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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 죄를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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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8-09 22:38 조회6,2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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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8월14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6분

제7과
<죄(罪)를 이김>

<記憶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恩惠)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 <로마서6장(章)은 “우리의 내적변화(內的變化)”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로마서 6장을 3등분해보면
Ⅰ. “죄가 사망(死亡)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 <믿음을 알기 전 소욕(所欲)대로 살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Ⅱ. “은혜도 또한 의(義)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 <죄악적(罪惡的) 소욕(所欲)을 버리고 예수님의 의(義)를 받아들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Ⅲ.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永生)에 이르게 하려 함”
→ <새로운 빛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변화 되어가는 상태를 말함.>

☞ 로마서 6장(章)전체를 간추리면 이렇게 세부분으로 정리가 되는데,
내용의 흐름의 측면에서 다시 요약해 본다면 롬 6장 1, 2절의 배경과 의미는,
“유대인”의 궤변과 연관하여 설명했고, 그 다음
3-11절은 교회의 의식(儀式)인 침례(浸禮)와 대비하여 새로남(重生: 거듭남)의 원리를,
12-23절은 사회제도인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비(對比)하여 중생의 원리를 설명한 내용이다.

<要點>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충만하여 그의 죽음과 생명에 연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으면,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함과 영생의 복을 허락하신다.

일요일(8월 8일)
<은혜(恩惠)가 넘침>

▣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이 회복되고 확인 되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어떤 표가 있어야 하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는 그 표를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6장의 제목을 “호적신고”라고 생각해 봅시다.
미국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자동적으로 신고가 되고,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은 다음에 부모가 호적신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1-11절까지는 아들인,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인하는 예식으로 즉 호적신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침례(浸禮)인 것입니다.
그 다음 12절-14절까지는 이와 같이 아들로서 호적신고를 하고 아들의 신분이 법적으로도 확인된 사람들은 효도(孝道)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효도하는 삶을 사는 것은 자기를 의(義)의 병기(兵器)로 하나님 앞에 드려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그와 같이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15-23절까지는 이와 같이 된 사람의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관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들인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라고 번역된 말과, 자녀로 번역된 말이 각각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자녀라고 하는 말을 많이 즐겨 썼는데, 우리 한글로 번역된 말은 원문으로 “데크논(τεκνον)”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바울이 아들이라고 쓴 말의 원문으로는 헬라어 “휘어스(υιοʹѕ)”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그러면 두말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하면
자녀(子女)라고 하는 "데크논"은 혈연적으로는 아들로 자녀 된 사실을 나타날 때 쓰이며, 아들이라고 번역된 "휘어스"는 법적으로 아들이 된 사실에 대하여 씌여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때때로 양쪽으로 섞여서 쓰이기도 했지만
이것을 엄격하게 구별할 때는 그렇게 구별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적신고를 하지 않은 아들인 자녀는 "데크논" 일지라도 "휘어스"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인 자녀가 나이가 먹어서 점점 자라나 어른이 될 나이가 되었다 할지라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있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 6세가 되어도 취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없는 사람이가 때문입니다.
또 나이가 20세가 넘어도 병역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게 되어 재산을 상속 받으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는 상속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혈연적(血緣的)으로 된 아들이 된 사실은 중요합니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조직 사회에서는 호적신고(戶籍申告)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호적신고가 되어 하나의 법적인 신분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법적의무도 없어지게 되겠지만
그러나 마땅히 취할 수 있는 법적권리도 행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그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데크논"이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난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낫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혈연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호적신고를 하지 않으면서 하늘나라에 법적인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확인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에 나타난 사실을 이론적으로 말하게 될 때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 <낙심할 필요가 없음>
“우리의 믿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신뢰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과거의 죄들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순종하기를 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죄도 아울러 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성화된 생애, 89)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욱 강력함을 믿는다. 우리는 이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죄가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지해야 한다.

◎ <침례(浸禮)는 쌍방 간의 서약(誓約) (마 28:19; 벧후 1:2,5-7)>
“침례를 받을 때는 우리는 주께서 쓰시는 도구로 바쳐진바 된다.
침례는 아주 엄숙하게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앙 고백으로 자아는 죄 된 생활에 대하여 죽는다. 물이 수침자(水浸者)를 덮을 때에 온 하늘이 보는 앞에서 쌍방이 언약(言約)을 맺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는 물 무덤으로 내려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무덤에서 일어난다.
하늘에 계신 세 분의 크신 능력자들이 보고 계신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임석(臨席)해 계신다.
(원고 57, 1900).”

◎ <침례 서약(誓約)을 충실히 지킴>
“우리가 침례서약을 충실히 지키면 영혼을 구원(救援)하는 데에 필요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리뷰 1904,5,26).”

◎ <수침(水浸)으로 받는 하나님의 인(고후 6:17, 18; 7:1; 골 3:1)>
“그리스도는 침례를 그분의 영적(靈的)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삼으셨다. 그분은 침례를,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의 권위(權威)하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따라야 할 결정적인 조건이 되게 하셨다.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 침례로써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였고, 하늘 왕의 자녀들이요, 하늘 왕의 한 가족들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모든 세상적 관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삼고 새로 맺은 관계를 첫째로 삼아야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자아 방종과 교만 가운데 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는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주를 위해 살아야 할 엄숙한 언약에 묶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께서 위탁하신 모든 재능들을 그분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며, 넷째 계명을 순종하는 백성, 곧 하나님의 인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신민들이라는 것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생생한 느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과 그들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다 내어 놓고 그들의 재능들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는 초청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수침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유의하라.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도장을 치시고 그들은 그분의 자녀들임을 선언하신 것을 기억하라.
전지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분들과 진실 된 언약을 맺은 사람들을 받으신다. 그분들은 침례식이 있는 곳마다 임재하시고, 세상을 포기하고, 영혼의 전으로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수침 자들을 가납하신다. 이 수침자(水浸者)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들의 이름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원고 27 1/2, 1900).”

◎ <하늘과 교통하는 문>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온 하늘은 이 목적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가 한 서약에 충실하면 우리 앞에는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그 문은 어떤 사람도 어떤 사단의 대리자도 닫을 수 없는 문이다. (리뷰 1906. 5. 17).”

◎ <산 채로 장사(葬事)된 사람들>
“거듭남은 우리 시대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귀(珍貴)한 경험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그토록 많은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성화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루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원고 148, 1897).”

◎ <침례(浸禮)는 졸업(卒業)이 아님(고후 6:17)>
“모든 유리한 조건과 모든 기회, 그리고 모든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풍부한 그리스도인 경험을 갖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우지는 못한다. 자라남이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조금 배운 것을 가지고 “졸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 침례를 받자마자 곧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졸업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맹세할 때에 하늘의 능력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맹세하신다. 만약 우리가 “저희 중에서 나와서…따로 있고…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침례 서약을 이행하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겠다고 친히 맹세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서약에 충실할 때에 그분은 “내가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원고 85, 1901).”

▣ 침례(浸禮) (Baptism) =(baptism by immersion)

(마 3:13-14)
우리말 한글 성경에는 세례(洗禮)라는 말로 번역(飜譯)되어 있기 때문에 “세(洗))뿌릴세” 머리에만 물을 얻는 것으로 이 예식(禮式)은 마치 물을 뿌리는 예식(禮式)처럼 오해(誤解)하기가 쉽다. “그러나 원문(原文)헬라어에는 분명히 세례(洗禮)가 아니라 침례(浸禮)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례(洗禮)란 잘못된 번역이다.

[1] 침례(浸禮)의 어원적(語源的) 의미(意味).
헬라어로 BAPTISMA인데 이 말은 동사형인 밥티조 (baptizo)에서 파생(派生)되었다.
그러면 밥티조 (baptizo)라는 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⑴ 물속에 잠근다는 뜻이다.
어원적인 의미에서 볼 때 밥티조 (baptizo)란 말에는 “물을 뿌린다”는 의미가 전혀 없다.
이 말은 분명히 “물속에 잠그다”는 뜻이므로 성서적(聖書的)인 용어(用語)다 그 예식 방법은 세례(洗禮)가 아니라 “침례(浸禮)”임을 알 수 있다.

⑵ 천(cloth) : (布)를 물감 속에 담그다 는 뜻이다.
“밥티조 (baptizo)” 라는 말 가운데는 염색(染色)하기 위해 천(布)을 물속에 담그다 는 뜻도 있다.
염색을 하려면 그 옷감은 반듯이 물감 속에 담겨져야만 한다.
이처럼 침례식(浸禮式)은 뿌리는 예식이 아니라 물속에 잠기는 예식이다.

⑶ 배를 침몰(沈沒)시키다 는 뜻이다.
baptizo(밥티조) 라는 말 가운데는 배를 침몰시키다 는 뜻도 있다.
바다 속에 침몰(沈沒)된 수많은 배를 연상케 해준다.
즉 이 말은 물속에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를 암시해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baptizo(밥티조)라는 말속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물속에 잠긴 상태(狀態)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원적(語源的)의미에서 고찰(考察)해 볼 때 성경이 요구하는 예식은 물을 뿌리는 “세례(洗禮)가 아니라 물속에 잠기는 침례(浸禮)이다.

[2]침례(浸禮)의 영적(靈的)의미?
①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갈 3:27, 롬6:3-5)
남녀가 결혼식(結婚式)을 통하여 한 몸이 된 것을 공적(公的)으로 선포(宣布)하듯
침례는 예수그리스도와 의 연합(聯合)을 공적(公的)으로 선언(宣言)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의 죄 된 생애도 함께 죽는 것이요.
㉡ 예수그리스도의 장사(葬事) 되심을 본받아 나의 죄 된 생애를 장사(葬事)지내 버리는 것이다.
㉢ 예수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본(本)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意味)함.

침례(浸禮)를 통하여
ⓐ 죽음= 물속에 잠길 때.
ⓑ 장사(葬事)= 물속에 잠길 때.
ⓒ 부활(復活)= 올라 올 때.
이와 같이 침례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葬事)지냄과 부활(復活)의 경험(經驗)속에 믿음으로 동참(同參)함으로 예수그리스도와 연합 하는 것이다.

② 죄(罪)로 부터의 정결(淨潔)을 의미 한다. (행 2:38, 22:16)
침례를 받고 죄 사(赦)함을 받으라.
※ 물 자체가 우리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침례 자체가 우리의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침례가 죄를 씻어주는 예식이 될 수 있는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 하여 침례를 받는 자는 예수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그는 죄의 용서를 받고 정결(淨潔)함을 받는 것이다.

③ 새로운 생애(生涯)의 시작(始作)을 의미(意味)한다. (엡 4:22-24, 고후 5:17, 요 3:3-5)
④ 하나님의 가족과 연합(聯合)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갈 3:26-28, 엡 2:19)

[3] 침례(浸禮)를 받아야 하는 이유(理由)
⑴ 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命令) 하셨기 때문이다. (마 28:19-20)
⑵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본(模本)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마 3:13-17, 막 1:9-11)
⑶ 사도(使徒)들이 실행(實行)했기 때문이다. (행 2:38, 41)
⑷ 구원(救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막 16:15-16, 요 3:5) 골 2:12

[4] 침례(浸禮)의 방법(方法)
⑴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엡 4:5) 하나님+믿음+침례
⑵ 물 있는 곳에서 행한다. (마 3:16, 행 8:36-39)
⑶ 물속에 잠겨야 한다. (행 8:36-39)

[5] 침례(浸禮)를 위한 준비(準備)
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마 28:19-20)
(행 8:26-29)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침례를 받기 전에 빌립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 구원(救援)의 도리(道理)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⑵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막 16:16)
⑶ 회개(悔改) 해야 한다. (행 2:37-38, 행 3:19), 마 3:6)

[6] 침례후(浸禮後)의 생애(生涯)
⑴ 새로운 생애(生涯) (엡 4:22-24, 고후 5:17)
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하는 생애 (시 119:33-34)
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애 (갈 5:22-23)
⑷ 위에 것을 사모(思慕)하는 생애 (골 3:1-2)

<침례에 대한 결론(結論)>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定罪)를 받으리라. (막 16:15-16)

월요일(8월 9일)
<죄가 인격화(人格化) 됨>

▣ (로마서 6:12절)의 “왕 노릇하지”란 말은?
과거부터 그래온 것처럼 “계속하여 왕 노릇하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사도 바울이 “왕 노릇하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왕 노릇 함과 그저 살아가는 것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 노릇함과 완전히 폐위(廢位)된 삶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신자(信者)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그들에게 지배권을 갖지 못 한다.
“몸의 사욕(邪慾)을 순종치”
비록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6절),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죽을 몸” 속에 있으며, 이 세상의 욕망과 갈망을 가지고 있다.
죄는 여전히 하나의 권세이다.
만일 우리가 허용한다면 죄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육신(肉身)의 세속적인 욕망(慾望)들을 근절(根絶)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경험은 우리를 죄의 지배를 꾀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저항(抵抗)하게 해주는 더 높은 권세와,
접촉할 수 있는 곳에 있도록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우리의 충성을 죄에 바칠 것인가 그리스도에게 바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매일 “새로운 회심”을 경험해야만 한다. (교회증언 1권699; 4권44 참조)
어제의 경험이 오늘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
비록 어제는 죄에 대해 죽었다 해도, 우리의 “옛 사람”이 오늘다시 그 추한 머리를 들 수 있다.
옛 자아(自我)를 끊임없이 그리고 완전히 죄에 대하여 죽도록 지킴으로써만,
침례(浸禮)로 말미암아 예증(例證)되었듯이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대하여 살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 분에대한 믿음 곧 매우 실제적이고 한결 같은 것으로서 그분처럼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의(義)를 사랑하게 해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실물교훈 331쪽 과 치료봉사 452-453 참고)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649-650p>

◯ (로마서 6:12절)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는 불가항력적이었다.
그러나 침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그것의 지배권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보는 것처럼 죄는 여기서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배하다”는 뜻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왕이 되다” 또는 “왕의 역할을 하다”는 의미이다. 죄는 우리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며 우리의 행위를 조종하고자 한다.
바울은 죄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의롭다 칭함을 얻는 자가 죄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통치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은 의지의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 “그대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요, 결정력이요, 선택력이다. 만사는 의지를 옳게 쓰는 여부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그대 자신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나니 그리하면 그는 그대들 안에서 그대들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의 온 성질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대들의 애정은 그에게 중심을 두게 되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와 조화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47)

◉ <온전한 신뢰>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충동적이지 않고 변덕스럽지 않고 미신적이 아닌, 고요하고 평온하며 깊고 꾸준하며 열렬한 헌신의 시간들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굴복이 있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거룩함을 연습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된다.”(증언보감 2권, 507)

◉ 죄는 우리 삶을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때,
우리는 그것의 지배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화요일(8월 10일)
<법(法) 아래에?>

▣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슬하(膝下)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들로부터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어떤 것을 하면 안 된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등등의 간섭(법(法))을 많이 받고 자라난다.
즉 부모님께서 어린이들에게 정해놓은 많은 규약과 제약들이 있었다.
그 어린 시절에는 유쾌하지 않는 많은 제약(制約)들이 부모님으로부터의 법(法)이 있었다.
그 당시로써는 잘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의 그런 제약들을 피해서 행동을 숨기고 모르게 위반들을 많이들 한다.
그 후 철이 들어서 볼 때 부모님들께서 어린 자녀들에게 시행 하였던 법(法)? 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해(害)가 되거나 속박(束縛)을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들이 아님을 장성(長成)한 후에 알게 된다.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나서 부모를 떠나 분가(分家) 한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부모님께서 시행하던 일들이 필요 없거나, 아니면 부모님의 규약들을 파기(破棄)할만한 것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모를 떠나 분가(分家) 한다고 해도 옛날의 부모님의 인도하시는 모든 방법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부모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법(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규정하는 죄(罪)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은혜(恩惠)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롬 6:14절)의 이 말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규정하는 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은혜 안에서 순종함>
“우리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의의 참여자가 되고,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치 않는 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리뷰 앤 헤럴드, 1901. 9. 3.)

◉ 우리가 더 이상 법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산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로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요일(8월 11일)
<씨름하고 있는 두 주인(主人)>

▣ <종과 주인과 중생(重生)>
로마서 6장12-23에서
12절부터도 종과 주인이라는 관계 설정만 달리했을 뿐 역시 자기부인(自己否認)의 새로 남(거듭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안에서 부활하여 새 생활을 하라는 말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죄(罪)를 의(義)로, 육신(肉身)을 영(靈)으로, 율법(律法)을 은혜로 완전히 바꾸라는 말은,
섬기고 있는 왕을 바꾸듯하여 의(義)로운 주인의 병기(兵器)로 쓰이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롬 6:12-16)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왕)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不義)의 무기(武器)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肢體)를 의(義)의 무기(武器)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恩惠) 아래에 있음이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義)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2-16절)
그러니 1절의 궤변(詭辯)같이
15절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17절부터 다시 종합 반복한다.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解放)되어 의(義)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義)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義)에 대하여 자유(自由)로웠느니라.” (롬 6:17-20)

여기서 “종”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것은 앞에서 나온 “지배(왕 노릇)라는 말의 상대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순복하는 자” 라는 뜻으로 마음이 어떤 것에 지배당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무엇에게 순복한다는 말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새로 남(거듭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봅시다.

로마서 6장 전체에서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지만,
자기가 죽는 다고 말할 때의 그 “자기(自己)” 죄가 왕 노릇 한다고 할 때의 그 “죄”,
지체를 드린다고 할 때의 그 “지체(肢體)” 이런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순종하는 그 주인은 구체적으로 심령작용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거듭났을 때는 순종의 대상이 바뀐다고 하는데 무엇이 무엇으로 바뀐다는 말인지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부인(否認)되어 죽었다고까지 했고 또 그런 변화가 성령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아는데, 그런데도 죽고 나서 다시 자기가 되살아나며, 다시 죄의 종이 된다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부인(否認)후에도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不義)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거룩함에 이르라”, 의(義)의 종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으니 거듭 났어도 계속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의를 유지할 수 잇다는 말 아닌가? 그러면 이 말은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다는 말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 로마서 6:16절의 바울의 요점은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었다면 이제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사는 삶이 죄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믿음의 삶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이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승리를 줄 수 있다.
(롬 6:17절)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인하여 우리가 얻는 것은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 <섬길 자를 택하라>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를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기를 원하신다.”(시대의 소망, 203)

◉ 우리가 의(義)의 주인을 섬기기 원한다면 올바른 교리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목요일(8월 12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라는 것은
먼저 자기 스스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고 → 자기에게 절망하여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그래서 은혜를 바라서 믿고 → 믿고 보니 죄가 용서 되고 → 죄가 용서 되니 자유로워지고 → 자유로우니 다시 죄를 짓는 일이 잦고 →구래서 다시 자기를 부인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 마음으로 은혜 아래 들어오고.
로마서 6장의 논리(論理)가이렇게 계속 순환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은혜아래 있을 때에 힘서 순종함으로 순환하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하는 것인가?
그렇다. 한번 죽었다고 그 “자기”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목숨과는 달리 죄의 목숨은 수시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롬 7:24)고도 했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함의 노력과는 조금 다른 “자기의지의 사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사용하는 여부에 의해 의(義)와 구원(救援)이 결정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이 의지의 실제(實際)가 로마서 7장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6장에서 비유로 설명된 이 내용이 로마서 7장에서는 직접 설명으로 더 구체적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진리이다.
여기 까지를 이해하면 가장 핵심이 되는 로마서 7장을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義)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롬 6:20)에서
“자유(ἐλεν θερία)”라는 말이 ‘죄의 종“된 상태에 쓰인 것을 보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는 말에 익숙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은 생경(生梗)하다.
자유를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뜻으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죄에 지배당하고 있을 때에는
의(義)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는 “자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육체의 자유,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의 자유이며 마귀의 종이 되는 자유이다.” (Calvin).
그리고도 새로남 설명이 계속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좀 소개한다.
21절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절 그러나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로마서 6장 끝말의 내용이 롬8장 초반의 내용과 분위기가 일치한다.
그것은 이 6장 끝이 새로남 설명의 중간 결론으로서 7장까지의 새로남 설명이 다 끝나고 제대로 종합 결과를 알려주는 롬8장 초반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새로 나고 보면 자유라고 생각했던 죄의 종노릇이 부끄럽고 그 삯이 사망이었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새로 나면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는 기쁨과 영생을 삯으로 받는 것이다.
여기서 “삯”을 “열매”와 동의어로 쓰고 있는데, 죄의 종이 될 때에는 사망을 삯 또는 열매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될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삯으로 받는다.
그러니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20절 “의(義)에 대하여 자유”를 택하고 사망을 얻든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정죄로부터 택하고 영생을 얻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죄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자유롭거나, 죄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종이 되는 수는 아예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진리가 정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 11:25)
그 분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시여자이다. (요 6:40).
하나님의 영생의 은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구적인 원천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 생명이신” 그분과의 연합을 통하여 받을 수 있다.
(골 3:4, 참조 ; 시대의 소망 786-787)
(영생).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몰수당한 영생의 은사는 기꺼이 그것을 받고자 원하고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헌신함으로써 스스로 준비하는 모든 자에게 되찾아질 것이다. <본교성경 주석(한) 11권 655p>

▣ 성화(聖化)는 신(神)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의 계속되는 과정이다.
(참조: 엡 4:12-15; 벧후 1:5-10)
그것은 본래 우리가 그 모습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서 회복될 때까지 매일매일
육체적, 정신적 및 영적인 능력이 조화롭게 계발되는 과정이다.
(참조: 교육 15-16; 각 시대의 대쟁투 470p; 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57p)
구속(救贖)의 경륜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속죄나 칭의 뿐 아니라, 우리의 회복과 성화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새 땅을 변화된 성도들로 채우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신자(信者)들에게 그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치도록 호소하는 이유는
이 변화의 경험과 그 과정을 갖기 위함이다. <본교성경 주석(한) 11권 653-654p>

◯ <받아들일 때 얻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평생 사업에 나타날 것이다. 열렬한 활동의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케 하는 믿음이 간직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생애에 나타날 것이다.”(교회증언 9권, 141)

◯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해져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구원의 주님께 맡기면 죄는 우리에게서 지배력을 잃게 된다.

◯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고 있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시대의 소망, 123)

◯ “침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직접 약속하였고, 지성과 감성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화된 인간 도구들과 협력하기로 맹세한다.”(화잇 주석, 롬 6:1~4)

◯ “믿음과 행실이 일치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악한 자의 자녀들은 그들 자신의 주인의 종이다. 누구를 섬기든지 그 섬기는 자의 종이 된다. 그들이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을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하늘 왕의 종들이, 사단의 종들이 참여하는 오락과 쾌락에 참여하는 것은, 비록 그들이 그런 오락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흔히 말할지라도 해가 없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분리시켜 당신 앞에서 정결하게 하시고자 신성하고 거룩한 진리를 계시하셨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04)

<초점(焦點)>
우리 인간 모두는 죄의 종의 신분인 부끄러움과 사망에서, 구원자(救援者)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義)로운” 의(義)의 종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데,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의(義)롭다 칭(稱)함을 얻는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은 몸을 장사(葬事)지내는 행위가 침례(浸禮)로 설명을 하는 것이며,
침례후 하나님의 은혜가 죄보다 더욱 강력함을 믿을 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이를 일컬어 성화(聖化)의 삶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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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 <로마서 6장(章)속으로 → 침례(浸禮), 죽음, 생명(生命)>

자, 로마서 6장1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보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내가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의 답은 이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금(禁)하실 지어다” 헬라어의 뜻은, “이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나의 기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로마서6장2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착하게 살기로 약속한 우리가 어찌 계속 죄를 범하겠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하여 죽은” 이라는 말이 로마서 6장에 3번 나온다.
첫 번째는 2절에 있는데 바울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浸禮)를 받은 신자들에게 적용한다.
3절 이하에 침례에 대하여 설명한다.
두 번째는 10절에 있는데 신자에게 적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실 때 그분은 죄를 단번에 영원히 끝장내셨다는 것이다.

죄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분리시켰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그가 죄를 파멸(破滅)시키고 죄를 무덤에 내버리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는 없어졌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어떤 장벽(障壁)도 없을 것이다.

(로마서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로마서6장3-8절에 묘사한 침례(浸禮)에 대한 전부이다.

이제 내가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하겠다.
바울이 여기서 침례에 대하여 말한 것은 침례 행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침례의 진리(眞理)를 말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 차이를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이 침례행위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
침례의 진리에 대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으로(into Christ)가 있다.

3절을 보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合)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침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한 경험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신 마가복음16장15,16절을 오해(誤解)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예수께서는 침례 행위(침례식)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회심하지 않고 침례 받은 자들이 많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한 교회를 담임했는데 거기 교인이 못되고 4년간 출석하던 한 숙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침례를 받지 못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제가 4년 전에 전도 집회에 참석했으나 내가 담배 습관을 끊을 수 없었으므로 침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사업가였다. 당시 경제 불황이었으므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에서 위로를 찾았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5일 금연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애써 보았습니다.
저는 벤프럼(Banfrom:담배 끊는 약)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온갖 것을 다 해보았으나 실패했습니다.
제발 제가 담배를 끊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해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금연(禁煙)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구원(救援)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침례행위(침례식)에 참가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내가 말했다.
“당신은 내 기도(祈禱)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복음(福音)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3개월간 그녀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그녀는 복음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승리를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원하기 때문에 승리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녀는 재교육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3개월 동안 그녀와 더불어 한 계단씩 연구하여 우리가 오직 은혜(恩惠)로써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그녀는 선물(膳物)로써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그녀가 구원의 확신의 평화를 가졌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기쁨으로 당신에게 침례 베풀기 원하나 내가 그렇게 한다면 교회가 반대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는 당신이 담배를 끊기 전에는 침례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오늘 죽어도 천국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이미 흡연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습관(習慣)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는 이길 수 없는 강제력(强制力)이 있습니다.”
그녀가 구원의 확신이 주는 평안을 소유한 후에 내가 말했다.
“이제 금연을 위해 일합시다.
벤프럼(금연약)이나 5일 금연 프로그램도 잊어버립시다.
주말을 금식(禁食)과 기도(祈禱)로 보냅시다.”
우리는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했다. 월요일에 그녀가 내게 전화했다.
“그 욕망(慾望)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잠깐 속단(速斷)일 수도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그녀는 담배 한 가치도 피우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그녀는 교회에서 매우 활동적인 신자(信者)가 되었다.

바울은 침례 행위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강도(强盜)는 성령(聖靈)의 침례를 받았다. 그는 행동으로 침례는 받지 못했다.
산채로 침례를 받는 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애(生涯)로 부활(復活)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침례의 의미를 살펴보자.

[침례(浸禮)]
1. (로마서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경험으로의 침례는 항상 그리스도 안으로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안으로의 경험은 어떤 모호한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으로의 침례는 그의 죽으심을 그대의 죽음으로 그대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4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러므로 죽지 않은 사람을 매장(埋葬)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불법(不法)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침례를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십자가(十字架)에 굴복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읽을 수는 없으나 만일 그들이 “네” 한다면 그들이 거짓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취급하실 것이다.
나는 경험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그러나 그리스도는 무덤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죽음이란?]

먼저,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서적으로 죽음은 영혼(靈魂)과 몸의 분리가 아니다.
그것은 헬라사상이지 성서적인 사상이 아니다. 죽음은 생명(生命)과의 영원(永遠)한 분리(分離)이다.
믿음이란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 승인 이상이다.
믿음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과 율법은 같은 것이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眞理)이다. 복음이 그대에게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너도 죽었다. 그분이 살았을 때, 너도 그분 안에서 살았다. 그분이 매장될 때 그대도 매장(埋葬)되었다.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復活)하셨을 때, 그대들도 부활했다. 나는 너희의 승인 없이 이 일을 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인격자(人格者)들로 창조하였으므로 내가 내 아들 안에 있는 너희의 역사를 너희가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말한다.
“네, 그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대들은 그를 매장(埋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매장했다. 그분은 같은 생명이 아닌 것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분이 인류에게 다른 생명을 주셨다. 그대들은 이것을 요한일서5장11절에서 찾을 것이다.

[생명(生命)]

헬라어에는 생명(生命)이라는 단어가 둘이 있다.
“비오스”와 “죠에”인데 “비오스”에서 생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죠에”는 영생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이다.
“비오스”는 원래 그대가 하는 것을 말한다. 그대가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샤워한 후 뉴스를 듣고 아침을 먹고 직장에 가서 11시에 잠깐 쉬면서 커피를 마신다. 그 후 12시까지 일한다.
점심시간에 휴식하면서 햄버거를 먹는다. 4시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종일 일한 부인이 설거지하는 동안에 가장(家長)이기 때문에 신문을 읽는다.
세상과 접촉하며 TV 보다가 11시가 되면 잠을 잔다.

후(後)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대의 비오스(생활)가 바뀐다.
6시에 일어나 TV 보는 대신 5시 반에 일어나 30분간 성경을 읽는다.
그대의 “비오스”는 변(變)했으나 같은 옛 생활을 이제는 수정한다. 커피 브랙시간에 포스텀이나 주스를 마신다.
집에 돌아와서 햄버거 대신 베지버거를 먹는다. 그대는 무슨 일을 했나?
그대는 외부적으로만 변했다. 생활은 꼭 같다. 그대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기독교는 옛 생활의 수정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유대교에서 배웠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나의 생활 대신 그리스도의 생명(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갈라디아서2장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내가 아직 살아있다. 더 이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내 안에서 그가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2000년 전에 그분이 사신 삶을 그대들 안에서 재생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에게 구원(救援)의 확신을 주시기 위함도 아니요, 그대들을 구원하시기 위함도 아니요, 이 복음, 구원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세상이 그대들 안에서 영광의 소망(所望)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그들은 그대들이나 그대들의 교회에 영광(榮光)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마태복음5장14절에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빛”은 단수로 되어 있고, “너희”는 복수이다.
우리가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손에 촛불을 들고 “이 내 작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성구에 맞지 않다. 우리가 많은 빛들이 아니요, 우리는 오직 하나의 빛, 각 사람을 비추는 빛(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1:4-9, 8:12, 요한일서1:5,7)만이 있음을 안다.

우리는 많은 백성이나 하나의 빛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5:16) “이같이 너희 빛(단수)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이 실천적인 기독교이다.

2.(로마서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聯合)(헬라어: 접붙이다) 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영어로는 oldman으로 되었는데 나의 아버지를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옛 사람”은 그대의 옛 자아 삶을 뜻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참된 번역은 죄의 몸이 그 세력을 박탈당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를 들어, 그대가 장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운전사가 두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첫 번째 운전사는 매우 난폭한 운전으로 모퉁이를 돌 때 두 바퀴로 돌아 그대의 심장이 심히 두근거린다. 그가 매우 거칠게 운전하므로 편히 쉬지 못하고 노래도 할 수가 없었다. 반쯤 와서 그 운전사는 내리고 새 운전사가 대신 운전하게 되었다. 꼭 같은 버스에 같은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나 운전사가 바뀌었다. 그 새 운전사는 매우 조심성이 있었다. 그대는 편히 앉아 노래를 부르며 유쾌하게 여행한다.
차이점은 버스가 아니다. 운전사였다. 기독교는 옛 운전사를 새 운전사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새 운전사는 같은 몸, 같은 손, 같은 다리를 사용하여 사방으로 다니면서 착한 일을 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로마서6장7절을 보자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영어 역에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지 않고 자유케 되었다(freed)로 됨)
바울은 자유케 되었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헬라어는 “데카이오스”로 되었는데,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13장39절에도 흠정 역에서도 같은 낱말을 사용했는데 의롭게 되었다로 번역되었다.
내가 은행에서 1만 불을 훔쳤으므로 체포되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재판에 회부되어 5년형을 받았다. 나는 은행 절도범으로 정죄된 죄수이다. 나는 형무소에 가서 5년형을 치렀다.
5년 후에 감옥에서 나왔다. 경찰이 그 죄 때문에 나를 다시 체포할 수 있는가? 나는 법에 의하면 아직도 정죄된 죄수로 나오는가? 아니다. 나는 의롭다함을 받고 나온다.
“의롭다 칭하다”는 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만일 그대가 무죄하다면, 만일 그대가 죄책이 없다면, 법은 그대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죄의 대가(값)를 치렀다면, 법은 또한 그대를 의롭다고 칭한다.
만일 그대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그리고 법은 말하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였으므로, 그대가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가 침례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대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고 공공연히 고백한다. 율법은 더 이상 그대를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로마서6장8,9절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만일 그대가 복음을 순종하였다면, 사망(2째 사망)이 더 이상 그대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대는 이것을 믿는가?
우리는 이미 11절을 연구했으므로 12절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죄를 용납하지 말라. 그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단절을 선언했다.
그렇다. 그대는 아직도 죄악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고전할 것이다. 그대는 여러 번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실제적으로 복음에 순종했다면, 그대는 바울처럼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회심한 마음)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아래와 같이 부르짖게 될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죄(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답은 이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승리를 주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승리를 주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확신을 위하여 승리에 의존하는 동안 승리가 안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실수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부족을 느끼도록 겸비케 하고 구원은 예수님의 의와 십자가에 있음을 통감하고 주님만 100% 의지하게 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위하여 더욱 열렬히 기도하며 말씀을 더 많이 탐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고린도전서2:2, 스가랴4:6, 고린도후서12:5-10).
우리는 율법주의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승리 때문에 안전감을 느끼는 백성, 백성에게 압력을 가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죄를 이기지 않는 한 너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 고 말하는 백성을 생산할 수 없다. 그것은 마귀의 방법이다.
그리스도를 반사할 백성을 생산하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칭의의 교리에 닻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열매들은 절로 맺게 될 것이다.

로마서 6장 후반에서도 바울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6장 전반에서는 바울은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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