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믿음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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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8-02 04:34 조회6,243회 댓글0건본문
8월 7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5분
기억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5장.
바울은 칭의 또는 하나님의 가납하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함을 밝혀왔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의 의가 우리를 주님 곁에 설 수 있도록 합당한 지위를 주기 때문이다. 구원의 위대한 진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 바울은 이 주제를 더욱 심도 있게 설명하려고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소위 의로운 자마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후에 바울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더 큰 그림을 본다. 그는 무엇이 죄와 고통과 사망을 야기 시켰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해결책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 조망한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는 정죄와 고립과 죽음에 직면했고, 한 사람 예수의 승리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기록과 형벌은 사라지고, 인간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함으로써 아담이 행한 일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회하셨는지, 그리고 아담의 죄로 해를 당한 인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세주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대속적 죽음이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류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5:1~2
|학습목표|
⊙ 깨닫기 :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하늘 왕족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한다.
⊙ 느끼기 : 우리에게 시험이 있지만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소망으로 인하여 평안을 누리며 기뻐한다.
⊙ 행하기 :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01. 깨닫기: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온 은혜
A. 인류 전체는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 인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B.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아버지 사이를 화목케 만든다면, 그분의 생명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가?
02. 느끼기: 사랑과 소망 안에 즐거워함
A.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살다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이유로 고통 중에도 즐거워해야 하는가?
B. 성령은 현실을 초월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부어주시는가?
03. 행하기: 순수한 선물
A. 죽음의 위협보다 은혜의 선물이 더 크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 어떤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나타낼 수 있는가?
요점: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온 일련의 다른 결과들, 즉 사랑과 소망과 화평을 선택할 수 있다.
일요일(8월 1일)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을 얻음
❶ 롬 5: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기별을 아래에 요약해 보십시오. 지금 그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롬5: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답: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는 이미 완료된 사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과 화목이라는 관계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며 구원의 소망을 굳게 한다.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완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미 의롭다고 칭함을 얻었다. 주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완전한 생애와 율법의 준수가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죄는 예수께 옮겨졌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행한 것으로 간주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께서 당하게 하셨다. 죄인에게 이 보다 더 영광스런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신뢰에 집중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이루실 줄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벧전 4:13 참조).
다음은 3절부터 5절까지의 흐름이다.
1. 인내. 그리스어 휴포모네는 “변함없이 견딤”을 의미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계발되며,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 안에서 생성되는 품성이다.
2. 연단. 그리스어 도키메는 문자적으로 “검증된 자질”, 더 구체적으로 “검증된 품성”을 의미한다.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자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
3. 소망. 인내와 연단은 자연스럽게 소망,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과 소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함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나, 이것을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만일 영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1)
<부가설명> 인내, 연단, 소망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죄의 세상에서 숨 쉬고 지나는 동안 구원받은 새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특질들이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그 나라에 이를 수 없는데, 굳이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없고, 연단으로 자기를 굳게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재미와 쾌락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 연단, 소망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언을 받았으면 그 구원을 이 세상 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인내해야 한다. 인내를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손이 단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단련이 되는 과정이 힘들지만 그것은 재림의 소망과 영원한 나라의 약속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과 환난을 당하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면서 우리의 품성은 계속 계발된다.
월요일(8월 2일)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
❶ 롬 5:6~8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이 말씀 들은 어떤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답: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아직 경건치 않고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사랑과 희생은 무조건적이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스럽고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시는 일에 주도적으로 접근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초청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갈 4:4).
❷ 롬 5:9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답: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그분의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께서 받으시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출애굽 당시 문설주에 바른 피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파괴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의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위를 보증해 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정확히 그분의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면,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으실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라. 죄가 그분의 창조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놨는지 보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악과 참상을 보시고 어떻게 진노하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❸ 우리가 기뻐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롬 5:10~11.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답: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분이 부활해서 지금 살아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히 7:25 참조).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여전히 무덤에 있다면 우리의 소망도 사라지고 만다. 11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나타난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산상보훈, 76)
<부가설명>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적 발전의 배경에 죄를 도덕적으로 저지른 잘못으로 이해한다. 성경에 기록된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은 루시퍼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시발점에서 더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계시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원죄설을 주장한다고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 원죄라는 말을 하면 어거스틴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어거스틴의 원죄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거스틴은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부패성을 물려받은 것을 원죄라고 하였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를 원죄라고 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부패를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영혼불멸설과 엉겨있는 사상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에 전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 그 영혼이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도덕적 죄를 용서받고 예수의 행하신 모든 의와 선을 믿는 신자의 것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오직 고통 중에 영생하거나, 행복 중에 영생한다는 것이 전제된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산 자들이 아니다. 죽은 자들이다.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잠시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선이 그들의 선고된 사형을 면하게 하고 영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원한 사형은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사형을 당하면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사형을 당하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 안에서 영생의 삶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칭의요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성경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피면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주 단순하고 쉬운 진리인데,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이 이치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신학도 그릇된 기초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경이 계시한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해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주제넘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제나 구원 문제가 바르게 깨달아질 때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화요일(8월 3일) 죽음이 삼킨바 됨
죽음은 최후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이 죽기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엄청난 고뇌와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❶ 롬 5: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무엇에 관 한 설명입니까?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답: 이 말씀은 종종 아담의 죄나 죄책(罪責)이 유전된다는 이론의 근거로 사용 되고 있지만, 사실은 죄가 세상에 총체적인 문제를 야기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가져 온 생명과 의는 총체적인 해결책이 되었다는 의미의 연장선에 있다.
그 어떤 성경절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가들의 논쟁이 뜨겁다. 재림교 성경주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으로 성경절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35)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냐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성경 절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언급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롬 3:23)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가 구주의 필요를 인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독자들의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그것이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아담의 죄 때문에 세상에 이르러온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베푸셨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담 안에 있는 죽음의 문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복음의 가장 밝은 측면은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 는 것이다. 예수는 무덤의 문을 여시고, 죽음의 속박을 벗기셨다. 그분은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계 1: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원수는 더 이상 포로들을 무덤에 붙잡아 둘 수 없다.
총체적인 회복을 이루신 그리스도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합의하셔서 인류가 사단에게 정복당하게 될 경우에 인류를 구속하시기로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들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엄숙한 서약을 하셨었다. 이 서약을 그리스도께서 성취시키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834)
<부가설명>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냐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성경 절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언급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롬 3:23)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에서 아담의 죄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유전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과 저자의 말이든지, 우리 주석이 말하는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든지, 이 구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계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담의 죄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면 죄를 도덕적으로 저지른 행위 자체로 생각하는 한 해답이 없다. 아담이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 되었다는 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원죄론이다. 그것은 현재의 사람들의 도덕적 상태 위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한 대답을 계시해 주었는데 사람들이 죄를 도덕적 허물에서 찾는 의식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된 죄는 도덕적 허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아담이 자기가 잃어버린 영생의 생명을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없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이 죽은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유예해 주지 않았다면 아담의 후손은 실제로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그의 모든 후손은 아담이 죽는 그 순간 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대속할 것을 담보로 죽는 때를 유예해 주신 사랑 때문에 후손들이 일정 기간 이 세상에 살 수 있도록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고 육체가 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고(마8:21,22 참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하는데(히6:1, 9:14 참고) 그것은 곧 썩는 것이다. 그 썩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들도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일고 가르쳐준다.(엡4:22) 또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자라고 지적한다.(롬8:21) 그러니까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말씀은 확실한 진리가 아닌가. 그것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생명 문제이다. 즉 아담에게서 그의 후손들에게 사망이 전해진다는 말이다. 사망이 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썩는 상태가 바로 도덕적 죄들이 되는 것이다. 아니 도덕적으로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부제를 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 예수께서 한 사람 아담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 이치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구원을 깨닫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훈: 아담은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왕노릇 할 수 없다.
수요일(8월 4일) 율법이 필요를 일깨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율법이 있기 전에는”이라는 구절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창조로부터 시내산까지, 즉 십계명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규례와 법도를 소개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시내산 이전에도 존재했다.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는 죄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❶ 시내산 이전에 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창 26:5, 출 16:4, 28은 하나님의 계명이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창 39:9, 42:22, 욥 8:4은 시내산 이전에도 죄가 무엇인지 알 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노아 시대나, 롯의 때 소돔은 대표적인 것이다.
시내산 이전에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제한적으로 주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럴지라도 인류는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내 산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명백하게 계시된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하였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부가설명> 위의 설명은 시내 산 이전의 사람들이 죽은 이유를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사상으로 설명하였다. 명백한 명령을 어기지 않았지만 죽은 것을 보면 그들이 분명 죄를 지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설명은 죄를 도덕적, 또는 명백한 명령을 어긴 것으로 정의하는 사상이다. 이런 설명은 아담 안에서 이미 모든 그의 후손들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상이다. 죄가 오직 개인이 명백한 명령이 없어도 여하튼 명령을 어긴 죄요 그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화잇 부인은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에 대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침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의인이었다. 그래도 죽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마23:35) 그 아벨도 죽었다. 이런 말씀들은 그들이 행한 의가 그들을 죽음에서 면하게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명백하거나, 명백하지 않거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기 보다는 이미 아담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히9:27)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둘째 사망으로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사람이 아무리 명령을 완벽하게 지키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선을 행할지라도 죽는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죽음을 유전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성경은 밝히 가르친 것이다.(고전15:22) 예수님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마8:22),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5:25) 이런 말씀들은 이 세상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임을 가르치는 말씀들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와 사망에 대한 계시를 성경의 시각으로 바르게 봐야 구원의 도리가 바르게 보일 것이다.
❷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율법을 통해 자신을 더 많이 계시하셨습니까? 롬 5:20~21.
[롬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답: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 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도록 만들어서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도덕법이 성문화되어 반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와 자신을 비교했을 때,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죄가 더해졌다. 그들은 어느덧 광범위한 죄악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같이 계시의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구약은 절대 율법주의가 아니었다.
율법의 역할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
<부가설명> 우리는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성경에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표현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생명이라고 말한 곳은 있다. 예수님은 요12:50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고 하셨다. 명령이라는 말은 엔톨레인데 계명이라는 말이다. 스데반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도(로고스)가 생명이라고 하였다.(행7:38) 이것은 신명기 32:46,47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계명도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그 생명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은 희생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 생명의 성질이 바로 십계명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십계명은 바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이 사랑이라는 것과(요일3:14)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구체화한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요일(8월 5일) 둘째 아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❶ 이 말씀에서 대조적인 두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답: 아담 안에 있으면 정죄와 사망의 저주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은혜와 생명의 약속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편에서 모든 시험을 견디심으로 아담이 넘어졌던 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아담의 수치스런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하나님 곁에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 셨다.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교묘한 영향력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란 첫째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는 분이셨다.”(화잇 주석, 롬 5:12~19)
❷ 롬 5:15~19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가 어떻게 비교되고 있습니까?
[롬5:15~19]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답: 아담은 범죄하였고, 불순종하여 정죄와 심판과 사망을 불러왔으나, 그리스도는 의로운 행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가져왔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을 보라. 죽음과 생명, 불순종과 순종, 정죄와 칭의, 죄와 의. 예수님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다 복구시키셨다.
15절에서 17절 사이에 은사(선물)이라는 말이 5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요점은 간단하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기 때문에, 공로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손을 내밀어 받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의 선물을 받는다.
완전한 승리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원수를 이기시기 위하여 투쟁의 생애에 돌입하셨으며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험을 맞아 성공적인 투쟁을 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분쇄할 수 있으셨고 타락의 치욕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2)
<부가설명> 성경에 둘째 아담이라는 표현은 없다.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아담이 둘 뿐이니까 둘째 아담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성경에는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이라는 표현은 있다.(고전15:47)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식, 그분은 살려주는 영이시다. 생명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아담이 죽은 그 죽음으로 대신하여 죽으셨다. 어떻게 한 사람 예수가, 시간적으로는 약 2천 년 전에, 공간적으로는 유대 땅에서 죽었는데, 시간적으로는 2천 년 후에, 공간적으로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타 유대 땅 밖에 살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시할 수 있으며 그 한 사람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에 잠긴 적이 있는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로마 5장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그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하여 죽으면 그의 모든 후손들도 예수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이신 것이다. 이 사실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고 한 것이다. 죄의 궁극적 본질이 바로 사망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다. 사형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의의 궁극적인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롬3:21) 이것은 예수의 부활로 확실하게 드러난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서에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 생명이다.(롬4:23~25)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은 것이다. 예수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면 썩을 수밖에 없다.(요일5:11~13)
교훈: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금요일(8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치료 봉사, 470~472 “일상생활에서의 도움”, 가려 뽑은 기별 1권, 383~384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60~62 “유혹과 타락.”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사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있음을 아신다.”(사도행적,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끔찍한 시련이 올 때, 믿음은 그대를 어떻게 지탱시킵니까? 시련은 그대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게 합니까?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을 그대는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 사람은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 안에서 얻은 부활과 영생을 믿음으로 시련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뢰의 정신은 시련을 인내할 수 있게 하면 연단으로 더욱 공고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이며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다.
2. 많은 저자와 철학자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생명을 덧없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어떻게 삶의 덧없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과 부활로 영생의 길이 있음으로 확신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바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며, 예수님의 부활로 증명된 것이다.
3.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갈망하지 못 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하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확실한 진리를 확실한 증거로 제시하고 생활로 그 길을 안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도록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서 말씀을 합리적으로 잘 제시하도록 훈련하는 일을 할 만한 일이다.
기억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5장.
바울은 칭의 또는 하나님의 가납하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함을 밝혀왔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의 의가 우리를 주님 곁에 설 수 있도록 합당한 지위를 주기 때문이다. 구원의 위대한 진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 바울은 이 주제를 더욱 심도 있게 설명하려고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소위 의로운 자마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후에 바울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더 큰 그림을 본다. 그는 무엇이 죄와 고통과 사망을 야기 시켰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해결책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 조망한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는 정죄와 고립과 죽음에 직면했고, 한 사람 예수의 승리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기록과 형벌은 사라지고, 인간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함으로써 아담이 행한 일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회하셨는지, 그리고 아담의 죄로 해를 당한 인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세주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대속적 죽음이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류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5:1~2
|학습목표|
⊙ 깨닫기 :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하늘 왕족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한다.
⊙ 느끼기 : 우리에게 시험이 있지만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소망으로 인하여 평안을 누리며 기뻐한다.
⊙ 행하기 :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01. 깨닫기: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온 은혜
A. 인류 전체는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 인하여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B.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아버지 사이를 화목케 만든다면, 그분의 생명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가?
02. 느끼기: 사랑과 소망 안에 즐거워함
A.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살다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이유로 고통 중에도 즐거워해야 하는가?
B. 성령은 현실을 초월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부어주시는가?
03. 행하기: 순수한 선물
A. 죽음의 위협보다 은혜의 선물이 더 크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 어떤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나타낼 수 있는가?
요점: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가져온 일련의 다른 결과들, 즉 사랑과 소망과 화평을 선택할 수 있다.
일요일(8월 1일)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을 얻음
❶ 롬 5: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기별을 아래에 요약해 보십시오. 지금 그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롬5: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답: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는 이미 완료된 사실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과 화목이라는 관계의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며 구원의 소망을 굳게 한다.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완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미 의롭다고 칭함을 얻었다. 주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완전한 생애와 율법의 준수가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죄는 예수께 옮겨졌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행한 것으로 간주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께서 당하게 하셨다. 죄인에게 이 보다 더 영광스런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신뢰에 집중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이루실 줄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벧전 4:13 참조).
다음은 3절부터 5절까지의 흐름이다.
1. 인내. 그리스어 휴포모네는 “변함없이 견딤”을 의미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계발되며,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 안에서 생성되는 품성이다.
2. 연단. 그리스어 도키메는 문자적으로 “검증된 자질”, 더 구체적으로 “검증된 품성”을 의미한다.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자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
3. 소망. 인내와 연단은 자연스럽게 소망,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과 소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전함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나, 이것을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만일 영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그분을 찾았기 때문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511)
<부가설명> 인내, 연단, 소망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죄의 세상에서 숨 쉬고 지나는 동안 구원받은 새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는 특질들이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그 나라에 이를 수 없는데, 굳이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없고, 연단으로 자기를 굳게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재미와 쾌락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 연단, 소망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언을 받았으면 그 구원을 이 세상 세력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인내해야 한다. 인내를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손이 단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단련이 되는 과정이 힘들지만 그것은 재림의 소망과 영원한 나라의 약속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과 환난을 당하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면서 우리의 품성은 계속 계발된다.
월요일(8월 2일)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
❶ 롬 5:6~8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이 말씀 들은 어떤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답: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아직 경건치 않고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사랑과 희생은 무조건적이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스럽고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시는 일에 주도적으로 접근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초청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갈 4:4).
❷ 롬 5:9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답: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그분의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예수께서 받으시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출애굽 당시 문설주에 바른 피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파괴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의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위를 보증해 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정확히 그분의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면,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으실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라. 죄가 그분의 창조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놨는지 보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악과 참상을 보시고 어떻게 진노하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❸ 우리가 기뻐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롬 5:10~11.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답: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실성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분이 부활해서 지금 살아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히 7:25 참조).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여전히 무덤에 있다면 우리의 소망도 사라지고 만다. 11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나타난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움튼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사랑이 계시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완고한 마음은 녹아지고 부드러워지며, 죄인은 변화를 입고 하늘의 자녀가 된다.”(산상보훈, 76)
<부가설명> 오늘날 기독교는 역사적 발전의 배경에 죄를 도덕적으로 저지른 잘못으로 이해한다. 성경에 기록된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은 루시퍼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시발점에서 더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인간의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계시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원죄설을 주장한다고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 원죄라는 말을 하면 어거스틴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어거스틴의 원죄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거스틴은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부패성을 물려받은 것을 원죄라고 하였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를 원죄라고 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부패를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영혼불멸설과 엉겨있는 사상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해 있기 때문에 전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은 다 그 영혼이 지옥에 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도덕적 죄를 용서받고 예수의 행하신 모든 의와 선을 믿는 신자의 것으로 여겨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오직 고통 중에 영생하거나, 행복 중에 영생한다는 것이 전제된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산 자들이 아니다. 죽은 자들이다.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잠시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선이 그들의 선고된 사형을 면하게 하고 영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원한 사형은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사형을 당하면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사형을 당하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 안에서 영생의 삶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칭의요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성경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피면 이 이치를 깨닫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아주 단순하고 쉬운 진리인데,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이 이치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신학도 그릇된 기초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경이 계시한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해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주제넘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제나 구원 문제가 바르게 깨달아질 때 우리의 믿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화요일(8월 3일) 죽음이 삼킨바 됨
죽음은 최후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이 죽기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엄청난 고뇌와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❶ 롬 5: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무엇에 관 한 설명입니까?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답: 이 말씀은 종종 아담의 죄나 죄책(罪責)이 유전된다는 이론의 근거로 사용 되고 있지만, 사실은 죄가 세상에 총체적인 문제를 야기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가져 온 생명과 의는 총체적인 해결책이 되었다는 의미의 연장선에 있다.
그 어떤 성경절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가들의 논쟁이 뜨겁다. 재림교 성경주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으로 성경절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35)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냐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성경 절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언급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롬 3:23)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가 구주의 필요를 인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독자들의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그것이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아담의 죄 때문에 세상에 이르러온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베푸셨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담 안에 있는 죽음의 문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복음의 가장 밝은 측면은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 는 것이다. 예수는 무덤의 문을 여시고, 죽음의 속박을 벗기셨다. 그분은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계 1: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원수는 더 이상 포로들을 무덤에 붙잡아 둘 수 없다.
총체적인 회복을 이루신 그리스도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합의하셔서 인류가 사단에게 정복당하게 될 경우에 인류를 구속하시기로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그들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보증인이 될 것이라는 엄숙한 서약을 하셨었다. 이 서약을 그리스도께서 성취시키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834)
<부가설명>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냐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성경 절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언급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롬 3:23)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에서 아담의 죄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유전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과 저자의 말이든지, 우리 주석이 말하는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든지, 이 구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계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담의 죄가 어떻게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는지를 알려고 하면 죄를 도덕적으로 저지른 행위 자체로 생각하는 한 해답이 없다. 아담이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 되었다는 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원죄론이다. 그것은 현재의 사람들의 도덕적 상태 위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한 대답을 계시해 주었는데 사람들이 죄를 도덕적 허물에서 찾는 의식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된 죄는 도덕적 허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아담이 자기가 잃어버린 영생의 생명을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없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이 죽은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유예해 주지 않았다면 아담의 후손은 실제로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없다.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그의 모든 후손은 아담이 죽는 그 순간 다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대속할 것을 담보로 죽는 때를 유예해 주신 사랑 때문에 후손들이 일정 기간 이 세상에 살 수 있도록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고 육체가 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고(마8:21,22 참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하는데(히6:1, 9:14 참고) 그것은 곧 썩는 것이다. 그 썩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들도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일고 가르쳐준다.(엡4:22) 또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자라고 지적한다.(롬8:21) 그러니까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말씀은 확실한 진리가 아닌가. 그것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생명 문제이다. 즉 아담에게서 그의 후손들에게 사망이 전해진다는 말이다. 사망이 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썩는 상태가 바로 도덕적 죄들이 되는 것이다. 아니 도덕적으로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부제를 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 예수께서 한 사람 아담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 이치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구원을 깨닫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훈: 아담은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왕노릇 할 수 없다.
수요일(8월 4일) 율법이 필요를 일깨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율법이 있기 전에는”이라는 구절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창조로부터 시내산까지, 즉 십계명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규례와 법도를 소개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시내산 이전에도 존재했다.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는 죄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❶ 시내산 이전에 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창 26:5, 출 16:4, 28은 하나님의 계명이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창 39:9, 42:22, 욥 8:4은 시내산 이전에도 죄가 무엇인지 알 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노아 시대나, 롯의 때 소돔은 대표적인 것이다.
시내산 이전에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제한적으로 주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럴지라도 인류는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내 산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명백하게 계시된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하였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부가설명> 위의 설명은 시내 산 이전의 사람들이 죽은 이유를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사상으로 설명하였다. 명백한 명령을 어기지 않았지만 죽은 것을 보면 그들이 분명 죄를 지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설명은 죄를 도덕적, 또는 명백한 명령을 어긴 것으로 정의하는 사상이다. 이런 설명은 아담 안에서 이미 모든 그의 후손들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성경의 분명한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상이다. 죄가 오직 개인이 명백한 명령이 없어도 여하튼 명령을 어긴 죄요 그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화잇 부인은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에 대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침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의인이었다. 그래도 죽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마23:35) 그 아벨도 죽었다. 이런 말씀들은 그들이 행한 의가 그들을 죽음에서 면하게 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명백하거나, 명백하지 않거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기 보다는 이미 아담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히9:27)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둘째 사망으로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사람이 아무리 명령을 완벽하게 지키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선을 행할지라도 죽는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죽음을 유전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성경은 밝히 가르친 것이다.(고전15:22) 예수님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마8:22),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5:25) 이런 말씀들은 이 세상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임을 가르치는 말씀들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와 사망에 대한 계시를 성경의 시각으로 바르게 봐야 구원의 도리가 바르게 보일 것이다.
❷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율법을 통해 자신을 더 많이 계시하셨습니까? 롬 5:20~21.
[롬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답: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들 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도록 만들어서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도덕법이 성문화되어 반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와 자신을 비교했을 때,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죄가 더해졌다. 그들은 어느덧 광범위한 죄악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같이 계시의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구약은 절대 율법주의가 아니었다.
율법의 역할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4)
<부가설명> 우리는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성경에 십계명을 도덕법이라고 표현한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생명이라고 말한 곳은 있다. 예수님은 요12:50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라고 하셨다. 명령이라는 말은 엔톨레인데 계명이라는 말이다. 스데반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도(로고스)가 생명이라고 하였다.(행7:38) 이것은 신명기 32:46,47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계명도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그 생명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은 희생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은 그 생명의 성질이 바로 십계명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십계명은 바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이 사랑이라는 것과(요일3:14)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구체화한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요일(8월 5일) 둘째 아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❶ 이 말씀에서 대조적인 두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답: 아담 안에 있으면 정죄와 사망의 저주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은혜와 생명의 약속 안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편에서 모든 시험을 견디심으로 아담이 넘어졌던 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아담의 수치스런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하나님 곁에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 셨다.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교묘한 영향력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란 첫째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는 분이셨다.”(화잇 주석, 롬 5:12~19)
❷ 롬 5:15~19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가 어떻게 비교되고 있습니까?
[롬5:15~19]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답: 아담은 범죄하였고, 불순종하여 정죄와 심판과 사망을 불러왔으나, 그리스도는 의로운 행동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가져왔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을 보라. 죽음과 생명, 불순종과 순종, 정죄와 칭의, 죄와 의. 예수님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다 복구시키셨다.
15절에서 17절 사이에 은사(선물)이라는 말이 5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요점은 간단하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기 때문에, 공로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손을 내밀어 받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의 선물을 받는다.
완전한 승리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원수를 이기시기 위하여 투쟁의 생애에 돌입하셨으며 아담이 실패한 바로 그 시험을 맞아 성공적인 투쟁을 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분쇄할 수 있으셨고 타락의 치욕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72)
<부가설명> 성경에 둘째 아담이라는 표현은 없다.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아담이 둘 뿐이니까 둘째 아담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성경에는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이라는 표현은 있다.(고전15:47)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식, 그분은 살려주는 영이시다. 생명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아담이 죽은 그 죽음으로 대신하여 죽으셨다. 어떻게 한 사람 예수가, 시간적으로는 약 2천 년 전에, 공간적으로는 유대 땅에서 죽었는데, 시간적으로는 2천 년 후에, 공간적으로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타 유대 땅 밖에 살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시할 수 있으며 그 한 사람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에 잠긴 적이 있는지?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로마 5장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그 죽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하여 죽으면 그의 모든 후손들도 예수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이신 것이다. 이 사실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고 한 것이다. 죄의 궁극적 본질이 바로 사망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다. 사형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의의 궁극적인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롬3:21) 이것은 예수의 부활로 확실하게 드러난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서에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 생명이다.(롬4:23~25)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은 것이다. 예수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면 썩을 수밖에 없다.(요일5:11~13)
교훈: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금요일(8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치료 봉사, 470~472 “일상생활에서의 도움”, 가려 뽑은 기별 1권, 383~384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60~62 “유혹과 타락.”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사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있음을 아신다.”(사도행적,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끔찍한 시련이 올 때, 믿음은 그대를 어떻게 지탱시킵니까? 시련은 그대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게 합니까?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을 그대는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 사람은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 안에서 얻은 부활과 영생을 믿음으로 시련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뢰의 정신은 시련을 인내할 수 있게 하면 연단으로 더욱 공고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이며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다.
2. 많은 저자와 철학자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생명을 덧없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어떻게 삶의 덧없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과 부활로 영생의 길이 있음으로 확신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바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며, 예수님의 부활로 증명된 것이다.
3.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갈망하지 못 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하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확실한 진리를 확실한 증거로 제시하고 생활로 그 길을 안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확실히 증거할 수 있도록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서 말씀을 합리적으로 잘 제시하도록 훈련하는 일을 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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