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 악(惡)의 문제 - (핵심Q&A)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7과 - 악(惡)의 문제 - (핵심Q&A)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2-10 19:57 조회1,215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제7과 악(惡)의 문제(問題) 

             (02월 15일 (안) / 일몰: 오후 6시 11분) 


<기억절(記憶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일러라"(계21:4). 


<개요(槪要)>

1. 악(惡)의 문제는 우주(宇宙)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따라 존재하는 문제이다. 

2. 하나님은 악(惡)의 문제도 사랑의 방법으로 해결(解決)하실 것이며 이를 위해 십자가(十字架)를 지셨다. 

3.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신뢰(信賴)하며 어려움 중에도 자유의지(自由意志)로 그분을 사랑하고 따른다.


⑴.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한계(限界)를 인식(認識)하고 희망을 가지고 궁극적(窮極的)인 해결책에 접근해야 합니다.


⑵.성경에는 악(惡)의 문제에 대한 열린 질문(質問)이 있습니다. 

고통(苦痛)의 순간에는 악(惡)의 존재(存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엄청난 선(善)하심을 조화(調和)시키기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의 고통(苦痛)과 고난(苦難)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惡)을 이길 것을 바랍니다.


⑶.악(惡)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설명(說明)은 제한적(制限的)입니다. 

악(惡)과 고통(苦痛)의 문제는 인류에게 도전(挑戰)을 제시합니다.

욥은 악(惡)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理解)할 수 있는 자신의 한계(限界)를 인식(認識)합니다.


⑷.우리는 희망(希望)을 가지고 악(惡)의 문제에 접근(接近)하도록 격려(激勵)받습니다. 

우리는 악(惡)의 문제에 대한 답(答)이 없는 질문(質問)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⑸.죄(罪)는 침입자(侵入者)이며, 우리 세상에서 죄의 존재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接近)하도록 도와줍니다.


⑹.우리가 악(惡)과 고통(苦痛)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욥이 이해력(理解力)이 제한(制限)되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제한(制限)되어 있는지 인식(認識)해야 합니다.


⑺."아담은 자유로운 도덕적(道德的) 행위자(行爲者)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욕망(欲望)에 압도(壓倒)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⑻.불순종(不順從)으로 그는 순수(純粹)함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恩寵)에서 멀어졌습니다."


⑼."무한(無限)한 지혜(智慧)는 인간에게 옳고 그름, 죄(罪)와 거룩함의 구별(區別)을 제시(提示)하지만, 하나님의 정부(政府)는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정부(政府)이며, 자유의지의 행위(行爲)가 아닌 반항(反抗)이나 순종(順從)의 행위(行爲)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원고 79, 1896.


⑽.“죄악(罪惡)의 시작(始作)은 그 존재(存在)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說明)할 수 없다. 그러나 죄(罪)의 시작(始作)과 죄(罪)의 최종적(最終的)인 처분(處分), 악(惡)을 처리(處理)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공의(公義)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할 수 있다.”(쟁투, 492)


(02월 09일) (일)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Q)~<왜 많은 경우에 악인(惡人)이 번영(繁榮)하고 악(惡)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이익(利益)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의(義)로운 사람이 그토록 많은 고통(苦痛)을 겪는가? 악(惡)이 활개 칠 때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거나 심지어(甚至於)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욥기 30:26, 예레미야 12:1, 예레미야 13:22, 말라기 2:17, 시편 10:1) 


(A)~<성경에는 악(惡)의 문제에 대한 열린 질문(質問)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强調)하는 것이 중요(重要)합니다. 악(惡)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제한적(制限的)입니다. 이러한 요점(要點)은 악(惡)이 정당화(正當化)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⑴.악(惡)의 문제(問題)는 예수님도 당면(當面)하셨으며, 우리는 답(答)을 알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경험(經驗)한다. 하지만 그것이 답(答)이 없다는 뜻은 아니며 여전히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신뢰(信賴)할 수 있다.


⑵.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악(惡)의 문제도 사랑의 원칙(原則)을 따라 대하시고 이를 위해 십자가(十字架)를 지셨다.


⑶.악(惡)의 가능성(可能性)에도 그분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것은 사랑, 선(善)한 것도 자유(自由)가 있어야 가능(可能)하기 때문이다.


⑷.“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진 것은 하나님께서 죄(罪)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責任)이 없으시다는 것, 하나님의 정부(政府)에는 반역(叛逆)을 일으킬 조건(條件)이 될 만한 아무런 결함(缺陷)이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恩惠)를 강제적(强制的)으로 거두어 버린 일이 없다는 것 등이다. 죄(罪)는 하나의 무단(無斷) 침입 자(侵入者)이” (쟁투, 492~493)


⑸.예레미야는 계속되는 악인(惡人)의 번영(繁榮)에 매우 당황(唐惶)한 듯이 보인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의(義)로우시다”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인간의 경험(經驗)과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개념(槪念) 사이에 조화(調和)를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예(例)를 들면 욥(욥 21:7-13)이나, 다윗(시 73:1-12; 시 73편 서론을 보라) 같은 이들도 같은 문제로 고심(苦心)했다. (화잇주석, 렘 12:1)


⑹.우리는 분명히 악(惡)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存在)하는 다양(多樣)한 악(惡)과 그 편만(遍滿)함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는 식으로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⑺.악(惡)은 매우 나쁜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악(惡)을 미워하신다. 따라서 세상의 많은 악(惡)과 불의(不義)에 대해서 성경전체(聖經全體)에서 울려 퍼지는 “주여, 언제까지입니까?”라는 탄식(歎息)에 우리도 함께 동참(同參)해야 할 것이다.


⑻.악(惡)의 문제는 오늘날만 아니라 성경(聖經)에서, 또한 예수께서도 고통(苦痛)당하신 문제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를 지셨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소홀(疏忽)히 해서는 안 된다. 


⑼.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의 고난(苦難)을 통해 악(惡)을 이기셨으니 악(惡)을 경홀(輕忽)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信賴)하며 예수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인내(忍耐)로 기다리는 믿음의 삶이 절대로 필요(必要)하다.


⑽.성소(聖所)를 볼 때 우리는 정의(正義)롭고 심판(審判)하시는 주님을 보며 선악(善惡)의 대쟁투(大爭鬪) 가운데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信賴)할 수 있다.


(02월 10일) (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Q)~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어떻게 모르고 있으며 악(惡)의 문제(問題)의 답(答)을 모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욥기 38:1~12, 42:3)


(A)~(하나님은 즉시(卽時)로 욥을 변호(辯護)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거룩한 목적은 논쟁(論諍)을 해결(解決)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분은 욥이 고통(苦痛)당하는 이유(理由)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분명히 이해(理解)하는 것이 거룩한 섭리(攝理)에 대한 모든 이유(理由)를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重要)하다. 하나님께서는 악인(惡人)들이 왜 번성(繁盛)하며, 의인(義人)들이 왜 고통(苦痛)을 받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분은 내세(來世)나, 현세(現世)의 불공평(不公平)에 대한 미래(未來)의 보상(報償)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 자신 곧 당신의 선(善)하심과 권능(權能)과 지혜(智慧)를 나타내시고, 이런 계시(啓示)가 욥의 문제에 대한 해답(解答)이 되기를 의도(意圖)하신다>.


⑴.하나님의 대답(對答)은 욥에게 사실(寫實)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理解)하도록 도와준다. 그분의 접근(接近) 방식(方式)은 매우 효과적(效果的)이어서 욥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라고 응답(應答)한다. 


⑵.욥이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의 황당함은 사라졌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의 문제들에 해결방법(解決方法)을 주실 수 있었다. 욥의 의문점(疑問點)들에 대답(對答)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는 가장 깊은 사상(思想)을 자극(刺戟)하는 오묘(奧妙)함이 있다.


⑶.하나님의 말씀에는 가장 박학다식(博學多識)한 학자(學者)도 결코 대답(對答)할 수 없는 질문(質問)들이 많다.


⑷.유한(有限)한 지성(知性)이 그들의 온갖 자랑스러운 지혜(智慧)를 다 동원(動員)한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일이 일상사(日常事)에 있어서조차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 주제(主題)에 주의가 환기(喚起)되었다. (3 SM 310)


⑸.희망(希望)과 용기(勇氣)는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요소(要素)이다. 이것들은 믿음의 열매이다. 낙담(落膽)은 죄(罪)요 옳지 않은 행위(行爲)이다. (PK 164.3) 


⑹.하나님께서는 시험(試驗)과 시련(試鍊)을 위해 필요(必要)되는 힘을 당신의 종들에게 “충분히”(히 6:17) 내려 주실 수 있으시고 내려 주시기를 원(願)하신다. 당신의 사업에 대한 원수(怨讐)들의 계획(計劃)이 잘 놓여지고 굳게 세워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중 가장 강(强)한 것이라도 뒤집어엎으실 수 있으시다. 


⑺.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의 신앙(信仰)을 충분히 시험(試驗)하셨다고 보실 때에 이 일을 정하신 시간에 당신의 방법으로 행하신다. 


⑻.낙심(落心)한 자(者)들을 위한 확실한 치료제(治療劑)가 있다. 그것은 신앙(信仰)과 기도(祈禱)와 사업(事業)이다. 신앙(信仰)과 활동(活動)은 자신감(自信感)과 만족(滿足)을 줄 것이며 그것들은 날마다 증가(增加)하게 될 것이다. 


⑼.하나님은 욥의 질문(質問)에 답(答)하시면서 욥이 알지 못하고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분명(分明)히 알려 주셨다. 욥처럼 우리도 세상과 그 이면(裏面·裡面)에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겸손(謙遜)하게 인정(認定)해야 한다.


⑽.우리가 질문(質問)에 대한 답(答)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 답(答)이 없다거나, 모든 것이 해결(解決)되는 날이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意味)는 아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신뢰(信賴)해야 한다.


(02월 11일) (화) <회의적(懷疑的) 유신론자(有神論者)> 


(Q)~회의적 유신론자(懷疑的有神論者)란 무슨 말씀이며, 우리가 경험(經驗)하는 알 수 없는 일들 중에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73:)


(A)~<회의적 유신론자(懷疑的有神論者)는 유신론적교리(有神論的敎理)에 기반(基盤)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지식(知識)이 제한(制限)되어 있어 하나님의 행동(行動)에 대한 뜻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⑴.회의적 유신론(懷疑的有神論)이라는 용어(用語)는 철학자(哲學者) 폴 드레이퍼가 1996년에 쓴 논문(論文) "회의적 유신론자(懷疑的有神論者)"에서 처음 사용(使用)되었습니다. 


⑵.이렇게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인식(認識)하는 데 기초(基礎)하여 악(惡)의 문제(問題)를 이해(理解)하려는 방법(方法)을 “회의적(懷疑的) 유신론(有神論)”이라고 한다.


⑶.회의적 유신론(懷疑的有神論)은 사람들이 악(惡)에 대한 자신의 인식(認識)이 정통기독교(正統基督敎) 신(神)의 존재(存在)에 반대(反對)하는 좋은 증거(證據)로 간주(看做)될 수 있는지 여부(與否)를 분별(分別)하는 능력(能力)에 대해 회의적(懷疑的)이어야 한다는 견해(見解)이다. 


⑷.죄(罪)는 침입자(侵入者)이며, 그 존재(存在)에 대한 이유(理由)를 제시(提示)할 수 없다. 그것은 신비(神祕)롭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변명(辨明)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擁護)하는 것이다. 그것을 변명(辨明)하거나 그것의 존재(存在)에 대한 이유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죄(罪)가 아닐 것이다.


⑸.하나님은 “내 생각(生覺)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사 55 : 8~9)다고 말씀하셨다. 


⑹.악(惡)한 자가 번영(繁榮)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를 나타내도록 허용(許容)하시는 것은 죄악(罪惡)의 잔(盞)이 찰 때 모든 사람이 그들의 완전(完全)한 멸망(滅亡) 가운데서 그분의 공의(公義)와 자비(慈悲)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爲)해서이다.


⑺.성경(聖經)에서 하나님께서 죄(罪)의 침입(侵入)에 대해 전혀 책임(責任)이 없다는 것보다 더 분명(分明)하게 가르쳐지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임의(任意)로 철회(撤回)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통치(統治)에 결함(缺陷)이 없어서 반항(反抗)이 일어날 이유(理由)가 없었다. 


⑻.시편기자(詩篇記者)는 세상의 악(惡)으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이 불의(不義)하고 불공평(不公平)해 보였다. 그는 해답(解答)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甚至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조차 가치(價値)가 있는지 의문(疑問)이 들었다. 그러던 중 그는 성소(聖所)를 바라보게 되었다. (시편 73:1~28)


⑼.성소(聖所)는 악(惡)의 문제(問題)에 대한 해결책(解決責)의 한 축을 제공(提供)하는데, 당신의 때에 정의(正義)와 심판(審判)을 (行) 하실 의(義)로운 심판자(審判者)가 계신 것을 인식(認識)하게 한다.


⑽.하나님의 합당(合當)한 뜻이 있지만, 인간은 유한(有限)하여 알 수 없다는 회의적(懷疑的) 유신론자(有神論者)와 달리 시편기자(詩篇記者)는 성소(聖所)를 통해 정의(正義)롭고 심판(審判)하시는 의(義)로운 하나님을 보았다. 


(02월 12일) (수) <자유(自由)의 지론(知論)> 


(Q)~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이란 무엇을 말하며, 자유의지(自由意志) 때문에 악(惡)이 발생했는데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습니까? (수 24:15)


(A)~<인간(人間)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졌으며 예정론교리(豫定論敎理)는 성경(聖經)의 교훈(敎訓)에 맞지 않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사건(事件)들에 대한 미리 알고 계심(foreknowledge)이 사건의 원인(原因)이라고 믿는 것을 반대(反對)하였다. 대신 회개(悔改), 침례(浸禮), 그리고 회개(悔改)와 같은 교리(敎理)는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존재(存在)에 맞는다고 보았다. 은혜(恩惠)란 인간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는 지식(知識)이라고 하였고,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사용하여 선(善)과 악(惡)을 선택(選擇)하는 것을 지지(支持)하였다. 그런 선택(選擇)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를 통하여 구원(救援)으로 인도(引導)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⑴.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은 악(惡)을 피조물(被造物)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오용(誤用)한 결과(結果)라고 본다. 이 관점(觀點)에서 악(惡)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善)한 뜻으로 주신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피조물(被造物)이 제멋대로 잘못 사용(使用)한 결과(結果)이기에 악(惡)은 하나님의 책임(責任)이 아니다.


⑵.사람들을 강제(强制)로 그들의 불신(不信)을 굴복(屈伏)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計劃)이 아니다. 그들 앞에는 빛과 어두움, 진리와 오류가 있다. 어느 것을 받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⑶.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충동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 곧 성경 절과 성경 절을 조심스럽게 대조해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살아 112~113).”(화잇주석, 신 30:15~19)


⑷.자유의지(自由意志)를 오용(誤用)하면 하나님이 창조(創造)하신 완벽(完璧)한 세상이 악(惡), 죄(罪), 고통(苦痛), 죽음의 세상(世上)으로 변(變)합니다.


⑸.자유의지(自由意志)를 오용(誤用)한다는 개념(槪念)이 악(惡)과 고통(苦痛)의 문제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說明)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啓示)하신 바에 따르면 이 문제에 대해 분명(分明)하게 말할 수 있다.


⑹.성경(聖經)에는 악(惡)의 문제(問題)에 대한 열린 질문(質問)이 포함(包含)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强調)하는 것이 중요(重要)하다. 악(惡)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설명(說明)은 제한적(制限的)이다. 이러한 요점(要點)은 악(惡)이 정당화(正當化)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⑺.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은 그것을 오용(誤用)한 결과 악(惡)이 생겼다고 본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것은 고귀(高貴)한 사랑, 선(善), 기쁨도 그것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⑻.사랑의 율법(律法)은 하나님 정부(政府)의 기초(基礎)이므로 모든 지성적(知性的) 존재(存在)들의 행복(幸福)은 그들이 이 의(義)의 대원칙(大原則)과 완전(完全)히 일치(一致)함에 달려 있다.


⑼.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被造物)로부터 사랑의 봉사(奉仕) 곧 당신의 품성(稟性)을 인식(認識)함으로 솟아나는 봉사(奉仕)를 원(願)하신다. 그분은 강제적(强制的) 굴종(屈從)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存在)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自願)하여 봉사(奉仕)하도록 그들에게 의지(依支)의 자유(自由)를 허락(許諾)하신다. (PP 34).


⑽.자유의지(自由意志)가 없다면 우리는 기계(器械)나 심지어(甚至於) 아무런 의식(意識)이나 생각 없는 로봇과 같은 존재(存在)일 뿐, 인간(人間)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02월 13일) (목) <사랑과 악(惡)>  


(Q)~예수님은 자유(自由)가 십자가(十字架)의 고통(苦痛)을 겪게 할 것을 아셨음에도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것은 어떤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습니까? (롬 8:18)


(A)~이 장래(將來)의 영광(榮光)에 대한 기대는 이 땅에서 고통(苦痛)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고난(苦難)은 크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고통(苦痛)이 이루어 내는 “영원(永遠)한 영광(榮光)의 중한 것”에 비교(比較)하면 “경(輕)한” 것에 불과(不過)하다. (고후 4:17). 


⑴.하나님은 사랑이기에 사랑이 존재(存在)하는데 필수적(必須的)인 자유(自由)를 부정(不淨)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유(自由)가 십자가(十字架)의 고통(苦痛)을 겪게 할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자유(自由)를 주셨다. 


⑵.고통(苦痛)은 순간적(瞬間的)이지만 영광(榮光)은 영원(永遠)할 것이다. 고통(苦痛)은 곧 지나가지만, 영광(榮光)은 영원(永遠)히 줄어들거나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벧전 1:4). 


⑶.다가오는 영광(榮光)과 비교(比較)해 볼 때 이생의 모든 고통(苦痛)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초기문집, 17). (롬 8:18, 재림교주석)


⑷.무엇보다도 성도(聖徒)가 ‘탄식(歎息)하여 양자(養子)될 것 곧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는 것’(롬 8:23 절)과 깊은 연관(聯關)이 있다. 따라서 이 고난(苦難)은 마음의 법(法)과 죄(罪)의 법이 투쟁(鬪爭)함으로써 성도(聖徒)에게 찾아오는 비참(悲慘)한 경험(經驗)과도 연관(聯關)이 있다.


⑸.바울은 성도(聖徒)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罪)와 사망(死亡)의 법(法)에서 해방(解放)된 신분(身分)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現在)의 삶 속에서 그 두 법(法)의 투쟁(鬪爭)이 죽는 날까지 지속(持續)되고 있음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⑹.성도(聖徒)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後嗣)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祭司長)이 되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된다. 이처럼 바울은 성도(聖徒)가 부활(復活)의 몸 곧 영광(榮光)스러운 몸(고전 15:43~44)을 입어 하나님의 후사(後嗣)가 된다는(고전 15:50) 사실을 어떤 것과도 비교(比較)할 수 없는 가장 영광(榮光)스러운 것이라고 강조(强調)했다. (롬 8:18, 주석)

⑺.“오늘날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不平)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선택(選擇)의 자유(自由)를 빼앗는 것은 지적존재(知的存在)로서의 특전(特典)을 박탈(剝奪)하는 것이며, 단순(單純)한 자동인형(自動人形)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⑻.의지(依支)를 강제(强制)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目的)이 아니다. 사람은 자유(自由)로운 도덕적(道德的) 행위자(行爲者)로 창조(創造)되었다. 


⑼.하나님께서 피조물(被造物)에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허락(許諾)하신 것은 그것이 사랑의 필수(必修) 요건(要件)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오용(誤用)하는 것이 악(惡)의 원인(原因)이다.


⑽.세상(世上)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誤解)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다. 음울(陰鬱)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만적(欺瞞的) 세력(勢力)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