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 칭의와 율법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5과 - 칭의와 율법

페이지 정보

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7-29 09:54 조회6,258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2010년 7월 31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2분

제5과
<칭의(稱義)와 율법(律法)>

<記憶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廢)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 로마서 4장은 여러 방식으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救援)”의 성서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구원의 계획을 다음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혜),
(2) 약속에 대한 인간의 반응(믿음),
(3) 믿는 자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칭의).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 <칭의(稱義).>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하심"(고후 5:21)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은 성령으로 채움을 입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 동일한 믿음을 통하여(롬 12:3; 엡 2:8)회개하는 죄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 3:28).
"칭의"라는 용어는 "의로운 요구, 행실", "규정", "사법적 선고", "의의 행위"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dikaioma)와 "칭의", "옹호", "무죄 석방"을 뜻하는 디카이오시스(dikaiosis)를 번역한 것이다.
"의롭다고 선고되고 그렇게 취급을 받다", "무죄 방면 되다", "의롭다고 여겨지다", "석방되다", "순결하게 하다", "공평하게 행하다"를 의미하는 관련된 동사 디카이오(dikaioo)도 그 용어의 의미에 부가적인 통찰을 준다.
"대체로 신학적으로 사용되는 칭의의 의미는 "참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거나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칭의는 정죄의 반대개념이다(롬 5:16).". 이 칭의(稱義)의 기초는 우리의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왜냐하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롬 5:18, 19)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롬 3:24) 신자들에게 이 순종을 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나니"(딛 3:5).

◉ <하나님의 율법(律法)>
“하나님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을 통해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救主)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계명(誡命)에 대한 순종이다. 이 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힘 있게 해준다.”
(기본 신조, 18. (교리, 219)

▣ <율법과 복음.>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이르러오는 선물이다(엡 2:8).
"율법의 그 어떤 행위도,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노력이나 선한 행위도 (그것이 많든 적든, 희생적이든 아니든 간에) 결코 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딛 3:5; 롬 3:20).
성경 전편을 통하여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다. 각각은 서로를 지지한다.

▣ <율법의 목적>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주신 것은 백성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제공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당신의 구원(救援)의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要點>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율례와 제사를 행함으로 얻는 구원의 개념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요일(7월 25일)
<율법(律法)을 세움>

▣ 믿음으로 의(義)롭다고 칭(稱)한다는 말의 잘못된 이해(理解)나 해석(解釋)을 하게 되면,
오해(誤解)로 믿음만 있으면 율법을 범하거나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廢)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구약(舊約)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 할지라도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항상 일치 되어 있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자”가 된다는 말씀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다윗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한 사례로 제시 하였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지만, 사실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고. 율법주의는 율법의 왜곡된 형태였을 뿐, 율법의 기본 정신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도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 (로마서 4:1~8)절의 말씀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칭함을 얻었고,
다윗도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義)로 여김을 받은 사람의 복에 대하여 노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舊約)에서도 구원(救援)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율법과 믿음>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하다.
그대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153)

◉ 구약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다.

월요일(7월 26일)
<은혜(恩惠)인가 ? 빚인가 ?>

▣ 은혜(恩惠)란 대가(代價)가 없는 완전한 공짜이지만, 빚은 반듯이 값어야 하는 의무(義務)이자 채무자(債務者)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은 것을 빚으로 여겨 장성하여 대가(代價)를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은혜에 대하여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 그 이상이다.
바울은 구원(救援)의 핵심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로마서 4:6~8절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다윗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의(義)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윗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의 복을 얻을 사람들은 다 자비(慈悲)의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오직 "하나님의 깊은 것"(고전 2:10)을 통찰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서만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계시로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기에 이를 수 있다.
그 때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 되고, 그는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교리, 20)

◉ “하나님의 나누어줄 수 있는 속성들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의 관심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것들로는 사랑(롬 5:8), 은혜(롬 3:24), 긍휼(시 145:9), 인내(벧후 3:15, NIV), 거룩함(시 99:9), 의(스 9:15; 요 17:25), 공의(계 22:12), 진리(요일 5:20)가 있다. 이러한 은사들은 그것들을 주시는 분 자신과 더불어서만 이르러 온다.”(교리, 26)

◉ “은혜(恩惠)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구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는가? 어떻게 사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이전의 옛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았으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딛 2:11).”(핵심, 구원4. 은혜로써 구원받음)

◉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은혜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엡 2:8)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구약은 오로지 율법뿐이며, 신약은 오로지 은혜뿐이고 율법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지내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우리의 유일의 질문은 이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핵심, 율법10.)

◉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한 삶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회개하는 죄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것으로 간주하신다.”(핵심, 율법10.)

◉ “은혜는 과거의 죄들을 제거하고 용서한다(롬 3:25). 이것은 신자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며(롬 5:21), 신자는 죄를 포기하고(롬 6:1-4),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업을 하게 된다(엡 2:8-10). 하나님의 율법 안에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구원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열매이다.”(핵심, 율법10. 율법과 은혜)

◉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로마서 6:3-7을 읽으라).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 구원받을 사람은 전혀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용서를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핵심, 율법10.)

◉ “야고보는 입법자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한다. “입법자와 재판 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그리스도는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마태복음 1:21; 히브리서 7:25를 읽으라). 멸망시킬 수 있는 분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이시다(데살로니가후서 1:7-9를 읽으라). 그러므로 은혜의 창시자는 또한 율법의 창시자이다.”(핵심, 율법10.)

◉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가려 뽑은 기 별 1권, 215)

◉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함>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삼는 믿음이다.”(시대의 소망, 347)

◉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가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화요일(7월 27일)
<언약(言約)과 율법(律法)>

◉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의 구별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하며 나라를 약속받았다.
따라서 구원(救援)의 약속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다 믿음으로 구(求)해야 한다.

◉ 사도 바울은 (로마서 4:13)절에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언약”과 “율법”은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약적 배경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을 예로 선택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의롭게 여겨진 것은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라고 하시며 아브라함과 언약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다.
즉 그것이 요구하는 역할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셨고, 그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
이것은 은혜가 구약시대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며,
바울이 아브라함을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은 예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 로마서 4:14~1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구약의 핵심 주제라 는 논리를 율법에 속하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언약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게 된다. 따라서 언약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믿음과 은혜에 속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약라고 설명을 하면서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기 전, 즉 모든 율법과 제사 제도가 수립되기 전에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음을 주장하였다.
설령 바울이 시내산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도덕법의 원칙까지 언급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 하면 그것이 믿음의 용도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강하게 자신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믿음은 구원하고 율법은 정죄한다.’ 바울은 우리를 정죄로 이끄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는 모두 율법을 어겼으며, 아브라함에게 필요했던 것, 즉 믿음으로 얻는 의,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언약의 하나님.>
“항구적인 관계 맺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창 9:1-17), 아브라함(창 12:1-3, 7, 13:14-17, 15:1, 5, 6, 17:1-8, 22:15-18)과 같은 인물들로 더불어 엄숙한 언약을 맺으셨다(본서 7장 참조). 이러한 언약들은 당신의 백성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노아에게 그분은 규칙적인 계절의 순환을 보증하셨으며(창 8:22), 또한 전 세계적인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임을 약속하셨다(창 9:11). 아브라함에게 그분은 허다한 후손들(창 15:5-7)을 두게 될 것과 그와 그의 후손들이 거할 한 땅을 약속하셨다(창 15:18, 17:8).”(교리, 34)

◉ <은혜의 언약>
“범죄를 통해서 첫 부부(夫婦)는 죄인이 되었다.
더 이상 사단을 저항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자유케 될 길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어떤 소망이 있었는가?

◉ <타락(墮落) 때에 주신 언약.>
하나님께서 타락한 부부의 죄에 대해 형벌을 내리시기 전에 그분은 그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제시하심으로 소망을 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나님의 기별은 용기를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사단이 인간을 자기의 악한 마력으로 장악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패배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졌던 것이다. 맨 처음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죄에 대한 보루를 약속하셨다. 그분은 뱀과 여자, 사단의 추종자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증오심을 조성하실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사단과 인간의 관계는 깨어지고 하나님과의 갱신된 관계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세기를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와 사단 사이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절정에 달할 것이었는데, 그분은 예언된 여인의 후손의 화신(化身)이셨다. 갈바리에서 사단은 패배하였다. 비록 여인의 후손이 상함을 받았지만 죄의 장본인은 패배하였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그들에게 성공을 거두게 하는 죄에 대한 증오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갈바리에서 이루신 구주의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교리, 93)

◉ <창조 이전에 세워진 언약.>
“은혜의 언약은 타락 후에 개발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당신들 사이에 인류가 죄에 빠질 경우를 위해 그들을 구출할 것을 언약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딤후 1:9 참조)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언급하면서 베드로는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벧전 1:20)다고 말했다.
언약은 흔들릴 수 없는 기초 위에 근거하였으니 곧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한 것이다(히 6:18).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보증인은 타인이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에 그 빚과 의무를 대신 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보증인으로서의 봉사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 속에 빠질 경우에 그분께서 그들이 당해야 할 형벌을 부담하시겠다는 의미였다. 그분은 그들의 구속에 필요한 값을 지불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범해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것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천사도 이런 의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오직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되신 그분만이 그 의무를 짊어지실 수 있었다(롬 5:12-21; 고전 15:22).
하나님의 아들은 언약의 보증이실 뿐 아니라 중보자, 혹은 실행자이시기도 하시다. 성육신한 인자로서의 당신의 사명에 대한 묘사는 그분의 역할이 지닌 이러한 측면을 계시한다. 그분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39, 5:30, 43 참조)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요 6:40)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아버지의 뜻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요 17:3). 당신의 사명을 끝내시면서 그분은 아버지의 명령의 실행에 관해 증거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언약 속에서 인간의 보증이 되기로 하신 당신의 서약을 성취하셨다. "다 이루었다"(요 19:30)는 그분의 외침은 그분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분은 범해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죄 값을 자신의 생명으로 치르셨으며, 회개하는 인류에게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보혈은 은혜의 언약을 비준하였다. 그분의 속죄하는 보혈을 믿음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이 되고, 따라서 영생의 후사가 된다.
이 은혜의 언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증거 한다. 창조 이전에 세워진 언약이 타락 후에 계시되었다. 그 때에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동반자가 되었다.” (교리, 93-94)

◉ <언약의 갱신(更新).>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홍수 전후를 막론하고 이 엄청난 은혜의 언약을 거절했다(창 6:1-8, 11:1-9).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제공하셨을 때 그분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다시 그분은 구속의 약속을 확인하셨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12:3, 18:18 참조).
성경은 특별히 언약의 조건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실성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분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창 15:6)었다. 아브라함이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언약이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지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창 17:1, 26:5).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에게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1)이라는 칭호를 줄 만 하였다. 그는 순종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모본이다(롬 4:2, 3; 약 2:23, 24). 은혜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들에게 자동적으로 그 축복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지상의 모든 사람은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언약된 구원의 약속들을 체험할 수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시내산 언약(첫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을 갱신한 것이었다(히 9:1).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언약으로 왜곡시켰다(갈 4:22-31).

◉ <새 언약.>
후기의 성경 절들은 "새롭고 더 나은 언약"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 변경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제도로 왜곡되었다.
(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 부활, 중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새롭게 계시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히 8:6-13 참조),
(3) 이것은 십자가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보혈로 비준된 것이 되었다
(단 9:27; 눅 22:20; 롬 15:8; 히 9:11, 12).
이 언약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제공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마음에 십계명을 기록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면, 회개하는 죄인들을 그들의 조물주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한다(렘 31:33). 새 언약, 중생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져다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체험을 갖게 한다. 이것이 제공하는 심령의 새롭게 됨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 등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로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총의 능력을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날마다 즐길 수 있게 된다(요 8:29). 타락한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라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왕국의 후사가 됨을 보증하는 이런 관계를 체험할 수 있다.”(교리, 94-95)

◉ <율법과 복음>
“누구든지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바르게 소개할 수 없다. 율법은 구체화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 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이다.”(실물교훈, 128)

수요일(7월 28일)
<율법(律法)과 믿음>

◉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이 오히려 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율법 아래 있으면 죄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저주(詛呪)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이방인의 종교의 기초에 놓여 있다.
이런 원칙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은 죄를 막을 방벽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시대의 소망, 35~36)
이상(以上)의 말씀은
죄악으로 기울어진 인간의 본성은 의(義)로워지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본성을 가리고 가식적(假飾的)이고 외식적(外飾的)인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거짓된 삶은 죄에 더 치명적(致命的)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갈라디아 3:21~23)절에서 의(義)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렇지만 율법이 약속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기 위해 율법이 모든 사람을 그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였다.

◉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성령을 받아들일 때 곧 영생이 시작된다.”(시대의 소망, 388)

◉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됨>
“헬라어 원문에서 “마침” 곧 “텔로스”가 강조되어 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때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또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지, 혹은 목표라고(갈 3:24 참조), 혹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이라고(마 5:17 참조), 혹은 그리스도는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마침이라고(롬 6:14 참조) 해석되었다. 첫째 해석은 율법폐기론적인 주장이며, 성경을 왜곡한 것이다(3:31 주해 참조). 나머지 세 해석들은 다 바른 명제를 진술하고 있으나, 이중에 셋째가 이 구절의 문맥에 가장 적합한 해석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인 믿음의 의와 사람이 시도하는 율법의 의를 비교하고 있다. 복음의 기별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의의 길로서의 율법의 마침이시라는 것이다. 율법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아마도 바울이 어떤 특정한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일반적인 율법을 지적했다는 유력한 증거일 것이다. 더구나 전체적 논제의 흐름을 볼 때 바울이 일반적인 의미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화잇주석, 롬 10:4)

◉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본질상으로 불변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롬 13:10)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며 진리이다. 그의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 119:142, 172)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쟁투, 466)

◉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 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 31).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및 그 높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 <의(義)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한일서 4장 16절)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義)로우”(시편 119편 172절)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로마서 13장 10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보훈, 18)

목요일(7월 29일)
<율법(律法)과 죄(罪)>

▣ 율법은 거울과 같은 역할로 현상을 보여주는 역할만 한다.
사람의 얼굴에 불순물(不純物)이 묻은 것을 자신이 볼수 없지만,
거울을 보면 어느 곳에 무엇의 불순물이 묻어있는지 알 수가 있듯이
율법은 죄를 지적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불순물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성경절까지 인용하며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그렇게 건전하거나 신학적이지 않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율법을 폐지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이 폐지(廢止)되거나 변경(變更)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만약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십자가 이후가 아니라 십자가 이전에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사실 십자가처럼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율법이 변경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만약 율법이 변경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 율법과 죄에 대하여 (요일 2:3~6, 3:4 그리고 롬 3:20)절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결국 법을 어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고,
율법의 정신이 그분의 품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 우리는 십자가가 율법을 폐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는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전에 율법을 폐지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었다면, 이후에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다.
왜 인류가 범죄한 직후 율법을 폐지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구약과 신약은 대립하지 않음>
“구약시대에 제시된 의의 위대한 표준은 신약시대에서 낮춰지지 않는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다.”(믿음과 행함, 52)

◉ “종종 인간의 권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던 계급 제도가 있던 그 시대에 바울은 인간의 형제 관계에 관한 대 진리를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섰다고 선언하였다.”(사도행적, 238)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아시지 못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당신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0)

◉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 주는 교훈>
“모든 희생 제물과 모든 의식 속에 구체화되고 감명을 끼치려고 의도된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 교훈은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이 엄숙하게 설교하였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반복해서 가르치신 교훈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죄 사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백성으로써 우리들은 이 위대한 진리의 힘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가장 작은 죄에도 용서가 있고, 가장 큰 죄에도 용서가 있다는 이 큰 진리를 우리의 생활 속으로 가져오는 사람은 참으로 몇 사람 안 된다. (리뷰 1886. 9. 21).”

◉ <레위기의 율법과 친숙하게 됨>
“ 레위기의 율법에 들어 있는 교훈을 우리들이 연구해 보면 우리들 각자가 서로를 대할 때 따라야 될 믿음과 행함의 규칙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누구도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을 핑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편지 3, 1905).”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율법이 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마 5:17, 18)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율법을 범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율법을 변경하거나 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확실하게 하셨다. 그분이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거나 율법의 표준을 낮추려 하심이 아니요 공의를 보존하기 위함이며 율법은 변할 수 없고 영원히 굳게 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상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될 때 하나님의 모든 법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실물, 314)

◉ <의(義)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 “만약 사단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의와 공로의 가치를 부여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사단은 그 사람을 유혹을 통해서 정복하며, 자신의 포로와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리뷰 앤 헤럴드, 1889. 9. 3)

<초점(焦點)>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믿음이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율법이 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이고, 또한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언약과 율법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求)하여야 하며,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는 오히려 율법의 매임을 받게 될 이고, 믿음은 율법의 매임에서 자유케 해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