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 아비가일 - 상황에 지배받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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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10-27 01:20 조회6,447회 댓글0건첨부파일
- 2010년10월30일(안) (제5과) 아비가일 - 상황에 지배받지 않음.hwp (36.5K) 83회 다운로드 DATE : 2010-10-27 01:20:36
본문
2010년10월 30일(안식일)일몰: 오후 5시 37분
제 5 과 <아비가일: 상황(狀況)에 지배(支配) 받지 않음>
기억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잠 14:33).
▣ 인간은 상황에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범(非凡)한 사람은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다수(多數)의 힘으로, 강자(强者)로써, 경제적(經濟的)으로 권력(權力)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다.
성경에는 보통 사람으로 비범한 생애를 산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 침례요한의 경우, 요셉의 경우, 사도들 등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감옥(監獄)에서 상황이 나쁜 환경에서 사도 바울은 흔히 말하는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 하는,
에베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을 기록하였다.
사도 바울은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거나, 지배를 받지 않고, (빌립보서 1장12-14절 참조)
감옥(監獄)안에서 전도의 대상을 간수(看守)들을 상대로 전도를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하는 결과를 얻었다. (사도행전 16장24-34절)
또 한 사람 오늘의 주인공인 “아비가일”도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고 믿음으로 한 그의 사역을 우리가 교훈하자.
요 점 : 아비가일은 악인의 아내였지만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하여,
다윗이 보복에 나섰을 때, 겸손하고 재치 있게 조언함으로써 끔찍한 유혈 상태를 막았다.
일요일(10월 24일)
<경청(敬聽)할 줄 아는 사람>
▣ 경청(傾聽)의 기술(技術)
잘 듣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경청(傾聽)은 말 잘하기보다 더 어려운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말 잘하는 것과 잘 듣는 것 중 더 어려운 것은?
놀랍게도 잘 듣는 일이 말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의 조언이다.
대화(對話)를 주도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인가, 듣는 사람인가?
역시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듣는 사람이 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말하기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듣기!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평가되는 경청의 기술이다.
1) 모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라
경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眞心)”으로 듣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상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고 착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상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끝까지” 듣기도 전에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범한다.
듣는 사람이 판단을 시작하게 되면 이미 더 이상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해진다.
말하던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되고, 듣는 사람은 끝내 말하는 사람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착오에 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상식(常識)과 모럴의 틀 안에 틀어박혀 버린 결과다.
잘 들으려면 먼저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상대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유연(柔軟)하게 받아들이고 상대의 기분을 헤아려 배려해야 한다.
경청해야 하는 순간 먼저 “나는~” “내 생각은~” “내 경험으로는~” 등과 같은 주어를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라.
그리고 오로지 상대의 이야기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전적으로 집중하라.
그것이 “진심(眞心)”으로 듣는 자세이며, 경청의 기본자세다.
2) 육하원칙(六何原則)을 버려라
경청에는 “수용(受容)”과 “공감(共感)”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수용”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거부하거나 반론(反論)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그 내용이 당신에 대한 비난이라 해도 곧바로 반론을 펴지 않고 일단 끝까지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감”이란 말하는 이가 이야기나 표정을 통해 보여 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기 일처럼 느끼고 이해하는 자세다.
물론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같은 입장에 놓였다면 어떤 심정(心情)일지를 여러 모로 헤아려 가능한 한 비슷한 기분을 가져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공감”이다.
“수용”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말하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육하원칙(六何原則), 즉 '언제' '어디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의 논리적 원칙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육하원칙(六何原則)을 사용한 듣기는 마치 업무에 관한 정보 수집을 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런 태도는 상대의 말하고자 하는 의욕(意慾)을 꺾고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말하는 이의 기분과 감정에 초점을 맞춰 중간에 차단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아도 상대의 이야기의 전모가 스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듣는다.
그것이 경청의 기술이다.
3) 상대의 언어(言語)로 요약(要約)하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엔 자신이 상대의 말을 성실히 듣고 제대로 이해했다는 확인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상대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후에 할 수도 있고, 이야기 도중 침묵(沈黙)의 시간이 찾아 왔을 때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언어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의 언어로 상대방이 말하려는 메시지를 반영해 주거나 확인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를 상담심리학에서는 “반영적 경청”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을 얻고 감정의 홍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상대가 자신의 메시지를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상대가 감정의 혼돈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배우기 위해서만 질문(質問)하라
말 그대로 배우기 위해서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을 가장(假裝)해서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교묘히 자신의 주장을 담은 질문은 상대에게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분노(憤怒)를 불러오게 된다.
예를 들어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문제점에 대해 상담하는 팀원과의 대화 중 "그럼 그 문제는 그냥 그렇게 접어 둘거니?"
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질문은 상대에게는 "그렇게 미숙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지! 어떻게 해서든 빨리 해결해야 하잖아"라는 식의 책임 추궁으로 들리기 쉽다. 이럴 경우 상대는 그 즉시 방어(防禦) 자세로 들어가게 된다.
5) 마음만이 아니라 표정(表情)으로, 그리고 몸으로 경청(傾聽)하라
경청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또 마음만으로 듣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끊임없이 표정과 몸짓과 태도 등 비언어적(非言語的) 표현을 통해 잘 듣고 있으며 공감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주어야 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문제를 가진 사람이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진심을 토로(吐露)하게 만들려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상대의 이야기를 아주 관심 있게 듣고 있다는 신호를 발산하라.
이 경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상대의 손을 잡아 무언의 격려 메시지를 전해 주는 일 등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이야기 도중 딴 곳을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서류를 뒤적이는 일, 등이나 고개를 뒤로 젖혀 상대에게 거부감을 표현하는 등의 행동은 이제 이야기를 그만 하자는 신호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경청(傾聽)의 기술 십계명>
1. 지도자는 “듣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을 습관화, 생활화하라.
2. 상대방의 의도와 생각에 집중하라.
말해지고 있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말고
그 말속에 숨은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창조적 듣기를 연습하라.
3. 개인적 감정과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라.
감정을 개입하거나 선입견을 갖는 것은 정직한 경청을 방해한다.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대하라.
4.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말하지 말라.
쉽게 결론을 내리거나 듣는 도중에 서둘러 충고하지 말고,
내용을 단계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하라.
5. 흥미를 갖고 끈기 있게 들으라.
비록 상대방이 지루하게 이야기 하더라도 재촉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듣도록 하라.
6. 적극적으로 질문하라.
요점을 파악하고, 대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질문하라.
그러나 자신의 호기심(好奇心)을 채우기 위한 질문은 삼가라.
7. 관심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라.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라. 이야기 도중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벼운 감탄사 혹은 미소와 따뜻한 눈길을 통해
관심을 표현하라.
8. 스스로에게 “경청”의 중요성을 말하라.
경청은 독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도 한다.
경청은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고 사람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9. 내적(內的), 외적(外的) 혼란을 통제하고 자신이 마치 해결사가 되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인상을 주지 마라.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전능자에게 가지고 가야 해결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10.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을 구(求)하라.
대화를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마음속으로 기도(祈禱)하라.
◯ <성경에서 말하는 경청의 기술>
[이사야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경청(傾聽)을 잘못하여 결국엔 생명을 잃게 된 성경의 사례>
[사무엘 상 25:1~11]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의 경우를 참조 하자
나발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도망친 종들이라고 비꼬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나발이 다윗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조절해 왔다. 그러나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우리처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선대했건만 상대는 저주와 모욕으로 갚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나발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윗의 부친이 누구이며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그는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부하들 곁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아비가일에게로 갔다.
◎ <그리스도의 모본(模本)>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비와 동정과 사랑의 말씀과 또는 행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항상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슬픔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없애 주셨다.”(살아남은 이들, 204)
◎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발과 같이 될 것이다.
월요일(10월 25일)
<행동(行動)은 말보다 강력(强力)하다>
▣ <아비가일이 미련한 남편 “나발”의 잘못을 수습하는 이야기>
나발의 종중에 하나가 다윗의 소년들을 보낸 후에 급히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가서 그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羞辱)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이 매우 선대(善待)하였으므로 우리가 상(傷)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나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 이다.”고 말하였다.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과 상의하거나 그의 의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량의 식량을 준비하여 나귀에 싣고 종을 시켜 먼저 보내고 자신도 다윗의 무리를 만나려고 출발하였다. 여인은 산의 유벽한 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하였다. 아비가일은 마치 왕관을 쓴 군주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존경하는 말로 다윗에게 말하였다. 나발은 경멸하는 말로 “다윗은 누구냐?”고 부르짖었으나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이나 교만심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의 불친절한 행동은 결코 계획적인 인신 모욕이 아니요 다만 비참하고 이기적인 그의 본성이 폭발한 것이라고 다윗에게 설명하였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그의 성급한 의도에서 돌이키려는 이 설득으로 자신의 면목을 세우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렸다. 그 후에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화목 제물로 풍부한 식량을 제공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대장의 분노를 일으킨 장본인처럼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말하기를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赦)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 이다”고 하였다. 아비가일은 은근히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다. 다윗은 비록 반역자처럼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개인의 과오에 대하여 복수하려 하지 말아야 하였다. 아비가일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하였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 25:29-31). (부조와 선지자 665)
◯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어리석게 반응할 뻔했던 다윗은 아비가일의 신속한 대응과 지혜로운 언사에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
◯ (야고보서 2: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믿음의 백성들은 자칫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믿음은 행위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아비가일, 다윗 그리고 나발의 행동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행동의 위력>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은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의 후덕한 삶과 이타적인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그 같은 의를 바라게 한다. 그 사람은 이기적인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에 반하게 되며, 하나님은 존귀케 되시며, 그분의 이름은 영화롭게 된다.”(교회증언 2권, 443)
◯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화요일(10월 26일)
<말할 때>
▣ 말[語]에 관련된 속담(俗談)은 많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일 잘하는 아들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들 낳아라.” 등 말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속담도 있지만 “혀 아래 도끼 들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 등 말에 대해 경계하는 속담이 더 많다.
요즘은 말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인기와 인정을 받으며, 화술 자체가 능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 말 잘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쉽게 신뢰를 잃는 경우가 많다.
말보다 행동을 통해
▣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 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恩惠)스런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답니다.
▣ <말 한마디의 힘>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말(언어·言語)로 인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도 있다.
잠언서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제가 한 말로 등에 매를 맞고 슬기로운 사람은 제가 한 말로 몸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를 역(逆)으로 풀이하면 말 한마디로 인해 천 냥의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은 말 한마디라도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혀뿌리를 조심하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실제 우리 주위에서 이같이 말 한마디로 곤경에 빠지고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대화를 할 때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가능하면 남의 험담이나 나쁜 이야기는 하지도, 옮기지도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마다 늘 이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들과의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또 안 해도 좋을 말까지 하면서 곧 바로 후회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른다.
사실 남에 대한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남에 대한 나쁜 말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이는 우리 마음에 내 이웃의 실패나 타락의 소식을 들으면 즐기고 싶은 본성이 있어 그저 타락한 내적 본성의 충동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거나 들을 때면 본성의 충동을 느끼는 우리는 창자 깊은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며 상대적으로 자신이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착각에 빠져든다. 아마 인터넷 악플을 즐기고 또 악플이 인기가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착각에 빠지다 보니 입만 뻥긋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험담과 중상모략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대리 만족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확인조차 없이 한 사람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아 놓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에 대한 좋은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 대한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다.
칭찬을 하고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모든 게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좋은 말도 평소 자주해 습관이 되어야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다.
말로는 “잘 한다.”라고 하는데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면 상대의 입장에서는 칭찬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암튼 교만한 사람은 말을 통해서 다른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자신도 유익함과 칭송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히 우리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실감날 정도다. 분명한 것은 나쁜 말·험담을 일삼아 하는 사람은 그릇된 본성(本性)으로 인해 건강하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말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밝은 심성(心性) 때문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라 할지라도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고 했듯 긍정적인 행동을 강화시켜주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입니다” 참으로 좋은 이런 말을 많이 하고 듣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악(惡)플 보다 선(善)플이 더 활개를 치는 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늘 편안하고 기분이 좋고, 또 만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가정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우리가 강조한다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때로는 말 한마디가 가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늘 자신의 마음을 닦는 사람, 말 한마디라도 지혜롭고 슬기롭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름답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이 사회는 밝고 맑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남의 잘못을 알고 지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잘못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 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는 말의 의미를 이번 교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깊게 되새겨 봅니다.
골짜기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고 그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예우하였다.
○. 사무엘 상 25장23~31절에서 아비가일의 말과, 나발의 대답(10~11절)과 얼마나 대조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발은 상대로 하여금 반감을 일으키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아비가일의 말은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사냥감을 찾는 무리의 두목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행동해야 함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윗 안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그녀는 다윗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다윗이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이 사태의 책임을 기꺼이 자신이 짊어짐으로써 자신의 집에 속한 자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救援)하고자 했다.
아비가일의 말은 성경의 위인(偉人)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백성들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悔改)하며 용서(容恕)와 자비(慈悲)를 구했다.
이런 중보의 자세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사(反射)하고 있다.
중재를 하려면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중재자는 중재 과정 중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기꺼이 뒤로 하고 오직 다른 이의 유익을 구했다.
○ <적절한 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감화력이 미치는 사람들에게 때에 맞는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주 예수를 제대로 섬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잠 2:10, 11)할 것이라. 그대는 지혜로 입을 열게 될 것이며, 그대의 혀는 친절한 말로 넘칠 것이다.”(교회증언 6권, 69)
○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하고 그들이 경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중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요일(10월 27일)
<아비가일이 거부(拒否)한 일>
▣ <아비가일과 다윗과의 인연(因緣)의 배경>
다윗과 그 부하들이 바란 광야에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지역에서 막대한 재산(財産)을 가진 부자 “나발”의 양떼와 소떼를 약탈자(掠奪者)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나발은 갈렙의 후손이었으나 그 성품이 야비(野鄙)하고 인색하였다.
때는 양털을 깎는 시기였고 손님을 후히 대접하는 계절이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식량이 매우 궁색하였다. 그 때의 풍속에 따라 이새의 아들은 열 명의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저희 주인 이름으로 나발에게 문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다음의 말을 덧붙여 말했다.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 하라 네 집도 평강 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 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갈멜산이 아니고 마온 성읍 가까운 유대 영토에 있는 한 장소임)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입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과 그 부하들은 나발의 목자와 양떼를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제 이 부자는 그에게 귀중한 도움을 주었던 자들의 곤궁을 구제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그 양떼나 소떼에서 그들의 필요를 취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친절은 나발에게 효과가 없었다. 그가 다윗에게 보낸 대답은 다음과 같이 그의 성품을 나타내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소년들이 빈손으로 돌아와 다윗에게 그 사연을 말했을 때에 다윗은 화가 잔뜩 났다. 다윗은 자기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킨 자를 멸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이 같은 충동적인 행동은 다윗의 성품보다는 사울의 성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새의 아들은 아직도 고난의 학교에서 인내의 공과를 배워야 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664)
▣ <현숙(賢淑)한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얻을 교훈 >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智慧)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꽃향기(香氣)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敬虔)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靈)이 여인의 마음에 거(居)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躁急)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惡)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이것은 순결(純潔), 기지(奇智), 단순(單純),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된다. 이것은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無我的) 사랑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긴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眷顧)자였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다. 다윗은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의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의인(義人)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시 141:5)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그 책망을 받아들였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 (부조와 선지자 667)
▣ <육신(肉身)만을 사랑하며 사는 미련한자(나발)의 종말(終末)>
집으로 돌아온 아비가일은 나발과 그의 손님들이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향락에 빠진 것을 보았으며 그들은 크게 취하여 그 잔치를 주정하는 장면으로 바꿔 놓았다. 이튿날 아침까지 여인은 다윗과의 회견에서 일어났던 일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발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그의 어리석음이 그에게 돌연한 죽음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나발은 중풍에 걸린 사람 같았다. 나발은 다윗이 전과같이 복수할 결심을 가지고 추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가망 없는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졌다. 10일 후에 그는 죽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명은 세상에 저주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발이 환락(歡樂)과 환희(歡喜)에 빠져 있을 때에 비유(譬喩) 중에서 한 부자(富者)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에게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라”(눅 12:20) 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그 후에 아비가일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미 한 아내의 남편이었으나 그 시대의 민족들의 풍습이 그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그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 비록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의 습관을 따르는 과오를 범하였다. 여러 아내와 결혼한 쓰라린 결과를 다윗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느꼈다. (부조와 선지자 667)
◯ 아비가일은 나발과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는 치부(致富)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고 솔직하게 나아오는 여인에게 다윗은 존경과 동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 <치우치지 않는 미덕(美德)>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懇請)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虛飾)이나 교만심(驕慢心)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獻身)의 깊이를 나타내었다.”(부조와 선지자, 666)
○ 학대(虐待)를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아간다.
목요일(10월 28일)
<등장(登場) 그리고 퇴장(退場)>
▣ <아비가일의 등장(登場)은>
아비가일의 등장은 (사무엘 하 25장2-44절)에 미련한자(악인(惡人))인 “나발”의 아내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영(靈)과 지혜로 다윗의 보복에 대한 극한 상황에서 먼저 다윗을 찾아가 겸손하고 지혜롭게 조언함으로
끔직한 유혈사태를 막고 이후 이에 감동된 다윗의 아내가 되기까지 한다.
아비가일은 감화를 끼치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하녀(下女)가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함께 섬기는 여주인이었다.
예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8).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당시의 관습(慣習)대로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의 가족사(家族史)는 하나님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 부인(夫人)이었고, 다윗은 여전히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였다.
시글락에서 그녀는 다른 부하(部下)들의 가족들처럼 아말렉의 노예(奴隸)로 잡혀갔다가 구조되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 <아비가일의 퇴장(退場)은>
우리는 다윗 왕 곁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침묵(沈黙)하고 있다.
단지 그녀에게 다니엘(대상 3:1) 또는 길르압(삼하 3:3)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추가됐을 뿐이다.
아비가일과 그의 자녀들은 그렇게 무대(舞臺)에서 사라졌다.
어떤 학자들은 아비가일과 그녀의 아들들이 살해(殺害)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다윗의 아들들이 저지른 강간(强姦), 살인(殺人), 봉기(蜂起), 반란(叛亂) 이전에 사망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꼭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신뢰심(信賴心)이다.
◯ <역사(歷史)의 진정한 주인공>
“인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모든 왕국들의 흥망은 마치 사람들의 의지나 용기에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건들의 생성은 그 대부분이 사람의 능력, 야심, 혹은 변덕에 의하여 결정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휘장이 열려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심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선지자와 왕, 499)
◯ 이 땅에서는 지혜(智慧)롭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행복한 결말(結末)을 보장(保障)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초점(焦點)>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며, 행동은 말보다 앞선 사람이고, 말할 때는 상대의 마음속에 존귀함에 호소하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가며 비록 그의 생애가 동화(童話)같은 인생을 살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신뢰심이 있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 지난주(제4과)를 올리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머리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제 5 과 <아비가일: 상황(狀況)에 지배(支配) 받지 않음>
기억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잠 14:33).
▣ 인간은 상황에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범(非凡)한 사람은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다수(多數)의 힘으로, 강자(强者)로써, 경제적(經濟的)으로 권력(權力)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다.
성경에는 보통 사람으로 비범한 생애를 산 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 침례요한의 경우, 요셉의 경우, 사도들 등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감옥(監獄)에서 상황이 나쁜 환경에서 사도 바울은 흔히 말하는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 하는,
에베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등을 기록하였다.
사도 바울은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거나, 지배를 받지 않고, (빌립보서 1장12-14절 참조)
감옥(監獄)안에서 전도의 대상을 간수(看守)들을 상대로 전도를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하는 결과를 얻었다. (사도행전 16장24-34절)
또 한 사람 오늘의 주인공인 “아비가일”도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고 믿음으로 한 그의 사역을 우리가 교훈하자.
요 점 : 아비가일은 악인의 아내였지만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하여,
다윗이 보복에 나섰을 때, 겸손하고 재치 있게 조언함으로써 끔찍한 유혈 상태를 막았다.
일요일(10월 24일)
<경청(敬聽)할 줄 아는 사람>
▣ 경청(傾聽)의 기술(技術)
잘 듣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경청(傾聽)은 말 잘하기보다 더 어려운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말 잘하는 것과 잘 듣는 것 중 더 어려운 것은?
놀랍게도 잘 듣는 일이 말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의 조언이다.
대화(對話)를 주도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인가, 듣는 사람인가?
역시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듣는 사람이 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말하기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듣기!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평가되는 경청의 기술이다.
1) 모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려라
경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眞心)”으로 듣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상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다고 착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상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끝까지” 듣기도 전에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범한다.
듣는 사람이 판단을 시작하게 되면 이미 더 이상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해진다.
말하던 사람은 입을 다물게 되고, 듣는 사람은 끝내 말하는 사람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착오에 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상식(常識)과 모럴의 틀 안에 틀어박혀 버린 결과다.
잘 들으려면 먼저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상대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유연(柔軟)하게 받아들이고 상대의 기분을 헤아려 배려해야 한다.
경청해야 하는 순간 먼저 “나는~” “내 생각은~” “내 경험으로는~” 등과 같은 주어를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라.
그리고 오로지 상대의 이야기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전적으로 집중하라.
그것이 “진심(眞心)”으로 듣는 자세이며, 경청의 기본자세다.
2) 육하원칙(六何原則)을 버려라
경청에는 “수용(受容)”과 “공감(共感)”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수용”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거부하거나 반론(反論)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그 내용이 당신에 대한 비난이라 해도 곧바로 반론을 펴지 않고 일단 끝까지 듣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공감”이란 말하는 이가 이야기나 표정을 통해 보여 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기 일처럼 느끼고 이해하는 자세다.
물론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같은 입장에 놓였다면 어떤 심정(心情)일지를 여러 모로 헤아려 가능한 한 비슷한 기분을 가져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공감”이다.
“수용”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말하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육하원칙(六何原則), 즉 '언제' '어디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의 논리적 원칙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육하원칙(六何原則)을 사용한 듣기는 마치 업무에 관한 정보 수집을 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런 태도는 상대의 말하고자 하는 의욕(意慾)을 꺾고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말하는 이의 기분과 감정에 초점을 맞춰 중간에 차단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아도 상대의 이야기의 전모가 스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듣는다.
그것이 경청의 기술이다.
3) 상대의 언어(言語)로 요약(要約)하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엔 자신이 상대의 말을 성실히 듣고 제대로 이해했다는 확인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상대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후에 할 수도 있고, 이야기 도중 침묵(沈黙)의 시간이 찾아 왔을 때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언어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상대의 언어로 상대방이 말하려는 메시지를 반영해 주거나 확인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를 상담심리학에서는 “반영적 경청”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을 얻고 감정의 홍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상대가 자신의 메시지를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상대가 감정의 혼돈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배우기 위해서만 질문(質問)하라
말 그대로 배우기 위해서만 질문해야 한다. 질문을 가장(假裝)해서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교묘히 자신의 주장을 담은 질문은 상대에게 혼란을 줄 뿐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분노(憤怒)를 불러오게 된다.
예를 들어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문제점에 대해 상담하는 팀원과의 대화 중 "그럼 그 문제는 그냥 그렇게 접어 둘거니?"
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질문은 상대에게는 "그렇게 미숙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지! 어떻게 해서든 빨리 해결해야 하잖아"라는 식의 책임 추궁으로 들리기 쉽다. 이럴 경우 상대는 그 즉시 방어(防禦) 자세로 들어가게 된다.
5) 마음만이 아니라 표정(表情)으로, 그리고 몸으로 경청(傾聽)하라
경청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또 마음만으로 듣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끊임없이 표정과 몸짓과 태도 등 비언어적(非言語的) 표현을 통해 잘 듣고 있으며 공감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주어야 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문제를 가진 사람이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진심을 토로(吐露)하게 만들려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상대의 이야기를 아주 관심 있게 듣고 있다는 신호를 발산하라.
이 경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거나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상대의 손을 잡아 무언의 격려 메시지를 전해 주는 일 등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이야기 도중 딴 곳을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서류를 뒤적이는 일, 등이나 고개를 뒤로 젖혀 상대에게 거부감을 표현하는 등의 행동은 이제 이야기를 그만 하자는 신호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경청(傾聽)의 기술 십계명>
1. 지도자는 “듣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을 습관화, 생활화하라.
2. 상대방의 의도와 생각에 집중하라.
말해지고 있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말고
그 말속에 숨은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창조적 듣기를 연습하라.
3. 개인적 감정과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라.
감정을 개입하거나 선입견을 갖는 것은 정직한 경청을 방해한다.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대하라.
4.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말하지 말라.
쉽게 결론을 내리거나 듣는 도중에 서둘러 충고하지 말고,
내용을 단계적으로 종합하고 분석하라.
5. 흥미를 갖고 끈기 있게 들으라.
비록 상대방이 지루하게 이야기 하더라도 재촉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듣도록 하라.
6. 적극적으로 질문하라.
요점을 파악하고, 대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 수 있도록 질문하라.
그러나 자신의 호기심(好奇心)을 채우기 위한 질문은 삼가라.
7. 관심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라.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라. 이야기 도중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벼운 감탄사 혹은 미소와 따뜻한 눈길을 통해
관심을 표현하라.
8. 스스로에게 “경청”의 중요성을 말하라.
경청은 독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도 한다.
경청은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고 사람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9. 내적(內的), 외적(外的) 혼란을 통제하고 자신이 마치 해결사가 되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인상을 주지 마라.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지만 전능자에게 가지고 가야 해결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10. 하나님의 인도(引導)하심을 구(求)하라.
대화를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마음속으로 기도(祈禱)하라.
◯ <성경에서 말하는 경청의 기술>
[이사야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약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경청(傾聽)을 잘못하여 결국엔 생명을 잃게 된 성경의 사례>
[사무엘 상 25:1~11]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의 경우를 참조 하자
나발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도망친 종들이라고 비꼬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나발이 다윗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조절해 왔다. 그러나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우리처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선대했건만 상대는 저주와 모욕으로 갚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나발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윗의 부친이 누구이며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그는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부하들 곁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아비가일에게로 갔다.
◎ <그리스도의 모본(模本)>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비와 동정과 사랑의 말씀과 또는 행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항상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슬픔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없애 주셨다.”(살아남은 이들, 204)
◎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발과 같이 될 것이다.
월요일(10월 25일)
<행동(行動)은 말보다 강력(强力)하다>
▣ <아비가일이 미련한 남편 “나발”의 잘못을 수습하는 이야기>
나발의 종중에 하나가 다윗의 소년들을 보낸 후에 급히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가서 그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羞辱)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이 매우 선대(善待)하였으므로 우리가 상(傷)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나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 이다.”고 말하였다.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과 상의하거나 그의 의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량의 식량을 준비하여 나귀에 싣고 종을 시켜 먼저 보내고 자신도 다윗의 무리를 만나려고 출발하였다. 여인은 산의 유벽한 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하였다. 아비가일은 마치 왕관을 쓴 군주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존경하는 말로 다윗에게 말하였다. 나발은 경멸하는 말로 “다윗은 누구냐?”고 부르짖었으나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이나 교만심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의 불친절한 행동은 결코 계획적인 인신 모욕이 아니요 다만 비참하고 이기적인 그의 본성이 폭발한 것이라고 다윗에게 설명하였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그의 성급한 의도에서 돌이키려는 이 설득으로 자신의 면목을 세우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렸다. 그 후에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화목 제물로 풍부한 식량을 제공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대장의 분노를 일으킨 장본인처럼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말하기를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赦)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 이다”고 하였다. 아비가일은 은근히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하였다.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다. 다윗은 비록 반역자처럼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개인의 과오에 대하여 복수하려 하지 말아야 하였다. 아비가일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하였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삼상 25:29-31). (부조와 선지자 665)
◯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어리석게 반응할 뻔했던 다윗은 아비가일의 신속한 대응과 지혜로운 언사에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
◯ (야고보서 2: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믿음의 백성들은 자칫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믿음은 행위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아비가일, 다윗 그리고 나발의 행동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행동의 위력>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은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의 후덕한 삶과 이타적인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그 같은 의를 바라게 한다. 그 사람은 이기적인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에 반하게 되며, 하나님은 존귀케 되시며, 그분의 이름은 영화롭게 된다.”(교회증언 2권, 443)
◯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화요일(10월 26일)
<말할 때>
▣ 말[語]에 관련된 속담(俗談)은 많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일 잘하는 아들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들 낳아라.” 등 말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속담도 있지만 “혀 아래 도끼 들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 등 말에 대해 경계하는 속담이 더 많다.
요즘은 말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말 잘하는 사람이 인기와 인정을 받으며, 화술 자체가 능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 말 잘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쉽게 신뢰를 잃는 경우가 많다.
말보다 행동을 통해
▣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 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恩惠)스런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답니다.
▣ <말 한마디의 힘>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말(언어·言語)로 인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도 있다.
잠언서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제가 한 말로 등에 매를 맞고 슬기로운 사람은 제가 한 말로 몸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를 역(逆)으로 풀이하면 말 한마디로 인해 천 냥의 빚을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은 말 한마디라도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혀뿌리를 조심하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실제 우리 주위에서 이같이 말 한마디로 곤경에 빠지고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대화를 할 때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가능하면 남의 험담이나 나쁜 이야기는 하지도, 옮기지도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마다 늘 이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들과의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또 안 해도 좋을 말까지 하면서 곧 바로 후회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른다.
사실 남에 대한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남에 대한 나쁜 말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이는 우리 마음에 내 이웃의 실패나 타락의 소식을 들으면 즐기고 싶은 본성이 있어 그저 타락한 내적 본성의 충동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거나 들을 때면 본성의 충동을 느끼는 우리는 창자 깊은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며 상대적으로 자신이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착각에 빠져든다. 아마 인터넷 악플을 즐기고 또 악플이 인기가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착각에 빠지다 보니 입만 뻥긋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험담과 중상모략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대리 만족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확인조차 없이 한 사람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아 놓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에 대한 좋은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 대한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의지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해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다.
칭찬을 하고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모든 게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좋은 말도 평소 자주해 습관이 되어야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다.
말로는 “잘 한다.”라고 하는데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면 상대의 입장에서는 칭찬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암튼 교만한 사람은 말을 통해서 다른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자신도 유익함과 칭송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히 우리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실감날 정도다. 분명한 것은 나쁜 말·험담을 일삼아 하는 사람은 그릇된 본성(本性)으로 인해 건강하지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말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은 밝은 심성(心性) 때문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라 할지라도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고 했듯 긍정적인 행동을 강화시켜주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을 만난 것은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입니다” 참으로 좋은 이런 말을 많이 하고 듣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악(惡)플 보다 선(善)플이 더 활개를 치는 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늘 편안하고 기분이 좋고, 또 만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가정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우리가 강조한다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때로는 말 한마디가 가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늘 자신의 마음을 닦는 사람, 말 한마디라도 지혜롭고 슬기롭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름답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이 사회는 밝고 맑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남의 잘못을 알고 지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잘못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 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는 말의 의미를 이번 교과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깊게 되새겨 봅니다.
골짜기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고 그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예우하였다.
○. 사무엘 상 25장23~31절에서 아비가일의 말과, 나발의 대답(10~11절)과 얼마나 대조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발은 상대로 하여금 반감을 일으키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아비가일의 말은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사냥감을 찾는 무리의 두목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행동해야 함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윗 안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그녀는 다윗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다윗이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이 사태의 책임을 기꺼이 자신이 짊어짐으로써 자신의 집에 속한 자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救援)하고자 했다.
아비가일의 말은 성경의 위인(偉人)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백성들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悔改)하며 용서(容恕)와 자비(慈悲)를 구했다.
이런 중보의 자세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사(反射)하고 있다.
중재를 하려면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중재자는 중재 과정 중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기꺼이 뒤로 하고 오직 다른 이의 유익을 구했다.
○ <적절한 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감화력이 미치는 사람들에게 때에 맞는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주 예수를 제대로 섬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잠 2:10, 11)할 것이라. 그대는 지혜로 입을 열게 될 것이며, 그대의 혀는 친절한 말로 넘칠 것이다.”(교회증언 6권, 69)
○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하고 그들이 경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중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요일(10월 27일)
<아비가일이 거부(拒否)한 일>
▣ <아비가일과 다윗과의 인연(因緣)의 배경>
다윗과 그 부하들이 바란 광야에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지역에서 막대한 재산(財産)을 가진 부자 “나발”의 양떼와 소떼를 약탈자(掠奪者)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나발은 갈렙의 후손이었으나 그 성품이 야비(野鄙)하고 인색하였다.
때는 양털을 깎는 시기였고 손님을 후히 대접하는 계절이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식량이 매우 궁색하였다. 그 때의 풍속에 따라 이새의 아들은 열 명의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저희 주인 이름으로 나발에게 문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다음의 말을 덧붙여 말했다.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 하라 네 집도 평강 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 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갈멜산이 아니고 마온 성읍 가까운 유대 영토에 있는 한 장소임)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입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과 그 부하들은 나발의 목자와 양떼를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었다. 그리고 이제 이 부자는 그에게 귀중한 도움을 주었던 자들의 곤궁을 구제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그 양떼나 소떼에서 그들의 필요를 취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직하게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친절은 나발에게 효과가 없었다. 그가 다윗에게 보낸 대답은 다음과 같이 그의 성품을 나타내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소년들이 빈손으로 돌아와 다윗에게 그 사연을 말했을 때에 다윗은 화가 잔뜩 났다. 다윗은 자기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그를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킨 자를 멸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부하들에게 싸울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이 같은 충동적인 행동은 다윗의 성품보다는 사울의 성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새의 아들은 아직도 고난의 학교에서 인내의 공과를 배워야 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664)
▣ <현숙(賢淑)한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얻을 교훈 >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智慧)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꽃향기(香氣)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敬虔)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靈)이 여인의 마음에 거(居)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躁急)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惡)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이것은 순결(純潔), 기지(奇智), 단순(單純),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된다. 이것은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無我的) 사랑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긴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眷顧)자였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다. 다윗은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의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의인(義人)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시 141:5)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그 책망을 받아들였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 (부조와 선지자 667)
▣ <육신(肉身)만을 사랑하며 사는 미련한자(나발)의 종말(終末)>
집으로 돌아온 아비가일은 나발과 그의 손님들이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향락에 빠진 것을 보았으며 그들은 크게 취하여 그 잔치를 주정하는 장면으로 바꿔 놓았다. 이튿날 아침까지 여인은 다윗과의 회견에서 일어났던 일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발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그의 어리석음이 그에게 돌연한 죽음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나발은 중풍에 걸린 사람 같았다. 나발은 다윗이 전과같이 복수할 결심을 가지고 추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가망 없는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졌다. 10일 후에 그는 죽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생명은 세상에 저주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발이 환락(歡樂)과 환희(歡喜)에 빠져 있을 때에 비유(譬喩) 중에서 한 부자(富者)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에게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리라”(눅 12:20) 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그 후에 아비가일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미 한 아내의 남편이었으나 그 시대의 민족들의 풍습이 그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그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 비록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의 습관을 따르는 과오를 범하였다. 여러 아내와 결혼한 쓰라린 결과를 다윗은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느꼈다. (부조와 선지자 667)
◯ 아비가일은 나발과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는 치부(致富)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고 솔직하게 나아오는 여인에게 다윗은 존경과 동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 <치우치지 않는 미덕(美德)>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懇請)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虛飾)이나 교만심(驕慢心)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獻身)의 깊이를 나타내었다.”(부조와 선지자, 666)
○ 학대(虐待)를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아간다.
목요일(10월 28일)
<등장(登場) 그리고 퇴장(退場)>
▣ <아비가일의 등장(登場)은>
아비가일의 등장은 (사무엘 하 25장2-44절)에 미련한자(악인(惡人))인 “나발”의 아내로 등장하여,
하나님의 영(靈)과 지혜로 다윗의 보복에 대한 극한 상황에서 먼저 다윗을 찾아가 겸손하고 지혜롭게 조언함으로
끔직한 유혈사태를 막고 이후 이에 감동된 다윗의 아내가 되기까지 한다.
아비가일은 감화를 끼치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하녀(下女)가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함께 섬기는 여주인이었다.
예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8).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당시의 관습(慣習)대로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의 가족사(家族史)는 하나님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 부인(夫人)이었고, 다윗은 여전히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였다.
시글락에서 그녀는 다른 부하(部下)들의 가족들처럼 아말렉의 노예(奴隸)로 잡혀갔다가 구조되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 <아비가일의 퇴장(退場)은>
우리는 다윗 왕 곁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침묵(沈黙)하고 있다.
단지 그녀에게 다니엘(대상 3:1) 또는 길르압(삼하 3:3)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추가됐을 뿐이다.
아비가일과 그의 자녀들은 그렇게 무대(舞臺)에서 사라졌다.
어떤 학자들은 아비가일과 그녀의 아들들이 살해(殺害)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다윗의 아들들이 저지른 강간(强姦), 살인(殺人), 봉기(蜂起), 반란(叛亂) 이전에 사망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꼭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신뢰심(信賴心)이다.
◯ <역사(歷史)의 진정한 주인공>
“인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모든 왕국들의 흥망은 마치 사람들의 의지나 용기에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건들의 생성은 그 대부분이 사람의 능력, 야심, 혹은 변덕에 의하여 결정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휘장이 열려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심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선지자와 왕, 499)
◯ 이 땅에서는 지혜(智慧)롭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행복한 결말(結末)을 보장(保障)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초점(焦點)>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며, 행동은 말보다 앞선 사람이고, 말할 때는 상대의 마음속에 존귀함에 호소하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가며 비록 그의 생애가 동화(童話)같은 인생을 살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선(善)하심에 대한 신뢰심이 있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 지난주(제4과)를 올리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머리숙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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