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물러난 백성들(질문, 대답, 설명) 12/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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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12-06 17:10 조회6,192회 댓글0건본문
제11과 물러난 백성들
12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4분
● 연구 범위 : 느 13:1~9, 신 23:3~6, 느 13:10~14, 민 18:21~24, 느 13:15~22, 요 5:5~16.
● 기억절 :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 13:22).
느 12장과 13장 사이에 느헤미야는 바벨론으로 돌아간다.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알지 못하지만(기원전 약 430~425년 사이), 그때 백성들은 퇴보하고 있었다. 첫째로 우상숭배자들과 통혼하지 않겠고, 둘째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겠으며, 셋째로 성전을 돌보고 십일조와 헌물로 그 일꾼들을 부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어겼다.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대한 유다 백성의 헌신이 느슨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백성들은 십일조와 헌물 드리기를 중단했고, 성전 낭실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심지어 주변 민족과 통혼하는 풍습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 민족 사이의 관계가 퇴보하는 데 일조하는 자들이 바로 느헤미야가 남겨 둔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심각했다. 모든 것이 뒤바뀐 것을 알고서 느헤미야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성품이 요구하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동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영적인 조직의 약화가 지도자들과 백성 사이에 존재해야 할 신뢰와 동기의 약화에서 비롯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 우리의 영적인 퇴보를 슬퍼하며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행하기 : 십일조 생활과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되새기고 잘못들을 시정한다.
➋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예루살렘에는 어떻게 영적인 퇴보가 진행되었습니까?(느 13장)
※ 대제사장부터 하나님 사업의 대적들과 연합했다.
➌ 그대는 이런 현상의 원인 또는 발단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바른 지도자가 없고 성경진리를 따른 바른 신앙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➍ 교단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십일조가 감소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➎ 느헤미야가 제시하는 안식일 준수 방법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무엇이 바뀌게 될까요?
※ 안식일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지키게 될 것이다.
결론 :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모본은 백성들의 헌신과 신앙적인 동기를 느슨해지게 만들었습니다. 십일조가 감소하자 성전 봉사자들은 이탈했고 안식일 정신도 흐려졌습니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교훈 삼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잘못된 점들을 회개하며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월 8일(일) 부패한 성전 지도자들
느 13장은 암몬과 모압 민족 그리고 그들 중에 있는 우상숭배자에 대한 문제로 시작한다(느 13:1~3). 이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다른 민족 출신의 개심자를 쫓아내기보다 다른 신앙에 속한 자들 곧 우상숭배자들을 내보내야 했다(신 23:3~6 참고).
1. 느 13:1~9을 읽어보라. 엘리아십과 도비야는 누구였는가? 왜 그들의 행위는 수용될 수 없었는가? 느 2:10, 19, 3:1, 12:10, 22, 13:28을 읽어보라.
[느13:1~9]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느2:10,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느3: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느12:10,22]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았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았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았고,/ 22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느13: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답: 엘리아십은 귀환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고, 도비야는 유대인들의 일을 방해하던 산발랏의 부하였다.
엘리아십과 도비야는 느헤미야서에서 이미 알려진 인물이다. 엘리아십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책임자였다. 도비야는 암몬족으로서 느헤미야의 사역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그의 원수였다. 엘리아십과 도비야의 동맹은 정략결혼을 통해 수립된 관계를 암시한다.
비록 결혼 관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도비야’(‘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뜻)가 유대식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유대인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내의 가족은 아라의 후손들인데, 확인되지는 않지만 엘리아십의 가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느헤미야의 또 다른 원수인 호론족 산발랏은 그의 딸을 엘리아십의 손자와 결혼시켰다. 따라서 그 땅의 고위층이 느헤미야의 지도력에 반대하는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느헤미야를 둘러싼 음모의 세력이 심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독의 부재 기간에 대제사장은 도비야에게 십일조, 예물, 헌물 등을 보관하는 성전의 방 하나를 내주었다. 도비야가 성전에 상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는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려는 편법이었다. 느헤미야의 원수들은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얻었다. 느헤미야를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느헤미야는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부가설명>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루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엘리아십은 주위의 유력한 이방인들과 연합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업을 크게 이루려고 하였다. 그는 산발랏의 딸을 손부(孫婦)로 맞이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가 있는 동안 저질러진 일이다. 대제사장이 더욱 성경말씀을 잘 지켜야 하는데 종교지도자는 타협으로 나가고 정치지도자인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수호했다. 엘리아십의 이런 그릇된 지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괜찮게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여 성경이 계시한 순수한 신앙생활에서 가정부터 떠나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돌아와서 이것을 단호히 시정했다. 성경에 엘리아십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가 신앙적 양심이 있었다면 심히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며 지도자의 본분을 회복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 일을 잘한 것으로 여겼다면 느헤미야를 원망했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앙지도자들은 먼저 자신이 철저한 신앙으로 정신과 생활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런 느헤미야의 정신과 생활이 그리운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 근심이 인다.
교훈 :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유다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부패하였다. 원수와 통혼하고 동맹을 맺을 뿐 아니라 심지어 원수에게 성전의 일부를 내주었다.
12월 9일(월) 밭으로 간 레위인들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느 13:13).
1. 느 13:10~14을 읽어보라. 느헤미야의 해결책은 무엇이었는가?
[느13:10~14]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11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로 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이는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답: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꾸짓고 원칙을 따라 직무를 새로 임명하고 다시 율법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노래하는 자들과 성전지기들, 그밖의 성전 봉사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그들의 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나님의 사업이 재정적으로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어렵게 수립된 십일조와 헌금 제도가 붕괴되었다.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방 안에 모든 것을 내던진 행위는 그의 필사적인 의지를 보여줬다.
“성전이 더럽혀졌을 뿐 아니라 그 헌물들이 악용되었다. 이 일은 백성들의 너그러움을 방해하였다. 그들은 열성과 정열을 잃었고 십일조 바치기를 싫어하였다. 여호와의 집 창고에 빈약하게 드려져서 여러 명의 노래하는 자들과 성소 봉사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한 공급을 받지 못하여 다른 일자리를 찾아 하나님의 사업에서 떠나갔다”(선지자와 왕, 670).
흥미롭게도 유대 백성들은 모여서 훼손되었던 것들을 다시 세웠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편에 서서 도비야와 엘리아십을 반대했다. 느헤미야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다. 느헤미야는 성전 감독 책임을 신실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의 임무는 십일조와 예물들을 걷고, 성물을 바르게 보관하며, 적절한 영역에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즉 느헤미야가 개입하여 일거에 타락한 지도층을 뿌리 뽑았다.
느헤미야가 성전 조직을 다른 신실한 자들에게 맡겼을지라도 타락한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지위를 상실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론의 후손에게만 계승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대제사장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조치로 말미암아 엘리아십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대제사장이었다.
<부가설명> 지도자가 잘못하면 그 직무를 내려놓아야 한다.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의 자리를 그냥 유지했는데 그것은 율법에 아론의 자손이 맡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그런 규정이 없다. 대제사장은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한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교인들은 그 지체들이며 이제는 은사를 따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선출되는데 선출된 지도자들은 철저한 신앙사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신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사상과 생활에서 반드시 그래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의 직무가 예수님이 맡긴 사명이라는 사상이 투철해야 한다. 취직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들이다. 목회자뿐만 아니다. 평신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 맡긴 직분과 직무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것은 사명이다. 감투가 아니며 지위도 아니다. 장로 집사는 계급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수행해야 할 하나님이 맡기신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주님 마음에 드는 인격이 되어서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신을 살펴 이런 정신과 각오와 삶이 없으면 그 직분과 직무를 속히 내려놓을 것이다. 충성하는 사람들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온 즉시 성전에서 잘못된 일들을 시정하고 떠나간 레위인들을 복귀시켰으며 충실한 자들을 성전의 지도자로 세웠다.
12월 10일(화) 십일조와 예물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느헤미야가 단행한 성전 봉사의 개혁에는 십일조와 예물 제도의 시행도 포함되었다.
1. 민 18:21~24, 말 3:10, 마 23:23, 고전 9:7~14, 고후 9:6~8, 히 7:1~2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에 따르면 십일조와 헌물은 당시의 성전 봉사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얼마나 중요한가?
[민18:21~24]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23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고전9:7~14]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후9:6~8]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7:1,2]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답: 성전봉사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직무이다. 봉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생활을 책임지셨는데 그것이 십일조와 헌물이다. 그 봉사는 예수님을 표상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믿음의 백성들이 예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의 본이다. 교회가 주님의 일을 수행하기 때문에 봉사 사명을 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십일조와 예물을 걷지 않고서는 성전이 기능할 수 없었다. 십일조가 중단되자, 성전 봉사가 무너졌고, 모든 예배 제도도 위기에 빠졌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섰으므로 성전 봉사자들은 성전을 돌보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약화되었다.
“십일조 제도는 그 단순성에 있어서 아름답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일정한 비율을 요구하는 데서 그 평등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분의 소유를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비율에 따라 우리는 그분께 십일조를 돌려드려야 한다.
십일조를 요구하실 때(말 3:10),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나 너그러움을 호소하지 않으신다. 비록 감사가 하나님께 대한 표현의 일부가 되어야 하겠으나,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은 그것을 자신에게 되돌리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 . . (2nd ed.) (Boise, Idaho: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2005), p. 304.
이스라엘 성전에서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신자들의 십일조와 헌금 없이는 붕괴될 것이다. 우리 교회도 수준 높은 사역과 계획, 교회의 운영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유급 사역자들 없이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질적으로 수준이 낮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십일조와 헌금 없이는 전도가 자취를 감출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 제도를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간혹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수립하실 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만물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주기를 기대하신다. 그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우고 안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손에 맡겨야 한다.
<부가설명> 엘리아십과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자 백성들은 십일조와 헌물 드리기에 충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조직과 지도자들이 이런 헌금을 성경의 원칙을 따라 바르게 집행해야 한다. 편법을 만들어서 합리화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이 신자들에게 알려지면 느헤미야 당시 유대인들처럼 십일조와 헌금이 줄어들게 되는 것은 빤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교회와 지도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믿음으로 드려진 십일조와 헌금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법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집행하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괜찮지만 십일조와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지도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집행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들이 올바르게 집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 아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고 지도자들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면 주께서 자기 일을 하실 것이다.
교훈 : 십일조와 헌금 제도는 성전 봉사를 유지하고 그 봉사자들을 부양할 뿐 아니라 오늘날 복음을 위해 구별된 사역자들을 위한 제도이다.
12월 11일(수) 안식일에 포도주 틀을 밟음
“그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느 13:15).
1. 느 13:15~16을 읽어보라. 여기서 느헤미야가 언급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느13:15,16]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게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 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16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답: 안식일을 계시해 주신 방법대로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소수파일 때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그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이 계명을 준수하게 하려고 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생각했다.
안식일은 창조 주간의 절정으로서 제정되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직업이나 다른 세속적인 목적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날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새롭게 되었고 재창조의 기회를 얻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킨 것 그 이상으로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라는 말이 있다. 요컨대 제7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키는 것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유익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 안에 믿음이 살아 있게 도와주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2. 느 13:17~22을 읽어보라. 안식일에 사고파는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느13:17~22]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18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 20 장사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21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답: 파수꾼을 세워 성문을 닫고 지키게 하였다.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법률 집행자로 여겼다. 유다의 법률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의 수호자가 되었다. 만약 유다의 민장들이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유입된 타락에 맞섰더라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관원들과 민장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를 돌려주라고 했던 일로 인해서 이미 느헤미야에게 분개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아십과 도비야가 일으킨 변화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는 먼저 귀족들을 꾸짖고, 성문을 닫으라 명령한 다음 성문마다 종들을 세워서 지키게 했다. 시장이 도성 안에서 성밖으로 옮겨지자, 그는 더 엄격한 조치를 취하고 다음 안식일에는 상인들을 잡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느헤미야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요지를 파악하고 그 이후로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부가설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첫째 제7일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날 하나님께 경건하고 엄숙하고 기쁘고 즐겁게 예배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일 외에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이익을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킬 수 있도록 안식일에 성문에 파수꾼을 세웠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 백성들이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는 일이다. 이런 일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에 파수 섰다고 안식일 범했다고 하면 안 된다. 제사장은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고된 봉사를 한다. 그것이 제사장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일상생활에 자기를 위하여 행하는 일들을 접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일들을 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하신 것이다.(마12:1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정말 느헤미야 시대에 안식일 지키는 것을 개혁한 사실을 잘 살피고 이 역사의 종말에 우리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데 올바르게 잘 지키고 십일조와 헌금도 잘 드리고 충성하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성령께서 은혜의 능력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훈 : 세상에는 온전한 안식일 준수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온전한 안식일 준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2월 12일(목) 너희 조상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느 13:18).
안식일에 대한 느헤미야의 열성은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안식일을 바르게 준수하려는 열망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느헤미야는 이방 상인들에게 손을 대겠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만약 그다음 안식일에 성 안에서나 성문에서 체포됐다는 것은 그가 직접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총독으로서 이 계명이 제대로 준수되게 할 공적인 책임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그들이 의무를 태만히 한 것에 대해 두려움 없이 견책하였다. 그는 신랄하게 문책하였다.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느헤미야는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까지는 다시 열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유사들이 임명한 자들보다 자신의 종들을 더욱 신임하여 그는 그들을 성문들 곁에 배치하고 그의 명령이 실행되는가를 보게 하였다”(선지자와 왕, 671~672).
안식일을 범하는 죄에 대한 다른 경고와 더불어 그 신성성을 모독하는 죄에 대한 느헤미야의 경고는 예수님의 시대까지 세대를 걸쳐 분명하게 메아리쳤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복음서에서 올바른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마 12:1~8, 막 3:1~6, 눅 6:6~11, 요 5:5~16을 읽어보라. 여기에서의 쟁점은 무엇인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이 논쟁의 발생 원인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마12:1~8]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막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눅6: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요5:5~16]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답: 이 사건들은 안식일 날짜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 문제를 두고 예수께 시비한 것이다. 유대 역사에서 안식일 지키는 방법의 문제로 많은 사건이 있었다. 맨 먼저는 만나를 내리실 때부터 느헤미야가 안식일 지키도록 조처한 것까지 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알면 바리새인들이 방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을 외면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오도된 열심을 가지고 안식일의 신성성이 훼손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 “안식일의 주인”(눅 6:5)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발할 정도로 광신적이었다. 너무 지나쳤다는 말인가? 율법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음에도 그들은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을 저버렸다.
<부가설명> 오늘날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는 교단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짜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신 말이 없다. 그는 제7일안식일을 구별하여 자기 규례를 삼고 회당 예배에 참여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과 치유를 베푸는 날인 것을 행동으로 가르치시고 증명하셨다. 그러나 제7일에서 다른 날로 날짜 자체를 변경하라고 하신 일도 없고 친히 제7일 안식일 그날을 기억하여 지키셨다. 안식일 날짜와 그 날을 지키는 방법을 혼동해서 예수님이 안식일 자체를 폐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성전재건, 성벽재건, 성전정결, 안식일 지키는 것 회복 등등 많은 사건을 역사적으로 남기고 우리들에게 신앙의 바른 길을 가도록 모본을 남겼다. 우리는 이런 계시의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아서 이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들로서 올바른 신앙개혁을 생활로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안식일에 대한 느헤미야의 열성은 과거 조상들의 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지만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했다.
12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15~126 ‘주 안에서 기뻐함’을 읽어보라.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경고를 제시하고 바로 이 같은 죄악으로 인하여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무서운 형벌을 상기시켰을 때 그들의 양심이 각성되어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를 돌이키고 그분의 인정과 복을 가져온 개혁 사업이 시작되었다.
성직에 있던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이방인 아내와 헤어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아내들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차별도 없었고,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대우도 없었다. 민장들 중에 우상 숭배자들과의 관계를 끊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즉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떠났다. 유명한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대제사장의 손자는 직분에서 해임되었을 뿐 아니라 신속히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되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기를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하였다”(선지자와 왕, 673~67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떤 예외도 두지 않았던 느헤미야의 조치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이방인 아내를 너무 사랑하여 헤어지기를 원하지 않은 자들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너무 강경하고 고집이 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외를 둘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사랑과 인내로 징계하되 동시에 진리의 표준을 낮추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 오늘날 교회는 느헤미야 때와는 다르다. 우리 모두 혈통으로는 이방인들이다. 불신자 배우자가 있다면 그를 진정한 신자가 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함께 영적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➋ 알다시피 진정으로 안식일 또는 계명을 지키는 일은 율법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안식일 또는 어떤 계명의 준수가 율법주의의 형태가 되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요? 십자가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생활자체가 신앙이 되면 계명 준수가 율법주의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이 삶을 주장하면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➌ 느헤미야가 직면했던 상황처럼 서서히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위험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순간순간 말씀 앞에 진심으로 굴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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