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주님을 따름: 행동하는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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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08-02-27 21:39 조회6,586회 댓글0건본문
제9과 주님을 따름: 행동하는 제자도
3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6분)
기억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연구범위: 마 8:14-15, 10:34-37, 28:18-20, 눅 5:17-26.
학습 포인트: 우리는 제자로서 어떤 동기를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대에 부딪칠 것을 예상해야 하는가? 우리가 제자의 일을 시작할 때에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에 관해 숙고해 보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나, 각 사람은 그 부르심을 깨닫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토머스 캐머런(Thomas Cameron)은 다음과 같은 어느 유명한 설교가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헨델(Handel)의 파이프 오르간을 위해 바람을 잣거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떨어진 붓을 주워 주거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쌍안경을 들어주거나,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가방을 들어 주는 일을 기꺼이 하겠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을 위해 하찮은 봉사를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영예가 된다면, 하물며 인류의 구세주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큰 특권이 되겠습니까?”(A. 고든 내스비 편, 기독교 세계의 보물, 327).
핵심본문: 눅 5:17-26
학습 목표
깨닫기: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보여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배운다.
느끼기: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키는 장애물을 제거할 필요를 느낀다.
행하기: 죄로 인해 의심과 두려움으로 마비된 자들을 위해 중재한다.
교과 개요
I. 행동하는 믿음
A. 중풍병자 이야기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해 어떤 통찰을 주는가?
B.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용서하신 것은 친구들의 믿음의 결과였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C.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의 몸과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얼마나 힘 있는 도구가 되었는가?
II.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
A. 그 친구들은 무리를 통과할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께로 인도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해야 할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B. 과거의 죄로 인해 마비된 사람들에게 어떤 확증을 줄 수 있는가?
III. 다른 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함
A.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를 달아 내리기 전에 먼저 지붕을 뚫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가?
B. 친구들은 그들의 친구를 예수님의 임재 속으로 달아 내렸다.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요점: 예수께서는, 과거의 죄로 인해 마비되어 당신께 나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당신의 임재 속으로 이끌게 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다.
일요일(2월 24일) 봉사와 제자도
1. 마태복음 8:14-15,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38-39을 읽으십시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마8: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막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4:38,39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답: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이 떠나자마자 곧 일어나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수종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섬김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세 기사는 모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만이 그녀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세한 기록을 했다고 믿는데, 특히 헬라어 상으로 특정한 열병으로 분류된 하나의 질병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이 기사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녀의 병든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시기를 요청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께서 그녀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셨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그 사실을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능력으로 고쳐주시도록 간청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역할에 관해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그분께 인도하여야 한다. 모든 도움의 근원이신 그분께 절실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는 나음을 입은 후에 봉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회복되자마자 자신을 걱정해주던 많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병으로 인해 아직도 피곤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즉시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들면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어근은 아킨(akin)인데 ‘종,’ ‘봉사자,’ ‘집사’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그녀는 나음을 입자마자 즉시 봉사를 시작하였다.
자원하는 봉사를 가납하심
“가버나움의 한 어부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 그러자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봉사하였다(눅 4:38, 막 1:30, 마 8:15)”(치료봉사, 29).
“예수께서는 영혼 내에서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부분적인 봉사를 가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원하는 봉사, 사랑의 강권 아래서 마음을 기꺼이 굴복시키는 것을 갈망하신다”(사도행적, 541).
<부가설명> 봉사는 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환자는 봉사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다. 환자는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봉사자로 오셨다. 그는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다. 실력이 있어야 봉사할 수 있다. 유식해야 무식한 자를 도울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으며 힘이 있어야 약한 자를 도울 수 있다.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 환자였다. 그는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예수께서 그를 완치하셨을 때 그의 집에 예수를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이 기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원한 생명의 치유를 경험한 자들은 봉사의 능력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소 죽은 자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소개하고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봉사를 기꺼이 수행해야 하며, 그런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봉사하는 자인가. 봉사 받기를 기대하는 자인가. 섬김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주 약한 자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교훈: 베드로의 장모는 질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참된 제자도는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다.
월요일(2월 25일) 예수님과 중풍병자
누가복음 5:17-26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누가복음 5:1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힘 있고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까? 또한 우리를 위한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눅5: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답: 예수께서 계신 곳에 치유의 능력이 임한다. 다만 인간의 죄와 교만이 이 능력을 방해할 뿐이다. 특히 유대 종교의 영향력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적극적인 방해 요인이 된 것을 보여준다.
유대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각처로부터 왔다. 본문은 그 때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있었으며, 도움과 치유와 구원이 거기에 있었다. 단 하나의 문제점은 자아와 죄와 교만이 이 일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힘 있는 경고가 되는가?
한편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자들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적극적으로 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리를 뚫고 지나갈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쉽게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친구를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일했던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인정해 주셨는지 주목해 보라.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드러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오는 일을 실천하였다.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은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의 회복된 몸과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증은 강력한 전도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참조 26절).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참람됨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르침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을 방해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한 귀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중풍병자의 믿음
“중풍병자를 멘 사람들은 몇 번이고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이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망하던 도움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어떻게 소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의 요청으로 친구들은 지붕으로 그를 운반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의 발아래에 그를 내려놓았다. 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신음하는 얼굴을 바라보시고 자기를 주목한 탄원하는 눈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사정을 이해하셨다. 그는 이 당황하고 의심하는 심령을 자신에게로 가까이 이끄셨다. 중풍 환자가 아직 집에 있을 동안에 구주께서는 이 사람의 양심에 죄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믿었을 때에 구주의 생명을 주시는 자비하심이 먼저 그 갈망하는 심령에게 복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예수가 죄인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주시하셨으며, 그 믿음이 예수 앞에 나오고자 노력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셨다”(시대의 소망, 268).
교훈: 중풍병자를 낫게 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그의 친구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이다.
화요일(2월 26일)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마 10:34-37, 눅 12:49-53)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장 평화로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즉 그들이 전해야 했던 기별이 오직 화평만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을 일소(一掃)하고 있다. 그들이 집집을 방문할 때, 사역의 결과로 다툼이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 말 것이었다. …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종종 가장 신랄하고 혹독한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이런 일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나며, 종교의 형식만 행하며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일어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2-303).
1. 자신의 그리스도인 경험, 혹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아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해 볼 때,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의 삶에 있어서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참조 마 10:24-25).
마10:24,25, 34-37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답: 행동하는 제자의 삶으로 인해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분쟁이 생겨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이러한 일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언제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일이 닥칠 때에 놀라지 말기를 바라신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친한 형제의 관계를 이루어 준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고 상호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대적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은 그들의 습관과 욕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활 원칙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주는 순결을 증오하며 공의롭고 성결한 복음의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각 시대의 대쟁투, 46).
<부가설명> 예수님과 평화는 정복전쟁의 완벽한 승리의 결과로 이르는 완전한 평화를 뜻하는 것이다. 전쟁 중에는 평화의 소망이 진행되는 것일 뿐 아직 평화가 정착하지 못한 단계이다. 평화의 왕이 완벽한 승리를 이룰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정착한다. 폭군이 승리하면 역시 평화는 없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사9:6). 예수께서 완전한 승리를 하기까지 이 세상은 선악의 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예수님은 이 악의 폭군과 전쟁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조용한 가정에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면 전쟁이 벌어진다. 예수를 믿지 않는 식구들과 예수를 믿는 식구는 그 섬기는 왕이 다르기 때문에 전쟁이 생긴다. 이 세상 신을 왕으로 섬기는 식구들이 예수를 왕으로 섬기기로 선택한 식구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전쟁을 한 편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계속된다. 예수 신앙을 포기하든지 온 식구가 예수를 믿든지 해야 한다. 요즘은 영악한 시대라 무관심으로 냉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철저한 평화의지의 표현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악을 완벽하게 없애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사건들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이런 정복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다. 그 불에 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속히 완전히 소멸되어야 한다. 그때 영원한 평화가 온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불화와 분쟁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수요일(2월 27일) 우리 영혼의 가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어느 잡지의 기사에 어떤 특별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매우 비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었다. 그들의 학업 성취도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은 놀라운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잡지는 이 학생들 중 하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였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우리는 죽음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죽음을 없앤다고?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더 잘해야 할까?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의 인생에서 성취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만간 우리에겐 죽음이 닥쳐오며 머지않아 모든 것이 무덤으로 끝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얼마나 살겠는가? 우리 중 대부분은 100살을 채우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거기에 훨씬 못 미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겨놓을 것인가? 수천 년 전에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문제를 묵상하고(참조 전 1, 2장),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생은 그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하여도 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우리 인생이 ‘숨결’에 불과하며,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기심(利己心)은 곧 죽음이다. 신체의 어떤 기관도 그 활동을 그 자체에게만 한정시킨다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원동력을 손과 머리에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은 그 능력을 속히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피처럼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의 신비한 신체의 각 부분을 통하여 발산된다. 우리는 여러 지체 가운데 하나이니 주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417).
<부가설명> 사람은 죽기 위하여 태어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사람을 원래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창조주와 함께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시조가 사단에게 속아서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를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창조주께서는 그 허물을 스스로 지시고 사람을 다시 영생에 이르도록 그 길을 마련하셨다.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영원한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이 영원한 승자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망이 된 사람들에게 은혜의 기간을 주셨다. 그것이 시간이다. 각 사람은 다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기간은 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다. 하나님이신 분이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 각 개인은 그를 위하여 죽어주신 분만큼 가치가 있다. 우리가 예수님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가치를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내어 다른 사람도 그런 가치에 이르도록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죽음보다 강한 사명이 주어져 있다.
목요일(2월 28일) “그러므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한 가장 위대한 말씀 중 하나를 우리는 마태복음 28:18-20에서 발견한다. 이 구절을 읽어보라. 여기에 나오는 ‘가라,’ ‘제자 삼으라,’ ‘침례를 주라,’ ‘가르치라’ 등의 모든 동사들을 살펴보라. 제자들은 반드시 제자를 만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원리는 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1. 마태복음 28:18-20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참조 눅 1:32, 행 10:36, 엡 1:20, 히 1:1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제자 삼는 일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행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히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답: 그리스도인 제자의 삶은 역동적인 삶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기 위해 어디든지 달려가는 삶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 삼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모든 족속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에는 인종적 차별이나 남녀의 구별이나 민족적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롬 5:17-19, 히 2:9). 따라서 복음의 지상명령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계 14:6-7).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이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하는 삶’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순종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순전히 교리적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주어진다는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셨다. 물론 그러한 일도 제자가 되는 일의 한 부분이 되겠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우리는 그분을 순종함으로 따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준비를 하셨으며 또 사업의 성공에 대한 책임을 몸소 지셨다. 저희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일하는 한 그들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그분은 명하셨다. 사람이 거하는 땅 끝까지 가라. 그러나 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라. 내가 너희를 버릴 때란 결코 없으리니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일하라.
제자들에게 맡기신 구주의 명령에는 모든 신자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 영혼구원 사업이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의존된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하늘의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 사업이 위탁되어 있다”(시대의 소망, 822).
<부가설명>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리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얻은 생명의 본능이다. 그러나 각각 받은 은사가 있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요 교인들은 그 몸의 지체라는 사상은 받은 은사의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 지체된 자리에서 지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본분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에게 있는 은사가 어떤 것이 있든지 그 은사를 증인이 되는데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훈: 진정한 제자의 삶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순종함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금요일 (2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1-304, 10권, 278-282, 시대의 소망, 제37장 ‘최초의 복음 전도자들’(349-358), 제48장 ‘누가 가장 크냐’(433-442), 마가복음 16:15-20, 요한복음 14-17장.
“구주께서는 복음에 대한 세상의 증오는 정복될 것이며 잠시 후에 그 반대가 그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분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투쟁이 생기는 것은 복음의 영향이 아니라 복음에 반대하는 결과로 생긴다. 모든 박해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박해는 가정 안에서의 알력이요 절친한 세상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疎遠)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신다”(시대의 소망, 357).
“예수께서는 다섯 번째 계명의 구속력을 재가(裁可)하셨고, 자녀들이 그 부모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책망하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모든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로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 의무가 서로 상충될 경우에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섬김이 인생의 최고 규칙, 곧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5계명을 포함하고 있는 십계명의 ‘둘째’ 돌판은 그 성격과 중요성에 있어서 첫째와 같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나 안교활동반에서, 혹은 교회 차원에서 도와 줄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핍박하는 가족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을 가족들에게 하면 안 된다. 우선 핍박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면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소망을 굳게 붙잡도록 최대한을 도와야 한다.
2. 이번 주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에 관해 배웠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이 분야에 대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 각 교회 각 반에서 토의해 보라.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섬기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섬길 수 있는 실력을 주시도록 기도할 것이다.
3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6분)
기억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연구범위: 마 8:14-15, 10:34-37, 28:18-20, 눅 5:17-26.
학습 포인트: 우리는 제자로서 어떤 동기를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반대에 부딪칠 것을 예상해야 하는가? 우리가 제자의 일을 시작할 때에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는가?
안식일 오후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는 제자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에 관해 숙고해 보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나, 각 사람은 그 부르심을 깨닫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토머스 캐머런(Thomas Cameron)은 다음과 같은 어느 유명한 설교가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헨델(Handel)의 파이프 오르간을 위해 바람을 잣거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떨어진 붓을 주워 주거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쌍안경을 들어주거나,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가방을 들어 주는 일을 기꺼이 하겠습니다.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을 위해 하찮은 봉사를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영예가 된다면, 하물며 인류의 구세주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큰 특권이 되겠습니까?”(A. 고든 내스비 편, 기독교 세계의 보물, 327).
핵심본문: 눅 5:17-26
학습 목표
깨닫기: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보여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배운다.
느끼기: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키는 장애물을 제거할 필요를 느낀다.
행하기: 죄로 인해 의심과 두려움으로 마비된 자들을 위해 중재한다.
교과 개요
I. 행동하는 믿음
A. 중풍병자 이야기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해 어떤 통찰을 주는가?
B.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용서하신 것은 친구들의 믿음의 결과였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C.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은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의 몸과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얼마나 힘 있는 도구가 되었는가?
II.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
A. 그 친구들은 무리를 통과할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께로 인도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해야 할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B. 과거의 죄로 인해 마비된 사람들에게 어떤 확증을 줄 수 있는가?
III. 다른 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함
A.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를 달아 내리기 전에 먼저 지붕을 뚫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가?
B. 친구들은 그들의 친구를 예수님의 임재 속으로 달아 내렸다.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요점: 예수께서는, 과거의 죄로 인해 마비되어 당신께 나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당신의 임재 속으로 이끌게 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다.
일요일(2월 24일) 봉사와 제자도
1. 마태복음 8:14-15, 마가복음 1:29-31, 누가복음 4:38-39을 읽으십시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제자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마8: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막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4:38,39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답: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이 떠나자마자 곧 일어나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수종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섬김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세 기사는 모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만이 그녀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상세한 기록을 했다고 믿는데, 특히 헬라어 상으로 특정한 열병으로 분류된 하나의 질병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2. 이 기사들에서 강조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녀의 병든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시기를 요청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께서 그녀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셨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 그 사실을 말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능력으로 고쳐주시도록 간청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역할에 관해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그분께 인도하여야 한다. 모든 도움의 근원이신 그분께 절실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는 나음을 입은 후에 봉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회복되자마자 자신을 걱정해주던 많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병으로 인해 아직도 피곤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즉시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들면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어근은 아킨(akin)인데 ‘종,’ ‘봉사자,’ ‘집사’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한 그녀는 나음을 입자마자 즉시 봉사를 시작하였다.
자원하는 봉사를 가납하심
“가버나움의 한 어부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다.’ 그러자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에게 봉사하였다(눅 4:38, 막 1:30, 마 8:15)”(치료봉사, 29).
“예수께서는 영혼 내에서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부분적인 봉사를 가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원하는 봉사, 사랑의 강권 아래서 마음을 기꺼이 굴복시키는 것을 갈망하신다”(사도행적, 541).
<부가설명> 봉사는 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환자는 봉사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허락하지 않는다. 환자는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는 봉사자로 오셨다. 그는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다. 실력이 있어야 봉사할 수 있다. 유식해야 무식한 자를 도울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으며 힘이 있어야 약한 자를 도울 수 있다.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 환자였다. 그는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예수께서 그를 완치하셨을 때 그의 집에 예수를 찾아온 많은 환자들을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이 기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원한 생명의 치유를 경험한 자들은 봉사의 능력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담 안에소 죽은 자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소개하고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봉사를 기꺼이 수행해야 하며, 그런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봉사하는 자인가. 봉사 받기를 기대하는 자인가. 섬김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주 약한 자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교훈: 베드로의 장모는 질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참된 제자도는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섬기는 것이다.
월요일(2월 25일) 예수님과 중풍병자
누가복음 5:17-26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누가복음 5:1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힘 있고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게 됩니까? 또한 우리를 위한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눅5: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답: 예수께서 계신 곳에 치유의 능력이 임한다. 다만 인간의 죄와 교만이 이 능력을 방해할 뿐이다. 특히 유대 종교의 영향력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적극적인 방해 요인이 된 것을 보여준다.
유대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각처로부터 왔다. 본문은 그 때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있었으며, 도움과 치유와 구원이 거기에 있었다. 단 하나의 문제점은 자아와 죄와 교만이 이 일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힘 있는 경고가 되는가?
한편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자들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적극적으로 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무리를 뚫고 지나갈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쉽게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친구를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일했던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인정해 주셨는지 주목해 보라.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드러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오는 일을 실천하였다.
중풍병자는 나음을 입은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떠나갔다. 그의 회복된 몸과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증은 강력한 전도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참조 26절).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참람됨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르침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을 방해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한 귀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중풍병자의 믿음
“중풍병자를 멘 사람들은 몇 번이고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이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망하던 도움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어떻게 소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의 요청으로 친구들은 지붕으로 그를 운반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의 발아래에 그를 내려놓았다. 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신음하는 얼굴을 바라보시고 자기를 주목한 탄원하는 눈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사정을 이해하셨다. 그는 이 당황하고 의심하는 심령을 자신에게로 가까이 이끄셨다. 중풍 환자가 아직 집에 있을 동안에 구주께서는 이 사람의 양심에 죄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믿었을 때에 구주의 생명을 주시는 자비하심이 먼저 그 갈망하는 심령에게 복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예수가 죄인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주시하셨으며, 그 믿음이 예수 앞에 나오고자 노력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셨다”(시대의 소망, 268).
교훈: 중풍병자를 낫게 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그의 친구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제자도의 기본이다.
화요일(2월 26일)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마 10:34-37, 눅 12:49-53)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장 평화로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 중 몇 사람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즉 그들이 전해야 했던 기별이 오직 화평만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을 일소(一掃)하고 있다. 그들이 집집을 방문할 때, 사역의 결과로 다툼이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 말 것이었다. …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종종 가장 신랄하고 혹독한 원수가 되어 버린다. 이런 일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나며, 종교의 형식만 행하며 생애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일어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2-303).
1. 자신의 그리스도인 경험, 혹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아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해 볼 때,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의 삶에 있어서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참조 마 10:24-25).
마10:24,25, 34-37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답: 행동하는 제자의 삶으로 인해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분쟁이 생겨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이러한 일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언제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일이 닥칠 때에 놀라지 말기를 바라신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친한 형제의 관계를 이루어 준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고 상호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대적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은 그들의 습관과 욕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활 원칙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주는 순결을 증오하며 공의롭고 성결한 복음의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각 시대의 대쟁투, 46).
<부가설명> 예수님과 평화는 정복전쟁의 완벽한 승리의 결과로 이르는 완전한 평화를 뜻하는 것이다. 전쟁 중에는 평화의 소망이 진행되는 것일 뿐 아직 평화가 정착하지 못한 단계이다. 평화의 왕이 완벽한 승리를 이룰 때에만 진정한 평화가 정착한다. 폭군이 승리하면 역시 평화는 없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사9:6). 예수께서 완전한 승리를 하기까지 이 세상은 선악의 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예수님은 이 악의 폭군과 전쟁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조용한 가정에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면 전쟁이 벌어진다. 예수를 믿지 않는 식구들과 예수를 믿는 식구는 그 섬기는 왕이 다르기 때문에 전쟁이 생긴다. 이 세상 신을 왕으로 섬기는 식구들이 예수를 왕으로 섬기기로 선택한 식구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전쟁을 한 편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계속된다. 예수 신앙을 포기하든지 온 식구가 예수를 믿든지 해야 한다. 요즘은 영악한 시대라 무관심으로 냉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철저한 평화의지의 표현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악을 완벽하게 없애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사건들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이런 정복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다. 그 불에 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이 속히 완전히 소멸되어야 한다. 그때 영원한 평화가 온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불화와 분쟁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수요일(2월 27일) 우리 영혼의 가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5-37)
어느 잡지의 기사에 어떤 특별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매우 비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었다. 그들의 학업 성취도는 같은 연령대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은 놀라운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잡지는 이 학생들 중 하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였다. 그 학생은 말하기를, “우리는 죽음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죽음을 없앤다고?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더 잘해야 할까?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의 인생에서 성취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조만간 우리에겐 죽음이 닥쳐오며 머지않아 모든 것이 무덤으로 끝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얼마나 살겠는가? 우리 중 대부분은 100살을 채우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거기에 훨씬 못 미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겨놓을 것인가? 수천 년 전에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문제를 묵상하고(참조 전 1, 2장),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생은 그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하여도 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우리 인생이 ‘숨결’에 불과하며,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음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기심(利己心)은 곧 죽음이다. 신체의 어떤 기관도 그 활동을 그 자체에게만 한정시킨다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의 원동력을 손과 머리에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은 그 능력을 속히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피처럼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의 신비한 신체의 각 부분을 통하여 발산된다. 우리는 여러 지체 가운데 하나이니 주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417).
<부가설명> 사람은 죽기 위하여 태어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사람을 원래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창조주와 함께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시조가 사단에게 속아서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를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창조주께서는 그 허물을 스스로 지시고 사람을 다시 영생에 이르도록 그 길을 마련하셨다.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영원한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이 영원한 승자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망이 된 사람들에게 은혜의 기간을 주셨다. 그것이 시간이다. 각 사람은 다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기간은 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다. 하나님이신 분이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 각 개인은 그를 위하여 죽어주신 분만큼 가치가 있다. 우리가 예수님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가치를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내어 다른 사람도 그런 가치에 이르도록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죽음보다 강한 사명이 주어져 있다.
목요일(2월 28일) “그러므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행동하는 제자도에 관한 가장 위대한 말씀 중 하나를 우리는 마태복음 28:18-20에서 발견한다. 이 구절을 읽어보라. 여기에 나오는 ‘가라,’ ‘제자 삼으라,’ ‘침례를 주라,’ ‘가르치라’ 등의 모든 동사들을 살펴보라. 제자들은 반드시 제자를 만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원리는 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1. 마태복음 28:18-20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참조 눅 1:32, 행 10:36, 엡 1:20, 히 1:1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제자 삼는 일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행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엡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히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답: 그리스도인 제자의 삶은 역동적인 삶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기 위해 어디든지 달려가는 삶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 삼는 일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모든 족속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에는 인종적 차별이나 남녀의 구별이나 민족적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롬 5:17-19, 히 2:9). 따라서 복음의 지상명령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계 14:6-7).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이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하는 삶’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행동하는 제자의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순종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순전히 교리적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 주어진다는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셨다. 물론 그러한 일도 제자가 되는 일의 한 부분이 되겠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우리는 그분을 순종함으로 따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분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준비를 하셨으며 또 사업의 성공에 대한 책임을 몸소 지셨다. 저희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일하는 한 그들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그분은 명하셨다. 사람이 거하는 땅 끝까지 가라. 그러나 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라. 내가 너희를 버릴 때란 결코 없으리니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일하라.
제자들에게 맡기신 구주의 명령에는 모든 신자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 영혼구원 사업이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의존된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하늘의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 사업이 위탁되어 있다”(시대의 소망, 822).
<부가설명>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생리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얻은 생명의 본능이다. 그러나 각각 받은 은사가 있다. 교회가 예수의 몸이요 교인들은 그 몸의 지체라는 사상은 받은 은사의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 지체된 자리에서 지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본분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에게 있는 은사가 어떤 것이 있든지 그 은사를 증인이 되는데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훈: 진정한 제자의 삶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순종함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금요일 (2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1-304, 10권, 278-282, 시대의 소망, 제37장 ‘최초의 복음 전도자들’(349-358), 제48장 ‘누가 가장 크냐’(433-442), 마가복음 16:15-20, 요한복음 14-17장.
“구주께서는 복음에 대한 세상의 증오는 정복될 것이며 잠시 후에 그 반대가 그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분께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투쟁이 생기는 것은 복음의 영향이 아니라 복음에 반대하는 결과로 생긴다. 모든 박해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박해는 가정 안에서의 알력이요 절친한 세상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疎遠)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선언하신다”(시대의 소망, 357).
“예수께서는 다섯 번째 계명의 구속력을 재가(裁可)하셨고, 자녀들이 그 부모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책망하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모든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로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두 의무가 서로 상충될 경우에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섬김이 인생의 최고 규칙, 곧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5계명을 포함하고 있는 십계명의 ‘둘째’ 돌판은 그 성격과 중요성에 있어서 첫째와 같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3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나 안교활동반에서, 혹은 교회 차원에서 도와 줄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핍박하는 가족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을 가족들에게 하면 안 된다. 우선 핍박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면 그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소망을 굳게 붙잡도록 최대한을 도와야 한다.
2. 이번 주에 우리는 행동하는 제자의 삶에 관해 배웠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이 분야에 대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 각 교회 각 반에서 토의해 보라.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섬기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섬길 수 있는 실력을 주시도록 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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