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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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4-01 13:21 조회6,389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09년04월04일(안) 이봉주 (제1과) 사랑.hwp (32.0K) 130회 다운로드 DATE : 2009-04-01 13: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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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04월04일(안) (일몰: 오후 6시 57분)
제1과 사랑
기억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께서 보이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비록 우리가 이 사랑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인간의 얕고 순간적인 사랑, 때때로 이기심과 탐욕이 섞여 있는 그런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을 지니고 계시거나 보여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깨닫기: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동정어린 무아적인 사랑을 비교해 본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한다.
요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일(日) (3월 29일)
<삶의 본질인 사랑(마 22:37-39)>
◉ 사랑이라는 말이나 단어가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언어나 글자는 참으로 범위와 뜻이 많다.
그 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석과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라는 말과 단어는 범위가 넓다.
◉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에로스라는 것은 이성간(異性間)의 사랑,
스톨게라는 것은 부모(父母) 자식간(子息間)의 사랑,
필레아라는 것은 친구간(親舊間)의 사랑,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같은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人間)은 에로스에 의해서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하여 양육(養育)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장(成長)하고,
아가페에 의하여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인간은 확실히 사랑함으로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서 살고,
사랑을 먹고 살고,
사랑이 살아 있는 한 삶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 하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실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 소포클레스 -
*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해서, 또는 이익이 있으므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 행복을 느낌으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 파스칼 -
* 사랑은 끝없는 신비(神秘)이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타고르 -
*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 스탕달 -
* 가장 완성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 마호메트 -
*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 호라티우스 -
* 사랑의 마음 없이는 어떠한 본질도 진리도 파악하지 못한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따뜻한 정으로써만 우주의 전지전능에 접근하게 된다.
사랑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힘이,
이와 반대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 호라티우스 -
* 사랑의 마음 없이는 어떠한 본질도 진리도 파악하지 못한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따뜻한 정으로써만 우주의 전지전능에 접근하게 된다.
사랑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랑은 인간 생활의 최후의 진리이며 최후의 본질이다. - 슈와프 -
*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 - 데스카 -
*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훨씬 더 슬프다. - M.D.라이크 -
* 그대가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대도 사랑으로부터 거부당하리라. - 테니슨 -
* 사랑이란 상실이며 단념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 버렸을 때 사랑은 더욱 풍부해진다. - 구코 -
*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뇌와 인내에서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있다. - 헤세 -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죽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을 필요로 하며,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하는 만큼 또한 사랑을 나눌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은 창조주이시다.(참조 창 1:26, 요 3:16)
◉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그분의 사랑의 속성을 닮아야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보다 앞선다.
참된 사랑은 “거룩한 원칙이며 항구적인 능력이다.
성별되지 않은 마음은 이 사랑을 일으키거나 산출할 수 없다.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속에만 이 사랑이 나타난다.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다.”(사도행적, 551)
◉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루이스(C. S. Lewis)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별하기 위해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우리가 동료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필요로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인 사랑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에 굶주리신 분이 아니시며,
다만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해 계신다.”(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1998년, 121).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참으로 그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께 대하여 사랑과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순종하거나, 혹은 불신하고 불순종할 수 있었다.
… 왜냐하면 오직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사랑의 원칙(요일 4:8)을 충분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 표현, 곧 온 영과 혼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었다(마 22:36-40).”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20)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신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월(月) (3월 30일)
<구약(舊約)의 하나님 - 사랑의 하나님(렘 31:3)>
◉ 사랑은 준비(예비(豫備))를 합니다.
1. 산모(産母)가 아이를 낳기 전에 아가의 옷과 영아(嬰兒)의 모든 필요를 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첫째 날부터 만물을 창조하시어,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제6일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고
제7일에 안식하심으로 창조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다.(창 1:26-31; 창 2:21-25)
2.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다는 점이다.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없다면 인간(人間)은 인간이 아니고 로봇에 불과 하다.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하나님을 슬프게 한 사건이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였고,
그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이르게 되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죄(罪)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解決策)을 제공하심으로 인간에 대한사랑을 확증하셨다.
(창 3:15, 22:8, 사 53장 참조)
3. 쉼이 없는 인생살이는 생각만 해도 정말로 고해(苦海)와 같은 삶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지친 몸을 회복시키시는 차원의 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쉼을 갖고 난 후에 일을 하는 축복을 주시므로 가족제도와 같은 축복의 안식일제도를 주셨다. (출 31:12-17)
4.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담장(자유를 속박하는 뜻의 감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울타리(보호 받음)의 역할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은사를 허락하셨다.
자동차를 몰고 도로(道路)위를 주행(走行)하다 보면 도로(道路)옆에는 틀림없이 안전 표지판이 있다.
즉 안전표지판에는 안내표시와, 규제표시와 주의표시로 위험한 도로(道路)를 운행(운전)하는 이들에게,
안전운전을 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고 있다. 이를 무시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인간들에게도 도로의 안전표시판 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울타리인 말씀을 주신다.
울타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명령하신 말씀이 곧 먹는 것, 입는 것, 경배와 신앙과 휴식과 가정생활과,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을 소상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 "하나님"께서도 위험한 세상에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주어진 인생의 일생을 운전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안내(案內)하시고 지시(指示)하시는 은사를 통하여 우리인간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구약을 통하여 소상히 말씀하고 계심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의 반역으로 포로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인도해주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 하시며 심지여 먹을 양식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나 안니 하나 시험(출 16:26)까지 하시며 축복과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천연계(天然界)와 계시(啓示-성경을 의미함)는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
천연계의 기이하고 미묘한 것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필요와 행복에 얼마나 적당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온 땅을 비추는 일광과 적시는 우로(雨露)와, 산과 바다와 들,
이 모든 것은 조물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과연 모든 피조물의 날마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이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시인(詩人)의 글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시 145:15, 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매우 거룩하고 행복스럽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이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되었을 당초에는
쇠퇴(衰退)의 증상(症狀)이나 저주의 음영(陰影)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던 것이 비애(悲哀)와 사망이 이 세상에 이르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사랑의 율법)을 범한 까닭이다.
그러나 비록 죄의 결과로 생기는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땅은 너(사람)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창 3:17)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문구는 방싯방싯 피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싹마다 기록되었다.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충만케 하는 아름다운 새들, 향기를 풍기는 연연하고 고운 꽃들, 잎이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의 교목(喬木)들, 이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인정 있고 자부적(慈父的)인 권고(眷顧)와 그 자녀를 행복 되게 하시려는 그의 갈망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증거로써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그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善)의 대적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이러한 몽매한 오해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었다.
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창1:26-31, 2:21-25)
2)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신 사랑. (창3:15, 22:8, 사53장)
3)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사랑. (출31:12-17)
4) 선지자를 통해 계속적으로 은사를 허락하신 사랑. (암3:7)
5)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 (출34:7, 시51:1-15)
6)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 (신32:10, 시37:28, 사43:1-2)
7)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자세한 예언을 주심. (미5:2, 단9:25-27, 사7:14)
8) 역사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 사랑. (창6장, 다니엘서 등)
비록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구약에는 분명히 전쟁과 피 흘림에 관한 이야기와 진술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백성을 당신께로 이끄시고, 심지어 그들이 반복해서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에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 언약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 <헤세드와 아가페 >
“'헤세드'(chesed, 사랑 혹은 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영어로 적절하게 번역하기에 가장 어려운 히브리어다. 그 단어는 히브리 구약에 245회 나타난다. … '헤세드'는 첫째로 개인들 간의 관계를, 둘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헤세드'의 예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헤세드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과 그분의 태도, 그분의 교제들, 그분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와, 어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람과 그들의 태도, 그들의 교제들, 그들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를 묘사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 오히려 구약 기자들은 신약 기자들이 '아가페'(agape,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를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이 '헤세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시편 36)
◉ 성경 전체를 주의 깊이 연구해 보면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화(火) (3월 31일)
<신약(新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요 3:16)>
◉ 삐뚤어진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서 애태우며 보내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를 옆에서 보다 못한 이웃집 사람이 말을 건넸다. "이젠 그런 자식을 그만 잊어버리세요. 아예 안 낳은 셈 치시라고요.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시름에 잠긴 노모(老母)는 대답 했다. "나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라면 벌써 잊어버렸겠소."―
그렇다 자식이 부모의 분신(分身)이듯 그렇게도 넓은 우주와 그토록 무수한 천체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 길래 죄 때문에 망쳐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생각하고 또 생각 하시다가, 티끌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처럼 죄로 추해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나이까?
그것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시편 8편의 의미이다.(히브리서 2장9절 참조)
죄로 망쳐진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창조하실 때는 손과 손가락을 움직이셨는데, 구원하실 때에는 팔을 쓰셔야 했다. (이사야 52:10, 53:1, 50:16; 시편 77:15 참조)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넓게 벌린 예수 그리스도의 양팔은 "다 이루었다"는 구속의 선언이 있기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인 인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그리고 영원히 찬란해진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려거든 ; 창조의 "손, 구원의 팔 " 68-69 인용>
◉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요 1:18).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하고 요청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실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하심이라”(눅 4:18)고 하였나니 이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촌락들도 있었나니 이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이 병을 고쳐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나니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 저들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인자하시고 사려(思慮)깊으신 그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그의 품성은 이러하였나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이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빚(負債)과 죄를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귀여움을 받나니 이는 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기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주신 것은 다만 인류 가운데 사시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의 희생제물을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니다.
그는 그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아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이익 되는 것과 필요한 것들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셨던 그는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줄로 그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리하”(히 2:11)신다.
그는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성을 쓰신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맏형님 이시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하신 인류와 일체가 되신 인자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멸망과 죄의 타락에서 건져내시고 또한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시켜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랑은 무엇으로든지 비할 수 없다.
하늘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치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자모의 애정보다도 뛰어난, 인정 깊은 자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로, 9-15)
◉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그분은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분은 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흠 없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시는가?
다른 방법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왜 죄의 문제를 완전히 다루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답할 입장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로써 인간이 죄의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계획을 고안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완전한 율법에 대해 반역한 자들을 묵과하실 수 없으셨으며,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들이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멸망해 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실 수만은 없으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을 묵인하실 수 없는 그분의 완전한 순결이다.
한편 그분의 사랑은 죄인을 감싸 안으시는 풍성한 자비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부정과 불경으로부터 분리되게 하며,
그분의 사랑은 부정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그들과 하나 되게 한다.
… 하나님의 진노는 죄가 지속되는 동안으로 한정되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다.”
(도널드, G. 블로쉬,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 지혜, 성결, 사랑, 1995년, 140-143)
◉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다음의 신약 구절들 외에 또 다른 목록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심(요 3:16)
2)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를 내어주심(빌 2:5-8)
3)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요 14:15-18, 행 2:1-4)
4) 영적인 은사를 허락하심(고전 12:1-11, 엡 4:11-13)
5)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심(요일 3:1-3)
6) 사랑 안에 거하는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심(벧후 3:13)
7) 영생에 이르는 길이 제시됨(요 14:6, 행 4:12)
8) 부활의 소망도 제시되어 있다.(요 11:25, 살전 4:16-17)
9)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계 21, 22장)
◉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롬 5:8)
◉ <십자가의 사랑을 자랑함 >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갈 6:14)고 부르짖은 것을 우리는 이상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것도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갈 바리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그 빛을 받아,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사도행적, 210)
◉ 신약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수(水) (4월 1일)
<사랑에 대한 반응(反應)(신 6:5-6)>
◉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엄마를 찾아 젖을 먹고 움직이고 엄마를 쫒아 다니며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부모의 돌봄이나 보살핌이 없으면 먹는 것 하나 챙겨먹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가장 오랫동안 엄마나 아빠의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고, 영아와 유아와 소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부모들의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동물들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돌봄을 받는 것이 인간이 셈이다.
그러기에 철없는 시절에는 부모님들에게 강짜만 부리다가 점점 철이 들어가면 고집이 수그러들다 가 결혼하고 나서 자식을 둘 때면 그때야 부모님에 마음을 알고 그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사랑에 고마움을 보답하고는 싶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이거나, 자기 자신도 가정에 매여 제 자식(子息)들 에게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습니까?
어른들 이야기에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이 굶었다고 하면 요즘의 아이들은 라면이라도 사다 먹지 왜 굶느냐고 하질 않는가?
옛날 철없었을 때에 엄마나 어른들께서 생선 한 마리에 무나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생선을 조리면 어른들은 생선의 머리나 꼬리만 잡수실 때 하는 말이 나는 머리가 좋아서 꼬리가 좋단 다라고 하신 말씀을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은 장성(長成)하여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 깨닫고, 그 때 어른들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한 것을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 우리가 참으로 회심한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목(木) (4월 2일)
<체현(體現)된 사랑(눅 17:12-19)> (인격화(人格化)된 사랑)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랑"이다
그러나 사단은 사랑을 거래로 정의하고 사람들에게 거래로 종용(慫慂)하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에게 접근하거나 미혹(迷惑)하는 수법이 거래로 인간을 충동질한다.
<예(例)>
욥기서의 요약은(욥 1:6-19) 사단이 심지어 하나님 앞에 까지 가서 하나님께 욥의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므로(거래(去來) 관계로) 욥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경외 한다고 참소(讒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과 욥의 신앙이 그렇게 축복(거래(去來))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빡빡 우깁니다.(욥 1: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단의 주장이 잘못됨을 알게 하기위하여 재난을 허락(욥 1:12)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욥의 자녀를 죽게 하고, 재물과 가축을 몽땅 잃게 하는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도 욥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축복으로 인한 조건부 거래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욥 1:21-22)
사단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욥의 몸(생명까지) 위협합니다. 아니 시련과 고통을 주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거듭 참소(讒訴)합니다. (욥 2:3-5)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확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두 번째의 욥의 시련을 허락하십니다.(욥 2:6)
주위에 온갖 사람들이 욥을 괴롭게 하지만 심지여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욥 2:9) 정말로 모욕적인 말까지 하며 가깝다는 친구들조차도 욥에게 사단의 유혹을 앞장서는 지경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단의 사슬에서 벗어나는(욥 2:10)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보았고 들어서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온갖 환란이나 재난이나 고통과 질병(疾病)등을 안겨주는 자는 바로 사단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체현(體現)즉 인격화(人格化)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의 여러 사건들을 면밀히 공부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도 사관(私館)이 아닌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온갖 종교지도자들의 모략과 시기와 괴롭힘을 받으셨으며 결국에는 시기(猜忌)로 말미암아 제자중 한 사람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며 계속 계속하여 회개할 것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세족식(洗足式)을 하시기까지 유다가 하는 짓이 사단의 앞잡이라는 것을 계속 말씀하시며 기회를 주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을 판 유다까지도 사랑하시는 정말로 사랑의 실체(實體)가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당시의 소외 받는 자들과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여인들과 나병(癩病)환자며 세리(稅吏)며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십니다.
인간에겐 사랑이란 그 모양이나 자체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발전소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서 전달하는 존재들이다.
◉: 우리의 완전한 역할 모델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초점(焦點)>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속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의 기초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서도 계시되었으나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일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반응을 하게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도(聖徒)라고 자부하거나 공언한다면 그에 삶은 조물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과 이웃을 위한 무아적(無我的)인 사랑으로 특정지어질 것이다.
제1과 사랑
기억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께서 보이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비록 우리가 이 사랑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인간의 얕고 순간적인 사랑, 때때로 이기심과 탐욕이 섞여 있는 그런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을 지니고 계시거나 보여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깨닫기: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동정어린 무아적인 사랑을 비교해 본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삶에 나타나게 한다.
요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되면, 이 사랑은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일(日) (3월 29일)
<삶의 본질인 사랑(마 22:37-39)>
◉ 사랑이라는 말이나 단어가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언어나 글자는 참으로 범위와 뜻이 많다.
그 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석과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라는 말과 단어는 범위가 넓다.
◉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에로스라는 것은 이성간(異性間)의 사랑,
스톨게라는 것은 부모(父母) 자식간(子息間)의 사랑,
필레아라는 것은 친구간(親舊間)의 사랑,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같은 희생적(犧牲的)인 사랑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人間)은 에로스에 의해서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하여 양육(養育)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장(成長)하고,
아가페에 의하여 완성(完成)되는 것이다.
인간은 확실히 사랑함으로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서 살고,
사랑을 먹고 살고,
사랑이 살아 있는 한 삶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 하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실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 소포클레스 -
*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해서, 또는 이익이 있으므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 행복을 느낌으로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 파스칼 -
* 사랑은 끝없는 신비(神秘)이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타고르 -
*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 스탕달 -
* 가장 완성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 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 마호메트 -
*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 호라티우스 -
* 사랑의 마음 없이는 어떠한 본질도 진리도 파악하지 못한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따뜻한 정으로써만 우주의 전지전능에 접근하게 된다.
사랑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힘이,
이와 반대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정열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 호라티우스 -
* 사랑의 마음 없이는 어떠한 본질도 진리도 파악하지 못한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따뜻한 정으로써만 우주의 전지전능에 접근하게 된다.
사랑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포근히 안길 수 있는 힘이 있다.
사랑은 인간 생활의 최후의 진리이며 최후의 본질이다. - 슈와프 -
*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 - 데스카 -
*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것은 훨씬 더 슬프다. - M.D.라이크 -
* 그대가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대도 사랑으로부터 거부당하리라. - 테니슨 -
* 사랑이란 상실이며 단념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어 버렸을 때 사랑은 더욱 풍부해진다. - 구코 -
*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뇌와 인내에서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있다. - 헤세 -
우리는 살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한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는 곧 죽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을 필요로 하며,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하는 만큼 또한 사랑을 나눌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참다운 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은 창조주이시다.(참조 창 1:26, 요 3:16)
◉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므로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그분의 사랑의 속성을 닮아야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보다 앞선다.
참된 사랑은 “거룩한 원칙이며 항구적인 능력이다.
성별되지 않은 마음은 이 사랑을 일으키거나 산출할 수 없다.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속에만 이 사랑이 나타난다.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거룩한 은혜로 새롭게 된 마음속에서 사랑은 행동을 지배하는 원칙이다.”(사도행적, 551)
◉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루이스(C. S. Lewis)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별하기 위해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우리가 동료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필요로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인 사랑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에 굶주리신 분이 아니시며,
다만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해 계신다.”(C. 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1998년, 121).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참으로 그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께 대하여 사랑과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순종하거나, 혹은 불신하고 불순종할 수 있었다.
… 왜냐하면 오직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사랑의 원칙(요일 4:8)을 충분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하나님의 형상의 최고 표현, 곧 온 영과 혼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었다(마 22:36-40).”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20)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신 그것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월(月) (3월 30일)
<구약(舊約)의 하나님 - 사랑의 하나님(렘 31:3)>
◉ 사랑은 준비(예비(豫備))를 합니다.
1. 산모(産母)가 아이를 낳기 전에 아가의 옷과 영아(嬰兒)의 모든 필요를 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첫째 날부터 만물을 창조하시어,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제6일에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고
제7일에 안식하심으로 창조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다.(창 1:26-31; 창 2:21-25)
2. 인간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다는 점이다.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없다면 인간(人間)은 인간이 아니고 로봇에 불과 하다.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하나님을 슬프게 한 사건이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였고,
그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이르게 되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죄(罪)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解決策)을 제공하심으로 인간에 대한사랑을 확증하셨다.
(창 3:15, 22:8, 사 53장 참조)
3. 쉼이 없는 인생살이는 생각만 해도 정말로 고해(苦海)와 같은 삶이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지친 몸을 회복시키시는 차원의 쉼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쉼을 갖고 난 후에 일을 하는 축복을 주시므로 가족제도와 같은 축복의 안식일제도를 주셨다. (출 31:12-17)
4.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담장(자유를 속박하는 뜻의 감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울타리(보호 받음)의 역할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은사를 허락하셨다.
자동차를 몰고 도로(道路)위를 주행(走行)하다 보면 도로(道路)옆에는 틀림없이 안전 표지판이 있다.
즉 안전표지판에는 안내표시와, 규제표시와 주의표시로 위험한 도로(道路)를 운행(운전)하는 이들에게,
안전운전을 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고 있다. 이를 무시하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인간들에게도 도로의 안전표시판 처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울타리인 말씀을 주신다.
울타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명령하신 말씀이 곧 먹는 것, 입는 것, 경배와 신앙과 휴식과 가정생활과,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을 소상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 "하나님"께서도 위험한 세상에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주어진 인생의 일생을 운전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안내(案內)하시고 지시(指示)하시는 은사를 통하여 우리인간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구약을 통하여 소상히 말씀하고 계심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의 반역으로 포로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인도해주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 하시며 심지여 먹을 양식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나 안니 하나 시험(출 16:26)까지 하시며 축복과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천연계(天然界)와 계시(啓示-성경을 의미함)는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생명과 지혜와 기쁨의 근원이시다.
천연계의 기이하고 미묘한 것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인류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필요와 행복에 얼마나 적당한가를 생각하여 보라.
온 땅을 비추는 일광과 적시는 우로(雨露)와, 산과 바다와 들,
이 모든 것은 조물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과연 모든 피조물의 날마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이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시인(詩人)의 글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시 145:15, 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매우 거룩하고 행복스럽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이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되었을 당초에는
쇠퇴(衰退)의 증상(症狀)이나 저주의 음영(陰影)이 도무지 없었다.
그렇던 것이 비애(悲哀)와 사망이 이 세상에 이르게 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사랑의 율법)을 범한 까닭이다.
그러나 비록 죄의 결과로 생기는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땅은 너(사람)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창 3:17)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문구는 방싯방싯 피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싹마다 기록되었다.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충만케 하는 아름다운 새들, 향기를 풍기는 연연하고 고운 꽃들, 잎이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의 교목(喬木)들, 이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인정 있고 자부적(慈父的)인 권고(眷顧)와 그 자녀를 행복 되게 하시려는 그의 갈망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증거로써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그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善)의 대적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이러한 몽매한 오해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었다.
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창1:26-31, 2:21-25)
2)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신 사랑. (창3:15, 22:8, 사53장)
3)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사랑. (출31:12-17)
4) 선지자를 통해 계속적으로 은사를 허락하신 사랑. (암3:7)
5)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 (출34:7, 시51:1-15)
6)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 (신32:10, 시37:28, 사43:1-2)
7)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자세한 예언을 주심. (미5:2, 단9:25-27, 사7:14)
8) 역사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 사랑. (창6장, 다니엘서 등)
비록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구약에는 분명히 전쟁과 피 흘림에 관한 이야기와 진술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백성을 당신께로 이끄시고, 심지어 그들이 반복해서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에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 언약의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 <헤세드와 아가페 >
“'헤세드'(chesed, 사랑 혹은 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영어로 적절하게 번역하기에 가장 어려운 히브리어다. 그 단어는 히브리 구약에 245회 나타난다. … '헤세드'는 첫째로 개인들 간의 관계를, 둘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헤세드'의 예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헤세드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과 그분의 태도, 그분의 교제들, 그분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와, 어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람과 그들의 태도, 그들의 교제들, 그들의 관계들을 적용했을 때를 묘사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 오히려 구약 기자들은 신약 기자들이 '아가페'(agape,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를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이 '헤세드'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시편 36)
◉ 성경 전체를 주의 깊이 연구해 보면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화(火) (3월 31일)
<신약(新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요 3:16)>
◉ 삐뚤어진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서 애태우며 보내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를 옆에서 보다 못한 이웃집 사람이 말을 건넸다. "이젠 그런 자식을 그만 잊어버리세요. 아예 안 낳은 셈 치시라고요.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시름에 잠긴 노모(老母)는 대답 했다. "나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라면 벌써 잊어버렸겠소."―
그렇다 자식이 부모의 분신(分身)이듯 그렇게도 넓은 우주와 그토록 무수한 천체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 길래 죄 때문에 망쳐진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생각하고 또 생각 하시다가, 티끌 같은 인간을 구원하여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처럼 죄로 추해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나이까?
그것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시편 8편의 의미이다.(히브리서 2장9절 참조)
죄로 망쳐진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창조하실 때는 손과 손가락을 움직이셨는데, 구원하실 때에는 팔을 쓰셔야 했다. (이사야 52:10, 53:1, 50:16; 시편 77:15 참조)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넓게 벌린 예수 그리스도의 양팔은 "다 이루었다"는 구속의 선언이 있기까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인 인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그리고 영원히 찬란해진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려거든 ; 창조의 "손, 구원의 팔 " 68-69 인용>
◉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요 1:18).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하고 요청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실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하심이라”(눅 4:18)고 하였나니 이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촌락들도 있었나니 이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이 병을 고쳐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나니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 저들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인자하시고 사려(思慮)깊으신 그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그의 품성은 이러하였나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이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빚(負債)과 죄를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귀여움을 받나니 이는 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기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주신 것은 다만 인류 가운데 사시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의 희생제물을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니다.
그는 그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아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이익 되는 것과 필요한 것들을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셨던 그는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줄로 그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리하”(히 2:11)신다.
그는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성을 쓰신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맏형님 이시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구속하신 인류와 일체가 되신 인자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멸망과 죄의 타락에서 건져내시고 또한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시켜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랑은 무엇으로든지 비할 수 없다.
하늘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치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와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자모의 애정보다도 뛰어난, 인정 깊은 자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로, 9-15)
◉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그분은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분은 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흠 없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시는가?
다른 방법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왜 죄의 문제를 완전히 다루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답할 입장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지혜로써 인간이 죄의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계획을 고안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완전한 율법에 대해 반역한 자들을 묵과하실 수 없으셨으며,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들이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멸망해 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실 수만은 없으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을 묵인하실 수 없는 그분의 완전한 순결이다.
한편 그분의 사랑은 죄인을 감싸 안으시는 풍성한 자비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부정과 불경으로부터 분리되게 하며,
그분의 사랑은 부정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그들과 하나 되게 한다.
… 하나님의 진노는 죄가 지속되는 동안으로 한정되지만,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다.”
(도널드, G. 블로쉬,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 지혜, 성결, 사랑, 1995년, 140-143)
◉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다음의 신약 구절들 외에 또 다른 목록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심(요 3:16)
2)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를 내어주심(빌 2:5-8)
3)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요 14:15-18, 행 2:1-4)
4) 영적인 은사를 허락하심(고전 12:1-11, 엡 4:11-13)
5) 확실한 구원을 베풀어 주심(요일 3:1-3)
6) 사랑 안에 거하는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심(벧후 3:13)
7) 영생에 이르는 길이 제시됨(요 14:6, 행 4:12)
8) 부활의 소망도 제시되어 있다.(요 11:25, 살전 4:16-17)
9)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계 21, 22장)
◉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롬 5:8)
◉ <십자가의 사랑을 자랑함 >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갈 6:14)고 부르짖은 것을 우리는 이상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것도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갈 바리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그 빛을 받아,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사도행적, 210)
◉ 신약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수(水) (4월 1일)
<사랑에 대한 반응(反應)(신 6:5-6)>
◉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엄마를 찾아 젖을 먹고 움직이고 엄마를 쫒아 다니며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부모의 돌봄이나 보살핌이 없으면 먹는 것 하나 챙겨먹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가장 오랫동안 엄마나 아빠의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고, 영아와 유아와 소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부모들의 돌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동물들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돌봄을 받는 것이 인간이 셈이다.
그러기에 철없는 시절에는 부모님들에게 강짜만 부리다가 점점 철이 들어가면 고집이 수그러들다 가 결혼하고 나서 자식을 둘 때면 그때야 부모님에 마음을 알고 그때부터 부모님에 대한 사랑에 고마움을 보답하고는 싶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이거나, 자기 자신도 가정에 매여 제 자식(子息)들 에게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습니까?
어른들 이야기에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많이 굶었다고 하면 요즘의 아이들은 라면이라도 사다 먹지 왜 굶느냐고 하질 않는가?
옛날 철없었을 때에 엄마나 어른들께서 생선 한 마리에 무나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생선을 조리면 어른들은 생선의 머리나 꼬리만 잡수실 때 하는 말이 나는 머리가 좋아서 꼬리가 좋단 다라고 하신 말씀을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은 장성(長成)하여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 깨닫고, 그 때 어른들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한 것을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 우리가 참으로 회심한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목(木) (4월 2일)
<체현(體現)된 사랑(눅 17:12-19)> (인격화(人格化)된 사랑)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랑"이다
그러나 사단은 사랑을 거래로 정의하고 사람들에게 거래로 종용(慫慂)하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에게 접근하거나 미혹(迷惑)하는 수법이 거래로 인간을 충동질한다.
<예(例)>
욥기서의 요약은(욥 1:6-19) 사단이 심지어 하나님 앞에 까지 가서 하나님께 욥의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므로(거래(去來) 관계로) 욥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경외 한다고 참소(讒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과 욥의 신앙이 그렇게 축복(거래(去來))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빡빡 우깁니다.(욥 1: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단의 주장이 잘못됨을 알게 하기위하여 재난을 허락(욥 1:12)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욥의 자녀를 죽게 하고, 재물과 가축을 몽땅 잃게 하는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도 욥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축복으로 인한 조건부 거래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욥 1:21-22)
사단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욥의 몸(생명까지) 위협합니다. 아니 시련과 고통을 주면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거듭 참소(讒訴)합니다. (욥 2:3-5)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확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두 번째의 욥의 시련을 허락하십니다.(욥 2:6)
주위에 온갖 사람들이 욥을 괴롭게 하지만 심지여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욥 2:9) 정말로 모욕적인 말까지 하며 가깝다는 친구들조차도 욥에게 사단의 유혹을 앞장서는 지경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단의 사슬에서 벗어나는(욥 2:10)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보았고 들어서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온갖 환란이나 재난이나 고통과 질병(疾病)등을 안겨주는 자는 바로 사단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체현(體現)즉 인격화(人格化)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의 여러 사건들을 면밀히 공부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도 사관(私館)이 아닌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온갖 종교지도자들의 모략과 시기와 괴롭힘을 받으셨으며 결국에는 시기(猜忌)로 말미암아 제자중 한 사람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하여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며 계속 계속하여 회개할 것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세족식(洗足式)을 하시기까지 유다가 하는 짓이 사단의 앞잡이라는 것을 계속 말씀하시며 기회를 주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을 판 유다까지도 사랑하시는 정말로 사랑의 실체(實體)가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당시의 소외 받는 자들과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여인들과 나병(癩病)환자며 세리(稅吏)며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십니다.
인간에겐 사랑이란 그 모양이나 자체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발전소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아서 전달하는 존재들이다.
◉: 우리의 완전한 역할 모델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들까지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초점(焦點)>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속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의 기초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서도 계시되었으나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일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반응을 하게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도(聖徒)라고 자부하거나 공언한다면 그에 삶은 조물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과 이웃을 위한 무아적(無我的)인 사랑으로 특정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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