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을 보는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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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09-29 03:25 조회3,322회 댓글0건본문
요한 서신을 보는 두 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요일 4:14-
그리스도론
신약성경의 배경은 신화시대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BC722년 경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태어났다. 특히 헤시오도스는 그가 양떼를 돌보고 있을 때 시의 여신인 뮤즈가 나타나 그에게 시인의 지팡이와 목소리를 주면서 ‘영생의 축복을 받은 신들에 대해 노래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아마 하나님이 침묵하시려는 시기에 사단은 재능 있는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않았나 생각된다.
앗수르와 바벨론을 지나 페르샤와 헬라시대에 이르러 신화작가들은 현대의 창작 신화작가인 조앤 롤링만큼이나 환영을 받았다. 망령되고 허탄한 이야기를(딤전 4:7) 공교히 꾸며낸(벧후 1;16) 이야기들은 헬라와 로마 시대에 신전 안으로 들어가 신전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은 한 시대만 지나면 전설이 되며 그 전설에 신적인 요소가 개입되면 그것은 신화가 된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신인이다. 신인의 특징은 반신반인이다. 제우스가 정실부인인 헤라를 범할 때는 상처를 입은 뻐꾸기로 변하고 스파르타의 왕비인 레다를 유혹할 때는 백조로 변한다. 하지만 뻐꾸기나 백조에서 다시 제우스로 돌아오는 일에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나오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살려내셨다. 사도행전 2장 24절의 관주를 보면 20번이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성경절이 나온다. 그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예수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의 저자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성경의 예수는 신과 인간을 50%씩 나누어 가진 신인이 아니라 물과 피를 가진 완전한 육체로 오셨다.(요일 5:6)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간주되었다.(요일 4:2)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는 말은 신화의 신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화의 신들에겐 인간을 구하고자하는 의지가 없다. 따라서 인간을 위해 흘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이다. 조지프 켐벨의 말대로 ‘인간의 피는 신들의 진찬’(조지프 캠벨, 『동양신화』 14쪽 참조)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물과 피로 임하셨다. 이것은 육체로 임하셨다는 뜻 외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는 분명한 의지를 가진 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신화의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점이다.
구원론
BC 586년, 유다가 멸망한 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으로 생각했던 이방인들 틈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다. 하나님이 침묵하던 시대에 이리 저리 쫓겨 다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것들을 집대성 한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는 쫓겨 다니던 유대인들이 세상을 살기 위해 도덕적 계율에 충실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선을 행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큰 부자일지라도 맛있는 요리가 즐비한 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같다’(마빈 토케어 『성전 탈무드』 115쪽)고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바르고 근면한 삶만이 그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탈무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시대에 인간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려 노력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론을 확립하는 한 편, 이단으로 인해 서로 간에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사랑이 기독교 최고의 계율인 것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요일 3:14) 하지만 이 사랑은 세상종교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삶을 얻는 일에 인간의 무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한데 성경은 삶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빌 4;13)가 있다는 것이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의 삶이 ‘나’라는 모니터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가 ‘진리 자체도 그를 인정’(요삼 1:12 공동번역)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요일 4:14-
그리스도론
신약성경의 배경은 신화시대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BC722년 경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태어났다. 특히 헤시오도스는 그가 양떼를 돌보고 있을 때 시의 여신인 뮤즈가 나타나 그에게 시인의 지팡이와 목소리를 주면서 ‘영생의 축복을 받은 신들에 대해 노래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아마 하나님이 침묵하시려는 시기에 사단은 재능 있는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않았나 생각된다.
앗수르와 바벨론을 지나 페르샤와 헬라시대에 이르러 신화작가들은 현대의 창작 신화작가인 조앤 롤링만큼이나 환영을 받았다. 망령되고 허탄한 이야기를(딤전 4:7) 공교히 꾸며낸(벧후 1;16) 이야기들은 헬라와 로마 시대에 신전 안으로 들어가 신전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은 한 시대만 지나면 전설이 되며 그 전설에 신적인 요소가 개입되면 그것은 신화가 된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신인이다. 신인의 특징은 반신반인이다. 제우스가 정실부인인 헤라를 범할 때는 상처를 입은 뻐꾸기로 변하고 스파르타의 왕비인 레다를 유혹할 때는 백조로 변한다. 하지만 뻐꾸기나 백조에서 다시 제우스로 돌아오는 일에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나오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살려내셨다. 사도행전 2장 24절의 관주를 보면 20번이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성경절이 나온다. 그 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예수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의 저자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성경의 예수는 신과 인간을 50%씩 나누어 가진 신인이 아니라 물과 피를 가진 완전한 육체로 오셨다.(요일 5:6)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간주되었다.(요일 4:2)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는 말은 신화의 신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화의 신들에겐 인간을 구하고자하는 의지가 없다. 따라서 인간을 위해 흘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이다. 조지프 켐벨의 말대로 ‘인간의 피는 신들의 진찬’(조지프 캠벨, 『동양신화』 14쪽 참조)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물과 피로 임하셨다. 이것은 육체로 임하셨다는 뜻 외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는 분명한 의지를 가진 신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신화의 신과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점이다.
구원론
BC 586년, 유다가 멸망한 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으로 생각했던 이방인들 틈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했다. 하나님이 침묵하던 시대에 이리 저리 쫓겨 다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것들을 집대성 한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는 쫓겨 다니던 유대인들이 세상을 살기 위해 도덕적 계율에 충실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선을 행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큰 부자일지라도 맛있는 요리가 즐비한 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같다’(마빈 토케어 『성전 탈무드』 115쪽)고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바르고 근면한 삶만이 그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탈무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시대에 인간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려 노력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론을 확립하는 한 편, 이단으로 인해 서로 간에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사랑이 기독교 최고의 계율인 것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요일 3:14) 하지만 이 사랑은 세상종교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삶을 얻는 일에 인간의 무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한데 성경은 삶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빌 4;13)가 있다는 것이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의 삶이 ‘나’라는 모니터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가 ‘진리 자체도 그를 인정’(요삼 1:12 공동번역)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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