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예배와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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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10-07 19:19 조회4,65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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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예배와 헌신
10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3분)
도입)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 요 4: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예배요 헌신이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은 예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성을 기울였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을 삶에 중심에 두고 사는 자들은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배는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이렇게 준비된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참된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것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예배를 실질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헌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의 형태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굴복하고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의 기본이며 헌신의 표현이며 나타남이다.
기억절: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연구범위: 출 25:22, 민 7~8장, 슥 4:1~6, 11~14, 계 4:2, 5, 11:4.
안식일 오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여러 면에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신다. 문화와 언어와 역사적인 간격이 있고, 예배의 형태와 표현방식이 다를지라도 그들과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들이 의식과 의례를 통해 배웠던 기본적인 진리는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와 동일한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영적 조상들이 걸어간 믿음의 여정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셨던 의식들과 율법들과 명령들을 몇 가지 더 고찰해 볼 것이다. 그 외에도 번제단의 봉헌, 성소의 등대, 그리고 광야 성소의 직무를 위해 제사장들과 더불어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레위인들의 임명식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0월 11일)
단의 봉헌(민 7장)
도입)
단을 봉헌하기 위해서 각 지파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린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각 지파의 이름과 족장의 이름만 바꾸어서 같은 사건의 내용이 단조롭게 반복되어 있다. 단이란 날마다 드리는 예배의 중심지(中心地)이다. 그러므로 단을 위한 봉헌은 첫 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행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여기서 각 지파가 동일한 예물, 번제물, 속죄제물, 화목제물을 드리고 있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번제물을 제외한 나머지 제사물들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특히 소제물(素祭物)은 제사장의 중요한 몫이었으며(레6:14-18)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도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다.(레7:11-18, 28-36) 제사장의 사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족장들의 일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은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제사장들을 도와 그들의 사역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열두 지파가 드린 예물과 제물을 동일하게 반복하여 기록한 까닭은 모든 지파가 균등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한 각 지파가 서로 협동하여 성막과 제사장 직을 받들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광야의 성막에서 희생 제물은 모두 번제단 위에 드려졌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놋으로 입힌 번제단은 두 칸으로 이루어진 성막의 출입구 가까운 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지성소 휘장 앞에 놓여 있던 금빛 나는 단은 향을 피우는 데만 사용되었다.
1. 민수기 7장을 읽으십시오. 이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드려진 예물들에 관하여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이끌어 내어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이 기사 가운데 십자가는 어떻게 암시되어 있습니까?
답:
단은 이미 7일 동안 성결케 되었다(출 29:37). 이제 온 민족을 대표하는 족장들이 단의 봉헌을 경축하기 위해 12일간 예물을 가져왔는데, 각 족장과 그의 지파에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다. 모든 예물은 지파마다 동일하였는데 이는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희생 제물을 원하셨으며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서 그처럼 많은 피 흘리는 제물을 원하셨는지 의아해 한다.
모든 죽어가는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고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의식으로서 정신과 마음에 감동을 주는 교훈이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이런 의미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가 있다는 이 위대하고 중대한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 제도를 계획하신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07)
교훈: 번제단을 봉헌하는 의식에서 각 지파별로 바친 예물은 동일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필요함을 나타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죄 있는 죽은 사람에게 계실 수 없고 생명 없는 죽은 교회 죽은 종교 위에는 임재 할 수 없다. 민수기는 열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매일 한 족장씩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셨다. 우선 열 두 족장이 당번제로 번제단에 헌물을 드리게 하셨고 그 내용 또한 “성소의 세겔대로”(민 7:13) 드리게 하셨는데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성경의 진리)대로 드리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선 열 두 종족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날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매일 드리는 제사”(히 10:11)와 같이 성막을 세우고 기름부음 받는 날부터 12일간 당번제로 예물을 드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그들의 예물을 드리되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족장마다 자기 날에 드릴지니라, 하시니라”(민 7:11) 우리는 열두 족장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산제사의 생활이 이어져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구원을 받은 날부터 천국에 실제로 이르는 날까지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또 맡겨주신 사명을 어깨에 메고 주님의 세우신 교회에서 각자 주어진 은사대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월요일(10월 12일)
하나님과의 교통(민 7:89)
도입)
이스라엘 종교의 특징은 주변국가의 형상숭배와는 달리 형상이 없다. 그런데 법궤는 형상이 아니지만 중요한 제의기구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법궤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고 인도하셨다. 출애굽에서는 “법궤”라고 했고, ‘증거(간증)의 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출 40:21). 이 뜻은 하나님의 증거(간증)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며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율법도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민수기에서의 아름은 “언약궤”(민 10:33, 14:44)이었다. 여기에서의 뜻은 궤와 언약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궤가 있는 곳에 언약도 있었다. 또 사무엘상에서의 이름은 “하나님의 궤”였다(삼상 4:11, 13, 17, 21, 22). 이 뜻은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신다는 것이다. 궤는 곧 하나님을 대표했다. 궤가 백성과 같이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이 백성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법궤는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삼하 6:2)의 하늘 보좌를 상징하였다. 지성소의 그룹들(cherubim) 사이에서 빛나는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그룹들이 옹위하는 보좌 아래에 놓여 있던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었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근거가 되었으며, 그분의 우주적 통치의 도덕적 기초가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가 무엇인지 말해 줄 뿐 아니라,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었다.
1. 출애굽기 25:22과 민수기 7:89을 읽으십시오. 모세가 겪은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께 아주 가까이 가더라도 멸망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참조 출 20:19)
답:
2.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임재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까?(참조 히 4:14~16). 예수께서 어떻게 이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까?
답:
모세가 어떻게 성막 안으로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드렸는지 주목해 보라.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대부분도 어떻게 기도하는지, 어떻게 여호와께 말씀드리는지를 알며, 우리의 형편을 아뢰고 필요한 것들을 간청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통한다는 것은 단지 일방통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쌍방이 서로 교통하는 것처럼, 우리와 조물주와의 관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그 음성을 듣는가 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처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간의 교통이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법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법궤는 출애굽 이후 성막에 모셔지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물이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며 종교적, 정치적 실존적 상징이 된다. 구약에는 법궤를 지고 다니고 법궤를 성소 안에 모셔 놓고 하나님과 교통을 했다. 하지만 신약에 법궤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법궤의 장본인 되신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이다. 법궤를 모시고 가는 자들은 모두 이기는 자들이다. 법궤가 떠난 곳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법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임재의 상징물이었다.
화요일(10월 13일)
성막 안의 빛(민 8:1~4)
도입)
성소 안에는 금으로 만든 등대가 있다.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다. 등대 가운데는 밑판이 있고, 그 위에 줄기가 있고 가지 여섯이 있다. 가지는 가운데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셋씩 있기 때문에 그 끝에 등잔이 모두 일곱 개가 있다. 그리고 여섯 가지를 위해 꽃받침이 있게 하되 줄기와 이어지는 부분에 꽃받침이 세 개씩 있다.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를 가지고 쳐서 만들라고 했는데, 그것은 망치로 때려서 만들었다. 둥그런 금을 큰 망치로 때려서 가지와 꽃을 쳐 내고 가지 여섯 개와 줄기 끝에 살구꽃 형상의 등잔을 만든 것이 등대이다. 줄기 꼭대기에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여섯 개가 있으니 전부 합해서 일곱 개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3’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4’는 고난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40일 동안 광야 길을 행했다. ‘5’는 ‘은혜’를 나타내는데 값없이 받는다는 의미이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값없이 성령을 받았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베데스다 연못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다. ‘6’은 ‘인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칫집에 가셨을 때, 포도주가 모자랐는데, 거기에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에 ‘666’이 나온다. 그리고 다니엘서에는 신상의 높이가 60규빗이라고 나와 있다.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등대의 여섯 가지는 인간을 나타내고 그 가지 여섯 개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과 합해져서 ‘7’이 되었을 때, 온전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고 있다.
뜰에서 12일 동안 단의 봉헌 의식이 거행된 후에 모세가 성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성막의 내부는 어두웠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아론에게 고하여 일곱 등잔을 가진 등대에 불을 밝히게 하라고 하셨다. 이 등대는 히브리어로 메노라(menorah)라고 하는데(민 8:1~4), 히브리어로 빛을 뜻하는 오르(or)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메노라(또는 등대)는 중심 되는 줄기가 있고 양 옆에 세 개씩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는데, 한 달란트 무게의 금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것이었다. 그 모양은 살구나무(almond) 가지의 양식을 본뜬 것이었다(출 25:31~40). 제사장들은 각 가지 끝에 위치한 등잔을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보살폈다(출 30:7~8). “그[아론]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레 24:4)
1. 다음 구절들은 메노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줍니까?
슥 4:1~6, 1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4:2, 5,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가랴의 이상에서 관을 통해 메노라로 흘러가서 계속 등불이 타게 하는 기름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5~6절). 히브리어로 살구(렘 1:11~12)는 '깨어 있다' 또는 '각성하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래서 살구나무는 문자적으로 '깨어있는 나무' 또는 '각성의 나무'로 불렸다. 이는 이 나무가 아주 일찍 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 성소를 보았는데, 그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켜 있는 메노라가 있었다. 이를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였는데(5절), 그것은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성령님을 요한이 자기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의 둘째 칸뿐 아니라 첫째 칸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밤낮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훈: 성막의 첫째 칸에는 끊임없이 등불을 밝히는 등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백성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시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했다.
부가적용)
요 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하였다. 구약의 성소 안에서 12개의 떡을 비취던 일곱 등잔의 빛이 이제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비추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빛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한다. 결국 일곱 등잔의 빛은 우리를 생명 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교회를 왜 촛대라고 하였을까? 교회는 어둠을 밝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대가 어둠을 밝히는 것은 기름을 통해서 이다. 이 기름은 바로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는데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인본주의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가장 칭찬을 많이들은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다. 교회 사업이 가장 왕성한 교회였다. 그러나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셨다. 우리 교회 안에 가장 강력히 역사해야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는 교회는 복음을 빛을 발한다. 어둠을 몰아낸다.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수요일(10월 14일)
레위인들의 봉헌-1(민 8:6~26)
도입)
레위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의 봉헌을 위해 스스로 구별하여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하였다. 죄를 벗기는 물을 뿌리며, 전신의 털을 밀고, 의복을 빨아서 몸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의 속죄를 위해 일상적인 제물(소제물, 번제물,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에 나아간다. 그 후에 그들은 회중 앞에서 “손을 얹는”(안수) 의식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가 바친 제물로 간주되고,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요제로) 바쳐졌다. 이렇게 한 뒤에 비로서 그들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졌다. 즉 제사장들에게 봉사하도록 맡겨졌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면 당시에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백성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하는 사역 역시 거룩한 것이어서 그래서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며 의복을 빨아야만 했다.(민 8:7)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였지만 그러나 제사장은 아니었다. 레위인들이 하는 일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돌보고 정리하며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레위인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제사장인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다.
1. 민수기 8:6~2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레위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봉사하도록 봉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식의 절차 중 어떤 부분에서 당신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까? 이 의식은 거룩함, 죄, 정결, 하나님께 대한 헌신 등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어떤 봉사의 역할을 담당하든 간에, 이 의식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위한 어떤 원칙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까?
답:
레위 지파의 가족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성막 주위에 진을 쳤다. 그들의 수는 2만 명이 넘었기 때문에(민 3:39) 그들의 봉헌 과정 중 어떤 부분은 틀림없이 대표적인 몇 사람에게 상징적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즉 레위 사람 전체가 아닌 대표 되는 몇 사람만 직접적으로 그 의식에 가담했을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은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나서 속죄제물을 바친 다음(레 8:7~8), 그들 자신이 요제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이다(11절). 이것은 분명히 산 사람을 불살라 제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위인들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하게 될 것에 대한 헌신과 봉헌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레위인들에게 안수하게 함으로 이 책임을 위임한 사실에 잘 나타난다(10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레위 지파 전체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성소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게 하셨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셨다.
교훈: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장자를 대표하는 레위인들을 안수함으로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로 특별한 봉사를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선물로 주셨다.
부가적용)
레위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해야 했던 일은 자기 자신이 먼저 거룩(구별)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속죄의 물로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의복을 빨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레위인은 자기 자신을 정결케 되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레위인을 안수하고, 레위인은 제물에 안수한다. 속죄제물과 번제 제물을 드림으로,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드리며, 레위인을 정결케 한다. 그렇게 정결케 된 레위인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레위인을 취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속죄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직무를 수행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직무였기에 레위인 스스로도 정결하게 되어져야했던 것이다.
목요일(10월 15일)
레위인들의 봉헌-2(민 8:16)
도입)
어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나님께서 부과하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이제 그가 하나님께 성별되었다는 것을 공동체가 인정한다는 표시로써 안수를 행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안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했고(민 8:1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음을 알렸으며(민 27:22~23; 신 34:9), 예루살렘 교회가 선발한 일곱 명의 일꾼은 안수를 통하여 공동체적 인준을 받았는가 하면(행 6:5~6), 안디옥 공동체는 바나바와 사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이 성령님에 의해 파송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로서 안수를 행했고(행 13:2~3), 디모데는 장로들의 회에서(딤전 4:14) 혹은 바울에 의해(딤후 1:6) 안수를 받고 사역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민 8:16)
여호와께서 레위인들을 특별히 부르신 것에 관하여 얼마나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는지 주목해 보라. 그들은 여호와께 “온전히 드린바 된 자”들이었다.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나에게 드려지고 또 드려진바 되었다”는 반복적인 강조가 나타난다. 이는 그들의 부르심이 얼마나 엄숙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1. 민수기 8:19을 읽으십시오.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가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빛 안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롬 5:11, 히 9:25~28)
답:
학자들 간에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이것은 분명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그런 속죄는 아니다. '속죄하다'라는 동사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우에 우리는 그 해답을 같은 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봉사를 행함으로 그들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즉 레위인들은 그들의 봉사와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성소로 가까이 오게” 함으로써 (민 8:19)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처럼 백성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들을 위해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가 되었던 것이다.
교훈: 레위인들의 봉헌은 넓은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가 되었다. 백성을 성소로 가까이 이끄는 사역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실제로 레위인들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아론의 아들들을 돕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기는 일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귀한 것인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을 귀히 여기신다.(요 12:26) 마 20:28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직이요 이는 매우 귀한 직분인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라고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그것을 맡기신 분은 주님이시기에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항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라고 칭하셨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첫 열매) 레위인을 취하였다.
금요일(10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고대 유대인들이 '안수'하는 관습을 연구해 보라. 안수의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창 48:8~9, 13~14, 17~20, 민 27:18~23, 마 19:13~15, 행 13:1~3
“이 예식은 유대인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유대인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할 때에 그는 경건하게 손을 그들의 머리 위에 얹었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에도 제사장의 권위를 가진 이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들의 손을 얹었을 때,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하여 정해진 그 특별한 사업을 위해 택함 받은 헌신한 사도들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였다.
후에 손을 얹는 이 안수 예식은 크게 남용되어 마치 안수를 받는 이들에게 어떤 능력이 즉시 임하여, 당장 그들이 목회 사업에 모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부당하게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도들을 구별함에 있어서, 단순히 손을 얹는 행위로 어떠한 능력이 부여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의 안수와 미래 사업에 끼친 관계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사도행적,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오늘날 교회의 담임 목사는 어떤 면에서 레위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담임 목사를 어떻게 후원할 수 있습니까?
2. 레위인들은 성소 봉사와 관련하여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구별하여야 합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 형태와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예물을 바치고,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하고,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빛을 숙고하며,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동일한 성경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10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3분)
도입)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들이 있다. 요 4: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예배요 헌신이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은 예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정성을 기울였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하나님을 삶에 중심에 두고 사는 자들은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배는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이렇게 준비된 예배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참된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것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예배를 실질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헌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의 형태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굴복하고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예배의 기본이며 헌신의 표현이며 나타남이다.
기억절: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연구범위: 출 25:22, 민 7~8장, 슥 4:1~6, 11~14, 계 4:2, 5, 11:4.
안식일 오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여러 면에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신다. 문화와 언어와 역사적인 간격이 있고, 예배의 형태와 표현방식이 다를지라도 그들과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들이 의식과 의례를 통해 배웠던 기본적인 진리는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와 동일한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영적 조상들이 걸어간 믿음의 여정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셨던 의식들과 율법들과 명령들을 몇 가지 더 고찰해 볼 것이다. 그 외에도 번제단의 봉헌, 성소의 등대, 그리고 광야 성소의 직무를 위해 제사장들과 더불어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레위인들의 임명식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10월 11일)
단의 봉헌(민 7장)
도입)
단을 봉헌하기 위해서 각 지파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린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각 지파의 이름과 족장의 이름만 바꾸어서 같은 사건의 내용이 단조롭게 반복되어 있다. 단이란 날마다 드리는 예배의 중심지(中心地)이다. 그러므로 단을 위한 봉헌은 첫 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행하는 중요한 행사이다. 여기서 각 지파가 동일한 예물, 번제물, 속죄제물, 화목제물을 드리고 있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번제물을 제외한 나머지 제사물들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특히 소제물(素祭物)은 제사장의 중요한 몫이었으며(레6:14-18)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도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다.(레7:11-18, 28-36) 제사장의 사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족장들의 일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은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제사장들을 도와 그들의 사역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열두 지파가 드린 예물과 제물을 동일하게 반복하여 기록한 까닭은 모든 지파가 균등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한 각 지파가 서로 협동하여 성막과 제사장 직을 받들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광야의 성막에서 희생 제물은 모두 번제단 위에 드려졌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놋으로 입힌 번제단은 두 칸으로 이루어진 성막의 출입구 가까운 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지성소 휘장 앞에 놓여 있던 금빛 나는 단은 향을 피우는 데만 사용되었다.
1. 민수기 7장을 읽으십시오. 이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드려진 예물들에 관하여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이끌어 내어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이 기사 가운데 십자가는 어떻게 암시되어 있습니까?
답:
단은 이미 7일 동안 성결케 되었다(출 29:37). 이제 온 민족을 대표하는 족장들이 단의 봉헌을 경축하기 위해 12일간 예물을 가져왔는데, 각 족장과 그의 지파에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다. 모든 예물은 지파마다 동일하였는데 이는 신분과 지위에 관계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떤 이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희생 제물을 원하셨으며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서 그처럼 많은 피 흘리는 제물을 원하셨는지 의아해 한다.
모든 죽어가는 희생 제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고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의식으로서 정신과 마음에 감동을 주는 교훈이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이런 의미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가 있다는 이 위대하고 중대한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 제도를 계획하신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07)
교훈: 번제단을 봉헌하는 의식에서 각 지파별로 바친 예물은 동일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필요함을 나타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죄 있는 죽은 사람에게 계실 수 없고 생명 없는 죽은 교회 죽은 종교 위에는 임재 할 수 없다. 민수기는 열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매일 한 족장씩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셨다. 우선 열 두 족장이 당번제로 번제단에 헌물을 드리게 하셨고 그 내용 또한 “성소의 세겔대로”(민 7:13) 드리게 하셨는데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성경의 진리)대로 드리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선 열 두 종족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은 날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매일 드리는 제사”(히 10:11)와 같이 성막을 세우고 기름부음 받는 날부터 12일간 당번제로 예물을 드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그들의 예물을 드리되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족장마다 자기 날에 드릴지니라, 하시니라”(민 7:11) 우리는 열두 족장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산제사의 생활이 이어져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구원을 받은 날부터 천국에 실제로 이르는 날까지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또 맡겨주신 사명을 어깨에 메고 주님의 세우신 교회에서 각자 주어진 은사대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월요일(10월 12일)
하나님과의 교통(민 7:89)
도입)
이스라엘 종교의 특징은 주변국가의 형상숭배와는 달리 형상이 없다. 그런데 법궤는 형상이 아니지만 중요한 제의기구로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법궤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고 인도하셨다. 출애굽에서는 “법궤”라고 했고, ‘증거(간증)의 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출 40:21). 이 뜻은 하나님의 증거(간증)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며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율법도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민수기에서의 아름은 “언약궤”(민 10:33, 14:44)이었다. 여기에서의 뜻은 궤와 언약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궤가 있는 곳에 언약도 있었다. 또 사무엘상에서의 이름은 “하나님의 궤”였다(삼상 4:11, 13, 17, 21, 22). 이 뜻은 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신다는 것이다. 궤는 곧 하나님을 대표했다. 궤가 백성과 같이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이 백성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법궤는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삼하 6:2)의 하늘 보좌를 상징하였다. 지성소의 그룹들(cherubim) 사이에서 빛나는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그룹들이 옹위하는 보좌 아래에 놓여 있던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었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근거가 되었으며, 그분의 우주적 통치의 도덕적 기초가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가 무엇인지 말해 줄 뿐 아니라,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었다.
1. 출애굽기 25:22과 민수기 7:89을 읽으십시오. 모세가 겪은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대면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께 아주 가까이 가더라도 멸망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참조 출 20:19)
답:
2.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임재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까?(참조 히 4:14~16). 예수께서 어떻게 이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까?
답:
모세가 어떻게 성막 안으로 들어가 여호와께 말씀드렸는지 주목해 보라.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대부분도 어떻게 기도하는지, 어떻게 여호와께 말씀드리는지를 알며, 우리의 형편을 아뢰고 필요한 것들을 간청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통한다는 것은 단지 일방통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쌍방이 서로 교통하는 것처럼, 우리와 조물주와의 관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그 음성을 듣는가 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처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 간의 교통이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법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법궤는 출애굽 이후 성막에 모셔지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물이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며 종교적, 정치적 실존적 상징이 된다. 구약에는 법궤를 지고 다니고 법궤를 성소 안에 모셔 놓고 하나님과 교통을 했다. 하지만 신약에 법궤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법궤의 장본인 되신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이다. 법궤를 모시고 가는 자들은 모두 이기는 자들이다. 법궤가 떠난 곳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법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임재의 상징물이었다.
화요일(10월 13일)
성막 안의 빛(민 8:1~4)
도입)
성소 안에는 금으로 만든 등대가 있다.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다. 등대 가운데는 밑판이 있고, 그 위에 줄기가 있고 가지 여섯이 있다. 가지는 가운데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셋씩 있기 때문에 그 끝에 등잔이 모두 일곱 개가 있다. 그리고 여섯 가지를 위해 꽃받침이 있게 하되 줄기와 이어지는 부분에 꽃받침이 세 개씩 있다. 등대는 정금 한 달란트를 가지고 쳐서 만들라고 했는데, 그것은 망치로 때려서 만들었다. 둥그런 금을 큰 망치로 때려서 가지와 꽃을 쳐 내고 가지 여섯 개와 줄기 끝에 살구꽃 형상의 등잔을 만든 것이 등대이다. 줄기 꼭대기에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여섯 개가 있으니 전부 합해서 일곱 개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3’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4’는 고난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40일 동안 광야 길을 행했다. ‘5’는 ‘은혜’를 나타내는데 값없이 받는다는 의미이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값없이 성령을 받았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베데스다 연못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다. ‘6’은 ‘인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칫집에 가셨을 때, 포도주가 모자랐는데, 거기에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에 ‘666’이 나온다. 그리고 다니엘서에는 신상의 높이가 60규빗이라고 나와 있다.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등대의 여섯 가지는 인간을 나타내고 그 가지 여섯 개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과 합해져서 ‘7’이 되었을 때, 온전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고 있다.
뜰에서 12일 동안 단의 봉헌 의식이 거행된 후에 모세가 성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성막의 내부는 어두웠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아론에게 고하여 일곱 등잔을 가진 등대에 불을 밝히게 하라고 하셨다. 이 등대는 히브리어로 메노라(menorah)라고 하는데(민 8:1~4), 히브리어로 빛을 뜻하는 오르(or)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메노라(또는 등대)는 중심 되는 줄기가 있고 양 옆에 세 개씩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는데, 한 달란트 무게의 금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것이었다. 그 모양은 살구나무(almond) 가지의 양식을 본뜬 것이었다(출 25:31~40). 제사장들은 각 가지 끝에 위치한 등잔을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보살폈다(출 30:7~8). “그[아론]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레 24:4)
1. 다음 구절들은 메노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줍니까?
슥 4:1~6, 1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4:2, 5,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가랴의 이상에서 관을 통해 메노라로 흘러가서 계속 등불이 타게 하는 기름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5~6절). 히브리어로 살구(렘 1:11~12)는 '깨어 있다' 또는 '각성하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래서 살구나무는 문자적으로 '깨어있는 나무' 또는 '각성의 나무'로 불렸다. 이는 이 나무가 아주 일찍 순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 성소를 보았는데, 그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켜 있는 메노라가 있었다. 이를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였는데(5절), 그것은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성령님을 요한이 자기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의 둘째 칸뿐 아니라 첫째 칸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밤낮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훈: 성막의 첫째 칸에는 끊임없이 등불을 밝히는 등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백성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시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했다.
부가적용)
요 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하였다. 구약의 성소 안에서 12개의 떡을 비취던 일곱 등잔의 빛이 이제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비추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빛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한다. 결국 일곱 등잔의 빛은 우리를 생명 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교회를 왜 촛대라고 하였을까? 교회는 어둠을 밝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대가 어둠을 밝히는 것은 기름을 통해서 이다. 이 기름은 바로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는데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인본주의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가장 칭찬을 많이들은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다. 교회 사업이 가장 왕성한 교회였다. 그러나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셨다. 우리 교회 안에 가장 강력히 역사해야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는 교회는 복음을 빛을 발한다. 어둠을 몰아낸다.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수요일(10월 14일)
레위인들의 봉헌-1(민 8:6~26)
도입)
레위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의 봉헌을 위해 스스로 구별하여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하였다. 죄를 벗기는 물을 뿌리며, 전신의 털을 밀고, 의복을 빨아서 몸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의 속죄를 위해 일상적인 제물(소제물, 번제물,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에 나아간다. 그 후에 그들은 회중 앞에서 “손을 얹는”(안수) 의식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 전체가 바친 제물로 간주되고,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요제로) 바쳐졌다. 이렇게 한 뒤에 비로서 그들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졌다. 즉 제사장들에게 봉사하도록 맡겨졌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면 당시에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백성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하는 사역 역시 거룩한 것이어서 그래서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며 의복을 빨아야만 했다.(민 8:7)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였지만 그러나 제사장은 아니었다. 레위인들이 하는 일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돌보고 정리하며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레위인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제사장인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다.
1. 민수기 8:6~2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는 레위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봉사하도록 봉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식의 절차 중 어떤 부분에서 당신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까? 이 의식은 거룩함, 죄, 정결, 하나님께 대한 헌신 등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어떤 봉사의 역할을 담당하든 간에, 이 의식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위한 어떤 원칙들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까?
답:
레위 지파의 가족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성막 주위에 진을 쳤다. 그들의 수는 2만 명이 넘었기 때문에(민 3:39) 그들의 봉헌 과정 중 어떤 부분은 틀림없이 대표적인 몇 사람에게 상징적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즉 레위 사람 전체가 아닌 대표 되는 몇 사람만 직접적으로 그 의식에 가담했을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은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나서 속죄제물을 바친 다음(레 8:7~8), 그들 자신이 요제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이다(11절). 이것은 분명히 산 사람을 불살라 제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위인들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하게 될 것에 대한 헌신과 봉헌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레위인들에게 안수하게 함으로 이 책임을 위임한 사실에 잘 나타난다(10절).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장자들을 대표하는 레위 지파 전체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성소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게 하셨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물로 주셨다.
교훈: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장자를 대표하는 레위인들을 안수함으로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로 특별한 봉사를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선물로 주셨다.
부가적용)
레위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제사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해야 했던 일은 자기 자신이 먼저 거룩(구별)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속죄의 물로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의복을 빨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레위인은 자기 자신을 정결케 되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레위인을 안수하고, 레위인은 제물에 안수한다. 속죄제물과 번제 제물을 드림으로,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드리며, 레위인을 정결케 한다. 그렇게 정결케 된 레위인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레위인을 취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속죄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직무를 수행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 사역을 감당하는 직무였기에 레위인 스스로도 정결하게 되어져야했던 것이다.
목요일(10월 15일)
레위인들의 봉헌-2(민 8:16)
도입)
어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나님께서 부과하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이제 그가 하나님께 성별되었다는 것을 공동체가 인정한다는 표시로써 안수를 행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안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레위인들에게 안수를 했고(민 8:1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음을 알렸으며(민 27:22~23; 신 34:9), 예루살렘 교회가 선발한 일곱 명의 일꾼은 안수를 통하여 공동체적 인준을 받았는가 하면(행 6:5~6), 안디옥 공동체는 바나바와 사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이 성령님에 의해 파송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로서 안수를 행했고(행 13:2~3), 디모데는 장로들의 회에서(딤전 4:14) 혹은 바울에 의해(딤후 1:6) 안수를 받고 사역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민 8:16)
여호와께서 레위인들을 특별히 부르신 것에 관하여 얼마나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는지 주목해 보라. 그들은 여호와께 “온전히 드린바 된 자”들이었다.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나에게 드려지고 또 드려진바 되었다”는 반복적인 강조가 나타난다. 이는 그들의 부르심이 얼마나 엄숙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1. 민수기 8:19을 읽으십시오.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가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빛 안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롬 5:11, 히 9:25~28)
답:
학자들 간에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이것은 분명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그런 속죄는 아니다. '속죄하다'라는 동사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경우에 우리는 그 해답을 같은 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봉사를 행함으로 그들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즉 레위인들은 그들의 봉사와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성소로 가까이 오게” 함으로써 (민 8:19)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도록 도와주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처럼 백성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들을 위해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가 되었던 것이다.
교훈: 레위인들의 봉헌은 넓은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가 되었다. 백성을 성소로 가까이 이끄는 사역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실제로 레위인들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아론의 아들들을 돕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기는 일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귀한 것인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을 귀히 여기신다.(요 12:26) 마 20:28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직이요 이는 매우 귀한 직분인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라고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그것을 맡기신 분은 주님이시기에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항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바 된 자" 라고 칭하셨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첫 열매) 레위인을 취하였다.
금요일(10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고대 유대인들이 '안수'하는 관습을 연구해 보라. 안수의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창 48:8~9, 13~14, 17~20, 민 27:18~23, 마 19:13~15, 행 13:1~3
“이 예식은 유대인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유대인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할 때에 그는 경건하게 손을 그들의 머리 위에 얹었다.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칠 때에도 제사장의 권위를 가진 이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들의 손을 얹었을 때,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하여 정해진 그 특별한 사업을 위해 택함 받은 헌신한 사도들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였다.
후에 손을 얹는 이 안수 예식은 크게 남용되어 마치 안수를 받는 이들에게 어떤 능력이 즉시 임하여, 당장 그들이 목회 사업에 모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처럼 부당하게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도들을 구별함에 있어서, 단순히 손을 얹는 행위로 어떠한 능력이 부여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의 안수와 미래 사업에 끼친 관계에 대한 단순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사도행적,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오늘날 교회의 담임 목사는 어떤 면에서 레위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담임 목사를 어떻게 후원할 수 있습니까?
2. 레위인들은 성소 봉사와 관련하여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구별하여야 합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 형태와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예물을 바치고,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하고,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빛을 숙고하며,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동일한 성경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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