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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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7-16 10:58 조회7,643회 댓글0건본문
7월 24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8분
기억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 학생은 활기찬 교과 토의를 위해 반드시 예습을 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3:19~28.
이번 과에서 우리는 로마서의 기본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공부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음과 같은 법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을 어긴 자가 판사 앞에 나아와 자신의 범죄 사실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때 대속자가 나타나서 모든 잘못을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그 범죄자가 대속 자를 받아들였을 때, 판사는 그의 유죄 판결을 삭제할 뿐 아니라, 그를 법정까지 오게 만든 죄 자체가 없다고 간주했다. 왜냐하면 대속자가 법적으로 완전무결한 신분을 그 범죄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정말 무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죄 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복음이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이 범죄자이고 예수님은 대속자이시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깨끗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대신 법정에 서신다. 그리고 그의 의는 우리의 불의를 대신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3:28
|학습목표|
⊙ 깨닫기 : 의의 주제에 관하여 율법의 역할과 믿음의 역할을 대조한다.
⊙ 느끼기 : 죄의 결과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고난의 깊이를 인식한다.
⊙ 행하기 :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인다.
01. 깨닫기: 율법과 사랑
A.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품성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그런 완전은 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가?
B.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의 높은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켰는지 설명하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는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시는가?
C.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과 사랑을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
02. 느끼기: 율법과 사랑의 토대
A. 하늘의 왕께서는 어떻게 우주의 법질서를 유지하시면서 동시에 그런 엄격한 원칙들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사랑과 소망과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가?
03. 행하기: 우리의 반응
A.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매일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하는가?
요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며, 인간은 절대로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불완전함을 대신하여 제공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일요일(7월 18일) 율법의 행위
❶ 롬 3:19~20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율법이 할 수 없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롬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답: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 방식에 따라 율법을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 하고 있다. 율법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구약의 첫 다섯 책 또는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를 의미한다. 토라에는 도덕법과 그것을 확장시킨 규례와 법도들과 제사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율법이란 유대교의 모든 체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관할 하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그런 죄의 책임을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구할 해결책을 찾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서를 삶에 적용하기 원한다면 율법을 유대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 율법을 도덕적인 의미에서 적용해야 한다. 도덕법은 유대교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도덕적 율법의 기능이 아니다. 이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분의 성품에 미치지 못함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법이든, 또는 의식법, 시민법, 아니면 전체 율법이든지 상관없이 율법의 준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부족을 지적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은 마치 증상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증상에는 치료 기능이 없다. 단지 치료가 필요함을 알려줄 뿐이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
“시내산에서 율법이 반포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성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대조하여 봄으로 자신들의 품성의 죄악성을 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로 죄를 깨닫게 해주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시대의 소망, 308)
<부가설명> 로마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교과 저자의 말대로 모세오경 전체를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고, 도덕법인 십계명을 한정적으로 뜻할 수도 있고, 의전 법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사랑의 내용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실상이 어떤지를 깨닫기를 원하신다. 도덕적으로는 십계명의 내용에 자기를 비추어볼 때 도덕성이 아주 결여된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의전 법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는 길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의식을 집행하는 동안 자기가 그런 의식을 집행하지 않으면 사망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장차 우리의 사망을 대신 담당하실 구주를 바라보고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신 것이다. 우리가 의전 법(의식 법)들은 죄를 속하는 법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인데, 사실 의식 법들도 죄를 깨닫게 하는 법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히10:1~3)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도덕적 행위에 대한 말로 사용했는지는 숙고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율법의 행위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도덕법을 지키는 행위로 생각해버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에는 행위는 “일”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은 의식 법들을 행하는 노동과 관련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등등.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 중심적인 사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확실하다.
교훈: 우리는 도덕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월요일(7월 19일) 믿음과 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❶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율법 외에 다른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의로워질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조치를 취하셨다는 뜻이다.
이 새로운 의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율법의 의와 대조된다. 새로운 의는 ‘하나님의 의’로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주시며, 그분이 인정하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의이다.
물론 이 의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그분의 삶을 통해 이르러 왔으며, 이 의를 얻는 자들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며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의를 제공하신다.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❷ 이 놀라운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롬 3:22 참조)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답: 이 새롭고 다른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조치를 감사함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예수 믿음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지적 동의 이상,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분을 나의 구주와 대속자로, 나의 구원에 대한 보증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분을 신뢰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우리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사유하시는 자에게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절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때에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실 것이다.”(정로의 계단, 65)
<부가설명> 교과의 저자가 설명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말이나 엘렌 화잇의 기록이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3과 월요일 참고 문에서 인용된 화잇의 언급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정곡을 지적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방종과 자기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 등의 부정한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치료봉사, 455)” 행위는 생명 있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생명이 없으면 행위가 없다. 다만 썩을 뿐이다. 원래 생명이 없는 것들도 썩기는 한다. 그것을 한국 사람들은 삭는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생명 있던 것이 생명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부패라고 하고 썩는다고 표현한다.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그의 후손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썩는 것 외에는 생명 있는 자에게 있는 행위를 나타낼 수 없다. 그들의 행위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롬8:21; 엡4:22) 신약성경에는 썩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다. 썩은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전15:50)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썩게 마련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한 삶을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은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롬6:4)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이다. 예수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요일5:11~13)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율법 외의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그것이다.
교훈: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사고와 생활방식,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화요일(7월 20일) 은혜와 칭의
❶ 지금까지 배웠던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롬 3:24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속량(redemption)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속량이란 속전을 지불하여 풀려나게 하는 일을 의미한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아무 공로 없이, 단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하여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들다”, “의롭다 칭하다”, “의롭게 여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 디카이오수네는 “의”, 디카이오마는 “옳은 행실”을 뜻한다. 여러 번역 성경에서 항상 그 연관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칭의 (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 이전에 인간은 불의하며,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다. 반면 칭의 이후에 인간은 의롭게 간주되며 하나님께 가납된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는 공로가 없어도 주어지는 “호의”를 의미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거나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그것은 아무 조건 없는 호의이다. 신자가 의롭다 칭함을 얻는 것은 그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단지 총체적으로 대책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가져갈 뿐이다. 그러므로 그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 그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는 적시에 이루어지는 정밀한 조치이다. 칭의 직전에도 죄인은 구원 밖에 있으며 불의하고 가납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칭의 직후에 그는 구원 안에 있으며 의롭고 가납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칭의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시켰을 때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다. 롬 5:1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시제는 현재완료인 것이다.
물론 의롭게 된 죄인이 타락하여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칭의는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매일 재회심의 경험이 이어져야 한다면 그 말은 칭의도 반복적인 경험 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깨끗게 하심
“죄인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를 힘입음으로써만 속박과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오직 죄가 없으신 대치물과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의 완전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경주(競走)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 밑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0)
<부가설명> 속량이라는 말과 구속이라는 말은 다 헬라어 “아폴뤼트로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주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속량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값이 되셨다는 뜻이다.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 값인 사망을 우리 대신 당하시므로 죄 값을 갚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다. 예수를 믿을 때 바로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의 생명을 얻어서 그 생명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의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성질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생명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이다. 곧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가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예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이시다.(요1:14,17)
교훈: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며, 그 순간 우리는 구원 안에 있게 된다.
수요일(7월 21일) 그의 의
롬 3:25에서 바울은 구원의 위대한 소식을 더 심도 있게 다룬다. 그는 화목제물 (propitiation*)이라는 전문적인 말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신약에서 오직 이곳과 히 9:5에 “속죄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3:25 에서 이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칭의와 구원을 함축하고 있으며, 구약 성소의 속죄소에서 표상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셨고, 속죄를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롬 3:25은 또한 “죄의 사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지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구원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을 때에 죄가 사하여 질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
간과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레시스는 문자적으로 “넘어감” 또는 “지나감”을 뜻 한다. 그러나 간과한다는 것은 죄를 못 본 체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고전 15:3).
❶ 롬 3:26~2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3:26,27]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답: 심판을 받고 멸망해야 할 죄인들을 의롭게 여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이 자비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도 의롭고, 그분을 믿는 자들도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복음이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여전히 우주 앞에서 우리를 의롭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하늘이 최상의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요구하는 것이 더 많다고 비난해 왔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주장을 일축하였다.
*propitiation(프로피티에이션)은 신의 진노를 달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또한 그분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모든 자에게는 생명, 곧 영생이 있다.”(교회증언 9권, 193)
<부가설명>
교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하여졌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
목요일(7월 22일) 믿음과 행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❶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대는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답: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도덕적 율법은 우리가 왜 의롭게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행위와 판단의 기준이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보면 바울이 롬 3: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유대교 전체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체계 아래 아무리 철저히 살고자 할지라도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성경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울의 결론은 믿음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면 모든 공은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 게 보내는 권면, 456)
율법의 행위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는 칭의를 이루는 것과 상관이 없다. 행위 없이 의를 얻는다는 것은 칭의를 이루는데 우리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며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믿는 것이라고 말하며 행위와 순종, 심지어 도덕적 율법에 대한 순종마저 가볍게 여긴다. 이는 바울의 서신을 완전히 잘못 읽는 것이다. 로마서와 다른 서신에서도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에 대하여 매우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이다(마 19:17, 롬 2:13, 약 2:10~11, 계 14:12). 바울의 요점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의롭다 칭함을 얻지 못하여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절대로 성취할 수 없다.
능력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인간은 외적 행동을 교정할 수는 있어도 심령을 변화시키거나 생명의 근원을 정결케 할 수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거룩해지려면 먼저 그 마음속에 역사하는 능력 곧 위로부터 받은 새 생명이 있어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함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18)
<부가설명> 어거스틴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 노력하여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 같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부패를 물려받아서 도덕적으로 이미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펠라기우스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행할 능력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인간이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하여 보여줌으로 모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본으로 보여주셨고 우리가 그 본을 따라 도덕적으로 선을 이루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것 같다.
두 이론은 모두 그럴듯하지 않는가? 재림교회는 어쩌면 펠라기우스쪽으로 기우러져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논의는 모두 죄와 의를 도덕적 성품과 선행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서 생긴 이론들이다. 성경은 이런 것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친다. 그것은 존재와 생명이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사망이 된 것이 바로 죄인이고, 그런 사람은 영원한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의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뜻하고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얻는 예수의 행위가 나의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이런 이치를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모든 성도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교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율법을 지키려는 자기 의를 포기한 것이지, 율법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금요일(7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36~239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 331~335 “와서 구하고 찾으라”, 373~374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전한 순종”, 실물교훈, 128~129 “새 것과 옛 것.”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기의 대치물이시며 담보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6~367)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번 주에 공부한 말씀들을 다시 읽고 요약해서 함께 나누십시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속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죄 값을 지불하게 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예수께서 그들 속에 살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이 온전한 삶을 이루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이루는 삶의 실상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어 그 안에 사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
2.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생각하십시오. 죄는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죄를 그치고,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사실이 죄의 유혹을 저항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창조된 사람이 사망이 되어서 영원히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믿지 않으면 동일한 결과에 이른다. 즉 영원한 상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대로 회복되어 영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어 대신 죽음, 곧 상실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실상을 완전히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그분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의라고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확신하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자기 속에 역사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승리하는 삶을 이루는 기쁨이 될 것이다.
3.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놀라운 소식들을 남용하도록 유혹을 받을까요? 그런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덫에 걸립니까?(벧후 3:16, 요 일 3:7 참조)
*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 사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도덕적 관점에서만 속죄를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실의 실상인 것을 깨달으면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억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 학생은 활기찬 교과 토의를 위해 반드시 예습을 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3:19~28.
이번 과에서 우리는 로마서의 기본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공부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음과 같은 법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을 어긴 자가 판사 앞에 나아와 자신의 범죄 사실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때 대속자가 나타나서 모든 잘못을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그 범죄자가 대속 자를 받아들였을 때, 판사는 그의 유죄 판결을 삭제할 뿐 아니라, 그를 법정까지 오게 만든 죄 자체가 없다고 간주했다. 왜냐하면 대속자가 법적으로 완전무결한 신분을 그 범죄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정말 무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죄 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복음이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이 범죄자이고 예수님은 대속자이시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깨끗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대신 법정에 서신다. 그리고 그의 의는 우리의 불의를 대신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3:28
|학습목표|
⊙ 깨닫기 : 의의 주제에 관하여 율법의 역할과 믿음의 역할을 대조한다.
⊙ 느끼기 : 죄의 결과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고난의 깊이를 인식한다.
⊙ 행하기 :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인다.
01. 깨닫기: 율법과 사랑
A.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품성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그런 완전은 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가?
B.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의 높은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켰는지 설명하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는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하시는가?
C.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과 사랑을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
02. 느끼기: 율법과 사랑의 토대
A. 하늘의 왕께서는 어떻게 우주의 법질서를 유지하시면서 동시에 그런 엄격한 원칙들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사랑과 소망과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가?
03. 행하기: 우리의 반응
A.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매일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하는가?
요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며, 인간은 절대로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불완전함을 대신하여 제공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일요일(7월 18일) 율법의 행위
❶ 롬 3:19~20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율법이 할 수 없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롬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답: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 방식에 따라 율법을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 하고 있다. 율법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구약의 첫 다섯 책 또는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를 의미한다. 토라에는 도덕법과 그것을 확장시킨 규례와 법도들과 제사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율법이란 유대교의 모든 체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관할 하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그런 죄의 책임을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구할 해결책을 찾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서를 삶에 적용하기 원한다면 율법을 유대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 율법을 도덕적인 의미에서 적용해야 한다. 도덕법은 유대교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도덕적 율법의 기능이 아니다. 이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분의 성품에 미치지 못함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법이든, 또는 의식법, 시민법, 아니면 전체 율법이든지 상관없이 율법의 준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부족을 지적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은 마치 증상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증상에는 치료 기능이 없다. 단지 치료가 필요함을 알려줄 뿐이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
“시내산에서 율법이 반포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성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대조하여 봄으로 자신들의 품성의 죄악성을 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로 죄를 깨닫게 해주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시대의 소망, 308)
<부가설명> 로마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교과 저자의 말대로 모세오경 전체를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고, 도덕법인 십계명을 한정적으로 뜻할 수도 있고, 의전 법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한 사랑의 내용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실상이 어떤지를 깨닫기를 원하신다. 도덕적으로는 십계명의 내용에 자기를 비추어볼 때 도덕성이 아주 결여된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의전 법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는 길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의식을 집행하는 동안 자기가 그런 의식을 집행하지 않으면 사망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장차 우리의 사망을 대신 담당하실 구주를 바라보고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신 것이다. 우리가 의전 법(의식 법)들은 죄를 속하는 법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인데, 사실 의식 법들도 죄를 깨닫게 하는 법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히10:1~3)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도덕적 행위에 대한 말로 사용했는지는 숙고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율법의 행위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도덕법을 지키는 행위로 생각해버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에는 행위는 “일”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은 의식 법들을 행하는 노동과 관련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등등.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 중심적인 사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율법의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확실하다.
교훈: 우리는 도덕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월요일(7월 19일) 믿음과 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❶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율법 외에 다른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의로워질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조치를 취하셨다는 뜻이다.
이 새로운 의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율법의 의와 대조된다. 새로운 의는 ‘하나님의 의’로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주시며, 그분이 인정하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의이다.
물론 이 의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그분의 삶을 통해 이르러 왔으며, 이 의를 얻는 자들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며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의를 제공하신다.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❷ 이 놀라운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롬 3:22 참조)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답: 이 새롭고 다른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조치를 감사함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예수 믿음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지적 동의 이상,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분을 나의 구주와 대속자로, 나의 구원에 대한 보증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분을 신뢰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우리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사유하시는 자에게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절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때에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실 것이다.”(정로의 계단, 65)
<부가설명> 교과의 저자가 설명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말이나 엘렌 화잇의 기록이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3과 월요일 참고 문에서 인용된 화잇의 언급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정곡을 지적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방종과 자기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 등의 부정한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치료봉사, 455)” 행위는 생명 있는 자에게서 나타난다. 생명이 없으면 행위가 없다. 다만 썩을 뿐이다. 원래 생명이 없는 것들도 썩기는 한다. 그것을 한국 사람들은 삭는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생명 있던 것이 생명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부패라고 하고 썩는다고 표현한다.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그의 후손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썩는 것 외에는 생명 있는 자에게 있는 행위를 나타낼 수 없다. 그들의 행위는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롬8:21; 엡4:22) 신약성경에는 썩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다. 썩은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전15:50)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썩게 마련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한 삶을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은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롬6:4)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이다. 예수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 영생의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요일5:11~13)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아직도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율법 외의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그것이다.
교훈: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사고와 생활방식,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화요일(7월 20일) 은혜와 칭의
❶ 지금까지 배웠던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롬 3:24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속량(redemption)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속량이란 속전을 지불하여 풀려나게 하는 일을 의미한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아무 공로 없이, 단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하여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들다”, “의롭다 칭하다”, “의롭게 여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 디카이오수네는 “의”, 디카이오마는 “옳은 행실”을 뜻한다. 여러 번역 성경에서 항상 그 연관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칭의 (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 이전에 인간은 불의하며,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다. 반면 칭의 이후에 인간은 의롭게 간주되며 하나님께 가납된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는 공로가 없어도 주어지는 “호의”를 의미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거나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그것은 아무 조건 없는 호의이다. 신자가 의롭다 칭함을 얻는 것은 그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단지 총체적으로 대책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가져갈 뿐이다. 그러므로 그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 그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는 적시에 이루어지는 정밀한 조치이다. 칭의 직전에도 죄인은 구원 밖에 있으며 불의하고 가납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칭의 직후에 그는 구원 안에 있으며 의롭고 가납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칭의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시켰을 때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다. 롬 5:1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시제는 현재완료인 것이다.
물론 의롭게 된 죄인이 타락하여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칭의는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매일 재회심의 경험이 이어져야 한다면 그 말은 칭의도 반복적인 경험 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깨끗게 하심
“죄인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를 힘입음으로써만 속박과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오직 죄가 없으신 대치물과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의 완전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경주(競走)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 밑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0)
<부가설명> 속량이라는 말과 구속이라는 말은 다 헬라어 “아폴뤼트로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주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속량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값이 되셨다는 뜻이다. 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 값인 사망을 우리 대신 당하시므로 죄 값을 갚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다. 예수를 믿을 때 바로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의 생명을 얻어서 그 생명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의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성질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생명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순종의 능력이다. 곧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가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가. 예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이시다.(요1:14,17)
교훈: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며, 그 순간 우리는 구원 안에 있게 된다.
수요일(7월 21일) 그의 의
롬 3:25에서 바울은 구원의 위대한 소식을 더 심도 있게 다룬다. 그는 화목제물 (propitiation*)이라는 전문적인 말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신약에서 오직 이곳과 히 9:5에 “속죄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3:25 에서 이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칭의와 구원을 함축하고 있으며, 구약 성소의 속죄소에서 표상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셨고, 속죄를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롬 3:25은 또한 “죄의 사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지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구원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을 때에 죄가 사하여 질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
간과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레시스는 문자적으로 “넘어감” 또는 “지나감”을 뜻 한다. 그러나 간과한다는 것은 죄를 못 본 체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고전 15:3).
❶ 롬 3:26~2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3:26,27]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답: 심판을 받고 멸망해야 할 죄인들을 의롭게 여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이 자비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도 의롭고, 그분을 믿는 자들도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이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복음이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여전히 우주 앞에서 우리를 의롭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하늘이 최상의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요구하는 것이 더 많다고 비난해 왔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주장을 일축하였다.
*propitiation(프로피티에이션)은 신의 진노를 달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또한 그분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모든 자에게는 생명, 곧 영생이 있다.”(교회증언 9권, 193)
<부가설명>
교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하여졌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
목요일(7월 22일) 믿음과 행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❶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대는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답: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도덕적 율법은 우리가 왜 의롭게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행위와 판단의 기준이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보면 바울이 롬 3: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유대교 전체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체계 아래 아무리 철저히 살고자 할지라도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성경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울의 결론은 믿음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면 모든 공은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 게 보내는 권면, 456)
율법의 행위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는 칭의를 이루는 것과 상관이 없다. 행위 없이 의를 얻는다는 것은 칭의를 이루는데 우리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며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믿는 것이라고 말하며 행위와 순종, 심지어 도덕적 율법에 대한 순종마저 가볍게 여긴다. 이는 바울의 서신을 완전히 잘못 읽는 것이다. 로마서와 다른 서신에서도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에 대하여 매우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이다(마 19:17, 롬 2:13, 약 2:10~11, 계 14:12). 바울의 요점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의롭다 칭함을 얻지 못하여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절대로 성취할 수 없다.
능력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인간은 외적 행동을 교정할 수는 있어도 심령을 변화시키거나 생명의 근원을 정결케 할 수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거룩해지려면 먼저 그 마음속에 역사하는 능력 곧 위로부터 받은 새 생명이 있어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함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18)
<부가설명> 어거스틴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 노력하여 도덕적으로 선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 것 같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부패를 물려받아서 도덕적으로 이미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펠라기우스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행할 능력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인간이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하여 보여줌으로 모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본으로 보여주셨고 우리가 그 본을 따라 도덕적으로 선을 이루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것 같다.
두 이론은 모두 그럴듯하지 않는가? 재림교회는 어쩌면 펠라기우스쪽으로 기우러져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논의는 모두 죄와 의를 도덕적 성품과 선행을 중심으로 생각하는데서 생긴 이론들이다. 성경은 이런 것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친다. 그것은 존재와 생명이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사망이 된 것이 바로 죄인이고, 그런 사람은 영원한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의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뜻하고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얻는 예수의 행위가 나의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이런 이치를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모든 성도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교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율법을 지키려는 자기 의를 포기한 것이지, 율법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금요일(7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36~239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 331~335 “와서 구하고 찾으라”, 373~374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전한 순종”, 실물교훈, 128~129 “새 것과 옛 것.”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기의 대치물이시며 담보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6~367)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번 주에 공부한 말씀들을 다시 읽고 요약해서 함께 나누십시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속죄 없이는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죄 값을 지불하게 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예수께서 그들 속에 살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이 온전한 삶을 이루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이루는 삶의 실상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어 그 안에 사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
2.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생각하십시오. 죄는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죄를 그치고,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사실이 죄의 유혹을 저항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창조된 사람이 사망이 되어서 영원히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믿지 않으면 동일한 결과에 이른다. 즉 영원한 상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대로 회복되어 영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어 대신 죽음, 곧 상실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실상을 완전히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그분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의라고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확신하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자기 속에 역사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승리하는 삶을 이루는 기쁨이 될 것이다.
3.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놀라운 소식들을 남용하도록 유혹을 받을까요? 그런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덫에 걸립니까?(벧후 3:16, 요 일 3:7 참조)
*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 사상에 사로잡힌다. 이것은 도덕적 관점에서만 속죄를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실의 실상인 것을 깨달으면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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