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 선지자의 미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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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11-28 22:26 조회6,147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09년12월05일(안) 제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hwp (31.0K) 105회 다운로드 DATE : 2009-11-28 22:26:08
본문
2009년12월05일 (안) (日沒 : 오후 5시 14분) <李奉周>
제10과 선지자(先知者)의 '미친 행동'
연구범위: 민 22~24장, 신 1:30, 20:4, 마 15:14, 고전 2:14, 벧후 2:14~16, 계 3:17. / 핵심본문: 딤전 6:10
<記憶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學習目標>
(깨닫기) → <선지자의 타락(墮落)>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詛呪)하면 주겠다는 부(富)의 약속에 미혹(迷惑)되어,
하나님의 선지자가 타락한 슬픈 역사를 확인한다.
(느끼기) → <유혹(誘惑)의 위험성을 인식(認識)함>
어떤 형태의 유혹(誘惑)이든지 그것과 장난치는 것은 위험(危險)함을 느낀다.
(행하기) →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될 것인가, 사자의 먹이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선(善)하심에 집중(集中)함으로 유혹(誘惑)을 물리치기로 다짐한다.
<要點>
한때 신실했던 선지자가 세상 왕이 약속한 보상(報償)을 탐(貪)함으로 완전히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일요일(11월 29일)
<두려움에 빠진 어리석은 왕 (王) (민 22:1~6)>
◈ <가나안 원주민의 신(神)에 대한 개념(槪念)>
가나안 원주민들은 나름대로의 지방 신(地方 神)들을 숭배하고 있었으나 저들의 신이 절대적 존재라거나 유일한 신(神)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즉 그들은 다른 족속들의 신(神)을 인정했으며 그 신들의 능력을 따져 우세한 신과 열세(劣勢)한 신을 가렸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삼상 5:1-6:16)
여기에 제시된 모압 왕 ‘발락’과 브돌의 복술자(卜術者) ‘'발람'’과의 결탁은 바로 위와 같은 생각 속에 이뤄졌다.
발락은 자신의 땅에 접근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복술자의 신탁(信託)으로 괴멸시키려 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복술자(卜術者) '발람'의 입술을 주관하셔서 네 번이나 거듭되던 저주의 메시지를 차단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 왕에 대한 예언을 하게 하셨다. (민수기 24:15-24) 결국 이 사건은
⑴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며, (시편 103:19)
⑵ 모든 사건과 인격을 주관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역사를 이뤄 가심을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자 이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전(勝戰)소문을 들은바 있는 모압 왕이 겁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滅)하기 위해 '발람'을 데려오는 이야기로 민수기 22장을 시작한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을 좇는 진실한 선지자인 것처럼 모압 왕의 뜻을 거절 하나 후에 모압 왕이 보낸 복채(卜債)에 마음이 끌리어 모압으로 온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는 타락한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영혼이 없는 짐승을 통해 그의 잘못을 꾸짖으셨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게 된다. 이렇듯 물질에 집착하여 진리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 할 수 없으며, 참되고 거짓된 것을 분멸할 줄 모르는 자는 하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시편 49:20)
◈ <모압 평지(平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 전 도달한 마지막 점검지역으로서 백성들은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인구 조사와 함께 군대를 재검열하며 율법을 재차 선포하고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차기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뽑는 등 일련의 가나안 정복 준비를 완료하였다.
(민수기 26:1-65; 신명기 1:1-3;신명기 34:9)
▶ 한편 신명기서 전체의 내용도 바로 이곳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이다.
1. <발락>
‘약탈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압의 왕이었다. (사사기 11:25)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회(迂廻)하여 돌아갈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평지에 진(陣)을 치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진멸 대상에 (신명기 7:1) 해당하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통과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조그마한 위험 앞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요일 4:18)
⊙ 모압 왕 발락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이웃의 강한 부족인 아모리와 바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다.
⊙ 발락이 특히 두려웠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대적과 싸우시고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 발락은 자신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적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 적이 섬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저주함으로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발락은 선지자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견지에서 볼 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안 될 일이었다. 발락이 왜 자기 나라의 사제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모압의 신들에게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탄원하게 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민수기 22:6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함>
“만일 우리가 참되고 구원하는 감화력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가 믿노라고 공언하는 바를 실천하게 하며 우리의 의로운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을 분명히 구별 지어 보이도록 하라. 언어와 의복과 행실이 하나님을 증거(證據)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감화가 그들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며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전도, 672)
⊙ 발락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겁에 질려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러들였다. 그는 아마도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월요일(11월 30일)
<'발람' (민 22:7~21)>
◈ '발람'(Balaam) = (순례자, 백성들의 주)
'브올'의 아들, 미디안의 선지자 메소포타미아의 '브들'에 거주 하였다.
1. <'발람'의 배경(背景)과 인격(人格)>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였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배도(背道)하고 탐심에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그는 불의의 재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발락이 그를 청하러 사람을 보내었다. 그는 두 마음을 품고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의 영예와 칭찬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추구하고 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영적선물4권 43쪽)
2. '발람'은 '불신(不信)의 삯을 사랑'하였다. (벧후 2:25)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죄(貪慾罪)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부조와 선지자 하(下)55-56쪽)
3. <동방에서 온 박사(博士)들은 철학자(哲學者)들이었다.>
저들은 명문출신으로 그 나라에서 재물(財物)과 지식(知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유력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발람'도 이들 박사(博士)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던바 성령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전설로 전하여 내왔었다. (시대의 소망 60-61쪽)
4.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물음>
너무나도 뚜렷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 사람들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는 그 문제를 위해서 감히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는 반대되는 길로 가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을 설득 하려고 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불쾌히 여기신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었다. 까닭은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큰 보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발람'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는 주어질 상에 매우 연연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감히 두 번째 하나님께 물었다. 받은바 의무가 그들이 타고난 성향에 맞을 때는 그 의무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환경과 이치로 보아서 그 의무가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 의무가 그들의 성향에 배치될 때는 흔히 이 증거들을 번복해버린다. 그들이 공상하는 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버려진바 될 위험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교회증언 3권 73쪽)
5.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저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3권 158)
6. '발람'의 이야기에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의 엄숙한 경고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비 그리스도인적 습관을 품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죄가 자라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반복함으로 강화되어서 고상한 능력을 모두 다 굴복 시키는 지배적 힘을 발휘한다. 바람은 불의(不義)의 삯을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같은 서열에다 놓으신 탐욕의 죄를 그는 물리치고 승리하지 못하였다. 사단은 이 한 가지 허물을 가지고 그를 온전히 다스려서 그의 품성을 타락 시키고 그를 기회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SPT 1880. 11. 18)
7. <'발람'의 고백(告白)>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처럼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벌(罰)을 더 받지 않으려고 그의 죄를 인정하였지만 재앙(災殃)이 멈추자마자 곧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자리로 되돌아갔다. '발람'의 자복(自服)도 비슷한 성질의 것이다. 길에 천사가 칼을 뽑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죄를 인정(認定)하였다. 죄에 대한 순수한 회개(悔改)도 통회(痛悔)도 없었고 목적을 바꾼 것도 아니요 죄를 미워함도 아니요 그의 자복은 아무런 가치도 미덕도 없는 것이었다. (교회증언5권 637p)
8. <하나님의 영(靈)이 '발람'을 떠남>
부귀영달(富貴英達)의 소망과 왕의 총애(寵愛)를 잃었고 그가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산 것을 알고 실망한 '발람'은 자기스스로가 선택하였던 사명의 길에서 되돌아 왔다. '발람'이 집에 도착한 후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제어(制御)하시는 능력이 그를 떠나고 다만 이제까지 제지하여 온 그의 탐욕(貪慾)이 그를 지배(支配)하였다.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발락이 약속한 보상(報償)을 얻고자 하였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번영은 저희가 하나님께 순종함에 달려 있고 저희로 죄에 빠뜨리지 않고는 저희를 전복시킬 길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부조와 선지자 下 71p)
9. <'발람'은 유다와 같은 자이다>
'발람'의 운명(運命)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저희 성격에는 서로 현저한 유사점(類似點)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현저한 실패를 당하였다.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께 충실함을 승인하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公言)하였다. 유다도 역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다고 공언하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부귀(富貴)와 세속적 명예(名譽)를 얻는 디딤돌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실패하여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발람'과 유다 양쪽 다 큰 빛을 받고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악은 온 성품을 중독(中毒)시켜 저희를 멸망하게 하였다. 마음속에 품은 한 작은 죄는 품성을 점점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부조와 선지자 下 72-73)
⊙ <'발람'의 탐욕과 그 결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벧후 2:15).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의 죄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했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유혹자는 그들이 지나치게 양심적이므로 번영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말한다.”(부조와 선지자, 439)
화요일(12월 1일)
<이상한 경험(經驗) (민 22:22~34)>
◈ <하나님의 사자(使者)와 '발람'의 나귀>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출발을 허락하셨으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보다 자신의 사욕(私慾)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把握)하시고 그의 가는 길을 막으셨다. (민 22:22).
즉 영혼이 없는 짐승을 사용하셔서 가장 현명하고 초자연적인 현상마저 간파(看破)한다고 떠벌리던 거짓 선지자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⑴ 욕심에 이끌리어(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영혼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이며, (눅 15:11-16)
⑵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제 하시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한갓 미물인 나귀의 눈에는 보이고 '발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사실상 구속의 은혜를 받지 못한 모든 인생은 멸망하는 짐승에 불과하다.
◈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이 사건을 단순히 우화적(寓話的)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여심으로써
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창조하셨으며 도한 운행하고 계심과 (시편 19:1-6)
⑵ 모든 언어의 출발점도 하나님에게 서임을 보여주셨다. (출 4:11-12)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사건(事件)과 사물(事物)과 인격(人格)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출발이시며 동시에 모든 것의 마침이 되신다. (롬 11:36; 계 1:8)
한편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는 하찮은 자연의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나 영적(靈的)으로 무디어 진 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경고조차도 간과(看過)해 버린다.
영적(靈的)귀머거리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 '발람'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은인(恩人)인 나귀가 하찮은 짐승이라는 점에서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극한 분노를 발(發)하였다. '발람'은 모압 왕이 제안한 보상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모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발람'은 신실한 것처럼 공언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아시고 그에 대해 반응하셨다.
참으로 진리를 사모(思慕)하고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의 충고(忠告)에도 마음을 연다. 완악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접근할 수가 없다. (시편 18:27; 야고보서 4:6)
⊙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나귀가 말을 할 때에 깜짝 놀라며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각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전혀 무감각하였다. 말 못하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처하던 '발람'이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탐욕에 눈이 멀게 되면 말 못하는 짐승보다 더 낮은 영적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참조 습 1:17, 마 15:14, 계 3:17)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이처럼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탐욕에 눈먼 선지자를 돌이키고자 하셨다.
⊙ <나귀 덕분에 생명을 보존(保存)한 '발람'>
'발람'은 자기가 그처럼 잔인하게 대했던 가련한 동물의 덕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주장하고 '눈을 뜬 자요', '전능자의 이상'을 본다고 선언한 자가 탐욕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의 나귀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분별할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442)
⊙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았을 때에도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요일(12월 2일)
<의인(義人)의 죽음 (민 23:5~10)>
◈ 1. '발람'은 그의 악마적(惡魔的) 계책(計策)이 성공하는 것을 목격(目擊)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詛呪)가 당신의 백성에게 임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벌(刑罰)을 받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신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유혹자(誘惑者)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다.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豫感)한 '발람'은 “나는 의인(義人)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願)하며 나의 종말(終末)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選擇)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運命)은 하나님의 원수 편으로 결정되었다. '발람'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그 두 사람의 성격에는 서로 유사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발람'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섬기노라고 공언하였다. 유다도 역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다고 공언하고 예수의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부귀(富貴)와 세속적(世俗的)명예(名譽)를 얻는 디딤돌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실패(失敗)하여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유다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 자기가 믿는 바와 같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하는 나라에서 부귀(富貴)와 영달(榮達)을 얻으려고 기대하였다. 그가 바라던 일의 실패(失敗)가 그를 배도(背道)와 멸망(滅亡)으로 몰아넣었다. '발람'과 유다 두 사람 다 큰 빛을 받았고 특별한 특권(特權)을 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악이 온 성품을 중독(中毒)시켜 그들을 멸망에 빠뜨렸다.
2. 마음속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특성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음속에 품은 한 작은 죄는 점점 품성을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양심의 방벽(防壁)중 하나를 제거(除去)하고, 한 가지 악습(惡習)에 방종(放縱)하는 것, 고상한 한 가지 의무의 요구를 게을리 하는 것은 영혼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사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타락(墮落)시킬 길을 열어준다. 가장 안전한 길은 다윗처럼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다.”
(부조와 선지자(영), 451-452p)
◈ 의인(義人)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인데 반해, 의인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고전 15:31; 고후 4:11)
이러한 맥락에서 의인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다. (잠 14:32)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저주(詛呪)하지 않으시며, 꾸짖지 아니하신다. '발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버리지 않은 한 그분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 “'발람'은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불멸의 영광중에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또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각 사람의 얼굴에 희열이 빛나는 것을 보고 그 순결한 행복의 무궁한 생애를 연상할 때에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부조와 선지자, 447)
⊙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말은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 곧 예수님의 의로 인해 주어지는 영생의 약속을 반영한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며, 의인의 삶을 살거나 스스로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님의 의(義)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발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신 것이다.
⊙ <'발람'의 죽음>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한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원수(怨讐)편으로 결정되었다.
⊙ 로마서에는 분명히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가르친다.(롬3:21,22)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은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거나 도덕적 선행을 수행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완전한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도 결국 그분의 행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과 성질이 변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행위를 전가해주시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가르치면 그는 성질이 변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는 성질 자체와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드러내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이다.(딤후1:10) 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전에는 사망이더니 이제는 생명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질이 바뀌는 것을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시나무, 무화과나무와 엉겅퀴로 대조하여 가르치셨다.(마7:16-20) 가시나무인데, 포도나무의 열매를 가시나무열매로 여겨주는 것이 칭의(稱義)가 아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칭의(稱義)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곧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사망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며(고후5:17) 이렇게 된 사람은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즉 신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벧후1:4)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한 “성품”은 “퓌시스”인데 “본성, 본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 '발람'은 '의인(義人)의 죽음'을 죽기 원(願)하였는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의인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
목요일 (12월 3일)
<별과 홀(笏) (민 24:15~17)>
※ 홀(笏)(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象徵)한다.
◈ 발람은 자신의 예언(預言)속에서 ‘그’라는 불특정(不特定) 3인칭 대명사로 표현되는 한 인물을 등장 시키는데 이는 ‘별’이나 ‘홀(笏)(규)’란 말과 연관시켜 볼 때 메시야(예수님)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별’은 성경에서 왕의 위엄(威嚴)과 영광을 상징하며 (마 2:2), ‘홀(笏)(규)’는 왕의 통치적 주권(主權)을 상징하는 막대기로써 (창 49:10) 본 장(章)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救援者)요 악인(惡人)의 심판자로 도래(到來)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사야 42:1-9; 계시록 22:16)
◈ “박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의 언덕을 가득히 채웠던 바로 그 밤에 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사라지자 광채(光彩)나는 한 '별'이 나타나 하늘에서 움직였다.
그 '별'은 항성(恒星)도 유성(游星)도 아니었으므로 그 현상은 극도의 흥미를 일으켰다. 그 '별'은 멀리서 빛을 발하는 천사의 무리였는데 박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제사장과 철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고대의 두루마리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민 24:17)리라. 이 이상한 '별'이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 박사들은 하늘에서 주신 진리의 빛을 환영하였으므로 이제 그 빛은 더욱 광명한 빛줄기로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새로 탄생하신 왕을 찾으러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시대의 소망, 60)
⊙ '발람'이 지은 노래 중에 언급한 홀과 별은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되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1~2)
⊙ 성경학도들은 이 구절을 구속자 예수님의 도래를 말하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해 왔다. 홀(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象徵)한다. 여호와께서는 이 예언이 주어질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지역적 상징으로 나타내셨으나 그 예언의 약속은 세계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세상의 임금이시다. 마침내 온 세상은 그분께서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참조 사 45:23, 롬 14:11, 빌 2:10)
⊙ <그리스도의 탄생(誕生)을 가리키는 홀과 별>
모세는 시간의 흐름을 내려다볼 허락을 받아 구주의 초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난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상의 평화를 축하하는 천사들의 즐거운 노래를 들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이 하늘의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으며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민 24:17)는 예언의 말씀을 회상할 때 그의 마음은 홍수 같은 큰 빛을 받았다.”(부조와 선지자, 475)
⊙ 홀과 별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발람'이 노래한 별과 홀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리킨 것이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救援者)로 초림(初臨)하셨고, 승리자(勝利者)로 재림(再臨)하실 것이다.
⊙ “자기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유로 동물을 학대하는 자는 비겁한 압제자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고통을 가하는 성벽은 악마적인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은 아무리 학대를 받아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잔인한 행위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발람'의 눈처럼 이런 자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가 증인으로서 하늘 법정에 서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으며 또 그들에게 형벌이 선고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43)
<要約>
'발람'이 재물(財物)과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詛呪)하려 했던 이야기는 그의 터무니없는 탐욕(貪慾)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誡命)은 우리에게 이러한 죄 된 성향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죄의 위험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한 성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마침내 우리는 파멸(破滅)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발람'의 실수로부터 교훈(敎訓)을 얻어야 한다. †
제10과 선지자(先知者)의 '미친 행동'
연구범위: 민 22~24장, 신 1:30, 20:4, 마 15:14, 고전 2:14, 벧후 2:14~16, 계 3:17. / 핵심본문: 딤전 6:10
<記憶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學習目標>
(깨닫기) → <선지자의 타락(墮落)>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詛呪)하면 주겠다는 부(富)의 약속에 미혹(迷惑)되어,
하나님의 선지자가 타락한 슬픈 역사를 확인한다.
(느끼기) → <유혹(誘惑)의 위험성을 인식(認識)함>
어떤 형태의 유혹(誘惑)이든지 그것과 장난치는 것은 위험(危險)함을 느낀다.
(행하기) →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될 것인가, 사자의 먹이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선(善)하심에 집중(集中)함으로 유혹(誘惑)을 물리치기로 다짐한다.
<要點>
한때 신실했던 선지자가 세상 왕이 약속한 보상(報償)을 탐(貪)함으로 완전히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일요일(11월 29일)
<두려움에 빠진 어리석은 왕 (王) (민 22:1~6)>
◈ <가나안 원주민의 신(神)에 대한 개념(槪念)>
가나안 원주민들은 나름대로의 지방 신(地方 神)들을 숭배하고 있었으나 저들의 신이 절대적 존재라거나 유일한 신(神)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즉 그들은 다른 족속들의 신(神)을 인정했으며 그 신들의 능력을 따져 우세한 신과 열세(劣勢)한 신을 가렸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삼상 5:1-6:16)
여기에 제시된 모압 왕 ‘발락’과 브돌의 복술자(卜術者) ‘'발람'’과의 결탁은 바로 위와 같은 생각 속에 이뤄졌다.
발락은 자신의 땅에 접근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복술자의 신탁(信託)으로 괴멸시키려 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복술자(卜術者) '발람'의 입술을 주관하셔서 네 번이나 거듭되던 저주의 메시지를 차단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 왕에 대한 예언을 하게 하셨다. (민수기 24:15-24) 결국 이 사건은
⑴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며, (시편 103:19)
⑵ 모든 사건과 인격을 주관 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역사를 이뤄 가심을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자 이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전(勝戰)소문을 들은바 있는 모압 왕이 겁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滅)하기 위해 '발람'을 데려오는 이야기로 민수기 22장을 시작한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을 좇는 진실한 선지자인 것처럼 모압 왕의 뜻을 거절 하나 후에 모압 왕이 보낸 복채(卜債)에 마음이 끌리어 모압으로 온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는 타락한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영혼이 없는 짐승을 통해 그의 잘못을 꾸짖으셨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게 된다. 이렇듯 물질에 집착하여 진리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 할 수 없으며, 참되고 거짓된 것을 분멸할 줄 모르는 자는 하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시편 49:20)
◈ <모압 평지(平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 전 도달한 마지막 점검지역으로서 백성들은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인구 조사와 함께 군대를 재검열하며 율법을 재차 선포하고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차기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뽑는 등 일련의 가나안 정복 준비를 완료하였다.
(민수기 26:1-65; 신명기 1:1-3;신명기 34:9)
▶ 한편 신명기서 전체의 내용도 바로 이곳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이다.
1. <발락>
‘약탈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모압의 왕이었다. (사사기 11:25)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회(迂廻)하여 돌아갈 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평지에 진(陣)을 치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진멸 대상에 (신명기 7:1) 해당하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통과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조그마한 위험 앞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요일 4:18)
⊙ 모압 왕 발락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이웃의 강한 부족인 아모리와 바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다.
⊙ 발락이 특히 두려웠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대적과 싸우시고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 발락은 자신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적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 적이 섬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저주함으로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발락은 선지자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견지에서 볼 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안 될 일이었다. 발락이 왜 자기 나라의 사제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모압의 신들에게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탄원하게 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민수기 22:6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함>
“만일 우리가 참되고 구원하는 감화력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가 믿노라고 공언하는 바를 실천하게 하며 우리의 의로운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을 분명히 구별 지어 보이도록 하라. 언어와 의복과 행실이 하나님을 증거(證據)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감화가 그들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며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전도, 672)
⊙ 발락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겁에 질려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러들였다. 그는 아마도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월요일(11월 30일)
<'발람' (민 22:7~21)>
◈ '발람'(Balaam) = (순례자, 백성들의 주)
'브올'의 아들, 미디안의 선지자 메소포타미아의 '브들'에 거주 하였다.
1. <'발람'의 배경(背景)과 인격(人格)>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였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배도(背道)하고 탐심에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그는 불의의 재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발락이 그를 청하러 사람을 보내었다. 그는 두 마음을 품고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의 영예와 칭찬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추구하고 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영적선물4권 43쪽)
2. '발람'은 '불신(不信)의 삯을 사랑'하였다. (벧후 2:25)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죄(貪慾罪)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부조와 선지자 하(下)55-56쪽)
3. <동방에서 온 박사(博士)들은 철학자(哲學者)들이었다.>
저들은 명문출신으로 그 나라에서 재물(財物)과 지식(知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유력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발람'도 이들 박사(博士)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던바 성령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전설로 전하여 내왔었다. (시대의 소망 60-61쪽)
4.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물음>
너무나도 뚜렷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면 사람들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는 그 문제를 위해서 감히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는 반대되는 길로 가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을 설득 하려고 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불쾌히 여기신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었다. 까닭은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큰 보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발람'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는 주어질 상에 매우 연연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감히 두 번째 하나님께 물었다. 받은바 의무가 그들이 타고난 성향에 맞을 때는 그 의무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환경과 이치로 보아서 그 의무가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 의무가 그들의 성향에 배치될 때는 흔히 이 증거들을 번복해버린다. 그들이 공상하는 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버려진바 될 위험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교회증언 3권 73쪽)
5.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저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3권 158)
6. '발람'의 이야기에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의 엄숙한 경고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비 그리스도인적 습관을 품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죄가 자라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반복함으로 강화되어서 고상한 능력을 모두 다 굴복 시키는 지배적 힘을 발휘한다. 바람은 불의(不義)의 삯을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와 같은 서열에다 놓으신 탐욕의 죄를 그는 물리치고 승리하지 못하였다. 사단은 이 한 가지 허물을 가지고 그를 온전히 다스려서 그의 품성을 타락 시키고 그를 기회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SPT 1880. 11. 18)
7. <'발람'의 고백(告白)>
바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처럼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벌(罰)을 더 받지 않으려고 그의 죄를 인정하였지만 재앙(災殃)이 멈추자마자 곧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자리로 되돌아갔다. '발람'의 자복(自服)도 비슷한 성질의 것이다. 길에 천사가 칼을 뽑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생명을 잃을까 두려워 죄를 인정(認定)하였다. 죄에 대한 순수한 회개(悔改)도 통회(痛悔)도 없었고 목적을 바꾼 것도 아니요 죄를 미워함도 아니요 그의 자복은 아무런 가치도 미덕도 없는 것이었다. (교회증언5권 637p)
8. <하나님의 영(靈)이 '발람'을 떠남>
부귀영달(富貴英達)의 소망과 왕의 총애(寵愛)를 잃었고 그가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산 것을 알고 실망한 '발람'은 자기스스로가 선택하였던 사명의 길에서 되돌아 왔다. '발람'이 집에 도착한 후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제어(制御)하시는 능력이 그를 떠나고 다만 이제까지 제지하여 온 그의 탐욕(貪慾)이 그를 지배(支配)하였다.
그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발락이 약속한 보상(報償)을 얻고자 하였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번영은 저희가 하나님께 순종함에 달려 있고 저희로 죄에 빠뜨리지 않고는 저희를 전복시킬 길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부조와 선지자 下 71p)
9. <'발람'은 유다와 같은 자이다>
'발람'의 운명(運命)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저희 성격에는 서로 현저한 유사점(類似點)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현저한 실패를 당하였다.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께 충실함을 승인하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公言)하였다. 유다도 역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다고 공언하였고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부귀(富貴)와 세속적 명예(名譽)를 얻는 디딤돌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실패하여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발람'과 유다 양쪽 다 큰 빛을 받고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악은 온 성품을 중독(中毒)시켜 저희를 멸망하게 하였다. 마음속에 품은 한 작은 죄는 품성을 점점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부조와 선지자 下 72-73)
⊙ <'발람'의 탐욕과 그 결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벧후 2:15).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의 죄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했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유혹자는 그들이 지나치게 양심적이므로 번영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말한다.”(부조와 선지자, 439)
화요일(12월 1일)
<이상한 경험(經驗) (민 22:22~34)>
◈ <하나님의 사자(使者)와 '발람'의 나귀>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출발을 허락하셨으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보다 자신의 사욕(私慾)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把握)하시고 그의 가는 길을 막으셨다. (민 22:22).
즉 영혼이 없는 짐승을 사용하셔서 가장 현명하고 초자연적인 현상마저 간파(看破)한다고 떠벌리던 거짓 선지자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⑴ 욕심에 이끌리어(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영혼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이며, (눅 15:11-16)
⑵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제 하시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한갓 미물인 나귀의 눈에는 보이고 '발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사실상 구속의 은혜를 받지 못한 모든 인생은 멸망하는 짐승에 불과하다.
◈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이 사건을 단순히 우화적(寓話的)인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여심으로써
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창조하셨으며 도한 운행하고 계심과 (시편 19:1-6)
⑵ 모든 언어의 출발점도 하나님에게 서임을 보여주셨다. (출 4:11-12)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사건(事件)과 사물(事物)과 인격(人格)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출발이시며 동시에 모든 것의 마침이 되신다. (롬 11:36; 계 1:8)
한편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는 하찮은 자연의 소리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나 영적(靈的)으로 무디어 진 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경고조차도 간과(看過)해 버린다.
영적(靈的)귀머거리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 '발람'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은인(恩人)인 나귀가 하찮은 짐승이라는 점에서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극한 분노를 발(發)하였다. '발람'은 모압 왕이 제안한 보상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모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발람'은 신실한 것처럼 공언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아시고 그에 대해 반응하셨다.
참으로 진리를 사모(思慕)하고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의 충고(忠告)에도 마음을 연다. 완악한 마음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접근할 수가 없다. (시편 18:27; 야고보서 4:6)
⊙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나귀가 말을 할 때에 깜짝 놀라며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각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전혀 무감각하였다. 말 못하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처하던 '발람'이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탐욕에 눈이 멀게 되면 말 못하는 짐승보다 더 낮은 영적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참조 습 1:17, 마 15:14, 계 3:17)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이처럼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탐욕에 눈먼 선지자를 돌이키고자 하셨다.
⊙ <나귀 덕분에 생명을 보존(保存)한 '발람'>
'발람'은 자기가 그처럼 잔인하게 대했던 가련한 동물의 덕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주장하고 '눈을 뜬 자요', '전능자의 이상'을 본다고 선언한 자가 탐욕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의 나귀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분별할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442)
⊙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았을 때에도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요일(12월 2일)
<의인(義人)의 죽음 (민 23:5~10)>
◈ 1. '발람'은 그의 악마적(惡魔的) 계책(計策)이 성공하는 것을 목격(目擊)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詛呪)가 당신의 백성에게 임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벌(刑罰)을 받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신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유혹자(誘惑者)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다.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豫感)한 '발람'은 “나는 의인(義人)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願)하며 나의 종말(終末)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選擇)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運命)은 하나님의 원수 편으로 결정되었다. '발람'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그 두 사람의 성격에는 서로 유사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발람'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섬기노라고 공언하였다. 유다도 역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다고 공언하고 예수의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부귀(富貴)와 세속적(世俗的)명예(名譽)를 얻는 디딤돌로 삼으려 하였다. 여기에 실패(失敗)하여 그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유다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음으로 자기가 믿는 바와 같이 메시야가 이 세상에 세우려고 하는 나라에서 부귀(富貴)와 영달(榮達)을 얻으려고 기대하였다. 그가 바라던 일의 실패(失敗)가 그를 배도(背道)와 멸망(滅亡)으로 몰아넣었다. '발람'과 유다 두 사람 다 큰 빛을 받았고 특별한 특권(特權)을 누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악이 온 성품을 중독(中毒)시켜 그들을 멸망에 빠뜨렸다.
2. 마음속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특성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마음속에 품은 한 작은 죄는 점점 품성을 저하시켜 그 고상한 모든 능력을 악한 욕망에 복종시킨다. 양심의 방벽(防壁)중 하나를 제거(除去)하고, 한 가지 악습(惡習)에 방종(放縱)하는 것, 고상한 한 가지 의무의 요구를 게을리 하는 것은 영혼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사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타락(墮落)시킬 길을 열어준다. 가장 안전한 길은 다윗처럼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다.”
(부조와 선지자(영), 451-452p)
◈ 의인(義人)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인데 반해, 의인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고전 15:31; 고후 4:11)
이러한 맥락에서 의인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다. (잠 14:32)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저주(詛呪)하지 않으시며, 꾸짖지 아니하신다. '발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버리지 않은 한 그분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 “'발람'은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불멸의 영광중에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또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각 사람의 얼굴에 희열이 빛나는 것을 보고 그 순결한 행복의 무궁한 생애를 연상할 때에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부조와 선지자, 447)
⊙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말은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 곧 예수님의 의로 인해 주어지는 영생의 약속을 반영한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며, 의인의 삶을 살거나 스스로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님의 의(義)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발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신 것이다.
⊙ <'발람'의 죽음>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한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원수(怨讐)편으로 결정되었다.
⊙ 로마서에는 분명히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가르친다.(롬3:21,22)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은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거나 도덕적 선행을 수행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완전한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도 결국 그분의 행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과 성질이 변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행위를 전가해주시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가르치면 그는 성질이 변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는 성질 자체와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드러내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이다.(딤후1:10) 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전에는 사망이더니 이제는 생명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질이 바뀌는 것을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시나무, 무화과나무와 엉겅퀴로 대조하여 가르치셨다.(마7:16-20) 가시나무인데, 포도나무의 열매를 가시나무열매로 여겨주는 것이 칭의(稱義)가 아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칭의(稱義)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곧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사망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며(고후5:17) 이렇게 된 사람은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즉 신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벧후1:4)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한 “성품”은 “퓌시스”인데 “본성, 본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 '발람'은 '의인(義人)의 죽음'을 죽기 원(願)하였는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의인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
목요일 (12월 3일)
<별과 홀(笏) (민 24:15~17)>
※ 홀(笏)(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象徵)한다.
◈ 발람은 자신의 예언(預言)속에서 ‘그’라는 불특정(不特定) 3인칭 대명사로 표현되는 한 인물을 등장 시키는데 이는 ‘별’이나 ‘홀(笏)(규)’란 말과 연관시켜 볼 때 메시야(예수님)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별’은 성경에서 왕의 위엄(威嚴)과 영광을 상징하며 (마 2:2), ‘홀(笏)(규)’는 왕의 통치적 주권(主權)을 상징하는 막대기로써 (창 49:10) 본 장(章)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救援者)요 악인(惡人)의 심판자로 도래(到來)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사야 42:1-9; 계시록 22:16)
◈ “박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의 언덕을 가득히 채웠던 바로 그 밤에 하늘에 빛나는 신비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사라지자 광채(光彩)나는 한 '별'이 나타나 하늘에서 움직였다.
그 '별'은 항성(恒星)도 유성(游星)도 아니었으므로 그 현상은 극도의 흥미를 일으켰다. 그 '별'은 멀리서 빛을 발하는 천사의 무리였는데 박사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제사장과 철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고대의 두루마리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민 24:17)리라. 이 이상한 '별'이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 박사들은 하늘에서 주신 진리의 빛을 환영하였으므로 이제 그 빛은 더욱 광명한 빛줄기로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꿈을 통하여 새로 탄생하신 왕을 찾으러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시대의 소망, 60)
⊙ '발람'이 지은 노래 중에 언급한 홀과 별은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되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1~2)
⊙ 성경학도들은 이 구절을 구속자 예수님의 도래를 말하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해 왔다. 홀(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象徵)한다. 여호와께서는 이 예언이 주어질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지역적 상징으로 나타내셨으나 그 예언의 약속은 세계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세상의 임금이시다. 마침내 온 세상은 그분께서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참조 사 45:23, 롬 14:11, 빌 2:10)
⊙ <그리스도의 탄생(誕生)을 가리키는 홀과 별>
모세는 시간의 흐름을 내려다볼 허락을 받아 구주의 초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난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상의 평화를 축하하는 천사들의 즐거운 노래를 들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이 하늘의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으며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민 24:17)는 예언의 말씀을 회상할 때 그의 마음은 홍수 같은 큰 빛을 받았다.”(부조와 선지자, 475)
⊙ 홀과 별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발람'이 노래한 별과 홀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리킨 것이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救援者)로 초림(初臨)하셨고, 승리자(勝利者)로 재림(再臨)하실 것이다.
⊙ “자기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유로 동물을 학대하는 자는 비겁한 압제자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고통을 가하는 성벽은 악마적인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은 아무리 학대를 받아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잔인한 행위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발람'의 눈처럼 이런 자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가 증인으로서 하늘 법정에 서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으며 또 그들에게 형벌이 선고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43)
<要約>
'발람'이 재물(財物)과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詛呪)하려 했던 이야기는 그의 터무니없는 탐욕(貪慾)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誡命)은 우리에게 이러한 죄 된 성향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죄의 위험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한 성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마침내 우리는 파멸(破滅)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발람'의 실수로부터 교훈(敎訓)을 얻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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