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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 빛 가운데서 행함 ; 죄로부터 돌이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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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7-12 19:25 조회6,2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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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18일 안식일 일몰 오후7시52분

제3과 빛 가운데 행(行)함 : 죄(罪)에서 돌이킴

<기억절(記憶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自白)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義)로우사 우리 죄(罪)를 사(赦)하시며 모든 불의(不義)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깨닫기) : 예수님을 죄에 대한 유일(唯一)의 해결책(解決策)으로 받아들인다.
(느끼기) : 값없이 베풀어 주신 용서(容恕)에 감사(感謝)드린다.
(행하기) :우리의 죄를 자백(自白)하고 용서(容恕)를 구(求)함으로써 은혜(恩惠)에 반응(反應)한다.

<요점(要點)>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자(解決者)는 예수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容恕)하실 수 있고 또한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

일(日) (7월12일)
<빛 (요일 1:5) >

◉ 흔히 빛이라고 하면 태양(太陽)이 연상(聯想)될 것이다.
태양은 우리 주변(周邊)의 자연(自然)에서 볼 수 있는 광원(光源)으로는 가장 강력(强力)한 것이다.
지구(地球)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오며, 그 에너지의 전달 체(傳達體)가 바로 빛이다.
따라서 빛은 에너지의 한 종류(種類)이다.
하지만 빛은 에너지로서 뿐만 아니라 많은 생물(生物)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감각(感覺)의 한 요소(要素)로서 작용(作用)하고 있어, 실제생활에 있어서 빛은 그 자체가 에너지원(源)으로 인식(認識)되기보다는 정보(情報)의 인식(認識)전달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는 파장(波長)이 0.4∼0.75μm인 가시광선(可視光線)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자외선(紫外線)과 적외선(赤外線)도 포함한다.
과거(過去)에는 가시광선(可視光線)만 빛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현대(現代)에는 빨간색 가시광선(可視光線)보다 파장(波長)이 긴 적외선(赤外線)(750nm~1mm)과 보라색 가시광선보다 파장(波長)이 짧은 자외선(紫外線)(10~390nm), 자외선보다 파장이 더 짧은 X선 등의 전자기파(電磁氣波)를 포함(包含)한다.

☞ 빛의 특징(特徵)
반사(反射), 굴절(屈折), 간섭(干涉), 회절(回折) 및 도플러효과(Doppler effect) 등 파동(波動)의 특징(特徵)을 보인다. 파장이 비교적 짧아 직진하며, 다른 매질의 경계면을 만나면 일부는 반사(反射)되고 일부는 굴절(屈折)된다.

※ <우리는 이상(以上)과 같은 빛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에 대해서 공부 할 것이다.>

◉ 다윗이란 이름은
물매 돌 5개로 골리앗 장군을 무찌른 소년(少年)으로, 또한
사울왕의 계승자(繼承者)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으로 또한
왕이 되어 부하인 "우리아"장군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姦淫)과 우리아를 (간접)살해(殺害)한 살인자였던 다윗
7년 반 동안 유다지파를 통치(統治)하고, 삼십 삼년 동안 모든 히브리 지파를 통치한 다윗으로 들 기억 하지만

그러나 다윗은 (사무엘 상22장 참조)
사울왕의 전 생애(生涯)를 통하여 다윗에게 목숨인 생명을 줄기차게 위협하며 그를 괴롭혔다.
그런 다윗이 시편27편의 주인공으로 자신의 목숨을 해(害)하려하는 사울왕의 정규군(正規軍)에게 쫓기며 기약(期約) 없는 생명을 이어가기위해 순간순간을 말초적(末梢的)인 불안(不安)에 에워싸여 살아야 했다.
그러한 다윗이 인간 공포증(恐怖症)에서 벗어나고 불안(不安)의 강박감에서 해방된 불퇴전(不退轉)의 노래인 강장시(强壯詩)가 바로 시편27편이다. 그는 시편 56:13절과 시편80:19절 등에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간증하고 있으며, 그리고 흑암(黑暗)중에도 결코 실족(失足)지 않는다는 간증(干證)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빛을 바라보며 살아온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라고 장담(壯談)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가 사람에게 쫒길 때 쉽사리 몸을 피(避)할 수 있는 견고(堅固)한 "마오즈(maoz) 곧 "내 생명의 요새(要塞)"이었으므로 겁날 것이 없었다고 토설(吐說)하고 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명령과 계명을 빛으로 말씀하고 있다.
(시편 119:105, 시편 27:1, 시편 43:3, 시편 56:13, 시편 80:3등등)

◉ 하나님을 빛으로 확실히 받은(믿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인 줄을 안는 사람은
자신이 사는 땅과 처지(處地)에서 쫓겨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핍박(逼迫)받는 것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의 거장(巨匠)인 욥을 보자.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사단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욥 1:21-22; 2:7-10 참조).
엘리야처럼 쫓겨나고, 예레미아 처럼 웅덩이에 던져 넣음을 받아도, 사자 굴에 내 던짐을 받은 다니엘도, 극렬(極烈)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 지움을 받은 다니엘의 세 명의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들도,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도, 죽을 매질을 당한 사도 바울도, 목 베 임을 당한 침례요한도, 그들 모두는 빛 되시는 분 하나님을 보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고난(苦難)과 고통(苦痛)과 핍박(逼迫)과 순교(殉敎)를 당해도 비겁하게 굴(屈)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빛은 생명이다.

◉ 빛 (Light)
성경(聖經)에서 말씀하고 있는 빛은 ?
○ 어둠 퇴치(退治). = (창 1:3-5)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創造)사역은 빛을 창조(創造)하신 일과 빛과 어두음을 분리(分離)하신 일이었다.

○ 치료(治療). =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治療)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 58:8)
"내 이름을 경외(敬畏)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治療)하는 광선(光線)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 생명(生命). = 빛은 생명(生命) 그 자체(自體)로 묘사(描寫)되었다.
(예(例) 욥 3:9, 16, 20; 18:5-6, 18; 시 49:19; 56:13; 참조 잠 13:9)
○ 진리(眞理). = 빛은 의(義)와 진리(眞理)로 표현(表現)되었으며(사 42:6; 눅 11:33-36),
○ 인도(引導). = 인도하는 인도자(引導者)로 표현(表現)되었으며(사 42:6; 눅 11:33-36),
○ 선(善). = 또한 인생의 선(善)한 것, 곧 형통(亨通), 평안(平安), 구원(救援), 복(福) 등이 빛으로 묘사(描寫)되었다. ( 이와 반대(反對)로 어두움은 불행(不幸)으로 묘사(描寫)되었음,)
(예(例) 에 8:16; 욥 30:26; 시 112:4; 사 9:2; 애 3:2; 암 5:18, 20' 참조 욥 22:18, 28; 사 30:26)
○ 창조(創造) =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낮과 밤의 분리(分離)를 유지(維持)시키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창조(創造)를 보존(保存)시키셨다. (시 104:19; 148:3-6; 렘 31:35-36; 33:25)
밤과 낮을 구별(區別)한 하늘의 천체(天體)들. (창 1:14-18; 참조 사 60:19)은 후(後)에 이방인(異邦人)들뿐만 아니라, 불행(不幸)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숭배(崇拜)의 대상이 되었다. (신 4:19; 왕하 21:3, 5; 렘 19:13)
○ 임재(臨在)의 상징(象徵) = 하나님의 임재(臨在)와 축복(祝福)에 대한 본질적(本質的)인 상징(象徵)으로,
또한 빛은 매우 넓은 영역(領域)에서 비유(譬喩)의 매체(媒體)로 사용(使用)되었다. (例) 시:44:3)
○ 말씀에 대한 상징(象徵) =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象徵)으로도 사용되었다. (욥 24:13; 시43:3; 119:105; 잠 6:23; 사 2:5; 요 5:35; 벧후 1:19)
○ 사랑 과 기쁨 = 또한 얼굴에 나타나는 사랑과 기쁨(욥 29:24; 시 4:6; 89:15; 잠 26:15)
○ 명철(明哲)과 지혜(智慧)로 (단 5:11, 14)
○ 의(義)와 공의(公義)로 = (시 37:6; 참조 렘 31:35-36)로도 묘사(描寫)되었다.
○ 하나님은 빛이시며, (시 27:1; 미 7:8) "이스라엘의 빛"이시고 (사 10:17)
○ 감춰진 것들을 드러나게 하실 때 빛을 사용하셨다.
(시 90:8; 139:11-12; 눅 12:3; 참조 단 2:22; 고전 4:5)
○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한 특징인 빛의 지속적인 출현은 아마도 빛의 장엄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例) 시 104:2; 합 3:4; 마 17:2) 그러나 하나님의 현현(顯現)하심을 단순히 "번개 빛"이라고 표현(表現)한 경우도 있다. (욥 36:30, 30, 32; 37:15; 참조, 합 3:11)
○ 하나님의 임재(臨在)와 관련된 빛은 종말(終末)의 날에 나타날 특별(特別)한 증거(證據)로 언급되었다.
(사 60:19-20; 계 21:23; 22:5; 참조, 슥 14:7).
그러나 다가올 종말(終末)과 최후 심판(審判)을 예고(豫告)하는 다른 본문(本文)에서는 종말(終末)에 해와 달이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언(豫言)하였다. (사 13:10; 겔 32:7; 욜 2:10, 31; 3:15; 마 24:29; 계 6:12-14).

○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到來)한 새 시대(時代)ㅊㅌ의 징표(徵表)가운데 하나는 빛의 출현(出現)이다.
이러한 사상(思想)은 특별(特別)히 요한복음에 강조(强調)되어있다.
○ 예수님께서 "참 빛" (요 1:9)이시며
○ "세상의 빛" (요 8:12; 9:5; 12:46: 참조 요일 1:5-7)이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聖徒)들 역시 "빛의 아들들"
(요 12:36; 눅16:8; 살전 5:5; 참조, 엡 5:8, "빛의 자녀")이다.

그 밖에도 빛은 ○ 희망(希望).으로 ○ 긍정(肯定).으로 ○ 힘(에너지: Solar).으로 ○ 성장(成長).으로 등등 생각할 수가 있다.

◉ 요한일서 1:5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한 요한이 말하고자 한 요점(要點)은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世上)에 오셨으며,
어두움에 거(居)하는 자들에게 생명(生命)의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참조, 시 27:1, 36:9, 마 4:16, 요 3:19, 8:12, 12:46, 딤전 6:16)

◉. 요한은 왜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덧붙인 이유는
빛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이며, 그분을 구원(救援)의 주님으로 나타낸다.
빛은 또한 진리(眞理)와 계시(啓示)의 개념(槪念)을 상징(象徵)한다.
그리고 특히 앞뒤 문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의 의와 거룩함과 완전(完全)을 드러내준다.(참조 요일 2:9)

◉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두움과 구별(區別)된 분이시다.
그러나 죄로 기우는 성향(性向)을 지닌 타락(墮落)한 인간은 어두움에 속해 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큰 차이(差異)가 있다.

◉ <빛이신 예수님을 닮아감 >
“예수님께서는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 그분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며, 어두움에서 나와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거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애쓸수록 사단의 더욱 집요한 추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을 떼어 내고자 애쓰는 간교한 원수의 노력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6)

월(月) (7월 13일)
<죄(罪)의 문제(問題) (요일 1:6, 8, 10) >

◉ 1. 투명한 유리컵에 빨간색의 물감으로 작업을 하고, 빨간 물감이 많이 뭍은 상태에서 물을 쏟고 밖에서 얼핏 보면 컵이 깨끗한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빈 컵을 속안이 마르도록 방치(放置)해 두었다가 얼마 후에 깨끗한 물을 부으면 아마도 딱지가 붙어있는 빨간색의 물감이 깨끗한 컵속에서 빨갓케 우러나올 것입니다.
분명히 말고 깨끗한 물을 부어도 컵안에 물은 빨간색을 물들을 것입니다.
죄도 이와 마찬 가지 라고 생각 합니다.
인간 속에 잠재(潛在)하여있는 죄의 빨간색들이 물만 부으면(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빨갓케 우러나오는 것처럼, 인간 마음 바닥에서 새록새록 언제든지 살아날 것입니다.
탐심(貪心)과 이기심(利己心), 교만심(驕慢心) 자아만족(自我滿足), 이생의 자랑, 안목(眼目)의 정욕(情慾), 원죄(原罪)등등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컵을 깨끗이 닦으려면 "세제(洗劑)"와 "물"이 필요하듯이 "예수님의 보혈(寶血)"과 구속(救贖)의 경륜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2. 캄캄한 어두움이 아무리 캄캄할지라도 작은 빛만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간다.
이 말을 어느 분은 빛이 어두움을 흡수(吸收)한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빛이 있는 한 어두움을 결코, 아니 절대로 빛 앞에 나타 날수가 없듯이,
빛 되시는 예수님 앞에는 어두움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처럼,
빛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 삶에 빛으로 밝히 켜놓을 때에는 결코 어두움이 우리를 엄습(掩襲)하지 못한다는
교훈(敎訓)을 성경에서 믿음의 부조(父祖)들로부터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아무리 어두운 현실과(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고난의 풀무 불과, 요셉의 경우처럼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무고(誣告)로 감옥(監獄)에 들어가 있는 역경(逆境)이 있을지라도) 극(劇)한 상황(狀況)일지라도 빛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므로 역전(逆轉)의 보상(報償)이 따랐다는 사실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그날의 소망으로 조금도 두렵거나 억울함으로 실의(失意)에 빠져 신앙(信仰)에 손해(損害)를 보지 않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로(慰勞)합니다.
(시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靈魂)을 음부의 권세(權勢)에서 건지리이까.(셀라)"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 이다."
(잠 23: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靈魂)을 음부에서 구원(救援)하리라"

◉ 죄(罪)(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 = "과녁을 명중(命中)시키는 데에 실패(失敗)", "잘못된 행위(行爲)"
"죄(罪)"(하마르타노(hamartano) = "과녁을 놓치다", '잘못하다", "잘못을 행(行)하다", "잘못된 길로 가다", "죄를 짓다"에서 유래(由來)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고 도덕법을 범하는 행위(行爲)를 언급(言及)하는 단어(單語)이다. 특별히 하마르티아(hamartia)는 거룩하게 주어진 도덕법(道德法)에 대한 위반(違反)이다.
이 단어는 또한 사람이 죄를 범(犯)하게 하는 원칙(原則)이나 힘을 언급(言及)할 수 있으나,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분명히 악(惡)한 행위 그 자체를 언급하고 있다.
헬라어는 문자적(文字的)으로 "그 죄(罪)"이다.
그러나 요한이 어떤 특별한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으며 문맥도 "그 죄"가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관사를 사용한 점은 저자가 모든 형태의 죄를 하나의 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를 야기하는 죄로(사 59:2 참조)로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모든 죄는 불법(不法)이고, 모든 불법(不法)은 죄(罪)이다.
요한은 죄가 법(法), 즉 하나님의 율법(律法)에 대한 무시(無視)라고 진술(陳述)한다.
법(法)의 정의(定義)는 잠언 3:1과 마태복음 5:17절과 로마서2:12; 3:19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지도(指導)하고, 그들이 생애를 충만(充滿)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며,
그들은 악(惡)에서 구원(救援)하고, 선(善)하게 보존(保存)하기위해 법을 공포(公布)하였다(출 20:1 참조)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稟性)의 사본(寫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의 아버지의 품성(稟性)을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상세히 설명되고 실물(實物)로 보여 진 율법(律法)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調和)되게 정리(整理)하기를 원(願)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생애를 모방(模倣)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 또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要約)할 수 있다.
인간의 품성(稟性)을 하나님의 형상(形象)을 따라 변모(變貌)시키는 것이 구원(救援)의 계획의 주요한 목적(目的)이다. 율법(律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품성(稟性)을 드러내며,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모든 덕목(德目)의 성취(成就)를 가능(可能)하게 하는 은혜(恩惠)를 제공(提供)한다.

◉ 하나님 안에는 어두움이 없으며, 하나도 없다. 즉
이중부정(二重否定)(제임스 역(譯)에는 'in him is no darkness at all"로 되어있다.)
즉 하나님의 본성에는 어떤 어두움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도 단호히 부인(否認)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와 같은 단정적인 진술을 한 다음 그 반대 개념을 부정함으로 그것을 더 강화하는 것이 요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요일 1:6, 8절 ; 요일 2:4; 요 1:3, 20; 10:28)
요한의 단호한 선언의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영지주의 이론은 "선(善)"과 "악(惡)"은 서로 필요한 상대역(相對役)이였으며, 그 둘 다 동일한 신적(神的) 근원(根源), 즉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어두움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고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빛"이시라면,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고 사도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반듯이 거절(拒絶)해야만 하였다.

바울의 서신(書信)에서
죄(罪)가 의(義)의 대조(對照)이고, (롬6:18-18)
"육신(肉身)"이 "영(靈)"의 대조(對照)이듯이 (롬 8;1)
요한의 글에서
"어두움" "스코토스(skotos)" 또는 "스코티아(skotia)"은 "빛"의 대조(對照)이다.

◉ 어두운, (헬라어 : "스코토스"(skotos).
어두움을 더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몇몇 하등 생물(生物)외 에는 어두움에서 번성(蕃盛)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패(腐敗)는 생명을 주는 빛이 없을 때 급속(急速)히 진행(進行)된다.
어두움에 익숙해진 눈은 빛에 반응(反應)하는 능력(能力)을 상실(喪失)한다.
이와 같이 영혼(靈魂)에 있어서 조차도, 죄악(罪惡)의 어두움은 영적(靈的)성장을 저하시키며,
계속적인 죄는 영적(靈的)인 시각(視覺)을 파괴(破壞)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더 효과적으로 죄를 짓기 위해 어두움을 추구(追求)한다.
(요 3:19-20)

◉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분과 사귐이 있는 모든 자들은 또한 빛 가운데 다닐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와의 교제(交際)를 주장하면서 어두움에 다니는 자들은 누구나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빛을 알고 있음을 입증(立證)하지만 어두움이 그들을 두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무지(無知)로 인해 빛에서 떨어져있거나 고의(故意)로 그들 자신을 빛에서 차단시키고 있음을 드러낸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행동할 때 진리를 행하지도 않는다.
죄는 처음에는 마음속의 생각으로 표현(表現)되나,
생각(生角)은 대개 행동으로 옮긴다.
매일의 삶의 행동가운데 교회 출석으로 신앙을 고백하기를 부인(否認)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분리(分離)가 명백해진다.
종교(宗敎)가 일상(日常)의 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삶에서 배척(排斥)되고 어두움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에게서부터 발(發)하는 빛으로 끊임없이 둘러싸여 계신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이 발산(發散)하는 빛의 광선(光線)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여행자(旅行者)가 어둡고 알지 못하는 길에서 안내자(案內者)의 불빛을 따르는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생애의 길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을 따를 것이다. (고후 4:6; 엡 5:8; 참조; 잠4:18)

▶. 요한은 요한일서 1장6, 8, 10절에서 어떤 거짓말들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그것들 사이에 공통점은 6절에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고, 8절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속였으며, 10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다. 요한은 인류가 처한 죄 문제의 실체와 그 심각성을 분명히 이해(理解)하고 있었다.

▶. 10절에 나오는 요한의 선언(宣言)의 중요한 이유와, "우리가 범죄(犯罪)하지 아니하였다"는 말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犯罪)하였으므로 구주(救主)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범죄(犯罪)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 요한은 인간이 처해 있는 죄 문제의 심각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강한 어조로 질책하였다.

◉ <"죄(罪)는 불법(不法)이라" >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있을 수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의의 표준은 아주 광범위한 것이요,
모든 악한 것들을 금하는 것이다. …
단 한 계명을 범했거나 가장 작은 세목 하나를 범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 측 입장에서는 그 죄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될 것이다.”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51)

화(火) (7월 14일)
<죄(罪) 문제(問題)에 대한 반응(反應)들(요일 1:7, 9, 2:2) >

◉ 성경(聖經)에서 죄(罪)를 한센병(나병(癩病))으로 인용(引用)하고 있다.
한센병(나병(癩病))의 특징(特徵)은 몸이 썩어 들어가도 통증(痛症)을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한센병(나병(癩病))으로 비유(譬喩)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비유(譬喩)이다.
한센병(나병(癩病))역시(亦是) 전염성(傳染性)으로(현대(現代)는 치유(治癒)됨) 죄 또한 전염성(傳染性)이 있다.
그러므로 부정(不淨)의 대상으로 성소(聖所)에 나갈 수 없었듯이,
성소봉사(聖所奉仕)에서도 제사장(祭司長)일지라도 죄를 그대로 숨기고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성도(聖徒)란 속(俗)된 것과 거룩함을 구별(區別)하는 사람을 성도(聖徒)라 한다.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 정말 성도(聖徒)라 자부(自負) 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나 될까?
그러므로 좋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속죄(贖罪)제물(祭物)로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그분이 나의 구주(救主)이심을 고백하고 믿으며, 영접(迎接)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解決)하실 분이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신앙(信仰)합시다.

☞ "다른 이로서는 구원(救援)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天下)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罪)에서 구원(救援)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救援)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요한은 요한의 서신에서 분명히 죄의 심각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요한일서 3:4에서 그는 죄를 불법(不法)이라고 했고, 5:17에서는 그릇된 행위 또는 불의(不義)라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또한 진리와 반대이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그 멀어짐의 결과로 영적 죽음에 이른다. 죄가 단수(單數)로 쓰일 때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가리키며, 복수(複數)로 쓰일 때는 죄악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어찌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는 실제적이며 대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 요한일서 1:7, 9에는 죄 문제의 해결(解決)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義)로우사 우리 죄를 사(赦)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 죄인(罪人)은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든지 끝까지 죄를 품고 영원한 죽음을 맛보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 <죄(罪)로부터의 구원(救援)을 간구(懇求)할 때 >
“우리가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체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으나 우리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그의 뜻이다.”(시대의 소망, 266)

수(水) (7월 15일)
<그리스도인들의 목표(目標) (요일 2:1) >

◉ 우리 주변에 흔히들 금(金)의 종류(種類)로 14K, 24K, 99.99%(순금(純金))등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접(接)하고 있을 것이다. 그 들의 14K, 24K, 99.99%(순금(純金))등은 금의 비중(比重)을 표시하는 말로 14K,는 금 성분이 14%이고 그 나머지는 금(金)이 아니라는 뜻이며, 24K, 99.99%(순금(純金))등도 금의 함량을 표시(表示)하는데 이들의 성분을 시험하는 것을 일컬어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말씀이 시금석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따라 생애 할 때 몇%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성도의 함량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설교를 할 때 성경절(聖經節)한구절만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생각과 세상의 온갖 세속적인 이야기만 설교시간에 할애(割愛)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언이 과연 몇%의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더 쉽게 이야기해서 성도(聖徒)님들이 아침에 기상(起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하루를 지냈다면 몇 %의 신앙(信仰)생활을 했다고 간주(看做)할 수 있을까요?
즉 성경 말씀은 하나도 보지 않고 기도만 했다면 필시 하나님께 주십시오, 주십시오, 라는 이기적(利己的)인 기도만 했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30분정도 보고 기도(祈禱)를 한 시간 정도 드렸다면 그래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祈禱)를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울타리와 안내서(내비게이션)와 참고서가 되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인 것이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시금석(試金石)으로 우리의 목표를 삼읍시다.

<예(例)>
시골에서 농부(農夫)인 한 아버지가 아들을 대학교에 보내서 자기처럼 무식(無識)해서 고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직 이 아들만 이 가정에 큰 기대(期待)주로 생각하며 자식(子息)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留學)을 보냈다. 그 아들이 시골에서 서울에 와보니 학교에 나가면 고등학교에서 해보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자유스럽게 음주(飮酒)며 흡연(吸煙)이며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도 하고 정신없이 부모님의 간섭(?)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어영부영 대한고 1학년2학년을 맞게 되었다. 봄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서 아버지의 밭가는 들판의 일터에 나가서 쟁기질을 하는 아버지에게 그 쟁기질을 자신이 한번 해보겠다고 아버지에게 제의를 하니 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듯이 쟁기와 소를 아들에게 맡겼다. 그 아들이 쟁기를 붙잡고 소를 몰고 이랴! 하며 소(牛)에 고삐로 채찍을 하며 몰았다. 그런데 소가 한두 발자국만 내 딛고는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냥 서있기에 그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가 할 때는 소가 앞으로 잘 나가는데 내가 하면 소가 앞으로 가질 않느냐고 질문을 하니까 아버지 말씀이 쟁기를 어느 정도 들어줘야 소가 힘에 맞을 때에 앞으로 간다고 했다, 다시 쟁기를 들고 소를 물으니까 앞으로는 갔는데 밭이랑이 엉뚱한 곳으로 이랑이 났다. 다시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왜 이렇게 나는 아버지처럼 반듯한 골 이랑이 안 되고 삐뚤어진 밭골 이랑이 되었느냐고 여쭈었다. 아버지 말씀이 너는 목표를 보고 가지 않고 땅만 보고 소가 가는대로 쫒아갔기 때문에 그 모양이 됐다고 했다. 아들은 이번에는 목표를 밭 끝에 있는 송아지에게 목표를 두고 소를 몰고 갔는데 가는 도중에 송아지가 어미 소를 보고 오는 바람에 그 목표인 송아지를 따라 간 결과 역시 밭 골 이랑이 삐딱하게 되었다, 다시 아버지에게 여쭈었더니 움직이는 목표인 송아지를 목표로 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듣고 이번에는 밭 끝에 있는 큰 소나무를 목표로 해서 소를 몰고 밭골 이랑을 탄결과 중간에는 다소 반듯하지는 못했으나 끝에는 반듯하게 골 이랑이 되었다. 아들이 그날의 일을 마치고 경험하기를 무식(無識)한 농부인 아버지도 밭이랑 하나를 갈기 위해서도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보고 농사일을 하시는데 자신은 대학교 1학년 2학년까지 앞으로의 목표와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 어영부영 시간만 허비했다는 후회와 반성으로 분명한 목표를 정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송아지와 같은(움직이는 목표물은)이 세상에서의 돈이나, 재물(財物)이나 출세나 명예(名譽)나 감투나, 예쁜 인물 등등을 뜻하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는(소나무와 같은) 목표는 변함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하는 것을 뜻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정하여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요한은 그 서신의 수신인들에게 완벽하게 무죄한 삶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어떤 죄든지 용납하지 말고 죄를 멀리하라고 호소하였다.
▶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족하였을 때 좌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일어나야 한다.

◉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든지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의(義)를 힘입어 >
“신자 앞에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가능성 즉 율법의 모든 원칙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사람은 스스로는 전혀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전에 가져야 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선언된 성결은 그가 진리의 성령의 훈련과 제어하시는 감화에 복종할 때에 일어나는 거룩한 은혜의 역사의 결과이다. 사람의 순종은 모든 순종의 행위를 하나님의 향기로 채우는 그리스도의 의의 향(香) 에 의하여서만 완전하게 될 수 있다.”(사도행적, 531)

목요일(7월 16일)
<그리스도인들의 위안(慰安) (요일 2:1~2) >

◉ 힘들고 어렵고 참기 힘들 때에도 우리는 성경에서와, 영감의 글인 "예언의 신"의 서적을 통해서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용사들을 보면서, 또한 실제로 믿음으로 우리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의 경험들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구원자(救援者) 되시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소망(所望)으로 모든 것이 지금의 고난(苦難)이나 환란(患亂)이나 역경(逆境)들이 문제가 아니며 능히 넉넉히 보장되어있음을 인하여 위로(慰勞)와 위안(慰安)으로 믿고 감사하며 신앙(信仰)합시다.

◉ 요한일서 2:1~2에는 회개한 죄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놀라운 진술이 담겨 있다.
죄의 그 무서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있다.
요한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죄의 용서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함을 말한다.

(첫째)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代言者)이시며, 우리의 중보자(中保者)이시다.
이 대언자는 의로우신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일서 1:9에서 의로움은 성부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고,
2:1에서는 성자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의로우신 속성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당신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화목 또는 속죄를 가져 오셨으므로 우리의 용서는 보장되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죄의 형벌을 갚으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갚아 주셨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화목제물과 중보자로 묘사한다.
신약의 증언에 따르면, 그분은 우리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요한일서 2장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이토스(parakletos)는 보혜사, 위로자, 조력자, 중보자, 대언자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참조 요 14:16, 26, 15:26, 16:7, 요일 2:1).
누군가의 곁에서 그 사람을 돕도록 부르심을 받은 파라클레이토스가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가리키고 요한일서(2:1)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한다.
예수님을 가리켜 중보자, 혹은 우리 죄의 용서를 제공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큰 위안을 얻을 때에 주의할 점이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인색하고 가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시다(요 3:16). 또한 몇 절 앞에서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었다(요일 1:9).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과 참조)

◉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대언자(代言者)와 중보자(中保者)이시다.
또한 성부(聖父)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구원(救援)을 갈망하시는 분이시다.

◉ <우리의 유일(唯一)한 대언자(代言者) 그리스도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로서 중보하실 때에 그리스도는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중보가 필요치 않으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죄의 담당자시요,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다. 기도와 고백은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그분에게만 드려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셨다. 그분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다. 그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中保)하신다. 이것은 로마교의 거짓 교리 중 하나인 미사를 아무 소용이 없게 한다.”(재림교 성경주석, 7권, 912)

◉ <하나님께 은혜를 얻는 조건은 단순하고 합리적이다. >
“주께서는 용서를 받기 위하여 어떤 괴로운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하늘의 하나님께 의탁하고 우리의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길고 지루한 순례를 하거나 고통스러운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리스도께서 하늘 법정에서 당신의 교회 곧 당신께서 보혈로 속전을 지불하신 이들을 위하여 탄원하고 계신다. 여러 세기나 시대가 흐를지라도 그분의 속죄 희생의 효력은 감소될 수 없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높음이나 깊음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매우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매우 단단히 붙잡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모든 약속의 배후에 계신 분에게 의존되어 있다.”(사도행적, 55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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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죄인(罪人)은 그리스도가 필요(必要)함>
“사람은 본래 고상한 능력과 공정한 마음이 품부(稟賦)되었다. 그의 본성은 완전하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융화되었다. 그의 사상은 순결하였고 그의 목적은 신성하였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은 악용되어 사랑의 자리는 이기심으로 점령한바 되었다. 그의 천성은 범죄로 말미암아 너무 약하여졌으므로 그 자신의 힘으로는 악의 세력을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가 되었으니 만약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영원히 그대로 사로잡힌 자가 되었을 것이다. 인류 창조의 하나님의 계획을 실패케 하고 이 세상을 재화(災禍)와 황폐로 충만케 하려는 것이 유혹자 곧 사단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재화가 하나님의 인류를 창조하신 사업의 결과로 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이 죄 없는 상태에 있을 때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골 2:3) 있는 자와 더불어 즐거이 교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로는 신성한 것을 즐기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게 되었다. 지금도 중생하지 아니한 자의 마음은 역시 그러하다. 그 마음이 하나님과 융화되지 못하매 따라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없고 거룩한 자들과 같이 사귀기를 거릴 것이 비록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는 거기서 아무 기쁨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기심 없는 사랑이 지배하는 거기에서, 각자의 마음이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거기에서, 죄인의 심금(心琴)에는 아무런 공명(共鳴)도 없을 것이다. 죄인의 사상과 취미와 동기도 거기 사는 무죄한 자들을 고무(鼓舞)시키는 사랑과 취미와 동기와는 배치(背馳)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멜로디”에는 거친 음조가 될 것이다. 그에게는 천국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빛이 되시고 하늘의 기쁨의 중심이 되시는 자에게서 피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즉 악인이 하늘에서 제외(除外)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제적 명령으로가 아니다. 저희 자신이 하늘의 교제에 부적당하기 때문에 제외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소멸시키는 불이 될 것이다. 저들은 저희를 구속(救贖)하기 위하여 죽으신 자의 얼굴을 피하기 위하여 차라리 멸망을 자취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 3:3) 즉 사람이 새 마음과 욕망과 새 목적과 새 동기를 받아 그것들로 새 생애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요 3:3)다고 하셨다. 본성적으로 사람에게 잠재(潛在)하고 있는 선을 계발시키기만 하면 족하다는 관념은 치명적(致命的) 오해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7). 또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하나님이 자애를 깨닫고 그의 품성의 인자하심과 자부적(慈父的) 온정을 깨달아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하나님의 율법의 지혜로움과 공의로움을 깨닫고 그 율법이 사랑의 영원한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사도 바울도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부르짖기를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6).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하였다.”(정로, 17-19)

◉ <회개(悔改)>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調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회개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악행이 저희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저희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서는 회개가 아니다. 저들은 죄 그것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함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이다.
발람은 칼을 빼어들고 자기의 가는 길에 선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자기 죄를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변하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주를 판 후에 부르짖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고 하였다.”(정로, 23-24) <참조 : (시 32:1, 2).(시 51:1-14).>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저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회개는 저희 죄의 사유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정로, 25-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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