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제자도의 모본(조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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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8-03-20 07:36 조회5,62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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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3과 제자도의 모본
3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2분)
도입)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은 ‘인간적인’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분’만도 아니셨다. 그분은 인간 자체이셨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사신 것은 자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려는 몸짓이 아니셨다. 그분은 정말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사랑이 풍성하셨고 온유하셨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깊은 심장을 에이는 고통에 괴로움을 당하신 분이시기도 하셨다.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분의 고통의 심연엘 들어가 보아야 한다. 거길 가본 사람은 우리가 고통에 빠질 때 우리를 한껏 이해하시고 돌봐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 곁에 서계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우리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느끼신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인해서 실족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원인이야 무엇이든 우리의 고통에 예수님은 동참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억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연구범위: 마 14:14, 15:32, 20:34, 막 1:41, 눅 6:12-13, 16:19-31, 17:4-5, 18:9-14, 골. 1:14, 딤전 5:16.
학습 포인트: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께서는 소외된 계층, 우리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어떤 모본을 남겨주셨는가? 제자 훈련을 위하여 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한 기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분께서 따르도록 택하신 사람들과, 그분의 제자 훈련, 그리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본과 교훈들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배웠다.
이번 기에 공부한 것들 중 몇 가지 주요한 부분들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의 사역에 기초를 이루어야 할 요소들 즉 그분께서 적극 강조하신 특성들과 개념들과 활동들을 재확인해 보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21세기 제자도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것이다.
일요일(3월 23일)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
도입)
[동정]이란 라틴어의 뜻은 [함께 괴로워한다]는 말이다. 문둥이의 괴로움을 자기의 고민으로 삼으시고 함께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의 동정이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의 비애를 자기의 비애로 삼음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근본이었다. 로마교에서는 [예수님의 다섯 개의 상처]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네 곳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말한다. 그러나 상처는 다섯 개 만이 아니다. 수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이렇게 인용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마 8:17,사53:4). 실상 남을 위하는 동정심은 언제든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동정심을 나타내셨다(참조 마 14:14, 15:32, 20:34, 막 1:41, 6:34, 눅 7:13).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 또는 ‘민망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는 사람의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된 상태를 가리킨다. 타락하여 딱딱해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데 하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더 깊은 아픔을 느끼셨겠는가?
1. 위에 열거된 참조 성경절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무엇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끼셨습니까?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와 같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답:
예수께서는 동정심뿐 아니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전에 문둥병자였던 시몬이 마리아를 멸시할 때 어떻게 대응하시는지를 보았다(눅 7:36-50). 예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궁극적인 용서의 모습을 보이셨다(눅 23:34).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특별한 용서를 경험했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재판받으실 때에는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동료 제자들 앞에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요 21:9-17).
2.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서, 또한 다른 이들을 제자로 삼는 자로서 얼마나 많이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까?(참조 눅 17:3-5, 엡 1:7, 4:32, 골 1:14).
답: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용서를 베푸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죄로 멸망해 가는 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냉혹한 마음은 예수님의 정신과 배치(背馳)된다.
부가적용)
성경은 도처에 예수님이 얼마나 동정과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던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분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시면 연민을 품으셨다.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은 사람. 영이 곤고하여 낙심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분은 깊은 동정심으로 가득 차셨다. 동정과 인정은 그의 모든 기적들의 참 동기 이였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그 먼지 길을 인정어린 마음으로 걸으셨던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 대하여 하나도 달라지시지 않으셨다.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거지꼴을 한 흉측한 사람이 도와달라며 다가온다. 우리 기분이 어떨까? 더러운 차림새, 추잡한 행동거지, 갈 곳 없는 떠돌이....우리 사회엔 참으로 많은 “쓰레기처럼 내 던져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때도 그랬다. 몸에선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볼품없이 찌그러진 사람들, 사람들이 피해서 지나가는 문둥병자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의 손길을 뻗치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사흘이나 굶은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오병이어로 사람들에게 식사를 배려하신 긍휼하신 주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이다. 나도 용서 받았으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용서의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자격이 된다.
월요일(3월 24일)
배척당하고 소외된 자들
도입)
마태복음 20장에는 두 소경이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가?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야, 조용히 해, 예수님은 지금 중요한 일로 바쁘시단 말이야).“ 이 무리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보통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청해오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물러 서셨다. 발을 멈추었다. 그들의 필요를 바라봐 주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눈을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마태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쓰고 있다. 예수께서는 뭉쿨 치미는 동정과 사랑에 마음이 아파 못내 안타까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분의 이 인정과 동정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고 보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가 절망 중에서 필요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요청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발을 멈춰주시는 분이시다. 당신과 내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 그분은 발길을 멈추고 기다려 서 계신 분이심을 잊지 말라. 우리도 이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저들을 무안케 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 “잠잠하라고 꾸짖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동정심을 안다면.....
예수께서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계층간의 경계선은 남자와 여자, 종교적 지도계층과 평민들, 부자와 빈자, 바리새인과 세리 등과 같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집 안에서 한정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1. 누가복음 16:19-3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계층간의 차별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답:
2. 누가복음 18:9-1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옹호하거나 동조하지 않으셨는데,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교제하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을 대변해 주셨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봉사하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분께서는 상류계층의 사람들과도 접촉하셨지만 동시에 이방인들, 평판이 나쁜 여인들, 나환자들, 세리들, 귀신들린 자들, 로마인들, 여러 종류의 장애를 가진 자들, 가난한 자들 등 그 사회에서 여러 모로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한 그분의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분께서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사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상류계층의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하고 어렵고 병든 자를 찾아다니며 전도하셨다. 예수께서 보이신 기적과 이적은 대부분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자를 먹이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회개 시키고 구원하셨다. 이 땅에서 지금 진정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소외된 사람들이라 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소외된 사람이 아니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돈이 많고 적은 것에 멈취 있지 않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저들이 한 번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저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부자요 돈이 많다고 해서 저들에게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피선교지에도 돈 있고 능력 있고 힘은 있지만 복음을 소개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한 이들, 지금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 더 소외당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눈길과 마음이 가지 않은 곳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부자들도 어쩌면 이 시대의 소외당한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소외된 자들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복음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하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곳이 진정으로 소외된 장소요 복음을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 바로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복음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함께 나누어져야 할 축복이기 때문이다.
화요일(3월 25일)
다양성과 차별의 정신
도입)
편견과 차별은 비겁한 사람의 무기이다. 겉만 보고 편견을 가지고 남을 차별하는 사람에게 있는 특징 한 가지는 상대방이 외적으로 그럴듯하면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는 높아지는 마음이 편벽된 사람의 마음이다. 편벽한 사람은 남을 무시도 잘하지만 남 앞에서 기도 잘 죽는다. 편견의 뿌리는 교만이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성별, 인종, 직업, 출신지 등을 언급하며 남을 낮추고 나를 낫게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편견이고, 자기 인격이 더 못됐으면서 남의 인격을 못됐다고 하는 것이 편견이다. 편견은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하기에 진리를 가장 왜곡할 수 있다. 편견은 가장 가벼운 죄처럼 보이는 가장 무거운 죄이고, 인간영혼이 제거해야 할 제일 대상이다. 편견의 벽을 무너뜨릴 때 불행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 기별로 주님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고 폄하한 저들의 편견이 주님을 차별하고 있었다. 또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출신지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 우리도 어느 특정 지역의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차별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출신으로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그 못 박힌 손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장애인이 되신 것은 “편견을 버리고 차별하지 말라!”는 우리들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이시다. 우리는 예수께서 억압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셨는지를 기억해 보아야 한다. 특히 민족적 혹은 인종적 다양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보자. 인종적 편견과 차별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들 주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문헌들에서 이러한 편견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헬라인들은 비헬라인들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 신앙의 깊이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버려야 한다.
1. 출애굽기 12:38, 18:1, 민수기 12:1, 룻 1:16-17, 마 23:1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을 구성한 인종의 다양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답:
이스라엘은 민족 형성 초기로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진화론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행 17:26), 우리는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부색, 국적, 인종, 종족, 종교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12).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즉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인종적 혹은 민족적 우월성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더욱이 특정 집단에 대한 모든 편견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은 모든 문화와 사회마다 내재하는 인종적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결국 세상에는 구원받은 사람과 잃어버린바 된 사람 이렇게 두 부류만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소개해 주어야 한다.
교훈: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부가적용)
인류의 구성원인 인간은 누구든지, 국적, 성별, 인종, 언어, 종교, 학식, 재산, 장애유무의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 충분하고도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속이나 생활습관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야만(野蠻)이라고 부른다. 이 야만이라는 말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조상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희랍의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야만이라는 말의 상대성을 지적하면서 “무례한 희랍인보다 정직인 야만인(이방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중국 사람들은 중화사상에 젖어 있고 유대인이나 독일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만을 인간이라 불렀고, 낯선 이방인(異邦人)들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민족 중심적인 사상을 종족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부류(部類)만을 높이 평가하려는 나르시즘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의 적개심(敵愾心, hostility)라는 말은 희랍어 손님(客, hostis,)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낯선 사람과 손님이라는 말은 한 때 적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으로 씌어졌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비로소 사람답게 살며 전인류가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괴테(J. V. Goethe)의 명언도 우리가 항상 유념하고 살아야 하겠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인류를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에 가게 되면 다른 인종과 피부를 가진 존재로 존재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등하되 다르다"(equal-though-different)는 원칙이 천국 생활의 또 한 면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체성(identity)이 그대로 유지되고 "평등하되 서로 다르다"는 원칙이 천국에 지속된다면, 인종적 정체성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인종적 특징은 성별(性別) 못지않게 어떤 사람의 고유함을 이루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인종적, 민족적, 부족적 정체성이 다 제거된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계 5:9)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겠는가? 요한계시록 5장 9절은 천국에서도 그러한 구별이 계속 유지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평등하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남을 멸시하거나 깔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종적인 모든 편견을 버리고 살아야 할 것이다.
수요일(3월 26일)
교회
도입)
그리스도교의 전도란 나의 주장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나의 덕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그래서 나의 당, 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전도란 내게 죄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내 구주를 세상에 소개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무리로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전도와 그리스도교의 전도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전도에 종사할 수 있다. 전도는 설교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다. 전도는 내 마음에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발표하는 일이다. 이 체험이 없으면 그 어떤 해박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교의 목회자가 아니다. 또한 이 체험이 있다면 누구라도 유력한 목회자일 수 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그 모임을 증거 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번 기 내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소외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제자를 만드는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이 일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이행해야 하는가?
1. 다음 성경절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줍니까?(행 20:28, 고전 12:14-22, 엡 4:11-13, 골 1:17-18).
답:
예수님은 참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스승이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며 교육하고 양육하실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셨다. 그분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도우실 시간을 내셨다. 제자 훈련은 그분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일이 주요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그 일은 21세기의 모든 교회의 사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목사나 성경교사나 장로나 집사나 교회의 어떤 직원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셨으므로 그것은 모든 교인들의 임무이다. “너희는 가라”(마 28:19)고 하신 그분의 명령은 당신을 향한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훈련이 부족하여 이러한 개념을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도 훈련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훈련시키셔야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교회는 교인 각 사람에게 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 신자들은 각각 제자훈련반에 배치되어 훈련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더 높은 훈련을 위해 상급반들이 개설되어야 하며, 모든 훈련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위한 사역에 배치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는 사명을 주셨다. 이 명령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 과업은 교회를 통해 완수될 수 있다.
교훈: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실 나라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그 나라를 이루시고, 교회를 통해 그 나라의 확장을 원하신다. 교회가 있는 하나의 이유는 생명의 구원이다. 한 생명에게 하나님이 가지신 복음을 통해 구원을 입게 하고, 그에게 생명의 세계를 공급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 생명의 복음이 자신을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게 하는 생명의 씨앗으로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가지신 절대 사명인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바로 "가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현장을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한 나라의 완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함께 책임지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가족경험을 시키는 것이다. 그 가족 경험을 통해 서로의 약함이 나뉘어 지고, 서로의 다른 견해가 하나가 되어지고, 서로의 강점과 약점이 함께 교류하는 공동체의 정신이 공유되는 기관을 세우시는 것이다.
목요일(3월 27일)
기도의 중요성
도입)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배우지 않아도 그 영혼 속에 잠재적인 하나님 의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도 생명의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가 이룩됨으로 필연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교통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도이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세상에 속해서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 기도하면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랑받는 자녀로서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기도만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를 점령해야만 한다. 이런 성령은 우리 기도를 통해서 임한다. 즉 기도는 성령의 생수마시는 연결관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7장 37절로 38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라고 했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게서 생수를 마실 수 있는 관이 기도인 것이다. 바로 기도는 예수님께 연결해서 성령의 생수를 충만히 마시는 연결 관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되고 더 많은 성령의 충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1. 다음에 소개하는 엘렌 G. 화잇 선지자의 글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하늘의 대왕께서 당신의 지상봉사를 수행하실 때 그분은 수많은 기도를 당신의 아버지께 드리셨다. 그분은 자주 온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다. … 감람산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으신 장소였다. 때때로 군중들이 밤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떠나간 후에도 그분께서는 하루의 수고로 피곤하셨으나 쉬지 않으셨다. … 성읍이 정적에 잠겨 있고 제자들이 잠을 통하여 원기를 얻기 위해 그분을 떠나간 사이에도 예수께서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제자들을 매일 세상에서 직면하는 악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닥쳐올 임무와 시련을 감당할 힘을 얻으시기 위해 탄원하는 그분의 거룩한 기도가 감람산으로부터 당신의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당신의 제자들이 잠자고 있던 온 밤 동안 거룩한 스승께서는 기도하고 계셨다. 밤 이슬과 서리가 기도하기 위해 숙인 그분의 머리 위에 내렸다. 그분의 모본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어졌다(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67).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러한 기도들을 드리게 된 각각의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사역을 수행할 때에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눅 5:15-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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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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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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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중요한 단계마다 기도에 집중하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 모본을 따르자.
부가적용)
기도만이 하나님의 팔을 움직이신다. 모세의 생애를 보라!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모였는데 갈 데가 없었다. 모세가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수를 가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모세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비밀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모르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큰일이므로 적은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상 결코 낙심할 수가 없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는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과 도우심이 흘러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다른 이웃 사회 국가에 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온 집이 구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이러므로 자녀가 구원을 얻으면 부모와 형제가 구원되도록 기도해야 되고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기도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활에 넘치도록 축복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교통이 가져다주는 큰 기쁨과 평안도 있지만 또한 마귀와 싸우는 고달픔, 대속기도의 무거운 짐도 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애쓰고 힘써야만 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기도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만 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19).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하늘나라를 여는 열쇠요 마귀를 물리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권세이다.
금요일(3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55-259, 539-547, 681-683, 10권, 464-472, 시대의 소망, 제38장 ‘와서 잠간 쉬어라’(359-363), 제40장 ‘호수의 밤’(377-379), 411,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1), 제74장 ‘겟세마네’(685-693), 교육, 80, 259.
여기에 우리 교회가 제자도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일들이 있다.
1. 제자를 만드는 일을 교회의 첫째 목표로 정하라.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공식화하라.
3. 각 프로그램의 지도자로 세울 사람들을 훈련시키라.
4. 모든 교인들을 제자훈련에 참여시키기 위해 동원하라.
5.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라.
6. 교회 주변의 지역 주민들의 유형과 그들의 필요를 확인하라.
7. 장벽을 무너뜨리는 교량적인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들과 친분을 맺으라.
8. 새 신자들의 역량을 활용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하라.
9. 교인들, 특히 새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계발하라.
10. 제자들을 만들고 양육하기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열거한 단계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십시오. 교회가 성공적인 제자훈련의 장이 되게 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이 일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까요?
2. 목회자와 평신도로 하여금 제자의 사역이 모든 교인들의 일임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역 교회 단위에서 신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3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2분)
도입)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은 ‘인간적인’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분’만도 아니셨다. 그분은 인간 자체이셨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사신 것은 자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려는 몸짓이 아니셨다. 그분은 정말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사랑이 풍성하셨고 온유하셨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깊은 심장을 에이는 고통에 괴로움을 당하신 분이시기도 하셨다. 예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분의 고통의 심연엘 들어가 보아야 한다. 거길 가본 사람은 우리가 고통에 빠질 때 우리를 한껏 이해하시고 돌봐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 곁에 서계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우리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느끼신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인해서 실족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원인이야 무엇이든 우리의 고통에 예수님은 동참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억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연구범위: 마 14:14, 15:32, 20:34, 막 1:41, 눅 6:12-13, 16:19-31, 17:4-5, 18:9-14, 골. 1:14, 딤전 5:16.
학습 포인트: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께서는 소외된 계층, 우리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어떤 모본을 남겨주셨는가? 제자 훈련을 위하여 교회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신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한 기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분께서 따르도록 택하신 사람들과, 그분의 제자 훈련, 그리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본과 교훈들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배웠다.
이번 기에 공부한 것들 중 몇 가지 주요한 부분들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의 사역에 기초를 이루어야 할 요소들 즉 그분께서 적극 강조하신 특성들과 개념들과 활동들을 재확인해 보자.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21세기 제자도의 모형이 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내어 적용하는 것이다.
일요일(3월 23일)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
도입)
[동정]이란 라틴어의 뜻은 [함께 괴로워한다]는 말이다. 문둥이의 괴로움을 자기의 고민으로 삼으시고 함께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의 동정이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의 비애를 자기의 비애로 삼음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근본이었다. 로마교에서는 [예수님의 다섯 개의 상처]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네 곳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말한다. 그러나 상처는 다섯 개 만이 아니다. 수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이렇게 인용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마 8:17,사53:4). 실상 남을 위하는 동정심은 언제든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동정심을 나타내셨다(참조 마 14:14, 15:32, 20:34, 막 1:41, 6:34, 눅 7:13). 헬라어로 ‘불쌍히 여기다’ 또는 ‘민망히 여기다’로 번역된 단어는 사람의 전 존재가 깊이 감응된 상태를 가리킨다. 타락하여 딱딱해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도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데 하물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고통 받는 인간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더 깊은 아픔을 느끼셨겠는가?
1. 위에 열거된 참조 성경절들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무엇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끼셨습니까?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와 같은 동정심을 갖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답:
예수께서는 동정심뿐 아니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전에 문둥병자였던 시몬이 마리아를 멸시할 때 어떻게 대응하시는지를 보았다(눅 7:36-50). 예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궁극적인 용서의 모습을 보이셨다(눅 23:34).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특별한 용서를 경험했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때에 베드로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한 재판받으실 때에는 세 번이나 그분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동료 제자들 앞에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요 21:9-17).
2.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서, 또한 다른 이들을 제자로 삼는 자로서 얼마나 많이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까?(참조 눅 17:3-5, 엡 1:7, 4:32, 골 1:14).
답: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용서를 베푸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로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죄로 멸망해 가는 자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냉혹한 마음은 예수님의 정신과 배치(背馳)된다.
부가적용)
성경은 도처에 예수님이 얼마나 동정과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던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분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시면 연민을 품으셨다.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은 사람. 영이 곤고하여 낙심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분은 깊은 동정심으로 가득 차셨다. 동정과 인정은 그의 모든 기적들의 참 동기 이였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그 먼지 길을 인정어린 마음으로 걸으셨던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 대하여 하나도 달라지시지 않으셨다.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거지꼴을 한 흉측한 사람이 도와달라며 다가온다. 우리 기분이 어떨까? 더러운 차림새, 추잡한 행동거지, 갈 곳 없는 떠돌이....우리 사회엔 참으로 많은 “쓰레기처럼 내 던져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때도 그랬다. 몸에선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볼품없이 찌그러진 사람들, 사람들이 피해서 지나가는 문둥병자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용서의 손길을 뻗치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 분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사흘이나 굶은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오병이어로 사람들에게 식사를 배려하신 긍휼하신 주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용서의 정신이다. 나도 용서 받았으니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용서의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자격이 된다.
월요일(3월 24일)
배척당하고 소외된 자들
도입)
마태복음 20장에는 두 소경이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가?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야, 조용히 해, 예수님은 지금 중요한 일로 바쁘시단 말이야).“ 이 무리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보통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청해오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물러 서셨다. 발을 멈추었다. 그들의 필요를 바라봐 주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눈을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마태는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쓰고 있다. 예수께서는 뭉쿨 치미는 동정과 사랑에 마음이 아파 못내 안타까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분의 이 인정과 동정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고 보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분은 우리가 절망 중에서 필요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요청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발을 멈춰주시는 분이시다. 당신과 내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 그분은 발길을 멈추고 기다려 서 계신 분이심을 잊지 말라. 우리도 이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저들을 무안케 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 “잠잠하라고 꾸짖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동정심을 안다면.....
예수께서는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계층간의 경계선은 남자와 여자, 종교적 지도계층과 평민들, 부자와 빈자, 바리새인과 세리 등과 같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집 안에서 한정된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1. 누가복음 16:19-3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계층간의 차별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답:
2. 누가복음 18:9-1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옹호하거나 동조하지 않으셨는데,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교제하시고 가르치시며 그들을 대변해 주셨다.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봉사하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분께서는 상류계층의 사람들과도 접촉하셨지만 동시에 이방인들, 평판이 나쁜 여인들, 나환자들, 세리들, 귀신들린 자들, 로마인들, 여러 종류의 장애를 가진 자들, 가난한 자들 등 그 사회에서 여러 모로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한 그분의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분께서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사명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상류계층의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항상 가난하고 어렵고 병든 자를 찾아다니며 전도하셨다. 예수께서 보이신 기적과 이적은 대부분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자를 먹이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회개 시키고 구원하셨다. 이 땅에서 지금 진정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소외된 사람들이라 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소외된 사람이 아니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돈이 많고 적은 것에 멈취 있지 않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저들이 한 번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저들은 소외된 자들이다. 부자요 돈이 많다고 해서 저들에게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피선교지에도 돈 있고 능력 있고 힘은 있지만 복음을 소개 받지 못하고 듣지 못한 이들, 지금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 더 소외당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눈길과 마음이 가지 않은 곳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부자들도 어쩌면 이 시대의 소외당한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소외된 자들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복음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하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곳이 진정으로 소외된 장소요 복음을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 바로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복음은 있는 자나 없는 자나 함께 나누어져야 할 축복이기 때문이다.
화요일(3월 25일)
다양성과 차별의 정신
도입)
편견과 차별은 비겁한 사람의 무기이다. 겉만 보고 편견을 가지고 남을 차별하는 사람에게 있는 특징 한 가지는 상대방이 외적으로 그럴듯하면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는 높아지는 마음이 편벽된 사람의 마음이다. 편벽한 사람은 남을 무시도 잘하지만 남 앞에서 기도 잘 죽는다. 편견의 뿌리는 교만이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성별, 인종, 직업, 출신지 등을 언급하며 남을 낮추고 나를 낫게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편견이고, 자기 인격이 더 못됐으면서 남의 인격을 못됐다고 하는 것이 편견이다. 편견은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하기에 진리를 가장 왜곡할 수 있다. 편견은 가장 가벼운 죄처럼 보이는 가장 무거운 죄이고, 인간영혼이 제거해야 할 제일 대상이다. 편견의 벽을 무너뜨릴 때 불행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 기별로 주님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고 폄하한 저들의 편견이 주님을 차별하고 있었다. 또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출신지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 우리도 어느 특정 지역의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차별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출신으로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그 못 박힌 손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장애인이 되신 것은 “편견을 버리고 차별하지 말라!”는 우리들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이시다. 우리는 예수께서 억압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셨는지를 기억해 보아야 한다. 특히 민족적 혹은 인종적 다양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보자. 인종적 편견과 차별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들 주변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문헌들에서 이러한 편견의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헬라인들은 비헬라인들을 야만인으로 보았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 신앙의 깊이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버려야 한다.
1. 출애굽기 12:38, 18:1, 민수기 12:1, 룻 1:16-17, 마 23:1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을 구성한 인종의 다양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답:
이스라엘은 민족 형성 초기로부터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서, 진화론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행 17:26), 우리는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피부색, 국적, 인종, 종족, 종교와 관계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12).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즉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인종적 혹은 민족적 우월성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더욱이 특정 집단에 대한 모든 편견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은 모든 문화와 사회마다 내재하는 인종적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결국 세상에는 구원받은 사람과 잃어버린바 된 사람 이렇게 두 부류만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소개해 주어야 한다.
교훈: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버려야 한다.
부가적용)
인류의 구성원인 인간은 누구든지, 국적, 성별, 인종, 언어, 종교, 학식, 재산, 장애유무의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 충분하고도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속이나 생활습관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야만(野蠻)이라고 부른다. 이 야만이라는 말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조상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희랍의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야만이라는 말의 상대성을 지적하면서 “무례한 희랍인보다 정직인 야만인(이방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중국 사람들은 중화사상에 젖어 있고 유대인이나 독일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만을 인간이라 불렀고, 낯선 이방인(異邦人)들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민족 중심적인 사상을 종족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부류(部類)만을 높이 평가하려는 나르시즘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의 적개심(敵愾心, hostility)라는 말은 희랍어 손님(客, hostis,)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낯선 사람과 손님이라는 말은 한 때 적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으로 씌어졌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비로소 사람답게 살며 전인류가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괴테(J. V. Goethe)의 명언도 우리가 항상 유념하고 살아야 하겠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인류를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에 가게 되면 다른 인종과 피부를 가진 존재로 존재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등하되 다르다"(equal-though-different)는 원칙이 천국 생활의 또 한 면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체성(identity)이 그대로 유지되고 "평등하되 서로 다르다"는 원칙이 천국에 지속된다면, 인종적 정체성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인종적 특징은 성별(性別) 못지않게 어떤 사람의 고유함을 이루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인종적, 민족적, 부족적 정체성이 다 제거된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계 5:9)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겠는가? 요한계시록 5장 9절은 천국에서도 그러한 구별이 계속 유지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평등하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남을 멸시하거나 깔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종적인 모든 편견을 버리고 살아야 할 것이다.
수요일(3월 26일)
교회
도입)
그리스도교의 전도란 나의 주장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나의 덕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그래서 나의 당, 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전도란 내게 죄가 있음을 세상에 알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내 구주를 세상에 소개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무리로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전도와 그리스도교의 전도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전도에 종사할 수 있다. 전도는 설교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다. 전도는 내 마음에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발표하는 일이다. 이 체험이 없으면 그 어떤 해박한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교의 목회자가 아니다. 또한 이 체험이 있다면 누구라도 유력한 목회자일 수 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임이며 그 모임을 증거 하는 자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이번 기 내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고 소외된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제자를 만드는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이 일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이행해야 하는가?
1. 다음 성경절들은 위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줍니까?(행 20:28, 고전 12:14-22, 엡 4:11-13, 골 1:17-18).
답:
예수님은 참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스승이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며 교육하고 양육하실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셨다. 그분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영혼들을 도우실 시간을 내셨다. 제자 훈련은 그분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일이 주요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그 일은 21세기의 모든 교회의 사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며 제안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무도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목사나 성경교사나 장로나 집사나 교회의 어떤 직원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예외 없이 모든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셨으므로 그것은 모든 교인들의 임무이다. “너희는 가라”(마 28:19)고 하신 그분의 명령은 당신을 향한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훈련이 부족하여 이러한 개념을 불편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도 훈련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훈련시키셔야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교회는 교인 각 사람에게 훈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새 신자들은 각각 제자훈련반에 배치되어 훈련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더 높은 훈련을 위해 상급반들이 개설되어야 하며, 모든 훈련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위한 사역에 배치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는 사명을 주셨다. 이 명령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 과업은 교회를 통해 완수될 수 있다.
교훈: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실 나라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그 나라를 이루시고, 교회를 통해 그 나라의 확장을 원하신다. 교회가 있는 하나의 이유는 생명의 구원이다. 한 생명에게 하나님이 가지신 복음을 통해 구원을 입게 하고, 그에게 생명의 세계를 공급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 생명의 복음이 자신을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게 하는 생명의 씨앗으로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가지신 절대 사명인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바로 "가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현장을 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한 나라의 완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함께 책임지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가족경험을 시키는 것이다. 그 가족 경험을 통해 서로의 약함이 나뉘어 지고, 서로의 다른 견해가 하나가 되어지고, 서로의 강점과 약점이 함께 교류하는 공동체의 정신이 공유되는 기관을 세우시는 것이다.
목요일(3월 27일)
기도의 중요성
도입)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배우지 않아도 그 영혼 속에 잠재적인 하나님 의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도 생명의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가 이룩됨으로 필연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교통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도이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세상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세상에 속해서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 기도하면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랑받는 자녀로서 함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기도만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하늘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를 점령해야만 한다. 이런 성령은 우리 기도를 통해서 임한다. 즉 기도는 성령의 생수마시는 연결관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7장 37절로 38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라고 했는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게서 생수를 마실 수 있는 관이 기도인 것이다. 바로 기도는 예수님께 연결해서 성령의 생수를 충만히 마시는 연결 관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성령의 생수를 마시게 되고 더 많은 성령의 충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1. 다음에 소개하는 엘렌 G. 화잇 선지자의 글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하늘의 대왕께서 당신의 지상봉사를 수행하실 때 그분은 수많은 기도를 당신의 아버지께 드리셨다. 그분은 자주 온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다. … 감람산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도하기 위해 즐겨 찾으신 장소였다. 때때로 군중들이 밤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떠나간 후에도 그분께서는 하루의 수고로 피곤하셨으나 쉬지 않으셨다. … 성읍이 정적에 잠겨 있고 제자들이 잠을 통하여 원기를 얻기 위해 그분을 떠나간 사이에도 예수께서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제자들을 매일 세상에서 직면하는 악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닥쳐올 임무와 시련을 감당할 힘을 얻으시기 위해 탄원하는 그분의 거룩한 기도가 감람산으로부터 당신의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당신의 제자들이 잠자고 있던 온 밤 동안 거룩한 스승께서는 기도하고 계셨다. 밤 이슬과 서리가 기도하기 위해 숙인 그분의 머리 위에 내렸다. 그분의 모본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주어졌다(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67).
1. 다음 구절들을 읽으십시오. 이러한 기도들을 드리게 된 각각의 상황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사역을 수행할 때에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눅 5:15-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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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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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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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중요한 단계마다 기도에 집중하셨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 모본을 따르자.
부가적용)
기도만이 하나님의 팔을 움직이신다. 모세의 생애를 보라!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모였는데 갈 데가 없었다. 모세가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수를 가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모세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비밀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는 모르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큰일이므로 적은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상 결코 낙심할 수가 없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기도는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과 도우심이 흘러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다른 이웃 사회 국가에 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온 집이 구원받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이러므로 자녀가 구원을 얻으면 부모와 형제가 구원되도록 기도해야 되고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 기도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활에 넘치도록 축복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교통이 가져다주는 큰 기쁨과 평안도 있지만 또한 마귀와 싸우는 고달픔, 대속기도의 무거운 짐도 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애쓰고 힘써야만 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기도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만 하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19).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하늘나라를 여는 열쇠요 마귀를 물리치는 능력이요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권세이다.
금요일(3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255-259, 539-547, 681-683, 10권, 464-472, 시대의 소망, 제38장 ‘와서 잠간 쉬어라’(359-363), 제40장 ‘호수의 밤’(377-379), 411,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1), 제74장 ‘겟세마네’(685-693), 교육, 80, 259.
여기에 우리 교회가 제자도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일들이 있다.
1. 제자를 만드는 일을 교회의 첫째 목표로 정하라.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을 공식화하라.
3. 각 프로그램의 지도자로 세울 사람들을 훈련시키라.
4. 모든 교인들을 제자훈련에 참여시키기 위해 동원하라.
5.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라.
6. 교회 주변의 지역 주민들의 유형과 그들의 필요를 확인하라.
7. 장벽을 무너뜨리는 교량적인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들과 친분을 맺으라.
8. 새 신자들의 역량을 활용할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하라.
9. 교인들, 특히 새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계발하라.
10. 제자들을 만들고 양육하기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열거한 단계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십시오. 교회가 성공적인 제자훈련의 장이 되게 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이 일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까요?
2. 목회자와 평신도로 하여금 제자의 사역이 모든 교인들의 일임을 깨우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역 교회 단위에서 신자들의 은사와 달란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2.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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