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시험, 시련 그리고 목록(질문, 대답, 설명) 11/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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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11-22 17:10 조회6,394회 댓글0건본문
제9과 시험, 시련 그리고 목록
11월 30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4분
● 연구 범위 : 스 1:9~11, 단 1:1~2, 단 5장, 스 8:1~23, 신 30:1~6, 느 11:1~ 2, 12:1~26
● 기억절 :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느 10:29).
우리는 보통 성경에서 족보나 기물의 긴 목록이 나오면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성경에 포함시키신 이유가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섬세한 신이시다. 그분은 세세한 것들도 주목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몇 개의 족보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기물의 목록들을 보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참새도 돌보시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아리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그분은 심지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신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실로부터 위로도 받아야 하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의하기도 해야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 헤아리시는 분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시련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린다.
행하기 :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알고 그곳에서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➋ 성경에 있는 개인, 가문 그리고 물건들의 목록을 볼 때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 성경의 모든 기록은 사실이며 하나님께서는 개인도 기억하고 돌보시는 것을 깨닫는다.
➌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님이 되돌려 놓으신 것에는 어떤 대상들이 포함되었을까요?
※ 성전, 성벽, 안식일, 예배, 가정정결 등등.
➍ 에스라가 왕이 제공하는 경호대를 사양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이 능히 보호하신다는 그의 믿음의 공언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➎ 물려받은 땅 대신 예루살렘 안에서 거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 개인의 편리보다 하나님 사업을 우선으로 한 삶을 배울 수 있다.
➏ 우리가 이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와 이 교회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요?
※ 확실한 성경진리를 지키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귀환 길에 오른 모든 사람과 바벨론으로 옮겨간 성전의 모든 기물의 목록이 구체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유다의 각 성읍이 복구되어야 했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사역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던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11월 24일(일) 역사의 하나님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스 1:11).
1. 스 1:9~11과 단 1:1~2을 읽어보라. 다니엘서의 설명은 에스라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스1:9~11] 그 수효는 금반이 삼십이요 은반이 일천이요 칼이 이십구요 10 금대접이 삼십이요 그보다 차한 은대접이 사백열이요 기타 기명이 일천이니 11 금, 은 기명의 도합이 오천사백이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때에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다 가지고 왔더라.
[단1:1,2]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답: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정복하고 성전 기구 얼마를 가지고 가서 자기 신의 사당(묘)에 두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스룹바벨 편에 돌려 보낸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 에스라서에 비해 다니엘서에는 큰 그림이 제시된 사실을 주목하라. 이 두 곳이 합쳐질 때 여호와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열국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큰 계획 속에 모든 국가와 모든 개인의 자리를 배정하셨다. 오늘날의 사람들과 나라들이 그릇 행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추(錐)로 시험을 받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고자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계신다”(선지자와 왕, 536).
2. 단 5장을 읽어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벨사살 왕에게 임한 심판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
다니엘 5장은 31절까지 있는데 바벨론 성이 함락되고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며 메데 사람 다리오가 바벨론 왕이 되는 내용이다. 여기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이라는 심판하는 글씨가 벽에 기록되는 내용이 있다.
답: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벨론은 메대-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정복당하면서 멸망했다(기원전 539년 10월). 어리석게도 자신의 성공, 사치, 명성에 의지했던 벨사살은 곧 죽을지도 모르고 그날 밤 성대한 잔치를 배설하였다. 거룩한 분의 손이 나타나 그의 날이 계산되었고 끝날 때가 되었다고 왕궁 벽에 기록했다. 그는 선조 느부갓네살의 운명과 회심의 이야기를 알았지만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지는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면 언제나 비극이 일어난다.
선지자 다니엘이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무시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에 우리는 근심거리, 문제, 비극의 길을 걷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부가설명>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신다. 그 중에는 지구도 포함된다. 비록 죄의 행성이 되었지만 창조주께서는 간섭하시고 주관하신다. 이런 사실은 성경에 이 지구역사에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게 하셔서 우리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때때로 개인도 그렇게 하시고 국가를 그렇게 하시는데 국가는 주로 왕들을 관할하시므로 그렇게 하신다. 다니엘서에 나나탄 느부갓네살 왕이나 벨사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이 명백한 증명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이스라엘와 유다 왕국을 직접 간섭하신 것은 사무엘서부터 역대기까지 잘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등은 개인을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오늘날도 살아계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국가와 교회와 개인들을 확실한 필요에 따라 이처럼 간섭하시고 주관하신다. 성도들은 성령께서 간섭하시는 음성을 잘 듣고 순복해야 할 것이다.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직접 나타난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개선의 기회를 다 놓치고 마침내 망하였다. 우리는 생애에서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도 성령의 음성을 잘 듣고 순복해야 할 것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사랑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자.
교훈 :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가져갔던 성전의 기물들을 잊지 않으셨다. 벨사살이 그 기물들로 하나님을 모독했던 날 그 나라는 멸망했다.
11월 25일(월) 자기들의 성읍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느 7:73).
1. 스 2장과 느 7장을 훑어보라. 거기서 그대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답: 거기는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함께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들의 명단이 스 2장과 느 7장에서 의도적으로 반복된다. 우리에게는 지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세한 것까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예루살렘 성벽이 이제 완공되었다. 비록 이러한 성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은 이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에스라-느헤미야의 귀환 세대가 쏟은 노력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록 그 과업이 까다롭고 수많은 난관이 있었으며 그들이 바라던 만큼 빨리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현 세대는 이전 세대의 업적 위에 세워졌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력도 중요했지만 백성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했다. 각 그룹이 서로 다른 때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시작(스 2장)과 끝(느 7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되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도 재정비되어 훌륭하게 재건되었다.
2. 느 7:73을 읽어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열망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느7:73]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답: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각각 자기 성읍에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
여러 면에서 그들의 귀환과 재건 사업은 매우 놀라웠다. 과거에 그 성과 성전과 그 땅에 멸망과 황폐함을 불러온 자들이 그 땅과 도시에 돌아와 모든 것, 심지어 성전까지 재건했다. 그것은 그들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기적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따라 이루어졌을 뿐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아시고 기억하신다.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욥바에 사는 가죽장사(피장이) 시몬을 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 집에 베드로가 묵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성경에 기록한 이런 사실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늘날 지구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다 아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계시해주시는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에 기록된 이들의 이름은 가공적인 이름이 아니다. 그 당시 역사적으로 생존하고 일했던 실재 사람들이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계시하신다. 어떤 종교 경전도 개인의 이름을 이처럼 많이 기록한 경전이 없다. 또 족보를 기록한 경전도 없다. 오직 성경만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이 역사적 사회적 사실인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이름을 적은 것과 족보를 기록한 것에는 복음과 구원 사업에 확실성과 성경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아멘.
교훈 : 귀환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통해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과업이 완성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
11월 26일(화) 제사장들은 어디 있는가?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스 8:15).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다. 어제 보았듯이 그것은 놀라운 예언의 성취였다.
그러나 사람이 개입된 모든 일이 그렇듯이 문제들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포로생활에서 돌아갈 수 있다는 놀라운 약속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바벨론에 머물기를 선호했다.
왜 그랬을까?
1. 스 8:1~15을 읽어보라. 특별히 15절을 잘 보라. 무엇이 큰 쟁점이었는가? 고국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스8:1~15] 아닥사스다 왕이 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계가 이러하니라 2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일백오십 명이요 4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이백 명이요 5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삼백 명이요 6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오십 명이요 7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칠십 명이요 8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팔십 명이요 9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일백육십 명이요 11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일백십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 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한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유하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하나도 없는지라.
답: 여기는 에스라와 함께 유다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었는데, 여기에 레위인들이 없었다.
사실 레위인들을 포함해서 바벨론의 모든 유대인이 귀환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몇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그 땅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많은 사람이 길고 위험천만한 여정을 떠나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을 충분히 데리고 왔다.
“그때까지 포로로 잡혀간 땅에 살던 유대인들은 거의 1세기 반 동안 그 땅에 머물렀다. 닙푸르(Nippur)에서 발굴된 수많은 문서들은 아닥사스다 I세의 치세 중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부유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그의 동료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을 설득하여 함께 귀환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외에 이주했다가 귀환하는 이 사람들은 바벨론보다 훨씬 불편하고 어려울 옛 고향의 개척 생활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볼 때, 에스라가 옛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자고 약 2,000 가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5권, 468).
<부가설명>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유대인들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을 애굽에서 살았다. 그들이 비록 노예처럼 살았지만 요셉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요셉 후에 왕조가 바뀌면서 노예로 전락했지만 그곳에서 조상 대대로 4대 동안 닦은 기반이 있었다. 그런데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따에 들어가서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 쉬웠겠는가? 아마도 나오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바벨론에서 70년 포로 생활했지만 그동안 닦은 기반이 있었고 교과에 기록된 대로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황폐한 고국 따에 선 듯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는 사람들이 고국 재건하는데 경제적 후원을 하겠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바벨론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진리교회라고 하는 이단 집단에 그곳을 버리고 쉽게 옮기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땅에서 나와 고국에 온 사람들의 용기는 참으로 칭찬할 만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예언과 섭리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옮겼을 것이다.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귀환한 사람들이 수행했던 같은 노력으로 종말의 주님의 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교훈 :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 귀환에 적극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속의 성취를 바라는 자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익숙해진 삶의 자리를 접고 길을 나섰다.
11월 27일(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신 30:5).
1. 신 30:1~6을 읽어보라. 여기서 히브리 백성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는가? 이 약속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신30:1~6]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답: 그들이 범죄하여 열방 중에 흩어졌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에스라 느헤미야 등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은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예언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이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느 9장을 보면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이 곤란을 당하는 이유도 깨달았다. 동시에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포로 귀환을 성공시키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약속에 난관이 많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번 기에 여러 번 보았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도 시험과 환난을 마주해야 했다.
2. 스 8:16~23을 읽어보라. 이곳의 난관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
[스8:16~23]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거한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저희가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 형제와 저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또 느디님 사람 곧 다윗과 방백들이 주어 레위 사람에게 수종들게 한 그 느디님 사람 중 이백이십 명을 데려왔으니 그 이름이 다 기록되었느니라 21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답: 돌아갈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난관에 하나였으나 하나님의 손길로 모았으며, 또 가는 길에 어려움을 만날 것이 난관이었으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그 여정이 얼마나 위험할지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금식함으로써 그들의 성공적인 여정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의 앞에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왕의 원조와 보호를 요청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에스라에게 떠올랐을 법하다. 후에 느헤미야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호대를 두었지만(느 2:9)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스 8:22). 이미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한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 왕에게 보호를 요청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 경우에 그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셨기 때문에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이 안전했다고 기록했다(스 8:31).
<부가설명> 고토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다른 선택을 했다. 에스라는 왕이 보호하겠다고 했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왕에게 선언했기 때문에 그 도움 대신 자기가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손길을 전적으로 의뢰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왕에게 그런 말을 하지 ㅇ않았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왕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도록 하실 것을 믿었다. 두 사람의 믿음을 다 응답되었다. 우리의 삶에서 에스라의 믿음과 느헤미야의 믿음은 함께 작용한다. 세상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돕게 하실 것이며, 또한 에스라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때에도 직접적으로 도와서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문제는 신자의 신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한 것은 응답될 것을 믿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응답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간구와 소원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간구와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가장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방버대로 응답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기록은 이 믿음을 실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교훈 :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고 회복의 약속을 믿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11월 28일(목) 거룩한 도성 안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느 11:1).
1. 느 11:1~2을 읽어보라.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들은 왜 제비를 뽑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살게 했는가?
[느11:1,2]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2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답: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건축하고 시가지를 정비한 다음에 그곳에 살 사람들을 정했다. 지도자들과 제비 뽑힌 사람들이었다. 새로 재건된 성읍에 산다는 것은 생활 터전을 새로 닦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을 수 있었다. 제비 뽑은 이유이다.
우리는 느 11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자들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할 자들이 필요했다.
사실 고대에는 도시보다 시골에서 사는 것이 훨씬 편했다. 시골에는 사람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있었다. 그것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사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었다. 많은 이가 그렇게 하면 설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수 있었다. 생계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도시의 생활 방식은 시골과 다르다. 새롭고 낯선 환경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낯선 도시나 국가로 이주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도시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새로운 모험과 고충을 감당하는 자발성을 요구한다.
“우리의 일꾼들은 뻗어나가야 할 만큼 나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사업에 대하여 각성하지 않는다. 나는 너무도 적은 것만이 이루어져 있는 도시들, 구주의 신속한 재림에 대하여 경고를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시들을 생각할 때, 멸망해 가는 영혼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업을 향해 나가는 남녀들을 보고 싶은 강력한 소망을 느낀다” (교회증언 7권, 40).
2. 느 12:1~16에는 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긴 명단이 언급되는가? 같은 장 뒷부분에 나오는 성벽 봉헌은 그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느 12:27~47)
[느12:1~16]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를 좇아 돌아온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이러하니라 제사장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2 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 3 스가냐와 르훔과 므레못과 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5 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6 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7 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과 그 형제의 어른이었느니라 8 레위 사람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냐니 이 맛다냐는 그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9 또 그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저의 맞은편에 있으며 10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았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았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았고 11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았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 12 요야김 때에 제사장의 족장 된 자는 스라야 족속에는 므라야요 예레미야 족속에는 하나냐요 13 에스라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아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 14 말루기 족속에는 요나단이요 스바냐 족속에는 요셉이요 15 하림 족속에는 아드나요 므라욧 족속에는 헬개요 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답: 성벽을 건축하고 성전봉사 할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다. 그들을 도와서 일할 사람들은 레위인들이다. 그들은 재건축된 성내에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헌신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이름을 열거했고 그들로 성벽이 완성된 축하행렬을 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사업이 바른 방식으로 이행되기를 원하신다. 위업이 달성되기 전에 먼저 헌신할 거룩한 백성이 필요하다. 이들 제사장 가문들은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성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안전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느헤미야를 도와 성벽을 건축했다. 성벽은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구별된 제사장들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위기에 처할 것이었다. 즉 백성마다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부가설명> 하나님이 맡기신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정한 특별한 장소에서 봉사해야 했다. 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내에 살면서 성전봉사를 해야 했고, 그렇기 위해서는 성벽이 안전해야 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완공하고 성벽완공 낙성 봉헌식을 했다. 성벽은 견고해야 한다.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성내의 주민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 일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선지자들이 함께 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그 성 안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살아야 했고 제비 뽑힌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성을 잘 수호하면서 그곳을 살만한 곳으로 가꾸어야 하지 않았을까?
에스라 느헤미야에 계시된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손들이 겪을 사건들을 예표하고 있다. 종말에 남은 자손들은 성소재건을 해야 했다. 그들은 하늘성소에 대한 성경진리를 찾았고 예수님의 대제사장 봉사가 하늘성소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확실한 진리 위에 마지막 남은 자손의 교회를 건설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성벽건설이 에표하는 것이다. 성벽이 견고해야 하듯이 교회는 견고해야 한다. 말씀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하고 교인 하나하나가 다 견고한 벽돌이 되어야 한다. 아무쪼록 이 진리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훈 : 하나님은 큰 사업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헌신적인 백성을 필요로 하신다. 느헤미야 시대에도 물려받은 땅을 놔두고 예루살렘에 거주할 백성이 필요했다.
11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57~65 ‘제자 되는 증거’를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자신의 성품이 불완전하고 생애의 결함이 많다고 느끼므로 과연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는지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 말하노니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과실로 인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담하지 말 것이다. 비록 우리가 원수에게 실패를 당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거나 미움을 받거나 배척을 당하지 않는다.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그분은 그대를 자신에게로 돌이키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그대에게서 반사되는 모습을 보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신을 그분께 바치기만 하면 그대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확실히 믿으라. 우리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 구주의 능력을 의지하자. 그리하면 “내 얼굴을 돕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수천 년 전에 다니엘서 2장은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와 오늘날 유럽의 분열까지 정확히 예언했습니다. 세상이 혼돈 가운데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예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언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위로를 얻어야 합니까?
※ 미래의 예언도 그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고 재림의 소망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➋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우리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해 주신다고 어떻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확실히 성취된 사실을 확인시켜서 성경의 약속은 그렇게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믿도록 도울 수 있다.
➌ 에스라는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보호해 주시리라는 그의 말이 헛되게 될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플 때 치료자 되시는 하나님 대신 의사를 찾아간다면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을 아니다. 느헤미야의 예가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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