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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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7-13 06:18 조회6,58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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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3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7월 17일
일몰: 오후 7시 52분
도입)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호는 젊은 한 때,탄광에서 일을 했다. 한 광부가 기계를 포장했던 천으로 작업복을 만들어 입고 있는데, 작업복 등에 “깨어지기 쉬우니 주의하시오”라고 인쇄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 고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문구는 기계취급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인쇄한 것이었지만 고호에게는 인생의 정체를 깨우쳐주는 놀라운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언제, 어디서 깨어질지 알 수 없는 흙으로 빚어진 하나의 질그릇과 같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그릇, 즉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있다. 이전의 바울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했던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죄인됨을 발견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는 이렇게 자신의 유한성과 죄성을 인정하고 인간 ‘사울’로부터 ‘바울’로 바뀌었다. 여기에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으로 표현한 것은 바울의 겸손과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모두가 사망에 이를 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억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교사(리더)는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해 주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롬 1:16~17, 22~32, 2:1~10, 17~23, 3:1~2, 10~18, 23.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칭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칭의의 첫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바울은 이방인들의 끔찍한 부패상을 소개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울의 결론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인간이 행한 일 가운데 어떤 것은 그의 죄값을 갚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유한하고 좁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그대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대가 애지중지하는 생각을 따라 옥신각신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 문제를 살펴보라. 이 문제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악한 자의 자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를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선행을 요구하신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선행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죄 가운데 자신을 두기 때문에 예수의 의만이 유효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화잇 주석, 롬 3:20~31)
일요일
7월 11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도입)
로마 사회는 권력과 지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무력한자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과 능력을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대제국을 앞두고, 바울은 지금 일개 비천한 천막공(天幕工)이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십자가는 치욕을 의미하는 극형이며,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받은 치욕을 짊어져야 한다(히 13:13).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을 받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22-22절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다.(신21:23)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약함을, 어리석음을, 지나침을 보지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본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짐을 본다. 우리는 십자가의 거침돌을 감수하고 살면서 이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됨을 본다.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사는 인생 안에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주어짐을 본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무력함과 교회의 비천함은 이 십자가의 ‘오직’을 외면하고 십자가를 다른 많은 좋은 것들 중의 하나로 변질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의 영광으로 일어서는 유일한 비밀은 십자가의 유일성,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 깨지고 십자가만이 높여지는 데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❶ 그대에게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 말씀에 나타나는 약속과 소망을 어 떻게 경험하였습니까?
이 성경절에 등장하는 몇 가지 핵심 단어는 다음과 같다.
1. 복음. 이 말은 “좋은 기별” 또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어떤 기쁜 소식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될 때는 “메시야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가 된다. (크리스토스는 메시야라는 의미의 그리스말이다.) 복음은 메시야가 오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구원은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도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의 완전한 의에 달려있다.
2. 의.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로마서에서 고유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특히 우리는 롬 1:7에서 “의”가 “하나님의 의”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아오는 의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의이다. 이 의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
3. 믿음. 이 말씀에서 “믿는다” 또는 “믿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피스튜오와 피스티스이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의미는 앞으로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심어주기를 원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 얻기에 얼마나 무가치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자들인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윤리 도덕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사회적 신분과 학벌이 어떠하든지, 종교적 경력이 얼마나 화려하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 없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라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항상 인간을 가장 깊은 절망적 상태에 두고 출발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시작은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두렵고 공의로운 진노를 묵상하는 것이다. 소망 없던 나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여 보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다스리며, 함께 후사가 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 그분의 영광에 참예한다. 구원은 교훈이나 권고가 아니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생명에 다가감으로 이뤄진다”(SDA 성경주석, 604).
월요일
7월 12일
인간의 처지
도입)
인간의 탐욕과 이기성이 통제 없이 개방되어 버린 우리 사회 속에서 부끄러운 인간의 본성이 각종 비리 사건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우리 현실을 보면서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인간을 향한 외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들 모두는 진흙탕 가운데 있다네…” 와일드는 인간 존재 깊숙이에 보편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인간의 죄성을 꿰뚫어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서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존재 속에 내재한 죄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낙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존재 깊숙이 자리 잡은 죄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죄성은 없어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실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회개한 죄인들이 매일 죄와 싸워 승리하여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성화(聖化)의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❶ 롬 3:23을 읽으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쉽게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면 이 말씀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선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선하다고 느낀다. 그런 논리라면 강호순*은 아돌프 히틀러에 비해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비교한다면, 자기혐오와 경멸감 외에 드러낼 것이 없을 것이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여러 의미로 해석 되고 있다. 가장 단순한 해석은 고전 11:7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어로 “영광”은 “형상”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 된 것 같다. 죄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켰다.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영광을 반사하는 데 한참 미치지 못했다.
❷ 롬 3:10~18을 읽으십시오. 오늘날과 다른 게 있습니까? 이 본문에서 그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또는 만약 그대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총체적 죄됨과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죄인이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죄인의 얼굴에서 자기방어와 위선, 자기 정당화의 가면을 찢고,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그분께 자비를 구하도록 만들 것이다(눅 18:13).
* 여성 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
교훈: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우리의 삶을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첫 단계이다.
부가적용)
성경은 인간 존재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죄의 본성을 이겨보려고 애쓰지만 이기지 못하고 진노의 자녀인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겸허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혼자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이다. 인간 존재가 본성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되면 희망적인 존재, 기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뜨거운 만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화요일
7월 13일
1세기에서 21세기까지
도입)
현대사회는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과 기술, 지식과 정보가 날로 팽창해 간다는데 있다. 지식의 발달은 단순히 지적 탐구를 넘어 모든 분야에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지금까지의 인문학 위주의 교육과 사고가 자연 과학 위주로 바뀌어 지고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은 고속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문학은 퇴조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현대인의 윤리 의식은 크게 약화되어 인간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간에 있어서 도덕성의 상실이 인간의 위기이다. 일찌기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우리 사회는 모든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 우리는 비인간성에로 가는 도상에 있다. 고 경고하였다. 물질만능주의는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가치의 정신적 가치 추월현상에 기인하며, 인간소외, 범죄, 정·재계의 비리 및 유착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 발생의 원인을 초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신의 존재를 잊은 채 살아간다. 문명의 발전에 비해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퇴보는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인간성이 개선되고 있고, 도덕성은 증가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가 점점 완전해지고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바른 교육과 도덕적 훈련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20세기로 진입할 때, 일제히 시작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것들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세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크게 감사히 여겨야할 부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과거 극단적인 광인이나 꿈꿨을 법했던 대량 살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❶ 롬 1:22~32을 읽으십시오. 1세기에 기록된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인류가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친 이후로 죄와 오류와 타락의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문제의 결과 가운데 살게 되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토피아(Utopia):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말.
교훈: 20세기 초에는 인간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 사회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부가적용)
인류의 살아온 역사는 발전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또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발전에 공이 큰 사람을 높게 평가하여 크게 대접하고 있다. 그리고 발전은 여러 가지 공헌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러나 반면 발전은 또 다른 퇴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인간의 진보는 이중적인 반비례 관계에 놓여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그 결과 기존 지구가 가지고 있던 자연적인 현상과 인간의 근본적임 성품윤리 등 도덕적 타락과 사회의 삭막함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문명발달을 추구하게 되면 지구에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자연스러움과 인간의 성품 윤리적 도덕성을 타락시키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문명발달을 거듭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상호차이를 사회의 각종 언론과 매개체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실례는 어렵지 않게 각종 사회매개체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다. 요즘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고 있는 아동유괴 사건 및 늘어만 가고 있는 범죄와 그 종류... 확실히 세대와 시대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 기술과 기법 등 종류가 다양해지며 늘어만 가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쟁점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그 생활능력. 안락. 편리성. 상호이익 등의 물질적 평화는 늘어가고 있지만 문명도 발달하고 변화하듯 인간의 근본적 척도도 서서히 모순과 악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지성인도 많지만 동기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게 인간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인간은 오히려 퇴보의 길에 조금 더 친숙해 있다.
수요일
7월 14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같이
도입)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를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존재하게 된다”는 신학적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존재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우리 안에 존재근거가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있을 때 참으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도자기라도 그 안에 오물을 넣으면, 그것은 변기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하찮은 항아리일지라도 그것에 보배를 담으면, 그것은 보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구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마음에 담게 되면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가지게 되며 거룩하게 될 수 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고 가장 추악한 행위를 일삼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민족과 백성을 그 범주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❶ 롬 2:1~3, 17~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든지 이방인이든지 이 경고의 말씀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314)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분별하고 지적한다. 우리도 동일한 죄, 심지어 더 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할 때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태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왜냐하면 비록 선택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유대인 역시 죄인이며, 경우에 따라서 이방인보다 더 큰 죄인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였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의롭지 않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무도 내적으로 선하거나, 유전적으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 모두가 복음을 통해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교훈: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구원의 특별함을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는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부가적용)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교훈으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기독교인까지도 여기에 유념하지 않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교훈인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를 잘 해독하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것 같다. 심판하는 것은 재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옳고 그릇됨을 정하는 것이다. 그 선악을 단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남의 행위에 대해서 이것저것 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것을 크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증오나 애정에 따라서 남에게 법률상의 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몇 번이나 이 일에 대해서 우리들을 깊이 경계하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다”(마 7:1) 성경은 남을 비방하는 것을 강력하게 제어하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 남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죄악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람이 많은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경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이어서 그는 남의 잘못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씌워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깨끗한 사람은 악한 일을 모르는 법이다. 깨끗한 어린애나 소녀의 입에서 남의 악평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은 남의 악한 일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는 악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악한 일을 듣고 그것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실은 같은 악이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항상 거기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은 오로지 죄악 속에 잠긴 인류의 이러한 습성 때문이다. 오늘의 사회가 전적으로 타락한 증거는 많이 있지만, 가장 명백한 것은 사회 일반이 남의 타락을 듣고 기뻐하고, 설교자나 신문기자들이 사회개선을 명분 삼아 기꺼이 죄악의 폭로에 종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나쁜가? 사실은 사실이니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만일 말을 듣는 것이 싫으면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말 타당한 이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이 남을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들도 같은 잘못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혹은 남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해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은 누구든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남의 결점을 지적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다.
목요일
7월 15일
회개
도입)
국어사전에 보면 후회(後悔)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나와 있다. 후회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후회의 가장 큰 문제는 뉘우친 후에 변화되어지지 않는 것에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회개(悔改)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라고 나왔다. 회개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회와 회개의 공통점은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후회는 단지 뉘우치는데 그치는 것이고 회개는 뉘우친 후에 고치는 단계에까지 가는 것이다.
5살배기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을 밀어 넘어뜨렸다. 부모는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는 싫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들릴 듯 말 듯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것을 진심어린 회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❶ 위에 있는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요가 아닌 선한 인도하심으로 죄인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협박하거나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무한히 인내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기 원하신다. 강요된 회개는 참된 회개의 목적을 훼손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회개를 강요하는 분인데 일부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도록 강요하시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❷ 하나님의 사랑에 저항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불순종의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롬 2:5~10.
이 말씀과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은 선행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선행이 필요없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7절을 보면 구원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이르러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노력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경험 가운데 일부분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의 일과 행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결심과 행동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교훈: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되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시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극복하며 선행에 참여하기를 바라게 된다.
부가적용)
회개(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 즉 자신이 범한 과오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진심어린 결심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의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후회와 다르다. 후회는 그 시선이 과거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회개는 미래를 향한 다짐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후회는 자신을 중심으로 두지만, 회개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자고 한다. 후회는 쓰디쓴 죄의 결과를 맛보게 하지만, 회개는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지만, 결국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다. 유다의 시선은 철저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매어 있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종국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다. 베드로의 시선은 ‘예수님의 말씀’안에 머물렀다. 결국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달려있다. 후회는 죄의 결과에 머물지만,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금요일
7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실물교훈, 291~294 “주의 포도원”, 정로의 계단, 9~15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치료봉사, 492~494 “대인관계”, 교회증언 5권, 146~147 “사단의 앞잡이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세상 형편에 대한 비참한 광경이 내 앞에 제시되었다. 부도덕이 어디나 만연하고 있다. 방탕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이다. 악이 그 흉악한 머리를 오늘날처럼 대담하게 쳐든 때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보이며, 덕성과 참된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악의 대담성, 힘, 편만함으로 거의 낙망하고 있다. 편만한 악은 불신자들이나 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조차 그 사건을 위하여 사단 자신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부패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정욕을 섬겨 왔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그들의 상상이 부패한 것이 당연하다.”(교회증언 2권, 34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화요일 소지에서 언급된 현상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2. 오늘 엘렌 G. 화잇의 두 번째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그대는 어디쯤 있습니까?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요 8:11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3.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죄된 본성과 타락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인간의 그런 실상을 잊어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어떤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7월 17일
일몰: 오후 7시 52분
도입)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호는 젊은 한 때,탄광에서 일을 했다. 한 광부가 기계를 포장했던 천으로 작업복을 만들어 입고 있는데, 작업복 등에 “깨어지기 쉬우니 주의하시오”라고 인쇄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 고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문구는 기계취급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인쇄한 것이었지만 고호에게는 인생의 정체를 깨우쳐주는 놀라운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언제, 어디서 깨어질지 알 수 없는 흙으로 빚어진 하나의 질그릇과 같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그릇, 즉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있다. 이전의 바울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했던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의 한계와 죄인됨을 발견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는 이렇게 자신의 유한성과 죄성을 인정하고 인간 ‘사울’로부터 ‘바울’로 바뀌었다. 여기에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으로 표현한 것은 바울의 겸손과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감옥에 있는 사람이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모두가 사망에 이를 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억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교사(리더)는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해 주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롬 1:16~17, 22~32, 2:1~10, 17~23, 3:1~2, 10~18, 23.
자신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칭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칭의의 첫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바울은 이방인들의 끔찍한 부패상을 소개한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울의 결론은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인간이 행한 일 가운데 어떤 것은 그의 죄값을 갚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유한하고 좁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그대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대가 애지중지하는 생각을 따라 옥신각신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 문제를 살펴보라. 이 문제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악한 자의 자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를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선행을 요구하신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선행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죄 가운데 자신을 두기 때문에 예수의 의만이 유효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화잇 주석, 롬 3:20~31)
일요일
7월 11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도입)
로마 사회는 권력과 지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무력한자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과 능력을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대제국을 앞두고, 바울은 지금 일개 비천한 천막공(天幕工)이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십자가는 치욕을 의미하는 극형이며,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받은 치욕을 짊어져야 한다(히 13:13).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을 받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22-22절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다.(신21:23)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약함을, 어리석음을, 지나침을 보지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본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짐을 본다. 우리는 십자가의 거침돌을 감수하고 살면서 이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됨을 본다.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사는 인생 안에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주어짐을 본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무력함과 교회의 비천함은 이 십자가의 ‘오직’을 외면하고 십자가를 다른 많은 좋은 것들 중의 하나로 변질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의 영광으로 일어서는 유일한 비밀은 십자가의 유일성,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 깨지고 십자가만이 높여지는 데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❶ 그대에게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 말씀에 나타나는 약속과 소망을 어 떻게 경험하였습니까?
이 성경절에 등장하는 몇 가지 핵심 단어는 다음과 같다.
1. 복음. 이 말은 “좋은 기별” 또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어떤 기쁜 소식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될 때는 “메시야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가 된다. (크리스토스는 메시야라는 의미의 그리스말이다.) 복음은 메시야가 오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구원은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도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의 완전한 의에 달려있다.
2. 의.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로마서에서 고유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특히 우리는 롬 1:7에서 “의”가 “하나님의 의”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아오는 의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의이다. 이 의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
3. 믿음. 이 말씀에서 “믿는다” 또는 “믿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피스튜오와 피스티스이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의미는 앞으로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교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심어주기를 원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 얻기에 얼마나 무가치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자들인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윤리 도덕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사회적 신분과 학벌이 어떠하든지, 종교적 경력이 얼마나 화려하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 없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라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항상 인간을 가장 깊은 절망적 상태에 두고 출발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시작은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두렵고 공의로운 진노를 묵상하는 것이다. 소망 없던 나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여 보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다스리며, 함께 후사가 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 그분의 영광에 참예한다. 구원은 교훈이나 권고가 아니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활기찬 생명에 다가감으로 이뤄진다”(SDA 성경주석, 604).
월요일
7월 12일
인간의 처지
도입)
인간의 탐욕과 이기성이 통제 없이 개방되어 버린 우리 사회 속에서 부끄러운 인간의 본성이 각종 비리 사건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우리 현실을 보면서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인간을 향한 외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들 모두는 진흙탕 가운데 있다네…” 와일드는 인간 존재 깊숙이에 보편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인간의 죄성을 꿰뚫어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에서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존재 속에 내재한 죄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을 낙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존재 깊숙이 자리 잡은 죄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죄성은 없어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실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회개한 죄인들이 매일 죄와 싸워 승리하여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성화(聖化)의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❶ 롬 3:23을 읽으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쉽게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면 이 말씀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선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선하다고 느낀다. 그런 논리라면 강호순*은 아돌프 히틀러에 비해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비교한다면, 자기혐오와 경멸감 외에 드러낼 것이 없을 것이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여러 의미로 해석 되고 있다. 가장 단순한 해석은 고전 11:7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어로 “영광”은 “형상”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 된 것 같다. 죄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켰다.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또는 영광을 반사하는 데 한참 미치지 못했다.
❷ 롬 3:10~18을 읽으십시오. 오늘날과 다른 게 있습니까? 이 본문에서 그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또는 만약 그대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총체적 죄됨과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죄인이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죄인의 얼굴에서 자기방어와 위선, 자기 정당화의 가면을 찢고,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그분께 자비를 구하도록 만들 것이다(눅 18:13).
* 여성 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
교훈: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우리의 삶을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첫 단계이다.
부가적용)
성경은 인간 존재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진노의 자녀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죄의 본성을 이겨보려고 애쓰지만 이기지 못하고 진노의 자녀인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겸허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혼자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이다. 인간 존재가 본성적으로는 절망적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되면 희망적인 존재, 기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뜨거운 만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화요일
7월 13일
1세기에서 21세기까지
도입)
현대사회는 고도로 선진화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과 기술, 지식과 정보가 날로 팽창해 간다는데 있다. 지식의 발달은 단순히 지적 탐구를 넘어 모든 분야에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지금까지의 인문학 위주의 교육과 사고가 자연 과학 위주로 바뀌어 지고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은 고속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문학은 퇴조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현대인의 윤리 의식은 크게 약화되어 인간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간에 있어서 도덕성의 상실이 인간의 위기이다. 일찌기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우리 사회는 모든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 우리는 비인간성에로 가는 도상에 있다. 고 경고하였다. 물질만능주의는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가치의 정신적 가치 추월현상에 기인하며, 인간소외, 범죄, 정·재계의 비리 및 유착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 발생의 원인을 초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신의 존재를 잊은 채 살아간다. 문명의 발전에 비해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퇴보는 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인간성이 개선되고 있고, 도덕성은 증가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가 점점 완전해지고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바른 교육과 도덕적 훈련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20세기로 진입할 때, 일제히 시작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것들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세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크게 감사히 여겨야할 부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과거 극단적인 광인이나 꿈꿨을 법했던 대량 살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❶ 롬 1:22~32을 읽으십시오. 1세기에 기록된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인류가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친 이후로 죄와 오류와 타락의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문제의 결과 가운데 살게 되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토피아(Utopia):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말.
교훈: 20세기 초에는 인간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 사회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부가적용)
인류의 살아온 역사는 발전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또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발전에 공이 큰 사람을 높게 평가하여 크게 대접하고 있다. 그리고 발전은 여러 가지 공헌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러나 반면 발전은 또 다른 퇴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인간의 진보는 이중적인 반비례 관계에 놓여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며 성장해 왔다. 그 결과 기존 지구가 가지고 있던 자연적인 현상과 인간의 근본적임 성품윤리 등 도덕적 타락과 사회의 삭막함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문명발달을 추구하게 되면 지구에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자연스러움과 인간의 성품 윤리적 도덕성을 타락시키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문명발달을 거듭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상호차이를 사회의 각종 언론과 매개체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실례는 어렵지 않게 각종 사회매개체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다. 요즘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고 있는 아동유괴 사건 및 늘어만 가고 있는 범죄와 그 종류... 확실히 세대와 시대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 기술과 기법 등 종류가 다양해지며 늘어만 가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쟁점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그 생활능력. 안락. 편리성. 상호이익 등의 물질적 평화는 늘어가고 있지만 문명도 발달하고 변화하듯 인간의 근본적 척도도 서서히 모순과 악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지성인도 많지만 동기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게 인간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인간은 오히려 퇴보의 길에 조금 더 친숙해 있다.
수요일
7월 14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같이
도입)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를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존재하게 된다”는 신학적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존재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우리 안에 존재근거가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있을 때 참으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도자기라도 그 안에 오물을 넣으면, 그것은 변기에 지나지 않다. 그러나 하찮은 항아리일지라도 그것에 보배를 담으면, 그것은 보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구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마음에 담게 되면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가지게 되며 거룩하게 될 수 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잊고 가장 추악한 행위를 일삼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민족과 백성을 그 범주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❶ 롬 2:1~3, 17~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든지 이방인이든지 이 경고의 말씀에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314)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분별하고 지적한다. 우리도 동일한 죄, 심지어 더 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할 때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상태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왜냐하면 비록 선택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유대인 역시 죄인이며, 경우에 따라서 이방인보다 더 큰 죄인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하였다.
이 본문에서 바울의 요점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의롭지 않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무도 내적으로 선하거나, 유전적으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 모두가 복음을 통해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교훈: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구원의 특별함을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는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부가적용)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교훈으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기독교인까지도 여기에 유념하지 않는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교훈인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를 잘 해독하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것 같다. 심판하는 것은 재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옳고 그릇됨을 정하는 것이다. 그 선악을 단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남의 행위에 대해서 이것저것 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것을 크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증오나 애정에 따라서 남에게 법률상의 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몇 번이나 이 일에 대해서 우리들을 깊이 경계하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시지 않을 것이다”(마 7:1) 성경은 남을 비방하는 것을 강력하게 제어하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 남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그다지 죄악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람이 많은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경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이어서 그는 남의 잘못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실은 그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씌워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깨끗한 사람은 악한 일을 모르는 법이다. 깨끗한 어린애나 소녀의 입에서 남의 악평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은 남의 악한 일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는 악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악한 일을 듣고 그것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실은 같은 악이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항상 거기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은 오로지 죄악 속에 잠긴 인류의 이러한 습성 때문이다. 오늘의 사회가 전적으로 타락한 증거는 많이 있지만, 가장 명백한 것은 사회 일반이 남의 타락을 듣고 기뻐하고, 설교자나 신문기자들이 사회개선을 명분 삼아 기꺼이 죄악의 폭로에 종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나쁜가? 사실은 사실이니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만일 말을 듣는 것이 싫으면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말 타당한 이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이 남을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들도 같은 잘못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혹은 남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해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은 누구든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남의 결점을 지적하고 심판할 권리가 없다.
목요일
7월 15일
회개
도입)
국어사전에 보면 후회(後悔)란 “이전의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나와 있다. 후회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후회의 가장 큰 문제는 뉘우친 후에 변화되어지지 않는 것에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회개(悔改)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라고 나왔다. 회개란 잘못을 범하고 그 결과 참담한 지경을 당하여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뉘우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회와 회개의 공통점은 잘못을 뉘우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후회는 단지 뉘우치는데 그치는 것이고 회개는 뉘우친 후에 고치는 단계에까지 가는 것이다.
5살배기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을 밀어 넘어뜨렸다. 부모는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는 싫은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들릴 듯 말 듯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것을 진심어린 회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❶ 위에 있는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요가 아닌 선한 인도하심으로 죄인을 회개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협박하거나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무한히 인내 하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기 원하신다. 강요된 회개는 참된 회개의 목적을 훼손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회개를 강요하는 분인데 일부만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회개하도록 강요하시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
❷ 하나님의 사랑에 저항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면서 불순종의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롬 2:5~10.
이 말씀과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은 선행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선행이 필요없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7절을 보면 구원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이르러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노력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경험 가운데 일부분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의 일과 행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결심과 행동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교훈: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되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시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극복하며 선행에 참여하기를 바라게 된다.
부가적용)
회개(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 즉 자신이 범한 과오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진심어린 결심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의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후회와 다르다. 후회는 그 시선이 과거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회개는 미래를 향한 다짐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후회는 자신을 중심으로 두지만, 회개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자고 한다. 후회는 쓰디쓴 죄의 결과를 맛보게 하지만, 회개는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지만, 결국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는다. 유다의 시선은 철저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매어 있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종국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다. 베드로의 시선은 ‘예수님의 말씀’안에 머물렀다. 결국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달려있다. 후회는 죄의 결과에 머물지만,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금요일
7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실물교훈, 291~294 “주의 포도원”, 정로의 계단, 9~15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17~22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치료봉사, 492~494 “대인관계”, 교회증언 5권, 146~147 “사단의 앞잡이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세상 형편에 대한 비참한 광경이 내 앞에 제시되었다. 부도덕이 어디나 만연하고 있다. 방탕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이다. 악이 그 흉악한 머리를 오늘날처럼 대담하게 쳐든 때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보이며, 덕성과 참된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악의 대담성, 힘, 편만함으로 거의 낙망하고 있다. 편만한 악은 불신자들이나 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조차 그 사건을 위하여 사단 자신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부패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정욕을 섬겨 왔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그들의 상상이 부패한 것이 당연하다.”(교회증언 2권, 34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화요일 소지에서 언급된 현상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2. 오늘 엘렌 G. 화잇의 두 번째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그대는 어디쯤 있습니까?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요 8:11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3.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죄된 본성과 타락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인간의 그런 실상을 잊어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의 처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어떤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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