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십자가 이전의 부활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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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0-25 18:10 조회2,92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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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십자가(十字架) 이전(以前)의 부활(復活)
(10월29일 (안) / 일몰: 17시38분)
<서언(緖言)>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흔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使役)으로 “나인성 과부(寡婦)의 아들”(눅7:11~17)과 “야이로의 딸”(눅8:40~56)과 “나사로”(요11장)등의 사건만을 부활(復活)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십자가(十字架) 이전(以前)의 구약(舊約)에서도 “모세”(유다서1:9절)와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17:8~24)과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8~37)등의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한 우리의 아픔을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能力)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실(確實)한 보증(保證)을 볼 수 있으며, 오직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주(救主)로 믿을 때의 확실한 보증(保證)이 될 것이다.
(10월23일 (日) <모세의 부활(復活)>
(Q)~(유다서 1:9절, 눅 9:28~36)에서 모세의 부활(復活)의 증거(證據)들은 무엇입니까?
(A)~○. (유다서 1:9절)에서는 모세의 시체(屍體)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야기)으로써 모세의 영혼(靈魂)에 관한 내용이 아니고 모세의 몸이 부활(復活)했음의 확인이고 (눅 9:28~36절), 변화산(變化山)에서 나타난 예수님과의 대화(對話)는 확실한 부활(復活)의 이야기 이다. 즉 죽은 모세의 부활을 증거(證據)해 보자면 유다서에 모세의 시신(屍身)을 가지고 미가엘과 사탄이 다툰 점과, 변화산(變化山)에서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한 점으로 모세의 부활(復活)을 확인(確認)할 수가 있다.
(10월24일 (月) <구약(舊約)의 두 가지 사례(事例)>
(Q)~(왕상 17:8~24, 왕하 4:18~37)의 “사르밧 과부(寡婦)”와 “수넴 여인(女人)”이 경험(經驗)했던 사건(事件)속에서 유사점(類似點)과 차이점(差異點)은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A)~○. “사르밧 과부(寡婦)”(왕상 17:8~24)와 “수넴 여인(女人)”(왕하 4:18~37)은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要請)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구약의 두 사례의 유사점(類似點)과 차이점(差異點)은? “사르밧 과부(寡婦)”와 “수넴 여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因)해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특별한 경험(經驗)을 했다. 유사점(類似點)은 두 여인의 믿음의 결과(結果)인 점과 선지자(先知者)들을 도와주고 살려 달라 간청(懇請)한 결과(結果)요 차이점(差異點)은 사르밧 과부(寡婦)는 있었던 아들이고, 수넴여인이 낳을 수 없는 아들을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낳게 된 아들이라는 점의 차이가 있다.
두 여자의 아들들을 다시 살리신 것은 부활시킬 능력과 주장자(主張者)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들이다.
(10월25일 (火) <나인성 과부(寡婦)의 아들>
(Q)~(눅 7:11~17) 예수님께서 “나인 성(城)에 살던 과부(寡婦)”의 아들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해 어떤 희망(希望)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A)~○.사르밧 과부(왕상 17:8~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은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인 성의 과부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뢰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염치가 없다고 느낄 때라도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문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언제든지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10월26일 (水) <야이로의 딸>
(Q)~(막 5:21~43)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A)~○.죽음은 잠시 깊은 잠을 자는 것으로 묘사(描寫)한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부활이 있는 그날까지 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란 훌륭한 지도자 모세도, 불쌍한 사르밧 과부(寡婦)도 의지 할 것이 없는 나인성 과부도 가버나움의 회당장(會堂長) 야이로의 가정(家庭)에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避)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또한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있을 때에는 죽은 자들이 부활(復活)한다는 사실 앞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잠으로 묘사(描寫)하신 후에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다.
(10월27일 (木) <나사로>
(Q)~(요 11:1~44)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나사로의 병(病)과 죽음을 통해 영광(榮光)을 받으셨습니까?
(A)~○.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일로 예수님은 생명의 시여자(施輿者)이심을 드러내셨으며 영광(榮光)을 받으셨다. 또한 자신에게 죽음을 물리칠 능력(能力)이 있음을 증명(證明)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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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5과 십자가(十字架) 이전(以前)의 부활(復活)
(10월29일 (안) / 일몰: 17시38분)
<서언(緖言)>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흔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使役)으로 “나인성 과부(寡婦)의 아들”(눅7:11~17)과 “야이로의 딸”(눅8:40~56)과 “나사로”(요11장)등의 사건만을 부활(復活)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십자가(十字架) 이전(以前)의 구약(舊約)에서도 “모세”(유다서1:9절)와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17:8~24)과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8~37)등의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한 우리의 아픔을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能力)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실(確實)한 보증(保證)을 볼 수 있으며, 오직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주(救主)로 믿을 때의 확실한 보증(保證)이 될 것이다.
(10월23일 (日) <모세의 부활(復活)>
(Q)~(유다서 1:9절, 눅 9:28~36)에서 모세의 부활(復活)의 증거(證據)들은 무엇입니까?
(A)~○. (유다서 1:9절)에서는 모세의 시체(屍體)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야기)으로써 모세의 영혼(靈魂)에 관한 내용이 아니고 모세의 몸이 부활(復活)했음의 확인이고 (눅 9:28~36절), 변화산(變化山)에서 나타난 예수님과의 대화(對話)는 확실한 부활(復活)의 이야기이다. 즉 죽은 모세의 부활을 증거(證據)해 보자면 유다서에 모세의 시신(屍身)을 가지고 미가엘과 사탄이 다툰 점과, 변화산(變化山)에서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가 함께 한 점으로 모세가 몸으로의 부활(復活)을 확인(確認)할 수가 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 시에도(마26:37, 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눅 9:28~36, 만나주석)
○.천사들이 구름을 갈라 버리고 하늘에서 빛의 줄기가 들어오게 하는 것처럼 내게 보였다. 매우 뚜렷하게 제시된 주제는 모세의 경우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아, 모세가 산에 있던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 예술가의 기량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부르짖었다. 그의 체력은 튼튼하였다. 그 사실을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는 말로 성경은 알려 준다. 그의 눈은 나이 때문에 흐려지지 아니하였다. 그럴지라도, 그는 죽기 위하여 그 산에 올라가 있었다. 천사들이 그를 장사지냈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즉시 내려오셔서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켜 하늘로 데려가셨다. (1증언, 659)
○.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에 사단과 그의 천사들이 모세의 시체가 옮겨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나타났다.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가까이 가자 사단은 그리스도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대항하였으나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영광과 능력 때문에 뒤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사단이 모세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그가 범한 한 가지 죄(살인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게 그를 하늘 아버지께 위임하시면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9)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단에게 모세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 한 가지 잘못을 뉘우쳤으므로 그의 품성에 아무 흠도 남아 있지 않고, 따라서 그의 이름은 하늘 기록 책에 흐려지지 않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요구하던 모세의 시체를 부활시키셨다.”(살아, 173)
(10월24일 (月) <구약(舊約)의 두 가지 사례(事例)>
(Q)~(왕상 17:8~24, 왕하 4:18~37)의 “사르밧 과부(寡婦)”와 “수넴 여인(女人)”이 경험(經驗)했던 사건(事件)속에서 유사점(類似點)과 차이점(差異點)은 무엇이며 어떤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A)~○. “사르밧 과부(寡婦)”(왕상 17:8~24)와 “수넴 여인(女人)”(왕하 4:18~37)은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要請)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구약의 두 사례의 유사점(類似點)과 차이점(差異點)은? “사르밧 과부(寡婦)”와 “수넴 여인”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因)해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특별한 경험(經驗)을 했다. 유사점(類似點)은 두 여인의 믿음의 결과(結果)인 점과 선지자(先知者)들을 도와주고 살려 달라 간청(懇請)한 결과(結果)요 차이점(差異點)은 사르밧 과부(寡婦)는 있었던 아들이고, 수넴 여인은 낳을 수 없었던 아들을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낳게 한 아들이라는 점의 차이가 있다.
○.<살았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듯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상 17:17~24, 만나주석)
○.<혼(魂)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이 말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 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 어디까지나 ‘생명’, ‘목숨’을 의미할 따름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 뿐이다. (왕상 17:17~24, 만나주석)
○.아이의 부활과 이로써 그 어머니가 얻은 큰 만족. 아이는 다시 살아났다(22절). 기도의 위력과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권능을 유의하라. 그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과부에게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그 어머니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그 아기가 그녀의 소생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그러나 자기 아들의 죽음을 너무 악의로 해석하다 보니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선한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에게 그와 같이 갚지는 않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권능과 자비심을 다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고 극히 흡족히 여기게 되었다. 여인은 다시는 그런 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어서 그가 지시하는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일에 헌신할 터였다. 이와 같이 아이의 죽음은-나사로의 죽음처럼, 요한복음 11장 4절-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선지자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 (왕상 17:17~24, 매튜헨리)
(10월25일 (火) <나인성 과부(寡婦)의 아들>
(Q)~(눅 7:11~17) 예수님께서 “나인 성(城)에 살던 과부(寡婦)”의 아들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해 어떤 희망(希望)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A)~○.사르밧 과부(왕상 17:8~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은 각각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인 성의 과부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뢰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염치가 없다고 느낄 때라도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문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언제든지 돕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
○.아이의 생명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를 불러 아들을 취하라고 했다.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켰을 때 어머니에게 그를 넘겨주었고(왕상 17:23),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렸을 때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눅 7:15). 예수님의 마음은 자녀를 잃고 울고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동하며, 그분이 부활의 기쁜 날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자녀들의 생명을 소생시켜 천사들이 그들을 어머니의 손에 안겨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45).”(성경주석, 왕하 4:36)
(10월26일 (水) <야이로의 딸>
(Q)~(막 5:21~43)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A)~○.죽음은 잠시 깊은 잠을 자는 것으로 묘사(描寫)한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부활이 있는 그날까지 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란 훌륭한 지도자 모세도, 불쌍한 사르밧 과부(寡婦)도 의지 할 것이 없는 나인성 과부도 가버나움의 회당장(會堂長) 야이로의 가정(家庭)에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避)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또한 예수님의 재림(再臨)이 있을 때 에는 죽은 자들이 부활(復活)한다는 사실 앞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잠으로 묘사(描寫)하신 후에 야이로의 딸을 깨우셨다.
○. “죽은 야이로의 딸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잔다고 말씀하셨다(마 9:24; 막 5:39). 그분은 죽은 나사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셨다(요 11:11-14).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다고 기록했고,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그가 "자니라."(행 7:60)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고전 15:51, 52; 살전 4:13-17; 벧후 3:4).”(교리, 325)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다만 잠깐 동안만 앓았으며 죽었다가 곧 살아났으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녀가 다만 잔다고 하신 것처럼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선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칠 수 없으며 그의 이적에는 부정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소망, 534).
○. “야이로는 군중을 밀치고 구주 곁에 더 바싹 다가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급히 발을 옮겼다. 벌써 그 곳엔 곡하는 사람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이 와 있어서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공중에 사무쳤다. 무리가 모여 있는 것과 떠드는 소리는 예수의 마음을 거슬리게 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잠잠하게 하려고 하셨다. 그들은 이 외인의 말에 성이 났다. 그들은 아이가 죽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를 멸시하고 조롱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집에서 떠나도록 요구하신 후에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를 데리시고 시체가 있는 방으로 함께 들어가셨다.”(소망, 343)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부드럽게 “달리다굼”(소녀야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자 소녀의 생명의 맥박은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10월27일 (木) <나사로>
(Q)~(요 11:1~44)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나사로의 병(病)과 죽음을 통해 영광(榮光)을 받으셨습니까?
(A)~○.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일로 예수님은 생명의 시여자(施輿者)이심을 드러내셨으며 영광(榮光)을 받으셨다. 또한 자신에게 죽음을 물리칠 능력(能力)이 있음을 증명(證明)해 보이셨다.
○.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나사로는 바위 동굴 속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그 출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시체를 단지 한 번 보시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장사한 지가 나흘이나 지나 시체가 벌써 썩기 시작했다는 말로써 거절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시기 전에 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원수들로 하여금 기만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지난번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기이하게 나타난 데 대하여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다. (소망, 534)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는 신실한 증인이시오 죽은 자들 중에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관련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맨 첫 번째 부활한 분은 아니나 다시는 사망이 그를 붙잡아 둘 수 없는 부활을 하신 분으로 첫째이시다. 그는 그 속에 생명이 있었다. 사망이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창 2:24).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앎이라”(롬 6:9). 그는 그 안에 잠자는 자들을 최후에 일으킬 부활의 생명으로 일어나셨다(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예수 안에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의 부활은 다른 사람을 뒤따라 부활시킬 부활의 선임자이시다. K.J.V.에서 행 26:23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높은 자 중에서 일어나야 할 자들 중에 첫째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처음에 보면 아무도 그리스도보다 먼저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벌써 여러 사람이 그 보다 먼저 부활했다.
○.수넴 사람의 아들(왕하 4:36), 과부의 아들(왕상 17:23),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눅 7:11-15), 야이로의 딸(눅 8:51-55), 그리고 나사로(요 11:44). 오점은 다른 이들이 죽은 자 중에서 부활했으나 그리스도는 부활해서 다시 죽지 않은 자중에서 첫째이다(롬 6:9). 그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다(Robertson 저, 신약의 말씀 묘사 3권, p. 451).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무덤에 빛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Waymouth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죽음 중에서 나오심으로 믿으니 소식을 선포해야 할 첫째 사람이 되어야 한다(행 26:23).”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의 창시자이심을 선언하셨으며, 몸소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는 사망의 열쇠를 잡으시고 무덤의 정복자로 사셔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그의 권리와 능력을 주장하실 분이었다.(시대의 소망 5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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