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하늘에 보물을 쌓으라-(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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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2-07 23:32 조회3,03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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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늘에 보물(寶物)을 쌓으라.
(2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6분)
<서언(緖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표(目標)와 선택(選擇)을 어떤 방향(方向)으로 향(向)하는지에 대한 핵심(核心)은 거의 재물(財物)과 연결(連結)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마태복음 6:21절) “네 보물(寶物)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더 쉽게 표현 하자면 너희가 목표로 해서 돈과 재물(財物)을 벌고자 (축적(蓄積))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너희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使用)할 것이냐라는 질문(質問)입니다. 즉 우리의 시간(時間)이나 재물(財物)이나 기도(祈禱)를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위해 바치는 것이야 말로 하늘 창고(倉庫)에 쌓아 둔다는 말씀으로 성공(成功)한 사람과 실패(失敗)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교훈(敎訓)하도록 (제5과 하늘에 보물(寶物)을 쌓으라)에서 공부(工夫)하는 것입니다.
(02월05일) (일) <은혜(恩惠)를 입은 노아>
(Q)~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적이고 과감한 순종의 선택을 한 노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을 삼아 종말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창세기 6:5~14)
(A)~노아의 시대(時代)는 지금과 같지 않고 악(惡)한 사람들로만 가득했을까? 그리고 단 한 사람 노아만이 착한 사람이었을까? 당시(當時)에도 인간의 기준(基準)에 착하고 의로운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計劃)이 항상 악(惡)할 뿐인 존재(存在)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윤리(倫理)나 도덕(道德)의 기준(基準)으로 판단(判斷)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宣)하신 뜻에 어긋나 있는 것을 죄로, 악(惡)으로 여기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존재(存在)의 문제이다.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곧 죄인(罪人)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人間)이 윤리(倫理)와 도덕적(道德的) 기준(基準)에 비추어 완벽한 삶을 살아도 그는 죄인(罪人)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墮落) 이후로 모든 인간의 시대는 곧 노아의 시대인 것이다.
(창6:8)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恩惠)를 입었더라. 이 말에는 진노(震怒)의 한복판에 자비(慈悲)가 보인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보존(保存)과 회복(回復)을 보증(保證)했다. “은혜(恩惠)”라는 단어(單語)가 성경에서 첫 번째로 여기에 나타나며, 신약(新約)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는데, 자격(資格) 없는 죄인들을 향(向)해 베푸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을 가리킨다.
(02월06일) (월) <믿는 자(者)들의 아버지 아브람>
(Q)~아브라함의 의심(疑心)없는 순종의 믿음의 삶 속에서 믿는 자의 아버지 아브람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창세기 12:1~3)(히 11:8)
(A)~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믿음은 삼중 포기(抛棄)(본토, 친척, 집)에 대한 하나님의 삼중언약(三重言約)(땅, 후손(後孫), 복(福))이 계시(啓示)되어 있다.
즉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相關)말고 떠나라” 기독교 역사는 떠남과 분리(分離)의 역사(歷史)이다. 본 성경절의 아브람의 경우가 그렇고,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야 했던 롯의 경우(창19:17)도 노예와 속박(束縛)의 당시 애굽을 떠나간 이스라엘의 경우(출12:40~41)도 그러했다. 지금 우리도 마침내 최후의 심판으로 멸망당할 죄악(罪惡)된 이 세상에서 분리(分離)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영적(靈的) 순례(巡禮)의 길을 떠나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 성도(聖徒)가 그렇다. (히11:13~16)
(02월07일) (화) <롯의 잘못된 선택(選擇)>
(Q)~믿음의 조상(祖上)이라 할 만큼 믿음이 출중(出衆)한 아브라함의 가까이에서도 교훈(敎訓)을 배우지 못한 롯의 선택(選擇)과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창세기 13:10~12절, 창세기 18:20~33절, 마가 8:36)
(A)~롯의 선택(選擇)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選擇)이었고, 성급(性急)한 결단(決斷)이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躊躇)함도 없이 선뜻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審判)으로 멸망(滅亡)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9절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가 중요합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自己中心)으로 생각하며 일을 전개(展開)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예민(銳敏)합니다. 손해(損害)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損害)도 볼 줄 알고 포기(抛棄)할 줄도 아는 여유(餘裕)와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었던 롯은 이러한 갈등(葛藤)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예민(銳敏)했고 물질(物質)과 눈에 보이는 세상 적인 행복을 추구(追求)했습니다.
①.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②.롯은 조건(條件)을 선택했습니다.
(02월08일) (수) <속이는 자(者)에서 성공(成功)한 자(者)로>
(Q)~속이는 자 야곱에서 성공한 자 이스라엘로 변화(變化)된 야곱의 교훈(敎訓)에서 야곱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관한 어떤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얻을 수 있을까요? (창세기32:22~31; 창 49:29~33절)
(A)~야곱은 그 어머니 리브가의 교사(狡詐)를 받아, 그 아버지 이삭의 눈을 속이고 형에서가 받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창27장). 그 전에는 팥 죽 한 그릇으로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빼앗고 이번에는 그이 받을 축복까지 가로채였으니, 그 가정에는 분란(紛亂)이 일게 되였고, 야곱에게는 양심(良心)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얍복 나루에서 씨름) 어언 수십 년의 세월을 객지(客地)에서의 생활을 보내던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돌라가는 길을 떠났다. 돌이켜 보건대 수 10년 전에 가정의 분규로 부득불(不得不) 그 자모(子母)의 슬하(膝下)를 떠날 때에는,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지팡이만 가지고(창 33:10) 훌쩍 요단을 건넜으나, 주님의 축복하심으로 목축(牧畜)의 치부(致富)하였고, 자손의 번영(繁榮)으로 도라 가게 되었다. 도중에 얍복 나루에 이르렀을 때, 야곱은 양심이 발작으로, 지나간 날에 형에서를 속이고 그의 축복을 가로챈 일이 떠오르며, 불안(不安)하고 두려웠다. 당시 얍복 나루 건너에는 에서가 거주(居住)하고 있었다. 이처럼 죄악(罪惡)이란 언제든지 그 양심(良心)에 기억 되여 있는 것이다. 이에 야곱은 오직 구원(救援)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매여 달려, 축복하시기까지 결사적(決死的)으로 씨름하듯 기도하였다. 이는 성경 중에 우리에게 모범적 기도의 일례인 것이다
(02월09일) (목) <애굽에서의 모세>
(Q)~모세는 애굽의 영광(榮光)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모세에게 영적지도자(靈的指導者)로 만들었던 배경(背景)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교훈(敎訓)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어떤 믿음의 선택(選擇)과 결심(決心)이 필요(必要)한가요? ( 히브리서 11:24~29; 사도행전 7:22)
(A)~모세는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정해놓은 고귀(高貴)한 운명(運命)을 확신했기 때문에 현재의 명예(名譽), 지위(地位), 권력(權力)을 거절(拒絶)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런 것을 희구(希求)하는 것보다 더 헛된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히브리 백성들은 지상(地上)의 가장 강력한 나라에 비참(悲慘)한 노예생활(奴隸生活)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約束)들에 대한 믿음만이 그로 하여금 애굽의 보좌(寶座)를 거절(拒絶)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 11:24~29, 재림교주석)
말미부록(末尾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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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늘에 보물(寶物)을 쌓으라.
(2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6분)
<기억절(記憶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막 8:36, 37).
<서언(緖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표(目標)와 선택(選擇)을 어떤 방향(方向)으로 향(向)하는지에 대한 핵심(核心)은 거의 재물(財物)과 연결(連結)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마태복음 6:21절) “네 보물(寶物)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더 쉽게 표현 하자면 너희가 목표로 해서 돈과 재물(財物)을 벌고자 (축적(蓄積))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너희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使用)할 것이냐라는 질문(質問)입니다. 즉 우리의 시간(時間)이나 재물(財物)이나 기도(祈禱)를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위해 바치는 것이야 말로 하늘 창고(倉庫)에 쌓아 둔다는 말씀으로 성공(成功)한 사람과 실패(失敗)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교훈(敎訓)하도록 (제5과 하늘에 보물(寶物)을 쌓으라)에서 공부(工夫)하는 것입니다.
(02월05일) (일) <은혜(恩惠)를 입은 노아>
(Q)~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적이고 과감한 순종의 선택을 한 노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을 삼아 종말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창세기 6:5~14)
(A)~노아의 시대(時代)는 지금과 같지 않고 악(惡)한 사람들로만 가득했을까? 그리고 단 한 사람 노아만이 착한 사람이었을까? 당시(當時)에도 인간의 기준(基準)에 착하고 의로운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計劃)이 항상 악(惡)할 뿐인 존재(存在)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윤리(倫理)나 도덕(道德)의 기준(基準)으로 판단(判斷)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宣)하신 뜻에 어긋나 있는 것을 죄로, 악(惡)으로 여기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존재(存在)의 문제이다.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인간 그들이 곧 죄인(罪人)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人間)이 윤리(倫理)와 도덕적(道德的) 기준(基準)에 비추어 완벽한 삶을 살아도 그는 죄인(罪人)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墮落) 이후로 모든 인간의 시대는 곧 노아의 시대인 것이다.
(창6:8)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恩惠)를 입었더라. 이 말에는 진노(震怒)의 한복판에 자비(慈悲)가 보인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보존(保存)과 회복(回復)을 보증(保證)했다. “은혜(恩惠)”라는 단어(單語)가 성경에서 첫 번째로 여기에 나타나며, 신약(新約)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는데, 자격(資格) 없는 죄인들을 향(向)해 베푸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늘의 보화(寶貨)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인생길에서 큰 전환(轉換)을 경험하게 하신다. 당신의 인생에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면, 당신도 그런 전환점(轉換點)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오늘 아니 지금 전환점(轉換點)에서 매일 매 순간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하며 다가올 재림(再臨)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노아처럼 옳은 선택(選擇)을 하라.
노아는…은혜(恩惠)를 입었더라.
심지어(甚至於) 타락(墮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여러 가지 요인들을 통해 관찰(觀察)할 수 있다. 그분은 여자의 후손(後孫)에 대한 약속에서 자비의 복음을 그들에게 주었고, 복음을 전하고 죄 된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경건한 사람들을 일으키고 그 자리를 계승(繼承)토록 함으로써 자비(慈悲)의 봉사(奉仕)를, 그들을 설득(說得)하고 호소(呼訴)하기 위해 자비의 정신을, 그들에게 유예기간(猶豫期間)을 할당해 줌으로써 자비의 섭리(攝理)를, 추가적(追加的)인 자비의 허락으로서 120 년간의 유예기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멸망(滅亡)당할 때 의인(義人)을 구원(救援)함으로써 자비의 한 실례(實例)를 보여 주었다.
이런 은혜(恩惠)와 자비(慈悲)에 대한 고대(古代)의 예증(例證)은 그리스도가 친히 노아의 시대에 비유(譬喩)했던, 마지막 때에 사는 신자(信者)를 위한 보증(保證)과 소망(所望)의 원천(源泉)이다(참조 마 24:37~39). 그분의 충성스런 추종자(追從者)들은 하나님이 노아를 받으신 것처럼 자기들을 받으실 것이요, 오늘날의 죄악(罪惡) 가운데서도 자기들을 노아처럼 보존(保存)해 주리라는 보증(保證), 그리고 오는 심판대(審判臺) 앞에서 자기들의 안전(安全)을 제공(提供)해 줄 확신 속에 쉼을 누릴 수 있다.
(창6:9) 노아는 의인(義人)이요.
새로운 부제(副題)가 노아의 역사(歷史)와 홍수(洪水)의 역사(歷史)를 소개(紹介)해 준다. 저자(著者)는 먼저, 왜 노아가 하나님의 목전(目前)에서 은혜를 얻었으며, 다가오는 멸망(滅亡) 가운데서 구원(救援) 받았는지를 제시(提示)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변덕스런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조화(調和)되는 생애로 인한 것이었다. 노아는 세 가지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각각의 표현은 그를 당대(當代)의 사람들과 대조(對照)하여 자신을 매우 호감(好感)스러운 빛 안에 두었다.
그는 (첫째) “의인(義人)”이었다. “의로운”이란 말은 흠 없는 무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고 정직하고 덕(德)이 있음을 뜻한다. 그는 단순히 “의롭다”고 불린 것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라고 불렸음은 주목(注目)할만 하다. 노아 시대에 모본이 되는 삶을 살려면 악(惡)한 유혹(誘惑)과 교묘(巧妙)한 시험들, 그리고 비열(卑劣)한 조롱(嘲弄)을 대항(對抗)해 두려움 없이 굳건하게 설 수 있는 용기(勇氣)가 필요했다. 그는 판단력(判斷力)이나 의지력(意志力)이 결여(缺如)된 약골(弱骨)이 아니라, 확신이 강하고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사람”이었다.(창 6:9, 재림교주석)
당세(當世)에 완전한 자라.
노아를 가리키는 (두 번째) 특징은 “그의 세대 중에서 흠이 없”는 것이었다(개정표준역(RSV). 이것은 그가 무죄한 상태에서 살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도덕적으로 결백(潔白)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노아의 경건한 생애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죄의 악영향(惡影響)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신앙을 유지했음을 나타낸다. 확실히 그는 순수한 혈통에 속하였으며, 바로 이 점에서 동시대 사람들과 구분되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경건(敬虔)한 자들과 불경건(不敬虔)한 자들 사이의 혼합결혼(混合結婚)에 의해 생긴 자손(子孫)들이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同行)하였으며.
(세 번째)로 노아의 생애는 그가 출생하기 불과 69년 전에 영원한 영광 속으로 승천한 그의 경건한 조상 에녹(참조 창 5:22, 24)의 생애를 닮았다. 그가 어렸을 때, 에녹의 승천이 나이 든 세대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생생할 그 시절에, 노아는 그 경건한 사람의 생애에 관해 틀림없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가 이렇게 묘사되었다는 사실이 그 자신의 노력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었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참조 히 11:7).(창 6:9, 재림교주석)
(02월06일) (월) <믿는 자(者)들의 아버지 아브람>
(Q)~아브라함의 의심(疑心)없는 순종의 믿음의 삶 속에서 믿는 자의 아버지 아브람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창세기 12:1~3)(히 11:8)
(A)~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믿음은 삼중 포기(抛棄)(본토, 친척, 집)에 대한 하나님의 삼중언약(三重言約)(땅, 후손(後孫), 복(福))이 계시(啓示)되어 있다.
즉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相關)말고 떠나라” 기독교 역사는 떠남과 분리(分離)의 역사(歷史)이다. 본 성경절의 아브람의 경우가 그렇고,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야 했던 롯의 경우(창19:17)도 노예와 속박(束縛)의 당시 애굽을 떠나간 이스라엘의 경우(출12:40~41)도 그러했다. 지금 우리도 마침내 최후의 심판으로 멸망당할 죄악(罪惡)된 이 세상에서 분리(分離)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영적(靈的) 순례(巡禮)의 길을 떠나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 성도(聖徒)가 그렇다. (히11:13~16)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고향(故鄕)과 친척(親戚)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증거(證據)가 없는 상황(狀況) 속에서도 가족과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참된 믿음을 나타내 보였다. 그것은 분명(分明) 쉬운 결정(決定)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세상의 육신(肉身)의 정욕(情慾)과 이생의 자랑과 쾌락(快樂)과 편안함을 포기해야 했다. 성도(聖徒)들의 신앙(信仰)의 결정을 매일 매순간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바른 판단(判斷)과 떠남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것은 믿음의 안경(眼鏡)이지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13:14) 실망한 아브람에게 사방팔방(四方八方)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적(絶望的)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십니다. 그 통로(通路)와 안경이 바로 믿음입니다. (창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횡(縱橫)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믿음의 안경을 꼈다면 종횡(縱橫)으로 다녀야 겠지요. 밟지 않으면 자신의 땅이 되지 않습니다. 복(福)의 시작(始作)은 믿음의 안경을 끼는 것이라면 복의 완성(完成)은 믿음으로 땅을 밟는 것입니다. 믿음은 공상(空想)이 아니라 행(幸)함이요 실천(實踐)이며 모험(冒險)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모험해봅시다.
(02월07일) (화) <롯의 잘못된 선택(選擇)>
(Q)~믿음의 조상(祖上)이라 할 만큼 믿음이 출중(出衆)한 아브라함의 가까이에서도 교훈(敎訓)을 배우지 못한 롯의 선택(選擇)과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창세기 13:10~12절, 창세기 18:20~33절, 마가 8:36)
(A)~롯의 선택(選擇)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選擇)이었고, 성급(性急)한 결단(決斷)이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躊躇)함도 없이 선뜻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審判)으로 멸망(滅亡)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9절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가 중요합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自己中心)으로 생각하며 일을 전개(展開)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예민(銳敏)합니다. 손해(損害)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면 손해(損害)도 볼 줄 알고 포기(抛棄)할 줄도 아는 여유(餘裕)와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었던 롯은 이러한 갈등(葛藤)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이해관계(利害關係)에 예민(銳敏)했고 물질(物質)과 눈에 보이는 세상 적인 행복을 추구(追求)했습니다.
①.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눈의 기능(機能)은 다양(多樣)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한적(制限的)입니다. 전부(全部)를 다 보지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配偶者)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決定)한다면 그 선택은 위험(危險)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롯은 조건(條件)을 선택했습니다.
(창13:10)(하) "온 땅에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東山)이었던 에덴동산과 같았고, 애굽 땅처럼 비옥(肥沃)했다"고 했습니다.
롯의 비극(悲劇)은 아브람을 떠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택(擇)했기 때문에 롯은 아브람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람은 축복(祝福)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지만,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었으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복의 근원(根源)이신 하나님을 (예수님을)떠나는 삶은 롯과 같은 결과(結果)를 자신이 선택한 결과(結果)라는 것을 잊지 말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자(富者)로 들어갔다가 빈털터리로 나온 롯
롯은 아름답고 큰 소득(所得)이 보장(保障)된 땅을 선택하였지만 그 선택의 결과로 그는 부자(富者)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나왔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위치(位置)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差異)를 말해준다. 즉 올바른 감화(感化)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에다 자신의 위치(位置)를 정(定)하느냐 아니면 현세적(現世的) 이득(利得)만을 택하느냐의 차이(差異)인 것이다. 소돔으로 가는 길은 많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을 식별(識別)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다 눈에 기름을 바를 필요가 있다(편지 109, 1899).
롯은 자신의 실수(失手)를 깨달았음
소돔에서 얻게 될 이득(利得)을 세속적 관점(世俗的觀點)에서 보았기 때문에 롯은 그의 가정(家庭)을 위해서 소돔 성(城)을 택(擇)하였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재물(財物)을 좀 모으고 난 다음에 롯이 절실히 깨달은 것은 그가 가정을 꾸려야 될 그 지역 사회의 도덕적(道德的) 수준(水準)을 전혀 고려(考慮)하지 않은 큰 실수(失手)를 범했다는 사실이었다(리뷰 1882. 11. 14). (창 13:10~12, 화잇주석)
그 장막(帳幕)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롯이 요단 골짜기의 도시(都市)들이 근접(近接)한 이웃에 자리 잡기를 바라고, 그들의 부(富)를 나누어 갖기를 희망한 것은 일평생(一平生) 방랑자(放浪者)로 남은 그의 숙부(叔父)와 뚜렷이 대조(對照)되었다(참조 히 11:9). 롯의 경험은 영원(永遠)한 행복 대신 세상의 친구들과, 일시적(一時的)인 이득(利得)을 선택(選擇)할 유혹(誘惑)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훈(敎訓)이다. 우선 그는 “보았고” 그 후에 “선택하였다.” 그는 사해 북쪽의 요단 골짜기를 떠나서 소돔 쪽으로 장막(帳幕)을 옮겨 쳤다(참조 14:12; 19:1). 그는 의(義)로웠을지 모르지만, 그의 운명적(運命的) 결정(決定)은 그가 소중(所重)하게 간직했던 모든 것의 상실(喪失)을 의미(意味)했다(부조와 선지자, 168). (창 13:10~12, 재림교주석)
(창13:10) 눈을 들어 … 바라본즉. 단순히 좌우를 둘러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저것 세속적(世俗的)인 여러 조건(條件)을 따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롯은 탐욕(貪慾)에 찬 눈과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하였을 것이다. (창 13:10, 만나주석)
(02월08일) (수) <속이는 자(者)에서 성공(成功)한 자(者)로>
(Q)~속이는 자 야곱에서 성공한 자 이스라엘로 변화(變化)된 야곱의 교훈(敎訓)에서 야곱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관한 어떤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얻을 수 있을까요? (창세기32:22~31; 창 49:29~33절)
(A)~야곱은 그 어머니 리브가의 교사(狡詐)를 받아, 그 아버지 이삭의 눈을 속이고 형에서가 받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창27장). 그 전에는 팥 죽 한 그릇으로 장자(長子)의 명분(名分)을 빼앗고 이번에는 그이 받을 축복까지 가로채였으니, 그 가정에는 분란(紛亂)이 일게 되였고, 야곱에게는 양심(良心)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얍복 나루에서 씨름) 어언 수십 년의 세월을 객지(客地)에서의 생활을 보내던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돌라가는 길을 떠났다. 돌이켜 보건대 수 10년 전에 가정의 분규로 부득불(不得不) 그 자모(子母)의 슬하(膝下)를 떠날 때에는,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지팡이만 가지고(창 33:10) 훌쩍 요단을 건넜으나, 주님의 축복하심으로 목축(牧畜)의 치부(致富)하였고, 자손의 번영(繁榮)으로 도라 가게 되었다. 도중에 얍복 나루에 이르렀을 때, 야곱은 양심이 발작으로, 지나간 날에 형에서를 속이고 그의 축복을 가로챈 일이 떠오르며, 불안(不安)하고 두려웠다. 당시 얍복 나루 건너에는 에서가 거주(居住)하고 있었다. 이처럼 죄악(罪惡)이란 언제든지 그 양심(良心)에 기억 되여 있는 것이다. 이에 야곱은 오직 구원(救援)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매여 달려, 축복하시기까지 결사적(決死的)으로 씨름하듯 기도하였다. 이는 성경 중에 우리에게 모범적 기도의 일례인 것이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 애서를 속이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 외삼촌(外三寸)의 집에서 고된 노역자(勞役者)가 되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인해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 긴자(이스라엘)로 부유(富裕)한 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으니, 즉 도적(盜賊) 놈(야곱)이 변(變)하여 "하나님의 태자(太子)"(이스라엘)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은혜(恩惠)를 받고 보면, 다 각각 자기만이 아는 새 이름을 까지는 것이다(계 2:17 야곱의 생애는 과연 나그네로 시작(始作)하여 나그네로 마친 것이다.
그 곳은 야수(野獸)들이 자주 나타나는 한적(閑寂)한 산악지대(山岳地帶)였고 강도(强盜)들과 살인자(殺人者)들의 은신처(隱身處)였다. 야곱은 혼자 아무 방비(防備)도 없이 비통(悲痛)한 마음으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밤중이었다. 그의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는 언제 위험(危險)과 죽음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무죄(無罪)한 사람들에게 이런 위난(危難)을 몰고 온 것은 자기 자신의 죄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진지(眞智)한 탄원(歎願)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갑자기 거센 손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원수(怨讐)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줄로 생각하고 공격자(攻擊者)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이기기 위해 서로 싸웠다. 한마디 말도없이 야곱은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싸웠으며 한 순간(瞬間)도 그의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이처럼 그가 자기의 생명을 위해 싸우는 동안 죄책감(罪責感)이 그의 영혼(靈魂)을 억눌렀으며 그의 죄가 되살아나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서운 궁지(窮地)에 빠져 있었지마는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기억하고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간청(懇請)하였다. 투쟁(鬪爭)은 거의 동틀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때 그 이상(異象)한 사람이 그의 손가락을 야곱의 환도 뼈에 대자 그가 곧 절게 되었다. 그리하여 야곱은 이제 그가 더불어 싸우는 상대자(相對者)가 누구인지를 분별(分別)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하늘의 사자(使者)와 씨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가 거의 초인간적(超人間的)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勝利)를 얻지 못한 원인이었다.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언약(言約)의 천사(天使)” 그리스도였다. 야곱은 이제 불구가 되어 격심한 고통을 느꼈으나 그가 잡고 있는 것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온전히 통회(痛悔)하고 상한 심령으로 그는 천사에게 매달렸다. 그는 축복을 탄원(歎願)하면서 “울며 그에게 간구(懇求)하였”(호 12:4)다. (부조, 196)
그는 자기의 죄가 용서(容恕)받았다는 보증(保證)을 받아야 하였다. 육체적 고통도 이러한 그의 목적을 단념(斷念)시킬 수 없었다. 그의 결심은 점점 강(强)하여지고 그의 신앙은 더욱더 열렬해져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견디었다. 천사는 그에게서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쓰며 말하기를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만일 이 말이 자만(自慢)하고 외람된 자신감에서 나왔다면 야곱은 즉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자기 자신의 무가치(無價値)함을 고백(告白)하면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信實)하심을 믿는 사람이 보여 주는 그러한 확신이었다. (부조, 196)
“얍복 강가에서 고민(苦悶)하던 밤, 멸망(滅亡)이 바로 그의 앞에 이른 것처럼 보이던 그 때에 야곱은 인간의 도움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는 모든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께 그처럼 큰 죄를 지었으나 그의 유일(唯一)한 도움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지(依支)할 곳 없고 자신의 무가치(無價値)함을 느낀 그는 회개(悔改)하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을 간청(懇請)하였다. 그 약속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겠다는 보증임을 확신하였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 수 있어도 그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를 붙들어 저 무서운 투쟁(鬪爭)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부조, 198)
야곱이 씨름하고 고민(苦悶)하던 밤에 겪은 경험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야 할 시련을 나타낸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룩한 이상 가운데 이 때를 내려다보고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그 얼굴 빛이 창백(蒼白)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患難)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求)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렘 30:5-7)고 말하였다. (부조, 201)
“ 야곱의 이야기는, 죄에 빠졌다가 참으로 회개(悔改)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내어 쫓지 않으시리라는 보증(保證)이 된다. 야곱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얻으려고 하다가 놓쳤던 그것을 얻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신뢰(信賴)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서였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恩惠)와 능력만이 그가 갈망(渴望)하던 축복을 그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종에게 가르치셨다. 말세(末世)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위험(危險)이 그들을 둘러싸고 절망(絶望)이 영혼(靈魂)을 억압(抑壓)할 때에 그들은 오직 속죄(贖罪)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력(無力)하고 무가치(無價値)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復活)하신 구주(救主)의 공로(功勞)를 의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멸망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흉악(凶惡)한 범죄의 긴 목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다. 그 기록은 완전하여 우리의 죄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다. 그러나 옛날 당신의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容恕)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그렇게 약속(約束)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성취(成就)하실 것이다. ”(부조, 202-203)
“야곱은 인내심(忍耐心)을 가지고 단호하게 섰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그의 경험은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증거(證據)한다. 우리가 끈질긴 기도(祈禱)와 불굴(不屈)의 신앙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에게 이르러 오는 가장 위대(偉大)한 승리들은 그들의 재능이나, 교육이나, 재물이 인간의 어떤 호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열렬하고 필사적(必死的)인 믿음으로 전능하신 능력의 팔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도의 밀실에서 얻어지는 승리들이다.”(부조, 203)
“모든 죄를 버리고 열렬(熱烈)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구(求)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붙잡고 그가 했던 것처럼 열렬하고 참을성 있게 매달리는 사람들은 야곱이 성공한 것처럼 모두 성공할 것이다.”(부조, 203)
(02월09일) (목) <애굽에서의 모세>
(Q)~모세는 애굽의 영광(榮光)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모세에게 영적지도자(靈的指導者)로 만들었던 배경(背景)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교훈(敎訓)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어떤 믿음의 선택(選擇)과 결심(決心)이 필요(必要)한가요? ( 히브리서 11:24~29; 사도행전 7:22)
(A)~모세는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정해놓은 고귀(高貴)한 운명(運命)을 확신했기 때문에 현재의 명예(名譽), 지위(地位), 권력(權力)을 거절(拒絶)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런 것을 희구(希求)하는 것보다 더 헛된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히브리 백성들은 지상(地上)의 가장 강력한 나라에 비참(悲慘)한 노예생활(奴隸生活)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約束)들에 대한 믿음만이 그로 하여금 애굽의 보좌(寶座)를 거절(拒絶)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 11:24~29, 재림교주석)
“요게벳의 아들은 고센의 가난한 가정을 떠나 바로의 궁전으로 가서 애굽 왕녀(王女)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었다. 모세는 애굽의 학교에서 최고의 문무(文武)훈련을 받았다. 그의 훌륭한 용모(容貌)와 체격(體格), 매력적(魅力的)인 인품(人品), 지성적(知性的)인 교양(敎養)과 귀공자(貴公子)다운 태도, 무관(武官)으로서의 명망(名望), 이런 것들로 그는 애굽의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애굽의 왕은 제사장(祭司長)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비록 이교의 신(神)에게 예배(禮拜)하는 것을 거부(拒否)하고는 있었지만 애굽 종교의 모든 비법(秘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의 애굽은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세력 있고 발달된 문명국(文明國)이었으므로, 모세는 그 나라의 미래(未來)의 군주(君主)로서 이 세상 최고의 영예(榮譽)를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보다 더 고귀(高貴)한 것을 선택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그리고 유린(蹂躪)당하고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 애굽의 영예(榮譽)를 포기(抛棄)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점에서 모세의 교육을 담당(擔當)하셨던 것이다.”(교육, 61)
“당시의 애굽은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세력(勢力) 있고 발달된 문명국(文明國)이었으므로, 모세는 그 나라의 미래(未來)의 군주(君主)로서 이 세상 최고의 영예(榮譽)를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보다 더 고귀(高貴)한 것을 선택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그리고 유린(蹂躪)당하고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 애굽의 영예(榮譽)를 포기(抛棄)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점에서 모세의 교육을 담당하셨던 것이다.…”(그리스도를 나타냄, 327)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분의 약속(約束)을 믿고 붙잡고 볼 수 있는 확신(確信)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向)해 세상 것들의 부귀영화(富貴榮華)등에 미련을 갖지 않고 포기(抛棄)하는 믿음의 삶으로 실천(實踐)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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