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은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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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9-03 14:30 조회5,942회 댓글0건본문
9월 11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7분
기억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10~11장
로마서 10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한 가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분의 사랑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로마서 10장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2).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이런 은혜는 국적이나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온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역할이 바뀌었지만 구원의 기본 계획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이 주제를 이어간다. 여기서도 바울은 택하심과 부르심에 관하여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할에 관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절대 그런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 특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한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는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 11:5~6
|학습목표|
⊙ 깨닫기 :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접붙이신 것처럼 다시 원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임을 알고 모두를 구원하려는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는다.
⊙ 느끼기 : 가능한 모두에게 자비를 보이시고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원대한 목적을 이해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자비와 친절을 확대한다.
01. 깨닫기: 원가지 또는 접가지
A.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위는 우리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분의 사역을 수용하는 것에 달려있다. 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가?
B. 약속의 자손으로 접붙임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주는 약속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C. 원래 약속이 주어졌던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02. 느끼기: 자비
A. 어떻게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분의 자비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가?
B.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는가? 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을 자랑하지 말고, 그 자비의 선물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가?
03. 행하기: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됨
A.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우리는 그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확대 시켜야 하는가?
요점: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5일) 율법의 마침
❶ 롬 10:1~4을 읽으십시오. 이전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했을 때, 이 말씀이 주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롬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답: 이스라엘 백성은 열정적인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였다. 그들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율법주의의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매우 미묘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 즉 자신의 선행과 식습관, 엄격한 안식일 준수, 그들이 금하고 있는 일들, 심지어 최고의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업적들을 바라보는 자들은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죄에 빠지기 쉬운 자아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와 반대되는 “자기 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롬 10:4은 로마서 전체 기별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성경절이다. 우선 우리는 말씀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고 있었다(롬 10:3).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롬 10:5). 그런데 메시야가 오심으로 참된 의의 길이 제시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정시킨 모든 자에게 의가 베풀어졌다. 그분은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가리켰던 분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의 정의에 십계명을 포함시킨다할지라도 십계명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와 잘못, 부족을 지적함으로써 구주에 대한 필요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용서와 의에 대한 필요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해 주려고 했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마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텔레오는 “목표” 또는 “목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계명, 특히 넷째 계명의 폐지를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가르쳤던 수많은 교훈에 역행하는 것이다.
구원의 근원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부가설명>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이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로 삼는 것 같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할 것이 없도록 하셨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제 율법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제시하면 된다. 율법은 예수님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다. 그는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킨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율법의 요구와 상관없이 생활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의 이해가 어려운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만족시킨 예수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 상태가 나의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제 율법의 요구를 범하시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 자체가 언제나 율법의 모든 요구의 만족이시다. 율법은 예수님을 만나면 언제 그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인하여 만족해한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런 상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 상태 안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율법의 지켜진 상태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벗어나면 그는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이치는 이런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볼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교훈: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의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월요일(9월 6일) 은혜로 선택됨
❶ 롬 11: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부인하고 있습니까?
[롬11:1~7]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은혜로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것을 영접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는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회심한 집단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 다음 베드로가 보았던 특별한 이상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복음이 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사도행전 10장과 행 15:7~9 참 조).
❷ 롬 11:7~10을 읽으십시오. 정말 하나님은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이 구원에 대하여 눈이 멀도록 하셨습니까? 이런 이해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습니까?
[롬11:7~10]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답: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강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위해 흘러 넘쳤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구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구원을 밝혀주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가린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9장의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집단도 제외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 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했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정직하게 읽을 것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상고하고 그들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았더라면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되시는 증거를 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긍지를 가졌던 성을 파멸시킨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은 그들의 몰지각한 완고성으로 말미암아 편협해졌다.”(시대의 소망, 241)
<부가설명>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다.(요1:14,17)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엘리야 때에도 이런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바알을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이 7천명이나 있었다는 말이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하나님을 위한 투사였지만 그 역시 구원은 그의 투쟁의 보상이 아니라 메시야로 인하여 얻은 것이다. 그는 변화산에 나타나서 모세와 함께 예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하여 대화하였다.(눅9:30,31)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알고 믿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원의 은혜 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의 은총을 입었는데, 민족적으로 거절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개인적으로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구원에 참여하며 동시에 또한 구원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은혜이다.
교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다.
화요일(9월 7일) 접붙인 가지
❶ 롬 11:11~15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위대한 소망을 전하고 있습니까?
[롬11:11~15]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답: 바울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풍성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므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평행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과 (2) “그(들의) 받아들이는 것”(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쇠락과 퇴출은 한시적인 것이며 그 뒤에 충만함과 용납이 있을 것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11장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이다.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부가설명> 이스라엘이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이기보다는 민족적으로는 선민의 자격을 잃었다.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공식적으로 가이사를 택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요19:1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과 같은 반열에 들었다.(행4:27) 그들이 스데반을 죽였을 때 그들을 위한 특별 은혜의 기간인 70 이레가 끝났다. 그들은 권고하는 날을 알지 못한 것이다.(눅19:44) 그래서 국가적 민족적으로 그들은 꺾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예수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며 교회를 통하여 주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든지 선민이 되는 일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선민이 되고 교회를 형성하여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 속했든지 동일한 상태에 있다. 민족적 이스라엘도 이렇게 영적 이스라엘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❷ 롬 11:16~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롬11:16~24]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답: 근원에 붙어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고, 근원과 거리가 먼 많은 이방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누가 다시 떨어져 나가고 누가 다시 접붙여질 것인지의 여지는 항상 남아있으며 그것은 더 이상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를 귀한 감람나무에 비유하였다. 그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 몇 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증명한다(2절). 뿌리와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을 받을 자유도 있지만, 구원을 거절할 자유도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실수할 때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거나 ‘완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특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피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22절)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거나 동료 인간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선함이나 우수함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표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자랑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본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살 힘을 약속하신 예수밖에 없다. 그분이 없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하여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 발견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양(謙讓)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실물교훈, 158)
<부가설명> 접붙이는 문제에 대하여 오해할 가능성이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법은 좋은 가지를 나쁜 나무뿌리에 접붙인다. 예를 들면 감나무를 고염나무에 접붙이고 오렌지나무를 탱자나무에 접붙인다. 그런데 여기는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다. 그래서는 돌 감람이 열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유가 잘못되었다고 오해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열매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 감람나무 같은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 둥치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 감람나무뿌리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록 돌 감람나무일지라도 참 감람나무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 감람나무뿌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고, 그 언약에 의하여 참 생명 되시는 예수께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없다. 오히려 선민사상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은 자리를 잃었고,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수요일(9월 8일) 신비가 드러남
❶ 롬 11:25~27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큰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롬11: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답: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대거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절들을 가지고 수세기동안 논쟁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우선 전체 논조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제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오직 (1)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2)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그리스어 프로시스는 “단단함”을 의미함)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 구절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성취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될 때,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화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것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포에 의한 모든 유대인의 구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인류 전체 혹은 특별 지역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바울은 그 중에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하였다(14절).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야를 영접했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였다.
로마서 11장을 주석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복음의 마지막 선포”의 때에 “많은 이(유대인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적, 38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루어야 할 막중한 과업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이 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개종하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저들을 통하여 우리는 비치는 등불처럼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으므로 현대진리의 빛이 저들에게도 소개되어야 한다. 저들 중에는 빛으로 나와서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복음전도, 578)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지 않으셨음
“마지막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돌아보지 아니하였던 계급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세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 할 때에 구약과 신약 성경을 잘 융합해서 설명하면, 이것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새 창조(영혼의 부활)의 아침과 같이 새로움을 줄 것이다.”(복음교역자, 398)
<부가설명> 바울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복음에 참여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민족적 국가적 선민 자격은 없어졌지만 이방인들이 다 개인적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데, 유대인도 개인적으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이 되어서 충만한 수를 이룰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그 명령이 성취될 것이며 그때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이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창조주의 뜻을 거역하여 창조주가 존재하게 한 대로 존재하기를 거절한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루시퍼를 따른 천사들도 그럴 것이고 예수 안에 들어오기를 끝까지 거절한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이다. 그날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교훈: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목요일(9월 9일) 죄인들의 구원
로마서 11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동족의 일부가 자신과 복음의 진리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깨달게 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❶ 롬 11:28~36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의 능력을 어떻게 설명 하고 있습니까?
[롬11:28~36]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답: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 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위 성경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되어 있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죄인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로 계획하셨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람들을, 때로는 나라들을 사용하기로 계획하셨다.
❷ 기도하는 마음으로 31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전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롬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전도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더욱 잘 대했다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찾았을 것이다. 기원 후 몇 백 년 동안 이루어진 큰 배도와 제칠일 안식일을 배격하고 일요일을 선호하는 등 기독교 내에 이루어진 급격한 이교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나아오기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그런 자비를 보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마 18:23~36 참조).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부가설명>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예외 없이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도 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어도 그것이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겨줄 수 없다. 그래서 다 죄인들이다.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는 의미와 이유도 증거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구주가 되시는 까닭도 밝히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교훈: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유대인들에게 계시되었고, 그들은 그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이다.
금요일(9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77~79 “산헤드린 앞에서”, 112~114 “박해자에서 제자로”, 474~475 “로마에서 편지함”, 복음전도, 573~577 “천주교인을 위한 사업”, 가려 뽑은 기별 1권, 155~156 “전파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들로서 상당히 많은 무리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구주의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기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새로이 연구하게 된 충실한 남녀들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이 그의 강림을 갈망해 온 분으로 인정한 충실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사도행적, 376~377)
“유대인 중에는 다소 사람 사울처럼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것이다. . . . 당신의 종들이 오랫동안 버려두고 멸시하여 온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수고할 때에 그분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381)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합할 때 이것은 많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창 곧 영혼의 부활의 아침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복음 시대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 묘사된 것을 보고 신약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는지를 깨달을 때 그들의 잠자던 기능은 일깨움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계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사도행적, 3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율법, 특히 안식일 계명이 날카롭게 부각되는 마지막 때에 재림 신도들처럼 십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세계 앞에서 중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대인가요 아닌가요? 토론해 보십시오.
* 그것은 바람직한 기대이며 그 이유를 십계명의 조문에 매인 상태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와 생명 관계로 증거하게 된다면 더 욱 좋을 것이다.
2. 여러 교회들 가운데 재림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성공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대의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대 또는 그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사상이 재림 교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교육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다.
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유대인들은 말씀을 맡은 백성이었다.(롬3:1,2) 그러나 그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했다.(히4:2) 재림성도들도 말세에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다.(계12:17) 들은바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하면 같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기억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10~11장
로마서 10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한 가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분의 사랑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로마서 10장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2).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이런 은혜는 국적이나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온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역할이 바뀌었지만 구원의 기본 계획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이 주제를 이어간다. 여기서도 바울은 택하심과 부르심에 관하여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할에 관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절대 그런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 특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한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는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 11:5~6
|학습목표|
⊙ 깨닫기 :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접붙이신 것처럼 다시 원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임을 알고 모두를 구원하려는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는다.
⊙ 느끼기 : 가능한 모두에게 자비를 보이시고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원대한 목적을 이해한다.
⊙ 행하기 :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자비와 친절을 확대한다.
01. 깨닫기: 원가지 또는 접가지
A.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위는 우리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분의 사역을 수용하는 것에 달려있다. 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가?
B. 약속의 자손으로 접붙임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주는 약속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C. 원래 약속이 주어졌던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02. 느끼기: 자비
A. 어떻게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분의 자비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는가?
B. 어떻게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는가? 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을 자랑하지 말고, 그 자비의 선물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가?
03. 행하기: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됨
A.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우리는 그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확대 시켜야 하는가?
요점: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일요일(9월 5일) 율법의 마침
❶ 롬 10:1~4을 읽으십시오. 이전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했을 때, 이 말씀이 주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롬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답: 이스라엘 백성은 열정적인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였다. 그들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율법주의의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매우 미묘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 즉 자신의 선행과 식습관, 엄격한 안식일 준수, 그들이 금하고 있는 일들, 심지어 최고의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업적들을 바라보는 자들은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죄에 빠지기 쉬운 자아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와 반대되는 “자기 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롬 10:4은 로마서 전체 기별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성경절이다. 우선 우리는 말씀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고 있었다(롬 10:3).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롬 10:5). 그런데 메시야가 오심으로 참된 의의 길이 제시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정시킨 모든 자에게 의가 베풀어졌다. 그분은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가리켰던 분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의 정의에 십계명을 포함시킨다할지라도 십계명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와 잘못, 부족을 지적함으로써 구주에 대한 필요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용서와 의에 대한 필요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해 주려고 했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마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텔레오는 “목표” 또는 “목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계명, 특히 넷째 계명의 폐지를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가르쳤던 수많은 교훈에 역행하는 것이다.
구원의 근원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부가설명>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이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로 삼는 것 같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할 것이 없도록 하셨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제 율법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제시하면 된다. 율법은 예수님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다. 그는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킨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율법의 요구와 상관없이 생활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의 이해가 어려운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만족시킨 예수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 상태가 나의 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제 율법의 요구를 범하시는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 자체가 언제나 율법의 모든 요구의 만족이시다. 율법은 예수님을 만나면 언제 그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인하여 만족해한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런 상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 상태 안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율법의 지켜진 상태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벗어나면 그는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이치는 이런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볼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교훈: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의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월요일(9월 6일) 은혜로 선택됨
❶ 롬 11: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부인하고 있습니까?
[롬11:1~7]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 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은혜로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것을 영접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는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회심한 집단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 다음 베드로가 보았던 특별한 이상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복음이 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사도행전 10장과 행 15:7~9 참 조).
❷ 롬 11:7~10을 읽으십시오. 정말 하나님은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이 구원에 대하여 눈이 멀도록 하셨습니까? 이런 이해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습니까?
[롬11:7~10]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답: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류를 대표하였다.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사단의 속임수에 눈이 멀어 그들은 참된 것을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강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위해 흘러 넘쳤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구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구원을 밝혀주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가린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9장의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집단도 제외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 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했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정직하게 읽을 것
“만일 그들이 성경을 정직하게 상고하고 그들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시험해 보았더라면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되시는 증거를 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긍지를 가졌던 성을 파멸시킨 재앙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은 그들의 몰지각한 완고성으로 말미암아 편협해졌다.”(시대의 소망, 241)
<부가설명>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다.(요1:14,17)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엘리야 때에도 이런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바알을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이 7천명이나 있었다는 말이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하나님을 위한 투사였지만 그 역시 구원은 그의 투쟁의 보상이 아니라 메시야로 인하여 얻은 것이다. 그는 변화산에 나타나서 모세와 함께 예수께서 죽으실 것에 대하여 대화하였다.(눅9:30,31)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알고 믿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원의 은혜 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의 은총을 입었는데, 민족적으로 거절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도 개인적으로 예수 안에서 얼마든지 구원에 참여하며 동시에 또한 구원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은혜이다.
교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다.
화요일(9월 7일) 접붙인 가지
❶ 롬 11:11~15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위대한 소망을 전하고 있습니까?
[롬11:11~15]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답: 바울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풍성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므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평행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과 (2) “그(들의) 받아들이는 것”(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쇠락과 퇴출은 한시적인 것이며 그 뒤에 충만함과 용납이 있을 것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11장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이다.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부가설명> 이스라엘이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이기보다는 민족적으로는 선민의 자격을 잃었다.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고 공식적으로 가이사를 택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요19:1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과 같은 반열에 들었다.(행4:27) 그들이 스데반을 죽였을 때 그들을 위한 특별 은혜의 기간인 70 이레가 끝났다. 그들은 권고하는 날을 알지 못한 것이다.(눅19:44) 그래서 국가적 민족적으로 그들은 꺾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예수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며 교회를 통하여 주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든지 선민이 되는 일은 없다.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선민이 되고 교회를 형성하여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 속했든지 동일한 상태에 있다. 민족적 이스라엘도 이렇게 영적 이스라엘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❷ 롬 11:16~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롬11:16~24]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답: 근원에 붙어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고, 근원과 거리가 먼 많은 이방인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누가 다시 떨어져 나가고 누가 다시 접붙여질 것인지의 여지는 항상 남아있으며 그것은 더 이상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를 귀한 감람나무에 비유하였다. 그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 몇 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증명한다(2절). 뿌리와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을 받을 자유도 있지만, 구원을 거절할 자유도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실수할 때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거나 ‘완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특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피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22절)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거나 동료 인간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선함이나 우수함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표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자랑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본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살 힘을 약속하신 예수밖에 없다. 그분이 없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하여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 발견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양(謙讓)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실물교훈, 158)
<부가설명> 접붙이는 문제에 대하여 오해할 가능성이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법은 좋은 가지를 나쁜 나무뿌리에 접붙인다. 예를 들면 감나무를 고염나무에 접붙이고 오렌지나무를 탱자나무에 접붙인다. 그런데 여기는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인다. 그래서는 돌 감람이 열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유가 잘못되었다고 오해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열매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 감람나무 같은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 둥치에 접붙임을 받아서 참 감람나무뿌리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록 돌 감람나무일지라도 참 감람나무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참 감람나무뿌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고, 그 언약에 의하여 참 생명 되시는 예수께 접붙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없다. 오히려 선민사상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은 자리를 잃었고,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수요일(9월 8일) 신비가 드러남
❶ 롬 11:25~27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큰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롬11: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답: 바울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대거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절들을 가지고 수세기동안 논쟁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우선 전체 논조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제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오직 (1)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2)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그리스어 프로시스는 “단단함”을 의미함)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 구절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성취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될 때,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화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것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포에 의한 모든 유대인의 구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인류 전체 혹은 특별 지역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바울은 그 중에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하였다(14절).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야를 영접했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였다.
로마서 11장을 주석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복음의 마지막 선포”의 때에 “많은 이(유대인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적, 38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루어야 할 막중한 과업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이 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개종하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저들을 통하여 우리는 비치는 등불처럼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으므로 현대진리의 빛이 저들에게도 소개되어야 한다. 저들 중에는 빛으로 나와서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복음전도, 578)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지 않으셨음
“마지막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돌아보지 아니하였던 계급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세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 할 때에 구약과 신약 성경을 잘 융합해서 설명하면, 이것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새 창조(영혼의 부활)의 아침과 같이 새로움을 줄 것이다.”(복음교역자, 398)
<부가설명> 바울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복음에 참여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민족적 국가적 선민 자격은 없어졌지만 이방인들이 다 개인적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데, 유대인도 개인적으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이 되어서 충만한 수를 이룰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그 명령이 성취될 것이며 그때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이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창조주의 뜻을 거역하여 창조주가 존재하게 한 대로 존재하기를 거절한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루시퍼를 따른 천사들도 그럴 것이고 예수 안에 들어오기를 끝까지 거절한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게 될 것이다. 그날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교훈: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목요일(9월 9일) 죄인들의 구원
로마서 11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동족의 일부가 자신과 복음의 진리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깨달게 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❶ 롬 11:28~36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의 능력을 어떻게 설명 하고 있습니까?
[롬11:28~36]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답: 믿음의 원가지인 유대인들이 복음의 원수가 되었지만, 불순종했던 이방인 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동일한 조건에서 긍휼을 얻게 되었다.
위 성경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되어 있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죄인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로 계획하셨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람들을, 때로는 나라들을 사용하기로 계획하셨다.
❷ 기도하는 마음으로 31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전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롬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전도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더욱 잘 대했다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찾았을 것이다. 기원 후 몇 백 년 동안 이루어진 큰 배도와 제칠일 안식일을 배격하고 일요일을 선호하는 등 기독교 내에 이루어진 급격한 이교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나아오기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그런 자비를 보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마 18:23~36 참조).
영혼을 소중히 여기라.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부가설명>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예외 없이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도 바울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어도 그것이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생명으로 옮겨줄 수 없다. 그래서 다 죄인들이다.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는 의미와 이유도 증거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구주가 되시는 까닭도 밝히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교훈: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유대인들에게 계시되었고, 그들은 그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이다.
금요일(9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77~79 “산헤드린 앞에서”, 112~114 “박해자에서 제자로”, 474~475 “로마에서 편지함”, 복음전도, 573~577 “천주교인을 위한 사업”, 가려 뽑은 기별 1권, 155~156 “전파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들로서 상당히 많은 무리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구주의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기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새로이 연구하게 된 충실한 남녀들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이 그의 강림을 갈망해 온 분으로 인정한 충실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사도행적, 376~377)
“유대인 중에는 다소 사람 사울처럼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것이다. . . . 당신의 종들이 오랫동안 버려두고 멸시하여 온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수고할 때에 그분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381)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합할 때 이것은 많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창 곧 영혼의 부활의 아침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복음 시대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 묘사된 것을 보고 신약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는지를 깨달을 때 그들의 잠자던 기능은 일깨움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계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사도행적, 3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율법, 특히 안식일 계명이 날카롭게 부각되는 마지막 때에 재림 신도들처럼 십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세계 앞에서 중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대인가요 아닌가요? 토론해 보십시오.
* 그것은 바람직한 기대이며 그 이유를 십계명의 조문에 매인 상태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와 생명 관계로 증거하게 된다면 더 욱 좋을 것이다.
2. 여러 교회들 가운데 재림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성공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대의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대 또는 그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사상이 재림 교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교육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다.
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유대인들은 말씀을 맡은 백성이었다.(롬3:1,2) 그러나 그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했다.(히4:2) 재림성도들도 말세에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다.(계12:17) 들은바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하면 같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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