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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기 제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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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12-01 01:43 조회3,5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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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미친 행동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발락과 발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모압 사람들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말했다.
“이제 이 큰 무리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마치 소가 들판의 풀을 뜯어먹듯 합니다.”(민 22:4)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오려고 사신들을 보내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한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드디어 바로 나의 맞은편에까지 와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오셔서 나를 보아서 이 백성을 저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너무 강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나는 그들을 쳐부수어서 이 땅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이는 복을 받고 그대가 저주하는 이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민 22:5,6 새번역)
발람이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에서 지내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들어 본 다음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물으셨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십볼의 아들 발락 곧 모압 왕이 저에게 보낸 사신들입니다. 이집트에서 한 백성이 나왔는데 그들이 온 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저더러 와서 발락에게 유리하도록 그 백성을 저주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발락은 그 백성을 쳐부수어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22:12)
다음날 아침에 발람이 일어나 발락이 보낸 사신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모압의 사신들은 일어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보고했다.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발락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처음 갔던 이들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을 뽑아 보냈다.
그들이 발람에게 가서 발락의 말을 전했다.
“아무것도 거리끼지 말고 나에게로 오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대에게 아주 후하게 보답하겠고 또 그대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꼭 오셔서 나에게 좋도록 저 백성에게 저주를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22:16-17 새번역)
발락에게 거리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거리끼는 것은 하나님이었다. ‘거리낌’을 ‘두려움’이라 한다면 발락이 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가 늘 향하여 부르던 하나님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성경백성과 가까이 하려다가도 멈칫하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가는 길에 거리낌만 없다면 서슴없이 진행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리낌은 오직 하나님이다. 아무리 그의 앞길이 탄탄대로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막아서신다면 가던 길을 중지한다. 만일 발락이 ‘거리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는 말을 듣고 나를 가로막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입니다’하고 증거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가 향하여 부르던 신이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었을까?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8,19)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말한 발람은 누구일까? 언뜻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참 선지자 같다. 하지만 무당도 그가 섬기는 신에게 물어본 뒤에야 그가 할 일을 결정한다. 모든 정황을 미루어볼 때 발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지자가 아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사실에 대해 다시 물었다. 이것은 모든 정황 중에서도 발람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단서다. 하나님은 변역치 아니하신다.(말 3:6)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묻기 위해 신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막아서서 그에게 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면 어떤 다른 신도 압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으니 너는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하는 말만 하도록 하여라.”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 고관들을 따라서 길을 나섰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길은 아니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발람은 나귀를 때려 다시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이번에는 두 포도원 사이의 좁은 길을 막아섰다. 길 이쪽에도 담이 있고 길 저쪽에도 담이 있었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를 보자 이쪽 벽으로 몸을 바짝 붙여 발람의 발을 벽에 긁히게 하였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를 한 대 더 때렸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앞으로 더 나아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피할 수 없는 좁은 곳에 섰다. 나귀는 주님의 천사를 보고는 발람을 태운 채로 주저앉았다. 발람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그 때 나귀가 발람에게 말했다.
“제가 주인어른께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십니까?”
이미 기적이 시작되었다. 자고이래로 짐승이 말한 적은 없었다. 짐승이 말했다면 이것은 토픽감이다. 정상적이라면 발람이 눈을 크게 뜨고 나귀에게 ‘네가 오늘 웬 일이니? 내가 뭐를 잘못했니?’라고 해야 한다. 한데 발람은 ‘놀림감으로 아느냐’ 하며 짐승과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하였다.
“저야말로 오늘까지 어른께서 늘 타시던 어른의 나귀가 아닙니까? 제가 언제 이처럼 버릇없이 군 적이 있었습니까?”
발람이 대답하였다.
“없었다.”
발람뿐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도 기적인 줄 모른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우리 눈앞에도 벌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인 줄로 안다.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칼을 빼들 수밖에 없다.
주께서 발람의 두 눈을 열어 주셨다. 그제야 그는 주님의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다. 발람은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너의 나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느냐?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이기에 너를 막으려고 이렇게 왔다. 나귀는 나를 보고 나에게서 세 번이나 비켜섰다. 다행히 나귀가 비켜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귀는 살렸겠지만 너는 분명히 죽였을 것이다.”
발람이 주님의 천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천사께서 저를 만나시려고 길에 서 계신 것을 몰랐습니다. 제가 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저는 되돌아가겠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가거라. 그러나 너는 내가 말해 주는 것만 말하여라.”
하나님께서 이미 ‘내가 말하여 주는 것만 말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을 재확인하시기 위해 나귀 앞을 가로막아 서셨던 것이다.
발락은 발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이하러 그의 영토가 끝나는 아르논 강 경계에 있는 모압의 한 성읍까지 나아갔다.
발락이 발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당신을 불러오려고 사신을 보내고 또 보내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곧바로 나에게 오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당신을 존귀하게 대접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이렇게 제가 임금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저의 입에 넣어 주시는 말씀, 그것이 무엇이든지, 저는 그것만을 말하겠습니다.”
발락은 발람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 소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발람과 그를 데리고 온 고관들에게 고기 얼마를 보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발락이 발람을 데리고 바알 산당으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보았다.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필요하니 이곳에다가 제단 일곱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곳에다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발락은 발람이 말한 대로 하였다. 발락과 발람은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다.
발람이 발락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제물 곁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볼 데가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밝히 나타내 주시는 것이면 어떤 말씀이든지 제가 임금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23:3 새번역)
발람이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나타나셨다.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었다.
“일곱 제단을 제가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고 그의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발람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면서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그대로 말하라고 하셨다. 발람이 발락에게로 돌아와서 보니 발락이 번제물 곁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사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약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사르었다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은 제단 앞에서 뛰놀앗을 것이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민 23:7-9)


열방 중 하나가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지구촌에 한국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가난한 남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80% 내지 60%는 다원주의를 지지하는데 한국만 기현상이다.(오강남 『예수는 없다』 중에서)

다원주의의 정당성을 귀납적 방법으로 논증하면서 시대의 경향을 앞세우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가슴에 양심 한 올 걸치지 않고 위와 같이 말한다. 위와 같은 말들은 많은 종교들 속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는 자들과 고독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을 미망(迷妄)으로 몰아넣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내가 골을 넣으면 상대방은 골을 먹어야하는 제로섬 게임을 즐기던 시대는 지났다. 이 시대는 윈윈(win-win) 게임에 열광하는 시대다. 가장 좋은 구경은 사람 구경이다. 아무리 황량한 사막이라도 사람들이 모이면 구경거리이다. 하물며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며,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생(相生)의 윤리로 사람들을 모으는 그곳에 어찌 사람들이 더욱 모이지 않겠는가?
인간은 고독을 그 내부에 안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높은 빌딩 창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고독의 내연(內燃)에서 탈출하려 몸부림친다. 크리슈나 무르티는 ‘인간의 고독한 이유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아에 집착할수록 자아의 성에 칩거하며, 자기중심적일수록 고독은 통증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하면서도 고독할 수 있고 형제들과 친교를 나누는 회당에 앉아서도 고독할 수가 있다. 인간이 자기 행복, 자기 발전, 자기 성취, 자기 문제, 자기 관심에 몰두하는 한 고독의 내연은 더욱 짙어질 뿐이다.
고독은 관계의 단절, 절대적인 고립, 나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의 자기 발견이다. 하여 인간은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친분관계로, 사회관계로, 성관계로 전전하지만 그것은 티베트 산 정상에서 알맹이 빠진 공기를 숨 쉬듯이 불안과 고통만 더해갈 뿐이다. 어찌하여 관계의 부족에서 발생한 고독 문제가 관계의 회복에서 해결되지 않을까? 고독의 조건이 관계의 단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이 잘 못 설정된 때문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시장기 같은 고독감이 엄습해왔다. 이제 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실 한 분이 내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은 나를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생명을 바쳐 나를 사랑하실 분은 오직 부모님뿐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나를 엄습한 고독은 내가 그 생명줄에서 끊어졌다는 고독감이었다.
인간은 어찌하여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한가?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원주의로도, 상생의 윤리로도, 상대 개념으로도, 결코 어떤 방법으로도 이 고독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오직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된다.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에야 ‘홀로 처하여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민 23:9) 않는 고고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고독문제를 열방과의 섞임에서 찾으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고독문제를 열방과의 섞임에서 해결하여 했다. 만일 이들이 고독 문제를 열방과의 섞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해결했더라면 이스라엘은 세계 열방 중에서 으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에는 죽음이 따르지만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의 죽음’이요 그들은 그 사분의 일도 계수할 수 없는 아무도 셀 수 없는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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