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 부록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쉽게 읽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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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9-03-05 14:20 조회6,352회 댓글0건첨부파일
- 믿음으로 말미암는 義 (껍질속의 복음 30-59).hwp (44.5K) 81회 다운로드 DATE : 2009-03-05 14:20:24
본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어려운 교리를 쉽게 읽어 보면 어떨까 해서 옴겨 봅니다.
# 참고로 " 껍질속의 복음"에서 한 부분을 옴겨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義(칭의)
(로마서 5:1-11)
우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중요 사실을 발견했다.
1.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있다. 이는 우리가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의 노예들이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는데 전혀 불가능하다.
2. 우리는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의란 우리 죄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義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그의 탄생, 생애,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이루신 의이다.
3. 이 하나님의 의는 순례 여행이나 헌금이나 교회에 입교하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효력이 발생한다.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이 놀라운 구원의 기별을 전파하는 곳마다 유대주의 신자들이 따라 다녔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바울은 불완전한 복음을 전파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은혜로써만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은혜와 더불어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키고 선행도 해야 얻는다고 믿었다. 로마교회의 과반수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로마서 4장 전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교리를 변호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삼중 논리(할례, 선행, 율법준수)를 대항하여 오직 은혜의 복음을 옹호하는 데에 할애했다.
후에 우리는 로마서 4장과 6장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함께 연구하겠다. 4장은 율법주의를 다루고 6장은 율법 폐기론에 대하여 다룬다. 이 율법주의와 율법 폐기론은 마귀가 만든 두 모조(가짜) 복음이다.
나는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영향들, 열매들, 결과 등을 논한 로마서 5장1-11절로 들어가려고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단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3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즉각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계속적인 일이며, 마지막 한가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궁극적인 열매이다.
우리는 로마서5장1-2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3가지 축복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즉각적인 열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 구절은 헬라어 시제로 과거형(아로리스트)이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순종하는 3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가 믿음으로 내딛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행위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말씀의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입교했을 때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만 과거의 죄만을 용서받는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우리가 어디에서 이런 지식을 얻었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히 성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성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침례를 받았을 때 나는 3가지 약속을 했다. 다시는 극장에 가지 않고,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그런데 내가 침례를 받은지 3일 후 건축 설계사로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전에는 돈도 많고 친구도 많았으나 친구들도 다 잃었다. 나는 매우 쓸쓸했는데 나이로비에서 가장 큰 극장들 중 하나인 수도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위대한 배우들 중의 하나인 록 허드슨이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는 광고판을 보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에이즈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었다.
나는 들어가고 싶었으나 3일전 내가 침례 받을 때 나 자신에게 한 나의 약속을 기억했다.
“아니다. 나는 들어가지 않기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나는 내 의지력을 강화시키면서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육신이 말했다. “너는 들어가지 말고 광고판 아래에서 최소한 사진이나 보면서 즐겨보라” 그러므로 나는 쳐다보며 즐겼다. 그런데 내 손이 자동적으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돈을 끄집어냈다. 표를 샀다. 내가 침례 받은 지 3일 후에 나는 극장 안에 있었다.
나는 영화를 잘 즐겼다. 그 후에 나는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먼저 할 일은 나의 새로운 친구들이 보지 못하도록 키를 낮추어 군중이 나갈 때 살짝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새로운 죄를 하나 더 지었다. 칭의는 단지 과거의 죄만 용서받는 것이라고 배웠으므로 새로 지은 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우산으로 가리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 새로운 죄가 있다.
성경은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느니라” 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무릎은 떨렸다. 나는 내 방으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를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가 원치 않는 짓을 했습니다” 육신은 제가 한 짓을 항상 알았을지라도, 그리고는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 드렸다.
그래서 나는 계속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나는 그 당시에 젊었으며 어리석었다. 내 아내는 지금도 말하기를 “당신은 늙었으나 어리석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사용하셔서 진리를 선포하신다고 한다.
6개월 후에 내가 가졌던 한 꿈을 성취했는데 그것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이로비에서 런던까지 가는 일이었다. 그 일은 약 2달 걸렸다. 내가 떠나기 직전에 연합회 청년 지도자가 나에게 ‘청년지도자’ 라는 잡지 한 권을 주었다. 그 속에 뉴볼드대학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당신이 만일 런던에 도착한다면(그는 내가 거기까지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뉴볼드대학에 꼭 가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목회사업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나는 많이 투쟁했다. 그러나 드디어 목회에 가담하면 죄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만 4년간 뉴볼드대학에 다녔다. 해마다 우리는 3주간의 기도 주일을 가졌다. 나는 약속들을 했다. 나는 결심들을 했다. 그리고는 그 약속들은 때로는 1주일동안 지켜졌으며, 때로는 2주일 갔으며, 잘하면 3주일동안 지켜졌다. 그러나 나의 모든 약속들은 썩은 새끼줄 같았으며 내가 넘어지는 순간 평화도 사라졌다. 이것이 나만의 경험일까 혹은 당신들도 같은 일을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뉴볼드대학에서 죄에서 승리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신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고 미국 앤드류스 대학교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앤드류스로 올 때 우유와 돈이 넘쳐흐르는 땅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잊었었다. 나는 여기 와서 시험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 나빴다. 나는 전에 들어보지도 못하던 룻 비어 훌로트(root beer floats, 일종의 소다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음료)와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발견했다. 그후에 나는 선교지로 가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했다.
나는 선교사로서 우간다로 갔다. 우간다에서 5년을 봉사한 후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나는 내 자신 안에서 고투하면서 내 교인들에게는 선하게 되라고 말하는 외식주의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목회를 거의 포기할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되어 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이 책들을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하나는 로마서요 또 하나는 갈라디아서인데 그대들도 이 책들을 연구하게 되기를 기도 드린다. 이 책들은 어려운 책들이지만 연구하고 이것들과 씨름하라.
바울은 칭의란 과거의 죄의 용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아래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우리 그대로(죄인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신다. 거기서(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서 있을 것이며, 우리는(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서 있게 될 것이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고전하는 상태에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하여 받는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그대의 이웃이나 그대의 목사나 그대의 배우자와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과의 사이에는 아직 싸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10:21-37)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주는 것은 수평적 화평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갖게 되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상관이 없다.
로마서의 문맥에 그것을 넣어 보자. 로마서1장18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태어났다.
(에베소서2:3)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 다음 로마서2장8-9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분개,분노,고난, 걱정(화평이 없음))를 좇는 자에게는 노(怒)와 분(憤)으로 하시리라”
원문에는 “자아를 추구하고 진리를 순종치 않고 불의를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로 되어 있다.
(로마서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들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예외가 없다. 온 인류는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셨다. 예수께서 요한일서5장12절에서 말씀하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새 흠정역 성경 (요한복음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갖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로마서8: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이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
예수께서 요한복음5장24절에서 너희가 복음을 믿는 순간사망에서 생명으로, 정죄에서 칭의로 이미 옮겨졌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가졌다함은 너희가 이제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10:19-22). 이것이 놀라운 특권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그대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나는 매우 독실한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다. 나의 삼촌은 제수잇 신부이다. 나의 고모는 수녀원의 원장 수녀였다. 나는 제단 소년이었다. 내가 25세에 그리스도인 교인이 되었을 때 우리와 로마 카톨릭과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저자가 처음 입교했을 때, 그에게 성경을 가르친 분들에 의하여 그가 알고 있는 한, 구원과 성화문제에 관한 한).
한 예를 들어 보겠다.
일요일에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인 죄이다. 도덕적인 죄란 만일 회개치 않고 자백하지 않고 죽는다면 지옥에 가는 것을 뜻한다.
한 일요일에 나는 교회로 가고 있었다. 그날은 뜨거운 날이었는데 내 친구를 만났다. 그가 물었다. “너 교회에 가고 싶어서 가니?” 나는 “아니야” 라고 대답하고 둘이 함께 수영하러 갔다.
나의 어머니는 매우 엄하셨으므로 집에 가기 전에 미사에 참여했던 다른 친구에게 갔다. 나는 누가 미사를 집예했느냐? 누가 특송을 불렀나? 어떤 찬송을 불렀느냐? 나는 상세한 사항을 다 알아냈다. 나는 중죄를 범했으므로 또 거짓말한 죄를 하나 더 범하게 되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물으셨다.
너 교회 갔었니?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너를 보지 못했는데” 나는 “더워서 맨 뒤에 앉아 있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누가 미사를 집예했지?” “오네일 신부님이요” “무슨 찬송을 불렀지?” 나는 세세히 대답했다.
어머님은 만족하셨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죄를 지었다.
카톨릭과 우리 교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우리는 직접 무릎을 꿇고 자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금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주일 내내 날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내 동생과 같이 수요일에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수요일은 장날이었다. 한 아랍인이 각종 장신구들을 장터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그는 크롬으로 도금한 열쇠 고리와 사슬 줄을 혁대에 차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탐났다. 그것은 멋이 있고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나는 내 동생에게 말했다.
“죄 하나 더 짓고 금요일에 고백하겠다. 너는 저 사람을 계속 바쁘게 만들어라”
그 다음에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사슬을 빼내어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금요일이 왔는데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가 두 사람이 있었다. 신부들은 고행을 시키는데 그 고행은 신부의 마음대로 시켰다. 신학적인 이론이 없었다. 만일 그가 인자하면 짧은 고행을 시키고 엄한 신부는 긴 고행을 시킨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나이가 많은 분들은 언제나 엄한 신부에게 간다. 그들은 긴 고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행을 오래 할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젊은 친구들은 인자한 신부에게 받으려고 긴 줄에 서 있는데 나도 그 줄에 서서 기다렸다. 내가 내 죄를 고백했더니 그가 말했다.
“너는 이 주일에 나쁜 아이였구나”
“네 신부님”
“너는 슬픔을 느끼는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고행을 주었다. 염주로 된 3개의 묵주를 주었다. 나는 가서 나의 묵주를 시속 90㎞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내가 돌아갔다.
그 신부가 “너는 벌써 다 했나?”
“네, 저는 빠른 속도로 기도했어요”
아무리 빨리 기도해도 상관없다. 기도문을 외우면 된다. 그때 그는 그의 손을 들고 축복을 했다. 나는 내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주머니에는 열쇠 고리를 가지고 거기서 떠났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이것은 교묘한 형태의 율법주의이다.
마음에 율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그 가운데서 나왔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만일 우리가 아직도 그런 종류의 신학사상(칭의는 과거의 죄만을 용서받는다는 사상)을 품고 있다면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바울 편지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다가올 위기에 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간다 대학에 있을 때 하루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그 번개가 우리 대학의 변전기를 내리쳐서 휴즈가 타버렸다. 우리의 모든 전등이 꺼지고 모든 냉장고에도 전기가 나갔다. 문제는 우리에게 전화가 없었다. 새로운 휴즈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직접 전기회사에 가야 했다. 24㎞의 거리에 있는 전기회사와 우리 대학 사이에는 이디 아민의 부대가 있었는데 가장 악질적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다. 모두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내가 자원했다. 나는 우간다 말을 하는 남기숙사 사감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대들도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복음이 우리를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시킨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품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믿어야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허락치 아니하시면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10:28-29, 마태복음10:28-29, 로마서8:28).
나는 차를 몰았다. 그날은 뜨거운 날이었으므로 유리를 내리고 가는데 우리가 부대에 접근할 때, 나는 소총의 철거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군인들은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매초 얼마나 많은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브레이크를 잡고 섰다.
3명의 술취한 군인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들은 사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나와 동행한 남기숙사 사감은 무서워 사색이 되어 우간다 말로 살려달라고 그 병사에게 탄원했으나 아무도 우간다 말을 몰랐다. 그들은 스와힐리 말을 쓰는 이디 아민 부대에서 왔으므로 우간다어를 몰랐다. 그 군인들 중 하나가 자기의 총을 잡아당기더니 그 사감을 쏠려고 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께서 맡아 주세요”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내가 총을 붙잡고 사령관처럼 행동했다. 내가 말했다. “차렷!” 했더니 그는 똑바로 서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는 이같이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도덕 윤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장하신 것이다. 내가 말했다.
“너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그는 “죄송합니다” 하니 세 사람 모두 똑바로 섰다. 내가 또 말했다. “내게 경례해” 그들은 모두 경례했다. 나는 또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왜 너희 의무를 하지 못하나?”
하니 그들은 모두 사과했다. 나는 또 말했다.
“나는 지금 전기회사로 가는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차려 자세로 그대로 서 있어! 만일 너희가 여기 서 있지 않으면 혼날 줄 알어”
그들은 거기에 서 있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전기회사에 가서 휴즈를 구해 왔다. 그 불쌍한 남기숙사 사감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입은 꽉 닫혀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때 그분이 해결하신다.
내가 돌아올 때에 그들은 거기 서 있었다. 그들이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차렷 자세로 서 있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경례를 했고, 나도 답례를 하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안돼” 하시면 아무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죽는다해도 그에게 일어난 일은 잠시 잠자러 들어간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 첫 번째 것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고 싶다. 만일 그대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갖지 못하면 진정한 성화를 경험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화평없이 성화는 불가능하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나햐면 성화는 옳은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자아가 있다면, 혹은 만일 그대가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산다면, 혹은 보상(현세의 축복이나 내세의 천국에 가기 위해서나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는다면)을 위하여 신앙한다면 그런 신앙은 무가치하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첫 번째 하시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계명 지키는 백성이란 어떤 계명들(규율들)을 기계적으로(형식적으로, 전통이나 관습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계명 지키는 백성에 대하여 말한 모든 성구들은 사랑의 문맥에서 말한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그 사랑이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요한일서4:16-18).
(로마서5:2) “또한 그로 말미암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가져 왔는데,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도 이 은혜에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두 번째 축복이다. 바울은 그대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밑으로 들어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다.
“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성향이다.
에베소서1장7절은 은혜의 첫째 의미의 좋은 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 다음 (에베소서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효력을 낸다)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그것은 헬라어 문법상 은혜를 가리킨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은혜의 첫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성향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은혜의 2차적인 의미가 있는데 바울이 은혜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사용한 것이 곧 2차적인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 아래에 서있는 것이다.
은혜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힘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실 때, 그분은 그대가 그대의 자연적인(육체적인) 자원(힘, 능력)에 의존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심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대들에게 그분이 하라고 부르신 것을 행할 은혜를 주신다. 나는 경험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다. 내가 처음 설교 단에 섰을 때 나의 무릎은 떨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잊어 버렸다. 내가 여기 서서 당신들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놀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장9-10절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그러므로 그는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여기 그러나가 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그의 은혜가 내게 유효하게 됨) 내가 모든 사도보다(문맥상으로 여기서 “모든”은 다른 사도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가 자랑꾼처럼 말한다는 오해를 시정한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크레딧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재능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신약성서에 특히 바울 서신에 이런 예증들이 많다.
그대들은 에베소서와 다른 성구들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고린도후서12장7절에 매우 분명한 것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생애의 한 문제를 나타낸다. 그는 그 문제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아마 그의 눈일 것이라고 느낀다. 어떤 이는 언어의 어떤 결함이라고 느낀다.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지 그것이 자기의 목회(봉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린도후서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치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 가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것은 사단에게서 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겸비케 하시려고 허용하신 것이다. 교만이 그 흉측한 머리를 내밀 때마다 그는 싸울 것이다.
(고린도후서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 제발 이 가시를 제거해 주세요. 저는 주님을 위한 보다 효율적인 일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하여 더 많은 일(영혼 구원)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보라.
그(하나님)가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그리고는 부언하시기를) 이는 내 능력(내 능력은 은혜라는 낱말과 동의어이다)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자연적인 자원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실상은 “그대가 더 약할수록 나(하나님)는 그대를 통하여 더욱 빛날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다윗과 골리앗, 기드온 300명을 기억하라)
이제 바울은 그 응답에 대하여 기도로 반응한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 내 능력(힘), 내 은혜는 모두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유효한(이용,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라.
“나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증거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대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르실 때 그대의 힘으로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지 않고 당신의 능력으로 하라고 부르신다.
이것을 명심하라. 우리 모든 교인들이 이것을 인식할 때 사업은 마쳐질 것이다. 온 세상은 그의 영광으로 환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간 배웠으나 아직도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에 적합하게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50일 후에는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은혜 안에 서 있다.(기도로 스위치만 누르면 은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한다).
에베소서3장7절과 디모데전서1장14절도 같은 말이 있다. 은혜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명백히 말하는 성구들이 많다.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3번째 열매가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5장2절 후반에 있다. 우리가 은혜의 우산 밑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에(언제나 힘입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우리를 하늘과 생명에서 추방시킬 뿐만 아니라 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앗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로마서3장23절에서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복음에 관한 놀라운 것은 복음은 우리를 사망에서 구속하고, 천국 입장권을 주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케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킨다.
(골로새서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라”
다른 성구 (고린도후서3장17,18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육신으로부터 자유)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는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라.
바울이 로마서5장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할 때,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인 영화에 대하여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면 그가 논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한 계단, 한 단계씩 살펴보자.
(로마서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모든 압력들과 인생의 사건들이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그 다음 그는 우리 육신의 아비들도 우리를 시정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징계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화가 나서 혹은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을 위하여 징계하신다.
우리가 그 징계에 순복하면 구원받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변화는 우리 마음에서이다. 헬라어로 만타노이오는 영어로는 회개라고 한다. 하나님을 적대하던 마음이 회심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나 성경이 육신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육신,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회심하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그대의 육체는 말한다. “아니야 나는 죄를 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투쟁이다. 이것이 로마서7장24절에서 바울이 왜 탄식하며 부르짖는가? 하는 이유이다.
“오, 하나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것입니까?”
그는 로마서8장23절에서도, “우리가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승리를 그대에게 주실 때, 육신의 욕망과는 반대되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때마다 그대의 육신은 고통을 겪는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4장1절에서 한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히브리서2장18절에서 그분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했으며, 히브리서5장8-9절에서는 그분이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셨다고 했다.
베드로는 그분이 어디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
그러므로 육체에 대한 승리는 항상 환난(뜰립시스는 헬라어임)의 한 부분인 고난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일시적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성을 낳는다.
로마서5장4절을 보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소망은 5절에서 정의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제 나는 이 구절(5절)로 돌아오겠다. 우리는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했을 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일에 로마서5장6-10절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영어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사상을 하나님께 투영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기억하기 때문에 복음의 문맥 안에서 그것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로마서5장6-10절을 읽어 가면서 그것을 보여 주겠다. 바울이 우리의 구속의 용어들 안에서 사용하게 될 4개의 단어들을 계속 주목하라. 그리고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과 비교하지 않고 대조적으로 사용한 것을 주목하라.
로마서5장6,8,9,10절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로마서5장7절은 인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것들이 반대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이것은 첫 말이다. 우리가 무력할 때,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때) 기약대로(알맞은 때, 정해진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분은 선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 그분은 경건치 않은 자들, 바꾸어 말하면 악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제 그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묘사한다.
(로마서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바울 당시에 아주 보편화된 한 이야기가 있다.
아드미티스라고 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거짓 고소를 당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바울 당시에는 일단 선고가 내려지면 번복할 수 없었으나 호소는 할 수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 ‘알쎄스티스’는 그 사람은 무죄하며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재판장에게 가서 호소했다.
“나는 당신이 선고를 변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 대신 죽기 원합니다”
로마법은 그것을 허용했다. 헬라인들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말했다. “이것은 사랑의 요약이다. ‘알쎄스티스’는 선한 사람을 위하여 자원해서 죽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말한다.
“그것은 사실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혹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극히 드물다”
로마서5장8절에서 그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을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러나 라는 낱말은 완전한 대조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기까지 혹은 선하게 되기 위하여 노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너희가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아니할 때, 악한 죄인이었을 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로마서5장10절에서 그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문맥상으로는 그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우리는 그분께 반역했다. 우리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그는 그분이 다만 준비만 했다고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우리는 실제로 화목 되었다)
(로마서5:9) “그러면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아래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인간의 사랑을 하나님께 투영함으로써 복음을 왜곡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3가지 다른 점이 있다.
1.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달려 있고 선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어떻게 사랑할 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내가 교수로 있을 때, 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모든 교수들이 이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대가 교실에 들어설 때 그대가 자동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동적으로 싫어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외모나 태도가 그대를 마찰하여 잘못 보이게 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시험지를 채점할 때 나는 언제나 자로 이름을 가리고 채점한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매겼을 때 자를 옮기고 누구인지 이름을 보는 때가 종종 있다.
만일 이 학생들 중 하나가 내가 자연적으로 싫어하던 학생이면 나는 혼잣말로 “이 친구는 이런 성적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성적을 고치지는 않는다. 그가 그런 성적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사랑은 외적인 미나 선함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즉각적이요,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도 사랑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도 사랑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에베소서 2장을 읽되 우리의 죄악적인 문맥 안에서 읽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성구를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속의 문맥 안에서 읽어보자.
에베소서2장1-3절에서 바울은 어둡고, 음침하고, 희망 없는 인류의 모습을 묘사했으나 4절은 말한다.
“그러나(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디도서3장3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죄악적인 상태를 설명한 후 4-5절에서 이같이 말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는 요한복음3장16절을 잘 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반역한 세상을 사랑하셨다.
영어에서는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밖에 없다. 헬라어에는 4가지가 있다. 제자들이 선택한 단어는 최소한 명사 형태로 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인데 그 단어는 “아가페”였다. 영어에는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하는 동의어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영어에 동의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love(사랑)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사랑을 하나님에게 투영한다.
만일 그대가 인간의 사랑을 하나님에게 투영(대입)하면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복음을 왜곡시킨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마태복음19장16절 이하에서,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조건적이다.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기 전에 내가 반드시 어떤 선행을 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인간적인 사랑을 하나님께 투영하면, 복음은 조건적이 된다.
또 다른 예는 요한복음9장13절 이하에 있다.
한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께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하셔야 할 전부는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개혁자였다.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사 진흙을 취하여 침을 뱉어서 진흙을 반죽하여 그의 눈에 바르셨다. 그분은 그날이 매우 중대한 날이었으므로 이 진지한 일을 하셨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논란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조건적인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안식일을 지켰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을 것이다.
나는 선교부에서 제작한 청년들과 아이들을 위한 작은 팜플렛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드디어 그런 팜플렛을 제작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나는 교회 선교부에서 만든 팜플렛을 내 가방 속에 넣고 다닌다.
두 기자들이 우리 청년들을 망쳐왔던 우리의 과거의 책들로부터 나온 인용문들을 나열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쟈니, 만일 네가 착하지 않으면 예수께서 너를 하늘에 데리고 가시지 않을 것이다.”
“빌리, 만일 네가 천국에 가기 원한다면 네 이웃들, 네 형제 자매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보실 때 그분이 오셔서 너를 하늘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우리 청년들이 아무런 소망도 평안도 없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구원은 조건적이라는 사상을 믿도록 지도해 왔다.
발류 제니씨스(Value Genesis)가 이것을 입증했다.
설문지 응답자 약 2,000명의 청년들 중에서 82%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가 된다”고 답했다. 그들은 이것을 3곳(학교, 가정, 교회)에서 배웠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청년들의 사상을 돌려서 이렇게 고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우리가 연약(무력)할 때에,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가 경건치 아니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과 화목케 하셨다.”
2.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 있다. 한 청년이 한 처녀에게 와서 고백한다. “나는 당신을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가 죽는 순간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그 처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야 한다. 그의 고백은 진심이었는가? 그렇다. 그는 정직하다. 그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신실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모른다. 인간의 사랑은 믿을 수 없다.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결혼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이혼율이 52%나 되며 교회 내에서도 49%나 되는가? 인간의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며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강권할 때만이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결혼이 될 수 있다. 나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에만 배우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에레미아서31장3절에서 하나님께서 반역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무궁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고린도전서13장8절은 말한다. “사랑(아가페)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로마서8장35-39절은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대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3. 인간의 사랑은 최선의 것이라도 자아 중심적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이다. 우리 자신 안에서 그대들과 내가 하는 모든 일(나는 지금 은혜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 자신 안에서 행하는 모든 좋은 일들도 모든 것은 항상 자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정치적이건 사회적인 것이든,경제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혹은 운동에서도 높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
내가 처음 미국 왔을 때 내 교회의 교인들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미국의 생활 방식에 관하여 배워야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겠습니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나에게 스키 타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나는 스키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려고 한번 노력했다. 그 후 다시는 안 했다.
둘째. 당신은 야구, 농구, 축구 등을 꼭 배워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왜 축구(football)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발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도 내가 보기에는 soccer가 football 이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 경기를 관람시키려고 데리고 갔다. 양편에 후원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같은 후원자들 그룹에 속한 교인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편만 응원했기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저쪽편이 볼을 넣었을 때 박수를 쳤더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내 교인들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멋지게 넣지 않았느냐?” 했더니, “당신은 반대편을 응원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종교계에서까지도 적은 교회로 내려가기 원하는 젊은 목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늙으면 피곤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원한다. 모든 방면에서 우리는 높이, 높이,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빌립보서2장6-8절에 “기노시스” 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었으나 그 동등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은 2번 이상 연임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린다. 그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레이건은 그의 두 번째 임기에 이르렀을 때 퇴임할 나이가 지났으나 법은 그에게 세번째 임기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법도 없는 나라들에 가 보라.
한 지도자는 94세에 죽었다. 그는 고령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는 93세에 폐위 당했다. 그도 역시 노쇠했다. 그들은 오래 전에 했어야 헸다. 모든 영국 국민들은 여왕이 하야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의 아들도 지금 벌써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시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찬탈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나 자신을 비우셨다. 그분은 종이 되셨다.
그분은 내려가고 또 내려가셔서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 의미어 보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시에는 그것은 인간이 일찍이 고안해낸 처형방법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이며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고린도후서8장9절에서 바울은 그분은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구원의 기초이며 마귀는 이것을 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동안, 두려움은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기뻐할 것을 알았다. 그가 기독교회를 공격한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변치 않는, 자기를 비우는 사랑이다.
그가 안식일과 죽은 자의 상태를 공격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가 아가페를 공격한 첫 시기는 제자들이 죽은 후였다. 교회의 지도력이 헬라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헬라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신약성서를 기록한 분들은 누가를 제외하고는 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언어를 알지 못한다.”
헬라인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최고 형태는 플라토가 “에로스”라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원 160년경에 죽은 말시온이 아가페라는 단어 대신 에로스라는 단어로 대치하려 했으나 다른 교부들이 반대하여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책을 수선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 100년 후에 오리겐이 요한일서4장8절의 숭고한 말을 실제로 고쳤다.
요한이 “하나님이 아가페시라”고 한 말을 “하나님은 에로스이시다”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심화되었다.
그 싸움은 4세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로마 카톨릭의 명석한 대 신학자가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아가페를 에로스로 대치할 수 없음을 알고 모든 이교의 기초가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뜻인 에로스의 개념을 채택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가페는 정반대(하나님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사랑에 대한 2개의 정반대의 개념이다.
어거스틴은 사랑의 두 정반대의 개념을 취하여 헬라의 논리를 사용하여 이 둘을 종합하여 카리타스라고 부르는 사랑의 3번째 종류를 만들어 냈다. 이 카리타스라는 단어에서 오늘날 영어의 쵀리티(charity)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오늘날 흠정역 성경에서 발견된다.
카리타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혼합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암흑시대의 그리스도인 사랑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가 되었다.
루터가 이 종합적인 사랑의 개념을 깨뜨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종합적인 사상을 깨뜨리시려고 한 백성을 일으키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카리타스 복음이 “나와 그리스도” 복음을 생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혼합이기 때문에 덫에 걸려 있다.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내가 최선을 다하면 그리스도께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실 것이다” 이다. 이런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내게 보여달라.
이것은 어거스틴의 복음에서 빌려온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내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경건치 아니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아적인 불변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케 했다. 그대들이 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기초를 단단히 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그대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오셔서 그대들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이 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그대들의 이웃들에게 수평적으로 널리 비치신다.
예수께서 요한복음13장34,35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사할 때,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그러나 먼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이 아가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후에야 감사와 감격한 마음으로 “하나님, 저를 통하여 이 사랑을 세상이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껍질속의 복음 30-59 p 인용>
어려운 교리를 쉽게 읽어 보면 어떨까 해서 옴겨 봅니다.
# 참고로 " 껍질속의 복음"에서 한 부분을 옴겨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義(칭의)
(로마서 5:1-11)
우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중요 사실을 발견했다.
1.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있다. 이는 우리가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의 노예들이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는데 전혀 불가능하다.
2. 우리는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의란 우리 죄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義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그의 탄생, 생애,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이루신 의이다.
3. 이 하나님의 의는 순례 여행이나 헌금이나 교회에 입교하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효력이 발생한다.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이 놀라운 구원의 기별을 전파하는 곳마다 유대주의 신자들이 따라 다녔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바울은 불완전한 복음을 전파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구원은 오직 은혜로써만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은혜와 더불어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키고 선행도 해야 얻는다고 믿었다. 로마교회의 과반수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로마서 4장 전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교리를 변호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삼중 논리(할례, 선행, 율법준수)를 대항하여 오직 은혜의 복음을 옹호하는 데에 할애했다.
후에 우리는 로마서 4장과 6장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함께 연구하겠다. 4장은 율법주의를 다루고 6장은 율법 폐기론에 대하여 다룬다. 이 율법주의와 율법 폐기론은 마귀가 만든 두 모조(가짜) 복음이다.
나는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영향들, 열매들, 결과 등을 논한 로마서 5장1-11절로 들어가려고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단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3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즉각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계속적인 일이며, 마지막 한가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궁극적인 열매이다.
우리는 로마서5장1-2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3가지 축복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즉각적인 열매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 구절은 헬라어 시제로 과거형(아로리스트)이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순종하는 3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가 믿음으로 내딛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행위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말씀의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입교했을 때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만 과거의 죄만을 용서받는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우리가 어디에서 이런 지식을 얻었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히 성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성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침례를 받았을 때 나는 3가지 약속을 했다. 다시는 극장에 가지 않고,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그런데 내가 침례를 받은지 3일 후 건축 설계사로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전에는 돈도 많고 친구도 많았으나 친구들도 다 잃었다. 나는 매우 쓸쓸했는데 나이로비에서 가장 큰 극장들 중 하나인 수도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위대한 배우들 중의 하나인 록 허드슨이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는 광고판을 보았다. 물론 그 당시에는 에이즈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었다.
나는 들어가고 싶었으나 3일전 내가 침례 받을 때 나 자신에게 한 나의 약속을 기억했다.
“아니다. 나는 들어가지 않기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나는 내 의지력을 강화시키면서 “안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육신이 말했다. “너는 들어가지 말고 광고판 아래에서 최소한 사진이나 보면서 즐겨보라” 그러므로 나는 쳐다보며 즐겼다. 그런데 내 손이 자동적으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돈을 끄집어냈다. 표를 샀다. 내가 침례 받은 지 3일 후에 나는 극장 안에 있었다.
나는 영화를 잘 즐겼다. 그 후에 나는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먼저 할 일은 나의 새로운 친구들이 보지 못하도록 키를 낮추어 군중이 나갈 때 살짝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새로운 죄를 하나 더 지었다. 칭의는 단지 과거의 죄만 용서받는 것이라고 배웠으므로 새로 지은 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우산으로 가리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 새로운 죄가 있다.
성경은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느니라” 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무릎은 떨렸다. 나는 내 방으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를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가 원치 않는 짓을 했습니다” 육신은 제가 한 짓을 항상 알았을지라도, 그리고는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 드렸다.
그래서 나는 계속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나는 그 당시에 젊었으며 어리석었다. 내 아내는 지금도 말하기를 “당신은 늙었으나 어리석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사용하셔서 진리를 선포하신다고 한다.
6개월 후에 내가 가졌던 한 꿈을 성취했는데 그것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이로비에서 런던까지 가는 일이었다. 그 일은 약 2달 걸렸다. 내가 떠나기 직전에 연합회 청년 지도자가 나에게 ‘청년지도자’ 라는 잡지 한 권을 주었다. 그 속에 뉴볼드대학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당신이 만일 런던에 도착한다면(그는 내가 거기까지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뉴볼드대학에 꼭 가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목회사업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나는 많이 투쟁했다. 그러나 드디어 목회에 가담하면 죄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는 만 4년간 뉴볼드대학에 다녔다. 해마다 우리는 3주간의 기도 주일을 가졌다. 나는 약속들을 했다. 나는 결심들을 했다. 그리고는 그 약속들은 때로는 1주일동안 지켜졌으며, 때로는 2주일 갔으며, 잘하면 3주일동안 지켜졌다. 그러나 나의 모든 약속들은 썩은 새끼줄 같았으며 내가 넘어지는 순간 평화도 사라졌다. 이것이 나만의 경험일까 혹은 당신들도 같은 일을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뉴볼드대학에서 죄에서 승리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신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고 미국 앤드류스 대학교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앤드류스로 올 때 우유와 돈이 넘쳐흐르는 땅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잊었었다. 나는 여기 와서 시험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 나빴다. 나는 전에 들어보지도 못하던 룻 비어 훌로트(root beer floats, 일종의 소다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음료)와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발견했다. 그후에 나는 선교지로 가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했다.
나는 선교사로서 우간다로 갔다. 우간다에서 5년을 봉사한 후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나는 내 자신 안에서 고투하면서 내 교인들에게는 선하게 되라고 말하는 외식주의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목회를 거의 포기할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되어 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이 책들을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하나는 로마서요 또 하나는 갈라디아서인데 그대들도 이 책들을 연구하게 되기를 기도 드린다. 이 책들은 어려운 책들이지만 연구하고 이것들과 씨름하라.
바울은 칭의란 과거의 죄의 용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아래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우리 그대로(죄인으로)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보신다. 거기서(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서 있을 것이며, 우리는(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서 있게 될 것이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고전하는 상태에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하여 받는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그대의 이웃이나 그대의 목사나 그대의 배우자와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과의 사이에는 아직 싸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10:21-37)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주는 것은 수평적 화평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갖게 되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상관이 없다.
로마서의 문맥에 그것을 넣어 보자. 로마서1장18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태어났다.
(에베소서2:3)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그 다음 로마서2장8-9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분개,분노,고난, 걱정(화평이 없음))를 좇는 자에게는 노(怒)와 분(憤)으로 하시리라”
원문에는 “자아를 추구하고 진리를 순종치 않고 불의를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로 되어 있다.
(로마서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들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예외가 없다. 온 인류는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셨다. 예수께서 요한일서5장12절에서 말씀하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새 흠정역 성경 (요한복음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갖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로마서8: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이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
예수께서 요한복음5장24절에서 너희가 복음을 믿는 순간사망에서 생명으로, 정죄에서 칭의로 이미 옮겨졌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가졌다함은 너희가 이제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10:19-22). 이것이 놀라운 특권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그대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나는 매우 독실한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다. 나의 삼촌은 제수잇 신부이다. 나의 고모는 수녀원의 원장 수녀였다. 나는 제단 소년이었다. 내가 25세에 그리스도인 교인이 되었을 때 우리와 로마 카톨릭과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저자가 처음 입교했을 때, 그에게 성경을 가르친 분들에 의하여 그가 알고 있는 한, 구원과 성화문제에 관한 한).
한 예를 들어 보겠다.
일요일에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인 죄이다. 도덕적인 죄란 만일 회개치 않고 자백하지 않고 죽는다면 지옥에 가는 것을 뜻한다.
한 일요일에 나는 교회로 가고 있었다. 그날은 뜨거운 날이었는데 내 친구를 만났다. 그가 물었다. “너 교회에 가고 싶어서 가니?” 나는 “아니야” 라고 대답하고 둘이 함께 수영하러 갔다.
나의 어머니는 매우 엄하셨으므로 집에 가기 전에 미사에 참여했던 다른 친구에게 갔다. 나는 누가 미사를 집예했느냐? 누가 특송을 불렀나? 어떤 찬송을 불렀느냐? 나는 상세한 사항을 다 알아냈다. 나는 중죄를 범했으므로 또 거짓말한 죄를 하나 더 범하게 되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니 어머님이 물으셨다.
너 교회 갔었니?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너를 보지 못했는데” 나는 “더워서 맨 뒤에 앉아 있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누가 미사를 집예했지?” “오네일 신부님이요” “무슨 찬송을 불렀지?” 나는 세세히 대답했다.
어머님은 만족하셨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죄를 지었다.
카톨릭과 우리 교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우리는 직접 무릎을 꿇고 자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금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주일 내내 날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내 동생과 같이 수요일에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수요일은 장날이었다. 한 아랍인이 각종 장신구들을 장터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그는 크롬으로 도금한 열쇠 고리와 사슬 줄을 혁대에 차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탐났다. 그것은 멋이 있고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나는 내 동생에게 말했다.
“죄 하나 더 짓고 금요일에 고백하겠다. 너는 저 사람을 계속 바쁘게 만들어라”
그 다음에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사슬을 빼내어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금요일이 왔는데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가 두 사람이 있었다. 신부들은 고행을 시키는데 그 고행은 신부의 마음대로 시켰다. 신학적인 이론이 없었다. 만일 그가 인자하면 짧은 고행을 시키고 엄한 신부는 긴 고행을 시킨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나이가 많은 분들은 언제나 엄한 신부에게 간다. 그들은 긴 고행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행을 오래 할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젊은 친구들은 인자한 신부에게 받으려고 긴 줄에 서 있는데 나도 그 줄에 서서 기다렸다. 내가 내 죄를 고백했더니 그가 말했다.
“너는 이 주일에 나쁜 아이였구나”
“네 신부님”
“너는 슬픔을 느끼는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고행을 주었다. 염주로 된 3개의 묵주를 주었다. 나는 가서 나의 묵주를 시속 90㎞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내가 돌아갔다.
그 신부가 “너는 벌써 다 했나?”
“네, 저는 빠른 속도로 기도했어요”
아무리 빨리 기도해도 상관없다. 기도문을 외우면 된다. 그때 그는 그의 손을 들고 축복을 했다. 나는 내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주머니에는 열쇠 고리를 가지고 거기서 떠났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이것은 교묘한 형태의 율법주의이다.
마음에 율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그 가운데서 나왔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만일 우리가 아직도 그런 종류의 신학사상(칭의는 과거의 죄만을 용서받는다는 사상)을 품고 있다면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바울 편지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다가올 위기에 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간다 대학에 있을 때 하루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그 번개가 우리 대학의 변전기를 내리쳐서 휴즈가 타버렸다. 우리의 모든 전등이 꺼지고 모든 냉장고에도 전기가 나갔다. 문제는 우리에게 전화가 없었다. 새로운 휴즈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직접 전기회사에 가야 했다. 24㎞의 거리에 있는 전기회사와 우리 대학 사이에는 이디 아민의 부대가 있었는데 가장 악질적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다. 모두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내가 자원했다. 나는 우간다 말을 하는 남기숙사 사감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대들도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복음이 우리를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시킨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품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믿어야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허락치 아니하시면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10:28-29, 마태복음10:28-29, 로마서8:28).
나는 차를 몰았다. 그날은 뜨거운 날이었으므로 유리를 내리고 가는데 우리가 부대에 접근할 때, 나는 소총의 철거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군인들은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매초 얼마나 많은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브레이크를 잡고 섰다.
3명의 술취한 군인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들은 사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나와 동행한 남기숙사 사감은 무서워 사색이 되어 우간다 말로 살려달라고 그 병사에게 탄원했으나 아무도 우간다 말을 몰랐다. 그들은 스와힐리 말을 쓰는 이디 아민 부대에서 왔으므로 우간다어를 몰랐다. 그 군인들 중 하나가 자기의 총을 잡아당기더니 그 사감을 쏠려고 했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께서 맡아 주세요”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내가 총을 붙잡고 사령관처럼 행동했다. 내가 말했다. “차렷!” 했더니 그는 똑바로 서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나는 이같이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도덕 윤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장하신 것이다. 내가 말했다.
“너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그는 “죄송합니다” 하니 세 사람 모두 똑바로 섰다. 내가 또 말했다. “내게 경례해” 그들은 모두 경례했다. 나는 또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왜 너희 의무를 하지 못하나?”
하니 그들은 모두 사과했다. 나는 또 말했다.
“나는 지금 전기회사로 가는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차려 자세로 그대로 서 있어! 만일 너희가 여기 서 있지 않으면 혼날 줄 알어”
그들은 거기에 서 있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그리하여 나는 전기회사에 가서 휴즈를 구해 왔다. 그 불쌍한 남기숙사 사감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입은 꽉 닫혀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때 그분이 해결하신다.
내가 돌아올 때에 그들은 거기 서 있었다. 그들이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차렷 자세로 서 있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경례를 했고, 나도 답례를 하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안돼” 하시면 아무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죽는다해도 그에게 일어난 일은 잠시 잠자러 들어간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이루어졌다.
나는 이 첫 번째 것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하고 싶다. 만일 그대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갖지 못하면 진정한 성화를 경험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 화평없이 성화는 불가능하다. 다시 강조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나햐면 성화는 옳은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자아가 있다면, 혹은 만일 그대가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리스도인 생애를 산다면, 혹은 보상(현세의 축복이나 내세의 천국에 가기 위해서나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는다면)을 위하여 신앙한다면 그런 신앙은 무가치하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첫 번째 하시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갖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계명 지키는 백성이란 어떤 계명들(규율들)을 기계적으로(형식적으로, 전통이나 관습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계명 지키는 백성에 대하여 말한 모든 성구들은 사랑의 문맥에서 말한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그 사랑이란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요한일서4:16-18).
(로마서5:2) “또한 그로 말미암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가져 왔는데,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도 이 은혜에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두 번째 축복이다. 바울은 그대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밑으로 들어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다.
“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성향이다.
에베소서1장7절은 은혜의 첫째 의미의 좋은 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 다음 (에베소서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효력을 낸다)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그것은 헬라어 문법상 은혜를 가리킨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은혜의 첫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성향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은혜의 2차적인 의미가 있는데 바울이 은혜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사용한 것이 곧 2차적인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 아래에 서있는 것이다.
은혜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힘이다.
나는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실 때, 그분은 그대가 그대의 자연적인(육체적인) 자원(힘, 능력)에 의존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심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대들에게 그분이 하라고 부르신 것을 행할 은혜를 주신다. 나는 경험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다. 내가 처음 설교 단에 섰을 때 나의 무릎은 떨렸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잊어 버렸다. 내가 여기 서서 당신들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놀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장9-10절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그러므로 그는 사도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여기 그러나가 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그의 은혜가 내게 유효하게 됨) 내가 모든 사도보다(문맥상으로 여기서 “모든”은 다른 사도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가 자랑꾼처럼 말한다는 오해를 시정한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크레딧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재능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신약성서에 특히 바울 서신에 이런 예증들이 많다.
그대들은 에베소서와 다른 성구들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고린도후서12장7절에 매우 분명한 것이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생애의 한 문제를 나타낸다. 그는 그 문제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아마 그의 눈일 것이라고 느낀다. 어떤 이는 언어의 어떤 결함이라고 느낀다.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지 그것이 자기의 목회(봉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린도후서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치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 가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것은 사단에게서 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겸비케 하시려고 허용하신 것이다. 교만이 그 흉측한 머리를 내밀 때마다 그는 싸울 것이다.
(고린도후서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다.
“하나님 제발 이 가시를 제거해 주세요. 저는 주님을 위한 보다 효율적인 일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하여 더 많은 일(영혼 구원)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보라.
그(하나님)가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그리고는 부언하시기를) 이는 내 능력(내 능력은 은혜라는 낱말과 동의어이다)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자연적인 자원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실상은 “그대가 더 약할수록 나(하나님)는 그대를 통하여 더욱 빛날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다윗과 골리앗, 기드온 300명을 기억하라)
이제 바울은 그 응답에 대하여 기도로 반응한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 내 능력(힘), 내 은혜는 모두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유효한(이용,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지 말라.
“나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증거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대에게 그대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르실 때 그대의 힘으로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지 않고 당신의 능력으로 하라고 부르신다.
이것을 명심하라. 우리 모든 교인들이 이것을 인식할 때 사업은 마쳐질 것이다. 온 세상은 그의 영광으로 환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간 배웠으나 아직도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에 적합하게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50일 후에는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은혜 안에 서 있다.(기도로 스위치만 누르면 은혜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한다).
에베소서3장7절과 디모데전서1장14절도 같은 말이 있다. 은혜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명백히 말하는 성구들이 많다.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3번째 열매가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5장2절 후반에 있다. 우리가 은혜의 우산 밑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에(언제나 힘입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우리를 하늘과 생명에서 추방시킬 뿐만 아니라 죄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앗아간다.
우리는 이것을 로마서3장23절에서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복음에 관한 놀라운 것은 복음은 우리를 사망에서 구속하고, 천국 입장권을 주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케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킨다.
(골로새서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라”
다른 성구 (고린도후서3장17,18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육신으로부터 자유)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는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라.
바울이 로마서5장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할 때,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인 영화에 대하여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면 그가 논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한 계단, 한 단계씩 살펴보자.
(로마서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모든 압력들과 인생의 사건들이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그 다음 그는 우리 육신의 아비들도 우리를 시정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징계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화가 나서 혹은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을 위하여 징계하신다.
우리가 그 징계에 순복하면 구원받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변화는 우리 마음에서이다. 헬라어로 만타노이오는 영어로는 회개라고 한다. 하나님을 적대하던 마음이 회심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나 성경이 육신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육신,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회심하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그대의 육체는 말한다. “아니야 나는 죄를 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투쟁이다. 이것이 로마서7장24절에서 바울이 왜 탄식하며 부르짖는가? 하는 이유이다.
“오, 하나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것입니까?”
그는 로마서8장23절에서도, “우리가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승리를 그대에게 주실 때, 육신의 욕망과는 반대되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때마다 그대의 육신은 고통을 겪는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4장1절에서 한 말을 들어보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히브리서2장18절에서 그분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했으며, 히브리서5장8-9절에서는 그분이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셨다고 했다.
베드로는 그분이 어디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
그러므로 육체에 대한 승리는 항상 환난(뜰립시스는 헬라어임)의 한 부분인 고난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일시적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성을 낳는다.
로마서5장4절을 보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소망은 5절에서 정의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제 나는 이 구절(5절)로 돌아오겠다. 우리는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했을 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일에 로마서5장6-10절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영어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사상을 하나님께 투영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기억하기 때문에 복음의 문맥 안에서 그것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로마서5장6-10절을 읽어 가면서 그것을 보여 주겠다. 바울이 우리의 구속의 용어들 안에서 사용하게 될 4개의 단어들을 계속 주목하라. 그리고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과 비교하지 않고 대조적으로 사용한 것을 주목하라.
로마서5장6,8,9,10절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로마서5장7절은 인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것들이 반대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이것은 첫 말이다. 우리가 무력할 때,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때) 기약대로(알맞은 때, 정해진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분은 선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 그분은 경건치 않은 자들, 바꾸어 말하면 악인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이제 그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묘사한다.
(로마서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바울 당시에 아주 보편화된 한 이야기가 있다.
아드미티스라고 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거짓 고소를 당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바울 당시에는 일단 선고가 내려지면 번복할 수 없었으나 호소는 할 수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 ‘알쎄스티스’는 그 사람은 무죄하며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재판장에게 가서 호소했다.
“나는 당신이 선고를 변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 대신 죽기 원합니다”
로마법은 그것을 허용했다. 헬라인들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말했다. “이것은 사랑의 요약이다. ‘알쎄스티스’는 선한 사람을 위하여 자원해서 죽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인용하여 말한다.
“그것은 사실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혹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극히 드물다”
로마서5장8절에서 그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을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러나 라는 낱말은 완전한 대조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기까지 혹은 선하게 되기 위하여 노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너희가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아니할 때, 악한 죄인이었을 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로마서5장10절에서 그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문맥상으로는 그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우리는 그분께 반역했다. 우리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그는 그분이 다만 준비만 했다고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우리는 실제로 화목 되었다)
(로마서5:9) “그러면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우산 아래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인간의 사랑을 하나님께 투영함으로써 복음을 왜곡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3가지 다른 점이 있다.
1.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달려 있고 선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어떻게 사랑할 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내가 교수로 있을 때, 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모든 교수들이 이 문제에 직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대가 교실에 들어설 때 그대가 자동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동적으로 싫어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외모나 태도가 그대를 마찰하여 잘못 보이게 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시험지를 채점할 때 나는 언제나 자로 이름을 가리고 채점한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매겼을 때 자를 옮기고 누구인지 이름을 보는 때가 종종 있다.
만일 이 학생들 중 하나가 내가 자연적으로 싫어하던 학생이면 나는 혼잣말로 “이 친구는 이런 성적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성적을 고치지는 않는다. 그가 그런 성적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사랑은 외적인 미나 선함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이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즉각적이요,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도 사랑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도 사랑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에베소서 2장을 읽되 우리의 죄악적인 문맥 안에서 읽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성구를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속의 문맥 안에서 읽어보자.
에베소서2장1-3절에서 바울은 어둡고, 음침하고, 희망 없는 인류의 모습을 묘사했으나 4절은 말한다.
“그러나(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디도서3장3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죄악적인 상태를 설명한 후 4-5절에서 이같이 말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는 요한복음3장16절을 잘 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반역한 세상을 사랑하셨다.
영어에서는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밖에 없다. 헬라어에는 4가지가 있다. 제자들이 선택한 단어는 최소한 명사 형태로 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인데 그 단어는 “아가페”였다. 영어에는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하는 동의어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영어에 동의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love(사랑)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사랑을 하나님에게 투영한다.
만일 그대가 인간의 사랑을 하나님에게 투영(대입)하면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복음을 왜곡시킨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마태복음19장16절 이하에서,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바꾸어 말하면 구원은 조건적이다.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기 전에 내가 반드시 어떤 선행을 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인간적인 사랑을 하나님께 투영하면, 복음은 조건적이 된다.
또 다른 예는 요한복음9장13절 이하에 있다.
한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께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하셔야 할 전부는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개혁자였다.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사 진흙을 취하여 침을 뱉어서 진흙을 반죽하여 그의 눈에 바르셨다. 그분은 그날이 매우 중대한 날이었으므로 이 진지한 일을 하셨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논란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조건적인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안식일을 지켰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을 것이다.
나는 선교부에서 제작한 청년들과 아이들을 위한 작은 팜플렛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드디어 그런 팜플렛을 제작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나는 교회 선교부에서 만든 팜플렛을 내 가방 속에 넣고 다닌다.
두 기자들이 우리 청년들을 망쳐왔던 우리의 과거의 책들로부터 나온 인용문들을 나열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쟈니, 만일 네가 착하지 않으면 예수께서 너를 하늘에 데리고 가시지 않을 것이다.”
“빌리, 만일 네가 천국에 가기 원한다면 네 이웃들, 네 형제 자매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보실 때 그분이 오셔서 너를 하늘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
우리 청년들이 아무런 소망도 평안도 없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구원은 조건적이라는 사상을 믿도록 지도해 왔다.
발류 제니씨스(Value Genesis)가 이것을 입증했다.
설문지 응답자 약 2,000명의 청년들 중에서 82%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가 된다”고 답했다. 그들은 이것을 3곳(학교, 가정, 교회)에서 배웠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청년들의 사상을 돌려서 이렇게 고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우리가 연약(무력)할 때에,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가 경건치 아니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과 화목케 하셨다.”
2.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 있다. 한 청년이 한 처녀에게 와서 고백한다. “나는 당신을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내가 죽는 순간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그 처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야 한다. 그의 고백은 진심이었는가? 그렇다. 그는 정직하다. 그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신실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모른다. 인간의 사랑은 믿을 수 없다.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결혼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이혼율이 52%나 되며 교회 내에서도 49%나 되는가? 인간의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며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강권할 때만이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결혼이 될 수 있다. 나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에만 배우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에레미아서31장3절에서 하나님께서 반역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무궁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고린도전서13장8절은 말한다. “사랑(아가페)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로마서8장35-39절은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대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3. 인간의 사랑은 최선의 것이라도 자아 중심적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이다. 우리 자신 안에서 그대들과 내가 하는 모든 일(나는 지금 은혜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 자신 안에서 행하는 모든 좋은 일들도 모든 것은 항상 자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정치적이건 사회적인 것이든,경제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혹은 운동에서도 높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
내가 처음 미국 왔을 때 내 교회의 교인들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미국의 생활 방식에 관하여 배워야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겠습니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그들은 나에게 스키 타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나는 스키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려고 한번 노력했다. 그 후 다시는 안 했다.
둘째. 당신은 야구, 농구, 축구 등을 꼭 배워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왜 축구(football)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발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도 내가 보기에는 soccer가 football 이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 경기를 관람시키려고 데리고 갔다. 양편에 후원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같은 후원자들 그룹에 속한 교인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편만 응원했기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저쪽편이 볼을 넣었을 때 박수를 쳤더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내 교인들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멋지게 넣지 않았느냐?” 했더니, “당신은 반대편을 응원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종교계에서까지도 적은 교회로 내려가기 원하는 젊은 목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늙으면 피곤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원한다. 모든 방면에서 우리는 높이, 높이,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빌립보서2장6-8절에 “기노시스” 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었으나 그 동등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은 2번 이상 연임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린다. 그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레이건은 그의 두 번째 임기에 이르렀을 때 퇴임할 나이가 지났으나 법은 그에게 세번째 임기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법도 없는 나라들에 가 보라.
한 지도자는 94세에 죽었다. 그는 고령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는 93세에 폐위 당했다. 그도 역시 노쇠했다. 그들은 오래 전에 했어야 헸다. 모든 영국 국민들은 여왕이 하야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의 아들도 지금 벌써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시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찬탈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나 자신을 비우셨다. 그분은 종이 되셨다.
그분은 내려가고 또 내려가셔서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 의미어 보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시에는 그것은 인간이 일찍이 고안해낸 처형방법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이며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고린도후서8장9절에서 바울은 그분은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구원의 기초이며 마귀는 이것을 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동안, 두려움은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기뻐할 것을 알았다. 그가 기독교회를 공격한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변치 않는, 자기를 비우는 사랑이다.
그가 안식일과 죽은 자의 상태를 공격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가 아가페를 공격한 첫 시기는 제자들이 죽은 후였다. 교회의 지도력이 헬라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헬라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신약성서를 기록한 분들은 누가를 제외하고는 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언어를 알지 못한다.”
헬라인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최고 형태는 플라토가 “에로스”라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원 160년경에 죽은 말시온이 아가페라는 단어 대신 에로스라는 단어로 대치하려 했으나 다른 교부들이 반대하여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책을 수선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 100년 후에 오리겐이 요한일서4장8절의 숭고한 말을 실제로 고쳤다.
요한이 “하나님이 아가페시라”고 한 말을 “하나님은 에로스이시다”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심화되었다.
그 싸움은 4세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로마 카톨릭의 명석한 대 신학자가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아가페를 에로스로 대치할 수 없음을 알고 모든 이교의 기초가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뜻인 에로스의 개념을 채택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가페는 정반대(하나님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사랑에 대한 2개의 정반대의 개념이다.
어거스틴은 사랑의 두 정반대의 개념을 취하여 헬라의 논리를 사용하여 이 둘을 종합하여 카리타스라고 부르는 사랑의 3번째 종류를 만들어 냈다. 이 카리타스라는 단어에서 오늘날 영어의 쵀리티(charity)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는 오늘날 흠정역 성경에서 발견된다.
카리타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혼합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암흑시대의 그리스도인 사랑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가 되었다.
루터가 이 종합적인 사랑의 개념을 깨뜨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종합적인 사상을 깨뜨리시려고 한 백성을 일으키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카리타스 복음이 “나와 그리스도” 복음을 생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혼합이기 때문에 덫에 걸려 있다.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내가 최선을 다하면 그리스도께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실 것이다” 이다. 이런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내게 보여달라.
이것은 어거스틴의 복음에서 빌려온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내버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경건치 아니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무아적인 불변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케 했다. 그대들이 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기초를 단단히 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그대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오셔서 그대들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이 사랑을 가지고 오셔서 그대들의 이웃들에게 수평적으로 널리 비치신다.
예수께서 요한복음13장34,35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사할 때,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그러나 먼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이 아가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후에야 감사와 감격한 마음으로 “하나님, 저를 통하여 이 사랑을 세상이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껍질속의 복음 30-59 p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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