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여성(女性)과 제자도(弟子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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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奉ju 작성일08-02-27 20:40 조회5,206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08년2월2일(안) 이봉주 (제5과).hwp (25.0K) 56회 다운로드 DATE : 2008-02-27 20: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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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여성(女性)과 제자도(弟子道)
<프리즘>
◉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利己的)일 때 많은 편견(偏見)을 낳게 된다.
여성(女性)들이 남성(男性)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남성(男性)들이 여성(女性)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이 자신의 성격(性格)에 대해 판단(判斷)하는 것
등(等)과 관련한 선입견(先入見)과, 오해(誤解)와, 엉터리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査實)인 양 통용(通用)되고 있는 것이다.
인지심리학(認知心理學)상으로 볼 때, 인간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 생각하거나 집단적(集團的) 오류(誤謬)에 빠지게 되면 그와 배치(排置)되는 정보(情報)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생각과 행동을 교정(矯正)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선입견(先入見)이나, 오해(誤解)를 기반으로 이성(異性)을 단정 짓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判斷)대로만 대할 때에는, 상대(相對)에 대한 지식(知識)과 이해(理解)가 부족(不足)할 때보다 더 많은 갈등(葛藤)이 발생하며, 오해(誤解)가 오해를 낳는 눈덩이 효과(效果)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傷處)만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라더라’식의 추론(推論)과 잘못된 정보가 개인적 관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 결국(結局) 이성간(異性間)의 문제는 상대(相對)를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100% 잘 알고 있다고 착각(錯覺)하는 것에서 시작(始作)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差別)을 두고 창조(創造)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사랑을 망각(妄覺)할 때 편견(偏見)으로 자기의 생각에 기울도록 판단(判斷) 할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기능(機能)으로 서로 돕는 배필(配匹)로 창조하셨을 뿐이다.
즉 남자의 부족(不足)한 것을 여자가 돕고, 여자의 부족(不足)한 것을 남자들이 돕도록 돕는 배필(配匹)로 창조되었음을 기억(記憶)하고 성별(性別)로 신앙(信仰)과 성경(聖經)을 이분(二分)해서 생각하지 말고 제자도(弟子道)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남녀(男女)공(共)히 같은 맥락(脈絡)으로 생각함이 옳다고 본다.
(日) (1월 27일)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요셉의 아내로써 당시의 문화(文化)와 여건(與件)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큰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감당하는 축복받은 여인(女人)이였다.
◉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말을 들었으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말로써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그녀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때때로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러한 때에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선생님이었다.
가정(家庭)이라고 하는 성소(聖所)에서 "예수님"은 그의 양친(養親)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교육(敎育)을 받으셨다.
그러나 비록"예수님"은 그 크신 사명(使命)을 망각(妄覺)하지는 않았지만 양친(養親)의 부모들의 소원(所願)하는 바를 참작(參酌)하였고 그들의 권위(權威)에 순복(順服)하였다. (YI 1901.8.22)
◉ 마리아는 "예수님"을 예모(禮貌)있게 되도록 가르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정신, 그녀의 모든 요구에 기쁨으로 응(應)하시는 순종심(順從心)을 주목(注目)하지 않을 수 없었다. (YI 1998. 9. 8)
◉ “사가랴는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분께서 미쁘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노년에 어떻게 한 아들이 주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제사장은 잠시 인간의 연약성에 그의 생각을 돌렸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이 불신(不信)은, 천사가 그 귀한 기별을 전하였을 때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한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소망, 98)
◉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는 그들의 집을 떠나 다윗성(城)을 향하여 여행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행하였다. 로마 제국의 거대한 영토(領土)내에 사는 백성들에게 호적(戶籍)을 하라는 명령(命令)이 갈릴리 산악지방(山岳地方)의 거주민(居住民)에게까지 미쳤다.
옛날에 사로잡혔던 주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고레스왕이 세계적인 대국(大國)의 왕위(王位)에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가이사 아구스도도 예수의 어머니를 베들레헴에 인도하는 일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킬 한 그릇이 되었다.
예수의 어머니는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의 자손은 다윗성에서 탄생해야 했다. .”(소망, 44)
◉ (마리아에 대한 마지막 기록)
주일(週日)중 첫째 날 아침 아직 날이 새지 않는 미명(未明)에 경건(敬虔)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香油)를 가지고 무덤에 왔다. 제자(弟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復活)하셨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그 소식(消息)을 전해준 여인들과 함께 급(急)히 무덤으로 달려갔다. (초기191)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의 대답에서 우리는 믿음의 위대(偉大)한 모본(模本)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절실히 요구(要求)된다.
(月) (1월 28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 "예수님"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는 남자제자들 외(外)에도 많은 여인들이 동행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소외계층의 신분(身分)을 갖인 자들로써 죄(罪)로부터의 구원(救援)과 해방(解放)을 경험한 사람들로써 그분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담대함을 소유하게 하였고 갈바리와 무덤까지 찾아갔던 사람들이다.
◉ 마가는 이 여인들을 가리켜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들(막 15:41)이라고 기록하였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사랑의 통로(通路)이자 능력(能力)이시다.
☞ 그분에 실체(實體)대해서 영감(靈感)의 글에서 그 맥(脈)을 찾아보자
◉ “인간 가족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노예 제도와 계급 제도, 부당한 인종 차별,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등 이 모든 것들은 비(非)그리스도인적이고 인류의 복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리스도 교회에게 폐지(廢止)하라고 명하신 죄악(罪惡)으로 제시되었다.”(자서, 473)
◉ “계급제도(階級制度)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질의 것은 어떤 것이나 다 무시(無視)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사람의 영혼은 동등(同等)한 가치(價値)가 있다.
연령, 계급, 국적 혹은 종교적 특권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께 나아가 생명을 얻으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소망, 403)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계급 제도, 사회적인 차별, 피부색, 인종, 지위, 재물, 가문 및 영달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연합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평등 사상에 있다. 모든 분열, 불화 및 차별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에게서 이탈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의 매력이 이끌려야 할 핵심이시며 우리가 그 핵심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정, 동정심, 사랑 및 예수님의 품성과 형상으로 자라는 일에 서로 공감(共感)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대우하는 일이 없으시다.”(1기별, 259)
◉ “그리스도께서는 그 생애로, 계급제도가 있지 아니하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주자나 종이나 다 동등한 형제라는 것을 보이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계급이나 차별이 없다는 종교를 설립하셨다. 그분의 활동은 어떠한 정치의 영향도 받지 아니하였다. 그분께서는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또는 자기편이거나 자기편이 아니거나 간에 차별 없이 대하셨으며, 생명수를 갈망하는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가득하셨다.”(복음, 46)
◉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아셨으며 그들이 따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火) (1월 29일)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 격언(格言)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난처(難處)한 일이나 불행(不幸)한 일이 잇따라 일어남을 이르는 말로써 어려움에 처하면 계속해서 더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經驗)해 보았을 것이다.
(마가복음 5:25-34)의 여인의 이야기도 질병으로 고통을12년이나 겪으면서 가정도 재물도 모두 잃은 여인으로써 얼마나 그의 삶이 망가졌겠습니까?.
남편이나 가족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면 참으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고 있던 처지였을 것이다. 그 여인의 12년이라는 숫자는 질병(疾病)의 심각성(深刻性)을 말해주고 있으며
하혈(下血)하는 여인과의 접촉(接觸)은 부정(不貞)한 것으로 여겨졌다 (레15:25)
여인의 부정한 하혈은 죄(罪)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겔 36:17)
이 여인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병을 고치려 했으나 실패(失敗)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인의 병이 불치(不治)의 병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에는 부유한 사람들만이 의사(醫師)를 찾아 갈 수 있었다.
이 여인은 의사(醫師)의 진찰(診察)을 받느라고 가난(家難)해졌으며 이제 삶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의 기적적(奇蹟的)인 치병(治病) 능력에 대해 소문(所聞)을 들었다
그녀가 몰래 "예수님"을 만지려고 한 것은 공개적(公開的)으로 그녀의 병(病)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율법은 혈루증(血漏症)환자를 부정하게 여겨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禁止)했다. (레15:19-27)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곁에 항상(恒常)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어 그 분을 만나고 그 여인처럼 새 삶을 영위(榮位)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사람들이 가난(家難)하고 병(病)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돈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이웃들에는 병에 걸리면 웬만한 가산(家産)은 바닥이 나고 만다.
물질(物質)로 어려움을 당하고 마음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이 지금도 우리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인간은 으레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출 15:16, 신 2:25, 11:25, 사 19:16, 시 2:11)참조
◉ 예수께서는 십이년 동안 질병(疾病) 때문에 괴로운 생애를 살아온 불쌍한 여인을 군중 가운데서 만나셨다. 그 여자는 모든 재산을 의사의 치료비와 약값으로 다 썼으나 불치(不治)라는 선고(宣告)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신 사실들을 알게 되자 그 여자의 소망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예수께 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 여자는 허약(虛弱)하고 괴로운 중에도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해변에 나와서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 여자는 다시 레위 마태의 집에서 예수를 따랐으나 여전히 예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무리를 헤치고 나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 여자는 드디어 크신 의원이신 예수 앞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혼잡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잠깐 스쳐보았을 뿐 그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그를 붙들 수도 없었다. 구조될 유일의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그 여자는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지나실 때에 앞으로 나아가서 예수의 옷가를 간신히 만지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 여자는 자기가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고 그 즉시로 그 여자의 고통(苦痛)과 쇠약(衰弱)함은 완전한 건강의 활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 살려 달라고 간청했으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은밀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하였다.
이 두 사람의 접근 방식은 크게 달랐지만 이들의 믿음은 참으로 강한 것이었다.
◉ 그녀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으며, “일생의 믿음을 집중”하여 그분의 옷자락을 만졌다(시대의 소망, 343).
◉ 열두 해 동안 혈루병(血淚病)을 앓다가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음으로 나아와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제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水) (1월 30일)
<많은 일로 분주함>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급(急)한 일과 중요(重要)한 일이 언제나 존재(存在)하고 있다.
세상의 일은 급(急)한 것을 항상 요구한다. 그러나 급(急)한 것보다 중요(重要)한 것을 먼저해야한다. 늘 경험하면서 살지만 교회에 출석하려고 하면 왜 그리 급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또한 안식일에는 왜 그리도 바쁘고 급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급한 일들로 인해서 신성(神性)한 예배를 못 드릴때가 많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급(急)한 것과 중요(重要)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설명한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실례를 교훈하여 나에게 적용하자.
◉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寶石)보다도 자기에게 더 귀중(貴重)한 말씀 곧 구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말씀을 그의 심령에 채우고 있었다.
◉ 마르다에게 필요(必要)되는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하는 데 필요한 은혜였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가버릴 일을 위해서 덜 염려하고 영원히 존속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저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 줄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에는 주의성 깊고 정열적인 일꾼이 필요하다.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에게 활동적인 종교 사업에 저희 열심을 다할 넓은 분야가 있다. 그러나 그들로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 앞에 앉게 하라. 근면과 기민성과 정력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화되게 하라. 그리하면 그 생애는 선을 위한 무적의 능력이 될 것이다. (소망 524-525)
◉ <마르다의 문제>
◉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놀라운 교훈을 주실 때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때에 음식 준비하는 일로 당황한 마르다가 예수께 나아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구주와 그의 제자들이 여리고로부터 도보로 수고스러운 여행을 한 직후였다. 마르다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를 염려하는 나머지 손님에게 베풀어야 할 예의를 잊어버렸다. 예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말씀으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소망, 525)
<우리들을 위한 교훈>
◉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모두 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속성을 아울러 갖고 있어야한다.
즉 기쁨의 봉사와 진리에 대한 진지한 사랑, 자아와 이기심은 떨쳐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별 있고,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원칙에는 참된 열렬한 부인 사역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자아와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부르고 계신다. 자아와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진리를 말하며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애쓰는 참을성 있는 부인들을 그분은 부르고 계신다. (6T 118)
◉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일한 마르다의 행위보다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은 마리아의 행위가 더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는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이 미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마르다는 많은 일에 분주함으로 정말 중요한 일을 제쳐둔 사람을 대표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木) (1월 31일)
<우물가의 여인>
◉ 세상에는 두 답답이가 산다.
"예수님"를 믿는 사람이 불신자(不信者)나 이방(異邦) 종교(宗敎)에 심취(心醉)해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또한 그들이 열심히 "예수님"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답답해한다.
요 4:4-30절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이 떠들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익히 소문으로 듣고 있던 남편이 다섯명이나 겪어보아도 별 수 없었고 지금의 남편도 자기의 남편 아닌 여인으로써 지긋지긋한 세파(世波)에 찌들어 살던 여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뉘인지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던 이 여인의 경우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경험(經驗)을 한답니다.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생 지식의 자(尺)대로 모든 사람을 평가(評價)하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자격을 논(論)하고 있는 것의 잘못을 이번의 교과를 통해서 바로 알고 잡아서 "예수님"의 쓰임 받는 제자가 됩시다.
◉ 그 여인은 자기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두운 비밀들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증거(證據)를 발견하였다.
◉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하고 외쳤다. 그녀의 확신에 넘친 모습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달려가 동족에게 담대(膽大)히 전파하였다. 확신(確信)은 담대(膽大)함을 가져온다.
<擴大鏡>
1. "예수님"의 제자(弟子)의 자격(資格)에는 빈부귀천남녀노소(貧富貴賤男女老少)를 차별(差別)하지 아니한다.
2. 말씀과 믿음에 바탕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弟子)가 될 수 있다
<프리즘>
◉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利己的)일 때 많은 편견(偏見)을 낳게 된다.
여성(女性)들이 남성(男性)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남성(男性)들이 여성(女性)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이 자신의 성격(性格)에 대해 판단(判斷)하는 것
등(等)과 관련한 선입견(先入見)과, 오해(誤解)와, 엉터리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査實)인 양 통용(通用)되고 있는 것이다.
인지심리학(認知心理學)상으로 볼 때, 인간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 생각하거나 집단적(集團的) 오류(誤謬)에 빠지게 되면 그와 배치(排置)되는 정보(情報)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생각과 행동을 교정(矯正)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선입견(先入見)이나, 오해(誤解)를 기반으로 이성(異性)을 단정 짓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判斷)대로만 대할 때에는, 상대(相對)에 대한 지식(知識)과 이해(理解)가 부족(不足)할 때보다 더 많은 갈등(葛藤)이 발생하며, 오해(誤解)가 오해를 낳는 눈덩이 효과(效果)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傷處)만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라더라’식의 추론(推論)과 잘못된 정보가 개인적 관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 결국(結局) 이성간(異性間)의 문제는 상대(相對)를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100% 잘 알고 있다고 착각(錯覺)하는 것에서 시작(始作)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差別)을 두고 창조(創造)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사랑을 망각(妄覺)할 때 편견(偏見)으로 자기의 생각에 기울도록 판단(判斷) 할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기능(機能)으로 서로 돕는 배필(配匹)로 창조하셨을 뿐이다.
즉 남자의 부족(不足)한 것을 여자가 돕고, 여자의 부족(不足)한 것을 남자들이 돕도록 돕는 배필(配匹)로 창조되었음을 기억(記憶)하고 성별(性別)로 신앙(信仰)과 성경(聖經)을 이분(二分)해서 생각하지 말고 제자도(弟子道)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남녀(男女)공(共)히 같은 맥락(脈絡)으로 생각함이 옳다고 본다.
(日) (1월 27일)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시며 요셉의 아내로써 당시의 문화(文化)와 여건(與件)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큰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감당하는 축복받은 여인(女人)이였다.
◉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말을 들었으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말로써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그녀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때때로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러한 때에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 마리아는 "예수님"의 첫 선생님이었다.
가정(家庭)이라고 하는 성소(聖所)에서 "예수님"은 그의 양친(養親)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의 하늘 아버지로부터 교육(敎育)을 받으셨다.
그러나 비록"예수님"은 그 크신 사명(使命)을 망각(妄覺)하지는 않았지만 양친(養親)의 부모들의 소원(所願)하는 바를 참작(參酌)하였고 그들의 권위(權威)에 순복(順服)하였다. (YI 1901.8.22)
◉ 마리아는 "예수님"을 예모(禮貌)있게 되도록 가르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정신, 그녀의 모든 요구에 기쁨으로 응(應)하시는 순종심(順從心)을 주목(注目)하지 않을 수 없었다. (YI 1998. 9. 8)
◉ “사가랴는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분께서 미쁘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노년에 어떻게 한 아들이 주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로한 제사장은 잠시 인간의 연약성에 그의 생각을 돌렸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의 이 불신(不信)은, 천사가 그 귀한 기별을 전하였을 때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한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소망, 98)
◉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는 그들의 집을 떠나 다윗성(城)을 향하여 여행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행하였다. 로마 제국의 거대한 영토(領土)내에 사는 백성들에게 호적(戶籍)을 하라는 명령(命令)이 갈릴리 산악지방(山岳地方)의 거주민(居住民)에게까지 미쳤다.
옛날에 사로잡혔던 주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고레스왕이 세계적인 대국(大國)의 왕위(王位)에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가이사 아구스도도 예수의 어머니를 베들레헴에 인도하는 일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킬 한 그릇이 되었다.
예수의 어머니는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의 자손은 다윗성에서 탄생해야 했다. .”(소망, 44)
◉ (마리아에 대한 마지막 기록)
주일(週日)중 첫째 날 아침 아직 날이 새지 않는 미명(未明)에 경건(敬虔)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를 향유(香油)를 가지고 무덤에 왔다. 제자(弟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復活)하셨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그 소식(消息)을 전해준 여인들과 함께 급(急)히 무덤으로 달려갔다. (초기191)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의 대답에서 우리는 믿음의 위대(偉大)한 모본(模本)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절실히 요구(要求)된다.
(月) (1월 28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 "예수님"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는 남자제자들 외(外)에도 많은 여인들이 동행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소외계층의 신분(身分)을 갖인 자들로써 죄(罪)로부터의 구원(救援)과 해방(解放)을 경험한 사람들로써 그분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담대함을 소유하게 하였고 갈바리와 무덤까지 찾아갔던 사람들이다.
◉ 마가는 이 여인들을 가리켜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들(막 15:41)이라고 기록하였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사랑의 통로(通路)이자 능력(能力)이시다.
☞ 그분에 실체(實體)대해서 영감(靈感)의 글에서 그 맥(脈)을 찾아보자
◉ “인간 가족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노예 제도와 계급 제도, 부당한 인종 차별,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등 이 모든 것들은 비(非)그리스도인적이고 인류의 복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리스도 교회에게 폐지(廢止)하라고 명하신 죄악(罪惡)으로 제시되었다.”(자서, 473)
◉ “계급제도(階級制度)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질의 것은 어떤 것이나 다 무시(無視)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사람의 영혼은 동등(同等)한 가치(價値)가 있다.
연령, 계급, 국적 혹은 종교적 특권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께 나아가 생명을 얻으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소망, 403)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계급 제도, 사회적인 차별, 피부색, 인종, 지위, 재물, 가문 및 영달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이 차별하는 것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 연합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평등 사상에 있다. 모든 분열, 불화 및 차별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에게서 이탈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의 매력이 이끌려야 할 핵심이시며 우리가 그 핵심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정, 동정심, 사랑 및 예수님의 품성과 형상으로 자라는 일에 서로 공감(共感)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대우하는 일이 없으시다.”(1기별, 259)
◉ “그리스도께서는 그 생애로, 계급제도가 있지 아니하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주자나 종이나 다 동등한 형제라는 것을 보이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계급이나 차별이 없다는 종교를 설립하셨다. 그분의 활동은 어떠한 정치의 영향도 받지 아니하였다. 그분께서는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또는 자기편이거나 자기편이 아니거나 간에 차별 없이 대하셨으며, 생명수를 갈망하는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가득하셨다.”(복음, 46)
◉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아셨으며 그들이 따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火) (1월 29일)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 격언(格言)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난처(難處)한 일이나 불행(不幸)한 일이 잇따라 일어남을 이르는 말로써 어려움에 처하면 계속해서 더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經驗)해 보았을 것이다.
(마가복음 5:25-34)의 여인의 이야기도 질병으로 고통을12년이나 겪으면서 가정도 재물도 모두 잃은 여인으로써 얼마나 그의 삶이 망가졌겠습니까?.
남편이나 가족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면 참으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고 있던 처지였을 것이다. 그 여인의 12년이라는 숫자는 질병(疾病)의 심각성(深刻性)을 말해주고 있으며
하혈(下血)하는 여인과의 접촉(接觸)은 부정(不貞)한 것으로 여겨졌다 (레15:25)
여인의 부정한 하혈은 죄(罪)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겔 36:17)
이 여인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병을 고치려 했으나 실패(失敗)했다.
이러한 사실은 여인의 병이 불치(不治)의 병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에는 부유한 사람들만이 의사(醫師)를 찾아 갈 수 있었다.
이 여인은 의사(醫師)의 진찰(診察)을 받느라고 가난(家難)해졌으며 이제 삶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의 기적적(奇蹟的)인 치병(治病) 능력에 대해 소문(所聞)을 들었다
그녀가 몰래 "예수님"을 만지려고 한 것은 공개적(公開的)으로 그녀의 병(病)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율법은 혈루증(血漏症)환자를 부정하게 여겨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禁止)했다. (레15:19-27)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곁에 항상(恒常)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어 그 분을 만나고 그 여인처럼 새 삶을 영위(榮位)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사람들이 가난(家難)하고 병(病)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돈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이웃들에는 병에 걸리면 웬만한 가산(家産)은 바닥이 나고 만다.
물질(物質)로 어려움을 당하고 마음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이 지금도 우리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인간은 으레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출 15:16, 신 2:25, 11:25, 사 19:16, 시 2:11)참조
◉ 예수께서는 십이년 동안 질병(疾病) 때문에 괴로운 생애를 살아온 불쌍한 여인을 군중 가운데서 만나셨다. 그 여자는 모든 재산을 의사의 치료비와 약값으로 다 썼으나 불치(不治)라는 선고(宣告)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신 사실들을 알게 되자 그 여자의 소망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예수께 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 여자는 허약(虛弱)하고 괴로운 중에도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해변에 나와서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 여자는 다시 레위 마태의 집에서 예수를 따랐으나 여전히 예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무리를 헤치고 나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 여자는 드디어 크신 의원이신 예수 앞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혼잡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잠깐 스쳐보았을 뿐 그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그를 붙들 수도 없었다. 구조될 유일의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그 여자는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혼잣말로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지나실 때에 앞으로 나아가서 예수의 옷가를 간신히 만지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그 여자는 자기가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고 그 즉시로 그 여자의 고통(苦痛)과 쇠약(衰弱)함은 완전한 건강의 활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 살려 달라고 간청했으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은밀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하였다.
이 두 사람의 접근 방식은 크게 달랐지만 이들의 믿음은 참으로 강한 것이었다.
◉ 그녀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으며, “일생의 믿음을 집중”하여 그분의 옷자락을 만졌다(시대의 소망, 343).
◉ 열두 해 동안 혈루병(血淚病)을 앓다가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음으로 나아와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제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水) (1월 30일)
<많은 일로 분주함>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급(急)한 일과 중요(重要)한 일이 언제나 존재(存在)하고 있다.
세상의 일은 급(急)한 것을 항상 요구한다. 그러나 급(急)한 것보다 중요(重要)한 것을 먼저해야한다. 늘 경험하면서 살지만 교회에 출석하려고 하면 왜 그리 급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또한 안식일에는 왜 그리도 바쁘고 급한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급한 일들로 인해서 신성(神性)한 예배를 못 드릴때가 많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급(急)한 것과 중요(重要)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설명한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실례를 교훈하여 나에게 적용하자.
◉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寶石)보다도 자기에게 더 귀중(貴重)한 말씀 곧 구주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말씀을 그의 심령에 채우고 있었다.
◉ 마르다에게 필요(必要)되는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하는 데 필요한 은혜였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가버릴 일을 위해서 덜 염려하고 영원히 존속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저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 줄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에는 주의성 깊고 정열적인 일꾼이 필요하다.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에게 활동적인 종교 사업에 저희 열심을 다할 넓은 분야가 있다. 그러나 그들로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 앞에 앉게 하라. 근면과 기민성과 정력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화되게 하라. 그리하면 그 생애는 선을 위한 무적의 능력이 될 것이다. (소망 524-525)
◉ <마르다의 문제>
◉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놀라운 교훈을 주실 때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는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때에 음식 준비하는 일로 당황한 마르다가 예수께 나아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구주와 그의 제자들이 여리고로부터 도보로 수고스러운 여행을 한 직후였다. 마르다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를 염려하는 나머지 손님에게 베풀어야 할 예의를 잊어버렸다. 예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말씀으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소망, 525)
<우리들을 위한 교훈>
◉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모두 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속성을 아울러 갖고 있어야한다.
즉 기쁨의 봉사와 진리에 대한 진지한 사랑, 자아와 이기심은 떨쳐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별 있고,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원칙에는 참된 열렬한 부인 사역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자아와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부르고 계신다. 자아와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진리를 말하며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애쓰는 참을성 있는 부인들을 그분은 부르고 계신다. (6T 118)
◉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일한 마르다의 행위보다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은 마리아의 행위가 더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봉사를 한다 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우리는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이 미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마르다는 많은 일에 분주함으로 정말 중요한 일을 제쳐둔 사람을 대표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木) (1월 31일)
<우물가의 여인>
◉ 세상에는 두 답답이가 산다.
"예수님"를 믿는 사람이 불신자(不信者)나 이방(異邦) 종교(宗敎)에 심취(心醉)해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또한 그들이 열심히 "예수님"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답답해한다.
요 4:4-30절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이 떠들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익히 소문으로 듣고 있던 남편이 다섯명이나 겪어보아도 별 수 없었고 지금의 남편도 자기의 남편 아닌 여인으로써 지긋지긋한 세파(世波)에 찌들어 살던 여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뉘인지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던 이 여인의 경우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경험(經驗)을 한답니다.
(요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생 지식의 자(尺)대로 모든 사람을 평가(評價)하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자격을 논(論)하고 있는 것의 잘못을 이번의 교과를 통해서 바로 알고 잡아서 "예수님"의 쓰임 받는 제자가 됩시다.
◉ 그 여인은 자기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두운 비밀들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증거(證據)를 발견하였다.
◉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하고 외쳤다. 그녀의 확신에 넘친 모습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달려가 동족에게 담대(膽大)히 전파하였다. 확신(確信)은 담대(膽大)함을 가져온다.
<擴大鏡>
1. "예수님"의 제자(弟子)의 자격(資格)에는 빈부귀천남녀노소(貧富貴賤男女老少)를 차별(差別)하지 아니한다.
2. 말씀과 믿음에 바탕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弟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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