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질문, 대답, 설명) 1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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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0-13 05:52 조회3,485회 댓글0건본문
제3과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10월 2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8분)
연구 범위: 창 11:1~9, 창 12:1~3, 단 9:24~27, 마 1:21, 창 12:10~13:1, 행 8:1~4, 행 1:8
기억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자신만의 안주지대(Comfort Zone: 편안하고 친숙한 삶과 영역, 편역자 주)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예컨대 바벨탑에서 사람들을 흩어서 퍼지게 하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새로운 변화를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 "이 분산은 사람들을 온 땅에 살게 하는 수단이었다. 이리하여 주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고 했던 바로 그 방편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20).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증거하며 고향에서 타향으로 떠났다(창 12장).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족들을 위해서만 일하다가(행 3장) 이방인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행 8:1~4). 사도행전 1:8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부터 시작하여 사마리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땅끝까지 이르는 전도의 원칙을 제시하셨다.
비록 이들처럼 고향 땅을 떠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하신다. 예루살렘 교회가 현실에 안주하려던 그 때, 성도들이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르렀다. 박해가 닥치고 신자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이런 불행한 사건들이 오히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깨닫기: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느끼기: 하나님은 선교를 위해 안주지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나가게 하신다.
행하기: 부르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원근의 사람들에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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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창 11:4)
*답: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아브라함은 어떤 상황에도 부르심을 따랐습니까?(히 11:8)
*답: 갈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 고향을 떠났다.
4.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아브라함은 어떤 어려움을 경험했습니까?(창 12:10~13)
*답: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가서 시험을 당했다.
5. 초대교회가 벗어나기 두려워했던 안주 지대는 무엇이었습니까?(갈 2:12)
*답: 민족과 그들의 관습이었다.
6. 예수님이 주신 선교의 원칙은 어떻게(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행 1:8)
*답: 자기 가장 가까운데서 시작하여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다.
7. 사도들의 오래된 관습과 편견이 논쟁 없이 무너진 것은 무엇을 시사합니까?(행 11:18)
*답: 성령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신 것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가 자신만의 안주 지대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변화를 주시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 고향과 익숙한 것을 떠나는 것은 어려움을 주지만 이를 통해 세상이 복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사명을 가지고 나가기를 원하신다.
10월 15일(일) 나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각자의 안주지대 밖으로 나가도록 하신다. 같은 민족, 같은 인종, 같은 사회에만 머물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이기심을 넘어 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이런 위험에 대한 교훈을 준다.
창세기 11:1~9을 읽어 보라.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했으며, 하나님은 왜 그것을 막으셨는가?
[창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답: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려는 정신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셔서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
바벨탑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가졌던 큰 야망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념비적인 도시와 탑을 만들어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창 11:4)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그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가? 정치, 예술, 사업, 심지어 종교를 통해서라도 기어이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은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인가?(전 2:1~11)
성경은 창세기 11:4에서 이 사람들이 지면에서 흩어지지 않기 위해 탑을 세우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이유로 서로 모여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으셨다.
이 사람들은 일을 위해서도 연합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라고 하셨다. 사람들의 이 야심찬 계획은 실상은 악한 것이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다 언급하지는 않지만, 엘렌 화잇은 그들이 다시는 물로 땅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고 말한다(창 9:14, 15).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안전을 위해 탑을 건축하려고 했다. 그들의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고 이기적인 야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시고 그들이 말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부가설명>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인간의 협동을 나타내는 표상적 말이 되었다. 그들은 탑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연합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땅에 거주하게 하셨고 노아 때 홍수와 같은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믿고 주장하고 실천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목으로 종말을 처음부터 보시는 분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오늘날도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주신 창조주의 의도롤 믿지 않고 인구팽창과 환경 오염이라는 이유를 대고 우주로 삶의 장소를 옮겨보려고 과학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바벨탑이 성공하는 듯할 때 여호와 삼위께서는 내려오셔서 그들의 모습을 보셨고 탑은 무너졌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바벨탑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예수께서 재림하실는지 모른다. 그날이 시기적으로 언제일지 모르지만, 성도들을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주님 오실 날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교훈> 사람들은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이기적인 이유로 뭉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친숙하고 편안한 것을 넘어 선교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10월 16일(월) 온 세상에 축복이 되는 삶
창세기 12:1~3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지시는 어떤 의미에서 선교에 대한 부르심이었는가?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답: 아버지와 친척 집을 떠나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자리로 가라는 말씀은 선교 사명을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후 아브라함으로 바꾸심)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아브라함은 주의 말씀을 따라 나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가족과 친척, 동족을 떠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곳으로 가서 주님을 섬기라고 부르실 수 있다.
다음 본문을 읽어 보라. 각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 즉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창세기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답: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구주를 약속하셨다
[창세기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답: 이삭의 출생을 약속하셔서 구원의 언약을 확인하셨다.
[민수기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답: 야곱에게서 왕의 규(홀)가 나온다는 약속으로 구원의 왕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답: 근본 하나님이신 분이 아들 아기로 오셔서 정사와 권세를 행하실 것으로 구주의 약속을 확인하셨다.
[다니엘9:24~27]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답: 70이레 예언으로 구주가 오실 역사적 때를 가르치심으로 구주의 약속을 확인하셨다
[마태복음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답: 마침내 구주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시게 됨으로 약속의 성취를 선포하셨다.
위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주셨던 약속, 즉 누군가가 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 분명하다. 이 해결책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혈통(사라를 통해)에서 오실 분이었다. 히브리서 11:9은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의 약속의 상속자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이 자신을 통해 어떻게 생겨날지에 대해 아브라함이 얼마나 알고, 이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얼마나 놀라운 귀감인가!
<교훈>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하여 하나님이 가라시는 곳으로 갔다. 그의 순종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복과 선교의 통로가 되었다.
<부가설명> 성경은 사람의 걸음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우리가 일상생활의 길도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는 이런 구절고 충돌된다. 신앙생활의 길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우리는 자신이 사는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먼나라나 낯선 지방에 가서 전도하지 못해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로 말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전도다. 또 다른 곳으로 가라하실 때는 아브라함 때와 달리 합당하도록 보내신다. 전적으로 목회에 몸을 바치고 전도자로서 삶을 바친 사람은 그 길을 지도하심이 신자로소 일상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선교지도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지금은 조직이 있고 조직질서가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일반 신자들이 당면하는 문제는 자기 생활 현장이 선교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10월 17일(화) 아브라함을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길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에 도착했지만 잔인함과 폭력으로 악명 높은 이교도인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창 12:6)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말씀하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격려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딱히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았다.
창세기 12:10~13:1을 읽어 보라. 이후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이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가?
[창12:10~13:1]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13: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답: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실수에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것 실수까지 했다.
분명히 편안하고 부유했을 고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 11:8)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낙담이 되었겠는가? 그가 처음 직면한 일 중 하나는 기근이었다. 기근이 너무 심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정착하라고 말씀하신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약점과 불완전함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증거하였다. 사라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의 생애 속에서 그처럼 자주 존귀하게 예증되었던 고상한 신앙과 용기의 결핍을 나타내었다 … 아브라함의 믿음의 부족 때문에 사라는 큰 위험에 처하였다. 사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애굽 왕은 그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궁궐로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왕가를 벌하시고 당신의 크신 자비로 사라를 보호하셨다"(부조와 선지자, 130).
누구도 선교 사업이 쉽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써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을 뿐이다. 게다가, 그 실수가 아브라함이 저지른 유일한 실수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브라함의 실수 때문에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순종으로 주님께 매달린다면 우리의 실수, 죄,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교훈> 아브라함은 어려움과 잘못, 실수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브라함을 믿고 사용하셨던 하나님은 부족한 나도 하나님의 선교에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부르셔서 일을 시키는 분이 아니다. 아담의 자손은 아담 안에서 다 썩어가는 옛사람들이 되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약한 사람을 부르셔서 성령으로 지도하시며 일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맘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것을 아신다. 그래도 그런 사람을 불러서 사명을 맡기신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들도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다. 그런 바울이 같은 죄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고잔2:16), 그는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에 한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행20:24). 예수님이 부르셔서 사용하는 사람은 그 부르심 안에 용서와 화평과 성령님의 역사로 주님 복음의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을 성경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다. 열두 제자도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행4:13). 그러나 그들이 성령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능력의 도구가 되었다. 그랬어도 여전히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도 바울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사용하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복음의 기초를 튼튼히 놓으셨다. 그래서 우리도 복음을 받아 진리의 백성이 되고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복음을 생활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들이 된 것이다.
10월 18일(수) 초대 교회와 안주지대
사도행전 8:1~4을 읽어 보라.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이 안주지대를 벗어나 흩어진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행8:1~4]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이전까지 초대교회는 주로 예루살렘 또는 유대 영토나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다. 독실한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8에서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8:4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행 8:4)한 것으로 성취되었다.
교회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후에도 신자들은 여전히 각처의 유대인 거주지나 그 인근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1:19에 따르면 신자들이 베니게(페니키아)와 구브로(키프로스)까지 흩어졌으나 이 단계에서는 유대인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는 유대인 외의 이방인에게 전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좁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초대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베드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베드로는 할례받은 자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알려져 있었다(갈 2:8).
사도행전 10:9~15, 28, 29을 읽어 보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기별은 무엇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원리를 선교 사역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행10:9~15,28,2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답: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가증한 동물이 있는 보자기의 환상으로 이방에 복음 전할 것을 가르치셨다.
초기의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꺼려했다(갈 2:11, 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자신의 안주지대에서 나오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바꾸셨다. 그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실제로 무엇을 수반하는지, 예수님의 죽음이 온 세상을 위해 무엇을 이루시는 것인지 배우기 시작했다.
<교훈> 초대교회와 제자들은 유대인 외에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그들을 밖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안목을 넓혀 주셨다.
<부가설명> 이 문제는 오늘날 평신도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나서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으나 아마도 대부분은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편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데는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지는 않아도 내 나라 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에 식사자리에서 음식과 관련하여 신앙의 소신을 온유와 겸손으로 설명하는 것도 전도다. 안식일에 모이자고 할 때도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를 온유와 겸손으로 설명하는 것도 전도다. 전도지를 들고 집집 방문하면서 전도지를 전하는 것만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한 바울의 권면의 보편적인 의도이다.
10월 19일(목) 내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기
사도행전 1:8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증인이 되거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어떤 원칙을 제시하셨는가?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답: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자기가 있는 곳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여 확장하는 원칙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원칙으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복음을 가진 제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진리를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14:6~12의 세 천사의 기별이 보여주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에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에는 몇 가지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 거듭 강조하지만 성경말씀과 같이 우리는 자신이 지금 거하는 곳에서부터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 가정, 교회, 이웃, 지역사회가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있는 곳, 즉 집이나 직장 등 주님께서 우리를 있게 하신 곳에서부터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 교회 사람들, 직장 동료, 이웃, 지역사회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먼 나라, 낯선 문화권으로 떠나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면서 정작 바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증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거기서부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행 1:8). 예수님은 증인이 되는 것이 문화적 경계를 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증하신다. 우리는 있는 곳에서 시작해서 다른 사회, 민족, 종교 집단에 다가가도록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도 있다. 증인이 증거해야 하는 어떤 민족이나 언어 집단에 이미 속해 있다면 넘어야 할 문화적 장벽이 낮기 때문에 증거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는 교회가 한 씨족이나 부족만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사명은 우리가 그분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안주지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힘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
함께해요: 지역사회에서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중 교회가 미처 다가가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목록을 작성하십시오.
시작해요: 가까운 시일에 그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부가설명> 선교는 주로 해외에 전도하는 경우를 말하고 전도는 자기 나라 안에서 전도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해외 선교도 반드시 그 지역에 가야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 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인들이 다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선교 활동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현지에 가서 직접 선교 활동하는 선교사는 현장 선교사이지만, 기도하고 선교헌금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은 후원 선교사들이다. 선교는 첫째로 성령께서 지도하시고 다음은 후원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힘을 얻게 된다. 재림교회의 선교는 교단의 지원을 받지 않고 사적으로, 또는 사 조직을 통하여 선교지에 파송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다 교단과 그런 조직을 통하여 후원 선교사들의 훈원을 받는다. 현장 선교사가 아닌 성도들은 다 기도와 헌금으로 후원 선교사로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분부에 순복하는 선교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생활 전도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 도와주소서.
<교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속해 있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한 이후에 복음을 모르는 더 먼 곳까지 나아가 증거하도록 선교의 원칙을 알려주셨다.
10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사도행적 3장 "대사명," 14장 ”진리의 탐구자“를 읽어 보라.
“비록 내 백성이 생명을 얻으러 내게 오지 않았어도, 비록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기록된 대로 나에게 행했어도, 비록 그들이 나를 거절했어도, 아직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내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나에게 나오는 사람들을 즐겨 용납하는 것을 보았다. 내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제자인 그대들에게 이 은혜의 기별을 위탁한다. 이 기별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첫째는 이스라엘에게 또 모든 나라와 방언과 백성들에게 모두 전해져야 한다 … 복음 전도 사명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대선교 헌장이다. 제자들은 영혼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만민에게 은혜의 초청을 전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기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하였다"(사도행적, 27).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마 28:19)으라는 대사명이 주어진 것은 분명하며 그것은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나라로 가는 것까지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더욱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어두운 죄악 세상 가운데서도 주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실 보석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다. 어느 곳에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굳게 설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세상의 이익보다도 하나님의 지혜를 귀중히 여길 것이며 충실한 빛의 증거자들이 될 것이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리하여 아무 논쟁 없이 편견이 무너지고, 오랜 관습으로 인해 확립된 배타심이 제거되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사도행적, 140~142).
토의를 위한 질문
1. 선교라는 단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할 때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답: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생명 복음을 생활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2. 그대는 일상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 선교할 수 있겠는가? 일상의 일과 중에서 어떻게 하면 더 선교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답: 1번의 답과 같다.
3.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위로부터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답: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태도가 준비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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