놀라운 묘사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아름다운 한 문장에는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요한은 먼저 “태초에”라는 말로 창세기 1:1의 창조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말씀은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를 확증한다. 

다음으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한복음 1:18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아버지 품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의 생각으로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매우 친밀하시다. 

이어서 요한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헬라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헬라어에는 정관사(the)는 있지만 부정관사(a/an)는 없다. 헬라어 정관사(the)가 특정한 대상이나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구절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에는 정관사가 있으므로 이는 특정한 존재, 즉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 말씀인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구절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에는 관사가 없으므로, 이 구문은 그분의 신성한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지만 여전히 신성의 두 번째 위격이며 신성한 아들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요한은 요한복음 1:3, 4에서 예수님이 만물의 창조주시라 말함으로써 이러한 이해를 확인시켜 준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 오직 그분을 통해서 창조된 것이다.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하심의 모습이며 ‘그의 영광의 광채’이셨다”(시대의 소망, 19).

 

<부가설명> 요1:1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그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계시해 준다. 교과에 설명한 대로 헬라어는 정관사는 있어도 부정관사는 없다. 정관사는 정해진 사실을 확인하는 관사다. 우리 말로는 ‘그, 이’ 등이다. 영어는 ‘the’다. 헬라어로는 ‘호, 헤, 토’가 있다. 헬라어는 단어의 성별(gender)에 따라 정관사가 다르다. 그래서 명사에서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부정관사로 이해하게 된다. 요1:1에서 이것이 문제를 만들었다. 어떤 교파는 이것을 문제 삼아 ‘말씀은 하나님이시라’는 문장에서 ‘하나님’은 정관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는 하나의 하나님(신성)이라고 우긴다. 즉 예수님은 신성 중에 하나니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관사를 살려서 번역하면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이(그) 말씀이 그(톤=호)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된다. 여기서 말씀 하나님 앞에 ‘그’라는 정관사를 붙이면 그 하나님과 말씀 하나님을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말씀 하나님 앞에 ‘그’를 붙이지 않고 그 하나님과 구별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헬라어 문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되’라고 기록한 하나님은 분명히 1절에 말한 그 하나님이신데 18절 하나님 앞에는 관사가 없다. 그러므로 관사가 없는 것은 a god라고 우기는 것은 예수님을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우기는 것이다. 몰라도 괜찮은 분은 이 설명 몰라도 되지만 알아서 유익한 분들은 기억해서 유익이 될까하고 적었다. 예수님은 참으로 스스로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한 위이시다. 아멘.

 

10월 14일(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3, 14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신 어떤 일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요1:1~3,14]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답: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성육신(成肉身)하셔서 사람이 되셨다. 그래서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게 되셨다. 

 

요한은 “예수”라는 이름, 혹은 메시아/그리스도의 역할이 아닌, ‘말씀’(logos, 로고스)이라는 호칭으로 복음을 시작한다. 요한의 시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은 우주의 이성적 구조를 가리키거나 논리와 이성의 개념을 지칭하는데 ‘로고스’를 사용했다.

유력한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가르침은 현실을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절대적인 완전함이 존재하는 천상의, 불변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썩어지고 변화하며, 위에 있다고 여기지만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완전한 실체를 불완전하게 나타내는 이 땅의 영역이다. 어떤 철학은 로고스를 영원한 형상과 유한한 지상의 형태 사이의 추상적인 매개체로 정의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를 사뭇 다르게 정의한다. 요한은 진리인 로고스는 하늘과 땅 사이의 어딘가를 떠다니는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고스는 인격이며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14). 

요한에게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소통하셨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을 인류에게 나타내셨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며 사람에게 오셔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요한복음 1:14에서 사도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한다. '거하시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천막을 치다’라는 뜻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그 백성에게 성소, 즉 천막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출애굽기 25:8을 생각하게 한다. 그와 같이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당신과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의 영광을 가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말씀(로고스)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며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말씀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이 되셨다. 이 말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사람이 볼 때 완전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으나 그분의 생명의 씨는 아담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그것은 말씀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씨가 되어 동정녀에게 잉태하신 것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나신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체질을 가지셨기 때문에 육체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엄청난 오해다. 바울은 예수님을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분에 육체대로 알면 안 되는 분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에 영이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라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셔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오해하지 않도록 하셨다.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전적으로 아담 자손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한 희생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바울이 사울일 때 예수님을 오해한 것 같은 오해가 우리에게는 없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물과 성령으로 나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게 된다(롬8:9).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멘.

 

10월 15일(화) 말씀을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

 

요한복음 1:9-13을 읽어 보라.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들의 실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요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답: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다.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한복음의 서론인 1:1-18은 말씀(logos)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묘사한다. 

요한복음 1:9은 그분을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부른다. 그 빛은 세상을 비추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내가 태양이 뜬 것을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은, 빛을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빛에 의해 내가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영광의 무게, 홍성사, 2019).

요한복음 1:9의 의미를 살펴보라.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취지만 모두가 그 빛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수요일 교과에서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지 혹은 거부하는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바로 빛을 받는 것에서 시작된다. 메시아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왔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이다. 

바울도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거부하는 같은 비극적 주제를 로마서 9-11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마치지 않고 결국 많은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까지도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을 조롱하여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 11:24). 

요한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일은 그분의 이름을 믿으면 이루어진다(요 1:12, 13 참조). 

요한복음은 이렇게 서론과 결론을 연결한다. 사도는 글을 쓴 이유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서론과 결론은 통일성을 보여준다. 서론과 결론은 그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주제들을 포괄하는 일관된 주제이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킨다. 

 

<교훈>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지 혹은 거부하는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주어진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의해 시작된다. 

 

<부가설명> 성경은 세상이 어둠의 세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빛의 진리를 가르친다. 세상이 어둠 아니고 이미 빛의 세상이라면 굳이 빛을 전할 이유가 없다. 세상은 흑암이고 사망이다. 요1:4은 이 두 진리를 하나로 묶어서 간단하게 표현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생명은 빛이고 그 빛은 또한 생명이다. 빛 가운데 다니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존재로 생활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 생명이요 빛이라면 사망이요 흑암인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사망의 존재들이 생명의 빛으로 오게 해야 한다.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흑암에 있는 자들이 그분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도가 어렵다. 사람들이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빛에서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빛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 밤에 전기가 나가면 빛을 밝히느라 부산하지만 정작 생명의 빛이 없고 사망의 어둠에 있으면서 참 빛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오기만 하면 영생을 얻고 빛이되어 비출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가? 깊이 자기를 살피고 확인해보면 어떨까(고후13:5)?

 

10월 16일(수) 계속 나타나는 주제 – 신뢰/불신

 

요한복음 3:16-21, 9:35-41, 12:36-46을 읽어 보라. 이 본문은 서두에서 나타난 신뢰/불신의 주제를 어떻게 반복하고 있는가?

[요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9:35~41]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12:36~4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답: 3장은 니고데모와 이야기한 후에 하신 말씀이고 9장은 나면서 맹인된 사람 고쳐주신 후의 사건이고 12장은 헬라인들을 만난 후에 한 사건이다. 이 모두가 예수님을 믿으면 빛으로 와서 생명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둠에 다니다가 사망한다는 기별이다. 

 

요한복음에서 인류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믿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두 개의 큰 집단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11명의 제자들, 니고데모, 우물가의 여인,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첫 번째 집단에 속한다. 두 번째 집단에는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서도 한 사람 유다가 있다. 

요한복음에는 ‘믿음’을 뜻하는 명사 pistis(피스티스, 헬라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믿다’로 쓰인 동사 pisteuō(피스투오, 헬라어)는 신약 전체에서 사용된 241회 중 98회가 요한복음에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실제로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믿음이라는 주제가 명사가 아닌 동사로 반복하여 사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매우 능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념이 누적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것이라면 마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야고보서는 말한다(약 2:19). 

요한복음에서 두 집단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다. 믿는 사람 또는 믿게 된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이거나 꾸짖으실 때도 그분을 향해 열려 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며 피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들을 비추는 빛이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대체로 논쟁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께 온다. 그들은 빛 보다는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여기거나 그분이 오래된 전통을 깨고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분의 빛이 그들을 살피고 판단하도록 맡기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를 판단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국가의 영적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받아들였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믿음이 명사가 아닌 동사로 반복하여 사용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믿음을 능동적으로 행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이신데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전혀 합리성이 없다. 세상적 지혜로 합리성을 찾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투명 인간이다. 그들의 합리적 논리에 들어와야 보인다. 바울은 이런 지혜를 세상 관원의 지혜라고 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고전2:5,6). 그런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의 지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세상 논리에 합리적이도록 설명하고 해석하고 시대를 따라 그 시대에 맞게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에 빠진다. 사탄은 그런 논리로 태초부터 사람을 속였다. 성경 앞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이 모순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이런 논리에 빠져서 진리를 버렸다.  

 

10월 17일(목) 계속 나타나는 주제 – 영광

 

요한복음 17:1-5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답: 예수님이 사명을 완성하시는 것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어제 교과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 늘상 일어났던 충돌과 상호작용을 통해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요한복음에서 발견되는 신성하고 우주적인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우주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된 것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성육신을 통해 사람이 되신 그분의 영광에 대해 기록한다(요 1:14). 요한은 ‘영광’(doxsa, 밝음, 찬란함, 명예)과 ‘영화롭게 하다’

(doxsazō, 찬양하다, 존경하다, 영화롭게 하다)라는 용어 모두를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개념은 그분의 때, 즉 그분의 죽음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요 2:4, 7:30, 8:20, 12:23-27, 13:1, 16:32, 17:1 비교). 십자가가 바로 그분의 영광의 때이다.

십자가는 고대 로마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사형 집행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 개념은 실로 역설적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이 놀라운 부조화는 그 속에 인간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계획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인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는 나약하고 멸시받는 범죄자로서 고통스럽게 죽으셨다. 

십자가의 이러한 인간적이고 어두운 면은 특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마 27:46, 막 15:34).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영광을 잘 드러낸다(눅 23:32-47, 요 19:25-30). 십자가는 구원과 자비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께 드린 곳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영광이 예수님이 겪으신 가장 깊은 수치, 즉 세상 죄를 짊어지심으로 빛나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이고 신비한 일인가! 

 

<교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한 역설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대신에 사망을 당하시는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그분은 창조하신 모든 것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영원하게 하셨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그런데 루시퍼가 사탄이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결과를 망가뜨려 생명이 사망으로 타락하였다. 창조주께서는 이것을 다시 생명으로 복원하셔야 창조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는 길을 사망을 처리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다(히2:14). 이 세력은 사망으로 처리될 때 없어지게 된다. 그것을 없애는 법은 생명이 사망하여 사망을 없애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생명이신 분이 오셔서 사망이 되어 사망을 처리해야 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없이하시며’를 개정판에는 ‘멸하시고’라고 번역했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명확하지 않다. 헬라허는 ‘카타르게오’인데 두 번역이 다 맞다. 그러나 ‘없이하시고’라는 번역은 결과를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히 가르친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이렇게 사망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을 폐하고 썩지 않는 생명 곧 영생의 생명을 드러내어 창조의 목적이 성취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재창조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사65:17, 계21:1~5, 고후5:17).

 

10월 1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1장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읽어 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된 개체이시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는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 그는 하늘에 있는 지성적 존재들의 사령관이셨으며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행위가 아니었다(잠 8:22-27).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하나이심)시라는 진리 속에는 빛과 영광이 있다. 이 진리는 어두운 곳을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으로 빛나게 하는 어두운 곳에 비취는 빛이다. 이 진리는 그 자체가 무한한 오묘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들을 설명해 주지만 그 진리 자체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불가해한 빛 가운데 간직되어 있다”(화잇주석, 요 1:1-3). 

“예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로 죄인에게 나타나셔야 했다.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시고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사람이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으로 저희 생애를 개선하려고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들을 이끄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저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감화력이 저들의 심령에 작용하여 양심이 각성되고 외적 생애가 개선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희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자를 주목하게 하실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2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요한은 왜 예수님의 창조주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것은 모든 신학에 있어서 창조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창조에 대하여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답: 예수님이 창조주이식 때문에 구원 곧 새(재) 창조도 하실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은 왜 우리 신학에서 그렇게 중요한 주제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예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면 우리는 무엇을 상실하게 되는가? 

*답: 피조물인 사람은 다 아담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고전15:22). 그러므로 그들은 대속할 자격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시오 생명자체이신 분이 죽음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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