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부수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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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9-15 07:27 조회5,02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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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3과 부수적인 것들
9월 25일
일몰: 오후 6시 25분
도입)
엘리나 라는 78세 된 화란 출신의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의 평생소원은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50년간 담배를 끊기 위해 클리닉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할머니는 어느새 78세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나 할머니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뒤늦게 사랑 하게 되었다. 제이슨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단 한 가지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오. 당신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나와 맞지 않는 거 같소.”라고 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제가 담배를 끊지요”라면서 그 순간부터 담배를 끊었단다. 그녀의 50년간 이루지 못한 평생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사의 마지막 줄에는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할머니의 멋진 고백이 실려 있었다.
기억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 14~16장
어떤 사람이 고령의 유명한 랍비를 찾아가 율법의 전체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랍비는 한 발로 서서 “너에게 해로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랍비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은 근본적인 것이고, 나머지 것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구원의 근본적인 원칙에 상당히 집중해 왔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구약의 모든 제도가 필요한지 아니면 십계명의 역할만이 필요한지 연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용납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이방인 간수의 질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거기에 대한 설명으로 바울은 이제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바울은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을 다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중요하다.
일요일
9월 19일
연약한 형제
도입)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앙은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행사되어야 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태도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고기를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미숙한 어떤 형제가 실족케 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교회 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밝혀주고 있다. 나의 신앙의 자유가 약한 자들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연약한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을 때 그것은 그 사람 책임이니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치는 것이란 ‘프로스콤마’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데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나로 인해서 약한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나는 나의 행위를 조심하고 절제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 중심의 신앙인의 모습이다.
롬 14:1~3에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나온다.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에서는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그런 종류의 육류를 삼가도록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것인지는 항상 의문시되었다(고전 10:25). 그럼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차라리 채식을 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채식주의나 건강한 생활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또한 이 본문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폐지되었다는 어떤 암시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롬 14:2)라는 말씀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그와 같은 적용은 다른 신약의 본문들과 배치될 수 있다.
반면 믿음이 약한 자를 받으라는 말씀은 교인으로서의 그의 권리와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을 온전히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교인들이 그와 논쟁을 하는 대신 그가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❶ 그렇다면 롬 14:1~3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3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문구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강하게 되는 방법을 조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민한”(하나님이 아닌 동료 신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신자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❷ 롬 14:4은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교훈: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
부가적용)
애하고 어른이 싸우면 어른이 잘못한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문자 그대로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약한 자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감수 하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생각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가장 주요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높은 신앙을 이해하고 그 수준에 올라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내세워서 자기의 주장이나 고집대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자신이 지키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이 왜 강요되어야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신다. 지식은 개인적인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 지식의 폭과 생각이나 이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유익을 준다. 또 사랑은 어디나 통하는 것이다. 이론과 지식은 사랑을 동반할 때 빛을 발한다. 사랑이 없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은 교만심을 준다. 사실 무슨 지식이든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판단하고 분별한다.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무시하고 어리석게 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식은 차가운 것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따뜻하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성격이 있다. 사랑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지식은 자신을 세우는데 필요하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식이 빛을 발하고 날개를 다는 것은 사랑이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아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월요일
9월 20일
그대가 사용하는 잣대
도입)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부분 초신 자나 평신도로 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대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된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을 하였다.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있다’든지 ‘가졌다’ 안다, 고 생각하는 순간 나오는 것이 자기요 인간적인 교만이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자기 포기와 겸손을 전제로 하고 시작되지만 이 믿음이 있다고 본인이 느끼는 순간 이상한 것이 나오고 자아가 나오게 된다. 성경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믿음에 자료가 되지만 그 지식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오래 믿어서 신앙의 경험과 여러 가지 교회생활에 능숙할 수는 있으나 이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또 자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입장에 내려가거나 그런 사람을 이해하고 품으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지식에 끌어다 맞추려하고 또 안 따르면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고 정죄를 하는 자세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강한 자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나의 확신은 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 상대를 위하고 덕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책임지라는 말씀이다. 특히 지식은 소중한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상대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랑이 없으면서 지식을 가지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 그것이 사용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하여야 한다.
❶ 롬 14:10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 주의하도록 권면하는 이유 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쉽다. 때로는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그렇게 한다. 남이 하면 안 되고 내가 하면 괜찮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스스로 어리석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1~4)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❷ 바울이 롬 14:11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서 인용된 사 45:23은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하고 있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는 이런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12절). 그때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❸ 문맥을 고려할 때, 롬 14:14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정결한 짐승인지 부정한 짐승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참조). 따라서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민한 자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하였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교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양심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바울의 이 말은 모든 문제의 분명한 답을 해줄 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울의 자유포기 선언이요 사랑의 대원칙이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당시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런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아예 육식을 결별하는 선언을 하고 있다고 무리한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정확한 진리를 제공해준다 나의 자유를 포기함으로 형제가 유익하다고 하면 덕이 된다고 하면 일상적인 식품인 고기를 평생 아니 영원토록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 자유를 양보하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문제는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되고 있는 것들이다.
화요일
9월 21일
거리낌이 되지 않음
도입)
우상이란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란 우상의 제물이란 먹어도 상관이 없고 먹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문제는 성숙한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이러한 믿음이나 영적인 지식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에서 문제의 해결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앙은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행사되어야 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태도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바울은 고기를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미숙한 어떤 형제가 실족케 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교회 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밝혀주고 있다.
❶ 롬 14:15~23을 읽으십시오(고전 8:12~13 참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감춰진 핵심은 무엇인지 요약해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17~20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을 적절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식생활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육류 대신 채식을 선택한 자들과 논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 기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림 교회의 식생활 문제에 관하여 이 교훈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건강 기별, 특히 식생활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관점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❷ 22절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매우 흥미로운 경고를 덧 붙였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경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주어진 문맥 속에서 어떻게 조화됩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오락을 즐기든지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 심지어 식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선악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를 존경하는 누군가 그대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도 그대의 잘못된 모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본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다.
교훈: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가 되는 일을 행하는 모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사도는 약한 자들의 어리석음 보다, 믿음에 강한 자들의 잘못을 교정해 주고 있다. 그들의 음식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제하는 방식이 그 원칙에서부터 틀려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있는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느니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8-9)" 는 말씀의 의미를 안다면,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비난하기 전에 오히려 그의 약점을 사랑스럽게 포용해주어 자신의 자유함을 제재하고 절제시키는 것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며,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성숙한 자의 자세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일
9월 22일
날들을 지킴
도입)
성경에서 명확하게 명시되고 명령되지 않은 것은 각자의 양심의 고백(선언)을 따라 마음으로 확증할 문제이므로, 그것은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멸시할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 즉 그리스도인은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이므로(고전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의 삶에 목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빌1:21). 그러므로 어떤 날을 특별히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며,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해서 먹고, 또 어떤 음식에는 손대지 않으려는 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므로 모두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 한국교회도 동일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봐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정말 이 어두움의 시대를 살면서 이런 사단의 교묘한 미혹(유혹)과 더불어 전투하고, 성령께서 주님의 몸으로 묶으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 이 거룩함을 힘써 지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각자의 양심을 세워주는 일(교육과 교제)이 얼마만큼 필요하고, 시급하며,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앞서 우리와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일부는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지키기를 원치 않는 기념일 문제도 제기되었다.
❶ 롬 14:4~10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넷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어떤 날들을 준수하는 문제로 초대교회에 논쟁이 있었는가? 갈 4:9~10에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갈리디아 신자들을 질책하였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그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갈리디아 신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으로 로마교회도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자들은 오히려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축제일들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해야만 했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각자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라고 말하였다. 핵심은 그 문제에 관하여 그대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축일 가운데 한두 개를 준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라고 권고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롬 14:5에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시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되지 못한다. 바울이 제4계명에 대하여 그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 교과에서 줄곧 살펴봤던 것처럼,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문제와 제4계명을 같은 범주에서 다룰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제칠일 안식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다. 그래서 바울의 글을 오용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교훈: 일부 날들을 중요시 여기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같은 범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살고 죽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죽고 사는 문제는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는데, 한 몸이요, 한 형제며, 동일하게 하나님이 부르셔서 사랑하는 존귀한 자를 누가 무슨 권한으로 멸시하며 정죄하고 업신여길 수 있는가를 반문하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것을 사45:23절을 인용하여 밝히며, 그때는 우리 각인이 빠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멸시하는 자들이 주요, 재판관이며, 심판주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며, 주께서 재판관이요 심판주이심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요일
9월 23일
적절한 축도
도입)
미국의 개신교인들은 차가 막히거나 고장이 나서 예배 시간에 늦었을 경우에라도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끝 부분의 목사님의 축도를 받으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그만큼 축도를 중요시 여기는 것일 것이다. 바울서신의 모든 부분에 인사와 축도는 빠지지 않고 있다. 바울의 영감은 언제나 신령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편지의 시작이나 마지막에 인사를 빼놓지 않고, 그가 보내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높이는 종교인 동시에 언제나 사람을 중시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천하와 비교가 안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 ‘주 안’, ‘예수 안’, ‘그의 사랑 안’이라는 말을 수없이 보았다. ‘주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은 사실상 바울 신학의 열쇠 중에 하나이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성도’(빌 4:21)라고 하였다. ‘성도’란, ‘형제’와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이름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어 성별된 자들을 뜻한다. 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이른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가족, 성도들을 의미했다. 저들은 정죄에서 해방을 받은(롬 8:1),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롬 8:14-16).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유업)으로 받은(마 25:34) 하늘의 시민권자(빌 3:19)들을 뜻한다.
❶ 롬 15:1~3을 읽으십시오. (1)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기독교 진리는 무엇입니까? (2) 위의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습니까? (3) 같은 사상을 가르치는 다른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이런 원칙에 따라 살겠습니까?
❷ 서신을 마쳐 갈 즈음에 바울은 어떤 다양한 말로 축도하였습니까? 롬 15:5~6, 13, 33.
인내의 하나님이란 그의 자녀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돕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불굴의 용기” 또는 “꾸준한 참을성”을 의미한다. 위로라는 말은 “격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은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란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❸ 개인적인 안부를 전한 뒤에 바울은 어떻게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까? 롬 16:25~27.
바울은 영광과 찬미의 기원으로 로마서를 마치고 있다.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안전하게 믿을 수 있다.
바울은 그와 같이 놀라운 소식의 전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다. 그는 이런 소식을 일컬어 “나의 복음” 즉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라고 불렀다. 그의 복음은 예수님과 다른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검증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비밀이 되었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더 밝은 빛을 주시지 못하도록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메시야가 인간의 육체로 오시기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종의 섭리가 있었다. 메시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었고, 거룩한 능력을 내려놓고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새로운 종류의 삶이 “믿음의 순종”으로 시작되었다. 순종은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부가적용)
고난이 소망을 이루는 근거가 되는 이유는 고난이 바로 인내를 만들어 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소망을 품게 하려면 먼저 고난을 통해 인내심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 때 고난을 통해 그 사람이 인내심을 배우게 되면 이제는 희망을 주시나요?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하나님은 인내심을 배운 사람에게 연단을 배우게 하신다. 조금 어려운 단어지만 연단이란, 인격을 의미한다. 좀 더 의미를 풀어서 해석한다면 성숙한 인격을 말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속에 인내심이라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신다. 이 인내심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가 그렇게도 소원했던 인격,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은 성숙한 인격이라는 건물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한 사람의 내면에 이루어지는 인내의 깊이와 견고함만큼 그 위에 세워질 인격이라는 건물의 크기와 높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한 이 인격을 이룬 사람에게야 하나님은 소망이라는 큰 은총을 주시는 것이다. 결국 고난의 열매는 소망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소망을 맨 나중에 주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처음부터 갖기를 원한다.
금요일
9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독서 과제: 교회증언 5권, 477~478 “교회의 연합과 사랑”, 604~606 “실수한 자들에게 대한 사랑”, 치료봉사, 166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재림교 성경주석 13 권, 220.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가 있을 때에 화잇 부부를 바라보고 그 문제에 대한 권고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 . . 많은 이 들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해도 될까요? 그 사업을 해도 될까요?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성경을 읽어라. 그분의 생애를 모방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좁은 길에서부터 빗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대의 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면, 그대는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118~119)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교회 안에는 언제나 혼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정신이 인간 도구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임명하신 직분에 있는 사람들의 권고를 존중하고 그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임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도행적, 163~1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다음 아래의 경우에서 어떻게 바른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까?
❶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충성하지만,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정죄 하지 않는다.
❷ 내 자신의 양심에 바르게 행하되, 오류에 빠진 것이 확실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말해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❸ 주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되 나를 존경하는 자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일 책임이 있다.
9월 25일
일몰: 오후 6시 25분
도입)
엘리나 라는 78세 된 화란 출신의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의 평생소원은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50년간 담배를 끊기 위해 클리닉에도 가보고 약도 먹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할머니는 어느새 78세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나 할머니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뒤늦게 사랑 하게 되었다. 제이슨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단 한 가지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오. 당신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나와 맞지 않는 거 같소.”라고 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제가 담배를 끊지요”라면서 그 순간부터 담배를 끊었단다. 그녀의 50년간 이루지 못한 평생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사의 마지막 줄에는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할머니의 멋진 고백이 실려 있었다.
기억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 14~16장
어떤 사람이 고령의 유명한 랍비를 찾아가 율법의 전체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랍비는 한 발로 서서 “너에게 해로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이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랍비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은 근본적인 것이고, 나머지 것은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구원의 근본적인 원칙에 상당히 집중해 왔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구약의 모든 제도가 필요한지 아니면 십계명의 역할만이 필요한지 연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용납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이방인 간수의 질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거기에 대한 설명으로 바울은 이제 몇 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다룬다. 바울은 몇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을 다루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중요하다.
일요일
9월 19일
연약한 형제
도입)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앙은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행사되어야 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태도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고기를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미숙한 어떤 형제가 실족케 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교회 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밝혀주고 있다. 나의 신앙의 자유가 약한 자들을 실족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연약한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을 때 그것은 그 사람 책임이니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거치는 것이란 ‘프로스콤마’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데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나로 인해서 약한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나는 나의 행위를 조심하고 절제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 중심의 신앙인의 모습이다.
롬 14:1~3에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나온다.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에서는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그런 종류의 육류를 삼가도록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것인지는 항상 의문시되었다(고전 10:25). 그럼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차라리 채식을 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채식주의나 건강한 생활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또한 이 본문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폐지되었다는 어떤 암시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롬 14:2)라는 말씀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그와 같은 적용은 다른 신약의 본문들과 배치될 수 있다.
반면 믿음이 약한 자를 받으라는 말씀은 교인으로서의 그의 권리와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을 온전히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교인들이 그와 논쟁을 하는 대신 그가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❶ 그렇다면 롬 14:1~3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3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문구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강하게 되는 방법을 조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민한”(하나님이 아닌 동료 신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신자들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❷ 롬 14:4은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교훈: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한다.
부가적용)
애하고 어른이 싸우면 어른이 잘못한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문자 그대로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약한 자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감수 하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생각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가장 주요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높은 신앙을 이해하고 그 수준에 올라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내세워서 자기의 주장이나 고집대로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자신이 지키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신앙이 왜 강요되어야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신다. 지식은 개인적인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 지식의 폭과 생각이나 이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유익을 준다. 또 사랑은 어디나 통하는 것이다. 이론과 지식은 사랑을 동반할 때 빛을 발한다. 사랑이 없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은 교만심을 준다. 사실 무슨 지식이든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판단하고 분별한다.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무시하고 어리석게 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식은 차가운 것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따뜻하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성격이 있다. 사랑은 사람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지식은 자신을 세우는데 필요하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식이 빛을 발하고 날개를 다는 것은 사랑이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아는 것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월요일
9월 20일
그대가 사용하는 잣대
도입)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부분 초신 자나 평신도로 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대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된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을 하였다.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있다’든지 ‘가졌다’ 안다, 고 생각하는 순간 나오는 것이 자기요 인간적인 교만이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자기 포기와 겸손을 전제로 하고 시작되지만 이 믿음이 있다고 본인이 느끼는 순간 이상한 것이 나오고 자아가 나오게 된다. 성경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믿음에 자료가 되지만 그 지식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오래 믿어서 신앙의 경험과 여러 가지 교회생활에 능숙할 수는 있으나 이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나 또 자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입장에 내려가거나 그런 사람을 이해하고 품으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지식에 끌어다 맞추려하고 또 안 따르면 믿음이 없다고 비판하고 정죄를 하는 자세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강한 자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나의 확신은 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 상대를 위하고 덕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책임지라는 말씀이다. 특히 지식은 소중한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상대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랑이 없으면서 지식을 가지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 그것이 사용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하여야 한다.
❶ 롬 14:10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에 있어서 주의하도록 권면하는 이유 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쉽다. 때로는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그렇게 한다. 남이 하면 안 되고 내가 하면 괜찮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스스로 어리석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1~4)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❷ 바울이 롬 14:11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서 인용된 사 45:23은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하고 있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는 이런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12절). 그때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❸ 문맥을 고려할 때, 롬 14:14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정결한 짐승인지 부정한 짐승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참조). 따라서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민한 자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하였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교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양심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바울의 이 말은 모든 문제의 분명한 답을 해줄 뿐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울의 자유포기 선언이요 사랑의 대원칙이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당시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런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아예 육식을 결별하는 선언을 하고 있다고 무리한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정확한 진리를 제공해준다 나의 자유를 포기함으로 형제가 유익하다고 하면 덕이 된다고 하면 일상적인 식품인 고기를 평생 아니 영원토록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 자유를 양보하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문제는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되고 있는 것들이다.
화요일
9월 21일
거리낌이 되지 않음
도입)
우상이란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란 우상의 제물이란 먹어도 상관이 없고 먹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문제는 성숙한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이러한 믿음이나 영적인 지식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에서 문제의 해결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신앙은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행사되어야 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배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태도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바울은 고기를 당연히 먹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미숙한 어떤 형제가 실족케 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은 교회 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의 해법을 밝혀주고 있다.
❶ 롬 14:15~23을 읽으십시오(고전 8:12~13 참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감춰진 핵심은 무엇인지 요약해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합니까?
17~20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을 적절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식생활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육류 대신 채식을 선택한 자들과 논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 기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림 교회의 식생활 문제에 관하여 이 교훈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건강 기별, 특히 식생활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관점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❷ 22절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매우 흥미로운 경고를 덧 붙였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경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주어진 문맥 속에서 어떻게 조화됩니까?
“내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오락을 즐기든지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 심지어 식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선악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를 존경하는 누군가 그대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도 그대의 잘못된 모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본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다.
교훈: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가 되는 일을 행하는 모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사도는 약한 자들의 어리석음 보다, 믿음에 강한 자들의 잘못을 교정해 주고 있다. 그들의 음식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제하는 방식이 그 원칙에서부터 틀려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고 있는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느니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8-9)" 는 말씀의 의미를 안다면,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비난하기 전에 오히려 그의 약점을 사랑스럽게 포용해주어 자신의 자유함을 제재하고 절제시키는 것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며,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성숙한 자의 자세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일
9월 22일
날들을 지킴
도입)
성경에서 명확하게 명시되고 명령되지 않은 것은 각자의 양심의 고백(선언)을 따라 마음으로 확증할 문제이므로, 그것은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멸시할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 즉 그리스도인은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이므로(고전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의 삶에 목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빌1:21). 그러므로 어떤 날을 특별히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며,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해서 먹고, 또 어떤 음식에는 손대지 않으려는 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므로 모두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 한국교회도 동일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봐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정말 이 어두움의 시대를 살면서 이런 사단의 교묘한 미혹(유혹)과 더불어 전투하고, 성령께서 주님의 몸으로 묶으시고 하나가 되게 하신 이 거룩함을 힘써 지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각자의 양심을 세워주는 일(교육과 교제)이 얼마만큼 필요하고, 시급하며,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앞서 우리와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일부는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지키기를 원치 않는 기념일 문제도 제기되었다.
❶ 롬 14:4~10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넷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어떤 날들을 준수하는 문제로 초대교회에 논쟁이 있었는가? 갈 4:9~10에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갈리디아 신자들을 질책하였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그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갈리디아 신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으로 로마교회도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자들은 오히려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축제일들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해야만 했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각자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라고 말하였다. 핵심은 그 문제에 관하여 그대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축일 가운데 한두 개를 준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라고 권고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롬 14:5에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시키는 것은 권장할 일이 되지 못한다. 바울이 제4계명에 대하여 그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 교과에서 줄곧 살펴봤던 것처럼,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문제와 제4계명을 같은 범주에서 다룰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제칠일 안식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다. 그래서 바울의 글을 오용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교훈: 일부 날들을 중요시 여기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같은 범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살고 죽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죽고 사는 문제는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는데, 한 몸이요, 한 형제며, 동일하게 하나님이 부르셔서 사랑하는 존귀한 자를 누가 무슨 권한으로 멸시하며 정죄하고 업신여길 수 있는가를 반문하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것을 사45:23절을 인용하여 밝히며, 그때는 우리 각인이 빠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멸시하는 자들이 주요, 재판관이며, 심판주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며, 주께서 재판관이요 심판주이심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요일
9월 23일
적절한 축도
도입)
미국의 개신교인들은 차가 막히거나 고장이 나서 예배 시간에 늦었을 경우에라도 예배 시간에 참석해서 끝 부분의 목사님의 축도를 받으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그만큼 축도를 중요시 여기는 것일 것이다. 바울서신의 모든 부분에 인사와 축도는 빠지지 않고 있다. 바울의 영감은 언제나 신령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편지의 시작이나 마지막에 인사를 빼놓지 않고, 그가 보내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높이는 종교인 동시에 언제나 사람을 중시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천하와 비교가 안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 ‘주 안’, ‘예수 안’, ‘그의 사랑 안’이라는 말을 수없이 보았다. ‘주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은 사실상 바울 신학의 열쇠 중에 하나이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성도’(빌 4:21)라고 하였다. ‘성도’란, ‘형제’와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이름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어 성별된 자들을 뜻한다. 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이른바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가족, 성도들을 의미했다. 저들은 정죄에서 해방을 받은(롬 8:1),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롬 8:14-16).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유업)으로 받은(마 25:34) 하늘의 시민권자(빌 3:19)들을 뜻한다.
❶ 롬 15:1~3을 읽으십시오. (1)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기독교 진리는 무엇입니까? (2) 위의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습니까? (3) 같은 사상을 가르치는 다른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이런 원칙에 따라 살겠습니까?
❷ 서신을 마쳐 갈 즈음에 바울은 어떤 다양한 말로 축도하였습니까? 롬 15:5~6, 13, 33.
인내의 하나님이란 그의 자녀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돕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불굴의 용기” 또는 “꾸준한 참을성”을 의미한다. 위로라는 말은 “격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은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란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❸ 개인적인 안부를 전한 뒤에 바울은 어떻게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까? 롬 16:25~27.
바울은 영광과 찬미의 기원으로 로마서를 마치고 있다. 우리는 로마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하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안전하게 믿을 수 있다.
바울은 그와 같이 놀라운 소식의 전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다. 그는 이런 소식을 일컬어 “나의 복음” 즉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라고 불렀다. 그의 복음은 예수님과 다른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검증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비밀이 되었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늘로부터 오는 빛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더 밝은 빛을 주시지 못하도록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메시야가 인간의 육체로 오시기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종의 섭리가 있었다. 메시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었고, 거룩한 능력을 내려놓고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새로운 종류의 삶이 “믿음의 순종”으로 시작되었다. 순종은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부가적용)
고난이 소망을 이루는 근거가 되는 이유는 고난이 바로 인내를 만들어 내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소망을 품게 하려면 먼저 고난을 통해 인내심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 때 고난을 통해 그 사람이 인내심을 배우게 되면 이제는 희망을 주시나요? 하나님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하나님은 인내심을 배운 사람에게 연단을 배우게 하신다. 조금 어려운 단어지만 연단이란, 인격을 의미한다. 좀 더 의미를 풀어서 해석한다면 성숙한 인격을 말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속에 인내심이라는 튼튼한 기초를 만드신다. 이 인내심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님은 드디어 우리가 그렇게도 소원했던 인격,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은 성숙한 인격이라는 건물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한 사람의 내면에 이루어지는 인내의 깊이와 견고함만큼 그 위에 세워질 인격이라는 건물의 크기와 높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한 이 인격을 이룬 사람에게야 하나님은 소망이라는 큰 은총을 주시는 것이다. 결국 고난의 열매는 소망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소망을 맨 나중에 주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처음부터 갖기를 원한다.
금요일
9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독서 과제: 교회증언 5권, 477~478 “교회의 연합과 사랑”, 604~606 “실수한 자들에게 대한 사랑”, 치료봉사, 166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재림교 성경주석 13 권, 220.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가 있을 때에 화잇 부부를 바라보고 그 문제에 대한 권고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 속에 빠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 . . 많은 이 들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해도 될까요? 그 사업을 해도 될까요?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성경을 읽어라. 그분의 생애를 모방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좁은 길에서부터 빗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대의 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면, 그대는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118~119)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교회 안에는 언제나 혼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정신이 인간 도구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임명하신 직분에 있는 사람들의 권고를 존중하고 그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을 신임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사도행적, 163~16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다음 아래의 경우에서 어떻게 바른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까?
❶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충성하지만,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정죄 하지 않는다.
❷ 내 자신의 양심에 바르게 행하되, 오류에 빠진 것이 확실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말해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❸ 주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되 나를 존경하는 자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일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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