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과 우리아: 한 이방인의 신의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 6 과 우리아: 한 이방인의 신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10-29 07:52 조회6,839회 댓글0건

본문

11월 6일(안식일)일몰:오후 5시 29분

기억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
하라”(신 6:5).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26:5~11, 삼하 11장, 에 8:17, 시 51편, 사 56:3~7, 엡 2:19.

열차표를 사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오랫동안 긴 줄에 서 있는 그대는 열차를 놓칠까봐 조마조마하다. 마침내 돈을 내고 표를 받아 기차를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가는 길에 봤더니 거스름돈을 너무 많이 받았다. 어떻게 할 건가? 열차를 놓치더라도 돈을 돌려주기 위해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갈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선과 악에 대한 그대의 이해에 달려있다. 윤리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가장 유행하고 있는 윤리는 상황윤리인데, 이는 세상에 도덕적 절대성은 없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다윗 왕의 윤리와 우리아의 윤리를 철저하게 대조해 보려고 한다. 다윗의 행동은 너무 끔찍하였고, 우리아의 행동보다 훨씬 심각하게 보였다. 우리아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삶과 불운한 최후를 보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단지 말만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삼하 11:11

| 학습 목표 |

⊙ 깨닫기 : 하나님과 조국에 대한 헷 사람 우리아의 충성심과 다윗의 도덕적 붕괴를 비교·대조한다.
⊙ 느끼기 :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성을 인정한다.
⊙ 행하기 : 매일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능력에 의지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신앙과 불신앙
A. 우리아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밧세바와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짓고 말았다. 우리아가 하나님께 신실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B. 다윗은 어떻게 그런 비원칙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
C. 우리아의 충성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다윗의 죄는 후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02. 느끼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A.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도 그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다면, 우리는 유혹에 얼마나 연약하겠는가?
B.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셨을 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03. 행하기: 매일 굴복하라
A. 비록 죄를 범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의지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다윗처럼 기도할 수 있는가?

요 점: 우리아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권세 있는 왕의 강력한 설득도 그로 하여금 양심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다윗은 그를 죽였다. 그는 온전함을 잃고 큰 죄를 범했다. 그러나 겸손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셨다.

일요일(10월 31일) 미끄러운 비탈길

1. 삼하 11장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자가 어떻게 그와 같이 죄에 깊이 빠질 수 있습니까? 이런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경고를 주고 있습니까?
[삼하11:1~27]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2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3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의 어떠한 것을 묻고 8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잔지라 10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11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13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18 요압이 보내어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고할새 19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고하기를 마친 후에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저희가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윗짝을 그 위에 던지매 저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22 사자가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의 모든 보낸 일을 고하여 23 가로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온 고로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신복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25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 26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답: 잠깐의 영적 태만을 틈타 찾아온 유혹은 다윗으로 하여금 심각한 타락과 범죄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우리아의 이야기는 다윗의 생애와 통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다윗은 점점 강해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사무엘하 11장은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예를 들어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핑계를 댄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죄에는 결과가 따르며 하나의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강조하고 있다. 다윗의 죄 때문에 고통 받은 첫 번째 인물은 우리아였고, 그 다음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다윗은 가족의 신뢰를 잃었고, 그 영향은 가족의 문제에서 국가적 문제로 확대되어 갔다. 다윗의 죄가 일으킨 연쇄 반응은 강간(삼하 13:14), 살인(삼하 13:28~29), 반란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손실(삼하 15장)로 이어졌다. 비록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나, 사무엘서의 저자는 죄에는 어두운 결과들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삼하 12:13~ 14).

성경의 기자는 우리아와 다윗의 행동을 비교하기 위해 “보내다”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 동사를 기초로 하여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이 암몬 족속과 싸우도록 요압을 보냈다(사무엘하 11장 1절).
·다윗이 밧세바에 대하여 묻고 그녀에게 사람을 보냈다(3~4절).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행했다(4절).
·밧세바가 그녀의 임신 소식을 보냈다(5절).
·다윗이 우리아를 보냈다(6절).
·우리아가 밧세바와 자는 것을 거부했다(13절).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라는 서한을 보냈다(14~15절).

우리가 누군가를 파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은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대부분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는 출연자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일으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고대의 전형적인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곧 죄였다. 그가 외적인 행위를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죄는 그의 선택과 동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달콤한 유혹의 치명적인 결과
“태초부터 사단은 범죄하면 이익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왔다. 천사들도 그런 식으로 유혹했고 아담과 하와도 그 방법으로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군중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에서 떠나도록 하고 있다. 범죄의 길은 바람직하게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잠 14:12)다. 대담하게 이 길에 들어섰다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 것임을 알고, 일찍 거기를 떠나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이다.”(부조와 선지자, 720)

<부가설명> 죄의 세상은 어디나 미끄럽고 비탈진 길이다. 잠시만 방심하면 미끄러져 떨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긴장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빠지지 않도록 되어버린 상태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죄를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생명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죄와 함께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중생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썩을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상처를 입히면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고 그 통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예수의 발 앞에 꿇어앉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다윗은 일시 마비 현상에 빠졌으나 곧 통증이 왔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상처의 법칙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렘30:11)

교훈: 죄는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고 영향력이 많은 사람의 죄일수록 미치는 파장은 더욱 크다.

월요일(11월 1일)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다윗과 우리아의 이야기는 암몬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삼하 11:1을 천천히 읽어보라. 성경 기자는 다윗을 어떤 방식으로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가?
다윗은 궁에 머문 채 요압 휘하의 군대를 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는 자신이 부하들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위험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다. 가장 큰 위험은 밖이 아니라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권력이나 권위를 둘러 싼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자아 개념을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우리는 쉽게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법과 규칙보다 우리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 삼상 26:5~11과 삼하 11장의 이야기에서 다윗이 행사하고 있는 지도력의 유형을 비교하십시오. 어떤 차이점을 발견했습니까?
[삼상26:5~11] 일어나 사울의 진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 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답: 다윗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부하들의 자발적인 충성과 헌신을 촉진시키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의 지도력은 위험을 멀리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사람의 목숨과 가정의 행복을 빼앗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사울의 생명을 보존하는 이야기에서 다윗은 모본을 통해 지도하고, 자원하는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하 11장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보호를 구하면서 군대와 함께 나아가는 대신, 뜨겁게 달궈진 습한 궁궐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 요새화 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궁궐에서는 예루살렘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다윗은 집들을 둘러보다 목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했다. 그는 그녀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내린 명령에 사용된 동사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단어는 다른 본문에서 강제적 의미를 띠고 있다(창 14:11 참조). 다윗은 욕망에 순종했다. 호르몬이 솟구치는 동안 그는 선악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의 활동을 완전히 중지시켰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고려치 않았다. 고의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그는 밧세바와 우리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삶에,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권력의 함정
“책임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은 그 중대한 자리가 그들을 오판이 없는 인물이 되게 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일은 주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 지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안전하다.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를 의지하는 이들은 안전한 길을 걷고 있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기별, 253)

<부가설명> 사람은 생명 문제에서는 평등하다. 왕이나 천민이나 죽는다는 데는 차이가 없다. 심지어 짐승과도 차이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전3:18,19) 자기의 생명이 귀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중한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죽는 것이 두렵고 아까우면 다른 사람의 생명이 죽는 것도 두렵고 아까운 것인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쾌락으로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위가 높으면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잔인해질 수 있다. 생물학적 생명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생명과 영적 생명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때때로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영적 생명을 빼앗은 적은 없는지 살필 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발 앞에 꿇어 우리의 허물을 씻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속죄를 이루신 주님은 그의 발 앞에 나아와서 정결해지기를 구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신다.

교훈: 아무리 작은 권한과 권위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 군림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 죄가 미칠 여러 결과들을 생각해야 한다.

화요일(11월 2일) 이스라엘 속의 이방인

이야기 속에서 우리아는 줄곧 헷 사람 우리아로 불려진다. 헷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헷 부족들인데, 이들이 북쪽의 신(新)히타이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구약시대에 세계는 문화, 국적, 민족, 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구약은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 간의 통혼(intermarriage)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금지하였다. 신 7:3에 제시된 금지법은 이스라엘에서 신앙적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재차 강조되었다. 통혼을 금지했던 주된 이유는 종교였다. 하지만 구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접한 이방인들의 예로 가득하다. 성경도 그들의 귀화(歸化)를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아의 경우 귀화는 종교와 함께 결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1. 또 어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화했습니까? 수 6:25, 룻 1:1~16, 에 8:17, 사 56:3~7.
[수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룻1:1~16]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1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12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에8:17]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사56:3~7]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답: 여리고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페르시아의 백성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들.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땅과 백성 그리고 종교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에 왔다. 그녀는 귀화란 다른 민족이 되는 것뿐 아니라 그 민족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모범적인 며느리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매춘부까지 포함되어 있다. 두명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을 기억하는가?

다윗을 섬겼던 헷 사람으로 우리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상 26:6을 보면 헷 사람 아히멜렉도 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지도급 장교였다(대상 11:41). 만약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이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이라면 우리아는 명문가에 장가든 것이다. 그의 장인 역시 지도급 장교이자 다윗이 신망했던 모사의 아들이었다. 이는 우리아의 집이 어떻게 궁궐에 인접해 있었는지, 또 아히도벨이 왜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했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손녀 밧세바의 문제와 그녀의 남편 우리아의 죽음 때문에 다윗에게 원한을 가졌던 것 같다.

하나님의 인간관
“국적이나 인종이나 계급에 의한 차별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모든 사람은 창조에 의하여 한 가족이 되었고, 구속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분리의 장벽을 헐어 버리시고 성전 마당의 모든 칸막이들을 열어 젖혀서 모든 영혼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선지자와 왕, 369)

<부가설명>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단일 혈통 민족이 아니었다. 우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실 때 아브라함과 이스마엘만 할례를 행한 것이 아니다. 할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특별한 언약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다 하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의 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실 때부터 이 일을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수다한 잡족들이 따라 나왔다. 그들 중에 진정으로 이스라엘에 귀화 동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이 사람이 갈렙이다. 갈렙은 그나스 족속이다. 그나스는 에서의 손자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었다. 갈렙은 유다지파에 소속된 귀화인이었으며 신앙의 용사였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했다면 모든 민족이 복음으로서 참 이스라엘로 귀화했을 것이다. 이 사명을 지금 교회가 수행해야 한다. 특히 재림교회가 수행해야 한다.

교훈: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통혼은 강력하게 금지되었지만, 하나님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얼마든지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수요일(11월 3일) 이름 속에 담긴 의미
성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문화적 유산과 신념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소원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삶의 방향과 신념이 바뀌면 종종 이름도 바뀌었다.

1. 다음의 성경 인물에게는 어떤 새 이름이 주어졌으며 이름이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창 17:5), 야곱(창 32:27~28), 다니엘(단 1:7).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단1: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답: 성경에서 새 이름은 변화된 운명을 의미했다. 예수께서도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승리하는 자에게는 새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방문자와 씨름했던 밤, 야곱은 구속의 역사에게 가장 극적인 이름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속이는 자(야곱)”에서 “하나님께서 다투시리라(이스라엘)”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후손이라 일컬어졌다.

다니엘의 개명(改名)은 조금 다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린 포로들이 누구의 지배하에 있는지 잊지 않도록 그들을 세뇌시키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의 다니엘은 “왕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의미의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은 다니엘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우리아는 성경에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의 기별을 전했던 우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도 있었다(렘 26:20~23). 우리아는 “여호와는 나의 빛” 또는 “여호와의 불길”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이름이다. 만약 그가 헷 족속 태생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아의 민족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가족이거나 또는 위대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문의 역사와 우리 개인의 과거사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들을 모두 무너뜨리셨다(갈 3:28).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있어서 각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다.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서 일단의 무리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시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변화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으로 정결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바뀌어진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산상보훈, 25~26)

<부가설명>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인식시키는 매체이다. 이름을 알면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아는 것과 같이 여긴다. 이름이 없으면 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이름을 얻는다. 사람은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누군가가 지어준다. 이름을 지어주는 분은 그 이름을 가진 자보다 먼저 존재하는 분이거나 권위가 있는 분이다. 먼저는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을 지어줌으로 부모님에게는 자녀의 존재 개념이 뚜렷해진다. 성경의 이름은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존재와 인격과 지위와 처지를 다 함축하고 있다. 그 이름들 위에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실 때 이름을 나타내신다. 이름이 그분을 피조물들에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름에 합당한 존재들인지 스스로 잘 살펴볼 것이다.

교훈: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변화된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며 이런 이유 때문에 새 이름을 받게 된다.

목요일(11월 4일) 원칙의 사람

성경 이야기에서 밧세바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성경 기자도 그녀의 책임이나 행적에 대한 어떤 설명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수동적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그녀 역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의 아이가 죽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장면은 임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윗에게 기별을 전할 때가 유일하다(삼하 11:5). 다윗은 우리아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윗은 약 6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아를 예루살렘에 불러들였다. 가벼운 담화를 나눈 뒤, 다윗은 은근히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자라고 명한다(삼하 11:8). 관대한 척 노력하면서 모든 일들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는 우리아의 집에 선물까지 보냈다. 그러나 원칙의 사람 우리아는 흔들리 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우리아가 왕의 신복들과 함께 성문에서 밤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황이 다윗의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들였다. 그는 흥분하였다. 우리아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한때 충직한 사람이었던 다윗이 이제는 우리아의 충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1. 삼하 11:10~13을 보면 우리아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충직함을 보인 성경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삼하11:10~13]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우리아가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11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12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 이튿날 13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답: 우리아는 언약궤까지 동원되어 있고, 지휘관들과 동료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충성심과 연합을 해칠 이기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스더도 민족이 멸절의 위기에 있을 때,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했다. 모세와 느헤미아 같은 사람도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고난에 동참하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아의 대답은 그가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자신의 전우들에게 대하여 완전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아는 자신의 현 상황을 개인적 안위나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때 사울 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보였던 다윗이 이제는 우리아의 충성과 충직함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다윗은 야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의도적으로 우리아의 원칙을 무너뜨리고자 술에 취하게 만들었다. 롯의 두 딸도 이와 같은 술책을 사용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유래되었었다(창 19:30~ 38). 그러나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아는 타협하지 않고 다시 왕의 신복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사소한 것의 중요성
“작은 일에 바른 원칙을 따라 살지 아니하므로 그가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큰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한다. 생애의 사소한 일을 취급하는 데 나타나는 결점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에까지 미친다.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하여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품성을 이루게 되어 그 품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세적인 또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실문교훈, 356)

<부가설명> 우리아의 태도는 우직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충직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충성스러움으로 우직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오직 기록된 말씀의 사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결연한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철학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는 상황을 따라 타협하도록 권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 그럴 때에도 말씀의 사상으로 굳게 서야 할 것이다. 사소한 것에 항상 원칙에 충실한 삶이 생활 원칙으로 굳어질 때 어떤 경우에도 말씀에 굳게 서서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에 굳게 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금요일(11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에는 사람들을 칭찬하여 말한 데가 거의 없다. 일찍이 세상에 산 가장 선한 사람들의 미덕까지도 자세하게 말해 주는 지면이 거의 없다. 이러한 침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 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좋은 자질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인 이상 그들의 위인(爲人)됨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성취했든지 간에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성경 역사의 교훈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사람을 칭찬하거나 높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 결국에 가서는 타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싸움을 계속하기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고 우리로 자고하게 하거나 자신을 의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분명히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성경의 취지는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다윗에게 범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자신을 의뢰하는 정신과 자기를 높이는 정신이었다. 아첨과 권세와 사치의 미묘한 유혹이 다윗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위의 민족과의 교제도 역시 악한 감화를 끼쳤다. 동방의 통치자들 사이에 성행하던 풍습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왕이 행했을 때에는 정죄하지 않았으며 왕은 신하가 행하는 그런 자제를 행할 의무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죄의 흉악성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무디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겸손히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기 시작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과반에서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런 지위에서 권한 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지책은 무엇인지 토론하십시오. 권한과 영향력을 남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위치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면 세상에서의 지위나 명성으로 인하여 우쭐대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교회에서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지 지배하는 직분이 아니다.

2. 교과반원들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십시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또는 비교인들이 그대의 교과반에 왔을 때 어떻게 환영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합니까?
*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든지 차별이 없다. 다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다.

3. 시편 51편을 읽고 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용서란 무엇인지 토론하십시오. 우리가 다윗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 다윗의 죄에 대한 형벌이 다윗에게 면제되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가 만든 열매들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명과 직무를 그만 두게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최대한의 보상과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