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 로마서 7장의 사람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8과 - 로마서 7장의 사람

페이지 정보

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8-18 23:41 조회6,122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2010년08월 21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7분

제8과 <로마서 7章의 사람>

<記憶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 <로마서 7장의 개요(槪要)>
로마서 7장은 로마서의 핵심(核心)이다.
로마서 7장을 3구분으로 요약되며, 총 주제는 “율법(律法)아래에서 은혜(恩惠)아래로”이다.
Ⅰ. 우리가 어떻게 율법아래에서 구원(救援)을 받았는가를 설명한다. (롬 7:1-6)
<자기를 부인(否認)하면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원리를 부부관계(夫婦關係)를 통해 설명하고,>
Ⅱ. “율법 아래”에서의 문제점과 율법의 기능을 설명한다. (롬 7:7-13)
<율법은 우리속의 죄를 더욱 죄(罪) 되게 하는 선(善)한 역할을 하며,
Ⅲ. 거룩한 율법과 죄악적인 사람과는 조화될 수 없음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한다. (롬 7:14-25)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거부(拒否)하는 마음,
선(善)한 양심과 악한 욕망(慾望)등이 우리 속에서 충돌하여 갈등으로 일으키는데, 오직 선택의지가 중요하다.>

<要點>
본성적으로 죄(罪)된 자아와 욕망에 대하여 죽어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

일요일(8월 15일)
<율법에 매임?>

▣ <법을 아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
모든 법에는 입법자(立法者), 목적(目的), 규정(規定), 조항의 적용범위, 그 범법자의 처리규정 등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이 스스로 입법하신 율법의 적용대상 범위와 그 기본 목적을 재차 밝힘으로서,
이미 그 율법의 적용범위에서 면제(免除)된 성도의 마땅히 행할 새 지표를 로마서7장1-6절에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 <로마서 7장의 예증(例證)을 살펴보자.>
(로마서7:2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절)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 토라, 율법 책에는 온갖 종류의 규례들과 규정들이 있는데 결혼법(結婚法)도 있다.
결혼법(結婚法)은 한 쌍이 결혼할 때 그들은 서로 실증을 느낄 때까지만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혹시 허용될지 모르나 율법 서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결혼하는 것이다.
그가 한 예증을 사용한 것은 그가 로마서7장1절에서 말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태어나며 그 율법은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는 바울이“율법이 우리를 지배한다.”와 “율법아래”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래”라는 말은 노예사회(奴隸社會)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그것은 주인 아래 있었던 노예들에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너는 완전히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율법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한다.
우리는 율법의 통치하에 태어난다.
율법은 말한다. “순종하면 너는 살 것이요, 만일 네가 불순종하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율법 아래에서는, 너는 너의 행위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이 계산해야 한다.
율법은 어떤 다른 사람이 너를 대신해서 살아주거나 도와주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율법 아래에서 살기 위해서는 율법의 요구들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다.
이런 견해에서 우리가 갈라디아서 5장으로 돌아가서 실제적으로 로마서 8장에서 해설이 된 매우 중대한 어떤 것을 보자.

(갈라디아서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를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 안에 있다.

(갈라디아서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 아래에서는 성령께서 그대를 도와주시지 아니할 것이다.
그분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만을 도와주신다. 율법 아래에서는 그대는 그대의 행위의 기초 위에서만 계산(평가, 심판)해야 한다. 그대는 육신을 정복해야만 한다. 율법의 요구들에 응하기 위하여 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한다.

▶ 바울이 로마서 7장2,3절에 사용한 예증(例證)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여기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여자는 그녀가 결혼하기 원하는 다른 남자를 발견한다.
그러나 결혼법(結婚法)에 의하여 그녀는 그 첫 남편이 죽기 전에는 그분과 결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날마다 말한다. “나는 남편이 죽기를 원한다.”
그녀는 그가 죽는 일을 도우려고 노력까지도 해본다.
그가 죽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누가 첫 남편인가? 둘째 남편은 누구며 그 여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예증이며 이들은 모델들이다.

이 예증은 바울이 로마서 7장1절에서 한 말, 곧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말에 기초되었다.
율법은 첫 남편이요 우리는 아내이다. 둘째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원하나 첫 결혼에서 해방되기까지는 할 수 없다. 그 여자는 둘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첫 남편이 죽기를 바란다. 첫 남편이 매우 선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그 첫 남편이 간음을 행하여 이혼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첫 남편은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하다.(로마서7:12,14).

▶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 남편이 선(善)하다면, 왜 그 여자는 첫 결혼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가?”
첫 결혼에 문제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1. 첫 남편이 거룩하고 선(善)할지라도 아내를 동정할 줄을 모른다. 율법은 동정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명령만 한다. 그것은 동정할 수 없다. 그러나 둘째 남자(예수)는 동정할 줄 안다.
그래서 그 여자는 그분과 결혼하기 원한다.

2, 첫 남편은 그 아내가 착하게 되도록 도울 수 없다. 그는 착하게 되라고 말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여자는 할 수가 없다.
첫 남편이 스파게티를 하라고 하는데 그 여자는 자주 태운다. 접시를 씻으라 하는데 자주 접시를 깬다.
그 아내는 “여보 좀 도와주세요, 나는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가 말한다.
“나는 그대를 도울 수 없소. 나는 명령 밖에 할 수 없소” 율법은 동정할 수 없다.
율법은 도울 수 없다. (율법은 용서할 수도 없고 정죄하고 사형을 언도한다)
율법은 죄악적인 사람에게서 의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순종하지 못하는 그 아내는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율법은 명령 밖에 못하며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원하나 할 수 없다.

3.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다른 하나의 큰 문제는 그 첫 남편이 동정할 수 없고 도와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그의 머리카락 하나도 죽지 않는다. 우리 신자들로 대표된 이 여자는 그녀의 곤경에서 빠져나올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둘째 남자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분도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 우리 같이 도망가서 결혼하자”고 우리에게 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이 여인과 결혼하려면 첫 결혼을 무효화시켜야 한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첫 결혼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으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지시켰다고 가르치나 바울이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이 아니라 세대주의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로마서7장4절에서 주님이 어떻게 이 결혼을 무효화시키는가를 말한다. 결혼 법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죽음이 둘을 나눌 때까지 함께 연합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율법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이제 누가 죽는가를 보자.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이 구원하려는 인류의 공동체적인 인성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다.

◎ (롬 7:1~6절)에서 사용된 바울의 예증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사는 동안 여인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편이 살아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남편에게 매였던 법적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 로마서 7:4~5.절에서 바울은 혼인법에 관한 예증을 유대교 체계로 설명하기를
남편의 죽음으로 여자가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 것처럼,
육체에 거(居)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재혼(再婚)”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야의 초청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예증은 고대(古代)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바울이 의도했던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을 도덕법의 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조차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칠 일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넷째 계명의 폐지 및 변경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됨>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수준에 맞도록 당신의 율법의 요구를 낮추실 수도 없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에 응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은 죄악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고 창조주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사도행적, 425)

월요일(8월 16일)
<그럼 율법이 죄란 말인가?>

▣ <율법과 죄와의 관계>
성도(聖徒)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혹은 “벗어났다”하는 교훈 때문에,
“그러면 혹 율법 율법자체가 나쁜 것이 아닌가, 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율법 그 자체는 선(善)도 악(惡)도 아니며 선(善)과 악(惡)의 분별 기준이다.
즉 악하면 그 죄가 악한 것이지 죄를 죄라하는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악을 악으로 보여줌으로서 선(善)한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로마서 7장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율법에서 인용)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의문의 율법인가? 도덕률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것이다. 그대를 사형으로 정죄하고 있는 율법은 의문의 율법이 아니다.
사실상 의문의 율법은 그대들에게 그리스도를 그대들의 구주로 지시한다. 그대들을 정죄하는 것은 도덕률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그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우리의 새로운 남편을) 의문(문자)의 낡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7:6)
의문(letter, 문자)이란 규율(하라. 하지 말라)을 의미한다. 영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뜻한다.
율법의 영은 사랑이다. 율법의 문자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대를 지배하면, 그대는 이런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모든 일을 한다. 그것은 기쁨이 된다. 너무나 많은 규정들로 하라, 하지 말라 하는 교회의 규정들을 보라.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이교이다. 라틴어로 종교란 노예로 돌아가다 라는 뜻이다.

종교가 말하기를, “만일 네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라고 할 때, 이것이 노예이다. 죄(이기심)에 의하여 지배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네가 이것(계명, 의, 선)을 하면 천국에 가고 저것(죄악, 불순종)을 하면 지옥불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공포심에 의하여 순종하는 노예이다). 기독교는 참으로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와 사랑으로 값없이 용서와 구원을 받고 감사와 사랑으로 순종하며 봉사하는 것이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만일 네가 나를 순종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정죄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구원받았다. 나는 율법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너는 더 이상 나의 남편(주인)이 아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대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구원받기 위해서 의를 요구할 수 없으며, 그대가 넘어질 때마다 그대를 정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율법 아래에서 구원하시고 그대 홀로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분께서는 자신과 결혼하시려고 그대를 율법 아래에서 구원하셨다. 이제 그대는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다. 은혜 아래에서의 규율들은 “10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처벌하겠다.” 이런 것들이 아니다. 은혜 아래에서의 규율들은 매우 놀라운 규율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내가 네게 요구하는 전부는 내 안에 거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 있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내가 너희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이며 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을 때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은혜 아래에서 생산하며 실은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했는지를 설명하면서 한 문제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아래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한 두 가지 문제는
(1) 우리는 죄 아래에 있다는 사실과
(2) 우리는 율법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로마서 6장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를 죄 아래에서 구원하셨으며 또한 율법 아래에서 구원하셨다.
로마서 7장7절에서 바울이 일으킨 질문은 죄와 율법이 동의어 혹은 동업자인가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율법 아래에서와 죄 아래에서 구원받는다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이들은 두 가지 다른 일이다.

나는 죄가 나를 죽이기 때문에 죄 아래에서부터 구원받는다. 내가 율법 아래에서 구원받는 이유는 내가 율법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내가 죄악적인 본질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율법에 조화될 수 없고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로마서 7장 7절에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십계명 중에서 아무 계명이나 선택할 수 있었으나 독특한 계명을 선택했다. 그대들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행동과는 아무 상관없으나 욕망과 관계있는 계명을 택했다. 우리 중 많은 분들도 유대인들과 꼭 같은 잘못들을 범하고 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일어서서 말하곤 한다.
“나는 결코 아무도 살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잠깐, 너희가 마음으로 누구를 미워한다면,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너희는 이미 살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또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행동으로 간음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의 눈으로, 율법의 눈으로 율법의 눈에는,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서의 죄는 인간의 법과는 달리 행동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품고 있는 욕망(동기)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안식일 아침에 교회에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하자.(최소한 설교 듣는 것처럼 보이나)
그런데 내일 어떤 사람이 그대의 집을 사러 올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이 집을 팔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있으며, 그대는 갖가지 전략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자.
목사의 눈에는 그대가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 있다. 목사님이 보기에는 그대가 안식일마다 설교 들으러 오기 때문에 좋은 교인으로 보이나,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그대는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우리가 죄는 행동 이상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는 최소한 내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할 것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로마서 7장 8, 9절에서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우리는 반역적인 본성을 가졌으므로 그 율법은 실제로 우리 안에 그것을 범할 욕망을 일으킨다.
이것이 우리가 얼마나 죄악적(罪惡的)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7장 9-10절은 매우 중요하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바울은 자가기 율법을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2살 때부터 율법을 가르친다.
그들은 두루마리 율법 책에다 꿀을 발라서 2살 된 아들이 그 꿀을 핥아먹게 한다.
그 율법이 꿀같이 달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아이를 속이는 것이다. 단 것은 꿀이다. 12살 때 그 소년은 이미 토라(모세 5경)를 다 외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율법의 지식을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유대교가 율법은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율법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만일 그대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

◐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 그는 정죄 받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 계명이 이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양심을 깨우칠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자신을 보되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바울이었다.”(화잇 주석, 롬 7:9)

◐ <폐지된 것은 율법이 아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증명해 준다.”(각 시대의 대쟁투, 46)

◐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화요일(8월 17일)
<거룩한 율법>

▣ 로마서 7장12절의 말씀은
율법(律法)과 계명(誡命)의 신적기원(神的基源)과 근본적인 선(善)함을 밝히 드러내는 내용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義)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선(善)한 의도로 주신 것으로 근본적으로
악(惡)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는 기능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타락한 인류의 죄 된 본성과
범죄 행위 때문이다.

▣ 바울은 로마서7장12절에서 결론적으로 말한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는 우리의 곤경 때문에 율법을 탓할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의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아셨다면 왜 그것을 주셨는가?

▶ 여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4가지 목적이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죄가 무엇인가를 정의(定意)해 주기 때문에 주셨다.
(로마서7:7)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
사람의 생각에는 죄는 단지 행동이다.
만일 내가 이 도시의 거리에 나가서 멋진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거기 서서
“나는 저 차를 가졌으면 좋겠다” 고 말해도, 경찰이 나를 체포할 수 없다. 내가 그 차를 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나를 정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는 행동뿐만 아니라 품은 탐욕까지도 그 동기까지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 율법이 없다면, 사람에게는 죄는 항상 행동이므로,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온갖 생각들이 내 마음 속을 더럽히도록 허용할 것이다.
(살인, 강도, 간음 등 행위로 범하지 않는 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죄로 정의한다.

2. 율법은 인간의 죄악적인 본질(本質)을 드러낸다.
(로마서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
율법은 죄를 정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내가 죄인임을 보여주며 알려준다.
로마서3장20절도 역시 이 사실을 말한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죄에 대한 인식을 갖는다.
우리가 처음 율법 앞에 나갈 때,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나의 죄악성을 들어낸다.

3. 죄는 죽이는 것임을 율법이 지적(指摘)한다.
로마서7장9-11절은 율법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율법은 또한 우리가 얼마나 심히 악한 죄인(罪人)인가를 보여준다.
(로마서7:13) “…….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것이 사태를 개선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다.
이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신학자들이 이렇게 말한 때가 있었다.
“규율을 충분히 세워서, 우리는 미국인들에게 도덕적 자유를 주어야 한다.”
간음죄, 혼전 성생활, 그리고 온갖 부도덕이 증가하고 있다. 이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광란이 크게 악화일로에 있다.

미국에는 도덕재건 혹은 재건신학이라 불리우는 한 새로운 사상을 드높이는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부를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법률을 만들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일요일 휴업령이 이 운동을 통하여 통과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저것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법률을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모든 일은 문제를 은폐시킬 뿐이다.

이 나라에서 공공연한 음주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을 때, 백성은 음주를 금지하지 않았다.
죄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법률이 아니라 복음(福音)이다.
(13절) “그런즉 선(善)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罪)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우리의 자존심의 뚜껑을 열어서 우리가 내적으로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겉은 멋지고 깨끗하다.

◯ 내 위장(胃腸)이 주릴 때, 위는 머리에게 말한다. “나는 배가 고프다.” 그러면 내 머리는 다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을 데리고 냉장고로 가라” 그때 다리는 “나는 배가 안 고파요.
위(胃)가 배고프다면 위(胃)보고 가라고 하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다리는 나를 냉장고로 데리고 간다. 다리는 머리에 전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내가 냉장고 앞에 오면 머리가 손에게 “문을 열고 먹을 것을 꺼내라”고 명한다.
손은 “위(胃)보고 꺼내라고 하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손도 뇌(腦)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산다면 교회는 완전한 연합을 이룰 것이며,
우리는 피차 도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한 지체가 고통하면 모든 지체가 고통 한다는 말씀을 했다.
만일 하나가 칭찬을 받을 때 다른 지체들은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기뻐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를 해방시켜야 한다. 복음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이다.
율법이 우리를 심한 죄인임을 보여줄 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이것이 우리의 죄(罪)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 <율법 앞에서 인간은 죄인일 뿐이다.>
“거룩하다고 크게 공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을 들여다보라. 그들이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깨닫

◯ 율법은 너무나 선한 것이지만, 메시야 없는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낼 뿐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가야 한다.

수요일(8월 18일)
<로마서 7장의 사람>

▣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居)하는 죄(罪)니라>
우리는 로마서 7장17절에서 말하는 자아(自我)의 정체를 정확히 규명(糾明)하여야 한다.
앞의 “나”는 중생한 종합적 인격체로서의 “나”이며, 후자는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자아의 영혼(靈魂)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내 심령의 악(惡)한 본성(本性)”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전체적 자아인 내가 없애고자 노력하는 타락한 본성인 것이다.

▣ <내 속에 죄>
자기가 하기를 원하는데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내가 알지 못하노니”)행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15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은 함이라”
그런데 선을 행하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양심이 행하려 했던 것만으로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 되고,
정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즉 16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自己)속의 죄를 분리함으로서,
원치 않고 지은 죄는 자기 속의 죄의 책임이고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기 속의 양심과 실제로 행위를 하게하는 죄와
이들의 갈등 속에서 선 택력을 발휘하는 자기의지와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심령의 기능들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것인가도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20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 하는 죄니라.”
내속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죄가 심각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일 뿐이라고 하니,
편리한 자기 합리화로 보아야 하나, 아니면 죄의 정확한 통찰이라고 보아야 하나?
그래서 여기서는 로마서 5, 6, 7장에 그렇게도 많이 나온 “죄”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부터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거듭남과 성결(聖潔)을 획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죄라는 말이 로마서 5장12절에서 7장 끝까지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주장 다음의 각 개인이 실제로 의롭게 되는 과정을 다루는 부분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믿음으로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 만큼 의를 설명하기위해 죄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범위 안에 “죄(罪)”가 42번, “범죄”가 7번, “정죄”가 2번, “죄인”이 1번 나온다.
어근(語根)은 대부분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 그 동사형, 형용사 형인데,
“빗나가다”, “넘어지게 하다”, “빚진”, “형벌 받을”,등의 뜻이다.
그러나 본 로마서7장에서는 좀 더 근본적이며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죄론(罪論)을 신학적으로보다는 의로움을 위한 체험적인 입장에서 좀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 죄의 개념은 먼저 사회적으로는, “법률적 개념”과, “도덕적 개념”이 있다.
“법률적 개념”은 제정된 법조문을 어기는 것을 말하고(A라고 해보자),
“도덕적 개념”은 양심을 기준으로 이웃에게 정당하지 못하게 행동한 것을 말한다. (B라고 해보자)
이것이 세상적 개념이다. 그리고
성경의 개념도 원리는 같은데, “율법적 개념”과 “믿음의 개념”이 있다.
“율법적 개념”은 성경의 분명한 계명을 어기는 것을 말하여(a),
“믿음의 개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자기본위로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b).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행동으로 나타난, 소위 범죄(犯罪)만 죄로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네 가지 경우마다, 행위로 나타나기 전 마음에 품고 있을 때의 상태(A'. B'. a'. b'.)가 있고
또 범죄한 그 사람을 일컫는 죄인이라고 말할 때 (A. B. a. b)도 있다.
거기에다 범죄에 형벌이 첨가된 정죄(A~. B~. a~. b~)라는 개념도 있고,
죄인 스스로의 느낌이 첨가된 죄책감이라는 개념(A+. B+. a+. b+)도 있다.
죄의 개념이 이렇게 다양하다. 그러니 제대로 표현하려면 죄와 관계된 용어가 얼마나 많아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모든 용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같은 용어라도 문맥에 비추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용어가 어떤 개념으로 쓰였는지를 제대로 파악부터 해야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대개 A를 말하는 것이고,
교인들이 기도 하면서 고백하는 죄는 대개a를 말한다.
그러나 구원(救援)에서 다루는 문제는 마음속에 품은(A'. B'. a'. b'.)의 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죄보다 앞서는 더욱 근본적인 죄도 있는데,
어떤 불순한 의도를 품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겸손하고 이타적인 정신과 대립되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욕망이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 “이기적이며 교만한 정욕 자체”가 바로 죄인 것이다.
이것은 원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
바울의 탄식(롬 7:24)이 바로 이죄에 대한 것으로, 그 죄가 그만큼 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탄식이다.
이런 죄를 C라고 명명해보자,
이죄는 아주 집요한 것으로 그 지독함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의 필요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배경이 된다.
그렇게 지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역(逆)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25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찬양이 나오는 것이다.

◐ <율법은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64)

◐ 우리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목요일(8월 19일)
<사망에서 건져 냄>

▣ 바울은 몸 즉 육신(肉身)을 죄(罪)의 소재지(所在地),
곧 죽음을 가져오기 위하여 지체(肢體)속에서 활동하는 죄의 법이 거하는 장소로 본다. (롬 7:5, 13, 23, 25절)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통해 육체적 몸이 악(惡)하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구원에 대한 그의 부르짖음은 죄의 법의 속박에서 놓여나기 위함이며,
그리하여 그의 몸이 더 이상 죄와 죽음의 소재지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롬 12:1)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위함이다.

○ 바울이 깨달은 것은 구원(救援)은 율법을 통해 오거나,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지성(知性)의 힘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으며 그러한 방법들은 헛된 시도일 뿐이며 비참한 결과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25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1p)

◯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양심이 할 수 없는 일, 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복음(福音)의 계획으로 성취 될 수 있다.
완전한 구원(救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와 비교해보자.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주장하는 논의의 절정인 것이다.
율법의 탁월함을 확신하고, 율법의 요구를 알고 그 공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율법의 선함에 동의하고 더 나아가 그 가르침을 즐거워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게 항복하기 전에는,
순종하기 위해 아무리 진지한 노력을 한다 해도 지체(肢體)안에 있는 죄의 법을 대항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한 사람 그리스도에 대한 항복이 율법에 대한 율법 주의적 순종을 대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굴복이므로 완전한 자유로 느껴진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671p).
(정로의 계단 19; 치료봉사 131; 시대의 소망 466)

◐ <그리스도께서 전부가 되심>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 절망 중에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예수께서 주신 약속을 선택하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영광이 있었다. 이 두 율법은 다 신성의 소인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시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케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화잇 주석, 고후 3:7~11)

<초점(焦點)>
우리의 죄된 본성이 하나님의 법과 다투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또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무익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화의 삶을 약속하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