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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보내는 요한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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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9-14 21:13 조회6,0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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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4분) <李奉周>

제12과 택(擇)하심을 입은 부녀(婦女)에게 보낸 요한의 편지(便紙)

<記憶節>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討議 포인트>
○ 요한이서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어떤 면에서 비슷한가?
○ 요한은 ‘사랑’의 개념을 ‘진리’의 개념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
○ 계명들을 지키는 것과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요한은 왜 거짓 가르침의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
○ 요한은 왜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는가?

(깨닫기) :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 사랑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 오류와 이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日 (9월 13일)
<사랑과 眞理안에서>

◉ 요한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眞理)로 묘사(描寫)한다.
요한이서는 모든 서신(書信)들 가운데 여인(女人)에게로 보내진 유일(唯一)한 편지(便紙)이다.
요한이서는 모두 합(合)하여 13절밖에 안 되는 짧은 서신(書信)안에
"진리(眞理)"라는 말씀이 5번이나 나오고, "사랑"이란 말은 4번 나오고 있다.
"진리"와 "사랑"이두 말은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로 인(因)하여"(요이1:2) 세상의 모든 가르침을 성경말씀으로서 시험(試驗)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경험(經驗)을 시험(試驗)하라.
당신의 경험(經驗)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試驗)하지 않도록 주의(注意)하라.

요한이 말하고 있는 그 진리(眞理)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서 위로부터 받은 진리이다.
우리는 진리를 찬양(讚揚)하고 만 있을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행(行)해야 한다.
진리 안에 행할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요이1:5)
이 사랑은 순수하여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한다."
우리의 사랑의 증거(證據)는 우리의 행함 가운데 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誡命)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요이1:6)
이와 같이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같이 사도(使徒) 요한이 사랑하는 성도(聖徒)에게 보낸 편지로, 계명(誡命)을 좇아 행하고, 적(敵)그리스도들을 가까이 하지 말며, 특히 '진리'와 '사랑' 안에 행하라는 권면(勸勉)이 담겨 있다.
요한이서에는 진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타난다. 이 진리는 사랑과 함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 <사랑으로 진리를 말씀하심>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크신 지혜를 가지고 깊은 주의와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무례하지 아니하시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케 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아니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써 하셨다.”(정로의 계단, 12)

◉ 요한이서에 자주 반복되는 두 단어는 진리(眞理)와 사랑이다.
이 두 단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必須的)인 요소(要素)이며,
상호보완적(相互補完的)작용(作用)을 한다.

月 (9월 14일)
<誡命들을 좇아 行함(요이 1:4~6)>

◉ 십계명(十誡命)은 다른 모든 도덕적(道德的)및 영적(靈的) 법(法)위에 우뚝 서있다.
그것은(십계명)은 인간의 모든 행위(行爲)를 포괄(包括)한다.
그것은(십계명)은 양심(良心)을 효과적(效果的)으로 다스릴 수 있는 유일(唯一)한 법(法)이다.
그것은(십계명)은 각 시대의 인간의 행동을 위한 압축(壓縮)된 요람(要覽)이며 인간의 의무의 모든 영역(營域)을 다루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영생(永生)을 얻기 위한 길로 언급(言及)하셨다. (마태 19:16-19).
세상이 지속(持續)하는 한, 그것은 모든 인류 사회에 적합(適合)하며, 적용될 수 있고 효력(效力)을 발휘(發揮)할 것이다. (마태 5:17-18). 그것은 결코 시대에 뛰 떨어진 것이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품성(稟性)에 대한 불변(不變)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과 기록으로 십계명을 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출 31:18; 신 4:13).
하나님의 권위로 십계명이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전제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表現)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창 1:27), 그분이 거룩하듯이 거룩하게 지어졌다. (벧전 1:15-16) 따라서 십계명은 하늘이 제정한 거룩함의 표준이다. (참조 : 롬 7:7-25) 율법에 대한 영적 해석의 열쇠는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다. (마태 5-7장)
십계명은 거룩함의 표현일 뿐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태 22:34-40; 요 15:10; 롬 13:8-10; 요일 2:4.)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가 어떤 것이든 그것에 사랑이 없다면 율법을 성취(成就)할 수 없다. 우리가 십계명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길 수 있으며,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안식일 준수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소유를 도적질할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해 거짓 증거(證據)하며, 그들의 소유(所有)를 탐(貪)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忠誠心)의 뿌리이며, 동료(同僚)의 권리 존중의 뿌리이다. 그것이 항상 우리를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큰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요한 14:15; 15:10; 고후 5:14; 갈라디아서 5:6). 사람이 맨 처음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그가 행해왔던 악(惡)을 의식적(意識的)으로 그만두게 될 것이다. 십계명이 대체로 부정(否定)형태로 주어진 것은 주로 죄인들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區別)하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目的) 때문이다.
"너는 ∼하지 말지니라"는 말의 반복은 마음에 억제되어야 할 강한 경향들이 있음을 말해준다. (참조 ; 렘 17:9; 롬 7:17-23; 딤전 1:9-10). 그러나 이 부정 형태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및 영적(靈的)행동의 넓고도 만족할 만한 영역이 열려 있으며, 폭넓은 품성 발달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제제(濟濟)를 가하는 것은 언급(言及)된 몇 가지의 금지(禁止) 사항뿐이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진리를 입증한다. (야고보서 2:12; 고후 3:17).
비록 율법의 문자는 몇 자에 불과하여 범위가 좁게 보이지만 그것의 영적(靈的)의미는 "심히 넓"다. (시편 119:96)

십계명이 두 돌 판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두 종류의 도덕적(道德的) 의무(義務)(하나님에 대한 의무(義務)와 사람에 대한 의무.(마태 22:34-40)에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强調)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는 인간에 대한 의무에 필수적(必須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여김으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종교(宗敎)(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의무)와 도덕(道德)(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의무)사이의 구분을 무시하지 않지만, 이를테면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두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분)께 행한 것이라는 더 심오(深奧)한 개념(槪念)으로 둘을 묶는다.
(참조: 미가 6:8; 마태 25:34-45; 야고보서 1:27; 요일 4:20)
하나님의 말씀들로 이뤄진 십계명은 "율례(律例)"(21:1)와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십계명에 기초되어 있으며 이스라엘의 성문법(成文法)을 구성하는 "언약책(言約冊)(참조: 출 24:3)에 포함되어 있다.

율법의 다른 부분들을 제외한, 십계명을 구성하고 있는 두 돌 판은 "증거(證據)"(출 25:16), "언약(言約)(신명 4:13), "언약의 말씀"(출 34:28), '증거판(證據版)'(출 31:18; 32:15), '언약의 돌판'(신 9:9-11)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오직 이 돌판 들만 언약궤(言約櫃)안에 놓여졌다. (출 25:21; 왕상 8:9). 그래서 그것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언약의 증서로 간주되었다. 속죄소(贖罪所)밑에 두 돌 판을 놓은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성격에 빛을 던져 준다. 이것은 율법이 언약의 기저(基底), 곧 언약의 기초이며, 의무 이행(履行)문서, 곧 계약서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위에 화목제물(和睦祭物)의 피가 뿌려진 속죄소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容恕)가 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이다.
구약(舊約)은 도덕법(道德法)과 의식법(儀式法) 사이에 있는 명확한 구분을 일관적으로 보여준다. (왕하 21:8; 단 9:11) <본교 성경주석(한)1권694-695p>

◉ 사랑과 계명(誡命)은 서로 연결(連結)됩니다. <요한이서 1:5~6 (참조 : 계 14:12)>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誡命)을 좇아 행(行)하는 것이요”(요이 1: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誡命)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 계명(誡命)들을 지키는 것(출 20:1~17)이 상호간(相互間)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본질적(本質的)으로 사랑의 계명(誡命)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계명의 근본정신(根本精神)을 실천(實踐)하는 것이다.

◉ <진정(眞情)한 사랑은 계명(誡命)에 순종(順從)하게 함>
“순종은 그 같은 사랑을 드러낸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게(요일 2:3) 된다.”(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40)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要求)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行動)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실천(實踐)해야 한다.

火 (9월 15일)
<그리스도의 敎訓을 지나침 (요이 1:7~9)>

◉ 우리말 유전(遺傳)에 "날이 넘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숫돌에다 칼이나 낫을 갈아서 너무 갈면 칼날이 넘는다는 말이다.
즉 갈지 않은 것만도 못 된다는 말이다.
또 한 말은 무식(無識)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목소리가 크면 제일인 것인 냥 갑갑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조금 안다 싶으면 예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妄覺)하며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사는 인생들이 참으로 많다.
겸손한 사람들은 이설(異說)과 이단(異端)에 잘 넘어가질 않는다.

☞ 일예(一例)로 그동안 우리 교단(敎團)에서 이탈(離脫)하여 많은 무리(無理)를 빚었던 사람들을 보자.
이들은 하나 같이 자칭(自稱) 똑똑한 사람들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의 행위(行爲)의 결과는 과연 어떠했는가?
요한이 쓴 요한일이삼서의 서신을 짧게 썼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진리와 사랑으로 집약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염려(念慮)하는 부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치는 적(敵)그리스도들의 활동에 미혹(迷惑)되지 않도록 염려(念慮)와 당부(當付)의 글이 많은 비중(比重)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시의 예(例)를 든다면
① "영지주의(靈知主義)"자들과
②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救援)"이라는 개념(槪念)의 가르침 등이다.
이 말을 더욱 쉽게 이야기 하자면
와이(Y)셔츠의 단추를 최초에 한번 잘못 잠그면 위로 올라가면서 다 잘못 잠겨 진다는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예수님의 교훈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解釋)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가정(假定)을 해보자.
필시(必是)자신이 교주(敎主)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그 사실을 인지(認知)하지 못하고 살을 것이다.

◉ 교훈(敎訓)이란?
헬라어 "디다케(didacheʹ).의 "가르침" "가르치다" 라는 뜻의 "디다스코(didaskoʹ)에서 파생(派生)된 말씀으로 신약(新約)에 97회 나오는 단어로 시종일관(始終一貫) "가르치다"로 번역(飜譯)되어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 10권595p)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침으로 해석(解釋)할 수 있지만, 이곳의 문맥(文脈)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주신 교훈을 언급(言及)하고 있음을 지지한다. 이는 주님이 직접 전해준 교훈(敎訓)과 그 교훈이 사도(使徒)들의 가르침 속에서 유지(維持)되었음을 말해주는 표현으로 "미혹(迷惑)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그런 가르침들 안에 한정(限定)시키려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가진 다른 취지(趣旨)들을 첨가(添加)하고자 애썼으므로 구주(救主)가 친히 가르친 것을 지나쳐 가게 되었다.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79p)

☞ 영지주의(靈知主義)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앞서 가려고 시도하는 자들로, 충성스런 교인(敎人)들을 유혹(誘惑)하고자 애쓰는 자로써 그리스도인의 교훈에 역행(逆行)하는 교사임을 드러내주는 구실을 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요 10:30)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자는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절(拒絶)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능가하고자 시도(試圖)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영적지식(靈的知識)의 높이와 깊이에 만족하지 않고 잘못된 정보를 내포할 가능성이 농후(濃厚)한 다른 영역으로 돌진 하고자 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14권379p)

◉ 요한이서 1:7~9절에서 요한이 경고(警告)하고 있는 것은 ?
미혹(迷惑)하는 자에 대하여 경고(警告)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 미혹에 빠지면 적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도들이 한 일을 잃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

◉ 요한이서 1:9절에 그는 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조 마 16:12, 행 2:42, 롬 6:17, 계 2:14~15)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居)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즉 그릇된 교리(敎理)를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그분과 분리(分離)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 <그릇된 교리(敎理)의 위험성(危險性)>
“사단이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는 힘을 얻는 것은 거짓 교리와 유전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성실을 통하여 사단이 그의 힘을 어떤 범위까지 펴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교회에서까지 여호와의 율법을 떠나서 그릇된 표준을 세웠다. 사단은 그 모든 일에 그의 세력을 장악하여 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그릇된 표준으로 이끌므로 그는 인간의 품성을 그릇되게 형성시키고 인간에게 자신을 최고의 존재로 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복음전도, 589)

◉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견해(見解)를 거절(拒絶)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고 마침내는 영생(永生)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바른 교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水 (9월 16일)
<환대(歡待)하지 말라?(요이 1:10~11)>

◉ 잘못된 접대(接待)는 비싼 대가(代價)를 치른다.
만약(萬若)에 염주(念珠)를 돌리며 염불(念佛)을 하는 스님을 집으로 환대(歡待)해서 오래도록 생활을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처음에는 염불소리가 귀에 거슬리겠으나 오래도록 듣고 생활을 한다면 얼마쯤 후에 가서는 아마도 모름지기 귀에 거슬리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들릴 것이며,
이단(異端)들이나 적(敵)그리스도들의 행위(行爲)도 이와 같이 처음에는 의아하게 들리다가 얼마쯤 후에는 당연하게 인정(認定)을 하게 될 것이다. 즉 남을 대접(待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짓 교사들을 대접하는 것은 오히려 거짓 교리를 돕는 행위라는 말씀이다.

가짜와 모조품(模造品)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짜나 모조품은 겉으로는 구별(區別)하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의 많은 이단(異端)들을 보자 우리와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보고 사용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우리가 상상(想像)하는 것 이상의 성경을 떠나서 유권해석(誘勸解釋)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일예(一例)로 들어보자.
성경어디에 일요일(日曜日)을 안식일(安息日)로 변경(變更)하여 지키라고 되어 있는가?
창세기는 물론이거니와 십계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안식일(安息日)의 창조의 목적과 인간에게 주신 목적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으셨것만 어찌 그 많은 개신교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하늘을 두 손으로 가린다고 하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① 안식일(安息日)을 일요일(日曜日)로 변경(變更)
② 영혼멸설(靈魂滅說)을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로
③ 침례(浸禮)를 세례(洗禮)로
④ 영지주의(靈知主義) 주장
⑤ 한번 구원(救援)영원한 구원(救援)
⑥ 왜곡(歪曲)된 지옥과 연옥(煉獄)설 주장
⑦ 교황(敎皇)의 무오류(無誤謬)설 등등

◉ "그리스도의 . 교훈(敎訓)안에 거(居)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1:9)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시험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 ?
내가 어떻게 생각 하느냐가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였고 말하였느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나 ?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어떤 분이신가 ?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 등등
많은 적(敵)그리스도(거짓 선생)들이 그 때의 교회(敎會)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요이1:7-11)
그 들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肉身)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은 거짓말쟁이요, 적(敵)그리스도였다. (요이1:7) → (요일서 4:1-2 참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믿지 않고 그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인(否認)하였다.
그러나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 부르면서 그의 신성(神性)을 부인(否認)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적(敵)그리스도인 것이다.
이것이 곧 요한의 말이다.
중대한 진리로 오늘날 성행(盛行)하고 있는 많은 교파(敎派)와 이단(異端)들을 보라, 그들은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敎訓)을 부정(不淨)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적(敵)그리스도(거짓 선생)들에게 친절하지도 말고 대접(待接)하지도 말라고 요한은 명(命)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악한 행실에 동조(同調)하게 되기 때문이다.

◉ <교회(敎會)안에 침투(浸透)하는 오류(誤謬)의 위험(危險)>
“ 요한은 신도(信徒)들로 하여금 사랑의 정신을 나타냄으로 그들에게 이르게 될 고귀(高貴)한 특권(特權)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마음에 가득찬 이 구속(救贖)하는 능력은 모든 다른 동기를 지배할 것이며 이 능력의 소유자들이 세상의 부패(腐敗)시키는 감화(感化)를 초월(超越)하게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완전히 지배하도록 허용되고 생활의 원동력이 될 때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과 그들에 대한 그분의 관계가 완성될 것이다(행적 551).

◉ 세월이 흘러 신자들의 수효가 증가할 때에 요한은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보다 더한 성실과 열성으로 수고하였다. 그 당시는 교회에 위험이 충만하였다. 사단의 기만이 각처에 있었다. 사단의 사자들은 오전(誤傳)과 거짓으로 그리스도의 교훈들에 대하여 반대를 일으키고자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의견충돌과 이단들이 교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이 그들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일에서 해방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들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 없이 다만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족하다고 가르쳤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선량한 사람이었음을 지지하나 그분의 신성은 부인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하는 척하는 어떤 이들은 기만자(欺瞞者)들이었고 그들은 행실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부인하였다. 스스로 범죄 가운데 살고 있는 그들은 교회에 이론(異論)들을 가져 오고 있었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회의주의와 기만의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요한은 이 유해한 오류가 살금살금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픔에 찼다. 그는 교회가 직면한 위험을 알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그 위기에 대처하였다. 요한의 편지서 들은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 편지서 들은 마치 그가 사랑에 적시어진 붓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서도 저희가 죄 없이 살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자들과 접촉할 때에 그는 그들의 무서운 기만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평판이 좋고 널리 감화를 끼치는 한 여인인 복음 사업의 조력자에게 편지하면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 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생애를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제자가 행한 것과 동일한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졌다. 초대 교회의 번영을 위협한 것들과 비슷한 죄악이 이 마지막 시대에도 존재한다. 이 점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주의 깊이 들어야 한다. “너희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함은 각처에서 들려야 할 부르짖음이며 특별히 성화를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하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너무나 순결하여 자복하지 않은 죄를 덮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을 사랑해야 하는 반면에 죄악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역자들과 연합하면서 이 사랑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영혼을 멸망시키는 오류들을 반대한 것처럼 이 시대의 당신의 백성에게 의를 위하여 세상에 대해 확고부동하게 서기를 요구하신다.” (사도행적 552-555p).

◉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을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여깁니다. (히 13:2, 벧전 4:9).
예수께서는 세리(稅吏)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학(神學)이나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초대(招待)받은 사실과, 요한이서 1:10~11에서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참조 마 10:14~15, 18:15~17)

☞ ♡ 남을 대접(待接)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짓 교사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들이 전(伝)하는 거짓 교리를 돕는 행위가 된다.
요한이서 1:10~11에서 말하는 요점은 남을 대접(待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거짓 교사들을 대접함으로 그들이 전(伝)하는 거짓 교리(敎理)를 돕는 일을 하지 말라는 의미(意味)이다.

◉ <거짓 교사(敎師)들을 경계(警戒)할 것>
“나는 막을 수도 있는 이 문을 막지 않으므로 인하여 원수가 들어와 양 무리를 혼란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천사에게 어떻게 하면 그 문을 닫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천사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난처를 삼아야 하고 지금까지 무시되고 등한시 되었던 복음의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믿음으로 연합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나는 사도 시대 교회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 기만을 당할 뻔했던 것을 보았다.”(초기문집, 100)

※ 그리스도인들이 환대(歡待)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히 야박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권고(眷顧)는 "미혹(迷惑)하는 자"와 "적(敵) 그리스도"(요이 7절)의 경우에만 적용(適用)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가난(家難)한 친구와 나그네들에게 즐겨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는 환대(歡待)와는 직접적(直接的)인 관계가 없다. (참조 ; 마태 25:35; 히브리서 13:2)
하나님의 교회를 속이려고 마음먹고 방문(訪問)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별 의의(意義)가 없다.
<본교 성경주석(한)14권 380p>

木 (9월 17일)
<서로 교통(交通)함 (요이 1:12~13)>

◉ 우리말 속담(俗談)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교육(敎育)방법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법(敎授法)이 시청각(視聽覺)교육이라 한다. 이 말은 보고 듣고 몸으로 체험(體驗)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서로 교통하는 것은 편지나 글로서도 많은 반향(反響)을 끼치지만, 그보다도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면서 하는 일에는 몇 배의 효과가 있다는 말로서, 서신(書信)을 통한 간접적(間接的)인 만남에 비해 직접 대면(對面)하여 만나는 것의 유익(有益)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진리(眞理)안에서 기뻐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가 가서 성도(聖徒)들에게 진리(眞理)를 확증할 것이며 그 결과 진정한 친교의 기쁨이 넘칠 것을 기대하였다.
요한은 자신의 기별을 구두로 전(伝)할 수도 있었으나, 기록된 형태로 전함으로써 좋은 점도 있었다.
1. 사도들에 의해 쓰여진 편지는 특별히 중요하고 권위(權威)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신중하게 받아들여졌다.
2. 편지는 방문하는 것보다 독자들에게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상황이 중대할수록 신속한 반응이 요구되었다.
3. 기별은 다른 교회들이나 같은 상황에 처할 후세대를 위해 보존되었다.
실제로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다른 교회들과 나누라고 하였다.
4. 편지는 매우 주의 깊게 구성되기 때문에 말로 진술하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
5. 성령께서 글 쓰는 이로 하여금 바르게 기록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전히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원(願)하였다.

◉ <만남을 통해 깊어진 성도(聖徒)의 교제(交際)>
“성령의 강림 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구주,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 되는 영혼들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하여 나아갔다. 그들은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은 부드럽고 사려 깊었으며 자기를 부인하였고 진리를 위하여 어떤 희생도 불사하였다. 매일의 상호 교제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내도록 명하신 사랑을 나타냈다.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들은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붙이고자 노력했다”(교회증언, 8권, 240)

◉ 요한은 편지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바랐다.
성도의 교제는 이 땅에서 천국(天國)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

◉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공손함을 나타내는 한편, 죄(罪)와 죄인(罪人)을 그대로 지적(指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일치하는 행동(行動)이라고 그는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시고 구원(救援)하고자 애쓰신 영혼(靈魂)들을 우리가 사랑하되 그 죄와는 타협(妥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역(叛逆)하는 자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인식(認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그 시대(時代)에 그랬듯이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도 영혼을 파멸(破滅)시키는 오류(誤謬)에 대항(對抗)하여 의를 위해 굳게 설 것을 요구(要求)하신다.”(성화된 생애, 65)

◉ “세상의 가장 큰 결핍(缺乏)은 인물(人物)의 부족(不足)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賣買)되지 않는 사람, 심령(心靈)이 진실하고 정직(正直)한 사람, 죄(罪)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羅針盤)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南北)을 가리키듯이 양심(良心)이 그 의무(義務)에 충실(忠實)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초점(焦點)>

○ 사랑은 진리(眞理)라는 틀 안에서 표현(表現)되는 것이며,
진리(眞理)는 기만(欺瞞)과 오류(誤謬)를 분별(分別)하게 되며,
진정(眞情)한 사랑은 그분의 사랑으로 기록된 계명(誡命)을 순종(順從)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예수님의 교훈(敎訓)안에 거(居)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 환대(歡待)하지 말라? (요이 1:10-11) 는,
"미혹(迷惑)하는 자와" "적(敵)그리스도"의 경우에만 적용되며 ,
가난한 친구와 나그네들에게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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