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 믿음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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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8-05 19:08 조회5,73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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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8월 7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5분
제6과
<믿음을 설명함>
<記憶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로마서 5장(章)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예수님)>
1절-4까지 : 예수님의 믿음 안에서는 환난(患難)중에서까지 기뻐할 수 있는데,
5절-11절 :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救贖)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12절-19절 : 죄(罪)도 아담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구속(救贖)도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한데,
20절-21절 : 이 구속(救贖)은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율법을 통해 죄를 더욱 분명히 인식(認識)하는 자가 구속(救贖)을 받는다.
<要點>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온 일련의 다른 결과들,
즉 사랑과 소망과 화평을 선택할 수 있다.
(日) (8월1일)
<그러므로 의(義)롭다 칭(稱)함을 얻음>
◉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함으로 이미 의롭다고 칭(稱)함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칭(稱)함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試驗)과 환난(患難)을 당하지만,
인내(忍耐)하고 연단(鍊鍛)을 받으면서 우리의 품성(稟性)은 계속 계발(啓發)된다.
▣ <하나님과의 화목(和睦)>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같이 잘 지내자는 말이다.
즉 속죄(贖罪)의 칭의(稱義)를 받았으면 거기에 합당한 의(義)로운 생활(성화(聖化))을 하자는 말을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자”라고 표현한다.
화목의 최고의 모습은 특별히 공경(供敬)하고 도와주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함께 거(居)하는 그 자체이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놓았고 화목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하나님과 같이 거(居)하지 못하는 이것이 죽음이요, 이것이 죄이며, 이것이 세상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해(和解)했고 이제 계속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거(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 “화평”이란 말속에는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가지 말고 늘 함께 편안히 지내라는 뜻이 들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2)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2) 그리고 그 즐거움은 소위 이런 저런 세상적(世上的) 자랑과 부요 때문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이루어지는 소망 때문인데,(롬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忍耐)를, 인내(忍耐)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롬 5:1~5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稱義)는 이미 완료된 사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과 화목(和睦)이라는 관계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환난(患難)을 당하지만, 인내(忍耐)하고, 연단(鍊鍛)을 받으며 구원(救援)의 소망을 굳게 한다.
▣ <의(義)롭다 하심>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완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dikaioό)] “바르게 하다” “올바르다고 인정하다” “올바르다고 선언하다” “올바른 것으로 대우하다” “올바르다고 제시하다” 이 단어는 신약에 39번 나오며 그중 바울의 글에 27번 사용되었다.
[디카이오오]라는 단어는 “의롭다 하다”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다소 모호해진다.
헬라어에서 “의롭다 하다”는 뜻의 [디카이오오] “의로운”을 뜻하는 “디카이오스(dikaios),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unӗ). 이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 어근(語根)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세 단어 사이의 분명한 연계성을 볼 수 있다.
☞ 사람과 관련하여 신약에서 사용된 대로 , 칭의(稱義)는 사람을 하나님과 올바른 상태에 들어가게 만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은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온 사람을 무죄 처리하여 의롭지 않던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대우한다. 그것을 하늘 법정에서 죄인에 대해 제기된 고소를 취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을 구주(救主)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악하였을지라도 그분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정로의 계단. 62)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596-597)
◉ <다음은 로마서 5장3절부터 5절까지의 흐름이다.>
1. 인내(忍耐).
그리스어 휴포모네는 “변함없이 견딤”을 의미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계발되며,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안에서 생성되는 품성이다.
2. 연단(鍊鍛).
그리스어 도키메는 문자적으로 “검증된 자질”, 더 구체적으로 “검증된 품성”을 의미한다.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자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
3. 소망(所望).
인내(忍耐)와 연단(鍊鍛)은 자연스럽게 소망(所望),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과 소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믿음과 회개(悔改)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安全)함>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나, 이것을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만일 영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1)
◎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롬 5:1; 사 32:17).”(소망, 337)
◎ “들림을 받으신 구주께서는 값없는 언약의 축복 즉, 그분을 믿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얻으시려고 죽으신 유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보좌에 앉으신,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그분의 효험 있는 사업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
요한은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깊고, 너무 넓었다. 요한은 인간 가족들을 향하여 그것을 쳐다보라고 호소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그분의 생명의 피로 구속의 값을 치르어 주신 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아무리 세기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이 대속하는 희생의 효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그분의 은총의 복음 기별은 교회를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한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율법, 율법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은 생동감 있게, 능력 있게 백성들에게 제시되어야 했는데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 공로를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목사, 92-94)
◎ 죄인이 들림 받으신 구주를 바라보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그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께 눈을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던 베드로처럼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현재 사단은 시야에서 예수님을 놓치게 하고, 인간을 바라보게 하며, 인간을 신뢰하도록 하고, 인간에게서 도움 받기를 기대하도록 하는 것을 단호한 목표로 삼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서 교회는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해 왔으나,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제시하는 증언을 주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면에 있어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사람이 빛을 분별하고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 요한의 말을 외쳐야 한다. (요 3:31-36 참조).
이것은 세계 방방곡곡에 전파되어야 할 증거이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을 제시하며, 두 개를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묶는다.
(로마서 5장과 요한일서 3장 9절부터 그 장 마지막까지 참고하라).
이 소중한 성경 말씀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목사, 92-94)
<일요일 요약>
칭의(稱義)로 시작된 자는 성화(聖化)의 단계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관계로 접어들지만 계속해서 환난을 당한다, 그렇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며 구원(救援)의 소망을 굳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1-5절의 흐름은 ① 인내(忍耐) ② 연단(鍊鍛) ③ 소망(所望)으로 시험과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품성을 계발시킬 수 있다.
月 (8월 2일)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
▣ 우리의 소망이 세상의 이목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기(氣)죽을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환난(患難)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이런 기쁨이 성령이 마음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그런 것을 능가하는 내적(內的)즐거움이 있다. 그러니 소망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血)로 인한 의롭다 하심과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을 연결시키고(롬 5:9절)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화목과 그리스도의 살으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연결시킨다.(롬 5:10)
둘 다 현재의 칭의와 마지막 때의 구원과 연결시키는 말이다.
구원(救援)은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졌고,
현재의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미래의 심판 때 누릴 것이다.
과거 없이 현재가 없고 현재 없이 미래는 없다.
현재의 칭의(稱義)로 구원을 보증 받았으며(눅 17:21 참조)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 구원(救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요 14:3 참조)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 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래서 미래의 구원(救援)만 바라면서 참고 사는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현재를 즐거워하는 신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사랑이 나타난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산상보훈, 76)
◉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罪)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震怒)를 피할 수 있다.
<월요일 요약>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罪)에 대한 반응이시다.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죄(罪)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 하시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軟弱)하고 죄인(罪人)이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심을 인하여 기뻐해야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 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인하여 기뻐해야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의무이다.
火 (8월 3일)
<죽음이 삼킨바 됨>
▣ <예수님의 표상(表象)>
▶ 로마서 5장12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 한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그런즉” “그러므로” “이러므로” 와 같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나
“그러나”와 같은 역접의 접속사를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왜 그런가 하면 인과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인과도 없이 쓰이는 것 같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로마서 5장12절)에서도, 앞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和睦)되었으니 기뻐하자”는 내용에 이어 롬5장12절의 “그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라고 하는 것이다. 앞뒤의 내용이 어떻게 해서 “그러므로”로 연결 되었는지가 얼른 이해가 안 되어 문맥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뒤 절을 바꾸면 “그러므로”가 잘 어울린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롬 5:12).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하고 또 화목하게 된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롬 5:11)는 문맥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색해 보이는 이런 접속사들이 원어 문장의 어떤 도치(倒置)의 기법 같은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사소해 보이는 단어 들을 번역(飜譯)과 해석(解析)과 적용(適用)을 잘하는 것이 로마서 본문을 잘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 이제 (롬 5:12절)는 아담 한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 왔고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어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롬 3:10) 세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는 아담 때부터 이 세상에 들어 왔고 그 저주도 그때부터 있었으나 구체적인 율법이 생겨 그 범죄를 지적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 <죽음은 최후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이 죽기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엄청난 고뇌와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 <총체적인 회복을 이루신 그리스도>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합의하셔서 인류가 사단에게 정복당하게 될 경우에 인류를 구속하시기로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들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엄숙한 서약을 하였었다. 이 서약을 그리스도께서 성취시키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834)
◉ 아담은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왕노릇 할 수 없다.
<화요일 요약>
⑴.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 오셨다.
즉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왕 노릇 할 수가 없다.
⑵. 아담의 죄로 죄가 세상에 총체적인 문제를 야기 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선 온 세상에 생명과 의(義)로 총체적인 해결책이 되셨다.
水 (8월 4일)
<율법이 필요를 일깨움>
▣ (로마서 5장12-19)절에서 강조된 “한”이라는 말 속에는 아담이 우리 생명의 한 조상(祖上)이요 우리는 그의 분신이라는 어떤 뜻도 들어있다.
한 예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관계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히브리 7:5)라 하여 후손을 독립된 개체로 보기 보다는 조상의 일부로 보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섬긴 것을 훨씬 후에 태어난 아브라함의 후손 레위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을 섬긴 것이 된다고도 한 것처럼(히브리 7:4-10참조),
아담이 죄를 짓고 형벌을 받았다면 그의 분신으로서 우리도 그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아무런 약점이 되지 아니하나니,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놓고 생명과 멸망을 자기의지로 선택 했듯이 우리도 원죄가 아닌 자기의 의지로 구원(救援)과 멸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조상의 잘못으로 잘못된 환경에서 사는 괴로움은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고 싶으면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노아의 세 아들의 성격이 그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하면서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성질과 성벽(性癖)을 물려받으며, 부모의 본을 따른다. 그러므로 부모의 죄는 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하여 행해지게 된다. (부조와 선지자 118p)고 했다.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원이 결정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가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없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심판을 조상에게서 영향 받은 죄(원죄)로 하시지 않고, 유혹에 대한 개인의지의 활용 여부로 심판을 하심으로, 약해진 인간이라도 자기의지로 구원을 선택할 기회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배경이다.”
범죄가 없던 에덴에서도 영생은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 선택의 몫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천국 갈 때까지는 우리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죽음의 세력 밑에 있다. (히브리 9:27 참조)
그러나 우리 개인의 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한 죄의 책임은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의 충동이나 유혹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가 그 충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인데 로마서 7장8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 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도록 만들어서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다.
◉ <율법의 역할>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
◉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수요일 요약>
⑴.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救世主)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⑵. 시내 산에서 모세로 하여금 율법을 받기 이전에도 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성경 절들로
(창 26:5, 출 16:4, 28,)은 하나님의 계명이 성문화 되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했음을 말해주며,
또한 (창 39:9, 창 42:22, 욥 8:4)은 시내산 이전에도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⑶.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사랑을 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木 (8월 5일)
<둘째 아담>
▣. (롬 5:14절) 끝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type)”이라는 말이 나온다.
신학(神學)에서 표상학(typology)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표상이란 어떤 실체의 모형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모형 또는 표상(type)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를 원형 도는 실체(antitype)라고 한다.
성경에는 특별히 구약에 있는 인물이나 물건, 사건 등이 신약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使役)을 예표
한다는 뜻에서 구약(舊約)의 많은 부분이 모형이요, 신약(新約)의 만은 부분이 원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 비유(譬喩)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사건을 그 곁에 대비 시켜 원사건의 뜻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써 원사건과 대비된 사건에 표상적인 의미는 없고 오직 예화적인 의미만 있다.
▶. 그리고 우화(寓話)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다른 사건과 대비시키지 않고 한 이야기만 가지고 교훈 하는 것으로서, 그이야기가 실제이냐 허구이냐 모양이냐 원형이냐 상관없이 그 이야기 속의 교훈만 상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을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어, 같은 사건을 두고도 표상(表象)이다, 우화(寓話)다, 비유(譬喩)다 하고 학자간(學者間)에 이견(異見)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 그러나 여기의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는 혼돈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본문 자체가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역사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표상인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아담이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서 5:12-19절)사이에서 “한”이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
본 단락에서 “한”이라는 말이 12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가 바로 이해의 단서가 된다. (로마서 5:12-19절 참조)
▶. 이 말은 아담이 생명의 시조(始祖)였고, 전 인류의 대표자였고,
그 하나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면에서는 예수님의 표상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생명의 시조(始祖)요, 전 인류의 대표자요, 그의 행위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롬 5: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고 한 것처럼 그 효과는 정 반대니,
죄를 끌어들인 시조(始祖)와 죄를 물리친 시조(始祖)는 사망을 가져온 대표와,
생명을 가져온 대표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즉 모두가 죄인 되도록 영향을 끼친 것과, 모두가 의인(義人)되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靈)이”(고전 15:45)된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 왔으니,
예수님 한분으로 능히 죄와 사망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예(例)>
접(椄)붙임의 이야기로 감(柿) 열매는 고욤나무에다 품종이 좋은 감나무를 접(椄)붙이고, 사과는 능금나무에다 접(椄)을 붙이며,
모든 식물에서는 접(椄)붙임을 통하여 좋은 결실을 맺는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의(義)롭게 되려면,
의인(義人)되시는 예수님께 접(椄)붙임을 통하여 의(義)롭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 우리는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편에서 모든 시험을 견디심으로 아담이 넘어졌던 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아담의 수치스런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하나님 곁에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 섰다.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교묘한 영향력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란 첫째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는 분이셨다.”(화잇 주석, 롬 5:12~19)
◎ <로마서 5:15~19절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의 비교.>
아담은 범죄(犯罪)하였고, 불순종하여 정죄와 심판과 사망을 불러왔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로운 행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義)와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가져왔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을 보라.
죽음과 생명, 불순종(不順從)과 순종(順從), 정죄(定罪)와 칭의(稱義), 죄(罪)와 의(義).
예수님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다 복구(復舊)시키셨다.
칭의(稱義)는 획득(獲得)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기 때문에, 공로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손을 내밀어 받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稱義)의 선물을 받는다.
◉ <완전한 승리>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원수를 이기시기 위하여 투쟁의 생애에 돌입하셨으며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험을 맞아 성공적인 투쟁을 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분쇄할 수 있으셨고 타락의 치욕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2)
◉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사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있음을 아신다.”(사도행적, 524)
◎ <믿음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롬 3:19-28; 4:3-5; 갈 2:16; 히 11:1)>
“믿음은 우리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큰 축복이다. 곧 그것은 보는 눈이요, 듣는 귀이며, 달리는 발이요, 붙잡는 손이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면 왜 내가 그 축복을 붙잡지 않을 것인가 ? 나의 믿음은 그것을 붙잡는다. 이렇게 해서 나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고 그를 믿기 때문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편지 329a, 1905).”
◎ <믿음과 감정(感情)의 구별(고후 5:7)>
“믿음과 감정은 東이 西와 확연히 다른 것같이 다르다. 믿음은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할 마음이 나든지 나지 않든지 간에 믿음으로 열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는 기도한 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확신과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우리가 구한 다음에는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성취함에 나를 실패케 아니하시고, 당신께서 당신 자신을 친히 내게 나타내시니, 나는 당신의 뜻대로 행하는 당신의 것입니다”(편지 7, 1892).”
◎ <믿음의 단순성(單純性)과 믿음의 능력>
“믿음이 작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그 결과는 강력한 능력을 나타낸다. 성경 지식이 있다고 말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것이야말로 주를 믿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들의 영혼은 치료의 은혜를 입게 하는 특별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구속: 그리스도의 기적 97).” (화잇주석, 롬 5:1)
◎ <그리스도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윤리적(倫理的) 존재>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분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아주 미묘한 감화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첫째 아담보다는 그 상황이 죄(罪) 없는 생애를 살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으신 분이셨다. (안교 1903. 9. 29).” (화잇주석, 롬 5:12-19)
◎ <유리(有利)한 입장에 놓인 인간>
“첫 아담에게 연결된 인간은 그에게서 죄와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모든 시험을 견디시면서 아담이 실패한 곳에 오사 그곳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시험 가운데서도 더럽힘을 받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옴으로써 아담의 수치스러운 실패와 타락을 구속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리한 곳에 두셨다.
그곳에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구주(救主)로 모심으로써 신(神)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편지 68, 1899).” (화잇주석, 롬 5:12-19)
<목요일 요약>
⑴.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⑵. 아담 안에 있으면 정죄와 사망의 저주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은혜와 생명의 약속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⑶. 아담과 둘째 아담의 비교
아 담 / 죽음 / 불순종 / 정죄(定罪) / 죄(罪) / 저주(詛呪)
둘째 아담
(예수님) 생명 / 순종 / 칭의(稱義) / 의(義) / 은혜, 사랑, 은사. 선물
<초점(焦點)>
1. 무엇이 죄(罪)와 고통과 사망을 야기(惹起)했으며,
예수님안에서 해결책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는 정죄와 고립과 죽음에 직면 했고
한 사람 예수님의 승리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기록과 형벌은 사라지고
인간은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있다.
2. 아담의 죄로 해(害)를 당한 인류가
예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 모든 기초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대속적(代贖的)죽음을 통하여
유대인이든지 이방인(異邦人)이든지 모든 인류가 구원(救援)을 받을 수있는 길이 열렸다.
< 늦게 올려서 무지무지 죄송합니다. ^^>
<무더위에 예수님안에서 건강하세요> 샬롬
제6과
<믿음을 설명함>
<記憶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로마서 5장(章)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예수님)>
1절-4까지 : 예수님의 믿음 안에서는 환난(患難)중에서까지 기뻐할 수 있는데,
5절-11절 :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救贖)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12절-19절 : 죄(罪)도 아담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구속(救贖)도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한데,
20절-21절 : 이 구속(救贖)은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율법을 통해 죄를 더욱 분명히 인식(認識)하는 자가 구속(救贖)을 받는다.
<要點>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온 일련의 다른 결과들,
즉 사랑과 소망과 화평을 선택할 수 있다.
(日) (8월1일)
<그러므로 의(義)롭다 칭(稱)함을 얻음>
◉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함으로 이미 의롭다고 칭(稱)함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칭(稱)함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試驗)과 환난(患難)을 당하지만,
인내(忍耐)하고 연단(鍊鍛)을 받으면서 우리의 품성(稟性)은 계속 계발(啓發)된다.
▣ <하나님과의 화목(和睦)>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같이 잘 지내자는 말이다.
즉 속죄(贖罪)의 칭의(稱義)를 받았으면 거기에 합당한 의(義)로운 생활(성화(聖化))을 하자는 말을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자”라고 표현한다.
화목의 최고의 모습은 특별히 공경(供敬)하고 도와주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함께 거(居)하는 그 자체이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놓았고 화목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하나님과 같이 거(居)하지 못하는 이것이 죽음이요, 이것이 죄이며, 이것이 세상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해(和解)했고 이제 계속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거(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 “화평”이란 말속에는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가지 말고 늘 함께 편안히 지내라는 뜻이 들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2)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2) 그리고 그 즐거움은 소위 이런 저런 세상적(世上的) 자랑과 부요 때문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이루어지는 소망 때문인데,(롬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忍耐)를, 인내(忍耐)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
롬 5:1~5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稱義)는 이미 완료된 사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과 화목(和睦)이라는 관계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환난(患難)을 당하지만, 인내(忍耐)하고, 연단(鍊鍛)을 받으며 구원(救援)의 소망을 굳게 한다.
▣ <의(義)롭다 하심>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완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dikaioό)] “바르게 하다” “올바르다고 인정하다” “올바르다고 선언하다” “올바른 것으로 대우하다” “올바르다고 제시하다” 이 단어는 신약에 39번 나오며 그중 바울의 글에 27번 사용되었다.
[디카이오오]라는 단어는 “의롭다 하다”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다소 모호해진다.
헬라어에서 “의롭다 하다”는 뜻의 [디카이오오] “의로운”을 뜻하는 “디카이오스(dikaios),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unӗ). 이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 어근(語根)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세 단어 사이의 분명한 연계성을 볼 수 있다.
☞ 사람과 관련하여 신약에서 사용된 대로 , 칭의(稱義)는 사람을 하나님과 올바른 상태에 들어가게 만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은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온 사람을 무죄 처리하여 의롭지 않던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대우한다. 그것을 하늘 법정에서 죄인에 대해 제기된 고소를 취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을 구주(救主)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악하였을지라도 그분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정로의 계단. 62)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596-597)
◉ <다음은 로마서 5장3절부터 5절까지의 흐름이다.>
1. 인내(忍耐).
그리스어 휴포모네는 “변함없이 견딤”을 의미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계발되며,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안에서 생성되는 품성이다.
2. 연단(鍊鍛).
그리스어 도키메는 문자적으로 “검증된 자질”, 더 구체적으로 “검증된 품성”을 의미한다.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자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
3. 소망(所望).
인내(忍耐)와 연단(鍊鍛)은 자연스럽게 소망(所望),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과 소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믿음과 회개(悔改)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安全)함>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나, 이것을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만일 영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1)
◎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롬 5:1; 사 32:17).”(소망, 337)
◎ “들림을 받으신 구주께서는 값없는 언약의 축복 즉, 그분을 믿는 모든 영혼을 위하여 얻으시려고 죽으신 유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보좌에 앉으신,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그분의 효험 있는 사업 가운데서 나타나야 한다.
요한은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 깊고, 너무 넓었다. 요한은 인간 가족들을 향하여 그것을 쳐다보라고 호소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그분의 생명의 피로 구속의 값을 치르어 주신 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아무리 세기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이 대속하는 희생의 효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그분의 은총의 복음 기별은 교회를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한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율법, 율법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은 생동감 있게, 능력 있게 백성들에게 제시되어야 했는데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 공로를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목사, 92-94)
◎ 죄인이 들림 받으신 구주를 바라보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그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께 눈을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던 베드로처럼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현재 사단은 시야에서 예수님을 놓치게 하고, 인간을 바라보게 하며, 인간을 신뢰하도록 하고, 인간에게서 도움 받기를 기대하도록 하는 것을 단호한 목표로 삼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서 교회는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해 왔으나,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님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제시하는 증언을 주셨는데, 이것은 분명하고도 명백한 면에 있어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사람이 빛을 분별하고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 요한의 말을 외쳐야 한다. (요 3:31-36 참조).
이것은 세계 방방곡곡에 전파되어야 할 증거이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을 제시하며, 두 개를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묶는다.
(로마서 5장과 요한일서 3장 9절부터 그 장 마지막까지 참고하라).
이 소중한 성경 말씀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목사, 92-94)
<일요일 요약>
칭의(稱義)로 시작된 자는 성화(聖化)의 단계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관계로 접어들지만 계속해서 환난을 당한다, 그렇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며 구원(救援)의 소망을 굳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1-5절의 흐름은 ① 인내(忍耐) ② 연단(鍊鍛) ③ 소망(所望)으로 시험과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품성을 계발시킬 수 있다.
月 (8월 2일)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
▣ 우리의 소망이 세상의 이목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기(氣)죽을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환난(患難)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이런 기쁨이 성령이 마음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어떠하더라도 그런 것을 능가하는 내적(內的)즐거움이 있다. 그러니 소망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血)로 인한 의롭다 하심과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을 연결시키고(롬 5:9절)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화목과 그리스도의 살으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연결시킨다.(롬 5:10)
둘 다 현재의 칭의와 마지막 때의 구원과 연결시키는 말이다.
구원(救援)은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어졌고,
현재의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미래의 심판 때 누릴 것이다.
과거 없이 현재가 없고 현재 없이 미래는 없다.
현재의 칭의(稱義)로 구원을 보증 받았으며(눅 17:21 참조)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 구원(救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요 14:3 참조)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 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래서 미래의 구원(救援)만 바라면서 참고 사는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현재를 즐거워하는 신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사랑이 나타난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산상보훈, 76)
◉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罪)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震怒)를 피할 수 있다.
<월요일 요약>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罪)에 대한 반응이시다.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죄(罪)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 하시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軟弱)하고 죄인(罪人)이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심을 인하여 기뻐해야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 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인하여 기뻐해야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의무이다.
火 (8월 3일)
<죽음이 삼킨바 됨>
▣ <예수님의 표상(表象)>
▶ 로마서 5장12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 한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 “그런즉” “그러므로” “이러므로” 와 같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나
“그러나”와 같은 역접의 접속사를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왜 그런가 하면 인과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인과도 없이 쓰이는 것 같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 (로마서 5장12절)에서도, 앞의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和睦)되었으니 기뻐하자”는 내용에 이어 롬5장12절의 “그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라고 하는 것이다. 앞뒤의 내용이 어떻게 해서 “그러므로”로 연결 되었는지가 얼른 이해가 안 되어 문맥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앞뒤 절을 바꾸면 “그러므로”가 잘 어울린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롬 5:12).
“그러므로” 다시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하고 또 화목하게 된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롬 5:11)는 문맥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색해 보이는 이런 접속사들이 원어 문장의 어떤 도치(倒置)의 기법 같은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사소해 보이는 단어 들을 번역(飜譯)과 해석(解析)과 적용(適用)을 잘하는 것이 로마서 본문을 잘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 이제 (롬 5:12절)는 아담 한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 왔고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어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롬 3:10) 세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는 아담 때부터 이 세상에 들어 왔고 그 저주도 그때부터 있었으나 구체적인 율법이 생겨 그 범죄를 지적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 <죽음은 최후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이 죽기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엄청난 고뇌와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 <총체적인 회복을 이루신 그리스도>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합의하셔서 인류가 사단에게 정복당하게 될 경우에 인류를 구속하시기로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들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엄숙한 서약을 하였었다. 이 서약을 그리스도께서 성취시키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834)
◉ 아담은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왕노릇 할 수 없다.
<화요일 요약>
⑴. 아담은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 오셨다.
즉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왕 노릇 할 수가 없다.
⑵. 아담의 죄로 죄가 세상에 총체적인 문제를 야기 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선 온 세상에 생명과 의(義)로 총체적인 해결책이 되셨다.
水 (8월 4일)
<율법이 필요를 일깨움>
▣ (로마서 5장12-19)절에서 강조된 “한”이라는 말 속에는 아담이 우리 생명의 한 조상(祖上)이요 우리는 그의 분신이라는 어떤 뜻도 들어있다.
한 예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관계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히브리 7:5)라 하여 후손을 독립된 개체로 보기 보다는 조상의 일부로 보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섬긴 것을 훨씬 후에 태어난 아브라함의 후손 레위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을 섬긴 것이 된다고도 한 것처럼(히브리 7:4-10참조),
아담이 죄를 짓고 형벌을 받았다면 그의 분신으로서 우리도 그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아무런 약점이 되지 아니하나니,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놓고 생명과 멸망을 자기의지로 선택 했듯이 우리도 원죄가 아닌 자기의 의지로 구원(救援)과 멸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조상의 잘못으로 잘못된 환경에서 사는 괴로움은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고 싶으면 스스로 믿음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노아의 세 아들의 성격이 그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하면서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성질과 성벽(性癖)을 물려받으며, 부모의 본을 따른다. 그러므로 부모의 죄는 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하여 행해지게 된다. (부조와 선지자 118p)고 했다.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원이 결정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가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없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심판을 조상에게서 영향 받은 죄(원죄)로 하시지 않고, 유혹에 대한 개인의지의 활용 여부로 심판을 하심으로, 약해진 인간이라도 자기의지로 구원을 선택할 기회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배경이다.”
범죄가 없던 에덴에서도 영생은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 선택의 몫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천국 갈 때까지는 우리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죽음의 세력 밑에 있다. (히브리 9:27 참조)
그러나 우리 개인의 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한 죄의 책임은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의 충동이나 유혹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가 그 충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정죄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인데 로마서 7장8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 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도록 만들어서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다.
◉ <율법의 역할>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
◉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수요일 요약>
⑴.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救世主)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⑵. 시내 산에서 모세로 하여금 율법을 받기 이전에도 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성경 절들로
(창 26:5, 출 16:4, 28,)은 하나님의 계명이 성문화 되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했음을 말해주며,
또한 (창 39:9, 창 42:22, 욥 8:4)은 시내산 이전에도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⑶.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사랑을 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木 (8월 5일)
<둘째 아담>
▣. (롬 5:14절) 끝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type)”이라는 말이 나온다.
신학(神學)에서 표상학(typology)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표상이란 어떤 실체의 모형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모형 또는 표상(type)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를 원형 도는 실체(antitype)라고 한다.
성경에는 특별히 구약에 있는 인물이나 물건, 사건 등이 신약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使役)을 예표
한다는 뜻에서 구약(舊約)의 많은 부분이 모형이요, 신약(新約)의 만은 부분이 원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 비유(譬喩)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사건을 그 곁에 대비 시켜 원사건의 뜻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써 원사건과 대비된 사건에 표상적인 의미는 없고 오직 예화적인 의미만 있다.
▶. 그리고 우화(寓話)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다른 사건과 대비시키지 않고 한 이야기만 가지고 교훈 하는 것으로서, 그이야기가 실제이냐 허구이냐 모양이냐 원형이냐 상관없이 그 이야기 속의 교훈만 상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이들을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어, 같은 사건을 두고도 표상(表象)이다, 우화(寓話)다, 비유(譬喩)다 하고 학자간(學者間)에 이견(異見)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 그러나 여기의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는 혼돈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본문 자체가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역사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표상인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아담이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서 5:12-19절)사이에서 “한”이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
본 단락에서 “한”이라는 말이 12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가 바로 이해의 단서가 된다. (로마서 5:12-19절 참조)
▶. 이 말은 아담이 생명의 시조(始祖)였고, 전 인류의 대표자였고,
그 하나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면에서는 예수님의 표상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생명의 시조(始祖)요, 전 인류의 대표자요, 그의 행위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롬 5: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고 한 것처럼 그 효과는 정 반대니,
죄를 끌어들인 시조(始祖)와 죄를 물리친 시조(始祖)는 사망을 가져온 대표와,
생명을 가져온 대표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즉 모두가 죄인 되도록 영향을 끼친 것과, 모두가 의인(義人)되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靈)이”(고전 15:45)된 것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 왔으니,
예수님 한분으로 능히 죄와 사망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예(例)>
접(椄)붙임의 이야기로 감(柿) 열매는 고욤나무에다 품종이 좋은 감나무를 접(椄)붙이고, 사과는 능금나무에다 접(椄)을 붙이며,
모든 식물에서는 접(椄)붙임을 통하여 좋은 결실을 맺는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이 의(義)롭게 되려면,
의인(義人)되시는 예수님께 접(椄)붙임을 통하여 의(義)롭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 우리는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편에서 모든 시험을 견디심으로 아담이 넘어졌던 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아담의 수치스런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하나님 곁에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 섰다.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교묘한 영향력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란 첫째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는 분이셨다.”(화잇 주석, 롬 5:12~19)
◎ <로마서 5:15~19절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의 비교.>
아담은 범죄(犯罪)하였고, 불순종하여 정죄와 심판과 사망을 불러왔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의(義)로운 행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義)와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가져왔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을 보라.
죽음과 생명, 불순종(不順從)과 순종(順從), 정죄(定罪)와 칭의(稱義), 죄(罪)와 의(義).
예수님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다 복구(復舊)시키셨다.
칭의(稱義)는 획득(獲得)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기 때문에, 공로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손을 내밀어 받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稱義)의 선물을 받는다.
◉ <완전한 승리>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원수를 이기시기 위하여 투쟁의 생애에 돌입하셨으며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험을 맞아 성공적인 투쟁을 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분쇄할 수 있으셨고 타락의 치욕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2)
◉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사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있음을 아신다.”(사도행적, 524)
◎ <믿음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롬 3:19-28; 4:3-5; 갈 2:16; 히 11:1)>
“믿음은 우리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큰 축복이다. 곧 그것은 보는 눈이요, 듣는 귀이며, 달리는 발이요, 붙잡는 손이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시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면 왜 내가 그 축복을 붙잡지 않을 것인가 ? 나의 믿음은 그것을 붙잡는다. 이렇게 해서 나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고 그를 믿기 때문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편지 329a, 1905).”
◎ <믿음과 감정(感情)의 구별(고후 5:7)>
“믿음과 감정은 東이 西와 확연히 다른 것같이 다르다. 믿음은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할 마음이 나든지 나지 않든지 간에 믿음으로 열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는 기도한 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확신과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우리가 구한 다음에는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성취함에 나를 실패케 아니하시고, 당신께서 당신 자신을 친히 내게 나타내시니, 나는 당신의 뜻대로 행하는 당신의 것입니다”(편지 7, 1892).”
◎ <믿음의 단순성(單純性)과 믿음의 능력>
“믿음이 작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그 결과는 강력한 능력을 나타낸다. 성경 지식이 있다고 말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것이야말로 주를 믿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들의 영혼은 치료의 은혜를 입게 하는 특별한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구속: 그리스도의 기적 97).” (화잇주석, 롬 5:1)
◎ <그리스도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윤리적(倫理的) 존재>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분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아주 미묘한 감화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첫째 아담보다는 그 상황이 죄(罪) 없는 생애를 살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으신 분이셨다. (안교 1903. 9. 29).” (화잇주석, 롬 5:12-19)
◎ <유리(有利)한 입장에 놓인 인간>
“첫 아담에게 연결된 인간은 그에게서 죄와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모든 시험을 견디시면서 아담이 실패한 곳에 오사 그곳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시험 가운데서도 더럽힘을 받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옴으로써 아담의 수치스러운 실패와 타락을 구속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유리한 곳에 두셨다.
그곳에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구주(救主)로 모심으로써 신(神)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편지 68, 1899).” (화잇주석, 롬 5:12-19)
<목요일 요약>
⑴.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⑵. 아담 안에 있으면 정죄와 사망의 저주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은혜와 생명의 약속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⑶. 아담과 둘째 아담의 비교
아 담 / 죽음 / 불순종 / 정죄(定罪) / 죄(罪) / 저주(詛呪)
둘째 아담
(예수님) 생명 / 순종 / 칭의(稱義) / 의(義) / 은혜, 사랑, 은사. 선물
<초점(焦點)>
1. 무엇이 죄(罪)와 고통과 사망을 야기(惹起)했으며,
예수님안에서 해결책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는 정죄와 고립과 죽음에 직면 했고
한 사람 예수님의 승리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기록과 형벌은 사라지고
인간은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있다.
2. 아담의 죄로 해(害)를 당한 인류가
예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 모든 기초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대속적(代贖的)죽음을 통하여
유대인이든지 이방인(異邦人)이든지 모든 인류가 구원(救援)을 받을 수있는 길이 열렸다.
< 늦게 올려서 무지무지 죄송합니다. ^^>
<무더위에 예수님안에서 건강하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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