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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잘못된 결정들에 대처함(질문, 대답, 설명) 1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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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12-13 16:18 조회6,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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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잘못된 결정들에 대처함

 

12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7분

 

● 연구 범위 : 느 13:23~25, 신 7:3~4, 고후 6:14, 스 9~10장, 고전 7:10~17

 

● 기억절 :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민족과 통혼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 되어버린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두 지도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그 처참한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비신자 또는 우상숭배자 배우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칠 부정적인 감화력을 의식하였다. 가나안의 종교들이 이스라엘 내에 퍼졌고 급기야 높은 언덕마다 바알과 아세라가 숭배를 받았다. 무엇보다 이방인 배우자가 이스라엘 가족에게 해로운 감화를 끼쳤다.

발람은 모압 족속에게 그들의 여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여인들에게 속아넘어가 하나님에게서 떠날 것이라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배우자는 상대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통혼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것을 내버려 두었는가? 아니면 그것에 맞섰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두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이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신다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 이해한다.

느끼기 : 세속적인 사상과 우상숭배의 영향으로 흐려진 우리의 정체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우려에 공감한다.

행하기 : 우리의 가정을 신앙적으로 정화시키고 자녀들이 성경의 사상에 익숙해지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➋ 왜 하나님은 신자가 불신자 또는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실까요?

※ 하나님을 떠나게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사람 다 망하게 하는 것이다. 

➌ 느헤미야 시대에 통혼의 문제 때문에 가정에 어떤 현상들이 나타났습니까?(느 13:23~25)

※ 유다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있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녀들이 있었다.

➍ 어떤 이유 때문에 이방인 아내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까지 내보내야 했을까요?  ※ 그들은 다른 신앙인들을 부패하게 하는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➎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신자들에게 왜 우리는 그때와 다른 원칙을 적용해야 할까요?

※ 시대도 다르고 교회는 민족과 방언과 백성들을 다 포함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➏ 자녀들이 성경의 언어와 사상에 익숙해지려면 부모로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 부모가 먼저 성경의 언어와 사상에 익숙해지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한다.

 

결론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불신자 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그런 가정과 자녀들은 세상 또는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정체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지도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12월 15일(일) 느헤미야의 반응

 

“그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느 13:23~24).

 

1. 느 13:23~25을 읽어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느13:23~25]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24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25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답: 유다방언을 못한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게 되는 단초가 된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의분을 일으켰다. 

 

자녀들은 아람어(포로기에 사용했던 언어) 또는 히브리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러다가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지식이 왜곡되거나 사멸될 수 있었다. 학자들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토라를 아람어로 해석해주었다. 그러나 암몬, 아스돗, 모압 출신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양육하다보니 자녀들이 아버지의 언어를 말하지 못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언어는 곧 관념과 사고방식을 가르친다. 즉 그들은 성경의 언어를 상실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렀다. 느헤미야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가정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고 결과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주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성경학자들은 공공장소에서 백성들에게 수모를 주었던 느헤미야의 조치가 그 당시 규정된 형벌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느헤미야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했다고 했지만 그가 상스러운 언어와 욕설을 사용했다기보다는 언약에 동반된 저주를 선포했을 것이다. 신명기 28장에는 언약을 어긴 자들에게 일어날 저주들이 요약되어 있다. 느헤미야는 성경의 언어를 사용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과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를 깨닫게 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단지 격분하며 반응하기보다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느 13:25)았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매질이 규정된 공개 형벌의 형태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조치는 그들 중 일부에게만 적용되었다. 즉 잘못된 행동을 야기하거나 조장했던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 이런 조치는 공적인 수치의 방법으로 작용해야 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그들의 선택과 그것으로부터 일어날 결과들의 무게를 이해하기를 바랐다.

 

<부가설명> 아담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다. 죄가 들어온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었는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도구가 되었다. 이로부터 가정에서 아내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역사가 나타내준다. 다윗도 여자로 인해 엄청난 죄를 저질렀고 솔로몬도 여자로 인해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성경에는 부부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신앙적 영향을 미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아내가 남편에게 끼친 신앙을 떠나게 한 영향에 대하여 여러 번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인간의 이런 경향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방인과 결혼을 금하신 것이다. 느헤미야가 솔로몬의 예를 들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결과에 대하여 경고했다. 하나님은 죄의 세상에서 누리는 달콤한 감성적 애정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간절히 원하신다. 이런 생명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결국 사망으로 끝날 그런 감성적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경계하신 것이다. 참으로 신앙인이라면 아내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의 감성적 욕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느헤미야 때의 가정 상태가 비일비재한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비신자나 신앙노선이 다른 배우자를 얻어서 같은 신앙노선으로 이끌어 들이면 되지 않는가하는 안일하고 자기를 속이는 생각을 진정으로 버리고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가정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자.

 

교훈 : 통혼이 가져온 부정적인 감화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영적인 정체성은 위기를 맞이했다. 공개적인 처벌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의미였다.

 

 

12월 16일(월) 느헤미야의 책망

 

“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느 13:27).

 

1. 느 13:26~27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우리가 옳은 길에서 벗어나는 선택의 위험성을 알려면 성경의 역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느13:26,27]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27 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답: 솔로몬의 예를 들어 책망했는데 성경 역사의 바른 이해는 바른 길을 떠난 사실에 대하여 시정하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더 깊은 죄에 빠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스라엘 왕들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신 17:17)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솔로몬은 파멸을 자초했다. 솔로몬의 삶은 부정적인 모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단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을 뿐 아니라 느헤미야의 지적대로 하나님의 예배자가 아닌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

 

2. 어떤 점에서 이교도들과 통혼한 이스라엘 민족들을 책망한 느헤미야가 옳았는가?(창 6:1~4, 24:3~4, 28:1~2, 신 7:3~4, 고후 6:14 참고)

[창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24:3,4]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신7:3,4]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답: 느헤미야는 성경에 계시된 원칙대로 집행했을 뿐이다. 이방인과 결혼한 결과가 주로 배도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통혼하지 말라는 명령은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었다. 성경의 일부 인물들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민족과 결혼했다. 모세는 미디안 여인 십보라와 결혼했고,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했다. 이 명령이 암시하는 통혼의 문제는 신앙이 없거나 신앙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살았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리처드 데이비드슨(Richard M. Davidson)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에덴에서 제정된 결혼 계획은 여러 중요한 가치와 더불어 영적인 믿음을 통해서 두 배우자가 상호 보완적인 온전함을 이루라고 요구했다.”—Flame of Yahweh (Peabody, Mass.: Hendrickson Publishers, 2007), p. 316. 이 일화 속에서 이방 아내들은 우상숭배 신앙을 단념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느헤미야는 격분하기보다 애통해 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헌신의 부족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근거를 두게 하고, 우리의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행동이 제안된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와 결혼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대한 서로의 헌신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했다.

 

<부가설명> 대체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고를 그대로 따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지혜를 버리는 자리에 들어선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8:9)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 전에 천부적인 지혜가 있었다.(왕상2:9) 그는 하나님이 금한 애굽 여인을 왕비로 맞았다. 또 많은 이방여인들을 비빈으로 맞았다. 그는 국제적인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와 무역하고 정치적으로 동맹을 맺기 위하여 그 나라 여자들과 통혼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지혜로 정치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하게 되었다. 나라는 분열하게 되고 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다 솔로몬이 끼친 악영향을 망할 때까지 지속했다. 솔로몬이 비록 회개하고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역사적으로 나쁜 예를 남긴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방 결혼한 사람들을 책망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솔로몬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을 때 지혜도 버린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느헤미야의 조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솔로몬의 사상을 따를 것인가? 솔로몬은 자기가 지혜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미련한 자가 된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사상에 굳게 서야 한다.

 

교훈 : 성경은 신앙이 다른 상대와의 결혼을 반대한다. 결혼은 다른 중요한 가치관뿐 아니라 영적인 가치관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는 관계로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12월 17일(화) 에스라의 반응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레 10:10).

 

1. 에스라 9장을 읽어보라.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 소식을 듣고 에스라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스 9:1~2에 따르면 백성들은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떠나다’라는 말은 다음의 성경절들에도 사용되었다. 레 10:10, 11:47, 출 26:33, 창 1:4, 6~7, 14, 18. 이 단어는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스9:1,2]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레10: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레11: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출26: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창1:4,6,7,14,18]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답: ‘떠나다’라는 말은 ‘바달’인데, 위에 열거한 성구에서 ‘나누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인 이미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과 분리 되지 않고 섞였다고 반응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방인과 확연히 구별되기를 바라신다. 사상과 삶의 모습이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그들의 통혼 문제를 가지고 에스라에게 나아갔다. 그들이 가증한 행위와 관련된 민족들을 열거할 때 사용했던 용어들은 토라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 목록이 성경 기사들로부터 직접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 소식을 에스라에게 가져왔다. 제사장과 레위인들 같은 영적인 지도자들조차 이 죄악에 책임이 있었다.

“에스라는 바벨론의 포로를 인도하는 사업에 대해 연구하던 중에 이스라엘의 배도는 주로 그들이 이방 열국과 섞임으로 인하여 대규모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인근 열국과 분리되어 있었더라면 여러 슬픔과 굴욕의 경험들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과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배도에 대한 한 방벽으로 주어진 율법들을 감히 범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음은 분기되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고국으로 다시 발을 붙이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였고 그들의 배은망덕에 의분과 슬픔으로 억눌렸다”(선지자와 왕, 620).

‘떠나다’ 또는 ‘분리되다’라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독립체에 대하여 사용된다. 사실 그것은 완전한 대조를 암시한다. 이러한 진술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거짓 종교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무도 그들의 결혼생활뿐 아니라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상대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깨달았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하늘 백성들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따의 사람들이다.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엡4:18)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체의 생명만 가진 사람들(레17:11)이다. 이 두 생명의 다른 것은 물고기의 삶의 환경과 지상동물들의 삶의 환경이 다른 것처럼 달아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같은 환경에 처하여 생존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타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는 묵인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사상까지 타협하면 안 된다. 최대한으로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가장 위험한 것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다. 신앙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이 사실을 잘 계시하고 있다. 전에 있었던 이런 일을 기로한 것은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고전10:6)다. 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우리는 성경의 기록과 권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성도의 삶은 선박과 바다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자. 배는 물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배 안에 물이 새어들어오면 배는 침몰하게 된다. 이것은 세상과 성도의 관계이다.

 

교훈 : 하나님의 백성은 결혼 문제를 포함하여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방 민족의 신앙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12월 18일(수) 에스라의 조치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스 10:11).

 

에스라 10장을 읽어보라. 에스라와 지도자들은 통혼의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씨름했는가?

 

답: 여기는 많은 이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말씀대로 하기로 결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증거 했다.

 

온 회중이 그들의 이방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결의했다. 놀랍게도 네 명을 제외하고(스 10:15) 이방인 아내와 결혼했던 이들이 그 계획에 모두 동의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아내를 보내기로 약속한 뒤에 그 계획이 실행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마침내 111명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내보냈다(스 10:18~43). 흥미롭게도 어떤 이들은 이러한 통혼으로 말미암아 이미 자녀를 두었다(스 10:44). 그 자녀들을 어머니들과 함께 가족으로부터 내보내는 것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성적이거나 정당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가 하나님이 유다 국가를 다시 출범시키려고 하셨던 비범한(비상시대)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치들이 필요했다.

스 10:11, 19에서 사용된 ‘끊다(바달)’와 ‘내보내다(야차)’와 같은 특정 용어들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혼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에스라는 통상적으로 이혼을 의미하는 용어를 알았지만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즉 이는 그들이 토라의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 에스라가 그 결혼을 합법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 결혼은 율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무효가 되었다. 그 과정은 효력이 없는 결혼의 파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조치로 말미암아 그 아내들과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전남편은 전부인과 자녀들의 이주를 도왔고, 아내들은 대부분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어떤 유대인들은 다시 비신자들과 결혼하기 시작했고, 아마도 어떤 이들은 내보낸 아내에게로 돌아간 것 같다. 그 해결책의 일시적인 특성은 하나님께 헌신했다가 멀어지는 인간의 속성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우리 중 어떤 이들도 스스로 강한 신자라고 여기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부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덜 헌신하는 시기를 지낼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불행히도 인류는 하나님을 첫째로 모시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부가설명> 진리가 시행되기 시작한 무렵에는 진리의 길이 세상길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엄격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 진리도 하나의 세상 윤리와 도덕으로 여기게 될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복음 진리를 세상의 도덕윤리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과 사망의 문제이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교단들이 성경의 복음진리를 세상의 도덕윤리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인식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를 낳은 것이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복음은 죽는 것과 사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의 중간 상태는 없다. 병이 들어 굴신하지 못하는 것을 중간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호흡하는 것과 호흡이 끊어진 사실의 중간상태가 없다. 복음진리는 호흡하는 삶을 가르친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다 호흡이 없는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세상 공기는 호흡하지만 하늘 공기는 호흡하지 못한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늘의 생명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이다. 이 공기를 차단하는 것은 단호히 처리해야 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조치는 이것을 수행한 것이다.

 

교훈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 사이에 낳은 자녀를 내보내는 과감한 계획에 동의했다.

 

 

12월 19일(목) 오늘날의 결혼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전 7:13).

 

통혼의 문제와 관련하여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결혼을 진지하게 취급하신다. 따라서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며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고, 결정 과정에 하나님을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신실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래야 수많은 슬픔과 불행을 막을 수 있다. 

 

1.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고전 7:10~17을 자세히 살펴보라. 오늘날 믿지 않는 자와 하는 혼인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고전7:10~17]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답: 믿기 전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믿음으로 문제가 발생할 때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믿음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질 수 있다. 그러나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그냥 살면서 그리스도의 감화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마침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종파를 초월한 결혼에 대해서는 자세한 명령이 없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와 그 원칙에 역행하여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이혼은 정당한 것이며, 에스라의 기사에 기초할 때 심지어 권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결단은 일시적인 조치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스 10:11). 왜냐하면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미래와 예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예배자라는 정체성을 잃고 있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일부 유대인들이 애굽에 내려가 정착할 때, 지도자들이 통혼을 허용하자 곧 여호와와 여신 아낫을 위한 혼합 신앙이 발전했다. 급기야 메시아를 위한 혈통이 위험해졌다. 그러므로 신자가 비신자와 결혼했을 때 취했던 이 같은 일회적인 조치를 결혼 관계의 파기를 위한 처방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기사는 믿는 자들끼리의 결혼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높은 가치를 드러낸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독려하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할 때 기뻐한다. 그는 배우자들이 같은 믿음을 가질 때에 그들의 사명감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비록 성경이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분명하게 반대하지만(고후 6:14), 다른 선택을 한 자들에 대한 은혜를 이야기하는 말씀도 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과 사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들의 배우자에게 충실하라고 용기를 주신다. 우리가 비록 그분의 뜻에 어긋난 결정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께 도움을 구하면 그분은 도움을 주신다. 이는 우리 마음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바라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께 도움을 구하러 나아갈 때 그분은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아무에게도 소망이 없을 것이다.

 

<부가설명> 가정문제는 신앙과 관련하여 쉽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가정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신앙하는 미혼자들이 비신앙인들과 결혼을 위하여 교제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감성이 움직이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도 신앙문제는 결혼과 관련하여서는 최우선위치에 있어야 한다. 가정교육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중대한 사실이 결혼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제정하신 결혼을 제정하신 분의 의도대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복된 것이 아니겠는가? 또 부부가 되는 것은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섬기는 훈련과 사랑을 실천하는 훈련을 위한 장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은 예수님을 나타내고 아내는 충성스러운 교회를 나타내어야 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2~25) 이것이 그리스도인 부부가 나타내어야 하는 삶이다. 이 원칙을 최대한으로 이해하고 기도로 실천하려고 해 보자.

 

교훈 :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조치는 일회적이었다. 비록 하나님은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지하시지만 이미 그러한 선택을 한 자들의 가정도 소중히 여기신다.

 

 

12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지자와 왕>, 669~678 ‘개혁’을 읽어보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의무를 근면하게 행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일면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써 일할 형편을 잘 파악해야 한다. 지연과 태만은 실패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반면에 적절한 때에 신속하고도 결단력 있게 취한 행동은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지도자들이 진리를 위해 열심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무관심하고 목적 없이 행동한다면 교회는 부주의하고 태만하고 쾌락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려는 거룩한 목적으로 충만하다면 백성들은 연합할 것이며 희망을 가지고 열심을 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리하고 현저한 비교를 나타내는 것들이 많다. 죄와 거룩함은 나란히 놓여 있어서 그 둘을 바로 봄으로써 우리는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증오와 거짓과 반역을 묘사한 페이지에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고결함과 헌신과 자아 희생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택하는 대로 어느 편이든지 모방할 자유가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무서운 결과가 순종에서 오는 복과 마주 서 있다. 우리는 스스로 전자를 경험하든지 후자를 향유하든지를 결정해야 한다”(선지자와 왕, 67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에스라는 백성들을 그들의 뜻대로 버려두지 않고 변화를 일으키려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책망하고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행동을 변화시켰다고 해서 마음까지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이 자랐습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그들의 실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 에스라 때에 사람들은 느헤미야 때의 사람들이다. 에스라 때에 한 맹세와 조처는 느헤미야 때에 다신 같은 허물에 빠졌다. 우리는 진정으로 생명상태가 확 달라져야 한다. 사망으로 치닫는 생명이 영생의 생명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생명력이 우리를 참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➋ 교회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결혼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할까요?

※ 쉽지 않지만 기도와 사랑으로 함께 신앙하는 식구들이 되도록 하는 도움을 줘야 할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깨우쳐주는 성경공부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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