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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기 제3과 에배와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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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10-07 12:41 조회3,5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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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예배와 헌신

기억절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성막을 세우고

성막을 세우고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에 기름을 부어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였다.(7:1) 기름을 부었다고 달리진 것은 없다. 기름을 성전 기구에 붓는 것이나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상징이다.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며 왜 성전기구에 기름을 부으면 거룩하게 되고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메시야가 될까?
밍크의 복부 피하에서 추출한 밍크오일은 굳기름이 아니라 식물성 기름처럼 액체다. 밍크는 유일하게 피부병이 없으며, 손상된 피부를 치유하는 능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왜 밍크오일을 사용하여 기구나 사람을 성별하지 않으셨을까? 왜 성별을 위해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게 하셨을까? 식물성 기름은 식물에 따라 상처에도 사용되고 식용으로도 사용되고 방향제로도 사용된다. 식물성 기름이 요긴하게 사용되기 때문일까? 식물성 기름은 으깨고 부수뜨려 짠 기름이다. 식물성 기름은 으깨고 부수뜨려 짠 기름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셨을까? 식물성 기름은 이 두 가지를 갖춘 기름이다. 으깨고 부수뜨려 짠 기름이면서도 요긴하게 사용되는 기름이다. 메시야에게 부어질 기름은 으깨지고 부수뜨린 상한 심령이면서도 가장 요긴하게 사용되는 기름이어야 한다. 마리아는 그 기름을 예수께 부어 메시야를 자기 개인의 메시야로 삼았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계획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실 하나님에겐 으깨지고 부서지는 고통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고통의 골짜기를 지난 기름이 유용하게 사용되듯이 고통이 예정된 그리스도의 삶은 죄지은 인간을 살리는 아름다운 기름이 되었다. 따라서 그 예수에게 드려질 기름도 으깨지고 부서져 짜낸 기름이어 하며 구속의 계획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는 성막의 기구들도 그런 기름을 부어 성별하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곧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제물을 바쳤다. 그들은 지파의 지도자들로서 직접 나서서 인구조사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주님 앞에 가져온 제물은 덮개가 있는 수레 여섯 대와 황소 열두 마리였다. 수레는 지도자 두 사람에 한 대씩이고 황소는 각자 한 마리씩이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에게 제물을 받아서 레위 사람에게 주고 각자 자기 맡은 일에 따라 회막 일에 쓰도록 하여라.”(민 7:5 새번역)
모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여섯 대의 수레와 열두 마리의 황소를 레위 사람에게 주었다. 30세에서 50세까지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인구가 게르손 자손 보다 므라리 자손이 20% 정도 많았지만 게르손 자손에게는 수레 두 대와 소 넷을 주었고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 네 대와 소 여덟 마리를 나눠주었다.(민 7:7-8) 그리고 고핫 자손은 특별히 성소와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민 4:16), 특히 하나님의 궤를 어깨로 메는 거룩한 직임을 맡았으므로 수레도 황소도 주지 않았다.(민 7:9)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할 때 하나님의 성소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기구들을 어께에 메고 옮기도록 하셨을까? 그때로부터 약 400년 후에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새 수레’를 몰았다. 삼하 6장 3절은 새 수레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새수레를 원하실까? 새수레에 인간의 노력은 들어갔지만 인간의 마음을 담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수레를 사용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핫 자손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전 기구를 어께에 메고 이동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실체가 그 안에 계심을 뜻한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대하 6:18) 용납하지 못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좁은 법궤 안에 계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한줄기의 빛으로 임재하셨는지 어떤지는 이해 할 수 없지만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삼상 6:19) 하나님께서는 성막에만 계실 뿐 아니라 이동 중에도 함께 계셨던 것이다.

제단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던 날, 지도자들은 제단 봉헌 제물을 가져 와서 제단 앞에 바쳤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루에 지도자 한 사람씩 제단 봉헌 제물을 가지고 오게 하여라.”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각 지파의 자손들은 매일 한 사람씩 나와 제물을 바쳤는데 그들은 모두 성소의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쟁반 하나와, 70세겔 나가는 은 대접 하나에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 곡식제물을 가득 담아 바쳤다. 10세겔 나가는 금잔에는 향을 가득 담았다. 수송아지 1마리와 숫양 1마리와 일 년 된 새끼 숫양 1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고, 숫염소 1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쳤다. 화목제물로는 황소 2마리와 숫양 5마리와 숫염소 5마리와 일 년 된 새끼 숫양 5마리를 바쳤다.(7:12-83 새번역)
왜 성경엔 위와 같이 간단하게 쓰지 않고 성경 독자들에게 관심도 없는 각 지파 지도자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했을까? 왜 매일 바치는 봉헌 제물이 같은데도 매일 같은 제물의 이름을 열두 번이나 반복해서 썼을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베드로 일행이 고기잡이 하러 바다로 나갔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여 그대로 하니 고기가 많이 잡혔다. 비상식적인 이야기는 한 세대만 지나가면 전설이 되는 법, 요한은 그날 153마기가 잡혔다고 말함으로 그날 있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증거하였다. 증거의 요소 중 하나가 자세한 진술이다. 진술이 자세하지 않을 때 조사자는 거듭거듭 캐묻는다. 자세한 진술은 물증에 대한 믿음을 더해준다. 일백 쉰셋이라는 숫자는 물증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숫자로 남겨놓은 물증이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와 곡식제물을 담 은 쟁반 하나와 은 대접 하나와 향을 담은 금잔을 가져왔다. 수송아지 1마리와 숫양 1마리와 일 년 된 새끼 숫양 1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고, 숫염소 1마리는 속죄제물로 쳤다. 한데 화목제물로는 황소 2마리와 숫양 5마리와 숫염소 5마리와 일 년 된 새끼 숫양 5마리를 바쳤다.
속죄와 화목, 성경에선 같은 개념이다. 속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한데 왜 속죄제물보다 화목제물에 더 많은 제물을 요구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에 더 깊은 관심을 표하신 것은 인간의 죄보다 인간과의 화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실로 인간과의 화목이다.
제단에 기름을 부어서 제단을 거룩하게 하던 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바친 제단 봉헌 제물은 모두 은쟁반이 12, 은대접이 12, 금잔이 12이었다. 은쟁반 하나의 무게가 130세겔이고, 은대접 하나의 70칠십 세겔이므로, 그릇의 은은 성전 세겔로 모두 2,400세겔이었다. 향을 가득 담은 금잔은 모두 12인데, 금잔 하나가 성소의 세겔로 10세겔씩 나가는 것이므로, 금잔은 모두 120세겔이었다.(7:84-86)
번제물로 바친 짐승은, 수송아지가 12마리, 숫양이 12마리, 일 년 된 숫양이 12마리이다. 이 밖에도 곡식제물이 있었다. 숫염소 12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친 것이다. 화목제물로 바친 짐승은 황소가 24마리, 숫양이 60마리, 숫염소가 60마리, 일 년 된 숫양이 60마리이다. 이것이 제단에 기름을 부어서 제단을 거룩하게 한 다음에 바친 제단 봉헌 제물이었다.(7:87-88)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지도자들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릴 우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모세는, 주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으로 갔다. 그 때마다 모세는, 증거궤와 속죄판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곤 하였다.(7:89) 왜 희미하게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목소리를 들려주기만 하셨을까?
눈은 경황 중에 자칫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는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요 20:14) 그러나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수인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보고도 모른 예수를 목소리를 듣고 알았을까? TV를 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정확한 내용은 귀가 접수한다.
모세는 두 그룹 사이에서 소리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왜 하나님은 그의 보좌를 활활 타오르는 번제단에 정하지 않으시고 캄캄한 두 그룹 사이로 정하셨을까?(삼상 6:2)
쉐키나의 어원이 ‘거하다’는 ‘샤칸’이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쉐키나가 비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쉐키나로 지성소가 빛났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솔로몬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왕상 8:12). 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16) 하나님께서 캄캄한데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에는 아브람이 복 없는 땅으로 갈 것이 암시되었다. 복 없는 땅에 복의 근원이 필요한 것이지 복 있는 땅에 복의 근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다.’(잠 5:23) 빛이 필요한 곳은 어둠이지 밝은 곳이 아니다. 어두운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밝히시고자 어두은 가운데 처하여 계시는 것이다.


등대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에게, 등잔을 밝힐 때에는, 등잔 일곱 개가 등잔대 앞 맞은쪽을 비추게 차려 놓으라고 일러라.”
왜 일곱 갈래의 등잔대를 두었을까? 죄인이 등불을 등지는 순간 일곱 갈래로 도망치는 죄의 그림자가(신 28:7) 앞에서 춤을 춘다. 빛을 등지고 가면 갈수록 어두운 그림자는 더욱 길게 드리워지고 앞은 더욱 어두워진다. 그때 어두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떡상이다. 떡상의 높이는 1.5규빗(68cm정도)이다. 떡상은 머리를 뺏빳이 세운 자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떡상의 떡은 어두운 길을 가다가 넘어진 자가 무릎 꿇고 먹는 음식이다. 떡상은 빛을 등진 자에게 준비된 하나님의 은총이요, 넘어진 자에게 준비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떡을 먹고 힘을 내어 돌아선 자에게 비취는 빛은 ‘어두운데 빛이 비취리라’(고후 4:6) 하시던 그 하나님의 빛이다. 이 빛은 혼자 가지고 있는 빛이 아니라 일곱 갈래로 만방에 나누는 빛이다. 착한 행실로 나타나는 빛(마 5:16)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전도는 복된 소식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시간이다.
등대가 어디를 향하고 있건 성소 안은 등불로 환할 터이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등대가 떡상을 향하도록 하셨을까? 그것은 말씀에 비추시는 성령의 빛이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을 받은 표라고 생각한다. 죽을 병자를 고친다면 죽은 자도 살려야하는 게 아닐까? 등대가 떡상을 비추고 있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이다. 성령을 받기 원한다면 성경을 펴자. 성령의 불빛은 거기를 비추고 계신다.


레위 사람의 봉헌식

성막을 성별한 후에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을 주께 바치는 예식을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레위 사람을 회막 앞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라. 네가 레위 사람을 주 앞에 세우면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 사람에게 그들의 손을 얹을 것이다.”(민 8:9-10 새번역)
누가 누구에게 안수해야할까? 이 시대의 교회는 하나의 비즈니스다. 비즈니스에서 안수는 라이선스를 위한 요식행위이다. 라이선스를 위한 요식행위에서 안수는 선임자가 후임자에게 하는 일이지만 성경에서 안수는 백성의 추대를 받는 요식행위이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선 헤브론에 가서 유다 사람들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다.(삼하 2:4) 백성이 인정하지 않는 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 하시자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며 만류했다. 이때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인간을 구원하는 그것이 바로 의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룬다’는 말은 침례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없을까?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그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충이라고 한다면, 신분 높은 사람이 신분 낮은 사람에게 그의 목숨까지 바치는 것을 의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하셨다. 그 의를 인간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 앞에 나타나셨다. 침례 베풀기를 거절하던 요한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시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예수께서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에 의해 죽으실 것을 침례로 보여주신 것이다.
침례를 받으심으로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지만 실제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은 죄 많은 여인에게서였다.(눅 7:37-38)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 나의 개인적인 메시야로 삼지 않는다면 2000년 전에 태어난 그 분은 온 세상의 메시야일지는 몰라도 나 개인의 메시야는 아니다. 기름 붓는 일은 선임자의 권리가 아니라 지도자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백성의 본분이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들이 모여 레위 사람에게 손을 얹은 것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레위사람들의 봉사를 받아들이겠다는 표이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당신이 나의 왕이심을 받아들입니다’하는 표이다. 이것을 잘못 안 나폴레옹은 교황 피우스 7세가 그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는 왕관을 손으로 받아 들고는 뒤돌아서서 그 앞에 앉아 있는 아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 나폴레옹은 자기의 힘이 강화되는 줄 알았지만 백성의 왕관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폴레옹은 결국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만일 그때 나폴레옹이 무릎을 꿇고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받아드렸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백성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민 8:17,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장자들을 취하셨듯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산물의 처음 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취하심으로 이스라엘 모든 족속의 장자를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셨으며 레위인의 봉사를 모든 족속의 봉사로 받아들이셨다. 명품이 아니라 짝퉁으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에게 오늘 내가 바쳐야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민 8:19)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접근할 때에라도 재앙을 받지 않게 하려고’(새번역) 속죄하는 일을 했다. 여기서 속죄로 번역된 ‘카파르 kaphar’는 ‘속죄하다’ ‘덮다’ ‘씻다’ ‘용서하다’는 뜻이다. 왜 레위인이 그 일을 해주어야할까? 왜 죄를 스스로 씻지 못하고 레위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인간과 관계해서 짓는 모든 죄는 그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짓는 것이다. 민사사건은 서로 해결하면 되지만 형사사건은 검사의 고발에 부딪쳐야 한다. 6000년간 죄를 주장해온 사단의 고발에 맞서기에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다. 고발에 맞서기 위해 준비된 변호사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일 2:1) 아직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레위인은 양을 통해 그 사실을 죄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아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셨나요?

일요일: 단의 봉헌
1. 왜 기름을 부어 메시야를 삼았을까?

월요일: 하나님과의 교통
2. 정말 지성소가 쉐키나로 환히 밝았을까?
3.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16) 하나님께서
왜 캄캄한데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왕상 8:12)

화요일: 성막 안의 빛
4. 왜 등대는 떡상을 마주보게 두었을까?
5. 왜 등대는 일곱 갈래의 빛을 비출까?

수요일: 레위인들의 봉헌 I
6. 누가 누구에게 기름을 부어야 할까?

목요일: 레위인들의 봉헌 II
7. 왜 죄를 스스로 씻지 못하고
레위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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