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 은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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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9-06 20:20 조회5,50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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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9월11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7분
제11과
<은혜(恩惠)의 선택(選擇)>
<기억절(記憶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로마서 11:1).
▣ <로마서 10장(章)>
<요약(要約)―1>
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는 열심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믿음에는 무지(無知)하였다.
유사(類似)믿음과 가짜 의(義)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고 호소(呼訴)한다. (1절-15절)
Ⅱ.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소개한다. (16절-21절)
<요약(要約)―2>
⑴. 성경은 율법의 의(義)와 믿음의 의(義)의 차이를 보여 준다.
⑵.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⑶. 이방인(異邦人)들도 말씀을 받고 믿을 것임.
⑷. 이스라엘도 이런 일들에 대하여 모르지 않음.
▣ <로마서 11장(章)>
<요약(要約)―1>
Ⅰ. 이스라엘이 모두 행위(行爲)의 의(義)를 좇아간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제대로 된 남은자도 있다. (1절-10절)
Ⅱ.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異邦人)의 부요(富饒)함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이 더 유리(有利)하다. (11절-21절)
Ⅲ. 그러니 이방인으로서 믿음에 들어온 자들은 이스라엘을 무시하지 말고
오직 자기가 받은 은혜에 더욱 충실(忠實)하라,
오직 주의 지혜가 오묘(奧妙)할 뿐이다. (22절-36절)
<요약(要約)―2>
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두 버린 것이 아님
⑵. 더러는 택하심을 입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해짐
⑶.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희망이 있음.
⑷. 이방인도 이스라엘을 모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⑸. 이스라엘에게도 구원의 약속이 있다.
⑹.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測量)할 수가 없다.
<요점(要點)>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5일)
<율법의 마침>
▣ 바울은 (로마서 10:1-4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信者)들에게 제대로된 믿음을 알려주는 복음중의 복음을 소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신앙에서도 모조품(模造品)이 있다.
신앙(信仰)에도 유사(類似)믿음, 가짜 의(義)가 있는데, 이것이 신자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증언 하노니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知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2절)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3절)고 지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하나님의 의(義)가 아닌 것, 계명을 열심히 지킨 다고 하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 “지식(ὲπίωσις)”이란 말은 학문적 지식이나 체험적 지식(ϒνωσις)이기보다는 더욱 초월적인(ὲπί : 위에) 영생과 관계되는 심령의 거듭남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식을 모르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참의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로마서 9:30-33 참조)
참된 지식, 참된 의(義)는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義)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절).
여기 “율법의 마침(τὲλς ϒὰρ νόμου)”을 율법 폐지한다는 뜻으로 오해(誤解)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단답적으로 해석하면 로마서 3장에서 애써 설명한 내용을 반복해야한다.
예수님이 구약(舊約)의 표상은 성취시켰으나 율법을 폐지(廢止)하신 것은 아니다.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말은, 율법의 성취(成就)(마태 5:17)와 율법의 목표(갈라디아 3:24)가 된다는 말이다.
율법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율법이 폐지되면 죄도 성립이 안 되고, 죄가 없으면 믿음은 필요가 없어진다.
▣ <율법의 마침>
“마침‘은 헬라어로 ”텔로스“로 ”결론“ ”종결" ”목적“을 의미 한다. (딤전 1:5, 벧전 1:9)
①.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간들을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입장을 따르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이다. (갈 3:24)
②. 율법이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있어서 진행(進行)될 특별한 경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는 율법에 종지부를 찍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로마서 8:14; 9:31; 엡 2:15; 골 2:14) (로마서 13:10; 마 5:17; 딤전 1:5)
○ <그리스도는 율법(律法)의 마침이 됨>
“헬라어 원문에서 “마침” 곧 “텔로스(telos)”가 강조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⑴.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는 해석(解釋)과
⑵.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 또는 목표가 된다는 해석과,
⑶.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마태 5:17)라는 해석과
⑷ 또는 그리스도는 구원(救援)의 수단으로서 율법의 끝(로마서 6:14)이라는 해석(解釋)등이 있다.
①, 해석은 도덕률 폐기론(廢棄論)자의 해석으로, 성경을 곡해한 것이며,
②, ③, ④, 해석들은 모두 바른 명제를 내세우지만, 그 중 ③이 문맥상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방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시도를 대조한다.
복음의 기별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서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에 정관사가 없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意味)일 수 있는데,
바울이 특정한 어떤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율법의 원칙을 가리키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체적인 논증의 흐름은 바울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성경절(聖經節)은 단순히, 구약시대에는 실제로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있었다거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를 얻는 방법으로 율법이 믿음으로 대체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은 올 메시야를 믿음으로써 만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방법을 계시했다. (창세기 3:15; 창 4:3-5; 히 11;4참조 로마서 4장)
또한 이 구절(句節)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식(終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종말(終末)을 고한 것은 의(義)를 얻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이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선포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죄 됨(로마서 3:20)과 구주(救主)가 그들에게 필요함(갈라디아 3:24)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했으며, 그들 자신의 율법주의적인 순종을 시도함으로써 도덕률(道德律)과 의식률(儀式律)의 율법들을 그들 자신의 의(義)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율법의 남용을 끝내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러한 믿음은 율법을 폐(廢)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고(로마서 3:31)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충족(充足)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722-723p>
○ <하나님의 표준(標準)은 변하지 않았음>
(로마서 6:15; 삼상 15:22; 계 22:14)(고후 3:17-18; 엡 2:14-16; 계 2:6 참조)
“복음을, 인간에게 그분의 의(義)롭고 거룩한 율법을 계속 범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계속 하나님을 거스리고 반역하며 살도록 허락해 주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은혜 아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나 에덴에서 그가 요구하신 것`(율법의 완전한 순종)이 꼭 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왜 계속 나의 율법을 범했느냐?” “누가 너에게 나의 율법을 짓밟으라고 하였느냐?” “보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신약의 복음은 구약의 표준을 낮추어서 죄인에게 맞게 하고 그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구원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순종 곧 그의 모든 계명에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늘에 들어가는 유일한 자격으로서 항상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피난처이시다. 그의 의는 순종하는 자에게만 입혀진다.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아무 죄도 찾아볼 수 없게 하자. 그러나 거룩한 율법을 짓밟는 사람들은 그 의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한없이 큰 구속의 경륜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리뷰 1886. 9. 21).
◎ 이스라엘 백성은 열정적인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였다.
그들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 <구원(救援)의 근원(根源)>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 <일요일 요약>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의(義)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義)와 은혜에 시선(視線)을 고정시켜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이 우리를 인도해주려고 했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월요일(9월 6일)
<은혜(恩惠)로 선택(選擇)됨>
▣ 인간의 축복을 위한 남은 씨를 가지고 계심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섭리(攝理)인데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恩惠)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1:6)
은혜는 값없는 선물이고 행위는 그 자체가 값을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와 행위는 여기서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된 것이 아닌 것이다. (로마서 4:5 참조)
인간의 구원(救援) 문제는 근본행위로 될 수 없는 과업이다.
사람의 노력이 아니니 하나님의 예정(豫定)(은혜=선택)으로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어떠하냐”(로마서 11:7) 행함으로 의(義)를 얻겠다고 노력했던 “이스라엘이 구(求)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 (로마서 11:7). 이렇게 인간은 노력하여 구할지라도 안 되고, 하나님의 택하시는 의지(예정)로 되는데, 그 택하시는 기준이 바로 믿으면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기준에 들지 못한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로마서 11:7)
(로마서 11:7)절의 “남은 자(the rest)”는 (로마서 11:5절)에서의 “남은 자”(a remnant)와는 다르다.
(로마서 11:7절)은 택하고 남은, 즉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남은 쭉정이를 일컫는 말이고,
(로마서 11:5절)의 남은 자는 쭉정이를 날려 보내고 남은 알곡을 말한다.
고로 “남은 자”(a remnant)는 구원(救援)을 얻지만, “남은 자(the rest)”는 멸망을 당한다.
알곡은 거두고 남은 쭉정이의 모습도 예언되어 있는데,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이사야 29:10)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8절).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로마서 11:9절), 그들의 눈은 흐려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로마서 11:10절) 하였느니라.”(시편 69:22-23절)는 말씀이다. 이런 자는 “남은 자(the rest)” 즉 불에 태울 쭉정이다.
◎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강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위해 흘러 넘쳤다.
◎ <정직(正直)하게 읽을 것>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상고하고 그들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았더라면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되시는 증거를 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긍지를 가졌던 성을 파멸시킨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은 그들의 몰지각한 완고성으로 말미암아 편협해졌다.”(시대의 소망, 241)
◎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拒絶)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다.
▣ <월요일 요약>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異邦人)인이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열려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그들은 욕망과 이기심과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유대인뿐만 안이라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있다.
화요일(9월 7일)
<접(椄)붙인 가지>
▣ 접(椄)붙인 가지의 비유(로마서 11:15-24)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나음을 인정하라는 내용이다.
(로마서 11:15-24)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해설이 따로 필요 없이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본 성경 절은 지금가지의 유대인 위상에 대한 종합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설명이 좀 필요한 것은 접붙임에 대한 개념이다.
(로마서 11:17절)에서 참 감람나무뿌리에 돌 감람나무 가지를 접(椄)붙였다고 했는데
이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앞 장(章)들에서 계속적으로 생명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구원 얻는 원리를 설명해
왔는데(참 진액을 받아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되기),
그런데 여기서의 설명이 실제의 접붙이는 원리와 다르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의 접붙이는 방식은 돌 과수나무뿌리에 참 과수나무 가지를 접(椄)붙이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좋은 뿌리에 나쁜가지를 접붙인다고 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⑴. 바울이 접붙이는 원리를 잘 모르고 비유를 들었다면,
성경말씀에도 이렇게 피상적인 지성이 허용되는 것인가?
⑵. 또 알면서도 변형시켜 사용했다면,
바울도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억지 논리를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는 논리적으로만 파고들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지 접붙이는 방법을 강습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조금 변형시켰다고 해서 억지 지성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늙은 과수(果樹)를 회생 시킬 때나,
병든 가지를 재생(再生)시킬 때 는 혹 이렇게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比喩)란 원래가 원 사실을 잘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도리어 우리의 구원이 이러한 역리적(逆理的)인 수단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데 감사 할 수 있을 것이다.
◯ “축자영감설”(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을 선지자가 받아쓰기만 했다는 견해)이 아니라,
“사상 영감설”(하나님의 영감과 계시로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자기 말로 기록 했다는 견해)을 받아들인다면
이해하는 데 곤란 할 것도 없다.
도리어 이 엇긋진 접붙이기가 깊은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의도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뿌리는 두고 가지 얼마를 꺾으셨다. (렘 5:10)
이 꺾은 자리에 이방인 가지를 접붙이시는데 (로마서 11:17)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이 되려면
근본 되는 뿌리를 아예 바꿔야 한다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믿음의 의(義)란 인성을 다듬고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를 아예 바꾸는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나타내지만,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창조주 믿음과 이방인의 공력신앙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때
이방인이 하나님께 나오려면 그 뿌리가 되는 근본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다.
◯ (로마서 11:19-22절)을 참고로 볼 때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 여하로 꺾이기도 하고 접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두 원나무에 붙어있도록,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움으로 믿음에 서 있는 것이 중요 할뿐이다.
넘어져 꺾이는 자는 하나님의 준엄한 취급(엄위)을 받을 것이요,
서있어 붙어있는 자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은혜(인자)속에 거할 것이다. (로마서 11:23-24절 참조).
◎ 바울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풍성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므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평행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과
(2) “그(들의) 받아들이는 것”(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쇠락과 퇴출은 한시적인 것이며 그 뒤에 충만함과 용납이 있을 것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11장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이다.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 근원에 붙어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고, 근원과 거리가 먼 많은 이방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누가 다시 떨어져 나가고 누가 다시 접붙여질 것인지의 여지는 항상 남아있으며
그것은 더 이상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 <진정한 자아(自我) 발견>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양(謙讓)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실물교훈, 158)
▣ <화요일 요약>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나 가르침은 비성서적(非聖書的)이다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선민사상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은 자리를 잃었고,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원은 받을 자유도 있지만 거절할 자유도 있다.
실수할 때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거나, 완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조심해야 되며,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특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은 불가능 하다는 생각도 피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구원은 선(善)함이나 우수함의 댓가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함이나 우월감에서 사로 잡혀선 안된다.
우리에게 자랑 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에게 삶에 모본을 보여주시고, 도울 힘을 약속하신 예수님밖에 없다.
수요일(9월 8일)
<신비(神秘)가 드러남>
▣ 사도 바울은 좀 더 깊은 진리, 좀 더 민감한 진리를 소개 할 때는 신비(神秘)(비밀)라는 말을 흔히 쓴다.
(엡 3:3-4; 골로새서 1:26-27; 딤전 3:16)
그런데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줄로 착각하고는 이리저리 주장하는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명하기 위하여 알려준다는 비밀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愚鈍)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절).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실 이방인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그 수를 채우신다는 말인가?
아니면 떠나간 완악한 유대인의 수만큼만 이방인으로 채우신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말과 연관 지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속에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가 있고,
채워야 할 수가 있다는 말들은 있다. (사도행전 1:7; 전도서 3:1-8; 갈라디아서 4:4)
그리고 순교자도 그 숫자가 차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말도 있는데 (계시록 6:11),
이런 여러 말씀으로 볼 때, 이 “비밀(秘密)”이란 말은 지혜 있는 자는 알아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예민한 문제로서, 이스라엘 일부가 완악하게 된 것이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구원(救援)을 얻게 하기 위한(계시록 7:9 참조) 수단이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1:26절)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상당히 의문을 일으킨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다시 이방인을 인하여 시기 나게 하여 온 이스라엘로 구원 얻게 하심으로,
결국은 양편 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만인 구원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발한 논리일지는 몰라도 진리는 되지 못한다.
혈통적 유대인이 다 유대인이 아니요 할례(割禮)가 다 할례가 아니라고 그렇게 강조해 왔으며,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救援)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모두 구원을 얻는다면 결국 선악의 차이, 믿음의 유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희한한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본 문맥도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원뿌리와 접붙인 가지가 합해져서 완전한 나무가 되듯이,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들어와서 약속된 믿음 속에서 영적으로 이스라엘이 온전해 진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이루어진 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에(이사야 59:20-21절)를 바울이 인용하여 (로마서 11:26절)말씀하고 계신다.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 (로마서 11:26-27절)이라는 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충만케 하실 이 영적 이스라엘에 적용시킨다.
◎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證據)되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대거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 절들을 가지고 수세기동안 논쟁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우선 전체 논조(論調)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제(救濟)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오직
(1)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2)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그리스어 프로시스는 “단단함”을 의미함)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 구절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성취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될 때,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화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것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포에 의한 모든 유대인의 구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인류 전체 혹은 특별 지역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바울은 그 중에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하였다(14절).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야를 영접했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였다.
◎ <엘렌 G. 화잇은 로마서 11장(章) 주석(註釋)>
“복음의 마지막 선포”의 때에 “많은 이(유대인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적, 381)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루어야 할 막중한 과업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이 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개종하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저들을 통하여 우리는 비치는 등불처럼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으므로 현대진리의 빛이 저들에게도 소개되어야 한다. 저들 중에는 빛으로 나와서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복음전도, 578)
◎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지 않으셨음>
“마지막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돌아보지 아니하였던 계급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세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 할 때에 구약과 신약 성경을 잘 융합해서 설명하면, 이것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새 창조(영혼의 부활)의 아침과 같이 새로움을 줄 것이다.”(복음교역자, 398)
▣ <수요일 요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며,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다.
목요일(9월9일)
<죄인(罪人)들의 구원(救援)>
▣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하면(구세주(救世主)를 죽인 것으로 하면)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怨讐)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구약(舊約) 말씀을 받은 것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믿음 안에서 영적(靈的)으로 다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後悔)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절).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다.
◯ 옛날 양식(糧食)이 귀하던 시절 어느 가정의 한 할머니가 배고픈 이웃 아들을 불쌍히 여겨,
매일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쓰다듬어 주면서 밥 안 먹는 친손자로 시기 나게 해서 둘 다 밥을 잘 먹여
키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위의 말씀이 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나님은 아기를 모두 사랑하시는 자비(慈悲)로운 할머니이시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이런 식으로 하여 다 같이 구원(救援)으로 이끄신다.
하여튼 혈통의 선민(選民)과 약속의 선민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바울도 설명하느라고 애를 먹고 있다. 다시 요약 하면
“너희가(이방인)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이스라엘)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이방인)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이스라엘)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1:30-31절).
한번은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인이 긍휼을 얻었고,
다시 한 번은 이방인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얻어,
결국은 양편의 순종치 아니함이 양편의 긍휼 얻음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로마서 11:32절).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로마서 11:33-36절).
◎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 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 전도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 <영혼(靈魂)을 소중(所重)히 여기라.>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 “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들로서 상당히 많은 무리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구주의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기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새로이 연구하게 된 충실한 남녀들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이 그의 강림을 갈망해 온 분으로 인정한 충실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사도행적, 376~377)
◎ “유대인 중에는 다소 사람 사울처럼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것이다. 당신의 종들이 오랫동안 버려두고 멸시하여 온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수고할 때에 그분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381)
◎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합할 때 이것은 많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창 곧 영혼의 부활의 아침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복음 시대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 묘사된 것을 보고 신약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는지를 깨달을 때 그들의 잠자던 기능은 일깨움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계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사도행적, 381)
▣ <목요일 요약>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怨讐)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유대인들에게 계시(啓示)되었고,
그들은 그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이다.
<초점(焦點)>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 우리를 인도하는 율법의 최종 목표이다.
구원(救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우수함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차별이 없이 모든 백성 모든 인간에게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그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전도(傳道)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11과
<은혜(恩惠)의 선택(選擇)>
<기억절(記憶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로마서 11:1).
▣ <로마서 10장(章)>
<요약(要約)―1>
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는 열심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믿음에는 무지(無知)하였다.
유사(類似)믿음과 가짜 의(義)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고 호소(呼訴)한다. (1절-15절)
Ⅱ.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래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소개한다. (16절-21절)
<요약(要約)―2>
⑴. 성경은 율법의 의(義)와 믿음의 의(義)의 차이를 보여 준다.
⑵.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⑶. 이방인(異邦人)들도 말씀을 받고 믿을 것임.
⑷. 이스라엘도 이런 일들에 대하여 모르지 않음.
▣ <로마서 11장(章)>
<요약(要約)―1>
Ⅰ. 이스라엘이 모두 행위(行爲)의 의(義)를 좇아간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제대로 된 남은자도 있다. (1절-10절)
Ⅱ. 이스라엘의 실족이 이방인(異邦人)의 부요(富饒)함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이 더 유리(有利)하다. (11절-21절)
Ⅲ. 그러니 이방인으로서 믿음에 들어온 자들은 이스라엘을 무시하지 말고
오직 자기가 받은 은혜에 더욱 충실(忠實)하라,
오직 주의 지혜가 오묘(奧妙)할 뿐이다. (22절-36절)
<요약(要約)―2>
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두 버린 것이 아님
⑵. 더러는 택하심을 입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해짐
⑶.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희망이 있음.
⑷. 이방인도 이스라엘을 모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⑸. 이스라엘에게도 구원의 약속이 있다.
⑹.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測量)할 수가 없다.
<요점(要點)>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5일)
<율법의 마침>
▣ 바울은 (로마서 10:1-4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자(信者)들에게 제대로된 믿음을 알려주는 복음중의 복음을 소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신앙에서도 모조품(模造品)이 있다.
신앙(信仰)에도 유사(類似)믿음, 가짜 의(義)가 있는데, 이것이 신자들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증언 하노니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知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2절)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에 복종하지 아니 하였느니라”(3절)고 지적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하나님의 의(義)가 아닌 것, 계명을 열심히 지킨 다고 하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 “지식(ὲπίωσις)”이란 말은 학문적 지식이나 체험적 지식(ϒνωσις)이기보다는 더욱 초월적인(ὲπί : 위에) 영생과 관계되는 심령의 거듭남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식을 모르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참의에 이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로마서 9:30-33 참조)
참된 지식, 참된 의(義)는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義)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절).
여기 “율법의 마침(τὲλς ϒὰρ νόμου)”을 율법 폐지한다는 뜻으로 오해(誤解)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단답적으로 해석하면 로마서 3장에서 애써 설명한 내용을 반복해야한다.
예수님이 구약(舊約)의 표상은 성취시켰으나 율법을 폐지(廢止)하신 것은 아니다.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말은, 율법의 성취(成就)(마태 5:17)와 율법의 목표(갈라디아 3:24)가 된다는 말이다.
율법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율법이 폐지되면 죄도 성립이 안 되고, 죄가 없으면 믿음은 필요가 없어진다.
▣ <율법의 마침>
“마침‘은 헬라어로 ”텔로스“로 ”결론“ ”종결" ”목적“을 의미 한다. (딤전 1:5, 벧전 1:9)
①.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간들을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입장을 따르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이다. (갈 3:24)
②. 율법이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있어서 진행(進行)될 특별한 경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는 율법에 종지부를 찍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로마서 8:14; 9:31; 엡 2:15; 골 2:14) (로마서 13:10; 마 5:17; 딤전 1:5)
○ <그리스도는 율법(律法)의 마침이 됨>
“헬라어 원문에서 “마침” 곧 “텔로스(telos)”가 강조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⑴.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는 해석(解釋)과
⑵.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 또는 목표가 된다는 해석과,
⑶.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마태 5:17)라는 해석과
⑷ 또는 그리스도는 구원(救援)의 수단으로서 율법의 끝(로마서 6:14)이라는 해석(解釋)등이 있다.
①, 해석은 도덕률 폐기론(廢棄論)자의 해석으로, 성경을 곡해한 것이며,
②, ③, ④, 해석들은 모두 바른 명제를 내세우지만, 그 중 ③이 문맥상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방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시도를 대조한다.
복음의 기별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서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에 정관사가 없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意味)일 수 있는데,
바울이 특정한 어떤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율법의 원칙을 가리키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체적인 논증의 흐름은 바울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성경절(聖經節)은 단순히, 구약시대에는 실제로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있었다거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를 얻는 방법으로 율법이 믿음으로 대체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은 올 메시야를 믿음으로써 만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방법을 계시했다. (창세기 3:15; 창 4:3-5; 히 11;4참조 로마서 4장)
또한 이 구절(句節)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식(終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종말(終末)을 고한 것은 의(義)를 얻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이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선포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죄 됨(로마서 3:20)과 구주(救主)가 그들에게 필요함(갈라디아 3:24)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했으며, 그들 자신의 율법주의적인 순종을 시도함으로써 도덕률(道德律)과 의식률(儀式律)의 율법들을 그들 자신의 의(義)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율법의 남용을 끝내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러한 믿음은 율법을 폐(廢)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고(로마서 3:31)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충족(充足)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722-723p>
○ <하나님의 표준(標準)은 변하지 않았음>
(로마서 6:15; 삼상 15:22; 계 22:14)(고후 3:17-18; 엡 2:14-16; 계 2:6 참조)
“복음을, 인간에게 그분의 의(義)롭고 거룩한 율법을 계속 범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계속 하나님을 거스리고 반역하며 살도록 허락해 주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은혜 아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나 에덴에서 그가 요구하신 것`(율법의 완전한 순종)이 꼭 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왜 계속 나의 율법을 범했느냐?” “누가 너에게 나의 율법을 짓밟으라고 하였느냐?” “보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신약의 복음은 구약의 표준을 낮추어서 죄인에게 맞게 하고 그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구원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순종 곧 그의 모든 계명에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늘에 들어가는 유일한 자격으로서 항상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피난처이시다. 그의 의는 순종하는 자에게만 입혀진다.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아무 죄도 찾아볼 수 없게 하자. 그러나 거룩한 율법을 짓밟는 사람들은 그 의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한없이 큰 구속의 경륜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리뷰 1886. 9. 21).
◎ 이스라엘 백성은 열정적인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였다.
그들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 <구원(救援)의 근원(根源)>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 <일요일 요약>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의(義)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義)와 은혜에 시선(視線)을 고정시켜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이 우리를 인도해주려고 했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월요일(9월 6일)
<은혜(恩惠)로 선택(選擇)됨>
▣ 인간의 축복을 위한 남은 씨를 가지고 계심은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섭리(攝理)인데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恩惠)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1:6)
은혜는 값없는 선물이고 행위는 그 자체가 값을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와 행위는 여기서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된 것이 아닌 것이다. (로마서 4:5 참조)
인간의 구원(救援) 문제는 근본행위로 될 수 없는 과업이다.
사람의 노력이 아니니 하나님의 예정(豫定)(은혜=선택)으로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어떠하냐”(로마서 11:7) 행함으로 의(義)를 얻겠다고 노력했던 “이스라엘이 구(求)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 (로마서 11:7). 이렇게 인간은 노력하여 구할지라도 안 되고, 하나님의 택하시는 의지(예정)로 되는데, 그 택하시는 기준이 바로 믿으면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기준에 들지 못한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로마서 11:7)
(로마서 11:7)절의 “남은 자(the rest)”는 (로마서 11:5절)에서의 “남은 자”(a remnant)와는 다르다.
(로마서 11:7절)은 택하고 남은, 즉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남은 쭉정이를 일컫는 말이고,
(로마서 11:5절)의 남은 자는 쭉정이를 날려 보내고 남은 알곡을 말한다.
고로 “남은 자”(a remnant)는 구원(救援)을 얻지만, “남은 자(the rest)”는 멸망을 당한다.
알곡은 거두고 남은 쭉정이의 모습도 예언되어 있는데,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이사야 29:10)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8절).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로마서 11:9절), 그들의 눈은 흐려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로마서 11:10절) 하였느니라.”(시편 69:22-23절)는 말씀이다. 이런 자는 “남은 자(the rest)” 즉 불에 태울 쭉정이다.
◎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강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위해 흘러 넘쳤다.
◎ <정직(正直)하게 읽을 것>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상고하고 그들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았더라면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되시는 증거를 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긍지를 가졌던 성을 파멸시킨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은 그들의 몰지각한 완고성으로 말미암아 편협해졌다.”(시대의 소망, 241)
◎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拒絶)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다.
▣ <월요일 요약>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異邦人)인이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열려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그들은 욕망과 이기심과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유대인뿐만 안이라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있다.
화요일(9월 7일)
<접(椄)붙인 가지>
▣ 접(椄)붙인 가지의 비유(로마서 11:15-24)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의 나음을 인정하라는 내용이다.
(로마서 11:15-24)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해설이 따로 필요 없이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본 성경 절은 지금가지의 유대인 위상에 대한 종합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설명이 좀 필요한 것은 접붙임에 대한 개념이다.
(로마서 11:17절)에서 참 감람나무뿌리에 돌 감람나무 가지를 접(椄)붙였다고 했는데
이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앞 장(章)들에서 계속적으로 생명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구원 얻는 원리를 설명해
왔는데(참 진액을 받아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되기),
그런데 여기서의 설명이 실제의 접붙이는 원리와 다르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의 접붙이는 방식은 돌 과수나무뿌리에 참 과수나무 가지를 접(椄)붙이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좋은 뿌리에 나쁜가지를 접붙인다고 했으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⑴. 바울이 접붙이는 원리를 잘 모르고 비유를 들었다면,
성경말씀에도 이렇게 피상적인 지성이 허용되는 것인가?
⑵. 또 알면서도 변형시켜 사용했다면,
바울도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억지 논리를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는 논리적으로만 파고들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지 접붙이는 방법을 강습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조금 변형시켰다고 해서 억지 지성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늙은 과수(果樹)를 회생 시킬 때나,
병든 가지를 재생(再生)시킬 때 는 혹 이렇게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比喩)란 원래가 원 사실을 잘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도리어 우리의 구원이 이러한 역리적(逆理的)인 수단까지 동원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는데 감사 할 수 있을 것이다.
◯ “축자영감설”(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을 선지자가 받아쓰기만 했다는 견해)이 아니라,
“사상 영감설”(하나님의 영감과 계시로 감동을 받은 사람이 자기 말로 기록 했다는 견해)을 받아들인다면
이해하는 데 곤란 할 것도 없다.
도리어 이 엇긋진 접붙이기가 깊은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의도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뿌리는 두고 가지 얼마를 꺾으셨다. (렘 5:10)
이 꺾은 자리에 이방인 가지를 접붙이시는데 (로마서 11:17)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임이 되려면
근본 되는 뿌리를 아예 바꿔야 한다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믿음의 의(義)란 인성을 다듬고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를 아예 바꾸는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나타내지만,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창조주 믿음과 이방인의 공력신앙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때
이방인이 하나님께 나오려면 그 뿌리가 되는 근본을 바꾸어야만 하는 것이다.
◯ (로마서 11:19-22절)을 참고로 볼 때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음 여하로 꺾이기도 하고 접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두 원나무에 붙어있도록,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움으로 믿음에 서 있는 것이 중요 할뿐이다.
넘어져 꺾이는 자는 하나님의 준엄한 취급(엄위)을 받을 것이요,
서있어 붙어있는 자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은혜(인자)속에 거할 것이다. (로마서 11:23-24절 참조).
◎ 바울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풍성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므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평행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과
(2) “그(들의) 받아들이는 것”(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쇠락과 퇴출은 한시적인 것이며 그 뒤에 충만함과 용납이 있을 것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11장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이다.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 근원에 붙어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고, 근원과 거리가 먼 많은 이방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누가 다시 떨어져 나가고 누가 다시 접붙여질 것인지의 여지는 항상 남아있으며
그것은 더 이상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 <진정한 자아(自我) 발견>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양(謙讓)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실물교훈, 158)
▣ <화요일 요약>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나 가르침은 비성서적(非聖書的)이다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선민사상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은 자리를 잃었고,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원은 받을 자유도 있지만 거절할 자유도 있다.
실수할 때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거나, 완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조심해야 되며,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특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은 불가능 하다는 생각도 피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구원은 선(善)함이나 우수함의 댓가가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함이나 우월감에서 사로 잡혀선 안된다.
우리에게 자랑 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에게 삶에 모본을 보여주시고, 도울 힘을 약속하신 예수님밖에 없다.
수요일(9월 8일)
<신비(神秘)가 드러남>
▣ 사도 바울은 좀 더 깊은 진리, 좀 더 민감한 진리를 소개 할 때는 신비(神秘)(비밀)라는 말을 흔히 쓴다.
(엡 3:3-4; 골로새서 1:26-27; 딤전 3:16)
그런데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줄로 착각하고는 이리저리 주장하는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명하기 위하여 알려준다는 비밀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愚鈍)하게 된 것이라” (로마서 11:25절).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구원(救援)하실 이방인을 미리 정해 놓으시고 그 수를 채우신다는 말인가?
아니면 떠나간 완악한 유대인의 수만큼만 이방인으로 채우신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말과 연관 지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속에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가 있고,
채워야 할 수가 있다는 말들은 있다. (사도행전 1:7; 전도서 3:1-8; 갈라디아서 4:4)
그리고 순교자도 그 숫자가 차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말도 있는데 (계시록 6:11),
이런 여러 말씀으로 볼 때, 이 “비밀(秘密)”이란 말은 지혜 있는 자는 알아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예민한 문제로서, 이스라엘 일부가 완악하게 된 것이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구원(救援)을 얻게 하기 위한(계시록 7:9 참조) 수단이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1:26절)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상당히 의문을 일으킨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다시 이방인을 인하여 시기 나게 하여 온 이스라엘로 구원 얻게 하심으로,
결국은 양편 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만인 구원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발한 논리일지는 몰라도 진리는 되지 못한다.
혈통적 유대인이 다 유대인이 아니요 할례(割禮)가 다 할례가 아니라고 그렇게 강조해 왔으며,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救援)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모두 구원을 얻는다면 결국 선악의 차이, 믿음의 유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희한한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본 문맥도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원뿌리와 접붙인 가지가 합해져서 완전한 나무가 되듯이,
이방인의 충분한 수가 들어와서 약속된 믿음 속에서 영적으로 이스라엘이 온전해 진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이루어진 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에(이사야 59:20-21절)를 바울이 인용하여 (로마서 11:26절)말씀하고 계신다.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 (로마서 11:26-27절)이라는 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충만케 하실 이 영적 이스라엘에 적용시킨다.
◎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證據)되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대거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 절들을 가지고 수세기동안 논쟁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우선 전체 논조(論調)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제(救濟)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오직
(1)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2)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그리스어 프로시스는 “단단함”을 의미함)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 구절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성취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될 때,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화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것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포에 의한 모든 유대인의 구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인류 전체 혹은 특별 지역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바울은 그 중에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하였다(14절).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야를 영접했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였다.
◎ <엘렌 G. 화잇은 로마서 11장(章) 주석(註釋)>
“복음의 마지막 선포”의 때에 “많은 이(유대인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적, 381)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루어야 할 막중한 과업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이 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개종하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저들을 통하여 우리는 비치는 등불처럼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으므로 현대진리의 빛이 저들에게도 소개되어야 한다. 저들 중에는 빛으로 나와서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복음전도, 578)
◎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지 않으셨음>
“마지막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돌아보지 아니하였던 계급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세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 할 때에 구약과 신약 성경을 잘 융합해서 설명하면, 이것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새 창조(영혼의 부활)의 아침과 같이 새로움을 줄 것이다.”(복음교역자, 398)
▣ <수요일 요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며,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다.
목요일(9월9일)
<죄인(罪人)들의 구원(救援)>
▣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하면(구세주(救世主)를 죽인 것으로 하면)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怨讐)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구약(舊約) 말씀을 받은 것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믿음 안에서 영적(靈的)으로 다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後悔)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절).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다.
◯ 옛날 양식(糧食)이 귀하던 시절 어느 가정의 한 할머니가 배고픈 이웃 아들을 불쌍히 여겨,
매일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쓰다듬어 주면서 밥 안 먹는 친손자로 시기 나게 해서 둘 다 밥을 잘 먹여
키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위의 말씀이 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하나님은 아기를 모두 사랑하시는 자비(慈悲)로운 할머니이시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이런 식으로 하여 다 같이 구원(救援)으로 이끄신다.
하여튼 혈통의 선민(選民)과 약속의 선민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바울도 설명하느라고 애를 먹고 있다. 다시 요약 하면
“너희가(이방인)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이스라엘)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이방인)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이스라엘)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1:30-31절).
한번은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인이 긍휼을 얻었고,
다시 한 번은 이방인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얻어,
결국은 양편의 순종치 아니함이 양편의 긍휼 얻음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로마서 11:32절).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로마서 11:33-36절).
◎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 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 전도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 <영혼(靈魂)을 소중(所重)히 여기라.>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 “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들로서 상당히 많은 무리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구주의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기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새로이 연구하게 된 충실한 남녀들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이 그의 강림을 갈망해 온 분으로 인정한 충실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사도행적, 376~377)
◎ “유대인 중에는 다소 사람 사울처럼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것이다. 당신의 종들이 오랫동안 버려두고 멸시하여 온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수고할 때에 그분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381)
◎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합할 때 이것은 많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창 곧 영혼의 부활의 아침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복음 시대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 묘사된 것을 보고 신약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는지를 깨달을 때 그들의 잠자던 기능은 일깨움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계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사도행적, 381)
▣ <목요일 요약>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怨讐)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유대인들에게 계시(啓示)되었고,
그들은 그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이다.
<초점(焦點)>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 우리를 인도하는 율법의 최종 목표이다.
구원(救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우수함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차별이 없이 모든 백성 모든 인간에게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그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전도(傳道)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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