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과 성실성: 온전함과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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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5-27 09:04 조회4,96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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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0 과 성실성: 온전함과 거룩함
6월 5일
일몰:오후 7시 50분
도입)
비극적인 일이지만 영적 여정에 대한 어떤 관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의 모든 양상들을 부인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性을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지성이나 감정, 또는 놀이를 즐기는 성향 등을 거부했다. 그런 사람들이 온전함과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절뚝거림을 하나님께 가져가 치유 받으려 하기보다는 영적인 훈장으로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됨에 근거하지 않은 영성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실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좀 더 신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좀 더 참된 인간으로 빚어 내지 못하는 영성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파괴한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을 아는 일에 투자하면서도 자기를 참되게 아는 일에는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런 사람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한 쪽을 깊이 있게 알수록 다른 쪽을 더 깊이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을 강조하지만, 온전함은 그 거룩함이 우리를 신이나 천사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완전한 인간이 되게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를 충만히 인간답게 하고 충만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다(요10:10). 우리의 생명력과 삶의 진정한 충만함이 삶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을 보여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억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절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9:6~12, 삼상 24:1~10, 단 6:1~10, 마 4:1~11, 롬 1:26~27, 엡 3:14~21.
| 중심 사상 | 도덕적 성실성은 우리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시끄러운 아이들 때문에 몹시 화가 난 설교자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다름 아닌 그의 자녀들이었다. 급기야 그는 설교를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예배가 마치면 혼날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잠시 교회가 썰렁해졌다. 그래도 예배가 끝난 후 모두 점심 을 즐겁게 먹으며 웃고 즐겼다. 정말 행복한 안식일이었다.
행복한 분위기는 안식일이 끝나도 계속되었다.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 작은 딸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왜? 우리 귀염둥이!” “오늘 우리를 벌하실 거라고 약속하 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하신 거예요.”
말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것이 훨씬 어렵다. 아주 훌륭한 사람도 조심하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넘어지기 쉽다.
이번 주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것이다.
일요일
5월 30일
광야의 예수님
도입)
투우에는 진실의 순간이라는 시간이 있다. 투우에 쓰는 소는 묶어놓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풀어 키운다. 다른 소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맛없는 사료를 먹고, 젖을 짜는 동안 투우에 쓰일 소는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며 맛있는 풀을 먹고 산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맘껏 살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다 투우하기 이틀 전 잡아다가 눈을 가리고 좁은 우리에 가두어둔다. 이틀 동안을 불안과 초조 속에 살다 갑자기 투우장에 풀어놓는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사람들의 함성 속에 소는 흥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투우사들이 지나다니며 조금씩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친 소를 상대로 투우사가 일검으로 그를 찌르기 위해 마주하는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한 칼에 소를 죽이지 못하면 상처 입은 소에게 투우사가 죽을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소가 이때껏 살아왔던 그 삶,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왔던 그 순간은 진실이 아니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 소는 키워져 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껏 살아가는 이 인생이 진실이 아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 순간이 진실의 순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진실의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협하고 있는가? 과거에는 흑백이 분명했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양보하다가 약간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또 조금씩 양보하며 다시 새로운 입장에 선다. 그리고 그 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멀지 않아 자신이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완전 히 다른 입장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타협의 결과이다.
때로 조금씩 양보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자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마 4:1~11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였을 때, 사단이 제 시했던 세 가지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 까?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단은 예수께서 꼼짝하지 않는 만리장성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떤 시도도 예수님을 타협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리장성도 뚫린 역사가 있었다. 누군가 성문지기를 매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규모 공사로 지어올린 불가사의한 석조건축물이 의무를 등한히 했던 한 문지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 하고 말았다.
그렇다. 타협은 쉬운 것이다. 사단은 식성과 판단력과 자존심과 세속적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모든 경로를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그의 일은 우리의 성실성을 파괴하고 예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책략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꺼이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만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교훈: 조금씩 타협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타협하지 않는 깨끗함에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악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우상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괜찮아 보여도 명예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삶이다. 사단은 예수님이 현실과 타협하기를 요구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일평생 예수님께는 타협이라는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성도가 가야할 길을 분명하다. 신앙생활에 타협은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시간은 없다. 마땅한 성도의 의무요 책임인 것이다. 신앙의 기본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예배의 삶이 그 무엇인가 하고 타협하게 되면 그 신앙은 병들어 가고 만다. 세상에 타협을 잘 하고 두루뭉실한 사람들에게 적이 없고 또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매사에 분명한 행동 표명과 함께 불의와 돈과 명예와 타협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언행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타협하지 않으므로 오는 세상으로부터의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월요일
5월 31일
성실성을 유지하기
도입)
훌륭한 인격은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격은 마음의 열매이다. 그렇다면 선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 문화는 선한 마음을 하나님과 분리해서 다루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를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 둘은 동의어이다. 둘 중 하나는 나머지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인격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인격을 쌓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영적 개입을 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마음에 쌓이는 것과 성실성은 그 대부분이 모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인격은 포장된 채 현관에 배달되는 택배상품이 아니다. 인격은 카탈로그에 나오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도 없다. 우편배달 신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격은 배달된다. 이런 인격과 성실성은 오직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신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유혹이 도덕적 타협을 요구한다. 출장하는 직원이 지불청구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남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외설 적인 것들을 훔쳐보고, 어린이들이 부모를 속이고, 시민들이 세금을 탈루하며, 먹고 마시는 것에 방종하고, 학생들이 남의 답을 보고 쓰는 등 도덕적 타협을 요구하는 유혹의 목록은 끝이 없다.
1. 아래 주어진 성경본문을 읽으십시오. 등장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성실성을 잃 을 뻔 했습니까? 이 이야기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각각의 기사들을 읽 고 유혹의 배경과 인물들이 느끼는 중압감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렸더라면 자신의 선택을 얼마나 쉽게 합리화 시켰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창 39: 6~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삼상 24:1~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단 6:1~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 중 대부분은 자신이 정직하지 않음을, 적어도 거래에 있어서 투명하지 않음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하기를 원치 않지만, 때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를 꺼려한다. 어떤 상황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결정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솔직함보다 도덕적 편의주의를 선택하게 됐을까?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교훈: 성실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그만 타협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요셉과 느헤미야는 대단한 인격적 성실성을 갖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더럽힐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실패, 수치심, 거절, 죽음,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강력한 두려움들이다. 그렇지만 지도자들은 이런 두려움들이 그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세상적인 두려움들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될 때 한 개인의 인격적 성실성이 더럽혀질 여지도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성실성에 있어서 타협한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덜 중요한 두려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타협한 것이다. 리더십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지켜야 할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다른 그 어떤 두려움보다 더 커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요일
6월 1일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
도입)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고,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엡1:3),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골1:9,3:16),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며(고전12:1,14:1) 그 받은 은사들로 교회를 세우고(고전14:2),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고(골1:9),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영적인 사악함을 대적하며(엡6:12)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삶이란 영적인 생명을 지닌 성도들이 영적인 생각을 하며(롬8:6),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말씀은 영적인 젖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이 아닌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을 들으며(고전2:14), 영적인 것을 뿌림으로써(고전9:11)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 젊은이가 작은 모터와 트레일러가 달린 보트를 샀다. 선체는 깨끗하고 만족스러웠다. 중고가로 그리 비싸지도 않았다. 새 물건을 시험하고픈 마음에 그는 몇 명 의 친구들과 함께 부둣가에 가서 배를 띄웠다. 보트는 아주 잘 달렸다. 온타리오 호 수를 가로질러 배는 육지에서 떨어진 한 작은 섬에 도착했다.
보트를 정박시켜놓고, 그들은 섬을 돌아본 뒤, 배로 돌아갔다. 섬에서 막 벗어나 고 있을 때,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배가 뒤집혔고, 세 친구가 차디찬 물속에 빠졌다. 다행히도 신속한 구조로 최악의 결과는 모면하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배 밑바닥을 보니 썩은 판재 한개 가 발견된다. 호숫가에 정박시켰을 때, 그것이 갈라졌던 것이다. 파손된 조각 하나만 으로도 배 전체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면에 확고하고, 신실 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 굴복하지 않는 단 하 나의 영역, 버리지 못한 단 하나의 죄악이 우리를 깊은 도덕적, 영적, 육체적 타락에 빠뜨릴 수 있다.
1. 엡 3:14~2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개인적인 성실성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 런 약속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주 많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힘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분은 성형외과 의사가 아니라, 심 장외과 의사 같은 분이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하신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에서 이르러 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삶의 완 전한 변화를 추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신 다. 오늘날 자기 개발과 뉴에이지 철학이 팽배해 있지만, 바울은 우리 안에 숨어있 는 힘을 깨워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필요한 힘은 하나님의 힘 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다. 문제는 그분이 그렇게 일하시도록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느냐, 아니면 그 대신 우리의 육체적 본성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하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내부적으로 결함이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완전하게 만든다.
부가적용)
영적이란 것의 개념의 몰이해와 그릇된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는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들의 문제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영적인 삶, 신령함, 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특히 신령함을 추구하는 지방 교회의 폐해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영적 생활의 핵심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보혈이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집중시키며, 그 속에서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 영에 속한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육신의 힘으로 영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자들이다. 자아(self)에서 나온 것인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구분이 없이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을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자신의 타고난 성품과 힘으로 너무나 성실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믿음 좋은 사람, 영적인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경우이다. 가인처럼 자신의 땀으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하고, 육신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얕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을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며,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로부터 영적이요, 경건하며, 헌신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했다. 그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성령을 속인 죄로 엄히 징계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간교해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돕거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자주 꾸게 된다. 이들은 자기 부인 대신 자기 영광을 취하며, 수치와 모욕대신 칭찬과 자랑이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이 된다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런 욕구인 것이다.
수요일
6월 2일
성적 성실성
도입)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며, 어디에 있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대로 좋은 포도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들포도를 맺는 자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1. 롬 1:26~27, 고전 6:15~18, 살전 4:3, 유 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우 리에게 어떤 기별을 전하고 있습니까?
메건은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을 떠나 지내게 되었다. 성적 방종에 대하여 배우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자신이 그것 을 거부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 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성적 방종으로 불치의 병을 얻기 전까지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후회하게 되었다.
성적 타락은 그 자체로 매우 해롭다. 그것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손해를 끼친다. 그뿐 아니라 현대에는 그것이 아주 위험한 모험 이 될 수 있다. 성적 활동을 통해서 전염되는 질병은 포진으로부터 시작해서 에이즈 (HIV)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육체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가져온다. 이런 질병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적 도덕에 관한 성경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성적 쾌락은 결혼 관계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위한 것이다. 혼외의 성생활 은 하나님의 계획 밖이며 잘못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건강상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건강뿐만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치르는 대가도 막대하다. 특별히 성적인 오점을 가진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짐은 매우 가혹하다. 혼인 관계 밖에서는 성욕을 절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국가도 있다.
오늘날 특히 심각한 문제는 외설적인 영상물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보다 훨씬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 끔찍한 저주로 인하여 파멸당하고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수치심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꺼려하고 있다.
교훈: 성(性)은 결혼관계 내에서만 안전하며, 그 외의 사용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건전한 인간관계에 해를 끼친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자녀는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성적으로 타락한 자는 하나님의 높고 귀하신 부르심에서 탈락된다.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짓지만 성적 타락은 몸 안에서 짓게 된다.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만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성적인 타락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성적인 타락과 싸우기로 작정하고 순결하기를 원한다면, 승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몫이 된다. 싸우는 방법은 우리의 삶에서 진실로 두려워 할 자를 바로 알고 두려워함으로 싸워 나가는 것이다. 요셉의 고백처럼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 하리이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는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다. 천국의 법칙에 의해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 믿음의 싸움이다.
목요일
6월 3일
믿음대로 행하기
도입)
신앙,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살기"이다. 성실의 부재는 온 세상의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의 최대 원인중 하나이다. 하나님이 성실하신 분이라는 진리가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분은 완전히 성실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성실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에 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배워야 하고 닮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충성된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성실하고 충성된 자에게 큰일을 맡기시겠다고 하셨다.(마 25:21,23)
롬 12:1~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육혼 전체가 온전히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이는 모든 영역의 성실성 에 대한 요구이다.
성실함이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건강한 삶에 대한 원칙들은 큰 틀에서 대부분 수용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이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알고 있는 지식과 신념대로 살아 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은 건강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운동 하지 않는다면 신실함의 부족을 보이는 것이다. ‘깨끗한 물과 적당량의 햇빛은 건강 에 매우 유익하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원칙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비만이 유행병처럼 수많은 나라에 퍼져갔을 때, 폭식의 위험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각자 먹어야 할 음식의 양, 음식의 종류를 정해야 한 다. 특히 체중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담배는 세계적인 사망 원인 가운데 가장 흉악한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술과 마리화나로부터 코카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독성 물질들이 인명을 앗아가고 있다. 이제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 통 곡물과, 견과류를 예언의 신만이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정부에서조차 고지 방 육류의 사용을 줄이도록 권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채식주의 식습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 특히 우리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안다면 말이다.
“진실한 신앙과 건강의 법칙은 병행한다. 남녀들에게 건강을 파괴하고, 영혼을 타락시키고 거룩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죄악적인 만족을 깨트려 버릴 필요를 제시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다. 남녀들은 모 든 습관과 모든 행동에 대하여 신중한 견해를 갖고 육체의 불건강 상태를 초래하여 검은 구름이 마음을 가리우는 것들을 즉시 버리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지닌 자들이 높은 표준을 그들 앞에 언제나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신다. 교훈과 모본을 통해 그들은, 만일 따르기만 하면 불행과 타락과 질병과, 육체와 영혼 둘 다 죽음으로 이끌어 갈 사단의 거짓 표준보다 그들의 완전한 표준 을 더 높이 쳐들어야 한다.”(교회증언 7권, 136)
교훈: 건강법칙에 관한 진리와 믿음이 우리 삶에 드러나야 기별이 된다.
부가적용)
마음과 신체의 건강을 개혁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떤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먼저 그의 육체적 상태를 돌보셨다. 왜냐하면 육체의 상태는 마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절제와 방종과 부도덕한 생활을 정리하고자 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본을 통하여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모든 자극적이고 건강에 유익하지 않은 식물을 삼가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의복을 입으며,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의 개혁을 시작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고상하고 영적인 환경 하에 두어야 한다. 생활의 부절제와 탐욕적인 마음은 죄악적이고 방종한 생활로 사람들을 유도한다. 결국,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품성에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되며,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회에서도 소외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게 되며, 아무런 소망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높은 지위나 학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식욕이나 정욕의 방종과 여러 가지 부절제에 빠져서 마침내는 유혹에 대해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의 손이 없이는 스스로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방종과 부절제의 결과로 인하여 도덕적인 죄악과 육체적 질병에 압도된 채 불행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금요일
6월 4일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 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 곧 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 있다. 우리의 모든 습관과 입맛과 기호가 생명의 법칙과 건강 법칙에 조화되도록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가장 양호한 신체적인 건강 상태를 확보할 수 있으며, 선악을 분별하는 명료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다.”(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8)
“우리의 위험은 결핍에서가 아니라 풍부에서 온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부절제의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손상되지 않는 힘을 보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해롭고 타락시키는 방종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엄격한 절제를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식생활 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보십시오. 풍부에서 우리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2. 햇빛과 물 외에 좋은 것일지라도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 입니까?
3.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해 그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4.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혼전 순결을 지키도록 격려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위 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6월 5일
일몰:오후 7시 50분
도입)
비극적인 일이지만 영적 여정에 대한 어떤 관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의 모든 양상들을 부인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性을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지성이나 감정, 또는 놀이를 즐기는 성향 등을 거부했다. 그런 사람들이 온전함과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절뚝거리며 걷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절뚝거림을 하나님께 가져가 치유 받으려 하기보다는 영적인 훈장으로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됨에 근거하지 않은 영성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실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좀 더 신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좀 더 참된 인간으로 빚어 내지 못하는 영성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파괴한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을 아는 일에 투자하면서도 자기를 참되게 아는 일에는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런 사람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한 쪽을 깊이 있게 알수록 다른 쪽을 더 깊이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을 강조하지만, 온전함은 그 거룩함이 우리를 신이나 천사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완전한 인간이 되게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를 충만히 인간답게 하고 충만히 살아 있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다(요10:10). 우리의 생명력과 삶의 진정한 충만함이 삶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을 보여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억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절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9:6~12, 삼상 24:1~10, 단 6:1~10, 마 4:1~11, 롬 1:26~27, 엡 3:14~21.
| 중심 사상 | 도덕적 성실성은 우리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시끄러운 아이들 때문에 몹시 화가 난 설교자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다름 아닌 그의 자녀들이었다. 급기야 그는 설교를 중단하고 아이들에게 예배가 마치면 혼날 줄 알라고 호통을 쳤다. 잠시 교회가 썰렁해졌다. 그래도 예배가 끝난 후 모두 점심 을 즐겁게 먹으며 웃고 즐겼다. 정말 행복한 안식일이었다.
행복한 분위기는 안식일이 끝나도 계속되었다.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 작은 딸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왜? 우리 귀염둥이!” “오늘 우리를 벌하실 거라고 약속하 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하신 거예요.”
말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것이 훨씬 어렵다. 아주 훌륭한 사람도 조심하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넘어지기 쉽다.
이번 주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볼 것이다.
일요일
5월 30일
광야의 예수님
도입)
투우에는 진실의 순간이라는 시간이 있다. 투우에 쓰는 소는 묶어놓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풀어 키운다. 다른 소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맛없는 사료를 먹고, 젖을 짜는 동안 투우에 쓰일 소는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며 맛있는 풀을 먹고 산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맘껏 살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다 투우하기 이틀 전 잡아다가 눈을 가리고 좁은 우리에 가두어둔다. 이틀 동안을 불안과 초조 속에 살다 갑자기 투우장에 풀어놓는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사람들의 함성 속에 소는 흥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투우사들이 지나다니며 조금씩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친 소를 상대로 투우사가 일검으로 그를 찌르기 위해 마주하는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한 칼에 소를 죽이지 못하면 상처 입은 소에게 투우사가 죽을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소가 이때껏 살아왔던 그 삶,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왔던 그 순간은 진실이 아니라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그 순간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 소는 키워져 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껏 살아가는 이 인생이 진실이 아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 순간이 진실의 순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진실의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협하고 있는가? 과거에는 흑백이 분명했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양보하다가 약간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또 조금씩 양보하며 다시 새로운 입장에 선다. 그리고 그 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멀지 않아 자신이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완전 히 다른 입장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타협의 결과이다.
때로 조금씩 양보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자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마 4:1~11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였을 때, 사단이 제 시했던 세 가지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 까?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해 볼 때,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단은 예수께서 꼼짝하지 않는 만리장성과 같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떤 시도도 예수님을 타협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리장성도 뚫린 역사가 있었다. 누군가 성문지기를 매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규모 공사로 지어올린 불가사의한 석조건축물이 의무를 등한히 했던 한 문지기 때문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으로 전락 하고 말았다.
그렇다. 타협은 쉬운 것이다. 사단은 식성과 판단력과 자존심과 세속적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모든 경로를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그의 일은 우리의 성실성을 파괴하고 예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책략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꺼이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만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교훈: 조금씩 타협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타협하지 않는 깨끗함에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악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무서워도 우상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괜찮아 보여도 명예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삶이다. 사단은 예수님이 현실과 타협하기를 요구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일평생 예수님께는 타협이라는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성도가 가야할 길을 분명하다. 신앙생활에 타협은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시간은 없다. 마땅한 성도의 의무요 책임인 것이다. 신앙의 기본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예배의 삶이 그 무엇인가 하고 타협하게 되면 그 신앙은 병들어 가고 만다. 세상에 타협을 잘 하고 두루뭉실한 사람들에게 적이 없고 또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매사에 분명한 행동 표명과 함께 불의와 돈과 명예와 타협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언행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타협하지 않으므로 오는 세상으로부터의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월요일
5월 31일
성실성을 유지하기
도입)
훌륭한 인격은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격은 마음의 열매이다. 그렇다면 선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 문화는 선한 마음을 하나님과 분리해서 다루고자 하는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고 무지개를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 둘은 동의어이다. 둘 중 하나는 나머지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인격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인격을 쌓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영적 개입을 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마음에 쌓이는 것과 성실성은 그 대부분이 모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인격은 포장된 채 현관에 배달되는 택배상품이 아니다. 인격은 카탈로그에 나오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도 없다. 우편배달 신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격은 배달된다. 이런 인격과 성실성은 오직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신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다. 많은 유혹이 도덕적 타협을 요구한다. 출장하는 직원이 지불청구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남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외설 적인 것들을 훔쳐보고, 어린이들이 부모를 속이고, 시민들이 세금을 탈루하며, 먹고 마시는 것에 방종하고, 학생들이 남의 답을 보고 쓰는 등 도덕적 타협을 요구하는 유혹의 목록은 끝이 없다.
1. 아래 주어진 성경본문을 읽으십시오. 등장인물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성실성을 잃 을 뻔 했습니까? 이 이야기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각각의 기사들을 읽 고 유혹의 배경과 인물들이 느끼는 중압감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렸더라면 자신의 선택을 얼마나 쉽게 합리화 시켰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창 39: 6~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삼상 24:1~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단 6:1~10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 중 대부분은 자신이 정직하지 않음을, 적어도 거래에 있어서 투명하지 않음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거짓말하기를 원치 않지만, 때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를 꺼려한다. 어떤 상황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결정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솔직함보다 도덕적 편의주의를 선택하게 됐을까?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교훈: 성실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그만 타협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요셉과 느헤미야는 대단한 인격적 성실성을 갖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더럽힐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실패, 수치심, 거절, 죽음,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강력한 두려움들이다. 그렇지만 지도자들은 이런 두려움들이 그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세상적인 두려움들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될 때 한 개인의 인격적 성실성이 더럽혀질 여지도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성실성에 있어서 타협한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덜 중요한 두려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타협한 것이다. 리더십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격적 성실성을 지켜야 할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다른 그 어떤 두려움보다 더 커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요일
6월 1일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
도입)
영적인 생활의 성실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났고,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아(엡1:3),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골1:9,3:16),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며(고전12:1,14:1) 그 받은 은사들로 교회를 세우고(고전14:2),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고(골1:9),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영적인 사악함을 대적하며(엡6:12) 살아야 하는데, 이런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삶이란 영적인 생명을 지닌 성도들이 영적인 생각을 하며(롬8:6),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말씀은 영적인 젖이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이 아닌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을 들으며(고전2:14), 영적인 것을 뿌림으로써(고전9:11)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 젊은이가 작은 모터와 트레일러가 달린 보트를 샀다. 선체는 깨끗하고 만족스러웠다. 중고가로 그리 비싸지도 않았다. 새 물건을 시험하고픈 마음에 그는 몇 명 의 친구들과 함께 부둣가에 가서 배를 띄웠다. 보트는 아주 잘 달렸다. 온타리오 호 수를 가로질러 배는 육지에서 떨어진 한 작은 섬에 도착했다.
보트를 정박시켜놓고, 그들은 섬을 돌아본 뒤, 배로 돌아갔다. 섬에서 막 벗어나 고 있을 때,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배가 뒤집혔고, 세 친구가 차디찬 물속에 빠졌다. 다행히도 신속한 구조로 최악의 결과는 모면하였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배 밑바닥을 보니 썩은 판재 한개 가 발견된다. 호숫가에 정박시켰을 때, 그것이 갈라졌던 것이다. 파손된 조각 하나만 으로도 배 전체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면에 확고하고, 신실 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 굴복하지 않는 단 하 나의 영역, 버리지 못한 단 하나의 죄악이 우리를 깊은 도덕적, 영적, 육체적 타락에 빠뜨릴 수 있다.
1. 엡 3:14~2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개인적인 성실성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 런 약속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아주 많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힘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분은 성형외과 의사가 아니라, 심 장외과 의사 같은 분이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하신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에서 이르러 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삶의 완 전한 변화를 추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신 다. 오늘날 자기 개발과 뉴에이지 철학이 팽배해 있지만, 바울은 우리 안에 숨어있 는 힘을 깨워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필요한 힘은 하나님의 힘 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이 다. 문제는 그분이 그렇게 일하시도록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느냐, 아니면 그 대신 우리의 육체적 본성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하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내부적으로 결함이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완전하게 만든다.
부가적용)
영적이란 것의 개념의 몰이해와 그릇된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는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들의 문제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영적인 삶, 신령함, 영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특히 신령함을 추구하는 지방 교회의 폐해는 말로 다할 수 없다. 영적 생활의 핵심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보혈이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집중시키며, 그 속에서 진리를 깨우쳐 주신다. 영에 속한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육신의 힘으로 영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자들이다. 자아(self)에서 나온 것인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구분이 없이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을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자신의 타고난 성품과 힘으로 너무나 성실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믿음 좋은 사람, 영적인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경우이다. 가인처럼 자신의 땀으로 하나님의 피를 대신하고, 육신의 힘으로 성령을 대신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얕은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십자가의 정신을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며,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로부터 영적이요, 경건하며, 헌신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했다. 그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성령을 속인 죄로 엄히 징계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간교해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돕거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린다는 말 같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자주 꾸게 된다. 이들은 자기 부인 대신 자기 영광을 취하며, 수치와 모욕대신 칭찬과 자랑이 따르고,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이 된다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런 욕구인 것이다.
수요일
6월 2일
성적 성실성
도입)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거룩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며, 어디에 있으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대로 좋은 포도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들포도를 맺는 자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1. 롬 1:26~27, 고전 6:15~18, 살전 4:3, 유 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우 리에게 어떤 기별을 전하고 있습니까?
메건은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을 떠나 지내게 되었다. 성적 방종에 대하여 배우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자신이 그것 을 거부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것 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서 처음에는 유혹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하지만 서서히 타협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성적 방종으로 불치의 병을 얻기 전까지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뒤늦게 후회하게 되었다.
성적 타락은 그 자체로 매우 해롭다. 그것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손해를 끼친다. 그뿐 아니라 현대에는 그것이 아주 위험한 모험 이 될 수 있다. 성적 활동을 통해서 전염되는 질병은 포진으로부터 시작해서 에이즈 (HIV)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육체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가져온다. 이런 질병으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적 도덕에 관한 성경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성적 쾌락은 결혼 관계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위한 것이다. 혼외의 성생활 은 하나님의 계획 밖이며 잘못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건강상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건강뿐만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치르는 대가도 막대하다. 특별히 성적인 오점을 가진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짐은 매우 가혹하다. 혼인 관계 밖에서는 성욕을 절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국가도 있다.
오늘날 특히 심각한 문제는 외설적인 영상물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보다 훨씬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이 끔찍한 저주로 인하여 파멸당하고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치료법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수치심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꺼려하고 있다.
교훈: 성(性)은 결혼관계 내에서만 안전하며, 그 외의 사용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건전한 인간관계에 해를 끼친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자녀는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성적으로 타락한 자는 하나님의 높고 귀하신 부르심에서 탈락된다.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짓지만 성적 타락은 몸 안에서 짓게 된다.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만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성적인 타락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성적인 타락과 싸우기로 작정하고 순결하기를 원한다면, 승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몫이 된다. 싸우는 방법은 우리의 삶에서 진실로 두려워 할 자를 바로 알고 두려워함으로 싸워 나가는 것이다. 요셉의 고백처럼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 하리이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는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다. 천국의 법칙에 의해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 믿음의 싸움이다.
목요일
6월 3일
믿음대로 행하기
도입)
신앙,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살기"이다. 성실의 부재는 온 세상의 정신적 및 육체적 고통의 최대 원인중 하나이다. 하나님이 성실하신 분이라는 진리가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분은 완전히 성실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성실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에 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배워야 하고 닮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충성된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성실하고 충성된 자에게 큰일을 맡기시겠다고 하셨다.(마 25:21,23)
롬 12:1~2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육혼 전체가 온전히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이는 모든 영역의 성실성 에 대한 요구이다.
성실함이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건강한 삶에 대한 원칙들은 큰 틀에서 대부분 수용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이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알고 있는 지식과 신념대로 살아 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은 건강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운동 하지 않는다면 신실함의 부족을 보이는 것이다. ‘깨끗한 물과 적당량의 햇빛은 건강 에 매우 유익하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원칙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비만이 유행병처럼 수많은 나라에 퍼져갔을 때, 폭식의 위험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각자 먹어야 할 음식의 양, 음식의 종류를 정해야 한 다. 특히 체중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담배는 세계적인 사망 원인 가운데 가장 흉악한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술과 마리화나로부터 코카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독성 물질들이 인명을 앗아가고 있다. 이제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 통 곡물과, 견과류를 예언의 신만이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정부에서조차 고지 방 육류의 사용을 줄이도록 권장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채식주의 식습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 특히 우리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안다면 말이다.
“진실한 신앙과 건강의 법칙은 병행한다. 남녀들에게 건강을 파괴하고, 영혼을 타락시키고 거룩한 진리를 마음에 새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죄악적인 만족을 깨트려 버릴 필요를 제시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할 수가 없다. 남녀들은 모 든 습관과 모든 행동에 대하여 신중한 견해를 갖고 육체의 불건강 상태를 초래하여 검은 구름이 마음을 가리우는 것들을 즉시 버리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지닌 자들이 높은 표준을 그들 앞에 언제나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신다. 교훈과 모본을 통해 그들은, 만일 따르기만 하면 불행과 타락과 질병과, 육체와 영혼 둘 다 죽음으로 이끌어 갈 사단의 거짓 표준보다 그들의 완전한 표준 을 더 높이 쳐들어야 한다.”(교회증언 7권, 136)
교훈: 건강법칙에 관한 진리와 믿음이 우리 삶에 드러나야 기별이 된다.
부가적용)
마음과 신체의 건강을 개혁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떤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먼저 그의 육체적 상태를 돌보셨다. 왜냐하면 육체의 상태는 마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절제와 방종과 부도덕한 생활을 정리하고자 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본을 통하여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모든 자극적이고 건강에 유익하지 않은 식물을 삼가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의복을 입으며,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의 개혁을 시작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고상하고 영적인 환경 하에 두어야 한다. 생활의 부절제와 탐욕적인 마음은 죄악적이고 방종한 생활로 사람들을 유도한다. 결국,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품성에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되며, 하나님과 멀어지고 사회에서도 소외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게 되며, 아무런 소망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높은 지위나 학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식욕이나 정욕의 방종과 여러 가지 부절제에 빠져서 마침내는 유혹에 대해서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의 손이 없이는 스스로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방종과 부절제의 결과로 인하여 도덕적인 죄악과 육체적 질병에 압도된 채 불행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금요일
6월 4일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 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 곧 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 있다. 우리의 모든 습관과 입맛과 기호가 생명의 법칙과 건강 법칙에 조화되도록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가장 양호한 신체적인 건강 상태를 확보할 수 있으며, 선악을 분별하는 명료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다.”(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8)
“우리의 위험은 결핍에서가 아니라 풍부에서 온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부절제의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손상되지 않는 힘을 보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해롭고 타락시키는 방종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엄격한 절제를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식생활 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2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보십시오. 풍부에서 우리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2. 햇빛과 물 외에 좋은 것일지라도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 입니까?
3.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해 그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4.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혼전 순결을 지키도록 격려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위 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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