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용서하시는 우리 하나님(질문, 대다1, 설명)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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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9-11-09 06:43 조회6,023회 댓글0건본문
제7과 용서하시는 우리 하나님
11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1분
● 연구 범위 : 느 9:1~3, 단 9:4~19, 느 9:4~8, 골 1:16~17, 느 9:9~38, 롬 5:6~8
● 기억절 :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초막절이 끝난 뒤에 지도자들은 다시 백성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미완의 사업 곧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일을 해야 할 차례이다.
앞서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울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고 회개와 고백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축제가 끝났으니 이제는 제대로 된 고백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제시되는 순서는 꼭 기뻐한 다음에 고백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 반대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고백한 후에 기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롬 2:4을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찬양과 잔치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새롭게 창조해 주셔야 한다는 필요성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와 유지자시며, 우리의 죄와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는 분이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신뢰감을 잃지 않는다.
행하기 : 말씀에 순종하면서 우리의 삶을 통치해주시고 우리의 현실에 개입해주시기를 간청한다.
➋ 그대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붙들어주시는 분이시다.
➌ 그대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을 성경이 계시한대로 아는 것은 신앙의 초석이다.
➍ 하나님이 만물의 보존자가 되신다는 말씀(느 9:6)은 우리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 오늘 우리의 생명과 호흡과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➎ 우리가 잘못을 행할지라도 계속 하나님께 회개하며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는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잊으면 영생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그들을 지키시며 구원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 차이점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회개하며 그분께 경배할 수 있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이 우리의 삶에 개입해 주시기를 요청드릴 수 있습니다.
11월 10일(일) 금식과 경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느 9:2).
1. 느 9:1~3을 읽어보라. 그들은 왜 모든 이방인과 결별했는가?
[느9:1~3]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답: 이방인들과 친교하는 것 자체가 율법이 금하는 것이었고, 또 그들이 회개하는 자리에 이방인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차단한 것이다.
앞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그 시간을 기쁨과 연결시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제는 회중을 금식으로 인도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었고, 굵은 베옷을 입은 채 머리에는 티끌을 뿌렸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연대적인 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시켰다. 왜냐하면 용서받아야 할 죄는 그들 자신의 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로가 되게 한 죄가 바로 그들 민족의 죄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들의 합심 기도와 고백은 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깊은 이해를 나타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나라를 망치고 민족 전체를 포로의 수렁에 빠뜨린 역사에 대해 분노할 수 있었다. 아니면 귀환한 백성들을 초라한 현주소로 이끈 지도자들의 결정과 경건함이 결여되었던 이전 세대들에 대한 불평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증오와 불만을 품기보다 그들은 겸손히 자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향했다.
느 9:3에 따르면 백성들은 그날 하루의 사분의 일 동안 율법서를 읽었고, 사분의 일 동안에는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토라 낭독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죄의 고백에서 토라는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고백은 말씀에 기초하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성령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사고와 사상의 형태를 잡아주고, 우리가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향상시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슬퍼하며 울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깨닫고, 우주의 창조주께서 무가치한 우리와 함께하기로 선택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도 우리의 영적인 조상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될 수 있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그들이 귀환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귀환시킨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귀환했기 때문에 금식과 눈물의 회개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기 전에 그냥 회개하라고 했다.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외쳤다.(행2:38, 3:19)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온 다음에 말씀을 읽고 깨달았을 때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다.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도 회개했다. 그들은 조상들로 인하여 죄의 씨로 출생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자기가 개별적으로 지은 도덕적 율법적 죄에 대한 것 이전에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된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 가능하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말씀을 깨닫고 이런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귀환한 유대인은 이렇게 말씀에 근거한 회개를 함으로 진정한 남은 자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교훈 : 우리의 부족과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죄를 고백하며 그분을 경배할 수 있다.
11월 11일(월) 기도의 시작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성경을 읽은 백성들의 반응은 긴 기도로 나타났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불신의 역사와는 대조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열거했다. 그들의 반응은 기도라기보다는 한 편의 설교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절이 성경의 다른 절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1. 느 9:4~8을 읽어보라. 서두에서 이 기도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느9:4~8]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답: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과 그 이름의 영화로우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도의 서두에서 백성들은 하나님, 특히 그분의 성호를 송축했다. 히브리 문화에서 이름은 단지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르는 칭호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은 세상에 그 이름이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성호이다. 그 기도는 창조주시자,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로 시작한다(느 9:6; 골 1:16~17 참고). “보존”이라는 단어는 ‘계속 살아있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했다.
만물을 지으신 분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는 마음의 신실함 외에는 특별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였다. 심지어 그는 간혹 믿음이 결여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에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창 22장 참고). 그는 단지 하룻밤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실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히브리식 사고방식에서 마음은 생각을 지칭한다. 즉 아브라함은 생각과 행동 속에서 믿음을 키웠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백성들이 올린 기도의 첫 몇 구절들은 ⑴ 창조주, ⑵ 유지자, ⑶ 약속 이행자로서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기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항상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긴 안목에서 보게 하며, 마치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우리의 어려움에 상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가설명>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시124:8)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 곧 영화로우신 이름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 힘써 알아야 한다.(호6:3) 그 이름에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이미 들어있다. 즉 구원에 대한 약속이 들어있다. 이 이름을 바르게 깨달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넘치는 감사함으로 감사하고 경배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창15:6) 그가 그냥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의로여김을 받은 이유이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불러 송축하고 그분이 그 이름에 합당하게 창조하신 사실을 고백한다. 그래서 마땅히 경배 받으실 분이라고 고백한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고백하고 그들도 그들의 하나님께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저지른 도덕적 행위적 허물들을 회개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지 못한 자기들의 상태와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세력 아래서 죽은 자가 된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회개 후에 자기들의 도덕적 신앙적 허물들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이 순서이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교훈 :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보존하며, 모든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11월 12일(화) 과거로부터 얻는 교훈들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느 9:16~17).
1. 느 9:9~22을 읽어보라. 이 부분은 기도의 서두와 어떻게 다른가?
[느9:9~22]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10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11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저희로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를 돌을 큰 물에 던짐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12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 13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14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 15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마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명하셨사오나 16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18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19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21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답: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이 이런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지 않은 것을 고백한다.
그분의 신실하심을 인해 하나님을 송축했던 기도는 애굽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불신앙을 이야기하는 기도로 논조가 바뀌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하신 많은 것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러한 선물들에 대한 선조들의 반응은 불행히도 교만, 고집 그리고 그들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적에 대한 무시였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헌신의 부족과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고백과 회개의 중요한 단계이다. 물론 위의 성경절들은 이제는 사라진 백성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와 동일한 문제가 없다고 부정할 만한 사람은 없다.
물론 이런 점에서 그들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복음이 필요하다.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고백과 회개를 중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범법에 부과되는 형벌을 면제시켜주신다. 그때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며 하늘의 호의를 받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1).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죄들을 버리기로 결심해야 한다.
요점은 이스라엘 백성은 완고했고, 하나님은 성실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을 계속 돌보시리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중요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역대의 연대를 돌아보라고 하신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32:7)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인자를 회상하며 감사하고 현재 나의 믿음 생활을 주님 뜻에 합당하게 하고 있는지 자주 살피는 것은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은혜의 기회를 연장시켜주시며 하루하루 주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라고 권고하신다. 우리는 자만해서도 안 되고 낙심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겸손히 주님 말씀에 굴복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말씀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약하지만 하나님의 믿음, 곧 신실하심은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얽매이기 쉬운 약점들이 있다. 그것을 더욱 성령님께 맡기면서 단단히 붙들어주심을 간구하고 마음을 굳게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허락한 날들을 주님의 영광이 되도록 살아가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2)
교훈 : 돌이켜보면 믿음이 없었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이런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항상 신뢰할 수 있다.
11월 13일(수) 율법과 선지자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느 9:26).
1. 느 9:23~31을 읽어보라. 하나님이 주신 “큰 복”(25절)과 비교하여 이스라엘은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느9:23~31] 주께서 그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 열조에게 명하사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24 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거민으로 저희 앞에 복종케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과 그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을 저희 손에 붙여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25 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26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27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29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답: 하나님께서는 큰 복을 베푸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배반과 악행을 일삼았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기도(또는 설교)는 이제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그들이 바로 쓸 수 있는 영토와 도성과 밭을 주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느 9:25을 보면 그들은 그곳에서 “배불리 먹어 살”이 쪘다. 살이 쪘다는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신 32:15, 렘 5:28) 그마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백성들은 “주의 큰 복”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기보다 그들이 소유한 것 속에서 즐거워했다.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주 ‘이것저것이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지만 그것을 소유한 그들의 행복감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덜 헌신하게 이끌었다. 우리는 선물만 보고 너무도 쉽게 선물을 주신 분은 잊는다. 이것은 치명적인 착각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선물을 기뻐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선물로 인한 기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도자들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 불충실하게 행했던 일들을 고백했다.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들은 민족적으로 범했던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특별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다음의 두 가지 잘못이 중요하게 드러났다.
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 ⑵ 그들은 선지자들을 박해했다. 이제야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개인뿐 아니라 성민인 그들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이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고(느 9:29; 레 18:5에서 직접 인용함)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은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위해 계명을 주셨고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래서 이러한 선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부가설명> 화요일 문제나 수요일 문제는 다를 것이 없다. 화요일 부가설명은 그대로 수요일에도 해당된다. 이스라엘이 이런 경험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경고와 권고를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죽였다. 오늘 재림교회도 건망증에 빠져서 선지자 죽이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는지? 선지자의 권고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건망증
김명호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으로
건망증 집단임을
크게 드러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일을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 보내고
강변에
하얗게 마른
모래만 쌓았다.
건망증은
모래언덕이다.
기억의 길에
하얗게 쌓인 모래언덕
오늘 우리들의 길에
하얗게 쌓인
모래언덕.
교훈 :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보다 그것을 주신 그분으로 인해 즐거워해야 하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주신 율법과 선지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11월 14일(목) 찬양과 탄원
1. 느 9:32~38을 읽어보라. 이 고백의 기도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 결론을 맺고 있는가?
[느9:32~38]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 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33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34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열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35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한 고로 36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37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몸과 육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난이 심하오며 38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답: 그들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비를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냈다.
기도는 다시 방향을 바꿔서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놀라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며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듯하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처럼 보이는 탄원을 드린다. 이것은 10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2. 그들의 탄원은 무엇인가?
답: 그들은 탄원은 원수들에게서 구원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일에 직접 개입해서 해결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느 9:32).
그 공동체는 그들을 통치하는 왕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오는 압제가 작은 이스라엘 무리를 괴롭혔고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지쳤다. 그들은 폭군 이후에 또 다른 폭군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고통이 경감되기를 희망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스스로를 종이라고 불렀다. 그 민족의 불신앙을 열거한 뒤에 그들은 그 단어로 자신들을 지칭함으로써 결론을 맺었다. 물론 종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에게 순종한다. 이 말씀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여호와와 그분의 계명에 충성하고 싶은 그들의 소망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이 그들을 위해 개입해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공동체는 현재 그들의 경험을 심각한 곤란으로 설명한다(느 9:37).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고난에 비유될 수 있다(느 9:9). 그들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간과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왕들, 왕자들, 제사장들, 심지어 선지자들과 조상들마저 하나님께 신실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도 개입해주시기를 요청드린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개입해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나 조상들의 업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지한다.
<부가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난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늘 개입하신다. 아니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 가르쳐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개입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오늘날도 신앙세계는 동일하다. 재림신도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신 진리 안에 있다. 그런데 옛 이스라엘처럼 그 진리를 별로 사모하지 않는다. 사고방식이 세상적이고 세상 문화적이다. 이 세상 문화적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안달하고 있지 않는지?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들어각 가나안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라고 하셨다.(레18:1,2)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쉽게 그들의 풍속에 빠졌다. 즉 그들의 문화에 젖어버린 것이다. 오늘 재림교회 현상이 이와 흡사하지 않는지? 선지자를 보내시고 직접 개입하셔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는데, 위기를 당해야 직접 개입해 달라고 부르짖을 것인가?
교훈 :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종으로서 그분의 명령에 충성할 뿐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현실에 개입해주시기를 하나님께 요청드릴 수 있다.
11월 1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37~41 ‘자복’을 읽어보라.
느 9:25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큰 복을 ‘즐겼다’고 말한다. 그 말의 어근은 에덴동산의 ‘에덴’이라는 말과 같다(창 2:15). 만약 ‘에덴의 행복을 누리다’라는 말이 한 동사라면 큰 복을 즐겼다는 말은 ‘그들이 에덴의 행복을 누렸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결국 복음은 회복에 관한 것인데 궁극적인 회복의 목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에덴보다 더 나은 곳은 어디겠는가?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을 양육해서 타락한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에덴과 가장 근접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고대 세계의 요충지에 그들을 옮겨놓으셨다. 비록 그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아직도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사 51:3).
그 백성은 타락한 세계에서 가능한 최대 수준까지 물질적인 복을 누렸다. 그것은 에덴의 풍요를 연상시켰다. 그들은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이스라엘도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의 죄는 물질적인 복의 향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것이었다(겔 23:35). 그 복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되었다. 원래의 목적은 그 복을 통해서 주위의 민족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마 13:22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재물의 유혹”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이번 주 우리가 공부한 고백의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 사람은 재물을 가질 때에 삶의 편리함과 평안을 추구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게 될 때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재물이 목적이 된다. 이것을 회개한 것이다. 마13:22을 씨뿌리는 비유 중에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➋ 느헤미야 9장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유지자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으면 모든 존재가 없다. 유지해 주지 않으면 존재들이 생존할 수 없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성경 신앙의 초석이다.
➌ 우리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빌미로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는 사탄의 시도를 허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굳게 잡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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