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과 제자도에 관한 추가적인 교훈들(조춘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폴쵸 작성일08-03-06 06:15 조회5,856회 댓글0건본문
제 11과 제자도에 관한 추가적인 교훈들
3월 1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9분)
도입)
사랑이란 감정이 아닌 행동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즉,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행위가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모든 계명 중 으뜸 되는 계명으로 주셨다. 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 하는 것이 다른 모든 주님의 명령에 순종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 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음은 물론 성령의 열매인 변화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내가 주님의 명령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주면 그 이웃은 변하고 그 모습을 보게 되는 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사랑을 받으려만 할 때에는 사랑 대신 스트레스와 갈등과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사랑을 주면 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되고 내 가정은 천국이 된다. 부부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주게 되면 그 부부 사이에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 되면서 가정이 천국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되고 건강과 부요함을 그 대가로 얻게 된다. 이처럼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성공 할 수 있는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변화 받고 주님의 동역자로 살아 갈 수 있는 축복의 도구이다.
기억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7).
연구범위: 마 14:22-33, 막 4:36-41, 6:51-52, 눅 8:25, 24:37, 요 6:19.
학습 포인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왜 종종 두려움에 휩싸이는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전도할 때에 고의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안식일 오후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머물면서 당신께 배우도록 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명석하거나 민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수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나 여전히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서도 성장은 생명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자라나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한 성공적인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토양과 자양분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몇 가지 실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일요일(3월 9일)
바다에서 배우는 교훈 - 1
도입)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쉼이 필요할 때인데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영적 열심을 보이셨다. 그동안 예수님과 떨어져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문제는 예수님이 바로 전에 오병이어를 통해 보여 주신 기적의 의미를 제자들이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예수님이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경험했다. 그러나 고난에 당면하자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전에 배운 진리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제의 기적 속에 나타나셨던 주님을 오늘의 고난 속에서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마가복음 4장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은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과연 주님의 발아래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1. 마가복음 4:36-41을 읽으십시오. 특히 38절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한 말은 어떤 사실을 드러내 줍니까? 우리도 두려움에 휩싸일 때에 얼마나 자주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하곤 합니까?
답:
우리에게 비극과 문제가 닥쳐올 때, 과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돌보시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기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이 사건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한 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항상 그 곳에 계셨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자고 맨 먼저 말씀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 그 광풍에 놀라지 않으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임하는 시련에 대해서도 당황하지 않으신다.
2. 예수님을 깨운 것은 폭풍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이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제자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요인들이 무엇인지 주목해 보라. 그들은 광풍을 두려워했고, 그 다음에 광풍이 잔잔해지자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 물론 그들은 이제까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 그분에게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겠지만, 이와 같은 능력의 나타남을 보면서 크게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로 그들이 이제 그분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희망과 위안을 가졌어야 했다. 이 사건은 이 제자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교훈: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인생의 광풍을 만날 때 두려움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부가적용)
예수님을 믿어도 인생에 풍랑은 일어난다. 우리의 모습 : 놀라고, 무서워하고, 소리 지름, 주님의 모습 :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손을 내밀고, 붙잡아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심.
고난 속, 풍랑 속에서도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이요, 주님만을 믿는 것이다.(마틴 루터- 언제 우리에게 문제가 없었던 적이 있었느냐 믿음 없는 것이 문제이다.)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요,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믿음 없는 것이 문제이다. 눈앞의 구원자를 두고서도 믿지 못하는 '적은 믿음'은 그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렴풋한 마음의 확신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과 감사를 불러오는' 능력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뿐이다.
월요일(3월 10일)
바다에서 배우는 교훈 - 2
도입)
주님은 풍랑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가정, 하는 일에 언제나 풍랑이 일어날 수 있다. 풍랑을 주시기 위한 풍랑이 아니다. 풍랑을 통해 우주를 섭리하시는 주님을 깨닫고 더 강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 것이며, 가파른 인생길을 허덕이며 올라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이 다가올 때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를 삼키려는 인생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바람은 멈추고 만다.
생각해 보면, 바다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배우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참조 욥 12:10, 단 5:23, 행 17:28), 특히 발아래 있는 물이 나를 받쳐주지 못하고 삼켜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하나님을 붙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마도 주님께서 훌륭한 제자가 되는 데 있어서 핵심요소인 믿음에 관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바다를 선택하신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호수의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과의 대면 이후 성공적인 선교 여행(막 6:6-13)을 마치고, 그분께서 5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목격하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5천 명을 먹이시던 그날 밤에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폭풍을 경험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 배에 계시지 않았다.
1. 마태복음 14:22-23과 마가복음 6:45-52을 읽으십시오. 이 두 기사에서 제자들이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들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비록 마가복음에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이야기가 생략되었지만, 이 두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한 가지 핵심적인 내용은 그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말했다. 마가복음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한 바에 대해 마음에 심히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분께서 날씨까지도 복종케 하신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폭풍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물 위를 걸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참으로 그 어떤 사람도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던 것이다.
교훈: 제자들은 예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능력과 5천명을 먹이신 이적과 물 위를 걸으시는 광경을 목격한 후에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부가적용)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예수님을 모신 배가 풍랑을 만나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풍랑이 잔잔해 진다는 것이다. 차고 쌀쌀한 슬픔의 바람이 불어 닥쳐도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평강이 있다. 격정의 열풍이 몰아 닥쳐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평화와 안전이 있다. 인생의 삶을 고해라고 한다. 이러한 인생의 삶에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될 것이다.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한 말씀은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화요일(3월 11일)
바리새인들의 누룩
도입)
누룩은 천국 복음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천국 복음의 놀라운 확장성을 의미한다. 천국 복음은 누룩처럼 작지만 모든 반죽을 부풀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죄의 전염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였다. 누가는 그들의 외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은 원어로 ‘가면’ ‘각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나중에 위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졌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관하여 여러 번 말을 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인간을 향하였다. 둘째, 말과 행동을 달리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유전과 관습을 중요시 여겼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쉽게 물들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다고 본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드러나고,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들이 자신의 속을 감추고,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알려지게 된다. 바로 예수님은 그들이 감춘 것과 숨기는 것을 드러내셨다. 아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단순히 자기 위치에 대한 위협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지없이 그들의 마음에 감추어진 위선을 꼬집어 비판함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치부도 두려웠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존경과 우러러봄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1-12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예수께 던진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성경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여기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어떤 핵심을 이끌어내야 합니까? 마태복음의 앞 장들을 살펴보십시오(참조 눅 16:29-31).
답:
2.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하신 특별한 경고 이면에는 어떤 원칙이 깔려 있습니까?(마 23:23).
답:
3. 마태복음 16:8-11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목전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잊어버리기가 왜 그렇게도 쉽습니까?
답:
생명의 떡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이에는 어떤 대조가 있으며, 왜 이 둘을 혼동하기가 쉬운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신념이나 전통을 따르는 일과, 믿음을 수호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가 믿는 것이나 예배드리는 방식이나 혹은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제도화됨으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란 쉽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분의 사랑과 품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교훈: 생동감을 상실한 채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신앙은 위험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헤롯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각각 인간을 영적교만으로 이끄는 형식주의와 전통, 그리고 세속적, 정치적 욕망으로 신앙을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회의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에겐 과연 형식주의, 세속적인 면, 회의적인 면이 없는가 되돌아보자. 외식은 무엇인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겉을 치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외식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은 우리의 모습을 꾸미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외식은 바로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말한다. 예수님은 외식을 싫어하신다. 그래서 금식을 할 때에도 금식하는 것을 광고하듯이 금식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괜히 초췌한 모습으로 보이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금식을 알지 못하게 금식하라는 것이다. 이 외식의 대가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래서 외식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제자들은 외식하기에 딱 좋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좀 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이다. 좀 더 사람들 앞에 멋있게 유능하게 보이려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늘 우리는 이럴 때를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 될 때,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아 줄 때, 바로 그 때가 외식하기 쉬운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외식은 무서운 질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식은 우리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들은 사람과의 관계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일(3월 12일)
두려움에 관한 교훈
도입)
하나님의 사랑이 인생을 안내하는 등불이 된다면 인생에게 무엇이 겁이 나겠는가? 영국에 어떤 장교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어느 날 대서양을 배로 횡단하게 되었는데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장교 부인이 떨면서 심히 두려워했다. 그때 장교가 말없이 칼을 뽑아 부인의 목에 대었다. 그리고 막 목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장교가 칼을 그대로 든 채로 물었다. "여보, 내가 시퍼런 칼을 당신 목에다 대고 있는데 무섭지 않소?" 부인이 대답했다. "여보, 그 칼이 원수의 손에 있다면 모를까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겁을 내요?" 그 말을 듣자 그 장교가 말했다. "여보, 이 우주의 운전대를 마귀가 쥐고 있다면 겁나지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쥐고 있는데 왜 그리 두려워하시오?" 그러자 부인이 부끄러움의 미소와 함께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고 한다. 인생들에게 큰 대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인생들 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가장 큰 대적인 사망이 자신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과 영원하심을 믿는다면 인생들은 그것조차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제자들이 얼마나 자주 두려움에 빠졌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사복음서에는 여러 상황에서 두려움에 빠졌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1.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여러 상황들을 다음 구절들에서 확인해 보십시오(마 14:27, 17:6-7, 막 10:32, 눅 8:25, 24:37, 요 6:19). 우리는 이들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2. 마가복음 9:30-32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까?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슬프게도 제자들은 큰 소망을 주기 위해 제공된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구원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르러 온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만약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했더라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그들의 무지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폭풍 가운데서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보리떡 몇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죄는 실제이고 마귀도 실제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그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붙잡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소망과 위로 안에 머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진정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부가적용)
한때 미국 시카고에서 악명 높았던 범죄 갱단 두목의 딸이 책을 썼는데, 그 딸이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차를 보아도 경계하며 쳐다보고, 식당에 앉아서도 사방을 경계하며 앉아있고, 잠시도 공포가 떠날 날이 없더니 결국은 갑자기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범죄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되고,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음에 참 평안을 누리며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 그 신자가 참으로 거듭난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그의 말이나 행동, 또는 생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안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아무리 믿음 있는 체하고 말을 잘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거짓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참 신앙이 없는 위선자이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말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 Fear)"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온갖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목요일(3월 13일)
제자도와 전도
도입)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도적 제자의 삶이다. 전적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열두 제자와 전적으로 헌신하는 전도자를 부르셨다. 또 하나는 일반적 제자의 삶이다. 삶의 터전에서 활동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가정 직장 사업의 터전에서 활동하면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떤 제자를 부르실 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 어떤 제자에게는 “집으로 돌아가 친속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이는 어느 것이 중하고 덜 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무신론이 진실이길 바라고, 내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학문이 깊은 사람들이 종교를 신봉한다는 사실에 대해 거북함을 느낀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히 내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우주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토머스 네이겔, 마지막 말,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1997년, 130).
1. 위의 인용구를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을 생각하면 맨 먼저 어떤 성경절이 떠오릅니까? 지금 당장 적어 보십시오.
답:
2. 이제 성경절을 적었으면, 그 성경절을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그 성경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이 성경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동정적입니까, 비판적입니까, 아쉬움이 섞인 것입니까, 저주가 섞인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감정이 섞여 있습니까?
답: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증거하는 일이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준비시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훈련시키신 여러 기록들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쉽게 믿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거절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증거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위에 인용된 사람처럼 공공연하게 거절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와 동일한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분노하는가, 사랑하는가, 불쌍히 여기는가, 아니면 다른 느낌을 갖는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마음 문을 닫아버리는 이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가?
교훈: 제자도와 전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분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를 누리며, 기도응답의 체험을 하게 되면, 이 놀라운 삶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하라, 말라 할 것이 없다. 전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전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다. 증인은 결코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을 그저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 어떤 교통사고를 겪었다면, 그 사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쉬운 일이겠는가? 그 말을 하지 말라 하면 더 괴로운 일일 것이다.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오직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령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우리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까지 그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볼 때 또는 그리스도 몸 안에서 완전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볼 때까지 (제자화 될 때까지) 중단 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시고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용서 받아야 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이 엄청난 사건을 제자화된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길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일터로 전하여야 할 기쁜 소식이요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인 것이다. 이를 완수할 책임이 우리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금요일(3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49-353, 365-384, 10권, 276-282, 시대의 소망,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33-341), 제40장 ‘호수의 밤’(377-382), 제45장 ‘십자가의 예표’(410-418),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5), 제83장 ‘엠마오로 가는 길’(795-801), 제87장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829-835), 실물교훈, 40, 각 시대의 대쟁투, 349-350.
“베드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나 구원의 계획에 관하여는 매우 불완전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십자가가 없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죽어가는 인간이 생명과 소망을 얻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한 길 뿐이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91년 4월 7일자).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분과 감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때, 그리스도의 심령은 상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안에서 든든해지고, 힘을 얻고, 세움을 입게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당신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업을 그들이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그들의 심령은 그분의 손에 들린 신령한 수금이 되어, 그 모든 줄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8-5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한편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 오늘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에서 바리새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단계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리스도의 제자가 바리새인으로 변질되기가 쉽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에서 제자로 변화되기가 쉽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3월 1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9분)
도입)
사랑이란 감정이 아닌 행동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즉,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행위가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모든 계명 중 으뜸 되는 계명으로 주셨다. 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 하는 것이 다른 모든 주님의 명령에 순종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 되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음은 물론 성령의 열매인 변화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내가 주님의 명령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주면 그 이웃은 변하고 그 모습을 보게 되는 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사랑을 받으려만 할 때에는 사랑 대신 스트레스와 갈등과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사랑을 주면 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되고 내 가정은 천국이 된다. 부부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주게 되면 그 부부 사이에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 되면서 가정이 천국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게 되고 건강과 부요함을 그 대가로 얻게 된다. 이처럼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성공 할 수 있는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변화 받고 주님의 동역자로 살아 갈 수 있는 축복의 도구이다.
기억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7).
연구범위: 마 14:22-33, 막 4:36-41, 6:51-52, 눅 8:25, 24:37, 요 6:19.
학습 포인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왜 종종 두려움에 휩싸이는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전도할 때에 고의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안식일 오후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머물면서 당신께 배우도록 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명석하거나 민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수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나 여전히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서도 성장은 생명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자라나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한 성공적인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토양과 자양분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몇 가지 실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일요일(3월 9일)
바다에서 배우는 교훈 - 1
도입)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쉼이 필요할 때인데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영적 열심을 보이셨다. 그동안 예수님과 떨어져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문제는 예수님이 바로 전에 오병이어를 통해 보여 주신 기적의 의미를 제자들이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예수님이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경험했다. 그러나 고난에 당면하자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전에 배운 진리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제의 기적 속에 나타나셨던 주님을 오늘의 고난 속에서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마가복음 4장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은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과연 주님의 발아래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1. 마가복음 4:36-41을 읽으십시오. 특히 38절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한 말은 어떤 사실을 드러내 줍니까? 우리도 두려움에 휩싸일 때에 얼마나 자주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하곤 합니까?
답:
우리에게 비극과 문제가 닥쳐올 때, 과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돌보시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기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이 사건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한 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항상 그 곳에 계셨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자고 맨 먼저 말씀하신 분은 바로 주님이셨다. 그 광풍에 놀라지 않으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임하는 시련에 대해서도 당황하지 않으신다.
2. 예수님을 깨운 것은 폭풍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이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제자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요인들이 무엇인지 주목해 보라. 그들은 광풍을 두려워했고, 그 다음에 광풍이 잔잔해지자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 물론 그들은 이제까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 그분에게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겠지만, 이와 같은 능력의 나타남을 보면서 크게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로 그들이 이제 그분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희망과 위안을 가졌어야 했다. 이 사건은 이 제자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교훈: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인생의 광풍을 만날 때 두려움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기억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부가적용)
예수님을 믿어도 인생에 풍랑은 일어난다. 우리의 모습 : 놀라고, 무서워하고, 소리 지름, 주님의 모습 :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손을 내밀고, 붙잡아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심.
고난 속, 풍랑 속에서도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것이요, 주님만을 믿는 것이다.(마틴 루터- 언제 우리에게 문제가 없었던 적이 있었느냐 믿음 없는 것이 문제이다.)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문제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요,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믿음 없는 것이 문제이다. 눈앞의 구원자를 두고서도 믿지 못하는 '적은 믿음'은 그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렴풋한 마음의 확신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나의 믿음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과 감사를 불러오는' 능력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뿐이다.
월요일(3월 10일)
바다에서 배우는 교훈 - 2
도입)
주님은 풍랑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가정, 하는 일에 언제나 풍랑이 일어날 수 있다. 풍랑을 주시기 위한 풍랑이 아니다. 풍랑을 통해 우주를 섭리하시는 주님을 깨닫고 더 강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 것이며, 가파른 인생길을 허덕이며 올라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이 다가올 때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를 삼키려는 인생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바람은 멈추고 만다.
생각해 보면, 바다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배우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참조 욥 12:10, 단 5:23, 행 17:28), 특히 발아래 있는 물이 나를 받쳐주지 못하고 삼켜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하나님을 붙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마도 주님께서 훌륭한 제자가 되는 데 있어서 핵심요소인 믿음에 관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바다를 선택하신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호수의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과의 대면 이후 성공적인 선교 여행(막 6:6-13)을 마치고, 그분께서 5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목격하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5천 명을 먹이시던 그날 밤에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폭풍을 경험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 배에 계시지 않았다.
1. 마태복음 14:22-23과 마가복음 6:45-52을 읽으십시오. 이 두 기사에서 제자들이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들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비록 마가복음에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이야기가 생략되었지만, 이 두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한 가지 핵심적인 내용은 그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말했다. 마가복음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한 바에 대해 마음에 심히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분께서 날씨까지도 복종케 하신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폭풍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물 위를 걸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참으로 그 어떤 사람도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던 것이다.
교훈: 제자들은 예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능력과 5천명을 먹이신 이적과 물 위를 걸으시는 광경을 목격한 후에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부가적용)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예수님을 모신 배가 풍랑을 만나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풍랑이 잔잔해 진다는 것이다. 차고 쌀쌀한 슬픔의 바람이 불어 닥쳐도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평강이 있다. 격정의 열풍이 몰아 닥쳐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평화와 안전이 있다. 인생의 삶을 고해라고 한다. 이러한 인생의 삶에 풍랑을 잔잔케 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될 것이다.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한 말씀은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화요일(3월 11일)
바리새인들의 누룩
도입)
누룩은 천국 복음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천국 복음의 놀라운 확장성을 의미한다. 천국 복음은 누룩처럼 작지만 모든 반죽을 부풀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죄의 전염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였다. 누가는 그들의 외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외식이라는 말은 원어로 ‘가면’ ‘각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나중에 위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졌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관하여 여러 번 말을 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인간을 향하였다. 둘째, 말과 행동을 달리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유전과 관습을 중요시 여겼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쉽게 물들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다고 본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드러나고,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들이 자신의 속을 감추고,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알려지게 된다. 바로 예수님은 그들이 감춘 것과 숨기는 것을 드러내셨다. 아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단순히 자기 위치에 대한 위협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지없이 그들의 마음에 감추어진 위선을 꼬집어 비판함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치부도 두려웠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존경과 우러러봄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6:1-12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1. 예수께 던진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성경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여기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어떤 핵심을 이끌어내야 합니까? 마태복음의 앞 장들을 살펴보십시오(참조 눅 16:29-31).
답:
2.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하신 특별한 경고 이면에는 어떤 원칙이 깔려 있습니까?(마 23:23).
답:
3. 마태복음 16:8-11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목전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잊어버리기가 왜 그렇게도 쉽습니까?
답:
생명의 떡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이에는 어떤 대조가 있으며, 왜 이 둘을 혼동하기가 쉬운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신념이나 전통을 따르는 일과, 믿음을 수호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가 믿는 것이나 예배드리는 방식이나 혹은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제도화됨으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란 쉽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분의 사랑과 품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교훈: 생동감을 상실한 채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신앙은 위험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헤롯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각각 인간을 영적교만으로 이끄는 형식주의와 전통, 그리고 세속적, 정치적 욕망으로 신앙을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회의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에겐 과연 형식주의, 세속적인 면, 회의적인 면이 없는가 되돌아보자. 외식은 무엇인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겉을 치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외식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은 우리의 모습을 꾸미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외식은 바로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말한다. 예수님은 외식을 싫어하신다. 그래서 금식을 할 때에도 금식하는 것을 광고하듯이 금식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괜히 초췌한 모습으로 보이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금식을 알지 못하게 금식하라는 것이다. 이 외식의 대가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래서 외식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제자들은 외식하기에 딱 좋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좀 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이다. 좀 더 사람들 앞에 멋있게 유능하게 보이려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늘 우리는 이럴 때를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 될 때,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아 줄 때, 바로 그 때가 외식하기 쉬운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외식은 무서운 질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식은 우리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들은 사람과의 관계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일(3월 12일)
두려움에 관한 교훈
도입)
하나님의 사랑이 인생을 안내하는 등불이 된다면 인생에게 무엇이 겁이 나겠는가? 영국에 어떤 장교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어느 날 대서양을 배로 횡단하게 되었는데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장교 부인이 떨면서 심히 두려워했다. 그때 장교가 말없이 칼을 뽑아 부인의 목에 대었다. 그리고 막 목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부인은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장교가 칼을 그대로 든 채로 물었다. "여보, 내가 시퍼런 칼을 당신 목에다 대고 있는데 무섭지 않소?" 부인이 대답했다. "여보, 그 칼이 원수의 손에 있다면 모를까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겁을 내요?" 그 말을 듣자 그 장교가 말했다. "여보, 이 우주의 운전대를 마귀가 쥐고 있다면 겁나지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쥐고 있는데 왜 그리 두려워하시오?" 그러자 부인이 부끄러움의 미소와 함께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고 한다. 인생들에게 큰 대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인생들 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가장 큰 대적인 사망이 자신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과 영원하심을 믿는다면 인생들은 그것조차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제자들이 얼마나 자주 두려움에 빠졌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사복음서에는 여러 상황에서 두려움에 빠졌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1.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여러 상황들을 다음 구절들에서 확인해 보십시오(마 14:27, 17:6-7, 막 10:32, 눅 8:25, 24:37, 요 6:19). 우리는 이들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2. 마가복음 9:30-32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까?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슬프게도 제자들은 큰 소망을 주기 위해 제공된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구원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르러 온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그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만약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했더라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그들의 무지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두려움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폭풍 가운데서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보리떡 몇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죄는 실제이고 마귀도 실제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그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붙잡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소망과 위로 안에 머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진정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부가적용)
한때 미국 시카고에서 악명 높았던 범죄 갱단 두목의 딸이 책을 썼는데, 그 딸이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차를 보아도 경계하며 쳐다보고, 식당에 앉아서도 사방을 경계하며 앉아있고, 잠시도 공포가 떠날 날이 없더니 결국은 갑자기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범죄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되고,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음에 참 평안을 누리며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 그 신자가 참으로 거듭난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그의 말이나 행동, 또는 생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안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아무리 믿음 있는 체하고 말을 잘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거짓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참 신앙이 없는 위선자이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말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경외, Fear)"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온갖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목요일(3월 13일)
제자도와 전도
도입)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도적 제자의 삶이다. 전적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열두 제자와 전적으로 헌신하는 전도자를 부르셨다. 또 하나는 일반적 제자의 삶이다. 삶의 터전에서 활동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가정 직장 사업의 터전에서 활동하면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떤 제자를 부르실 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 어떤 제자에게는 “집으로 돌아가 친속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이는 어느 것이 중하고 덜 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무신론이 진실이길 바라고, 내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학문이 깊은 사람들이 종교를 신봉한다는 사실에 대해 거북함을 느낀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히 내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우주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토머스 네이겔, 마지막 말,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1997년, 130).
1. 위의 인용구를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을 생각하면 맨 먼저 어떤 성경절이 떠오릅니까? 지금 당장 적어 보십시오.
답:
2. 이제 성경절을 적었으면, 그 성경절을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그 성경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이 성경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동정적입니까, 비판적입니까, 아쉬움이 섞인 것입니까, 저주가 섞인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감정이 섞여 있습니까?
답: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증거하는 일이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준비시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훈련시키신 여러 기록들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쉽게 믿고, 또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거절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증거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위에 인용된 사람처럼 공공연하게 거절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와 동일한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분노하는가, 사랑하는가, 불쌍히 여기는가, 아니면 다른 느낌을 갖는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마음 문을 닫아버리는 이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가?
교훈: 제자도와 전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분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를 누리며, 기도응답의 체험을 하게 되면, 이 놀라운 삶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하라, 말라 할 것이 없다. 전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전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다. 증인은 결코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을 그저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 어떤 교통사고를 겪었다면, 그 사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쉬운 일이겠는가? 그 말을 하지 말라 하면 더 괴로운 일일 것이다.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오직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령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우리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까지 그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볼 때 또는 그리스도 몸 안에서 완전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볼 때까지 (제자화 될 때까지) 중단 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시고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용서 받아야 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이 엄청난 사건을 제자화된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길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일터로 전하여야 할 기쁜 소식이요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인 것이다. 이를 완수할 책임이 우리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금요일(3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49-353, 365-384, 10권, 276-282, 시대의 소망, 제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333-341), 제40장 ‘호수의 밤’(377-382), 제45장 ‘십자가의 예표’(410-418), 제46장 ‘예수께서 변화하심’(419-425), 제83장 ‘엠마오로 가는 길’(795-801), 제87장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829-835), 실물교훈, 40, 각 시대의 대쟁투, 349-350.
“베드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으나 구원의 계획에 관하여는 매우 불완전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십자가가 없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죽어가는 인간이 생명과 소망을 얻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한 길 뿐이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91년 4월 7일자).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분과 감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때, 그리스도의 심령은 상하신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안에서 든든해지고, 힘을 얻고, 세움을 입게 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당신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업을 그들이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그들의 심령은 그분의 손에 들린 신령한 수금이 되어, 그 모든 줄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8-5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한편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 오늘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에서 바리새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단계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리스도의 제자가 바리새인으로 변질되기가 쉽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에서 제자로 변화되기가 쉽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