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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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09-04-23 17:53 조회6,303회 댓글0건본문
제5과 계시
5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3분)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연구범위: 출 7:1-6, 시 19:1-4, 롬 1:18-20, 딤후 3:14-16, 히 1:1-3.
중심 사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식일 오후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분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로, 피조물들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과 결속을 굳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의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담이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분께서는 곧바로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때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류에게 말씀해 오셨다(히 1:1).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2:17). 이번 주에 우리는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핵심본문: 히 1:1-2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는 모든 자에게 말씀하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을 인식한다.
행하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 성령의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된다.
교과 개요
I.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삼상 3:1-10)
A.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대답하기까지 네 번이나 부르셨다. 이 사실은 우리와 교통하기 원하시는 그분의 열망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II. 사람은 들음(히 1:1-3)
A.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천연계와, 예언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지식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그분의 사랑을 인하여 그분의 영광을 본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B. 흔히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성경이 현대인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책이 되게 할 수 있는가?
III.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함(요 5:36-40)
A.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요 14:6).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연구하고 예언을 잘 깨닫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이번 한 주간 동안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가?
B.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가?
요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여러 방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특히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힘 있게 말씀하신다.
일요일(4월 26일)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시 19:1-4)
1. 시편 19:1-4과 로마서 1:18-20은 하나님께서 천연계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 가지 좋은 예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말로 정리해 보십시오.
시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롬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답: 천연계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천연계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은총을 맛볼 것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흥미를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 주위에 천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 놓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천연계의 영광을 그분의 품성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우리가 신실히 천연계의 책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을 명상하는 데 있어 풍성한 근원이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144)
성경을 믿는 자들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숲속의 수려한 나무들과, 눈 덮인 산 위로 아름답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볼 때 창조주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한 떨기의 들꽃, 또는 인체의 정교한 구조를 볼 때 경탄을 금치 못하며, 천연계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는데, 비신자들도 천연계를 바라봄으로 그 모든 것을 설계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면에서 자신들의 눈을 감아버린다. 그들은 진화론에 세뇌(洗腦)되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지적인 설계자가 계신 증거를 인정하고 있다.
2. 다음의 단순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아름답고 정교한 생명체에 대한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어느 것입니까?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주장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견해입니까?" 자신의 답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답: 당연히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우연히 되었다는 것은 추측이지 증명된 것이 아니다. 지적인 존재가 창조했다는 것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다. 현세에서 행해지는 것들 중에 우연히 되는 것이 없다.
천연계를 통한 계시와 그 한계
“하늘에서, 땅에서, 넓은 대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본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그러나 별들이나 대양이나 폭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품성을 배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개성과 품성을 다 같이 묘사하기 위하여 천연계보다 더욱 분명한 계시가 필요함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나타내셨다.”(치료봉사, 419)
<부가설명> 무신론자이며 웅변가인 잉그솔이 존경하는 목사님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부룩스 목사라고 생각된다). 자기가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그 목사님의 일상생애에서 나타나는 고결한 인품을 인하여 항상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어떻게든 잉거솔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그가 워낙 강경한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잉거솔을 초청하였는데 거실의 가구를 모두 새것을 바꾸어놓은 후였다. 잉거솔은 거실에 들어서면서 그것을 당장 알아보고 말했다.
“목사님, 가구들을 모두 바꾸셨군요. 참 좋은데요. 얼마나 들였습이까?”
“무슨 말씀을 합니까?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렇게 새 사구가 와서 정돈 되어 있던데요.”
“원, 목사님도 농담을 하십니까.”
“농담이라니요. 선생이 항상 나에게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잉거솔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숨 쉬고 먹과 마신다. 왜 그렇게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와 삶의 능력이 자기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사람은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을 공급하신 제일 원인이 바로 창조주이시다. 그렇게 숨 쉬고 먹고 마시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으로도 우연히 생겼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천연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비록 죄로 인해 손상되었을지라도 천연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크게 말해 준다.
월요일(4월 27일) 우리의 양심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창 42:18-23)
'양심'이란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내적인 원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거절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롬 2:14-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한 율법의 시여자이시며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을 두신 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인 문제에 관하여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이 도구도 죄로 인하여 무디어지고 말았다. 구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지만, 신약에는 아주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개념은 나타나 있다.
1. 사람들이 양심의 영향을 받아 행동한 이야기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참조 창 42:18-23, 단 5장, 마 27:3-5, 요 8:1-9)
창42:18-23 삼 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단5:1 이하 벨사살 왕이 잔치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기명으로 먹고 마시면서 우상을 찬양할 때에 벽에 글씨를 쓰는 손을 보고 무릎이 떨리는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마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요8:1-9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답: 요셉의 형제들은 아우 요셉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하여 양심에 찔림을 받았고,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거룩한 기명으로 술잔치를 벌이다가 분벽에 쓰인 글자를 보고 양심에 자극을 받았다. 가룟 유다는 무죄하신 예수님을 판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하였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땅에 쓰실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곳을 떠나갔다.
우리의 양심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양심은 깨끗하나, 그것이 나를 결백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니라”(고전 4:4, NIV). 사도는 또한 우리가 양심의 호소를 거절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상 그 양심이 화인(火印) 맞거나(딤전 4:2), 더럽혀진(딛 1:15) 자들도 있다.
한편,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로써 그분과 자주 교통함으로 그분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우리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보다 민감하게 될 것이다.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인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29)
<부가설명> 양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심리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학자는 마음에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했다. 좋은 말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양심이 더러워지고 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양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순에이데시스”인데 “공통된 지각”을 뜻하는 말이다. 또는 “공통으로 본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지각하는 것이나 본 것이라면 무엇일까? 시편은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시33:15)고 계시한다. 인류의 마음은 공통적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이미 창조되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통으로 보았으며 지각하였다. 창조주께서는 그 마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감찰하신다. 양심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지각하고 있는 본능적인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의 사상과 행위에 이 공통으로 보고 지각한 하나님의 형상에 맞지 않을 때 두려워하고 놀라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 곧 예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그 예수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바뀐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통로는 우리의 양심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써 둔감해진 양심을 예민하게 간직할 수 있다.
화요일(4월 28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출 7:1-6)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에 관해 매우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지자가 주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이며, 성경을 기록하고 자기 이름으로 표제를 붙인 사람들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훨씬 더 광범위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일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1.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의 관계는 선지자라는 용어의 핵심적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출 7:1-6)
출7: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답: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으로서 모세가 준 말을 전달하였다. 선지자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달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7:1-6에 선지자의 역할이 나온다. 위대한 선지자로 언급된 모세(신 34:10-12)는 그의 대언자 역할을 한 형의 도움을 받았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았고, 아론도 선지자로서 바로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했다는 것이다."(존 딥달, 풍성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출애굽기, 퍼시픽 프레스, 1994년, 80)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 말에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표현할 단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교통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 아모스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2. 구약시대 이후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신약의 다음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이름이 언급된 선지자들
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은사의 지속성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4:1-5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3. 거짓 선지자들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4. 남은 교회의 특징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께서 초림하신 이후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으며, 특히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는 대언의 영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역할과 사명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나비(nabi)를 번역한 것이다. 그 의미는 출애굽기 7:1-2에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나비)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게 하라. 바로와 모세와의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아론이 모세의 말을 바로에게 전달했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임명하신 대변자를 가리킨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06-307)
<부가설명> 선지자라고 번역된 말은 대언자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원어의 뜻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대언자는 그가 대언해야 할 분이 주시는 말을 그대로 대언해야 한다. 그분이 권한을 주지 않으면 준 말에 가감할 권리가 없다. 만일 말을 주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보여주고 그것을 대언하여 설명하라고 하면 그가 보고 깨달은 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도 이와 같다. 대언자가 본 사물이나 사건을 자신의 말로 설명할 때도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과거를 보여주시거나 말하게 하시면 과거를, 현재를 말하게 하시면 현재를, 미래에 대한 것을 주시면 미래를 말해야 한다. 선지자의 말이 다 미래를 말한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선지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사도행전13장1절이나 고전12:28에 보면 선지자는 교회에 주어졌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 교회에 선지자의 은사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특히 1260년 환난의 기간 후에, 또 계10장 예언 사건이 성취된 때에 다시 예언할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시고(계10:11), 바로 그때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 형성되면서 예언할 종을 일으키셨다. 그것이 남은 자손으로서 재림교회에 주신 예언의 신의 은사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기별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도 선지자를 보내셨다.
수요일(4월 29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딤후 3:14-16)
과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내신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약 1,500년간에 걸쳐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들을 편집해 놓은 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이다. 예수님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기록들 밖에 없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복음서와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기록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1.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는 것을 칭찬하면서, 그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구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에 대해 또 무엇을 말해 줍니까?(딤후 3:14-16)
딤후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답: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함. 2)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부분들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깊고 넓은 지식의 샘을 보게 된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한계가 없는 지식의 바다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 연구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마음과 생각은 새로운 힘과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체험은 성경이 하나님의 저작이라는 놀라운 확증을 준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 밥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엘렌 G. 화잇, 오늘의 나의 생애, 26)
과거에 비해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은 성경책들이 팔린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번역본들이 나오고, 초보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번역들도 등장한다. 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더 많이 읽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은 영원한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에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하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
성경을 읽는 자의 태도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성경은 이야기, 설교, 역사로 뒤범벅이 된 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을 받는 이들, 인내와 수많은 기도로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들 속에 깔려 있는 통일성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단조롭고 획일적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를 띤 증언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기 드물게 뛰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29)
<부가설명> 나는 웹사이트 kasda 칼럼에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지 적어놓았다. 창세기 1:1은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지 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물으셨다. 즉 성경의 기록이 중요한 것처럼 그것을 읽는 시각도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 곧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고전2:9-14; 사55:8,9). 창세기 1:1은 성경을 읽되 창조론적, 구원론적 종말론적 시각으로 읽도록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더 확실한 설명을 원하는 분들은 kasda 칼럼 김명호 방에서 “칠십생자비오자”란 글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 법을 따라 읽을 때 정말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제공해 준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연구함으로 영혼의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자.
목요일(4월 30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요 1:1-2)
누군가로부터 정기적으로 편지를 받는다면 그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만약에 사진을 받는다면 그 사람을 새로운 차원에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기까지는 그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우리와도 교통하기를 원하셨으나 죄 때문에 어렵게 되자,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류와 교통하셨다. 마침내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일에는 이런 사실도 포함된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떻게 온전히 나타내셨습니까?(요 1:1-2, 14, 14:9, 히 1:1-3)
요1:1,2,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히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답: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온전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아들(히 1:3)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1의 정확한 어법은 중요하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육신으로 보이셨다거나, 육신으로 나타내셨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 어느 시점에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셔서 육신이 되셨다. 즉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의 인성(육신)을 취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아마도 모든 기독교 교단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조일 것이다.
2.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요 5:36-40)
요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답: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증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성경을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선언하셨다.
어떤 이들은 성경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실제로 탁월한 성경학자들 중에도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님을 알기 위해 애쓰지 않고,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조리법을 읽는 것만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시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한 분, 나사렛 예수를 소개해 준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냄
“말씀 속에는 구주께서 매우 아름답게, 아주 매력적으로 나타나 있다. 모든 영혼들은 성경 가운데서 안위와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와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실 일에 관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병든 자들은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주실 때에 그분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는 생명나무 잎사귀를 주신 것이다. 성경을 읽거나 들어본 그 어떤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하는 세상 것들이나 오락들에서 기쁨을 찾고 하늘의 사물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가 있겠는가?”(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4)
<부가설명> 성경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오라고 지시한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영생이신 예수님께 오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성경 자체에서 영생을 얻는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재림교인들도 그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이 계시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듣고 보고 친히 손으로 만지는 경험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코이노니아(친교)해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다. 그분이 구원과 의이시다. 영생이시다. 사람이 얼굴과 얼굴울 대하여 보듯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여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경험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런 경험으로 우리의 삶이 이끌리기를 기도하자.
교훈: 하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요, 그분과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금요일(5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정로의 계단, 제10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85-91)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더불어 교통하게 하시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천연계는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에 말한다. 열린 마음은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만물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과 영광에 감복(感服)될 것이다. 기울여 듣는 귀는 천연계의 만물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기별을 들을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푸른 들, 울창한 수목, 새싹과 꽃, 흘러가는 구름, 내리는 비, 졸졸 흐르는 시내, 하늘의 광명들은 우리의 마음에 말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지으신 분과 친숙하여지기를 요청하고 있다.”(정로의 계단, 8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천연계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까?
*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천연계에서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2. 교과반에서, 우리의 양심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양심을 따를 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화에서 옳고 그름의 개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양심은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과 교육 등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양심을 따른다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양심으로 인도된 올바른 도덕적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두고 양심만 운위하면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남은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다면 그 은사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까요?
* 역사의 종말에 두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바른 진로를 인도할 것이다. 이 권고를 따를 때 말세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살게 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계시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넓히며 계시의 목적을 생각하고 특히 말씀과 예수님을 주신 계시로 구주 예수님을 요한처럼 만나는 경험에 이르기를 바란다.
요약: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천연계와 양심을 통해 우리와 교통하신다. 그분께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해 교통하셨으며, 오늘날 당신의 교회에도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순례를 위한 거룩한 안내서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특히 그분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5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3분)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연구범위: 출 7:1-6, 시 19:1-4, 롬 1:18-20, 딤후 3:14-16, 히 1:1-3.
중심 사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식일 오후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분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로, 피조물들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과 결속을 굳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의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담이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분께서는 곧바로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때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류에게 말씀해 오셨다(히 1:1).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2:17). 이번 주에 우리는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핵심본문: 히 1:1-2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는 모든 자에게 말씀하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을 인식한다.
행하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 성령의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된다.
교과 개요
I.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삼상 3:1-10)
A.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대답하기까지 네 번이나 부르셨다. 이 사실은 우리와 교통하기 원하시는 그분의 열망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II. 사람은 들음(히 1:1-3)
A.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천연계와, 예언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지식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그분의 사랑을 인하여 그분의 영광을 본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B. 흔히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성경이 현대인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책이 되게 할 수 있는가?
III.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함(요 5:36-40)
A.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요 14:6).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연구하고 예언을 잘 깨닫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이번 한 주간 동안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가?
B.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가?
요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여러 방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특히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힘 있게 말씀하신다.
일요일(4월 26일)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시 19:1-4)
1. 시편 19:1-4과 로마서 1:18-20은 하나님께서 천연계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 가지 좋은 예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말로 정리해 보십시오.
시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롬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답: 천연계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천연계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은총을 맛볼 것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흥미를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 주위에 천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 놓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천연계의 영광을 그분의 품성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우리가 신실히 천연계의 책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을 명상하는 데 있어 풍성한 근원이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144)
성경을 믿는 자들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숲속의 수려한 나무들과, 눈 덮인 산 위로 아름답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볼 때 창조주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한 떨기의 들꽃, 또는 인체의 정교한 구조를 볼 때 경탄을 금치 못하며, 천연계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는데, 비신자들도 천연계를 바라봄으로 그 모든 것을 설계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면에서 자신들의 눈을 감아버린다. 그들은 진화론에 세뇌(洗腦)되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지적인 설계자가 계신 증거를 인정하고 있다.
2. 다음의 단순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아름답고 정교한 생명체에 대한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어느 것입니까?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주장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견해입니까?" 자신의 답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답: 당연히 여호와라 이름 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우연히 되었다는 것은 추측이지 증명된 것이 아니다. 지적인 존재가 창조했다는 것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다. 현세에서 행해지는 것들 중에 우연히 되는 것이 없다.
천연계를 통한 계시와 그 한계
“하늘에서, 땅에서, 넓은 대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솜씨를 본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그러나 별들이나 대양이나 폭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품성을 배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개성과 품성을 다 같이 묘사하기 위하여 천연계보다 더욱 분명한 계시가 필요함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나타내셨다.”(치료봉사, 419)
<부가설명> 무신론자이며 웅변가인 잉그솔이 존경하는 목사님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부룩스 목사라고 생각된다). 자기가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그 목사님의 일상생애에서 나타나는 고결한 인품을 인하여 항상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어떻게든 잉거솔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그가 워낙 강경한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잉거솔을 초청하였는데 거실의 가구를 모두 새것을 바꾸어놓은 후였다. 잉거솔은 거실에 들어서면서 그것을 당장 알아보고 말했다.
“목사님, 가구들을 모두 바꾸셨군요. 참 좋은데요. 얼마나 들였습이까?”
“무슨 말씀을 합니까?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렇게 새 사구가 와서 정돈 되어 있던데요.”
“원, 목사님도 농담을 하십니까.”
“농담이라니요. 선생이 항상 나에게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잉거솔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숨 쉬고 먹과 마신다. 왜 그렇게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와 삶의 능력이 자기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사람은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을 공급하신 제일 원인이 바로 창조주이시다. 그렇게 숨 쉬고 먹고 마시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으로도 우연히 생겼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천연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비록 죄로 인해 손상되었을지라도 천연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크게 말해 준다.
월요일(4월 27일) 우리의 양심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창 42:18-23)
'양심'이란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내적인 원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거절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롬 2:14-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한 율법의 시여자이시며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을 두신 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인 문제에 관하여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이 도구도 죄로 인하여 무디어지고 말았다. 구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지만, 신약에는 아주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개념은 나타나 있다.
1. 사람들이 양심의 영향을 받아 행동한 이야기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참조 창 42:18-23, 단 5장, 마 27:3-5, 요 8:1-9)
창42:18-23 삼 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단5:1 이하 벨사살 왕이 잔치하면서 하나님의 성전 기명으로 먹고 마시면서 우상을 찬양할 때에 벽에 글씨를 쓰는 손을 보고 무릎이 떨리는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마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요8:1-9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답: 요셉의 형제들은 아우 요셉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하여 양심에 찔림을 받았고,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거룩한 기명으로 술잔치를 벌이다가 분벽에 쓰인 글자를 보고 양심에 자극을 받았다. 가룟 유다는 무죄하신 예수님을 판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하였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땅에 쓰실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곳을 떠나갔다.
우리의 양심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양심은 깨끗하나, 그것이 나를 결백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니라”(고전 4:4, NIV). 사도는 또한 우리가 양심의 호소를 거절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상 그 양심이 화인(火印) 맞거나(딤전 4:2), 더럽혀진(딛 1:15) 자들도 있다.
한편,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로써 그분과 자주 교통함으로 그분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우리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보다 민감하게 될 것이다.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
“인간의 양심은 변한다. 어떤 양심들은 '약하'고, 다른 양심들은 '더럽'고 '악하'며 '화인(火印) 맞'았다(고전 8:7, 12; 딛 1:15; 히 10:22; 딤전 4:2). 시계처럼 그것들이 아무리 잘 작동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정확한 표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양심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대한 표준인 그분의 율법에 맞추어져 있는 양심만이 우리를 죄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29)
<부가설명> 양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심리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학자는 마음에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했다. 좋은 말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양심이 더러워지고 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 양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순에이데시스”인데 “공통된 지각”을 뜻하는 말이다. 또는 “공통으로 본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지각하는 것이나 본 것이라면 무엇일까? 시편은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시33:15)고 계시한다. 인류의 마음은 공통적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이미 창조되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통으로 보았으며 지각하였다. 창조주께서는 그 마음을 통하여 사람들을 감찰하신다. 양심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지각하고 있는 본능적인 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의 사상과 행위에 이 공통으로 보고 지각한 하나님의 형상에 맞지 않을 때 두려워하고 놀라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 곧 예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그 예수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의 마음을 바뀐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통로는 우리의 양심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써 둔감해진 양심을 예민하게 간직할 수 있다.
화요일(4월 28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출 7:1-6)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에 관해 매우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지자가 주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이며, 성경을 기록하고 자기 이름으로 표제를 붙인 사람들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훨씬 더 광범위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일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1.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의 관계는 선지자라는 용어의 핵심적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출 7:1-6)
출7: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답: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으로서 모세가 준 말을 전달하였다. 선지자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달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7:1-6에 선지자의 역할이 나온다. 위대한 선지자로 언급된 모세(신 34:10-12)는 그의 대언자 역할을 한 형의 도움을 받았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았고, 아론도 선지자로서 바로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했다는 것이다."(존 딥달, 풍성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출애굽기, 퍼시픽 프레스, 1994년, 80)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 말에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표현할 단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교통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 아모스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2. 구약시대 이후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신약의 다음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이름이 언급된 선지자들
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은사의 지속성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전14:1-5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3. 거짓 선지자들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4. 남은 교회의 특징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께서 초림하신 이후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으며, 특히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는 대언의 영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선지자의 역할과 사명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나비(nabi)를 번역한 것이다. 그 의미는 출애굽기 7:1-2에 표현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나비)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게 하라. 바로와 모세와의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아론이 모세의 말을 바로에게 전달했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임명하신 대변자를 가리킨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06-307)
<부가설명> 선지자라고 번역된 말은 대언자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원어의 뜻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대언자는 그가 대언해야 할 분이 주시는 말을 그대로 대언해야 한다. 그분이 권한을 주지 않으면 준 말에 가감할 권리가 없다. 만일 말을 주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보여주고 그것을 대언하여 설명하라고 하면 그가 보고 깨달은 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도 이와 같다. 대언자가 본 사물이나 사건을 자신의 말로 설명할 때도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과거를 보여주시거나 말하게 하시면 과거를, 현재를 말하게 하시면 현재를, 미래에 대한 것을 주시면 미래를 말해야 한다. 선지자의 말이 다 미래를 말한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선지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사도행전13장1절이나 고전12:28에 보면 선지자는 교회에 주어졌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 교회에 선지자의 은사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특히 1260년 환난의 기간 후에, 또 계10장 예언 사건이 성취된 때에 다시 예언할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시고(계10:11), 바로 그때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 형성되면서 예언할 종을 일으키셨다. 그것이 남은 자손으로서 재림교회에 주신 예언의 신의 은사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기별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도 선지자를 보내셨다.
수요일(4월 29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딤후 3:14-16)
과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내신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약 1,500년간에 걸쳐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들을 편집해 놓은 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이다. 예수님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기록들 밖에 없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복음서와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기록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1.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는 것을 칭찬하면서, 그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구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에 대해 또 무엇을 말해 줍니까?(딤후 3:14-16)
딤후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답: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함. 2)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 3)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부분들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깊고 넓은 지식의 샘을 보게 된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한계가 없는 지식의 바다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 연구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마음과 생각은 새로운 힘과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체험은 성경이 하나님의 저작이라는 놀라운 확증을 준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 밥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엘렌 G. 화잇, 오늘의 나의 생애, 26)
과거에 비해 오늘날에는 훨씬 더 많은 성경책들이 팔린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번역본들이 나오고, 초보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번역들도 등장한다. 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더 많이 읽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은 영원한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에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하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다.
성경을 읽는 자의 태도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성경은 이야기, 설교, 역사로 뒤범벅이 된 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을 받는 이들, 인내와 수많은 기도로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들 속에 깔려 있는 통일성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단조롭고 획일적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를 띤 증언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기 드물게 뛰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29)
<부가설명> 나는 웹사이트 kasda 칼럼에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지 적어놓았다. 창세기 1:1은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는지 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물으셨다. 즉 성경의 기록이 중요한 것처럼 그것을 읽는 시각도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 곧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읽어야 한다(고전2:9-14; 사55:8,9). 창세기 1:1은 성경을 읽되 창조론적, 구원론적 종말론적 시각으로 읽도록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더 확실한 설명을 원하는 분들은 kasda 칼럼 김명호 방에서 “칠십생자비오자”란 글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 법을 따라 읽을 때 정말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제공해 준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연구함으로 영혼의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자.
목요일(4월 30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요 1:1-2)
누군가로부터 정기적으로 편지를 받는다면 그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만약에 사진을 받는다면 그 사람을 새로운 차원에서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기까지는 그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우리와도 교통하기를 원하셨으나 죄 때문에 어렵게 되자,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류와 교통하셨다. 마침내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일에는 이런 사실도 포함된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떻게 온전히 나타내셨습니까?(요 1:1-2, 14, 14:9, 히 1:1-3)
요1:1,2,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히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답: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온전히 계시되셨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하나님의 아들(히 1:3)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1의 정확한 어법은 중요하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육신으로 보이셨다거나, 육신으로 나타내셨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 어느 시점에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셔서 육신이 되셨다. 즉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의 인성(육신)을 취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은 아마도 모든 기독교 교단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조일 것이다.
2.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요 5:36-40)
요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답: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증명하신다. 그분께서는 성경을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선언하셨다.
어떤 이들은 성경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실제로 탁월한 성경학자들 중에도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님을 알기 위해 애쓰지 않고,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조리법을 읽는 것만으로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시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한 분, 나사렛 예수를 소개해 준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냄
“말씀 속에는 구주께서 매우 아름답게, 아주 매력적으로 나타나 있다. 모든 영혼들은 성경 가운데서 안위와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와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실 일에 관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병든 자들은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주실 때에 그분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는 생명나무 잎사귀를 주신 것이다. 성경을 읽거나 들어본 그 어떤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하는 세상 것들이나 오락들에서 기쁨을 찾고 하늘의 사물에 흥미를 잃어버릴 수가 있겠는가?”(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4)
<부가설명> 성경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오라고 지시한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영생이신 예수님께 오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성경 자체에서 영생을 얻는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재림교인들도 그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이 계시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듣고 보고 친히 손으로 만지는 경험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코이노니아(친교)해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다. 그분이 구원과 의이시다. 영생이시다. 사람이 얼굴과 얼굴울 대하여 보듯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여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진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경험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런 경험으로 우리의 삶이 이끌리기를 기도하자.
교훈: 하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계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요, 그분과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금요일(5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정로의 계단, 제10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85-91)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더불어 교통하게 하시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천연계는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에 말한다. 열린 마음은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만물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과 영광에 감복(感服)될 것이다. 기울여 듣는 귀는 천연계의 만물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기별을 들을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푸른 들, 울창한 수목, 새싹과 꽃, 흘러가는 구름, 내리는 비, 졸졸 흐르는 시내, 하늘의 광명들은 우리의 마음에 말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지으신 분과 친숙하여지기를 요청하고 있다.”(정로의 계단, 8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천연계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까?
*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천연계에서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2. 교과반에서, 우리의 양심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양심을 따를 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화에서 옳고 그름의 개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양심은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과 교육 등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양심을 따른다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양심으로 인도된 올바른 도덕적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두고 양심만 운위하면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남은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다면 그 은사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까요?
* 역사의 종말에 두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바른 진로를 인도할 것이다. 이 권고를 따를 때 말세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살게 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계시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넓히며 계시의 목적을 생각하고 특히 말씀과 예수님을 주신 계시로 구주 예수님을 요한처럼 만나는 경험에 이르기를 바란다.
요약: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천연계와 양심을 통해 우리와 교통하신다. 그분께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해 교통하셨으며, 오늘날 당신의 교회에도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순례를 위한 거룩한 안내서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특히 그분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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