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공동체: 사랑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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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6-18 08:08 조회5,73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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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3 과 공동체: 사랑의 띠
6월 26일
일몰: 오후 7시 58분
도입)
우리가 누군가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나 미운 마음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이겨 내야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 바지가 내려간다는 말은 영적으로 우리의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뜻이다. 섭섭함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외에 우리의 영적 자세를 흐트러 트릴 수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색함일 수도 있고 게으름일 수도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면 사단의 이런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허리를 띠를 띠고 있는가? 진리의 허리띠와 사랑의 띠인가? 아니면 감정의 허리띠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면 자신의 몸에 배인 습관대로 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응징하거나 하나님을 대신해 누구를 심판하라고 부탁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신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남편이 원수처럼 보여도,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내게 악한 일을 할지라도 응징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허리띠를 띠는 일이며 사랑의 공동체에서 행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기억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창 1:27, 요 1:1~3, 롬 14:7, 고전 12:14~26, 고전 13장, 갈 6:2, 엡 4:1~16.
|중심사상|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다.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만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도 축복이 된다.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들의 사망률은 다른 모든 비정상적인 사망률보다 2~5배 이상 높다. 지나친 슬픔과 고립감은 만족스런 관계에서 오는 일상의 기쁨을 앗아간다. 군 인병원에서 출산 전 간호를 받고 있는 직업군인 아내 170명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 심리적 지원이 없는 여자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고 있는 여자들보다 3배 합 병증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립감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질병과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친밀감, 유대감과 동질감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치유와 건강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서로 교제하며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한다 는 의미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치유와 절제에 관한 이번 기 교과의 마지막 주제를 공부하면서, 인간 상호 관계의 중요성과 관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
6월 20일
본래의 형상
도입)
인간의 가시적 세계 즉 시공(時空)의 세계로 들어오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며 이 가시적 세계의 주재자이시다. 유다서 1:25은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2:11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하는데 “다 하나”에서 나왔다는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시공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오신 “하나(one, 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슥 14:9절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라고 했다. 요한복음 8장 58에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치 않으면 그의 신성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미글리오리(Daniel L. Migliore)는 말하기를,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창세기 1장의 주석으로 제한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이 성경 본문의 증언은 복음에 비추어서 깊이 있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셨던 것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 4:4; 골 1:15)”라고 하였다.
죄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탓에 우리는 그것의 심각성을 종종 잊고 산다. 오랫동안 지속된 영적 저하의 상태에서 타락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 창 1:27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인류 의 조상이 태초에 가졌던 품성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성경의 주장은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분명하다(참고 요 1:1~3). 따라서 예수님의 도덕적 특징은 첫 조상의 인성에 반영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 신을 낮추시고 취하신 인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을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면서 까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품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죽어가는 강도를 위로하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탄원하셨던 모 습 속에도 죄가 들어오기 전 인성이 나타났다.
예수님의 삶을 특징지었던 다른 이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과 관심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삶에 어느 수준만큼 반영돼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원래 지어졌던 모습으로 재창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을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보고, 그분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중심에는 다른 이에 대한 이타적 사랑이 자 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들도 원래 이웃을 사랑하고 이타적으로 돌보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 속에는 분명 이런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동체와 가족이 있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교훈: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처음에 가졌던 인성을 회복해야 한다.
부가적용)
신약성경은 칼빈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고후 4:6; 요 1:14),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육체적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의도와 행위의 일치인 것이다. 육체적인 닮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의인화에는 명백한 우려를 나타낸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의인화에 대한 우려도 문제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화적인 모습으로만 그분을 그리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육체 안에 그분의 신성이 충만한 상태로 거하실 뿐만 아니라(골 2:9),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나타내는 것(빌 2:6)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지나치게 의인화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신화화 하여 유(有)의 세계를 열며 인간에게 다가오신 그분의 본질을 가리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인성과 형상의 참된 모본이 되어야 한다.
월요일
6월 21일
사람: 사회적 존재
도입)
임상 심리학자 윌리엄 디엄(William J. Diehm)은 『감동을 창조하는 인간관계』라는 책에서 인간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몇 년 전 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있는 쌍 페르난도에서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죽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자기의 의붓아버지에게 ”아빠, 나는 결코 아빠를 즐겁게 해 드릴 수 없어요. 나는 결코 좋은 일을 할 수 없어요. 저는 죽고싶어요“라고 말했다. 좋지 못한 언어 습관을 갖고 있던 의붓아버지는 아이에게 ”그럼 가서 죽어“라고 말했다. 그의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 어린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스스로 자살을 했기 때문에 그 의붓아버지는 살인죄로 기소될 수 없었다. 그가 아이를 때리거나 어떤 학대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말로 아이를 죽였다.” 잘못된 언어습관이 한 어린아이의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나쁜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말 속에 사람의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아픈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또한 상처를 치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훈련되지 않은 언어, 함부로 내뱉는 말은 “칼로 찌름과 같이”(잠12:18)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로 아무 때나 함부로 내뱉음으로 인하여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기분이 나빠지며, 불쾌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게 만들 뿐 아니라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회성이 떨어져서 직장과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이끌어 갈 수 없어서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아담을 창조하시자마자, 하나님은 그에게 동반자를 주셨다. 그분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창 2:18).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롬 14: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어떤 중요한 원칙이 나옵니까? 이 진리가 실제 삶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그대는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있습니까?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는 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2. 다음의 성경절들은 사회적 관계가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 고 있습니까? 창 2:18, 전 4:9~12, 고전 12:14~26, 갈 6:2.
좋은 관계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친 절하게 관계를 주고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내 몸이다.’ ‘다른 사람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사람이든지 건강치 못한 선택을 했을 때 그 사회는 직간접적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귀중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최상의 보존가치가 있다. 곳곳에서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따라서 그대의 건강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의사가 사회적 연대와 지원이 질병발생이나 사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사하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전통적으로 친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일본사회 로부터 모범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을수록, 사람들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않고, 사망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다.
부가적용)
한자(漢字)로 사람 “인(人)”을 쓰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막대 형상이다. 하나가 빠지면 넘어지고 만다. 이 모양에서 우리 인간들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성을 지닌 존재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사람은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대화를 끊고 혼자 외톨이가 되고 격리된다면 심리적으로 무서운 공포와 정신이상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독방에 격리 수용하여 대화할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 감정을 나누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심령을 유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미국 심리학회에서 내놓은 연구결과를 보면 물질(物質)과 지적(知的)인 능력(能力),사회적 명성(名聲)이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고 한다. 행복은 배우자(配偶者) 사이의 믿음과 사랑, 가족 간의 유대감(紐帶感), 장래(將來)에 대한 희망(希望)(천국 소망),좋은 친구간(교우(敎友) 우정(友情) 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신앙 안에서 긍정적(肯定的)인 사고(思考)가 행복론(幸福論)의 그 바탕이 된다고들 한다. 옛날보다는 지금은 잘사는데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옛날 같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剝脫)감과 소외감(疏外感)에 가슴 아파하고 더 큰 부(富)와 더 좋은 환경(環境)을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화요일
6월 22일
구원 속에서 연합
도입)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왜 형제와 연합하고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연합하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자라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대열에서의 이탈은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공동체에서 이탈하면 사단의 밥이 된다. 전도서 4:12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synergy(시너지)효과에 대한 반대말은 '링겔만 효과'라고 한다. 약 100여년전 독일의 심리학자 링겔만이 줄다리기를 통해 사람의 행태를 연구했는데, 줄다리기 실험의 가설은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개인이 발휘하는 힘도 증가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설과 달리 실험결과로는 1명 참여시 100%, 2명 참여시 93%, 3명 참여시 85%, 4명 참여시 49%로서 오히려 참여하는 개인의 수가 늘수록 개인의 공헌도는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이 실험을 계기로 시너지 효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링겔만 효과'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링겔만 효과를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원인은 대중 속에서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함이며, 이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 대안으로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내가 없으면 안되지!'라는 자기 존재의 인식을 강조한다. 이처럼 나 하나쯤의 생각이 공동체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한명으로 인해 공동체에게 안 좋은 영향도 준다. 않 좋은 세포가 산 다른 세포에 까지 않 좋은 영향을 주듯이 한사람이 다른 공동체 원들에게 않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교회결석, 흉보는 분위기.... 그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전체의 분위기를 영적인 분위기가 아닌 남의 허물이나 들고, 교회의 연합을 해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공동체에 위기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모든 인류는 한 조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행 17:26). 인간은 우리 모두를 사랑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벧후 3:9).
성경은 예수님 안에서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인간들 사이의 모든 장벽이 허물어 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동등하며, 다 하나님 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1. 바울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엡 4:1~16.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엡 5:29~30). 그리스도도 자신을 믿는 공동체를 자기 몸으로 여기시고 돌보신다. 인체의 각 부분들이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도움을 베풀 때, 우리의 건강은 향상된다. 276명의 건강한 자원자들에게 평범한 감기 바이러스를 노출 시켰다. 다양한 인간 상호 관계의 효과를 조사하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인간관계를 가장 적게 보고 한 집단은 가장 많이 보고한 집단보다 감기에 걸릴 확률이 4배 이상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차이점은 면역력, 흡연, 운동, 수면, 음주 그 밖의 요인을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는 관계의 다양성이 개인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가 적어도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교과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전부이다. 우리의 정서적, 정신적, 영적 건강은 신체적 건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성격 은 우리의 정서적 영적 건강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물론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때에 나를 든든히 받 쳐 줄 수 있는 큰 공동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조건이다.
부가적용)
공동체란 인간의 고안물이나 사회적 화합이 아니다. 모임의 생존을 위판 필사적인 해결책도 아니다. 공동체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본성(nature)에 기반을 두며 하나 되시는 존재(being)안에 다수의 인격들(a plurality fo person)이 계신다는 하나님의 본질(identity)을 반영한다. 공동체 건설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창조물을 향해 가지셨던 꿈이며,
역사를 통해 추구해 오셨고 시간의 마지막까지 계속 하실 일이다. 이 꿈은 교회가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 영원 속으로 들어가서 구속의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구세주의 품에 안겨 신랑되신 주님과 신부로서 연합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지와 성장, 확대에 관련된 문제들은 교회구성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우연에 맡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일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뿐 아니라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처음 계획하셨던 바로 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하며, 사람들의 전통이나 기호를 따라서는 안된다. 또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온 비공동체적인 이질적 유형들은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런 유형들에는 참된 공동체의 기쁨과 참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역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자신들의 경험, 전통에서가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관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현미경으로 점검하여 성경적인지 검증하고 참된 공동체에 걸림돌이 되는 부가적 전통 틀을 단호히 제거하여, 성경적이며 참된 공동체의 요소들로 대체해야 한다.
수요일
6월 23일
서로 후원함
도입)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겸손과 봉사의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분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지도자였지만 자신은 그들의 종이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은 몸소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 일은 종들의 일이지, 그들의 선생님이 할 일은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기꺼이 씻겨 봉사하려고 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기꺼이 봉사하려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가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필요하다면 서로에게 봉사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 봉사가 없으면 그만큼 배움이 없고 주님의 희생을 알지 못하며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뭔가 주어지기 때문에 하는 봉사가 아니라 나를 버리기 위한 봉사, 나를 부인하기 이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얻는 최고의 유익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진실한 헌신은 삶을 통해 변함없이 나타나야 한다.”(의료봉사, 204) 세상의 모든 신학적 지식을 가지 고 있더라도 만약 친절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이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겠는가? 그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어 보라.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따르고 있는지 자문하여 보라.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 13:35, 롬 15:7, 엡 4:32, 골 3:13,살전 4:18, 약 5:16, 벧전 3:8~9, 요 일 1:7.
그리스도인 최고의 미덕은 사람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그들을 돌보고 포용하셨다. 우 리는 그분처럼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 실 때만이 가능하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굴복하고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만큼 일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 게 친절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부분 그 정도는 한다. 그러나 우 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 우리를 거칠고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이 있을 때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의 은혜가 필요하다.
2. 사랑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을 잘하는 방법은 어 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들에게 가서 그 분처럼 하십시오.
교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봉사를 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일을 위하여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봉사를 통하여서 배우라는 것이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을 배우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희생이 무엇이며 섬김이 무엇인가를 서로 봉사하면서 배워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봉사를 명하신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봉사는 어떤 면에서 싸움이다. 어떤 싸움이냐 하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이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는 싸움인 것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함으로서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여서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되어져 가는 싸움인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저런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하나 내가 누군데 화장실 청소를 한다 말인가? 라는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배여 있는 사람이 그러한 봉사를 통하여서 자기를 배워 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 봉사가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봉사를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가 필요하다. 봉사는 단순히 내 이름을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또한 어떤 직분을 받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봉사는 주님의 모습을 담기 위한 것이며 또한 자기를 버리기 위한 훈련이며 또한 세상보다 하나님나라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투쟁인 것이다.
목요일
6월 24일
서로 섬기라
도입)
어느 날 한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 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정말 만족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허리를 굽혀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답니다." 그녀의 대답에서 우리는 섬김의 지혜를 터득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사는 그녀였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스타’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섬김’은 귀한 것이다. 우리가 주 앞에 서는 날 주님은 “네가 몇 사람에게 섬김을 받았으냐?” 질문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너는 몇 사람이나 섬겼느냐?” 물으실 것이다.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해서’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 45).” 주님의 일생이 사랑과 섬김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주님의 자녀라 불리는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마땅히 주님을 좇아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주님께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봉사의 생애를 사셨다. 봉사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그 분은 인간들을 섬기셨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섬기고 계신다 (히 2:17~18).
1. 우리는 각자 봉사에 필요한 특정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성경절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은사와 봉사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롬 12: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전 12:1~5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엡 4: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돕고 구제하기 위해 나아갈 때, 아무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자기를 내어줄 때, 기분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라. 우리 안에 깊은 감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는 좋은 것을 느끼는 감각이 있다. 우리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주는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 때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우리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 실을 보았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 더 잘 반응 한다. 놀랍게도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 써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니까 우리의 건강도 향상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교훈: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데일 카네기는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기웃거리는 사람은 허영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과 남의 일을 잘 조화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섬기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고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다. 섬기면서 삶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섬기는 것은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는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다. 사람을 섬기는 봉사는 구원받은 사람의 할 일이다. 좋은 섬김, 좋은 봉사가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금요일
6월 25일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4~51 “창조”, 치료봉사, 95~107 “봉사를 위하여 구 원해 줌”, 497~502 “향상과 봉사”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생애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분께서 걸어가 신 곳을 걸어 보고 그분께서 가르치기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그처럼 자주 머물렀던 들과 골짜기들을 바라보는 것이 큰 특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하여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병자의 침상 곁에서, 가난한 오두막에서, 사람 이 많은 대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 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린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타적 봉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을 행하는 자를 개혁시키는 일에 있어서 칼이나 공의의 법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일을 할 것이다. 칼이 나 공의의 법정은 범법자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선교사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때때로 견책 때문에 굳어지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질 것이다.”(치료봉사, 105~10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구주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 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2. 그대가 다니는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도들 간의 교제의 질을 높일 수 있을지 교과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3.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 얻는 만족이 그토록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을 자주 돕지 못하 도록 가로막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이기적으로 살아갈 때 느끼는 불만족과 공허함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4.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6월 26일
일몰: 오후 7시 58분
도입)
우리가 누군가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나 미운 마음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이겨 내야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 바지가 내려간다는 말은 영적으로 우리의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뜻이다. 섭섭함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외에 우리의 영적 자세를 흐트러 트릴 수 있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인색함일 수도 있고 게으름일 수도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면 사단의 이런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허리를 띠를 띠고 있는가? 진리의 허리띠와 사랑의 띠인가? 아니면 감정의 허리띠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면 자신의 몸에 배인 습관대로 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응징하거나 하나님을 대신해 누구를 심판하라고 부탁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신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남편이 원수처럼 보여도,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내게 악한 일을 할지라도 응징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허리띠를 띠는 일이며 사랑의 공동체에서 행해야 할 삶의 모습이다.
기억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창 1:27, 요 1:1~3, 롬 14:7, 고전 12:14~26, 고전 13장, 갈 6:2, 엡 4:1~16.
|중심사상|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다.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만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도 축복이 된다.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들의 사망률은 다른 모든 비정상적인 사망률보다 2~5배 이상 높다. 지나친 슬픔과 고립감은 만족스런 관계에서 오는 일상의 기쁨을 앗아간다. 군 인병원에서 출산 전 간호를 받고 있는 직업군인 아내 170명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 심리적 지원이 없는 여자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고 있는 여자들보다 3배 합 병증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립감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질병과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친밀감, 유대감과 동질감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치유와 건강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서로 교제하며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한다 는 의미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치유와 절제에 관한 이번 기 교과의 마지막 주제를 공부하면서, 인간 상호 관계의 중요성과 관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
6월 20일
본래의 형상
도입)
인간의 가시적 세계 즉 시공(時空)의 세계로 들어오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며 이 가시적 세계의 주재자이시다. 유다서 1:25은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2:11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하는데 “다 하나”에서 나왔다는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시공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오신 “하나(one, 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슥 14:9절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라고 했다. 요한복음 8장 58에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치 않으면 그의 신성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미글리오리(Daniel L. Migliore)는 말하기를,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창세기 1장의 주석으로 제한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이 성경 본문의 증언은 복음에 비추어서 깊이 있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셨던 것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 4:4; 골 1:15)”라고 하였다.
죄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탓에 우리는 그것의 심각성을 종종 잊고 산다. 오랫동안 지속된 영적 저하의 상태에서 타락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 창 1:27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인류 의 조상이 태초에 가졌던 품성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성경의 주장은 명백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분명하다(참고 요 1:1~3). 따라서 예수님의 도덕적 특징은 첫 조상의 인성에 반영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 신을 낮추시고 취하신 인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을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면서 까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품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죽어가는 강도를 위로하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탄원하셨던 모 습 속에도 죄가 들어오기 전 인성이 나타났다.
예수님의 삶을 특징지었던 다른 이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과 관심은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삶에 어느 수준만큼 반영돼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원래 지어졌던 모습으로 재창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을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분의 삶의 방식을 보고, 그분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중심에는 다른 이에 대한 이타적 사랑이 자 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들도 원래 이웃을 사랑하고 이타적으로 돌보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 속에는 분명 이런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창조되었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동체와 가족이 있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교훈: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처음에 가졌던 인성을 회복해야 한다.
부가적용)
신약성경은 칼빈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고후 4:6; 요 1:14),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육체적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의도와 행위의 일치인 것이다. 육체적인 닮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의인화에는 명백한 우려를 나타낸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의인화에 대한 우려도 문제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화적인 모습으로만 그분을 그리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육체 안에 그분의 신성이 충만한 상태로 거하실 뿐만 아니라(골 2:9),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나타내는 것(빌 2:6)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지나치게 의인화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신화화 하여 유(有)의 세계를 열며 인간에게 다가오신 그분의 본질을 가리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인성과 형상의 참된 모본이 되어야 한다.
월요일
6월 21일
사람: 사회적 존재
도입)
임상 심리학자 윌리엄 디엄(William J. Diehm)은 『감동을 창조하는 인간관계』라는 책에서 인간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몇 년 전 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있는 쌍 페르난도에서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죽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자기의 의붓아버지에게 ”아빠, 나는 결코 아빠를 즐겁게 해 드릴 수 없어요. 나는 결코 좋은 일을 할 수 없어요. 저는 죽고싶어요“라고 말했다. 좋지 못한 언어 습관을 갖고 있던 의붓아버지는 아이에게 ”그럼 가서 죽어“라고 말했다. 그의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 어린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스스로 자살을 했기 때문에 그 의붓아버지는 살인죄로 기소될 수 없었다. 그가 아이를 때리거나 어떤 학대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말로 아이를 죽였다.” 잘못된 언어습관이 한 어린아이의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나쁜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말 속에 사람의 생사(生死)를 주관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아픈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또한 상처를 치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훈련되지 않은 언어, 함부로 내뱉는 말은 “칼로 찌름과 같이”(잠12:18)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로 아무 때나 함부로 내뱉음으로 인하여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기분이 나빠지며, 불쾌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게 만들 뿐 아니라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사회성이 떨어져서 직장과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이끌어 갈 수 없어서 인생의 낙오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아담을 창조하시자마자, 하나님은 그에게 동반자를 주셨다. 그분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다(창 2:18).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롬 14: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어떤 중요한 원칙이 나옵니까? 이 진리가 실제 삶에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그대는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있습니까?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는 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2. 다음의 성경절들은 사회적 관계가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 고 있습니까? 창 2:18, 전 4:9~12, 고전 12:14~26, 갈 6:2.
좋은 관계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친 절하게 관계를 주고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내 몸이다.’ ‘다른 사람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사람이든지 건강치 못한 선택을 했을 때 그 사회는 직간접적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귀중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최상의 보존가치가 있다. 곳곳에서 생명의 가치가 경시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따라서 그대의 건강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의사가 사회적 연대와 지원이 질병발생이나 사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사하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전통적으로 친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일본사회 로부터 모범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을수록, 사람들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건강이 좋지 않고, 사망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은 더불어 사는 삶이다.
부가적용)
한자(漢字)로 사람 “인(人)”을 쓰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막대 형상이다. 하나가 빠지면 넘어지고 만다. 이 모양에서 우리 인간들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성을 지닌 존재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사람은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대화를 끊고 혼자 외톨이가 되고 격리된다면 심리적으로 무서운 공포와 정신이상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독방에 격리 수용하여 대화할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 감정을 나누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심령을 유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미국 심리학회에서 내놓은 연구결과를 보면 물질(物質)과 지적(知的)인 능력(能力),사회적 명성(名聲)이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고 한다. 행복은 배우자(配偶者) 사이의 믿음과 사랑, 가족 간의 유대감(紐帶感), 장래(將來)에 대한 희망(希望)(천국 소망),좋은 친구간(교우(敎友) 우정(友情) 등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신앙 안에서 긍정적(肯定的)인 사고(思考)가 행복론(幸福論)의 그 바탕이 된다고들 한다. 옛날보다는 지금은 잘사는데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옛날 같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剝脫)감과 소외감(疏外感)에 가슴 아파하고 더 큰 부(富)와 더 좋은 환경(環境)을 만들지 못해 안달이다.
화요일
6월 22일
구원 속에서 연합
도입)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왜 형제와 연합하고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연합하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자라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대열에서의 이탈은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공동체에서 이탈하면 사단의 밥이 된다. 전도서 4:12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synergy(시너지)효과에 대한 반대말은 '링겔만 효과'라고 한다. 약 100여년전 독일의 심리학자 링겔만이 줄다리기를 통해 사람의 행태를 연구했는데, 줄다리기 실험의 가설은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개인이 발휘하는 힘도 증가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설과 달리 실험결과로는 1명 참여시 100%, 2명 참여시 93%, 3명 참여시 85%, 4명 참여시 49%로서 오히려 참여하는 개인의 수가 늘수록 개인의 공헌도는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다. 이 실험을 계기로 시너지 효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링겔만 효과'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링겔만 효과를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원인은 대중 속에서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함이며, 이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 대안으로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내가 없으면 안되지!'라는 자기 존재의 인식을 강조한다. 이처럼 나 하나쯤의 생각이 공동체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한명으로 인해 공동체에게 안 좋은 영향도 준다. 않 좋은 세포가 산 다른 세포에 까지 않 좋은 영향을 주듯이 한사람이 다른 공동체 원들에게 않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교회결석, 흉보는 분위기.... 그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전체의 분위기를 영적인 분위기가 아닌 남의 허물이나 들고, 교회의 연합을 해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공동체에 위기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모든 인류는 한 조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행 17:26). 인간은 우리 모두를 사랑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벧후 3:9).
성경은 예수님 안에서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인간들 사이의 모든 장벽이 허물어 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동등하며, 다 하나님 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1. 바울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엡 4:1~16.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엡 5:29~30). 그리스도도 자신을 믿는 공동체를 자기 몸으로 여기시고 돌보신다. 인체의 각 부분들이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도움을 베풀 때, 우리의 건강은 향상된다. 276명의 건강한 자원자들에게 평범한 감기 바이러스를 노출 시켰다. 다양한 인간 상호 관계의 효과를 조사하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인간관계를 가장 적게 보고 한 집단은 가장 많이 보고한 집단보다 감기에 걸릴 확률이 4배 이상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차이점은 면역력, 흡연, 운동, 수면, 음주 그 밖의 요인을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는 관계의 다양성이 개인들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가 적어도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교과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전부이다. 우리의 정서적, 정신적, 영적 건강은 신체적 건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성격 은 우리의 정서적 영적 건강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물론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힘든 때에 나를 든든히 받 쳐 줄 수 있는 큰 공동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조건이다.
부가적용)
공동체란 인간의 고안물이나 사회적 화합이 아니다. 모임의 생존을 위판 필사적인 해결책도 아니다. 공동체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본성(nature)에 기반을 두며 하나 되시는 존재(being)안에 다수의 인격들(a plurality fo person)이 계신다는 하나님의 본질(identity)을 반영한다. 공동체 건설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창조물을 향해 가지셨던 꿈이며,
역사를 통해 추구해 오셨고 시간의 마지막까지 계속 하실 일이다. 이 꿈은 교회가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 영원 속으로 들어가서 구속의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구세주의 품에 안겨 신랑되신 주님과 신부로서 연합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지와 성장, 확대에 관련된 문제들은 교회구성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우연에 맡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일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뿐 아니라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처음 계획하셨던 바로 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하며, 사람들의 전통이나 기호를 따라서는 안된다. 또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온 비공동체적인 이질적 유형들은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런 유형들에는 참된 공동체의 기쁨과 참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역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자신들의 경험, 전통에서가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관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현미경으로 점검하여 성경적인지 검증하고 참된 공동체에 걸림돌이 되는 부가적 전통 틀을 단호히 제거하여, 성경적이며 참된 공동체의 요소들로 대체해야 한다.
수요일
6월 23일
서로 후원함
도입)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겸손과 봉사의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분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지도자였지만 자신은 그들의 종이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은 몸소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 일은 종들의 일이지, 그들의 선생님이 할 일은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의 발을 기꺼이 씻겨 봉사하려고 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기꺼이 봉사하려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가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필요하다면 서로에게 봉사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 봉사가 없으면 그만큼 배움이 없고 주님의 희생을 알지 못하며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뭔가 주어지기 때문에 하는 봉사가 아니라 나를 버리기 위한 봉사, 나를 부인하기 이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얻는 최고의 유익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엘렌 G. 화잇의 언급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진실한 헌신은 삶을 통해 변함없이 나타나야 한다.”(의료봉사, 204) 세상의 모든 신학적 지식을 가지 고 있더라도 만약 친절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식이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겠는가? 그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어 보라.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따르고 있는지 자문하여 보라.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 13:35, 롬 15:7, 엡 4:32, 골 3:13,살전 4:18, 약 5:16, 벧전 3:8~9, 요 일 1:7.
그리스도인 최고의 미덕은 사람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그들을 돌보고 포용하셨다. 우 리는 그분처럼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 실 때만이 가능하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굴복하고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만큼 일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는지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 게 친절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부분 그 정도는 한다. 그러나 우 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 우리를 거칠고 부당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이 있을 때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의 은혜가 필요하다.
2. 사랑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을 잘하는 방법은 어 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들에게 가서 그 분처럼 하십시오.
교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봉사를 하게 하신 것은 단순히 일을 위하여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봉사를 통하여서 배우라는 것이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을 배우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희생이 무엇이며 섬김이 무엇인가를 서로 봉사하면서 배워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봉사를 명하신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봉사는 어떤 면에서 싸움이다. 어떤 싸움이냐 하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이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는 싸움인 것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함으로서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여서 남을 섬기는 모습으로 되어져 가는 싸움인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저런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하나 내가 누군데 화장실 청소를 한다 말인가? 라는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배여 있는 사람이 그러한 봉사를 통하여서 자기를 배워 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 봉사가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봉사를 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가 필요하다. 봉사는 단순히 내 이름을 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또한 어떤 직분을 받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봉사는 주님의 모습을 담기 위한 것이며 또한 자기를 버리기 위한 훈련이며 또한 세상보다 하나님나라가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투쟁인 것이다.
목요일
6월 24일
서로 섬기라
도입)
어느 날 한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 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정말 만족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허리를 굽혀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답니다." 그녀의 대답에서 우리는 섬김의 지혜를 터득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사는 그녀였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스타’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섬김’은 귀한 것이다. 우리가 주 앞에 서는 날 주님은 “네가 몇 사람에게 섬김을 받았으냐?” 질문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너는 몇 사람이나 섬겼느냐?” 물으실 것이다.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해서’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 45).” 주님의 일생이 사랑과 섬김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주님의 자녀라 불리는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마땅히 주님을 좇아 서로를 섬기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주님께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봉사의 생애를 사셨다. 봉사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그 분은 인간들을 섬기셨다. 성경말씀에 따르면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섬기고 계신다 (히 2:17~18).
1. 우리는 각자 봉사에 필요한 특정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성경절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은사와 봉사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롬 12: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전 12:1~5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엡 4: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을 돕고 구제하기 위해 나아갈 때, 아무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 없이 자기를 내어줄 때, 기분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라. 우리 안에 깊은 감동이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는 좋은 것을 느끼는 감각이 있다. 우리는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주는 것은 우리가 찾아야 할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 때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이 우리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 실을 보았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 더 잘 반응 한다. 놀랍게도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학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 써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니까 우리의 건강도 향상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교훈: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데일 카네기는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기웃거리는 사람은 허영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과 남의 일을 잘 조화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섬기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고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다. 섬기면서 삶의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섬기는 것은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는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다. 사람을 섬기는 봉사는 구원받은 사람의 할 일이다. 좋은 섬김, 좋은 봉사가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금요일
6월 25일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4~51 “창조”, 치료봉사, 95~107 “봉사를 위하여 구 원해 줌”, 497~502 “향상과 봉사”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생애하시던 장소들을 방문하여 그분께서 걸어가 신 곳을 걸어 보고 그분께서 가르치기 좋아하시던 호숫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눈이 그처럼 자주 머물렀던 들과 골짜기들을 바라보는 것이 큰 특권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하여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이나 베다니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병자의 침상 곁에서, 가난한 오두막에서, 사람 이 많은 대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위로가 필요한 어느 곳에서든 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린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해야 한다. 우리는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타적 봉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을 행하는 자를 개혁시키는 일에 있어서 칼이나 공의의 법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일을 할 것이다. 칼이 나 공의의 법정은 범법자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선교사는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때때로 견책 때문에 굳어지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질 것이다.”(치료봉사, 105~10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구주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 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2. 그대가 다니는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도들 간의 교제의 질을 높일 수 있을지 교과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3.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 얻는 만족이 그토록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남을 자주 돕지 못하 도록 가로막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대의 경험에 따르면 이기적으로 살아갈 때 느끼는 불만족과 공허함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4.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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