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내 이웃을 향한 선교(질문, 대답, 설명) 1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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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1-09 20:11 조회4,496회 댓글0건본문
제7과 내 이웃을 향한 선교
(11월 1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0분)
연구 범위: 눅 10:25~37, 딤후 3:16, 약 2:17~22, 마 22:37~40, 갈 5:14, 미 6:6~8
기억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눅 10:27)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피상적인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나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몸과 생각을 온전히, 매일 온전히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하는 데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고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강력하고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요일 4:20, 흠정역)느냐고 요한은 말한다. 바울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갈 5:14)다고 기록했다.
이번 주에는 이 교훈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내가 이웃에게 다가가 사랑을 전하는 참된 이웃이 되기를 원하신다.
느끼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행동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타난다.
행하기: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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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도가 불순한 율법사를 대하는 예수님의 자세는 어떤 교훈을 줍니까?(눅 10:25)
*답: 묻는 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복음 전할 기회를 삼아야 한다는 교훈.
3. 누가복음 10:26은 우리가 가져야 할 성경연구의 자세에 대해 무엇을 알려줍니까?
*답: 우리가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했는지 찾고 바른 방법으로 읽으라고 알려준다.
4. 율법의 핵심, “그것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신앙에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합니까?(눅 10:28)
*답: 얻은 생명의 구원이 생명력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5. 믿음으로 산다는 추상적인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롬 1:17)
*답: 믿음은 사는 것이라고 나타났다. 믿음은 사상이 아니고 삶이다.
6.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믿음의 어떤 면을 부각하고 있습니까?(눅 10:30~37)
*답: 좋은 이웃으로 살라고 부각시킨다.
결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인생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읽고 삶에 적용하며 실천해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 행위에서 드러나며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11월 12일(일) 가장 중요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의 궁극적인 종말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들은 여러모로 인간, 즉 자신이 유한함을 아는 존재(개나 고양이도 유한하지만 이를 알지 못함)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러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누가복음에 나타난다.
누가복음 10:25을 읽어 보라. 이 율법사는 무엇을, 왜 물었는가?
[눅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답: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질문이 진지해도,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때로 어떤 이는 회의적인 자세에 더하여 불신의 모습으로 다가오며 그 사람의 질문 또한 진지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사람도 여전히 선교의 대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동기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실하게 대하셨다. 예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을 이용하여 율법사 자신과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이끄셨다. 주님은 그의 의도가 진실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를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셨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겠는가? 어떤 종교적 예식이나 관습이라도 그 모든 것의 뒤에는 이 질문이 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로 묘사되는 삶을 사는 존재들에게 이 질문을 대체할 만한 중요한 다른 질문이 어디에 있겠는가?
동기가 미심쩍었지만, 율법사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예수님은 모든 기회를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 항상 깨어 계셨기에, 영혼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 기회를 활용하셨다.
고린도전서 15:30~3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영생의 중요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는가?
[고전15:30~32]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답: 영생이 없다면 다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한다.
<교훈> 동기가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도 예수님은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선교의 기회로 사용하셨다.
<부가설명> 유식한 사람들 중에 이 율법사와 같이 우리를 시험하는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의 질문을 들으면 감정이 상하여 화가 치미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했으니 대답할 기회를 준 것이므로 그 기회를 잘 활용할 지혜를 구하면서 진지하게 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험하는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듣게 되면 시험하는 자가 진지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율법사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대답할 때 온유한 말로 하고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벧전3:15). 두려움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 말씀을 나의 생각으로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나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듣는 사람이 합당하면 성령께서 깨닫게 할 것이다.
11월 13일(월) 예수님의 응답과 방법
예수님은 율법사가 질문한 의도를 아셨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갈망과 소원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 그분과 달리 우리는 우리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동기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 모른다.
때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질문한다. 무슬림의 경우에는 ‘성경 어디에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했나요?’라든가, ‘삼위일체라면 하나님은 또 어떻게 한 분이라는 것이지요?’ 같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련된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은 도발적으로 들리지만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속 공허함과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갈망을 나타내는 질문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르며, 다 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다만 최선을 다해 그 사람들을 섬기면 된다.
마태복음 26:56, 사도행전 17:11, 고린도전서 15:3, 디모데후서 3:16을 읽어 보라. 누가복음 10:26에 기록된 율법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마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행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눅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답: 예수님은 오직 말씀에 기록된 대로 율법사에게 대답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답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찾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예수님은 배움의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끄신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스스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답은 이미 성경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교사와 목사의 역할이 있지만, 결국 중요한 진리를 찾으려면 자신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것은 그저 적어 놓은 한 줄의 단순한 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중요성을 신자들에게 알려주는 신성한 진리이다.
<교훈> 예수님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게 하셨다. 우리가 가진 많은 질문도 성경으로 돌아가 답을 스스로 찾고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가설명> 요한 1:1에도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했고 요일1:1에도 그랬다. 계시록 19:13에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말씀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다. 그분 자체가 말씀이셨고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말씀이셨다. 행동과 모든 동작이 말씀의 현현(顯現)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육정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써 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다(요1:12,13). 진정으로 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말씀이 육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너희 안에 거하시는 내 아버지의 성령이시라’(마1)20)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인간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의 이유를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항상 사람들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11월 14일(화) 영생을 얻으려면
누가복음 10:27, 28을 읽어 보라. 이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눅10:27,28]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답: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다.
율법사는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네 대답이 옳도다"(눅 10:28) 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고 하시며 예수님은 그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하셨다.
신자들이 교리와 믿음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고 믿는 바를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지 않아서 구원을 잃게 될 것이다. 앎과 실천 사이의 간격은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 행해야 한다.
야고보서 2:17~2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과 어떻게 유사한가?
[약2:17~22]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답: 믿음은 그 믿는 것을 행함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을 다하여" 순종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거나 내가 도울 수 있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무시한다면 그런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독교는 단지 일련의 신념을 체계적으로 나열한 집합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 16).
<교훈> 진정한 믿음은 교리나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부가설명> ‘믿음과 행함’이라는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 논의가 많은 말이다.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로마서는 믿음을,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깊이 살피면 이것은 행함에 관한 말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행함이 있는 믿음은 그 자체가 산 것이라’라고 할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것은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것은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것은 스스로 행동할 수 없다.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도 같은 질문을 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실을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물이라고 살아있으면 움직인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셨으면(요일5:11,12) 그에게는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은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두 경우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전혀 없거나, 있는데 깊은 병이 들어서 겨우 숨만 할딱거리거나이다. 우리 믿음은 어느 것인가? 생명이 없으면 진정으로 거듭나서 바울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거나(갈2:20), 할딱거리는 생명력을 더욱 풍성하게 되도록 치료해야 한다(요10:10, 렘8:22).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11월 15일(수)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4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10:27, 28의 율법사에게 하신 대답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눅10:27,28]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답: 마태복음은 원리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은 그 원리를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실천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2:37~40에 따르면 예수님은 참된 믿음이 일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누가복음 10:27, 28에서는 이것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랑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이루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을 견실하게 하고 보호해 줄 수 있다. 이 사랑만이 시련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실물 교훈, 49).
갈라디아서 5:14, 미가 6:6~8, 요한일서 4:20, 21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뒷받침해 주는가?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요일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답: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생활하라고 가르친다.
바울에 따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갈 5:14)진다. 바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 사랑이 예증될 때에만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말할 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숨겨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다. 바울, 미가, 요한이 기록한 믿음의 실재는 분명 실제적인 행위에서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큰 지식이 있고 놀라운 일을 하거나 위대한 믿음을 가졌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 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 흠정역)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교훈>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보이는 행동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확인된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말이다. 믿음은 자신을 자기가 믿는 분에게 맡기는 것을 뜻한다(눅16:11, 11절의 맡긴다는 말은 ‘피스튜오’인데 믿는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와 같다. 사도들은 자신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고 했다.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이다. 노예는 주인의 의지가 자기 의지인 존재들이다. 노예는 자기 의지를 버려야 하고 자기 주장과 사상을 버려야 한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나를 통하여 생활하신다면 나는 예수님이 하시는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목회자들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은 모든 성도 안에 계신다. 그래서 안팎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생활하고 드러나게 살게 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이 사랑은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된 사람들에게 생활되는 본성이다. 성경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예수님의 생명으로 들어간 증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지 물어보자(요15:12).
11월 16일(목)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은 율법사의 옳은 대답을 칭찬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고 말씀하심으로 그 사람의 마음 속 중심을 찌르셨다. 질문마다 정답을 말하는 것은 율법사에게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2,000년 전이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는 질문을 이어 던졌다.
누가복음 10:30~37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겠는가?
[눅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답: 너도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가?
때때로 목사, 장로, 신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보다 지역 사회의 사람들에게 더 친절할 수도 있다. 우리가 친절에 대해 이야기 할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다가가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 사람 중 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었는지 물으시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셨다.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시대의 소망, 503).
<교훈> 진리를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이웃은 동료나 교우, 동족만이 아닌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많은 경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말한 이웃에 관한 예수님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것 같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니까?’라는 질문의 답으로 이 비유를 하셨다. 예수님은 비유를 하신 후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누가 이 율법사의 이웃이라고 답하지 않으셨다. 율법사가 이웃이 되라고 답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내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내 이웃이 아니고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이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특히 강도만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도 강도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우리의 선한 이웃 되시는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로 생명을 얻고 치료받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 주위는 예외없이 강도만난 사람들이다. 그 강도가 사탄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에게 전도의 자비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도록 치료의 손길을 뻗어야 한다. 그것이 선교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11월 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54장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읽어 보라.
오늘날 세상에는 굶주리고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맡기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먹을 것이 부족한 지인을 돕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일부터 불의로 인해 시달리거나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 같은 여러 가지 세상 문제들로 고통받는 교우들을 돕는 것까지 다양하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이것이다.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좋은 열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맺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선한 말, 자선의 행위,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동정하는 것이다. 실의와 슬픔으로 눌린 마음을 동정하고, 궁핍한 자에게 나누어 주며 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를 집안에 들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천사들은 매우 가까이 머물 것이며 하늘에서는 응답의 선률이 울려퍼질 것이다. 정의와 자비와 자선의 행위는 하늘에서 노래가 된다. 아버지께서는 그 보좌에서부터 자비를 행한 사람들을 보시며 그들을 가장 귀한 보배로 헤아리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모을 때에 그들이 나의 것이 될 것이라.” 궁핍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베푼 자비는 바로 예수께 베푼 것처럼 간주된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통당하고 압제받는 자를 동정하고, 고아를 가까이 할 때에 그대는 예수와 더 긴밀한 관계에 들어간다"(교회증언 2권, 25).
토의를 위한 질문
1.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빌 2:5~8) 묵상해 보라. 우리가 구원을 얻거나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이 왜 그렇게 큰 오류인가? 구원을 위해 행위로 노력하는 치명적인 실수와 예수님 안에서 이미 받은 구원을 삶에서 나타내는 것의 차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답: 행위는 구원받아 예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생명 작용일 뿐이다.
2.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내재적인 편견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답: 성경의 사상과 맞는지 아닌지 분별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 이번 주 교과에서 공부한 구절들 외에 상대가 누구이건 친절을 베풀어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답: 아브라함과 롯이 손님 대접한 것. 아래 구절들을 보라.
[레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습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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