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여성과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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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08-02-27 20:34 조회5,413회 댓글0건본문
제 5과 여성과 제자도
2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6분)
도입)
과거의 역사에서의 여성,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고 늘 배후요 들러리요 주변이었다. 왜 그렇게 여성의 지위가 허약하게 된 것일까? 인류의 재앙은 여성이 자기 사명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뱀의 책략 앞에서 하와는 하나님을 변호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인에게서 무시를 당했다. 그것은 결국 남녀 간의 연합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제 여성은 돕는 자로서의 남자의 강력한 동맹과 영적 자원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신에, 소유하고 남성들에게 통제 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죄의 시작은 결국 남녀가 함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대신 서로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다투는 역사로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결국 여성은 침묵하고 다소곳하고 뵈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남성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처럼 여자들은 억압을 당해 왔고 힘 있는 남자들은 이렇게 말했고, 많은 남자들도 그렇다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들에 대한 왜곡이고 잘못된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하나님 사랑(하나님의 형상)과 이웃 사랑(돕는 자)이라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고귀하고 고유한 사명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남성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배우자를 잃은 때라고 한다. 교회는 참 오랫동안 여인들을 잃은 채 살아오면서도 그 손실을 슬퍼할 줄 모를 만큼 불감증 환자였다. 암이 무서운 것이 심각해지기까지 통증이 없는 것이라지 않은가. 여성의 재발견은 남성의 소생과 치유의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전 통치 영역에서의 남녀의 복된 연합이 남성과 여성이 온전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고,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야 여성의 바른 역할이 회복될 것이고 이 세상의 역사도 회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연구범위: 막 5:25-34, 눅 1:26-38, 8:1-3, 10:38-42, 요 4:4-30.
중심 사상: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는 어떤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았는가? 예수님의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우물가의 여인의 이야기에서 제자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여성들의 활약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기부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분의 모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탄생시켰는데, 물론 이 일은 오직 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믿음과 복종의 모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 여성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음을 입은 여인과 우물가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기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여성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더 많은 통찰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예수께서 어떻게 여성들과 더불어 일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월 27일)
“내게 이루어지이다”
도입)
‘제자도’하면 우리는 흔히 남성들만의 이야기로 생각하진 않는가? 예수님이 훈련한 열두 명의 제자들이 모두 남자여서 일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제자도하면 흔히 남성들에게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신약에 나타나는 여 제자들은 하나님이 미래 세대의 모든 제자들을 위해 시대를 초월해 모델로 준비하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여성 제자들의 비범하고 감동적인 삶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특징과 교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신약의 여성 제자들이 보여준 용기 있는 헌신과 인격 등을 본받도록 하고 또한 그런 삶을 위해 분기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도란 제자로서 충성을 다해야 하는 예수의 형상을 날마다 조금씩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구약에 나타난 여성들의 신앙과 성품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품성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 누가복음 1:26-38을 읽으십시오. 마리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구절들을 통해 마리아는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까? 그녀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습니까?
답:
과학 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보다 초자연적인 일에 대해 더 쉽게 받아들이던 고대 사회에서조차도 마리아에게 한 천사의 말은 믿음의 극한(極限)을 요구할 만큼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첫째,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난 역사가 있었던가?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게다가 그녀의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그녀가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천사가 나이 늙어 임신한 친족 엘리사벳(눅 1:5-25)에게 일어난 기적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는 힘 있는 재보증의 말씀을 주었을 때 마리아는 믿음과 수용의 말로써 반응하였다.
2.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한 대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는 어떤 태도를 나타냅니까? 마리아의 믿음의 모본은 우리에게 어떤 귀감이 됩니까?
답:
성육신(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 수세기 동안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젊은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나려고 한 일에 대해 얼마나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복종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의 대답에서 우리는 믿음의 위대한 모본을 본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부가적용)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구원의 계약을 구축하고 있는데 구약의 사건들의 중심에는 모두 남성이 구원의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다르다. 구원의 역할에 있어 하와의 불순종을 통해 잃었던 여성의 수치를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의 통로를 열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할게 될 위험이 있지만 에덴을 잃게 하였던 통로가 된 것이 여성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통로로서 여성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여성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여성의 역할은 더 이상 이 세계 역사의 변두리가 아니라 구원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구약은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신약은 구원하시는 어머니의 역할을 보여주는 책이다. 아버지의 공의와 위엄을 구약에서 보았다면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과 중보에 대한 신약의 새로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결합을 통해서만 한 인간이 완전한 것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조차 이처럼 조화로운 하나님의 배려는 심오한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더 깊게 읽어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월요일(1월 28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도입)
누가복음 8장 1-3절『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에 의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할 때, 남성 제자들이 함께 하였던 것 같이 여성들도 함께 함으로서 여성 제자 그룹이 있었다. 그리고, 남성 열두 제자 그룹을 대표하여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다면, 갈릴리의 여성제자들을 대표하여서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가 있었다. 갈릴리로부터 온 이 여성제자 집단은 예수의 전도 여행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속하여 있던 재물까지도 다 바쳐서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기에 남성제자들 보다, 더 능동적인 제자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때로 많은 주석가들이 이 여성들이 예수를 쫓아 『섬겼다』는 말을 여성의 남성 종속적 의미를 지닌『시중들다』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새 번역, 공동번역, 독일어, 영어성경 등 참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여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마치 빨래나 밥을 해주기 위하여서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섬겼다』라는 희랍어 동사 디아코네오(diakoneo)는 예수가 세상을 섬기러 왔다는 의미와 똑같은 섬김을 말하고 있기에 여성들이 이미 예수의 가르침인 섬김의 삶을 실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누가복음 8:1-3에는 예수님의 두 번째 갈릴리 여행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여행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또 어떤 이들이 동행하였습니까?
답:
누가는 예수님의 선교여행에 여인들이 동행했음을 매우 분명히 언급하였는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당시 소외계층 중 하나인 여자들에게 예수께서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셨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러 기록을 남긴 유일한 복음서 기자이며, 마리아나 엘리사벳 그리고 안나와 같은 여자의 관점에서 기록하곤 하였다. … 이것은 천국복음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위한 것이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여성들의 몫이 남성들의 역할만큼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07).
예수께서 여인들이 따르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독특한 일이었다. 그 당시의 다양한 종교적 운동에서 대체로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교사들은, 여자는 머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배울 수도 없고 남자들과 함께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도 안 되며 집안에 틀어박혀 가사나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복음서 전반에 걸쳐 여성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여러 면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2. 마태복음 27:55-56과 마가복음 15:40-41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의 봉사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에 관해 또 어떤 정보를 줍니까?
답:
이 여인들 중 어떤 이들은 여러 질병에서 나음을 받고 그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의 사역을 돕고 생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선교여행에 가담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계를 돕고 필요들을 공급한 과부들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헌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초기 교회에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훈: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아셨으며 그들이 따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길리건이란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도덕적 판단을 보이는 것을 연구한 결과 남성들은 사회의 질서나 법을 중시하는 이른바 정의(justice)의 원리에 입각한 도덕 판단을 시도하고 사회 구성원에게 허용된 권리(right)를 적절하게 수행했는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질서 자체 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두고 범죄한 자의 관계까지 고려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양육과 같은 보살핌(care)의 책임성(responsibility)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관계적인 앎을 통해 '감정이입'을 함께 동반한 세심한 돌봄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벨렝키는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접근할 때 제자들이나 니고데모에게 했던 것처럼 가르치려 하거나 이성적 논리적 접근을 하기보다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에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혹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라고 접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신 분이시지만 또 여성들에게는 철저히 상대방을 중심으로 접근하셨던 분이셨다.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가 위대한 성육신이었던 것처럼 모든 자들에게 세심하게 성육신 하신 분이었다.
화요일(1월 29일)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도입)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고, 누구의 옷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행복을 위하여 사랑의 손을 잡고, 출세를 위하여 권력의 손을 잡고,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기업가의 손을 잡기도 한다. 또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잡는 우정의 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손을 잡아서 잘되면 좋지만 안 될 수도 있다. 사랑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불행하게 되고, 잘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잘못되고, 영광을 위하여 잡았지만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의 손보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고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 가운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10명의 정탐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잘해도 손을 잡으면 잘못되는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줄을 잘서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손을 잘 잡아야 한다. 오늘 이 여인은 제대로 붙잡아야 할 분을 제대로 붙잡은 전형적인 믿음의 모델이다.
마가복음 5:25-34에서, 절망적인 질병에서 나음을 입은 한 여인의 유명한 이야기를 읽어보라. 성경 본문은 그 여인을 제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제자에게 필수불가결한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한 방식과 회당장 야이로가 그분께 접근한 방식(막 5:22-23) 사이의 흥미로운 대조를 주목해 보라.
1. 이들이 접근한 방식을 각각 어떻게 달랐습니까? 동시에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이 여인은 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께 왔을 때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 위대하신 분에 관해 증언해 주었을 때 그녀는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그녀의 첫 번째 믿음의 행동이었다(참조 요 20:29, 히 11:1).
본문에 따르면 그 여인은 분명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그녀는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신체적 접촉을 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녀가 결혼한 상태라면 남편과 관계를 갖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의식법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아이들을 만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열두 해를 지냈던 것이다!
1. 그녀가 다음으로 나타낸 큰 믿음의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그녀의 행동이 아무리 은밀하였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녀는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모든 것을 예수님께 고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간증을 말함으로써 제자로서의 첫 번째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제 모든 상황이 공개되었으므로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기가 더 쉬워졌다.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관해 듣고 왔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분에 관해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교훈: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다가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음으로 나아와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제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부가적용)
막 5:28절에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다. 여기서 ‘함일러라’는 계속했다는 말이다. 이 여인은 손만 대어도 구원 얻을 줄 믿고 또 믿었다. 우리는 믿고 또 믿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겠다. 여인의 행동은 소망이 아니라 굳은 마음이었다. 예수님의 몸에 불결한 자신의 손일지라도 대기만 하면 반드시 낫게 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오고 또 나와야 한다. 나오는 것이 문제 해결을 받는 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인생의 난관에 부딪쳤을지라도 결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안된다. 교회야 말로 우리 주님의 옷자락이다. 교회에 나올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과 심정으로 나와야 한다.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섞여 나왔듯이 주님께로 나와야 문제 해결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셨을 때에는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곧 담대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했다.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신앙이 바로 우리 성도의 고백인 것이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얻는 것이다. 여인이 입으로 시인할 때 즉시 주님은 그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했다. 그리고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했다. 이것은 믿음의 결과였다. 감사고백의 결과였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병고침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믿음과 감사를 고백함으로 구원까지 얻었다. 이 여인은 감사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세상의 화려한 인간의 옷자락을 잡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기 바란다.
수요일(1월 30일)
많은 일로 분주함
도입)
인생은 자신 또는 가족, 사회를 위해 준비하는 일로 항상 바쁘다.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마음은 분주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정하여 지혜롭게 일처리를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능률을 올리고 기대했던 만큼의 어떤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만 분주했지 얻은 결과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 그러다가 아무 일도 마치지 못한 것이다. 분주한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일들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을 잡지 못하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때때로 분주한 아이들을 향하여 어른들이 하는 말이 "마음 좀 잡아라"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되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분주한 마음은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분주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 마음의 집중은 믿음으로 이어지기에 너무도 중요하다. 마음의 집중이 없으면 기도가 되어 지지 않는다. 많은 설교자들이 말씀 듣는 것이 일 하는 것 보다 더 좋다고 설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르다가 되지 말고 마리아가 되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르치는 분문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일로 인한 분주한 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되면 열매를 맺지 못하니 분주한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오직 그분과 시간을 보냄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우리는 분망한 삶에서 많은 중요한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러한 와중에서 그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1. 누가복음 10:38-42을 읽으십시오. 이 이야기는 비록 좋은 일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두 명의 여성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답: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아무도 그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본문은 또한 그녀가 그분의 발아래 앉았다고 말한다. 1세기에 교사들은 높은 의자에 앉고 제자들은 낮은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앉음으로 발아래 앉았다. 누군가의 발아래 앉는다는 것은 제자나 배우는 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분의 제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비교 행 22:3).
언니 마르다는 정반대였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녀가 많은 접대로 인해 ‘마음이 멀리 떠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마르다를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이 그들의 집에 오셨는데, 손님에게 시중드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으로 하여금 도와주게 해달라고 호소했는데, 당시의 풍습으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리아의 위치는 남자들과 함께 하는 ‘식탁’이 아닌 가사를 수행하도록 여자들에게 지정된 ‘부엌’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꾸짖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나무라셨다. 그분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심으로 관심을 나타내셨다. 마르다의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 모두는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을 미루어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훈: 마르다는 많은 일에 분주함으로 정말 중요한 일을 제쳐둔 사람을 대표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도리어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하셨다고 칭찬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마르다를 정죄한 것으로나 마르다의 수고를 책망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다의 수고는 반드시 필요한 봉사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수고에 대하여 나쁘다고 하지 않으셨다. 어느 편이 좋다 나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주님의 음식을 만드는 일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마르다의 수고는 나쁜 것이 아니었고 그는 정죄 받을 일이 아닌 합당한 봉사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일을 가볍게 하여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은 더 좋은 편이다. 우리는 마르다의 수고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교회에서 안식일마다 수고하는 여 집사님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도 일을 가볍게 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편이 더 나은 편이 될 수 있다. 가볍게 식사를 준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은 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엌일을 돕는 집사님들을 나쁘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점은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분주하여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항하여 있지 못하면 그 일 또한 주님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주를 위한 일이 되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주를 위한 일이라 하면서도 우리는 여러 마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허망한 마음에서 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분주한 마음을 씻어내라. 꼭 필요한 몇 가지 일이든지, 아니면 한 가지라도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여 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목요일(1월 31일)
우물가의 여인
도입)
요한복음 3장과 4장에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유대인이다. 그러나 4장에 등장하는 이 우물가의 여인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이다. 종교적으로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었다면, 여인은 종교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니고데모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관료였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니고데모는 많은 특권을 받아 누리는 남성의 신분이었고, 이 여인은 많은 여자들처럼 아무 혜택 받지 못하는 여성의 신분이었다. 니고데모는 밤에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용기와 영적 갈급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람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 싶다”는 선물을 가지고 찾아가셨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 모두 만나주셨고 동시에 두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분이시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힘이 없고,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가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실 때 획일적이 아니라 각 개인의 형편에 맞추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수준에 맞게 찾아오신다.
1. 요한복음 4:4-30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여인의 신뢰심을 얻으셨으며, 그녀로 하여금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까?
답: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자들은 그분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인도하신 과정을 주의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인도하신 과정에는 네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예수께서는 (1)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를 일깨우셨고(7-15절), (2) 개인적 필요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셨으며(16-20절), (3)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도록 결심을 촉구하셨고(21-26절), (4) 결심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하셨다(26-30, 39-42절).
이 여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지 상상해 보라. 먼저 이 낯선 유대인이 예상치 않은 친절을 보여주시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깊고 어두운 비밀들을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라고 대답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뿐 아니라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심을 인정한 말이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여인이 화제를 바꾸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녀의 죄에 대해 아무런 압박도 주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녀의 대화를 이어받아 더 깊은 진리를 제시하시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이신 당신께로 인도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셨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분을 믿게 되었다.
2. 이 여인이 자신의 동족에게 어떻게 증거했는지 살펴보십시오(29, 39절).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녀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자기 자신에 관한 약간의 고백을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그리할 때 그녀의 증언은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요?
답:
교훈: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달려가 동족에게 담대히 전파하였다. 확신은 담대함을 가져온다.
부가적용)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복음 전파 즉, 전도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삶속에서 체험할 때 가능해진다. 그때 자기 인생의 구원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주님을 영접, 그 높고 귀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고 모두 전도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수가성 여인을 보면 그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결혼을 했지만 인생의 실패자로 목마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 자기 인생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뒤 전도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외친 한 마디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였다. 이렇게 외치면서 동네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었다. 가난하고 상처 많은 한 여인에게 단 한 번의 중요한 만남이 삶의 변화에 전환점이 되고 변화된 그를 통하여 자기 삶의 현장이 변화되는 수가성의 역사는 우리에게 꼭 만나야 할 하나님을 만나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생의 해답과 치유와 구원을 얻게 된 복음의 진수이다. 복음을 가진 한 사람의 중요성(바울)과 단 한 번의 만남의 중요성을 보라(행8:26-40). 예수님과의 만남이 생의 해답과 치유와 구원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던 이 여인처럼 우리의 삶에 치유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발현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런 주님의 종이 될 것이다. 먼저 우리의 삶에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 경험이 중요하다.
금요일(2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607-609, 678-679, 10권, 178-179, 328-330, 543-546, 시대의 소망, 제58장 ‘나사로야 나오라’(524-536).
“마르다에게 필요되는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하는 데 필요한 은혜였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가버릴 일을 위해서 덜 염려하고 영원히 존속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저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 줄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시대의 소망, 525).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을 섬기는 여자들의 봉사를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 부분이 생소해 보이는 것은, 예외적으로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여자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그들의 봉사를 받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공공 생활에서 유대 여자들의 역할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0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모친이 된 마리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녀는 무엇을 믿으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그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도록 요청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믿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조언해 줄 수 있을까요?
2.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을 제자화하는 일을 이전보다 더욱 강력히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2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6분)
도입)
과거의 역사에서의 여성,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고 늘 배후요 들러리요 주변이었다. 왜 그렇게 여성의 지위가 허약하게 된 것일까? 인류의 재앙은 여성이 자기 사명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뱀의 책략 앞에서 하와는 하나님을 변호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인에게서 무시를 당했다. 그것은 결국 남녀 간의 연합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제 여성은 돕는 자로서의 남자의 강력한 동맹과 영적 자원으로 소중하게 여겨지는 대신에, 소유하고 남성들에게 통제 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죄의 시작은 결국 남녀가 함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대신 서로를 정복하고 다스리려고 다투는 역사로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결국 여성은 침묵하고 다소곳하고 뵈지 않는 곳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남성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처럼 여자들은 억압을 당해 왔고 힘 있는 남자들은 이렇게 말했고, 많은 남자들도 그렇다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들에 대한 왜곡이고 잘못된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하나님 사랑(하나님의 형상)과 이웃 사랑(돕는 자)이라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고귀하고 고유한 사명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남성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배우자를 잃은 때라고 한다. 교회는 참 오랫동안 여인들을 잃은 채 살아오면서도 그 손실을 슬퍼할 줄 모를 만큼 불감증 환자였다. 암이 무서운 것이 심각해지기까지 통증이 없는 것이라지 않은가. 여성의 재발견은 남성의 소생과 치유의 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전 통치 영역에서의 남녀의 복된 연합이 남성과 여성이 온전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고,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야 여성의 바른 역할이 회복될 것이고 이 세상의 역사도 회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8).
연구범위: 막 5:25-34, 눅 1:26-38, 8:1-3, 10:38-42, 요 4:4-30.
중심 사상: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는 어떤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았는가? 예수님의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우물가의 여인의 이야기에서 제자도에 관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여성들의 활약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기부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분의 모친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탄생시켰는데, 물론 이 일은 오직 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남긴 믿음과 복종의 모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 여성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음을 입은 여인과 우물가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기 위해 마음이 열려 있는 여성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더 많은 통찰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예수께서 어떻게 여성들과 더불어 일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월 27일)
“내게 이루어지이다”
도입)
‘제자도’하면 우리는 흔히 남성들만의 이야기로 생각하진 않는가? 예수님이 훈련한 열두 명의 제자들이 모두 남자여서 일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제자도하면 흔히 남성들에게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신약에 나타나는 여 제자들은 하나님이 미래 세대의 모든 제자들을 위해 시대를 초월해 모델로 준비하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여성 제자들의 비범하고 감동적인 삶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특징과 교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신약의 여성 제자들이 보여준 용기 있는 헌신과 인격 등을 본받도록 하고 또한 그런 삶을 위해 분기해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도란 제자로서 충성을 다해야 하는 예수의 형상을 날마다 조금씩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구약에 나타난 여성들의 신앙과 성품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품성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 누가복음 1:26-38을 읽으십시오. 마리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구절들을 통해 마리아는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까? 그녀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습니까?
답:
과학 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보다 초자연적인 일에 대해 더 쉽게 받아들이던 고대 사회에서조차도 마리아에게 한 천사의 말은 믿음의 극한(極限)을 요구할 만큼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첫째, 그녀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난 역사가 있었던가?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게다가 그녀의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그녀가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천사가 나이 늙어 임신한 친족 엘리사벳(눅 1:5-25)에게 일어난 기적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는 힘 있는 재보증의 말씀을 주었을 때 마리아는 믿음과 수용의 말로써 반응하였다.
2.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한 대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는 어떤 태도를 나타냅니까? 마리아의 믿음의 모본은 우리에게 어떤 귀감이 됩니까?
답:
성육신(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에 관한 신학적 논쟁이 수세기 동안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젊은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나려고 한 일에 대해 얼마나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복종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교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의 대답에서 우리는 믿음의 위대한 모본을 본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부가적용)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구원의 계약을 구축하고 있는데 구약의 사건들의 중심에는 모두 남성이 구원의 그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다르다. 구원의 역할에 있어 하와의 불순종을 통해 잃었던 여성의 수치를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의 통로를 열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할게 될 위험이 있지만 에덴을 잃게 하였던 통로가 된 것이 여성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구원의 통로로서 여성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여성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도 하나님이셨다. 여성의 역할은 더 이상 이 세계 역사의 변두리가 아니라 구원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구약은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신약은 구원하시는 어머니의 역할을 보여주는 책이다. 아버지의 공의와 위엄을 구약에서 보았다면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과 중보에 대한 신약의 새로운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결합을 통해서만 한 인간이 완전한 것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조차 이처럼 조화로운 하나님의 배려는 심오한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더 깊게 읽어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월요일(1월 28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도입)
누가복음 8장 1-3절『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쌔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에 의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할 때, 남성 제자들이 함께 하였던 것 같이 여성들도 함께 함으로서 여성 제자 그룹이 있었다. 그리고, 남성 열두 제자 그룹을 대표하여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었다면, 갈릴리의 여성제자들을 대표하여서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가 있었다. 갈릴리로부터 온 이 여성제자 집단은 예수의 전도 여행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속하여 있던 재물까지도 다 바쳐서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기에 남성제자들 보다, 더 능동적인 제자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때로 많은 주석가들이 이 여성들이 예수를 쫓아 『섬겼다』는 말을 여성의 남성 종속적 의미를 지닌『시중들다』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새 번역, 공동번역, 독일어, 영어성경 등 참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여성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마치 빨래나 밥을 해주기 위하여서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섬겼다』라는 희랍어 동사 디아코네오(diakoneo)는 예수가 세상을 섬기러 왔다는 의미와 똑같은 섬김을 말하고 있기에 여성들이 이미 예수의 가르침인 섬김의 삶을 실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누가복음 8:1-3에는 예수님의 두 번째 갈릴리 여행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여행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또 어떤 이들이 동행하였습니까?
답:
누가는 예수님의 선교여행에 여인들이 동행했음을 매우 분명히 언급하였는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당시 소외계층 중 하나인 여자들에게 예수께서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셨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여러 기록을 남긴 유일한 복음서 기자이며, 마리아나 엘리사벳 그리고 안나와 같은 여자의 관점에서 기록하곤 하였다. … 이것은 천국복음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위한 것이며,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여성들의 몫이 남성들의 역할만큼 중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07).
예수께서 여인들이 따르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독특한 일이었다. 그 당시의 다양한 종교적 운동에서 대체로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교사들은, 여자는 머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배울 수도 없고 남자들과 함께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도 안 되며 집안에 틀어박혀 가사나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복음서 전반에 걸쳐 여성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여러 면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2. 마태복음 27:55-56과 마가복음 15:40-41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의 봉사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에 관해 또 어떤 정보를 줍니까?
답:
이 여인들 중 어떤 이들은 여러 질병에서 나음을 받고 그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기 위해 그분의 사역을 돕고 생계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선교여행에 가담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계를 돕고 필요들을 공급한 과부들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헌신이 무엇이었든 간에 초기 교회에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훈: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아셨으며 그들이 따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길리건이란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도덕적 판단을 보이는 것을 연구한 결과 남성들은 사회의 질서나 법을 중시하는 이른바 정의(justice)의 원리에 입각한 도덕 판단을 시도하고 사회 구성원에게 허용된 권리(right)를 적절하게 수행했는지의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질서 자체 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두고 범죄한 자의 관계까지 고려의 대상으로 포함시켜 양육과 같은 보살핌(care)의 책임성(responsibility)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관계적인 앎을 통해 '감정이입'을 함께 동반한 세심한 돌봄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벨렝키는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접근할 때 제자들이나 니고데모에게 했던 것처럼 가르치려 하거나 이성적 논리적 접근을 하기보다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에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혹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라고 접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신 분이시지만 또 여성들에게는 철저히 상대방을 중심으로 접근하셨던 분이셨다.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가 위대한 성육신이었던 것처럼 모든 자들에게 세심하게 성육신 하신 분이었다.
화요일(1월 29일)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도입)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고, 누구의 옷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행복을 위하여 사랑의 손을 잡고, 출세를 위하여 권력의 손을 잡고, 우리의 생활을 위하여 기업가의 손을 잡기도 한다. 또 사랑하는 친구의 손을 잡는 우정의 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손을 잡아서 잘되면 좋지만 안 될 수도 있다. 사랑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불행하게 되고, 잘되려고 잡았지만 오히려 잘못되고, 영광을 위하여 잡았지만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의 손보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던 고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 가운데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던 10명의 정탐꾼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잘해도 손을 잡으면 잘못되는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줄을 잘서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손을 잘 잡아야 한다. 오늘 이 여인은 제대로 붙잡아야 할 분을 제대로 붙잡은 전형적인 믿음의 모델이다.
마가복음 5:25-34에서, 절망적인 질병에서 나음을 입은 한 여인의 유명한 이야기를 읽어보라. 성경 본문은 그 여인을 제자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제자에게 필수불가결한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접근한 방식과 회당장 야이로가 그분께 접근한 방식(막 5:22-23) 사이의 흥미로운 대조를 주목해 보라.
1. 이들이 접근한 방식을 각각 어떻게 달랐습니까? 동시에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이 여인은 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따르면, 그녀는 예수께 왔을 때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이 위대하신 분에 관해 증언해 주었을 때 그녀는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그녀의 첫 번째 믿음의 행동이었다(참조 요 20:29, 히 11:1).
본문에 따르면 그 여인은 분명히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다. 레위기 법에 의하면 그녀는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신체적 접촉을 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녀가 결혼한 상태라면 남편과 관계를 갖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의식법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아이들을 만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열두 해를 지냈던 것이다!
1. 그녀가 다음으로 나타낸 큰 믿음의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그녀의 행동이 아무리 은밀하였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녀는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모든 것을 예수님께 고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간증을 말함으로써 제자로서의 첫 번째 행동을 한 것이었다. 이제 모든 상황이 공개되었으므로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기가 더 쉬워졌다.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관해 듣고 왔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분에 관해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교훈: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다가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음으로 나아와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제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부가적용)
막 5:28절에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다. 여기서 ‘함일러라’는 계속했다는 말이다. 이 여인은 손만 대어도 구원 얻을 줄 믿고 또 믿었다. 우리는 믿고 또 믿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겠다. 여인의 행동은 소망이 아니라 굳은 마음이었다. 예수님의 몸에 불결한 자신의 손일지라도 대기만 하면 반드시 낫게 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오고 또 나와야 한다. 나오는 것이 문제 해결을 받는 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인생의 난관에 부딪쳤을지라도 결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안된다. 교회야 말로 우리 주님의 옷자락이다. 교회에 나올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과 심정으로 나와야 한다.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섞여 나왔듯이 주님께로 나와야 문제 해결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셨을 때에는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곧 담대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고백했다.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신앙이 바로 우리 성도의 고백인 것이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얻는 것이다. 여인이 입으로 시인할 때 즉시 주님은 그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했다. 그리고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했다. 이것은 믿음의 결과였다. 감사고백의 결과였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병고침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믿음과 감사를 고백함으로 구원까지 얻었다. 이 여인은 감사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세상의 화려한 인간의 옷자락을 잡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기 바란다.
수요일(1월 30일)
많은 일로 분주함
도입)
인생은 자신 또는 가족, 사회를 위해 준비하는 일로 항상 바쁘다.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마음은 분주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정하여 지혜롭게 일처리를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능률을 올리고 기대했던 만큼의 어떤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만 분주했지 얻은 결과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 그러다가 아무 일도 마치지 못한 것이다. 분주한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일들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을 잡지 못하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때때로 분주한 아이들을 향하여 어른들이 하는 말이 "마음 좀 잡아라"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되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분주한 마음은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므로 분주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 마음의 집중은 믿음으로 이어지기에 너무도 중요하다. 마음의 집중이 없으면 기도가 되어 지지 않는다. 많은 설교자들이 말씀 듣는 것이 일 하는 것 보다 더 좋다고 설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르다가 되지 말고 마리아가 되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르치는 분문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일로 인한 분주한 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되면 열매를 맺지 못하니 분주한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것은 오직 그분과 시간을 보냄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우리는 분망한 삶에서 많은 중요한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러한 와중에서 그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1. 누가복음 10:38-42을 읽으십시오. 이 이야기는 비록 좋은 일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두 명의 여성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답: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아무도 그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본문은 또한 그녀가 그분의 발아래 앉았다고 말한다. 1세기에 교사들은 높은 의자에 앉고 제자들은 낮은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앉음으로 발아래 앉았다. 누군가의 발아래 앉는다는 것은 제자나 배우는 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분의 제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비교 행 22:3).
언니 마르다는 정반대였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녀가 많은 접대로 인해 ‘마음이 멀리 떠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마르다를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이 그들의 집에 오셨는데, 손님에게 시중드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으로 하여금 도와주게 해달라고 호소했는데, 당시의 풍습으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리아의 위치는 남자들과 함께 하는 ‘식탁’이 아닌 가사를 수행하도록 여자들에게 지정된 ‘부엌’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꾸짖지 않으시고 마르다를 나무라셨다. 그분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심으로 관심을 나타내셨다. 마르다의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 모두는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을 미루어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훈: 마르다는 많은 일에 분주함으로 정말 중요한 일을 제쳐둔 사람을 대표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도리어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하셨다고 칭찬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마르다를 정죄한 것으로나 마르다의 수고를 책망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다의 수고는 반드시 필요한 봉사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수고에 대하여 나쁘다고 하지 않으셨다. 어느 편이 좋다 나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주님의 음식을 만드는 일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마르다의 수고는 나쁜 것이 아니었고 그는 정죄 받을 일이 아닌 합당한 봉사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일을 가볍게 하여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은 더 좋은 편이다. 우리는 마르다의 수고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교회에서 안식일마다 수고하는 여 집사님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도 일을 가볍게 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편이 더 나은 편이 될 수 있다. 가볍게 식사를 준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은 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엌일을 돕는 집사님들을 나쁘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점은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분주하여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항하여 있지 못하면 그 일 또한 주님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주를 위한 일이 되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주를 위한 일이라 하면서도 우리는 여러 마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허망한 마음에서 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분주한 마음을 씻어내라. 꼭 필요한 몇 가지 일이든지, 아니면 한 가지라도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여 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목요일(1월 31일)
우물가의 여인
도입)
요한복음 3장과 4장에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유대인이다. 그러나 4장에 등장하는 이 우물가의 여인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이다. 종교적으로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었다면, 여인은 종교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 니고데모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관료였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니고데모는 많은 특권을 받아 누리는 남성의 신분이었고, 이 여인은 많은 여자들처럼 아무 혜택 받지 못하는 여성의 신분이었다. 니고데모는 밤에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용기와 영적 갈급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람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 싶다”는 선물을 가지고 찾아가셨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 모두 만나주셨고 동시에 두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분이시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힘이 없고,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가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실 때 획일적이 아니라 각 개인의 형편에 맞추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수준에 맞게 찾아오신다.
1. 요한복음 4:4-30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여인의 신뢰심을 얻으셨으며, 그녀로 하여금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까?
답: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자들은 그분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인도하신 과정을 주의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인도하신 과정에는 네 가지 주요 단계가 있다. 예수께서는 (1)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를 일깨우셨고(7-15절), (2) 개인적 필요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셨으며(16-20절), (3)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도록 결심을 촉구하셨고(21-26절), (4) 결심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하셨다(26-30, 39-42절).
이 여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을지 상상해 보라. 먼저 이 낯선 유대인이 예상치 않은 친절을 보여주시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깊고 어두운 비밀들을 그분께서 드러내시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라고 대답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뿐 아니라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심을 인정한 말이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여인이 화제를 바꾸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녀의 죄에 대해 아무런 압박도 주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녀의 대화를 이어받아 더 깊은 진리를 제시하시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이신 당신께로 인도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셨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분을 믿게 되었다.
2. 이 여인이 자신의 동족에게 어떻게 증거했는지 살펴보십시오(29, 39절).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녀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자기 자신에 관한 약간의 고백을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그리할 때 그녀의 증언은 얼마나 더 효과적이었을까요?
답:
교훈: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달려가 동족에게 담대히 전파하였다. 확신은 담대함을 가져온다.
부가적용)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복음 전파 즉, 전도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삶속에서 체험할 때 가능해진다. 그때 자기 인생의 구원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주님을 영접, 그 높고 귀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고 모두 전도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수가성 여인을 보면 그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결혼을 했지만 인생의 실패자로 목마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 자기 인생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뒤 전도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외친 한 마디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였다. 이렇게 외치면서 동네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었다. 가난하고 상처 많은 한 여인에게 단 한 번의 중요한 만남이 삶의 변화에 전환점이 되고 변화된 그를 통하여 자기 삶의 현장이 변화되는 수가성의 역사는 우리에게 꼭 만나야 할 하나님을 만나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생의 해답과 치유와 구원을 얻게 된 복음의 진수이다. 복음을 가진 한 사람의 중요성(바울)과 단 한 번의 만남의 중요성을 보라(행8:26-40). 예수님과의 만남이 생의 해답과 치유와 구원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던 이 여인처럼 우리의 삶에 치유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발현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런 주님의 종이 될 것이다. 먼저 우리의 삶에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 경험이 중요하다.
금요일(2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607-609, 678-679, 10권, 178-179, 328-330, 543-546, 시대의 소망, 제58장 ‘나사로야 나오라’(524-536).
“마르다에게 필요되는 ‘한 가지’는 침착하고 헌신적인 정신과 장래와 영생에 관한 지식을 깊이 갈망하는 마음과 영적으로 향상하는 데 필요한 은혜였다. 마르다는 잠시 후에 지나가버릴 일을 위해서 덜 염려하고 영원히 존속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 염려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저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만들어 줄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붙잡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시대의 소망, 525).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을 섬기는 여자들의 봉사를 자주 언급한 것이다. 이 부분이 생소해 보이는 것은, 예외적으로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여자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그들의 봉사를 받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공공 생활에서 유대 여자들의 역할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0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모친이 된 마리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녀는 무엇을 믿으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그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도록 요청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믿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조언해 줄 수 있을까요?
2.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을 제자화하는 일을 이전보다 더욱 강력히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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