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과 아비가일: 상황에 지배 받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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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10-22 12:23 조회7,027회 댓글0건본문
10월 30일(안식일)일몰: 오후 5시 37분
기억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잠 14:3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25장, 사 28:23, 53:12, 단 9:15~19, 마 15:10, 롬 8:34.
상황이 그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낀 적이 있는가?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는가? 그렇다면 이번 주에 공부할 아비가일의 삶을 묵상해 보라.
그녀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미련한 나발과 결혼하였다. 갈렙의 후손이었던 나발은 조상의 명성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자였으나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가문끼리 자녀의 결혼을 미리 약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은 마치 그녀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조건이 유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비가일이 남긴 삶의 일면을 통해 상황에 지배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비가일은 현실 도피를 꿈꾸지 않았다.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삼상 25:25). 하지만 그 상황이 자신을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장하리라 다짐하였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삼상 25:41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아비가일의 상냥한 재치, 나발의 어리석은 욕설 그리고 다윗의 분노에 찬 반응을 대조한다.
⊙ 느끼기 :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평화와 위로의 빛을 비춰주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드림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와 지도에 따라 다른 이들을 지혜롭고 원만하게 중재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상냥함과 빛
A. 우리의 언행은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어떻게 나타내 보이는가?
B. 아비가일은 나발과 다윗에 대하여 신중하고 지혜롭게 처신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용감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였는가?
02. 느끼기: 빛의 통로
A. 아비가일의 지혜는 어디에서 왔는가?
B. 그녀는 다윗과 나발 사이의 긴장 국면을 어떻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되돌려 놓았는가?
C.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아비가일의 조언에 대하여 다윗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03. 행하기: 중재
A. 지혜롭고 재치 있게 조언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 중 하나이다. 우리가 아비가일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B.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용기와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가?
C.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중재하는 일에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요 점 : 아비가일은 악인의 아내였지만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하여, 다윗이 보복에 나섰을 때, 겸손하고 재치 있게 조언함으로써 끔찍한 유혈 상태를 막았다.
일요일(10월 24일)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대부분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사실 너무 말이 많아 탈이다. 듣기를 잘하면 훨씬 좋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는 강좌도 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잘 들을 필요가 있다.
1. 사 28:23, 마 15:10, 약 1:19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마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답: 속히 듣되 자세히 듣고 깨달아야 한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었다. 바란 광야에 머물 때, 그들은 대지주인 나발의 목동들과 가축들을 만났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양털 깎는 계절이 돌아오자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감사를 표하고 선물을 돌리는 시절이 온 것이다. 다윗은 양식을 얻고자 나발에게 열 명의 부하를 보냈다.
2. 삼상 25:1~11을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에 다윗이 흥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삼상25:1~1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답: 나발이 자신을 도주한 종과 부랑자로 치부했을 때, 억눌려 있던 다윗의 감정이 폭발하였다.
나발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도망친 종들이라고 비꼬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나발이 다윗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조절해 왔다. 그러나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우리처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선대했건만 상대는 저주와 모욕으로 갚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나발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윗의 부친이 누구이며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그는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부하들 곁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아비가일에게로 갔다.
그리스도의 모본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비와 동정과 사랑의 말씀과 또는 행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항상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슬픔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없애 주셨다.”(살아남은 이들, 204)
<부가설명> 갈멜 족속이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에는 갈렙(Caleb) 족속이라고 되어 있다. 원어로는 “칼리보”이다.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른 것 같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그 근방에서 으스대며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모습을 본문 성경에서도 느끼게 된다.
그는 귀를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듣는 정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심부름꾼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모욕하여 돌려보냈다. 다윗은 나발의 태도와 말에 격노하였다. 책에 있는 대로 사울에게 그렇게 관대했는데, 나발의 말에 격노하여 진멸하려고 일어선 것이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서 읽는 본문보다 히브리 사람이 히브리말로 나발의 말을 들을 때 느끼는 내용이 더 심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발은 하나님의 일을 조롱하는 자들을 표상하는 인물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말을 자세히 듣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대답하고 처리하는 것은 나발의 본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바르게 이해함으로 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발과 같이 될 것이다.
월요일(10월 25일)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1. 삼상 25장을 읽으십시오.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어떤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습니까?
[삼상25:1~44]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 읽으십시오. 너무 길어서 여기에 옮기지 않습니다.
답: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어리석게 반응할 뻔했던 다윗은 아비가일의 신속한 대응과 지혜로운 언사에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
하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비가일은 즉시 채비를 하였다. 그녀는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삼상 25:18~19에서 화자는 그녀가 준비한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건포도, 무화과, 양, 볶은 곡식, 떡 그리고 포도즙. 이 음식들은 다윗의 부하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풍족하였을 것이다.
이후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성경기자는 장면들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만남의 순간을 기다린다. 감정이 극에 달한 다윗과 부하들은 미처 하나님께 묻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복을 위해 출발하였다. 다윗과 함께 간 부하의 수는 분노의 정도를 말해 준다. 다윗의 병사 삼분의 이가 출격하였다.
분노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체로 과민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선물만 보내놓고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귀의 안장 위에 올라 다윗을 만나기 위해 달렸다. 그녀는 비록 경솔하고 독불장군 같은 자와 결혼했을지라도 자신의 정신까지 짓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돼 있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맞섰던 것처럼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인들과 함께 음식을 싣고 나귀를 타고 가는 한 여인이 칼과 분노로 무장한 4백 명의 군사와 마주쳐야 했다.
한편 미련한 나발 역시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분노한 군대를 대면하러 나아가고 있는 동안 그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취해 있었다.
2. 다음 성경절들은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마 7:21, 25:31~46, 약 2:14~17.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미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답: 믿음의 백성들은 자칫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믿음은 행위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아비가일, 다윗 그리고 나발의 행동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행동의 위력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은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의 후덕한 삶과 이타적인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그 같은 의를 바라게 한다. 그 사람은 이기적인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에 반하게 되며, 하나님은 존귀케 되시며, 그분의 이름은 영화롭게 된다.”(교회증언 2권, 443)
<부가설명>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성도들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말거리를 제공한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재림신자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문제로 달려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 문제는 계명을 지키는 여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른 판단과 그 판단에 따르는 실천을 뜻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예로 든 두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과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십계명의 내용을 실행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믿고 곧장 실천한 것을 뜻한다. 믿음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이런 관계이다. 그 당연한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생활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은 곧 실천(순종)이라는 공식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교훈: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화요일(10월 26일) 말할 때
골짜기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고 그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예우하였다.
1. 삼상 25:23~31에서 아비가일의 말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10~11절)과 얼마나 대조됩니까? 이는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삼상25:23~31]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답: 나발은 상대로 하여금 반감을 일으키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아비가일의 말은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사냥감을 찾는 무리의 두목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행동해야 함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윗 안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그녀는 다윗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다윗이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2.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녀의 말은 그대에게 무엇을 상기시킵니까? 그녀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출 32:32, 에 7:2~4, 사 53:12, 단 9:15~19, 롬 8:34 참조.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에7:2~4]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단9:15~19]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답: 아비가일은 이 사태의 책임을 기꺼이 자신이 짊어짐으로써 자신의 집에 속한 자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다. 성경의 위인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백성들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했다. 이런 중보의 자세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다.
중재를 하려면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중재자는 중재 과정 중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기꺼이 뒤로 하고 오직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아비가일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태를 남편을 제거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을 동일시하고 그의 무가치한 생명을 위해 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마 가장 훌륭한 중재는 중보기도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할 수 없거나 기도할 마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자신의 소원과 필요를 내려놓고 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영역에 깊게 개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해 드린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동정심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눅 6:28).
적절한 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감화력이 미치는 사람들에게 때에 맞는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주 예수를 제대로 섬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잠 2:10, 11)할 것이라. 그대는 지혜로 입을 열게 될 것이며, 그대의 혀는 친절한 말로 넘칠 것이다.”(교회증언 6권, 69)
<부가설명> 아비가일은 남편을 위하여 중재하였다. 남편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과의 저자는 아비가일의 이런 정신을 모세와 에스더와 다니엘과 바울과 나아가서 인류를 중재한 예수님의 중재에 대한 말씀들을 참고로 제시하였다. 중재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요소이다. 예수께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다.(고후5:18~20) 아비가일의 정신과 행동은 오늘날 재림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생활의 본이다.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교훈: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하고 그들이 경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요일(10월 27일) 아비가일이 거부한 일
사람들은 학대자들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학대자를 두둔하며,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거짓을 말하며 진실을 감춘다.
1. 삼상 25:25~26을 읽으십시오. 아비가일은 남편의 흠에 대하여 얼마나 공개적이었습니까?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녀가 남편을 위해 중재한 일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누군가 지금 그대를 위해 중재한다면, 그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삼상25:25,26]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답: 아비가일은 나발과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는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고 솔직하게 나아오는 여인에게 다윗은 존경과 동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남편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지만, 아비가일은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발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 밝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학대 받는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학대자의 행동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감은 강했다. 이런 자존감은 그녀의 사명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의 길을 막고 선물을 준 일에 대하여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단지 다윗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했다. 아비가일의 자기확신은 다윗이 자기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모욕을 갚기 위해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켰다.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삼상 25:28)다는 아비가일의 언급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높은 지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아비가일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에 두셨음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체면을 세우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 주실 것이다.
아비가일이 살았던 시대의 여인들은 이혼이나 별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상의 관점에서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편의 소유였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자신이 쓸모없이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남편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아비가일의 언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혜는 이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에게 반응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치우치지 않는 미덕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이나 교만심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나타내었다.”(부조와 선지자, 666)
<부가설명> 아비가일은 자기의 중심을 지키며 자존감을 버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자기의 처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불량한 남편을 섬기고 받드는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한 것 같지도 않다. 자기의 처지가 그리 바람직한 자리에 있지 않았어도 자기의 본분을 잘 지키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르게 표현하고 바르게 대처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이런 지혜를 얻어서 생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성도로서의 자신을 잘 지키면서 자기 앞에 당한 일들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처신하는 지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칫 치우치기 쉽다. 기도와 말씀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교훈: 학대를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아간다.
목요일(10월 28일) 등장 그리고 퇴장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게 다윗은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하려던 일의 결과를 멀리 내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피 흘림을 막기 위해 개입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집에 돌아온 아비가일은 남편이 듣지 못할 상황임을 보고 지혜롭게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나발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뇌졸중과 같은 증세를 보이다 열흘 만에 죽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잊지 않고 부하들을 보내 청혼의 뜻을 전했다.
1. 삼상 25:41에 기록된 아비가일의 말을 살펴보십시오. 이를 통해 아비가일의 어떤 면을 알게 됩니까? 이와 동일한 행동 원칙을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어디에 또 있습니까?
[삼상25:41]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답: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예우보다는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전령들을 맞이했다.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계셨다.
아비가일은 감화를 끼치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하녀가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함께 섬기는 여주인이었다. 예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8).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당시의 관습대로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의 가족사는 하나님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 부인이었고, 다윗은 여전히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였다. 시글락에서 그녀는 다른 부하들의 가족들처럼 아말렉의 노예로 잡혀갔다가 구조되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윗 왕 곁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단지 그녀에게 다니엘(대상 3:1) 또는 길르압(삼하 3:3)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추가됐을 뿐이다. 아비가일과 그의 자녀들은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어떤 학자들은 아비가일과 그녀의 아들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다윗의 아들들이 저지른 강간, 살인, 봉기, 반란 이전에 사망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꼭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
“인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모든 왕국들의 흥망은 마치 사람들의 의지나 용기에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건들의 생성은 그 대부분이 사람의 능력, 야심, 혹은 변덕에 의하여 결정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휘장이 열려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심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선지자와 왕, 499)
<부가설명> 성경을 기록한 방법의 일예를 보는 듯한 사건이다. 성경은 그 기록의 필요성만큼만 기록하여 전한다. 아비가일과 다윗의 로멘스 따위는 아주 생략되었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은 일을 세상의 소설을 쓰는 사람이 썼다면 아주 멋진 로멘스로 적었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아비가일과 나발의 사건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 속에서 구속의 섭리의 어떤 면을 찾을 수 있게 한 것만 나타낸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비가일의 입으로 다윗의 사명을 나타내었고, 지혜로운 여인으로서 구주의 표상이 된 인물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 된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을 암시하였다. 그런 상징적 암시가 끝나면서 아비가일은 퇴장하였다. 드러난 것은 다윗의 사명이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명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인들도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의 존재와 언어와 생활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훈: 이 땅에서는 지혜롭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금요일(10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꽃향기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여인의 마음에 거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이것은 순결, 기지, 단순,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된다. 이것은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 사랑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긴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자였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다. 다윗은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이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시 141:5)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그 책망을 받아들였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부조와 선지자, 66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배우자 학대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8월 4째 안식일을 “학대 및 가정폭력 예방 강조일”로 정하여 신자들을 교육하고 이런 문제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 첫째로 기도로 도우고 가능한 격려하여 믿음으로 행하도록 조언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일은 당사자가 결정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정에 하나님의 영이 도우시도록 기도로 간청할 것이다. 기타 방법들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어떤 특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원칙의 타협 없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비가일은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사태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득하였다.
기억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잠 14:3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25장, 사 28:23, 53:12, 단 9:15~19, 마 15:10, 롬 8:34.
상황이 그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낀 적이 있는가?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는가? 그렇다면 이번 주에 공부할 아비가일의 삶을 묵상해 보라.
그녀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미련한 나발과 결혼하였다. 갈렙의 후손이었던 나발은 조상의 명성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자였으나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가문끼리 자녀의 결혼을 미리 약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은 마치 그녀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조건이 유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비가일이 남긴 삶의 일면을 통해 상황에 지배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비가일은 현실 도피를 꿈꾸지 않았다.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삼상 25:25). 하지만 그 상황이 자신을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장하리라 다짐하였다.
학습 도우미
| 핵심 본문 | 삼상 25:41
| 학습 목표 |
⊙ 깨닫기 : 아비가일의 상냥한 재치, 나발의 어리석은 욕설 그리고 다윗의 분노에 찬 반응을 대조한다.
⊙ 느끼기 :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평화와 위로의 빛을 비춰주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드림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와 지도에 따라 다른 이들을 지혜롭고 원만하게 중재한다.
교과 개요
01. 깨닫기: 상냥함과 빛
A. 우리의 언행은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어떻게 나타내 보이는가?
B. 아비가일은 나발과 다윗에 대하여 신중하고 지혜롭게 처신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용감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였는가?
02. 느끼기: 빛의 통로
A. 아비가일의 지혜는 어디에서 왔는가?
B. 그녀는 다윗과 나발 사이의 긴장 국면을 어떻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되돌려 놓았는가?
C.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아비가일의 조언에 대하여 다윗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03. 행하기: 중재
A. 지혜롭고 재치 있게 조언하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 중 하나이다. 우리가 아비가일처럼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B.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용기와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가?
C.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중재하는 일에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요 점 : 아비가일은 악인의 아내였지만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충만하여, 다윗이 보복에 나섰을 때, 겸손하고 재치 있게 조언함으로써 끔찍한 유혈 상태를 막았다.
일요일(10월 24일)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대부분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사실 너무 말이 많아 탈이다. 듣기를 잘하면 훨씬 좋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는 강좌도 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잘 들을 필요가 있다.
1. 사 28:23, 마 15:10, 약 1:19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마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답: 속히 듣되 자세히 듣고 깨달아야 한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었다. 바란 광야에 머물 때, 그들은 대지주인 나발의 목동들과 가축들을 만났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양털 깎는 계절이 돌아오자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감사를 표하고 선물을 돌리는 시절이 온 것이다. 다윗은 양식을 얻고자 나발에게 열 명의 부하를 보냈다.
2. 삼상 25:1~11을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에 다윗이 흥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삼상25:1~1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애곡하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답: 나발이 자신을 도주한 종과 부랑자로 치부했을 때, 억눌려 있던 다윗의 감정이 폭발하였다.
나발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도망친 종들이라고 비꼬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나발이 다윗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조절해 왔다. 그러나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우리처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선대했건만 상대는 저주와 모욕으로 갚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나발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윗의 부친이 누구이며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그는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부하들 곁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아비가일에게로 갔다.
그리스도의 모본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비와 동정과 사랑의 말씀과 또는 행동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항상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슬픔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없애 주셨다.”(살아남은 이들, 204)
<부가설명> 갈멜 족속이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에는 갈렙(Caleb) 족속이라고 되어 있다. 원어로는 “칼리보”이다. 갈렙 족속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른 것 같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그 근방에서 으스대며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모습을 본문 성경에서도 느끼게 된다.
그는 귀를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듣는 정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심부름꾼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모욕하여 돌려보냈다. 다윗은 나발의 태도와 말에 격노하였다. 책에 있는 대로 사울에게 그렇게 관대했는데, 나발의 말에 격노하여 진멸하려고 일어선 것이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서 읽는 본문보다 히브리 사람이 히브리말로 나발의 말을 들을 때 느끼는 내용이 더 심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발은 하나님의 일을 조롱하는 자들을 표상하는 인물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말을 자세히 듣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대답하고 처리하는 것은 나발의 본을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바르게 이해함으로 바른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발과 같이 될 것이다.
월요일(10월 25일)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1. 삼상 25장을 읽으십시오.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어떤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습니까?
[삼상25:1~44]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 읽으십시오. 너무 길어서 여기에 옮기지 않습니다.
답: 어리석은 사람의 말에 어리석게 반응할 뻔했던 다윗은 아비가일의 신속한 대응과 지혜로운 언사에 감동을 받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다.
하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비가일은 즉시 채비를 하였다. 그녀는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삼상 25:18~19에서 화자는 그녀가 준비한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건포도, 무화과, 양, 볶은 곡식, 떡 그리고 포도즙. 이 음식들은 다윗의 부하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풍족하였을 것이다.
이후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성경기자는 장면들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만남의 순간을 기다린다. 감정이 극에 달한 다윗과 부하들은 미처 하나님께 묻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복을 위해 출발하였다. 다윗과 함께 간 부하의 수는 분노의 정도를 말해 준다. 다윗의 병사 삼분의 이가 출격하였다.
분노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체로 과민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선물만 보내놓고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귀의 안장 위에 올라 다윗을 만나기 위해 달렸다. 그녀는 비록 경솔하고 독불장군 같은 자와 결혼했을지라도 자신의 정신까지 짓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돼 있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맞섰던 것처럼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인들과 함께 음식을 싣고 나귀를 타고 가는 한 여인이 칼과 분노로 무장한 4백 명의 군사와 마주쳐야 했다.
한편 미련한 나발 역시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분노한 군대를 대면하러 나아가고 있는 동안 그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취해 있었다.
2. 다음 성경절들은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마 7:21, 25:31~46, 약 2:14~17.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미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답: 믿음의 백성들은 자칫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믿음은 행위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가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아비가일, 다윗 그리고 나발의 행동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행동의 위력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행은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의 후덕한 삶과 이타적인 행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는 그 같은 의를 바라게 한다. 그 사람은 이기적인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에 반하게 되며, 하나님은 존귀케 되시며, 그분의 이름은 영화롭게 된다.”(교회증언 2권, 443)
<부가설명>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성도들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말거리를 제공한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재림신자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문제로 달려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 문제는 계명을 지키는 여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른 판단과 그 판단에 따르는 실천을 뜻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예로 든 두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과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긴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십계명의 내용을 실행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믿고 곧장 실천한 것을 뜻한다. 믿음과 행위는 원천적으로 이런 관계이다. 그 당연한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생활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은 곧 실천(순종)이라는 공식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교훈: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화요일(10월 26일) 말할 때
골짜기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고 그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예우하였다.
1. 삼상 25:23~31에서 아비가일의 말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10~11절)과 얼마나 대조됩니까? 이는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삼상25:23~31]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답: 나발은 상대로 하여금 반감을 일으키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아비가일의 말은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사냥감을 찾는 무리의 두목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행동해야 함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윗 안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그녀는 다윗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다윗이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2.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녀의 말은 그대에게 무엇을 상기시킵니까? 그녀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출 32:32, 에 7:2~4, 사 53:12, 단 9:15~19, 롬 8:34 참조.
[출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에7:2~4]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단9:15~19]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답: 아비가일은 이 사태의 책임을 기꺼이 자신이 짊어짐으로써 자신의 집에 속한 자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다. 성경의 위인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백성들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했다. 이런 중보의 자세는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사하고 있다.
중재를 하려면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중재자는 중재 과정 중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기꺼이 뒤로 하고 오직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아비가일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태를 남편을 제거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을 동일시하고 그의 무가치한 생명을 위해 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마 가장 훌륭한 중재는 중보기도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할 수 없거나 기도할 마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자신의 소원과 필요를 내려놓고 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영역에 깊게 개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해 드린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동정심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눅 6:28).
적절한 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감화력이 미치는 사람들에게 때에 맞는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주 예수를 제대로 섬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잠 2:10, 11)할 것이라. 그대는 지혜로 입을 열게 될 것이며, 그대의 혀는 친절한 말로 넘칠 것이다.”(교회증언 6권, 69)
<부가설명> 아비가일은 남편을 위하여 중재하였다. 남편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과의 저자는 아비가일의 이런 정신을 모세와 에스더와 다니엘과 바울과 나아가서 인류를 중재한 예수님의 중재에 대한 말씀들을 참고로 제시하였다. 중재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요소이다. 예수께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다.(고후5:18~20) 아비가일의 정신과 행동은 오늘날 재림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생활의 본이다.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교훈: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하고 그들이 경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요일(10월 27일) 아비가일이 거부한 일
사람들은 학대자들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학대자를 두둔하며,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거짓을 말하며 진실을 감춘다.
1. 삼상 25:25~26을 읽으십시오. 아비가일은 남편의 흠에 대하여 얼마나 공개적이었습니까?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녀가 남편을 위해 중재한 일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누군가 지금 그대를 위해 중재한다면, 그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삼상25:25,26]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답: 아비가일은 나발과 같은 남편과 살고 있다는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남편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고 솔직하게 나아오는 여인에게 다윗은 존경과 동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남편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지만, 아비가일은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발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 밝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학대 받는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학대자의 행동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감은 강했다. 이런 자존감은 그녀의 사명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의 길을 막고 선물을 준 일에 대하여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단지 다윗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했다. 아비가일의 자기확신은 다윗이 자기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모욕을 갚기 위해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켰다.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삼상 25:28)다는 아비가일의 언급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높은 지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아비가일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에 두셨음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체면을 세우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 주실 것이다.
아비가일이 살았던 시대의 여인들은 이혼이나 별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상의 관점에서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편의 소유였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자신이 쓸모없이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남편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아비가일의 언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혜는 이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에게 반응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치우치지 않는 미덕
“여인은 친절한 말로 다윗의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남편을 위하여 그에게 간청하였다. 아비가일은 허식이나 교만심이 없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남편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나타내었다.”(부조와 선지자, 666)
<부가설명> 아비가일은 자기의 중심을 지키며 자존감을 버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자기의 처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불량한 남편을 섬기고 받드는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한 것 같지도 않다. 자기의 처지가 그리 바람직한 자리에 있지 않았어도 자기의 본분을 잘 지키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르게 표현하고 바르게 대처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이런 지혜를 얻어서 생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성도로서의 자신을 잘 지키면서 자기 앞에 당한 일들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처신하는 지혜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칫 치우치기 쉽다. 기도와 말씀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교훈: 학대를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아간다.
목요일(10월 28일) 등장 그리고 퇴장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게 다윗은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하려던 일의 결과를 멀리 내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피 흘림을 막기 위해 개입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집에 돌아온 아비가일은 남편이 듣지 못할 상황임을 보고 지혜롭게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나발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뇌졸중과 같은 증세를 보이다 열흘 만에 죽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잊지 않고 부하들을 보내 청혼의 뜻을 전했다.
1. 삼상 25:41에 기록된 아비가일의 말을 살펴보십시오. 이를 통해 아비가일의 어떤 면을 알게 됩니까? 이와 동일한 행동 원칙을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어디에 또 있습니까?
[삼상25:41]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답: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예우보다는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전령들을 맞이했다. 예수님도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한 자들을 섬길 수 있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계셨다.
아비가일은 감화를 끼치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하녀가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함께 섬기는 여주인이었다. 예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8).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당시의 관습대로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의 가족사는 하나님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 부인이었고, 다윗은 여전히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였다. 시글락에서 그녀는 다른 부하들의 가족들처럼 아말렉의 노예로 잡혀갔다가 구조되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윗 왕 곁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단지 그녀에게 다니엘(대상 3:1) 또는 길르압(삼하 3:3)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추가됐을 뿐이다. 아비가일과 그의 자녀들은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어떤 학자들은 아비가일과 그녀의 아들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다윗의 아들들이 저지른 강간, 살인, 봉기, 반란 이전에 사망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꼭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심이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
“인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모든 왕국들의 흥망은 마치 사람들의 의지나 용기에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건들의 생성은 그 대부분이 사람의 능력, 야심, 혹은 변덕에 의하여 결정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휘장이 열려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심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선지자와 왕, 499)
<부가설명> 성경을 기록한 방법의 일예를 보는 듯한 사건이다. 성경은 그 기록의 필요성만큼만 기록하여 전한다. 아비가일과 다윗의 로멘스 따위는 아주 생략되었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은 일을 세상의 소설을 쓰는 사람이 썼다면 아주 멋진 로멘스로 적었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아비가일과 나발의 사건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 속에서 구속의 섭리의 어떤 면을 찾을 수 있게 한 것만 나타낸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비가일의 입으로 다윗의 사명을 나타내었고, 지혜로운 여인으로서 구주의 표상이 된 인물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 된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을 암시하였다. 그런 상징적 암시가 끝나면서 아비가일은 퇴장하였다. 드러난 것은 다윗의 사명이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명을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인들도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자기의 존재와 언어와 생활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훈: 이 땅에서는 지혜롭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금요일(10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꽃향기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여인의 마음에 거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이것은 순결, 기지, 단순,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된다. 이것은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 사랑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긴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자였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다. 다윗은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이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시 141:5)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그 책망을 받아들였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부조와 선지자, 66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배우자 학대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도울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8월 4째 안식일을 “학대 및 가정폭력 예방 강조일”로 정하여 신자들을 교육하고 이런 문제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 첫째로 기도로 도우고 가능한 격려하여 믿음으로 행하도록 조언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일은 당사자가 결정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정에 하나님의 영이 도우시도록 기도로 간청할 것이다. 기타 방법들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2.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어떤 특성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원칙의 타협 없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비가일은 온화하고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사태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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