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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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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9-11-28 14:35 조회6,7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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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선지자의 '미친 행동
12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연구범위: 민 22~24장, 신 1:30, 20:4, 마 15:14, 고전 2:14, 벧후 2:14~16, 계 3:17.


안식일 오후

발람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농담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글쎄, 하나님이 발람의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데 누군들 못하시겠어?"

하지만 이 이야기를 우스운 이야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교통한 이야기는 죄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복되지 않으면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된다.

발람은 신약에 세 번 언급되는데(벧후 2:15~16, 유 1:11, 계 2:14), 어느 경우도 긍정적으로 언급된 곳은 없고, 오히려 그는 죄의 표본으로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는 발람의 행동을 “미친” 짓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정신적으로 미친 것이 아니라, 모압 왕 발락의 잘못된 요구까지도 기꺼이 들어주고자 할 만큼 돈에 대한 탐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발람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도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면 하물며 우리야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발람의 슬픈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고 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겠다.


핵심본문: 딤전 6:10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면 주겠다는 부(富)의 약속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선지자가 타락한 슬픈 역사를 확인한다.

느끼기: 어떤 형태의 유혹이든지 그것과 장난치는 것은 위험함을 느낀다.

행하기: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 집중함으로 유혹을 물리치기로 다짐한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선지자의 타락

A.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발람은 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요청을 들어주려고 시도했는가?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발락에게로 가라는 일종의 허락을 하셨는데도 왜 그분의 사자가 나귀의 앞을 가로 막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발람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B. 요한계시록 2:14에 따르면, 발람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요청을 들어 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가?


II. 느끼기: 유혹의 위험성을 인식함

A. 우리는 어떻게 발람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머뭇거리는가?

B. 발람의 태도는 연약한 자들에게 어떤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는가?


III. 행하기: 하나님의 사자가 될 것인가, 사자의 먹이가 될 것인가?

A. 비록 우리도 유혹에 약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발람이 예언한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가?

B. 발람의 예언한 축복을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요점: 한때 신실했던 선지자가 세상 왕이 약속한 보상을 탐함으로 완전히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일요일(11월 29일) 두려움에 빠진 어리석은 왕(민 22:1~6)


잠시나마 모압 왕 발락의 입장에 서 보자. 강대국 애굽으로부터 탈출해 나온 거대한 무리가 광야에서 40년간을 기적적으로 생존하였다. 이제 그들이 자신의 왕국에서 멀지 않은 “모압 평지에”(민 22:1) 진을 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들을 침략하거나 아무런 위협을 하지 않더라도 발락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이스라엘이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전에 모압을 친 적이 있는(참조 민 21:26) 아모리 왕 시혼을 쳐부순 소식을 들었다. 이 무리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민 21:1~3). 그가 겁에 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1. 민수기 22:1~6을 읽으십시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은 특히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민22:1-6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2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의 연고로 번민하여 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5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답: 모압 왕 발락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이웃의 강한 부족인 아모리와 바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다.

성경은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3절)고 하였다.


2. 발락이 이스라엘에 대해 위협을 느꼈다면 무엇에 대하여 두려워했어야만 했습니까?(참조 창 48:21, 출 15:1, 신 1:30, 20:4)

창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출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신1:30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20: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답: 발락이 특히 두려웠던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대적과 싸우시고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발락은 자신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적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 적이 섬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저주함으로 그들을 물리치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발락은 선지자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견지에서 볼 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안 될 일이었다. 발락이 왜 자기 나라의 사제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모압의 신들에게 이스라엘을 막아 달라고 탄원하게 하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민수기 22:6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함

“만일 우리가 참되고 구원하는 감화력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가 믿노라고 공언하는 바를 실천하게 하며 우리의 의로운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고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을 분명히 구별지어 보이도록 하라. 언어와 의복과 행실이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감화가 그들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며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복음전도, 672)


<부가설명>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모압 왕은 그 하나님께 굴복하면 그와 그의 나라가 안전할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죽음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아가 그분 안에서 죽든지,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기가 영원한 소멸을 당하든지 둘 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것은 동일하다. 바울은 날마다 자아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전15:31) 이런 경험은 그 사람에게 참된 쉼을 가져온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라고 계시록은 말한다.(계14:13) 공포도 없고 고됨도 없다. 예수 안에서 얻은 영생을 인한 즐거움이 그를 휩쌀 것이다. 세상의 고난과 환난이 있어도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롬5:3,4) 바로 이런 경험의 결과이다.


교훈: 발락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겁에 질려 하나님의 선지자를 불러들였다. 그는 아마도 그분의 능력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월요일(11월 30일) 발람(민 22:7~21)


발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일찍이 발람은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배도하고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자들이 그에게 온 용건을 말했을 때에 그는 발락의 보상을 거절하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은 위험하게도 감히 유혹과 장난하려고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39)


1. 민수기 22:7~21을 읽으십시오. 표면적으로는 발람이 여호와를 위해 굳게 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유혹과 타협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민22:7-21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로 그에게 고하매 8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 9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10 발람이 하나님께 고하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라 이르기를 11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13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 14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고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15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 16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컨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17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답: 발람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물질적 탐욕에 이끌려 모압 왕이 보낸 사신들을 단호하게 돌려보내지 못하고 하룻밤 유숙하도록 권하였다. 이런 태도가 그가 유혹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발람은 여호와께 조언을 구하기까지 확답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모압 왕의 사신들에게 그와 함께 하룻밤 유숙하도록 제안하였다.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저주가 이스라엘을 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참으로 여호와께 물을 필요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혹 다른 대답이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들을 즉시 돌려보냈어야 했으나 머물게 함으로써 자신을 유혹에 노출 시켰던 것이다. 그 사신들이 “복술의 예물”(7절)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하며 두 번째로 유혹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민 22:20) 말씀하셨다. 그 모압 귀족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발람은 이른 아침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값으로도 매도될 수 없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인 체 하였지만, 사실은 그에게 제안된 많은 돈을 갈망하고 있었다.


발람의 탐욕과 그 결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벧후 2:15).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신 탐욕의 죄는 발람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이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사단은 그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멸망을 초래했다. 유혹자는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세속적 이득과 명예를 제시한다. 유혹자는 그들이 지나치게 양심적이므로 번영하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말한다.”(부조와 선지자, 439)


<부가설명>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는(딤전6:5) 정신이 있으면 우리는 유혹의 땅에 들어선 것이다. 발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문제일 수 있다. 신앙생활의 어떤 면을 이익을 얻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는 발람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거래하는데, 자기가 장로이기 때문에 신뢰하라고 강조한다든가, 자기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속이지 못한다고 강조하면 의심스럽다.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 이익과 명예와 부에 절대 강자가 없다.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자세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 발람은 정말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과 저주를 했던 삶을 바탕으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부와 명예를 쌓으려고 하였다.


교훈: 발람은 한 때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나,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화요일(12월 1일) 이상한 경험(민 22:22~34)


발람은 모압 왕이 제안한 보상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모압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발람은 신실한 것처럼 공언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아시고 그에 대해 반응하셨다.


민수기 22:22~34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민22:22-34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31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1. 말 못하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의 선지자로 자처하던 발람이 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중요한 상징적인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까?(참조 습 1:17, 마 15:14, 계 3:17)

습1: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지라.

마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답: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탐욕에 눈이 멀게 되면 말 못하는 짐승보다 더 낮은 영적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2. 발람이 나귀의 하는 말을 듣고 나서 맨 처음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발람의 비이성적인 반응은 재물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짐승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답: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나귀가 말을 할 때에 깜짝 놀라며 영적인 의미를 생각하고 각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이 놀라운 상황에서도 전혀 무감각하였다.


3.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심지어 곁길로 나가는 발람에게도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이처럼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탐욕에 눈먼 선지자를 돌이키고자 하셨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 특이한 이야기를 해석하였으나 주석자마다 설명이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발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전히 그에게 매우 친근하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나귀 덕분에 생명을 보존한 발람

“발람은 자기가 그처럼 잔인하게 대했던 가련한 동물의 덕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주장하고 '눈을 뜬 자요', '전능자의 이상'을 본다고 선언한 자가 탐욕과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의 나귀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분별할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442)


<부가설명> 발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덮게 된다. 탐욕은 재물과 지위나 명예뿐만이 아니다. 학문이나 진리를 이해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든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로 옳다는 신념이 있으면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앞에서는 이런 정신을 다 벗어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발에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모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선입관이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을 배우고 깨닫고 그 목적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바른 길로 인도될 것이다. 발람은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실을 못 박아놓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였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어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훈: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았을 때에도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하였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영적인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요일(12월 2일) “의인의 죽음”(민 23:5~10)


나귀가 말하는 사건이 있은 후에 발람은 발락에게로 갔다. 발락이 발람을 “바알의 산당”(민 22:41)으로 인도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분명히 근동지방의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산꼭대기에 산당을 지었었다. 발람은 왕에게 그곳에 일곱 단을 쌓고 그 위에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1. 발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한 말을 읽어 보십시오. 어떤 놀라운 약속이 나타나 있습니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안겨 줍니까?(민 23:5~10, 참조 고전 15장)

민23:5-10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어 가라사대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6 그가 발락에게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 모든 귀족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7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10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하매.


답: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저주하지 않으시며, 꾸짖지 아니하신다. 발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버리지 않은 한 그분은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발람은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불멸의 영광 중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또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각 사람의 얼굴에 희열이 빛나는 것을 보고 그 순결한 행복의 무궁한 생애를 연상할 때에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엄숙한 기도를 드렸다.”(부조와 선지자, 447)


2. “의인의 죽음”을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그러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롬 3:20~24)

롬3:20-24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우신 대언자이시다(요일 2:1). 그분의 의를 통해서만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의 말은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 곧 예수님의 의로 인해 주어지는 영생의 약속을 반영한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며, 의인의 삶을 살거나 스스로 의인의 죽음을 죽을 수 없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님의 의(義)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여기 민수기에 기록된 발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신 것이다.


발람의 죽음

“발람은 이스라엘과 미디안 백성 사이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최후가 가까움을 예감한 발람은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부르짖었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원수 편으로 결정되었다.

발람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과 비슷하였고 그 두 사람의 성격에는 서로 유사점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려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부조와 선지자, 451~452)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삶,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게 하는 성품 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렇게 완전하게 사신 예수님의 행위를 우리가 한 행위로 여겨주시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전가(轉嫁)해 주시는 의라고 설명한다. 이런 사상에는 의가 행위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교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칠 때 이와 같이 가르친다. 필자도 그렇게 배웠다. 예언의 신의 증언에도 이런 표현들이 많다.

그런데 필자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대로는 하나님의 의는 행위 이전에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행위는 열매로 열리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에는 분명히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가르친다.(롬3:21,22)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것은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거나 도덕적 선행을 수행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완전한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도 결국 그분의 행위를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과 성질이 변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행위를 전가해주시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가르치면 그는 성질이 변하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의는 성질 자체와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드러내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이다.(딤후1:10) 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전에는 사망이더니 이제는 생명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질이 바뀌는 것을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시나무, 무화과나무와 엉겅퀴로 대조하여 가르치셨다.(마7:16-20) 가시나무인데, 포도나무의 열매를 가시나무열매로 여겨주는 것이 칭의(稱義)가 아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칭의(稱義)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한다. 곧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예수 안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사망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며(고후5:17) 이렇게 된 사람은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즉 신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벧후1:4) “신의 성품”이라고 번역한 “성품”은 “퓌시스”인데 “본성, 본질”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교훈: 발람은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였는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고, 의인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


목요일(12월 3일) 별과 홀(민 24:15~17)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기 시작하자 모압 왕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라. 왕은 비록 화가 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만 보이는 다른 산꼭대기로 선지자를 데리고 가서 일곱 단을 쌓고 다시 수송아지와 수양을 드렸다. 발람은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였다(민 24:1).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 발락은 다른 곳에서 세 번째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드렸으나 발람은 그가 이스라엘에 대해 사술을 쓰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 쓸데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세 번째 장소에서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며 다시 그 민족을 축복하였다(민 23:27~30, 24:1~10). 그러자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실패한 것을 비난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1. 민수기 24:15~17에서 발람이 지은 노래에 나오는 은유를 읽으십시오. 이 예언은 무엇에 관한 것이며, 또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창 49:10, 마 2:1~2)

민24:15-17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창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마2:1,2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답: 발람이 지은 노래 중에 언급한 홀과 별은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되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1~2)


“그들은 더욱 명확한 지식을 찾는 가운데 히브리 성경에 관심을 돌렸다. … 한때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발람도 이들 박사의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예언하였다. … 발람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나'리라(민 24:17). 이 이상한 별은 약속된 분을 예고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닐까?”(시대의 소망, 59~60)

성경 학도들은 이 구절을 구속자 예수님의 도래를 말하는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해 왔다. 홀(능력)과 별(빛)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여호와께서는 이 예언이 주어질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 지역적 상징으로 나타내셨으나 그 예언의 약속은 세계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세상의 임금이시다. 마침내 온 세상은 그분께서 승리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참조 사 45:23, 롬 14:11, 빌 2:10)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리키는 홀과 별

“모세는 시간의 흐름을 내려다볼 허락을 받아 구주의 초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난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상의 평화를 축하하는 천사들의 즐거운 노래를 들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이 하늘의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으며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민 24:17)는 예언의 말씀을 회상할 때 그의 마음은 홍수 같은 큰 빛을 받았다.”(부조와 선지자, 475)


<부가설명> 홀과 별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철저히 주장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하게 하셨다. 그래서 이 타락한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가 그것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상관없다. 그가 전한 기별은 진리였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그의 입을 주장하여 말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가야바로 그해의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이며 그 결과가 무엇일 것인지 예언적인 말을 하게 되었다.(요11:49-52)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기 위하여 말할 때에도 그 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그의 구원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목사가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성경적으로 가르치려고 마음을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그 말씀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오직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입을 통하여 진리를 말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왕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정직한 열망으로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 되면 훨씬 좋을 것이다.


교훈: 발람이 노래한 별과 홀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리킨 것이다.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로 초림 하셨고, 승리자로 재림하실 것이다.


금요일(12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40장 '발람'(438–452), 산상보훈, '팔복'(17~44) '율법의 신성성'(45~58)


“자기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유로 동물을 학대하는 자는 비겁한 압제자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고통을 가하는 성벽은 악마적인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은 아무리 학대를 받아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잔인한 행위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발람의 눈처럼 이런 자의 눈이 열릴 수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가 증인으로서 하늘 법정에 서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으며 또 그들에게 형벌이 선고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의 죄 된 속성에 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 자유의지는 살아 있고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사상이다. 우리가 태어난 것도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없다.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도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다. 다만 태어난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그때 비로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자유의지라는 말에 스스로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났다.(고전15:22; 마8:21,22)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죄의 속성 곧 사망의 독이 그들에게서 분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철저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야 한다. 그때 비로소 생명의 속성이 생활로 드러나게 된다.


2. '의인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내가 오늘 죽는다면 '의인의 죽음'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 언제 죽어도 내가 스스로 의인의 죽음에 참여할 수 없다.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만 의인의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그들의 생명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골3:1-4)


3. 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포함한 모든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돈의 부패케 하는 영향력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런 사상이 생활이 되게 하는 것이다. 돈뿐이 아니다. 우리는 호흡하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가 외부의 무엇을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주님의 교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다시 깊이 생각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망하게 될 것을 시인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하겠다.


요약: 발람이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이야기는 그의 터무니없는 탐욕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우리에게 이러한 죄 된 성향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죄의 위험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러한 성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마침내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발람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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