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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 부수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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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9-22 18:57 조회5,2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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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9월25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5분

제13과
<부수적(附隨的)인 것들>

<記憶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로마서 14:10).

▣ 본 제13과는 로마서 14장 15장 16장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신앙에 대한 다음의 교훈을 주고 있다.
<1> 의(義)롭게 된 사람의 교회생활은 선(善)을 이루고,
<2> 덕(德)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하며,
<3> 선(善)함에 있어 더욱 지혜롭게 사는 방법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다.

<要點>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각자 다르게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존중하며 서로 배우는 정신을 배양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다.

일요일(9월 19일)
<연약(軟弱)한 형제(兄弟)>

▣ 그리스도인의 교회 공동체 생활 중에서 견지해야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고,
서로 덕을 세우는 데 힘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은 남을 판단하지 말고 덕을 세우라는 말이 주제이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비평이 생기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바울은 음식문제와 날짜문제를 들고 있다.

▣ 믿는 형제간에는 신앙의 수준이나 태도에 서로 차이가 있을지라도 비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로 감싸고 선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비평의 요인으로서 음식(飮食)문제를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4)
이러한 음식 문제가 어떤 암시나 배경의 설명 없이 불쑥 나오는 것은 편지의 발신지와 수신자 사이에
이미 공통적인 이해가 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이해는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 본문의 뜻을 분명히 알기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당시의 음식 시비는 어떤 것 이였을까.
그것은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를 같은 기자에 의해 기록한
고린도전서 8장과 골로새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로마서 14:1~3절)의 말씀은 믿음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적용하는 부수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마다 다양성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문구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강하게 되는 방법을 조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민한”(하나님이 아닌 동료 신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신자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로마서 14:3).
(로마서14:4절)은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다.
성경이 가르치는 일반적인 원칙을 벗어나지 않을 때 그것으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 <비판(批判)하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후 13:5; 고전 11:31).”(시대의 소망, 313)

◎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

월요일(9월 20일)
<그대가 사용하는 잣대>

▣ 인생의 삶 가운데에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우지간이나 다른 성도들을 자주 미워하거나 깐보는 경우가 다소(多少)에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잣대로 다른 성도들을 재어보기 때문이다. 특히 의식주(衣食住)와 교회에서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서슴없이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여 성도들 한 분 한 분들에게 대한 감정의 평가가 머릿속에 메모리 되어 있어 좀체로 부정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전환하기가 아주 아주 힘들어하며 평생을 그러한 관념(觀念)안고 신앙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풀지 않고 잠드는 사람들이 죄인인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를 잘 알고 경험해본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했는가 말이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던 그 흉악한 편견의 사람이 바울 이였지 않는가?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잘 묘사한 고린도전서 13장의사랑 장(章)을 비롯해서 그에 서신(書信)모두에서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피력하고 권면하고 실천하라고 주의 편지서의 주제(主題)가 전부이지 않는가? 우리“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시여 성경을 많이 읽고 잘 알고 해박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남을 이웃을 아니 실패나 실수한 사람을 이해(理解)나 용서를 못하면 분명 하늘나라 시민이 아니요 하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하늘나라는 품성만 가지고 간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실제의 삶은 어떻습니까?
로마서의 핵심과 복음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이 세상 초림과 재림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아니 이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실천하셨고 교훈하신 그분을 만난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는 결론입니다. 그가 만나고 그가 전하는 복음 중에 복음이 되는 로마서를 통하여 나의 이웃이나 우리주위에 성도님들을 폄하(貶下)하거나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누(累)를 범하지 않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십자가(十字架)앞에 내어 놓으시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잣(尺)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지혜나 지식을 잣대로 표현 해본다면
교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거나 전혀 듣지 않은 분들의 잣대를 약 10㎝자(尺)로 표현해봅시다,
또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의 잣대를 100㎝자(尺)로 표시해보고요,
세상의 지성인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이나 박사(博士)들을 1,000㎝자(尺)라고 표현 해보구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의 수준을 10,000㎝자(尺)라고 가정해봅시다.
이러한 크기의 잣(尺)대로 서울에서 부신까지의 거리를 잴 수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서울에서 미국 뉴욕까지를 잴 수가 있을까요?
우리들의 이러한 잣대로는 보이는 길이도 잴 수가 없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죄인인 우리가 먹는 음식과 날짜에 대하여 신앙생활에 대하여
우리 이웃들과 교우님들에게 들이대는 잣(尺)대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로마서14:10절)은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요 8:7).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흠 없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 (로마서14:11절)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결정하고 생활하도록 용납하라.
자기 결정은 그날 자기가 책임을 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 (로마서14:14절)은 우상에게 바쳐졌다하더라도 음식 자체가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양심은 존중 받아야 한다.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정결한 짐승인지 부정한 짐승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상(偶像)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참조). 따라서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强)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민(銳敏)한 자들을 “약(弱)한 자들”이라고 무시하였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 <자신을 표준으로 삼지 말 것>
“그대의 의견, 의무에 대한 그대의 견해, 성경에 대한 그대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표준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그대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정죄하지 말라.”(산상보훈, 123)

◎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양심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화요일(9월 21일)
<거리낌이 되지 않음>

▣ <음식문제(飮食問題)>
로마서 14:1-3절에 채소(菜蔬)먹는 것을, 고기 먹는 것에 비해 믿음이 약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21절)에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교인들 사이에서 고기 먹는 것이 상당히 꺼리는 일로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전 8:13)고 했는데
고기 먹는 문제가 당시에 형제를 실족케 할 수도 있는 문제였던 것 같다.

이러한 말들을 볼 때 고기 먹는 문제가 어긋나는 문제는 아닐지라도 거리끼게 생각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고기 먹는 것은 개인의식(個人意識)의 차이일 뿐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런데 왜 상당한 교인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실족할 수도 있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하여 초기 교회의 총회결의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5장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유대로부터 온 그리스도인들이 의문(儀文)에 속한
율법도 강조함으로 신자들 사이에 적지 않는 변론이 일어났다.
이래서 이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올바른 지도(指導)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리하여 기독교 사이에서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총회가 열렸다.
이때 예수님의 교훈과 성령의 도움을 받은 사도(使徒)들이 모여 진지하게 기도(祈禱)한 후에
신앙의 기본 강령을 정하여 회답하였는데,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행 15:28-29)
고 하였다.

여기서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은 앞 20절에서 “우상의 더러운 것”을 받아 말한 것이고,
고린도전서 8장13절은 앞 1절의 “우상의 제물”과 “우상의 더러운 것”과 “고기”를 비슷한 의미로
혼용해서 썼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먹을 수 있는 시중의 고기가 대부분 우상의 제물에서 나온 것들이고 또 영적으로나
위생적으로 상당히 더러웠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중근동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안 먹는다는 말이 고기를 안 먹는다는 의미로 쓰일 정도였고,
거기에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은 예루살렘 결의에 의하여 당연히 지켜야할
도리(道理)로 알게 되었다.

사도행전 15장과 고린도전서 8장8-9절에서의 같은 환경에서 본 로마서 14장의 권면이 주어졌고, 본문자체도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로마서 14:2)로 시작 하지만 결론 부분에 가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 함이
아름다우니라.” (로마서 14:21절)로 귀착(歸着)하고 있음으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 되느니라” (로마서 14:14절)은
말을 무슨 고기든지 정하다고 생각하고 먹으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이미 그들의 분명한 신조(信條)가 된 그 “요긴한 규정”안에서,
더욱이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성결의무인 레위기 11장의 교훈(敎訓)안에서 일어나는
채소만 먹는 자와 고기를 먹는 자의(고전 8:4 참조) 차이와 시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영적지도자 이었던 베드로의 경험도 이 문제에 참고가 되겠는데, 수제자 베드로는 환상을 보는 중에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당에 네발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은 네가 속되다고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사도행전 11:6-10절)고하였다.
이 말씀은 아무고기나 먹어도 된다는 허락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계시가 주어진 목적은 이방인을 짐승처럼 부정하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선교적 안목을 넓혀 주기위한
계시였지 직접 음식문제를 다룬 계시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기 먹는 문제에 적용시키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베드로가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끝내 먹지 아니한 태도는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는 것은 충분히 나타낸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철저한 신앙을 한 번의 환상으로 완전히 뒤엎는 것은 성경의 태도가 아니다.
음식에 대한 기본 성결과(레위기 11장)그 “요긴한 규정”은 시비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도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31)할 것이요,
성경이 분명히 부정(不淨)하다고 말한 고기를 먹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以上)의 말씀에서 성경의 성경 교리 안에서라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데는 법률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믿음으로 해결되는 성령의 영역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⑴. 마음에 꺼리면서 먹는 경우와,
⑵. 믿음이 강하다면서 고기를 자유로이 먹음으로 다른 약(弱)한자를 거리끼게 하는 두경우로 해석이 되는데,
두 경우 모두 음식자체는 부정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정신 때문에 악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 (로마서 14:22절)의 이 말씀은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위가 타인의 양심을 상(傷)하게 하거나
그의 양심에 어긋나는 모본(模本)을 보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오락을 즐기든지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 심지어 식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선악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를 존경하는 누군가가 그대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도 그대의 잘못된 모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본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다.

○ <중요한 특성들>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특성들은 곧 인내와 오래 참음과 화평과 사랑이다. 사랑이 부족할 때에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된다.”(교회증언 6권, 398)

◎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가 되는 일을 행하는 모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요일(9월 22일)
<날들을 지킴>

▣ <날짜문제>
성경에는 신앙(信仰)과 연관된 날짜들이 많이 있다.
<첫째가> 창조(創造) 때 제정되었고, (창세기 2:1-4절)
십계명에 명시된(출애굽기 20:8),의 일곱째 날 안식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로 강조되었고,(에스겔 20:12, 20절),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켰고 (사도행전 16:13절), 말세에도 지켜야 할 (마태 24:20절) 확실한 성일(聖日)이다. <그 다음은> 유월절(逾月節) (누가복음 22:8, 15-16절), 장막절(帳幕節) (요한복음 7:2절),
대 속죄일 (레위기 23:27절), 오순절 (사도행전 20:16절), 부림절 (에스더 9:26절), 수전절 (요한복음 10:22절)
월삭 (이사야 66:22절) 등이 있다. 이런 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켰던 날들이다.

현대의 기독교 축일(祝日)들은 바울당시에는 없던 것들인 만큼, “이 날을 저 날보다”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모든 날들을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로마서 14:5절을 이해한다면 말세 때까지 강조되어있는 안식일까지도(마태복음 24:20절)이 한마디로 뒤엎어지는 꼴이 된다.
그리고 어떤 종교적 축일도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이런 것은 성경의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어느 한마디도 모순되거나 폐기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기록의 배경과 의도를 제대로 알면 각 구절들이 서로 조화되게 되어있다.

성경에서 지키라고 한 날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님의 절대불변(絶對不變)의 권위를 나타내는 “기념일(記念日)”이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상징적(象徵的) 기념일”이 있다.
“절대적 가치를 가진 날”과 “상대적 가치를 가진 날”이 있다는 말이다.
안식일(安息日)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가 들어있는 기념일이고,
다른 날들은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사업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든 상징적인 날이다.
이런 상대적인 예표의 날들은 실체(實體)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상징을 성취하심으로 구속력을 상실했다. (골로새서 2:14-16; 에베소서 2:15; 갈라디아서 3:19절 참조).
심지어 안식일이라 불려지는 날 중에도 이런 의문(儀文)에 속한 날이 있었는데,
장막 절기를 위한 7월1일과10일의 안식일이 그런 날이다. (레위기 23:24-32절 참조).
주일주기와 상관없이 10일간격의 이 축제의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안식일과 구별하여 절기 안식일이라고도 하는데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6절)는 말은 이런 절기에 속하는 날들을 서로 조화 보완되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서로 조화 보완되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자신도 날짜를 인하여 폄론(貶論)하지 말고 각자 자기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면서도 유월절에 참석하기위해 애를 쓴 모습을 보이는데 (사도행전 18:21-), 신앙이 법률적 판단으로만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도바울 당시 특히 음식과 날짜 문제에 그런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이 두 문제를 언급했다고 보인다.
상대적 가치의 날들이라면 율법적 판단보다는 화목과 성경 정신이 교회 공동체 생활의 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로마서 14장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로마서 14:4~10절)에 바울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교에서 전래된 몇 개의 축일(祝日)을 준수하는 문제에 대하여 서로 정죄할 필요가 없다고 권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날을 준수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이었다.
하지만 안식일(安息日)은 이런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계명(誡命)은 핵심적인 문제 곧, 도덕법(道德法)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어떤 날들을 준수하는 문제로 초대교회에 논쟁이 있었는가?
갈라디아서 4:9~10절에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 신자들을 질책하였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그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안식일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
“안식일은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담과 하와가 지켰고 온 하늘의 천군들도 역시 이 날을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초기문집, 217)

◎ 일부 날들을 중요시 여기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같은 범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목요일(9월 23일)
<적절한 축도(祝禱)>
▣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은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을 요약하는 말씀으로 (고전 10:24, 33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求)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救援)을 얻게 하라” 는 권면의 말씀과 더불어 “인내(忍耐)의 하나님”, “위로(慰勞)의 하나님”, “소망(所望)의 하나님”, “평강(平康)의 하나님”께서 로마 교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祝願)하면서, 바울은 모든 민족을 구원(救援)하기 위해 주신 복음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인들이 견고하게 되기를 기원했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서신을 마치고 있다.

▣ 성도들은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서 선(善)을 이루고 덕(德)을 세우는 적극적인 선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
교회 내에는 신앙의 수준과 신분과 지식, 개성과 취미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각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비평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연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의 개성과 수준의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뜻이 같게 하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25-217절의 유명한 편지를 축도(祝禱)로써 완전히 로마서를 마무리 짓고 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6:25~27).

선지자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바울은 편지를 시작 할 때나 끝날 때 특별한 송영 또는 축도를 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는 자의 찬양으로서의 또는 신자들 사이의 공통된 기원으로서 축도는 언약과 소원이 농축(濃縮)되어 있는 고백이다.
성도(聖徒)의 간결한 기도(祈禱)요 소원(所願)으로서 고린도후서 13장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은 교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축도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도 장엄한 축도로 편지서(便紙書)를 끝맺는데 “바울의 복음”으로 믿는 자들을 견고케 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함”이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케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고 있다.
이 축도 속의 복음의 내용(나의 복음과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역사(영세전(永世前)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복음의 전파(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복음의 능력(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런 축도로써 바울은 로마서의 모든 글을 끝맺는다.

◯ 인내(忍耐)의 하나님이란 그의 자녀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돕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불굴의 용기” 또는 “꾸준한 참을성”을 의미한다.
위로라는 말은 “격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은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란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 <믿음의 격려(激勵)>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그 산 믿음을 갖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
(교회증언 9권, 273)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가 있을 때에 화잇 부부를 바라보고 그 문제에 대한 권고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 많은 이들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해도 될까요? 그 사업을 해도 될까요?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성경을 읽어라. 그분의 생애를 모방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좁은 길에서부터 빗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대의 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면, 그대는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118~119)

○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 “교회 안에는 언제나 혼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정신이 인간 도구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임명하신 직분에 있는 사람들의 권고를 존중하고 그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임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도행적, 163~164)

<초점(焦點)>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서로가 가치 있게 여겨야 하며,
서로가 다른 점이 많지만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서로가 용납하고 존중하며,
서로 배우는 정신으로 연합의 정신을 갖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는
의(義)롭게 된 사람의 교회생활은 신앙을 가진 형제들 사이에서 음식문제나 날짜문제와 같은 것들로 인하여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며 다양성 속에서 서로가 가치 있게 여겨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기(2010년 제3기)동안 부족한 글을 찾아주시고, 기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 제4기에도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은혜가운데에서 만나뵙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살롬. <이봉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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