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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예수님의 승리 – 사탄의 패배(질문, 대답, 설명)0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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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3-24 07:57 조회6,0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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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예수님의 승리 – 사탄의 패배

(4월 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4분)

 

연구 범위: 계 12, 엡 5:25-27, 32, 빌 3:9, 단 7:25, 사 14:12-14, 계 13:14-17

 

기억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12:17)

 

“수적 열세”(코맥 오브라이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터의 역전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라는 책은 수적으로 심각하게 열세였음에도 여전히 승리했던 전쟁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카르타고에서 온 55,000명의 한니발의 군대가 "무적"인 80,000명의 강력한 로마군을 물리친 이야기, 또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군대가 페르시아 제국을 넘어뜨린 놀라운 이야기 말이다. 

 우리도 교활한 적과 생사를 건 싸움 가운데에 있다. 아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엄청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악의 세력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전쟁은 대패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패배가 확정적인 것 같다. 승리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압도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수적으로 열세이고,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며, 사탄의 공격은 악랄하기 그지없지만, 예수님을 통해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예수님이 분명히 승리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다. 이번 주 우리 연구의 초점인 요한계시록 12장은 이 전투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이 연구는 요한계시록 14장과 세 천사의 기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예수님은 사탄이 도발한 선과 악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 느끼기: 우리의 싸움은 이 땅이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싸움임을 깨닫는다. 

- 행하기 예수님의 편을 선택함으로 믿음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로 결심한다. 

 

TMI 위로

2. 선악의 대쟁투와 자유의지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눅 11:23)

※ 선택에 관한 연관이 있다. 

3. 사탄은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싸움을 이기려고 하였습니까?(계12:4)  

※ 아기가 출생하면 삼키려 했다.

4.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선악의 대쟁투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계 12:10-11) 

※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기게 한다.

5. 계 12:6의 말씀은 광야 같은 시기를 지나는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 1260년 간 진리가 핍박당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6. 이 땅 최후의 전쟁은 무엇을 쟁점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입니까?(계 12:17)

※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결론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이 이 땅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 전쟁은 사랑과 충성을 받으실 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사탄은 예수님과 믿는 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셨고 우리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을 강요치 않으시며 우리가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사랑과 승리의 편인 예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3월 26일(일) 하늘에서의 전쟁

 

요한계시록 12장은 하늘에서 시작되어서 여기 이 땅에서 마쳐질 오랜 시대에 걸친 선과 악의 쟁투의 간략한 묘사인 극적인 이야기와 장면들을 공개한다. 이 이야기는 하늘에서 사탄의 반란이 일어난 첫 장면부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악랄한 공격에 이르는 그 시간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선과 악의 우주적 갈등을 묘사한 요한계시록 12:7~9절을 읽어 보라.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늘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 구절들은 자유의지, 자유 선택이라는 실체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계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답: 사탄은 피조물이다. 그가 피조물이기를 거절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 정부의 기본 원칙이다. 하늘에서건 땅에서건 하나님께서는 로봇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은 결코 강요되거나 강압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것인지 아니면 이기심, 오만함, 교만함으로 외면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다. 하늘의 천사들이 사랑에 대한 영원한 선택에 직면했던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우리 각자에게 지상의 마지막 쟁투에서의 영원한 선택을 제시한다. 

대쟁투에는 중립 지대가 없으며(눅 11:23 참조) 지상의 마지막 전쟁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하늘의 천사가 예수님의 편과 루시퍼의 편 사이에서 선택했듯이 모든 인류 개개인은 마지막 때에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누가 우리의 충성과 예배와 순종을 받을 것인가? 이것은 항상 인류의 쟁점이었으며, 지구 역사의 마지막 위기에서는 더욱 극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소식이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우리 각자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이기는 편, 승리자이신 그분의 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편이 승리할지 미리 알고 있는 전투에서 우리가 한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묵상>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는 것이 십자가라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적용> 십자가의 고귀한 희생은 우리가 이 신성하지만 값비싼 선물(자유의지)을 얼마나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답: 생명을 택하라는 사랑의 권고이다. 

 

<부가설명>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죄의 시작과 죄의 최종적인 처분, 악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 하나님의 정부에는 반역을 일으킬 조건이 될 만한 아무런 결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강제적으로 거두어 버린 일이 없다는 것 등이다. 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쟁투 492.2). 성경은 죄가 들어온 경위를 계시하였고 그것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계시하였다. 우리는 이미 사망이 되어버린 죄의 존재들이다. 죄의 원인을 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신 방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창조주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교훈> 하늘에서 시작된 선과 악의 전쟁은 이 땅에서 마쳐진다. 하나님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며 우리는 자유 의지로 승리하신 예수를 선택할 수 있다. 

 

3월 27일(월) 사탄의 공격

 

사탄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참조 계 12:4, 5). 그러나 지금까지 사탄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실례로,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의 사악한 계획에 대해 천사로부터 경고를 들었고 그들은 이집트(애굽)로 도피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가장 유혹적인 시험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맞서셨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호하심을 찾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당신의 사랑의 광대함을 나타내셨고 우리를 정죄의 형벌에서 건져내셨다. 예수의 부활하심을 통해, 그는 우리의 살아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다.

 

요한계시록 12:4~6, 9, 에베소서 5:25~27, 32, 시편 2:7~9,를 읽고 다음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라. 

 

용= 사탄, 마귀(계12:9).

여자= 진리교회(엡5:25~27,32).

아이= 예수 그리스도(계12:4~6).

철장= 통치권, 왕권(시2:7~9).

 

성경에서, 지팡이는 지배권이나 통치권의 상징이다. 철장은 전능하고, 깨지지 않는, 무적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혹에 직면하셨지만 정복자로서 승리하셨다. 마귀는 이미 패배한 대적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에서 마귀를 이기셨다. 예수님께서 이미 갈바리 십자가에서 마귀를 이기셨기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죄의 빚은 탕감되고 우리의 죄는 용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이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선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고 기록했다. 우리가 용서받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참소 받을 것이 없다. 예수님은 죄악이 그분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영원히 정복하고 승리하셨다. 그는 악을 전면 공격했고 그것을 끝내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그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교훈> 사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격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과 부활로 승리하셨다. 예수님의 승리를 믿음으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묵상> 사탄의 도발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그것으로 인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답: 그것이 우리 믿음의 기초이고 결과이기 때문이다.

 

<적용> 빌립보서 3:9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바울의 고백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답: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진정한 그리스도 인은 거듭난 사람이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다(고후5:17). 이런 사람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서 본질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세상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망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거듭나서 본질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형상을 훼손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은 진흙탕 속에 있으면서 몸에, 옷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 사는 것만큼 어렵다. 아무리 조심해도 흙이 튀어 옷이나 몸에 묻는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활하실 동안 이런 진흙이 한 점도 묻지 않고 사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이 현상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 우리가 사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런 진흙탕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때가 예수님 재림하시고 첫째 부활에 참여할 때다. 그때까지 우리는 진흙탕에 살면서 매일 매순간 주님의 씻기시는 손길에 씻으며 살아야 한다(요13:8). 아직은 우리가 세상에서 숨쉬고 활동하는 동안은 이 씻김을 한 순간이라도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의를 확보한 사람들이다. 

 

3월 28일(화) 예수님의 승리를 받아들임

 

성경에 묘사된 것처럼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투에서 진 적이 없다. 예수님은 능력의 정복자이시며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자이다. 우리는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라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을 읽어보라. 그대를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사실에서 어떤 격려를 발견할 수 있는가?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답: 그는 더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이길 수 없는 패배자라는 것이 확인 됐다. 

 

비록 그 전투는 여전히 지상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사탄은 패배했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절정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에서 악의 정사와 권세에 대한 우리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좌절된 패배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어떤 태도나 습관에 대한 승리를 바라지만, 그들의 개인생활에서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실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읽어보라.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확신을 주시는가?

[계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답: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로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준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요한계시록의 기별 속에서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2:11에도 이 개념이 다시 사용되는 것을 본다. 본문의 "이기었으니"라는 단어의 원어는 nikao 이다. 그것은 문자적으로 "정복하다, 이기다, 승리하다, 또는 승리를 거두다"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지 주목하라. 요한계시록 12:11은 그것이 “어린양의 피“로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요한계시록 5:6의 예언적 계시에서 요한은 하늘을 보면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온 하늘이 주목하는 초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데 십자가보다 더 숭고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빚은 사라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게 서게 된다.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고(엡 1:7, 골 1:14, 골 2:14) “우리 형제를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구속받고, 승리하고, 구원받는다.

 

<교훈> 예수님의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승리의 편에 설 수 있다. 개인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묵상> 예수님이 승리하셨음에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하고 패배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까? 

 

답: 각각 대답하자. 그렇게 사로잡힐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기신 것을 기억하고 주님께 굴복하면 된다. 이것이 성도들의 증언하는 말씀이다. 

 

<적용> 여전히 시험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고 그편에 굳게 서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답: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기도와 말씀으로 가능하다.

 

<부가설명> 꽤 많은 재림성도들이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죄와 싸우느라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 죄는 호흡마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가? 그러니 순간순간 그것과 싸우려고 용을 쓰니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올 틈은 언제인가? 히12:4을 인용하면서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을 탄식한다.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갸륵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기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미 이기셨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마다 끝에 ‘이기는 자는’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각 시대 교회에 이기는 자가 있다는 보증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들은 다 ‘어린양의 피와 자신의 증언’으로 이긴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이기신 것이 곧 내가 이긴 것이 된다.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성도들은 그분 안에 있어야 한다. 사탄은 성도들을 여기서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기를 맡긴 사람들은 이긴 자로서 쫓겨난 사탄을 바라보는 눈길에 이긴 자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눈빛이 빛날 것이다. 

 

3월 29일(수) 광야의 여자

 

요한계시록 12:6을 읽고 계시록 12:14~16과 비교하라. 이 구절들에 기록된 기간, "여자"(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탄의 공격,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이 구절들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계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14~16]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답: 1260일 곧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진리를 핍박하는 것에 관하여 예언했고 하나님께서 피란처를 준비하신 사실을 계시했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의 1,260일은 계시록 12장 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같은 기간을 의미한다. 이 기간을 설명하는 같은 시간에 대한 예언이 다니엘 7:25, 요한계시록 11:2, 3, 또 13:5에도 있다. 이것들은 예언적 상징이기 때문에(문자 그대로 여자가 광야로 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언적 시간, 년-일 원칙(민 14:34, 겔 4:4-6 참조)을 이 계시들에 적용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예언상의 하루가 1년과 같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2절에 기록된 이 기간에 대해 앤드류스 주해성경(Andrews Study Bible)은 “그러므로 역사주의적 해석자들은 일반적으로 1260일의 예언적 기간을 AD 538-1798(계시록 11:2에 대한 주해, p1673) 사이의 문자적인 1260년으로 이해한다”라고 기술한다. 이 기간 동안 부패한 교회는 부패한 정부와 함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을 압제하고 박해하고 심지어 학살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 맹렬하고 사악한 박해는 선과 악 사이의 대쟁투의 연장선이었다.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려던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사제와 성직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다시 한번 진리가 승리했고 하나님은 강력한 반대 앞에서도 그분께 충실한 한 백성을 갖게 되었다.

이 구절들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더할나위 없이 고무적이고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이 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계 12:6)인 광야에서 여자가 “양육 받”았고(계 12:14), “땅이 여자를 도”왔다(계 12:16). 극심한 박해의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인도하신 것이다. 과거에 그렇게 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 남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행하실 것이다.

 

<교훈> 예언 속, 광야같은 시기를 지날 때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충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나의 삶에도 동일하게 주어진 약속이다. 

 

<묵상> 삶 속에서 쉽게 낙담할 수 있었던 시련과 어려움의 때에 하나님께서 피난처를 마련해 주시고 시험 가운데서 양육해 주셨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답: 역사적 사건에 관한 예언을 연구하여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양육했는지 깨닫게 되고 각자 개인에게도 같은 보살핌으로 이끄심을 믿을 수 있다. 각각 생각하고 이야기해보자.

 

<적용> 광야같은 현실과 계속되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가장 필요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도움을 주실까요?

 

답: 말씀 연구와 기도와 충성하는 믿음과 인내이다. 

 

<부가설명> 재림성도는 예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예언의 지도를 받는 것과 현대진리를 따라 신앙 생활하는 것은 손등과 손바닥 같은 관계다. 예언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8,19). 예언을 깨달으면 잠자지 않고 깨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믿음의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은 파선하게 된다. 그래서 재림교회에서는 예언 연구를 권장한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을 잘 연구하고 깨닫도록 기도하며 은혜를 강구해야 한다. 그래서 때에 합당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현대 진리, 곧 현재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3월 30일(목)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남은 자

 

마귀는 그의 하늘에서의 반역 이래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계 12:7). 그 당시도 그리고 지금도 사탄의 목적은 이 우주를 점령하는 것이다(이사야 14:12~14 참조). 이 지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마귀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집중된다. 요한계시록 12:17은 용(사탄)이 여자(교회)에게 격노(분노)하여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러 갔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는 이 표현은 「흠정역」에서는 “남은 자”로도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그분의 진리에 순종하며, 그분의 사명에 충실한 자들이다.

 

요한계시록 12: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남은 자들, 그의 마지막 때 교회의 특징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답: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7에서 사탄(용)은 하나님의 교회인 여자에게 분노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에게 분노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마귀는 결국, 법령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매할 수 없게 하고 투옥되어 죽음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계시록 13:14~17 참조).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다면 대신 그는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애정의 대상인 그분의 교회를 멸하려고 할 것이다. 지구의 마지막 전쟁은 중동이나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 각지에 있는 하나님 백성의 마음에 휘몰아치고 있는 전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사탄이라는 두 반대 세력 간의 전쟁이다. 단언하건대, 이 전쟁에서 누구도 중립일 수 없다. 

이 마지막 전쟁의 핵심 질문은 “우리의 충성심은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이다. 하늘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되어 그분의 은혜로 구속을 받고 그분의 목적에 헌신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음까지 맞이할 수 있는 신자들을 부르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중대한 위기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다. 우리를 순종으로 이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 이 일이 가능하며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교훈> 이 땅의 최후의 전쟁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충성을 받으실 분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쟁투이다. 

 

<묵상> 요한계시록 12:17에 기록한 용의 도전은 실재적으로 당신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답: 각 사람이 대답해보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신앙생활에 많은 지장을 주는 것이 사회요 문화공격이다. 문화환경에 휩쓸리기 쉬운 시대이다. 

 

<부가설명> 용은 크게 분 내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을 공격한다. 계12장에 기록된 해를 옷 입은 여자는 하나님의 참 교회를 표상한다. 17절의 남은 자손은 이 교회의 성도들이다. 공격은 물리적 공격도 있고,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고 체벌을 가하는 등의 핍박이다. 또 믿음을 지키기 힘 드는 환경을 조성해서 견딜 수 없게 하는 공격도 있다. 이런 공격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문화적 공격이다. 사회 문화 분위기를 성경 진리대로 살기 힘들게 만들어서 공격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사회 문화 분위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휩쓸리는 문화환경이다. 그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소위 왕따 당하게 된다. 어디 가서 어울릴 수가 없다. 이런 공격을 성경은 용이 입으로 물을 토하여 여자가 떠내려가도록 한다고 표현했다(계12:16). 현재 재림교회에도 이 문화 강물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따에 들어갈 때에 애굽 풍속과 가나안 풍속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당부한다(레18:1~5). 남은 자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대로 신앙 생활하는 그 문화를 창성하게 해야 한다. 문화환경에서 고립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성경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남은 자의 신앙 모습이다. 

 

3월 3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신다면 그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셔야 했다. 자유롭지 않은 존재는 사랑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에 사랑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떤 곳이 되었을까? 그것은 어떤 이들이 주장한 것처럼 엄격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작동할 뿐이며 자유의지도, 선택도 없고, 물리학적인 법칙만을 따르는 아주 작은 입자들로 이룬 살과 피 덩어리에 불과한 생각 없는 기계만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아름답지도 않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중 누가 우리의 부모, 자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그저 원자 배열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원칙과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사랑의 봉사 곧 당신의 품성을 인식함으로 솟아나는 봉사를 원하신다. 그분은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신다.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충성을 인정하는 동안 하나님의 우주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었다. 창조주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이 하늘 천사들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그분을 찬미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호간의 사랑도 믿을 만하였고 무아적이었다. 하늘의 조화들을 파괴할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다. (부조와 선지자, 34, 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왜 요한계시록 12장은 세 천사의 기별, 특별히 마지막 때에 다가올 쟁투를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서문인가?

※ 마지막 쟁투의 주인공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매일 직면하는 유혹과 시험 속에서 요한계시록 12장은 여러분 개인의 삶에 어떤 격려가 되는가? 

※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가 남은 자들임을 확인하기 때문에 격려가 된다.

3. 우리의 행동이 유전과 환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이 생각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의 선택과 우리 삶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사이의 관계에 대해 토의해 보시오.

※ 환경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화환경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마음에 성령께서 계셔서 생활을 주장하도록 하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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