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여호와를 경배함(질문, 대답, 설명) 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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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11-29 14:56 조회6,422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여호와를 경배함
12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3분
● 연구 범위 : 느 12:27~47, 대상 25:6~8, 요일 1:7~9, 요 1:29, 36, 고전 5:7, 히 9:1~11
● 기억절 :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스 3:11).
이번 주 기억절을 보면 히브리인들의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서 어떻게 그들의 감사가 흘러나오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기원전 515년에 그들은 새로운 성전을 봉헌했다(스 6:15~18). 그리고 약 60년 후에 예루살렘 성벽 완공을 기념했다(느 6:15~7:3, 12:27 이후).
느 11~12장에 족보를 열거한 이후에 저자는 성벽 봉헌을 기념했던 시절로 이동한다. 성전, 성벽, 심지어 가옥과 관공서 등의 건축물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그 민족의 관습이었다. 그러한 봉헌식은 주의 깊게 준비되었으며 노래, 음악, 연회, 희생 제사, 유희, 백성의 정결 등이 곁들여졌다. 다윗은 봉헌식에 이뤄지는 희생 제사의 관례를 마련했고, 언약궤를 성전에 안착시켰던 솔로몬으로부터(왕상 8:5) 이후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의 모본을 따랐다.
이번 주에 우리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했던 방법을 살펴보고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적용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하나님이 최고의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경외심과 큰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기로 결심한다.
➋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과 교회에서 찬양을 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 사람의 감성의 만족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의 차이이다.
➌ 성벽 봉헌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까?(느 12:27~47)
※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했다.
➍ 최고의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 어떤 전담 인력들이 배치되었습니까?
※ 음악 전문가들이 배치되었다.
➎ 성경에서 묘사하는 예배의 장면에는 어떤 정서들이 흐른다고 생각합니까?
※ 엄숙함과 즐거움이 함께 있었다.
➏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구원의 기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 창조와 구원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 조화를 이루게 된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우리에게 최고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 준비된 음악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뿐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예배를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월 1일(일) 찬양으로 여호와를 송축함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느 12:27).
1. 느 12:27~29을 읽어보라. 그들의 경배와 찬양이 어떠했는지를 알 만한 핵심 단어들에 주목하라. 그대는 그들의 예배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느12:27~29]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웹 들에서 모여 왔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답: 감사와 노래ㅇ하 악기로 연주하며 즐겁게 경배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레위인 중 일부 계층에 성전 예배를 위한 찬양과 음악을 전담시켰다. 성전 예배는 아름답고 전문적으로 수행되어야 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관례를 지시하셨고 예배를 위한 명령을 하달하셨다.
다윗 왕은 예배 의식을 이전보다 한층 정교하고 성대한 체계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다윗이 성전 예배 지도자로 임명했던 아삽의 자손들이 여전히 찬양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전 일을 맡”(느 11:22)았다.
2. 대상 25:6~8을 읽어보라. 하나님을 송축하는 경배와 찬양에 음악은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가?
[대상25:6~8]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7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인이라 8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무론하고 일례로 제비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답: 찬양을 전담한 지도자들을 왕의 수하에 두었다. 그들은 제비뽑아서 그 직무를 수행했다.
찬양하는 자들은 성전 봉사를 위해 공식적으로 배정된 레위인들이었다. 즉 성전 예배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그들이 전담하는 사역이었다. 다윗 왕 시절에는 그가 감독하는 정식 음악 학교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성전에서 교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연로한 교사와 젊은 연습생들이 있었다. 일부는 악기 연주자였고, 일부는 노래하는 자였으며, 악기와 의복을 관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같이 전문적인 조직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재능을 발전시키고 최고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비전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탁월성은 항상 예배의 목적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찬양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백성들이 영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음악가들과 노래하는 자들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발되었을 것이다.
<부가설명> 음악은 예배가 아니라고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예배는 예배하는 자의 정성을 다한 감성이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찬양은 찬양대가 잘 준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현대에서는 모든 회중이 진정한 감사로 기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해야 할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찬양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예배 음악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많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새벽별들이 노래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찬양했다.(욥38:7) 예수님 탄생하셨을 때 허다한 천군들이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는 찬양이 수반한 것을 볼 수 있다. 노래는 잘하는 사람도 있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는 것에는 잘하는 사람과 잘못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예배 찬미가 얼마나 충만한 감사로 드려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궤를 옮길 때 다윗을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우리가 예배할 때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예배하며 찬미가 제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성경이 권하는 것이다.(엡5:19, 골3:16, 히13:15) 세상 음악 가락이 예배를 침략하지 않도록 하자. 예배에는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훈 : 성전 예배와 의식에서 하나님은 음악과 노래로 찬양을 받으셔야 했다. 그분께 최고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일꾼들이 있어야 했다.
12월 2일(월) 정결
느헤미야서를 보면 성벽 봉헌을 논의한 후에 곧 노래하는 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다음 절에서 정결에 대해 말한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느 12:30).
‘정결하게 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은 ‘깨끗해지다’, ‘순결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정화되고 깨끗해진다는 개념도 포함한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9).
1.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⑴ 인간의 본성, ⑵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⑶ 우리의 삶에 임하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답: 인간은 죄인이고 죄를 짓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고백할 때 그분은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성전과 그 예배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럴지라도 성전과 그 예배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물론 그 목적이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로 백성을 이끌고, 그들의 삶을 정결하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아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러기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알 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아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예배 의식에 스며 있어야 할 기쁨과 감사의 원천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죄 사함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송축하는 일이 쉬워진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분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그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더 위대한 계시가 무엇이겠는가?
<부가설명> 예배에는 회개와 자복이 따른다는 것을 지적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빛 가운에 행해야 한다. 빛이 비치면 깨끗하지 못한 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면 하나님께 무엇을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할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성령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셔도 우리가 처하여 사는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고 죄투성이 환경이기 때문에 어둠속에서 끊임없이 죄가 날아와서 우리의 깨끗한 옷과 정결한 생명에 때를 묻힌다. 게다가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호응해서 우리를 죄 아래 사로잡아간다.(롬7:2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능력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언제나 사유하시는 사랑으로 넘친다. 이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적용하여 성령께서 생명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순간순간 해방해 주신다.(롬8:2)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죄의 호흡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하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예배에는 이런 감격과 감사가 동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 예배는 형식에 머물러 박제(剝製)가 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세 천사의 기별은 예배 회복의 기별이기도 하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대상이 누군지 확실히 알고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신앙의 나타남이다. 바른 예배를 하자.
교훈 :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찬양과 감사가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12월 3일(화) 두 개의 대규모 감사의 찬양대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느 12:31).
1. 느 12:31~42을 읽어보라. 이 기념 예배에서 음악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가?
[느12:31~42]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이요 33 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 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며 35 또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 대 손 아삽의 육 대 손 스가랴와 36 그 형제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 샘문으로 말미암아 전진하여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길에서 동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39 에브라임 문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 40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떼와 나와 민장의 절반은 하나님의 전에 섰고 41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 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답: 새로 쌓은 성벽 위로 감사예배 행진을 했는데 두 떼로 나누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여 끝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다. 두 떼가 다 나팔불고 찬송하며 예배행진을 했다. 이 예배에는 찬양이 중심이었다.
느헤미야의 시대에는 예배의 일환으로 악기를 대동하여 예루살렘을 도는 두 개의 감사의 찬양대가 있었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여 성벽을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눠져서 행진했다. 한 그룹은 에스라가 앞에서 이끌었고, 다른 그룹은 느헤미야가 뒤따랐다. 두 찬양대는 골짜기 문에서 다시 만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이 양쪽의 행진을 보조했다. 성전 안으로 입장한 두 찬양대는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그것은 정말 훌륭하게 조직된 행진과 예배 의식이었다.
음악이 왜 기념 예배와 의식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성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음악의 의미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전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4번을 들으려고 공연장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 아니다. 오히려 성전에서는 가수가 노래하고 악기가 연주될 때 사람들이 엎드려 기도한다. 음악은 그들에게 예배의 일부분이다.
성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희생 제물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은 다소 유쾌하지 않은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죄한 가축의 목을 베는 것 외에 무엇을 했는가? 여러 방식으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음악은 백성의 생각을 하늘로 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예배 전체가 더욱 유쾌해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음악이 예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성경의 예들을 찾아보라. 특히 출 15:1, 대하 20:21~22, 계 15:2~4을 살펴보라.
답: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출15:1은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의 노래로 찬양하는 것이고 대하20장은 여호사밧 왕이 침략군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적군을 물리친 예배이며, 계15장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모습이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음악은 예배 행위의 일부분이다. 위 성경절들을 보면 노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루신 일들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는 짐승을 이기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이야기도 포함된다. 그것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에 대한 찬양이다.
<부가설명>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은 그들이 한 일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루었다는 생각이 없었다.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신 것을 기억했고 그 감사를 찬양예배로 하나님께 올렸다. 진심으로 그들은 무력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능력이신 것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하면 절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감사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존재와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경도 예배가 예식 예배와 생활예배가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요4:23,24, 롬12:1) 우리의 생활이 예배가 될 때에 회중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가 된다. 생활이 전혀 말씀과 동떨어지면서 예배만 하면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의 신앙 태도와 다를 것이 없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7:9,10)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지겨워하는 예배가 되면 안 된다. 남은 자손인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도록 예배개혁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예배회복의 기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훈 : 음악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찬양한다.
12월 4일(수) 희생 제물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1. 느 12:43을 읽어보라. 예배의 일환으로 큰 제사를 드렸던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느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신 것을 감사하여 큰 제사를 드렸다.
희생 제물은 성전 시대의 예배에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다양한 희생 제사는 용서의 약속 또는 교제의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드려졌다. 희생 제물은 예배의 목적을 제공했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리를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실 약속의 씨 곧 메시아를 가리켰다.
2. 요 1:29, 36, 고전 5:7, 계 5:6, 12~13을 읽어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제물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만약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를 암시하는 가축의 희생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다면, 그들보다 더 확실한 이유를 가진 우리는 얼마나 더 기뻐해야 하는가?
[요1:29,36]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계5:6,12~13]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답: 성전에서 드린 희생 제물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을 믿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서 희생하신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으며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느 12:43에서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주목하라. 즉 백성들이 예배 의식에서 경험하는 경외 또는 거룩한 두려움 속에는 (죄로 인한 가축의 희생은 엄숙한 요소이지만) 기쁨과 즐거움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경외심과 두려움도 있어야 하지만 기쁨도 있어야 한다. 시 95편을 보면 진정한 예배 행위에는 하나님 앞에서 굽히고 무릎을 꿇을 뿐 아니라(6절)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외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음악을 연주하라는 요청이 있다(1절). 기쁨과 경외심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우리 창조주를 송축하고 찬양하며 경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부가설명> 예배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식이다. 그분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나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고 생활하는 것은 그분이 나를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내용이다. 또한 날마다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실로 사람은 무력하고 허무하다. 일생이 주님 앞에 없는 것 같은 존재가 아닌가?(시39:5) 그런데 역사를 이어오면서 소위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창달하면서 생활하는 것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신 말씀 그분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가 아닌가. 예수께서 오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고(딤후1:10)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영생하는 존재가 되게 하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느헤미야의 백성들은 이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엄숙하면서도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진정한 예배자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희생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구원과 용서의 기쁨으로 즐겁게 외치며 하나님을 찬미한다.
12월 5일(목)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날에…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느 12:44).
1. 느 12:44~47을 읽어보라. 유다 사람은 왜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했는가? 무엇 때문에 그들이 중요했는가? 제사장들의 일은 무엇을 상징했는가?(히 9:1~11 참고).
[느12:44~47]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45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46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47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히9:1~1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답: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의 허물을 용서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으므로 이스라엘은 날마다의 허물에서 사유함을 받는 예식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봉사는 백성들의 용서의 길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죄하는 봉사를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 우리는 실상 앞에서 더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시작된 일을 완성하기 위해 승천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히 6:20)신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89).
그 당시의 백성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만큼의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도 성전에서 봉사했던 레위인들의 사역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업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하고, 자신을 그분께 재 헌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성전에서의 사역이 간과되었으며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들이 재정비되었고, 레위인들이 그들을 위해 섬길 중요한 사역을 인하여 기뻐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성전 봉사가 그분이 설계하신 예배의 일부분임을 각인시키셨다.
불행히도 우리는 종종 목회자들과 성경 교사들, 찬양 봉사자들의 노고를 당연하게 여긴다. 심지어 느헤미야 시대에도 레위인들을 위한 부양이 지나치게 부족할 때가 있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 바치기를 중단하는 바람에 레위인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여러 번 다른 일에 종사해야 했다.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세계적인 조직의 교회는 존재하기 힘들다. 우리의 사업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칭찬과 인정뿐 아니라 물질적인 기여를 통해서 우리 목회자들을 부양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교회는 절대 완전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금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분의 사업이 전 세계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부가설명> 오늘날 교회는 옛날 성전과 똑 같지는 않지만,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계시하였고 예수님이 그 머리이고 신자들은 그 지체(肢體)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예수께서 친히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셨고 그들이 영적 삶의 봉사자가 되게 하셨다. 교회는 그들을 부양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십일조 제도를 제정해 주셨다. 성경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1,14) 첫째는 복음교역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영적 소명과 사명의식이 투철해야 하고 그 사명에 혼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옛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면서 여호와를 알지 않았다.(삼상2:12) 알지 않았다는 표현은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알기를 거부했다는 뜻이다. 제사장이 세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아들도 제사장이 되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복음교역자들이 이러면 안 된다. 자기의 직임은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위하여 받은 것인 줄 깊이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충성해야 한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충성해야 한다. 흡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결과를 맞이 않아야 한다. 다음으로 성도들은 충심을 그들을 사랑하고 도와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이런 개혁을 이루었다.
교훈 : 레위인들의 봉사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구약의 교훈에 따라 오늘날도 구별된 하나님의 일꾼들을 위해서 물질적인 부양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12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67~75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을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 그룹과 영광의 스랍들이 즐겨 경배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죄의 치욕과 슬픔을 지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가려진 채 마침내 잃어버린 세상의 죄 때문에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심장이 터지고 생명이 떠나간 사실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모든 운명의 결정자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 구원을 받은 모든 민족이 그들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분의 얼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또한 그들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속하는 그분의 보좌를 보고, 그분의 나라가 끝이 없을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환희에 사로잡혀 노래할 것이다. ‘우리를 그 귀하신 보혈로 하나님께 구속하시고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각 시대의 대쟁투, 651~65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배를 드릴 때 경외심과 기쁨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잡는 방법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그 둘은 서로 반대의 개념입니까?
※ 반대 개념은 아니지만 인간이 약해서 균형지게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가 넘친다면 이 둘은 균형을 이루고 예배가 더욱 활기차고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다.
➋ 이스라엘 백성은 봉헌식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성벽이 무용지물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이는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노력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해줍니까?
※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예수의 부활의 생명력의 작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노력을 할 뿐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➌ 그대의 교회에서는 음악이 예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음악이 아주 미약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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