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기 제1과 요한서신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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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하 작성일09-06-25 08:31 조회3,909회 댓글0건본문
제1과 요한 서신의 배경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요일 4:14-
이단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한 세대를 지나지 않아 교회에 이단에 생겼다. ‘이단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나님 또는 예수에 대해 누구든지 틀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잘못 가르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가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할 때 자기의 생각을 고친다면 그것은 이단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고 그의 생각을 퍼뜨리면서 파당을 짓는다거나 분당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이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 각자는 ‘이단자’요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단의 괴수’다.
이단 판별의 근거는 성경이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가 각자 다르므로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교회나 총회가 이를 신중히 연구하여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용어지만 니케아종교회의는 단일신론과 삼신론으로부터 하나님 사상을 보호하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어 기독교의 신조로 공표했다. 이단을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교회가 가장 크게 경계한 이단은 영지주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힐 이단이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뿐 아니라 세상역사 전반에 걸쳐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하나님 세계에 악영항을 미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뉴 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예수를 직접 본 모든 증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후 교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원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등 교부들이 교회를 지키던 때에, 발렌티우스에 의해 영지주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하고 비밀한 지식’(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적 사상은 이미 요한이 살아 있을 때 그 싹이 보였다. 실은 태초에 사단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인간을 쓰러뜨리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간에게 있는 영적 요소는 겸손히 하나님을 알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교만한자들에게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적 능력을 통해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스스로 깨달아 안 지식을 영지(靈智)로 간주했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하지만 영지를 가졌다고 하는 자들에게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해야하는 전리품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 영계에 속한 자들(pneumatic)은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신비한 지식’을 가진 자들로서 이들만이 지존자의 빛에 들어갈 수가 있다. 둘째, 심계(psychic)에 속한 자들은 구원을 얻으려 부단히 노력하므로 멸망당하지는 않지만 지존자의 빛에는 이르지 못한다. 셋째 육계(hylic)에 속한 자들은 사단과 자기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물질의 지배를 받다가 멸망당한다.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헬라, 애굽, 페르샤,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시조는 사단이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 말을 영지주의적으로 서술하면 ‘죽지 않고 구원의 길에 이르는 길은 눈을 밝혀 하나님과 같이 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금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창세 이후 끊임없이 인간 사회에 횡행하다가 홍수 후에 니므롯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이 말을 영지주의적으로 서술하면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 구원을 이루자’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모이고자 한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의 말과 함께 흩어버리셨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사상과 노력은 계속해서 인간을 괴롭혀왔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면서 자신을 학대했다. 드디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직접 가르쳐주셨지만 인간은 또 다시 미로를 헤맸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물질이란 영원히 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에 속한 육신은 항상 금욕과 고행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경건했다는 말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영적인 지식’에 의해 구원을 이룬다고 믿는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극도로 방탕한 행동에 빠졌다.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물질인 육체에 의해 저질어진 범과는 저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외부의 진흙에 의해 더러워질 수 없는 ‘진주들’이라고 주장했다.(『교회사 핸드북』98쪽 「영지주의」참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육체를 가지신 것으로 보여졌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한다. 그들은 신적인 그리스도가 침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결합했다가, 예수가 죽기 전에 그에게서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 견해는 요한일서의 많은 부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견해의 오염으로부터의 보호가 요한서신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적 이론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1:5) 하나님은 생명이시다.(2:2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관념적 구원을 꿈꾸며 영지를 통해 빛에 이르려는 자들에게 ‘빛 가운데 살아라’ ‘형제와 세상을 사랑하라’ ‘빛처럼 사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는 실천적인 말씀은 실로 영지주의자들의 심중을 꿰뚫었다.
요한의 확고한 신관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육신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부모가 했던 말을 거듭거듭 되풀이하듯이 요한은 독자들이 혹여 알아듣지 못할까 염려하여 되풀이하여 말한다. 물론 그 독자는 그로부터 2000년 후, 뉴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현대의 독자를 포함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요일 4:14-
이단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한 세대를 지나지 않아 교회에 이단에 생겼다. ‘이단성’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나님 또는 예수에 대해 누구든지 틀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잘못 가르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가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할 때 자기의 생각을 고친다면 그것은 이단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고 그의 생각을 퍼뜨리면서 파당을 짓는다거나 분당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이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 각자는 ‘이단자’요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단의 괴수’다.
이단 판별의 근거는 성경이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가 각자 다르므로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교회나 총회가 이를 신중히 연구하여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용어지만 니케아종교회의는 단일신론과 삼신론으로부터 하나님 사상을 보호하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어 기독교의 신조로 공표했다. 이단을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교회가 가장 크게 경계한 이단은 영지주의다. 하지만 이것은 창세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힐 이단이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뿐 아니라 세상역사 전반에 걸쳐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하나님 세계에 악영항을 미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뉴 에이지 운동, 종교다원주의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구원의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예수를 직접 본 모든 증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후 교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원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등 교부들이 교회를 지키던 때에, 발렌티우스에 의해 영지주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하고 비밀한 지식’(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적 사상은 이미 요한이 살아 있을 때 그 싹이 보였다. 실은 태초에 사단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인간을 쓰러뜨리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간에게 있는 영적 요소는 겸손히 하나님을 알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교만한자들에게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적 능력을 통해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고 스스로 깨달아 안 지식을 영지(靈智)로 간주했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하지만 영지를 가졌다고 하는 자들에게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해야하는 전리품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 영계에 속한 자들(pneumatic)은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신비한 지식’을 가진 자들로서 이들만이 지존자의 빛에 들어갈 수가 있다. 둘째, 심계(psychic)에 속한 자들은 구원을 얻으려 부단히 노력하므로 멸망당하지는 않지만 지존자의 빛에는 이르지 못한다. 셋째 육계(hylic)에 속한 자들은 사단과 자기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물질의 지배를 받다가 멸망당한다.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헬라, 애굽, 페르샤,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 시조는 사단이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 말을 영지주의적으로 서술하면 ‘죽지 않고 구원의 길에 이르는 길은 눈을 밝혀 하나님과 같이 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금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창세 이후 끊임없이 인간 사회에 횡행하다가 홍수 후에 니므롯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이 말을 영지주의적으로 서술하면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 구원을 이루자’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모이고자 한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의 말과 함께 흩어버리셨다.
인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사상과 노력은 계속해서 인간을 괴롭혀왔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면서 자신을 학대했다. 드디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직접 가르쳐주셨지만 인간은 또 다시 미로를 헤맸다.
영지주의의 특징은 ‘물질이란 영원히 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에 속한 육신은 항상 금욕과 고행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경건했다는 말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영적인 지식’에 의해 구원을 이룬다고 믿는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극도로 방탕한 행동에 빠졌다.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물질인 육체에 의해 저질어진 범과는 저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외부의 진흙에 의해 더러워질 수 없는 ‘진주들’이라고 주장했다.(『교회사 핸드북』98쪽 「영지주의」참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육체를 가지신 것으로 보여졌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한다. 그들은 신적인 그리스도가 침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결합했다가, 예수가 죽기 전에 그에게서 떠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 견해는 요한일서의 많은 부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견해의 오염으로부터의 보호가 요한서신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적 이론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1:5) 하나님은 생명이시다.(2:2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관념적 구원을 꿈꾸며 영지를 통해 빛에 이르려는 자들에게 ‘빛 가운데 살아라’ ‘형제와 세상을 사랑하라’ ‘빛처럼 사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는 실천적인 말씀은 실로 영지주의자들의 심중을 꿰뚫었다.
요한의 확고한 신관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육신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부모가 했던 말을 거듭거듭 되풀이하듯이 요한은 독자들이 혹여 알아듣지 못할까 염려하여 되풀이하여 말한다. 물론 그 독자는 그로부터 2000년 후, 뉴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현대의 독자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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