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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칭의와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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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목사 작성일10-07-23 08:47 조회6,4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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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2분

기억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 반장은 친교와 선교를 위해 안교 활동 반을 꼭 실시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15:6, 삼하 11~12장, 롬 3:20~23, 31, 4:1~17, 갈 3:19, 요일 3:4.
로마서 4장은 여러 방식으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성서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바울은 경건과 덕행의 귀감이 되는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로마서 4장을 읽는 독자는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최고의 인물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의롭게 할 수 없었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아브라함이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면,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구원의 계획을 다음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혜), (2) 약속에 대한 인간의 반응(믿음), (3) 믿는 자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칭의).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바울은 누누이 구원은 은혜라고 강조한다. 구원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 우리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의무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빚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여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으로 선물이어야 한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바울은 곧장 창세기 15:6로 간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교과 개요
|핵심본문| 롬4:1~2
|학습목표|
⊙ 깨닫기 : 우리를 의롭게 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구약이나 신약에 있어서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 느끼기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은총을 헤아린다.
⊙ 행하기 : 우리의 행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01. 깨닫기: 아브라함의 믿음
A.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게 여김을 받았는가? 칭의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있기 전, 모세 법과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기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B.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의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신조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02. 느끼기: 칭의의 복
A. 다윗은 부끄러운 죄를 짓고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는가?
B.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어떤 복이 따라 오는가?

03. 행하기: 자아를 그리스도께 맡김
A. 율법은 생명이나 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와 죄를 구분해 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B.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율법을 자신과 어떻게 연관시켜야 하는가?

요점: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율례와 제사를 행함으로 얻는 구원의 개념을 포기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요일(7월 25일) 율법을 세움

❶ 롬 3:31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재림교인들에게 얼마나 중요 한 문제입니까?
[롬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답: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세우는 자가 된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도리가 성경적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구약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항상 일치 되어 있었다.

❷ 롬 4:1~8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구약에서도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었음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롬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답: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칭함을 얻었고, 다윗도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은 사람의 복에 대하여 노래하였다.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간주되었다. 구약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율법을 폐했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소의 모든 제사들은 죄인이 자신의 행위가 아닌, 대속물의 죽음으로 구원받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밧세바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후에 용서를 받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분명 그를 구원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율법의 여러 원칙들을 범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이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다윗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한 사례로 제시 하였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지만, 사실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왜곡된 형태였을 뿐, 율법의 기본 정신이 아니었다.

율법과 믿음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안전하다. 그대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153)

<부가설명> 율법이라는 말은 언제나 행위를 요구하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구속력이 있는 요구는 사람들이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게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구속력이 있는 요구에서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구속력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그 본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변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현격한 차이이다. 본성은 그것을 거스를 때 불편해진다. 아프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것이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롬8:7)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율법의 구속력이 있는 요구 때문이 아니고 구원받은 생명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에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Life Style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프고 불편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불편이 없고 아프지도 않다면 그는 구원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구원받은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관계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교훈: 구약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다.

월요일(7월 26일) 은혜인가? 빚인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 그 이상이다. 바울은 구원의 핵심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용납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하고자 한다면, 그는 칭의와 용서를 받기 이전에 어떤 표준에 도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 내면만을 살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반면 공로가 없고 합당치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칭의를 선물로 주신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결국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품성을 온전하게 반영할 수 있겠는가? 구원을 얻고자 자신의 품성에 몰두한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초점을 맞춘 사람인가?

❶ 롬 4:6~8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어떻게 확대시키고 있습니까?
[롬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답: 다윗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의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다윗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을 얻을 사람들은 다 자비의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가려 뽑은 기 별 1권, 215)
바울은 이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해당됨을 설명한다(롬 4:9~12).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이방인이었다(수 24:2). 그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조상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예를 들어 구원의 보편성을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히 2:9).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함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삼는 믿음이다.”(시대의 소망, 347)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를 말할 때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성경의 은혜를 설명한다. 그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를 올바르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교과에서도 일반적인 의미로 은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친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8) 그래서 편지서마다 은혜와 평강은 예수 이름으로 비는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그 얻은 생명으로 생활할 때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선하고 의로운 행위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무 행위를 행할 수 없다.

교훈: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가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화요일(7월 27일) 언약과 율법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이 말씀에서 “언약”과 “율법”은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약적 배경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을 예로 선택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의롭게 여겨진 것은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라고 하시며 아브라함과 언약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다. 즉 그것이 요구하는 역할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셨고, 그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 이것은 은혜가 구약시대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며, 바울이 아브라함을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은 예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❶ 롬 4:14~17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구약의 핵심 주제라 는 논리를 어떻게 전개 시키고 있습니까?
[롬4:14~17]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답: 율법에 속하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언약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게 된다. 따라서 언약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믿음과 은혜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이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다. 유대인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구원이 율법의 준수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 그것은 구약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기 전, 즉 모든 율법과 제사 제도가 수립되기 전에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음을 주장하였다.
설령 바울이 시내산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도덕법의 원칙까지 언급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 하면 그것이 믿음의 용도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강하게 자신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믿음은 구원하고 율법은 정죄한다.’ 바울은 우리를 정죄로 이끄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는 모두 율법을 어겼으며, 아브라함에게 필요했던 것, 즉 믿음으로 얻는 의,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
“누구든지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바르게 소개할 수 없다. 율법은 구체화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 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이다.”(실물교훈, 128)

<부가설명> 위에 인용된 화잇 여사의 기록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같은 내용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구체화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 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이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 아닌가. 결국 율법은 복음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다. 사람이 속죄를 위하여 짐승을 죽일 때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구주가 대신 죽으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구주가 이렇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짐승을 속죄 제물로 드리는 율법의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을 드리는 행위가 없으면 구주의 대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짐승을 속죄 제물로 드리는 그 율법의 행위 자체가 의가 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다. 마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은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오해 등은 다 복음을 오해하는 것이다.
롬4:17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브라함은 창조의 하나님과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다. 창조좌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사람의 행위가 끼일 자리가 결코 없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성경은 구원과 의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사45:8)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행위가 끼일 자리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 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단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사는 방식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삶이다.

교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하며 나라를 약속받았다. 따라서 구원의 약속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다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수요일(7월 28일) 율법과 믿음

어제 살펴 본 것처럼 바울은 구원이 율법이 아닌 은혜의 약속을 통해서 이르러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메시야를 통해 성취된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된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이방인의 종교의 기초에 놓여 있다. . . . 이런 원칙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은 죄를 막을 방벽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시대의 소망, 35~36)

❶ 위에 인용된 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자는 죄에 노출되는 것입니까?
답: 죄악으로 기울어진 인간의 본성은 의로워지려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본성을 가리고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거짓된 삶은 죄에 더 치명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❷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갈 3:21~23.
[갈3:21~23]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답: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렇지만 율법이 약속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기 위해 율법이 모든 사람을 그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였다.

만약 생명을 줄 수 있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법도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율법을 어겼으며, 그것의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완전하게 드러난 믿음의 약속은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주었다. 여기서 율법의 얽매임이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노력함으로 율법의 저주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믿음과 은혜 없이 제시된 율법은 하나의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혜,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 없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은 곧 죄의 짐과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그 진정한 품성 그대로 보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믿음으로 마음에 성령을 받아들일 때 곧 영생이 시작된다.”(시대의 소망, 388)

<부가설명> 하나님은 입법자이시다.(약4:12) 입법자가 폐하지 않은 율법을 준법자들이 폐할 수 없다. 성경이 구원과 관련되어 계시한 율법은 그것이 의문(儀文)의 법이든지 도덕법이든지 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길로 안내한다. 도덕법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여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예수 안에서 도덕적으로 율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의문의 법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 지를 가르쳐준다. 곧 성소봉사나 절기 제도나 기타 모든 의문의 법들이 다 구주가 이루실 구원의 구체적인 방법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구원하시려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 노력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예수의 도움을 받아 자기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죽은 자인 것을 깨닫고 시인하면 그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뢰할 수밖에 없다. 자기는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면 그 생명이 나를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한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기쁘게 외친 것이 바로 갈2:20이며 빌2:13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멘.

교훈: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이 오히려 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율법 아래 있으면 죄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목요일(7월 29일) 율법과 죄

우리는 종종 성경절까지 인용하며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그렇게 건전하거나 신학적이지 않다.

❶ 요일 2:3~6, 3:4 그리고 롬 3:20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들은 율법과 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요일2: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답: 죄를 짓는다는 것은 결국 법을 어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고, 율법의 정신이 그분의 품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몇 백 년 전 아일랜드인 조나단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만약 ‘음주’, ‘사기’, ‘절도’,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영어와 모든 사전에서 제하기로 의회에서 결의했다고 치자. 그러면 다음 날 아침 우리 모두가 온화하고, 정직하며, 의롭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깨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타당한 절차인가?”(Jonathan Swift, A Modest Proposal and Other Satires,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5, 205.)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어떻게 거짓과 살인과 절도를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의 법이 변경되었다면 죄의 정의도 변경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죄 역시 폐지되어야 하는데,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요일 1:7~10, 약 1:14~15 참조)
신약은 율법과 복음을 모두 다루고 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복음은 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약 법이 없다면 죄가 없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율법이 존재해야 구원이 효력이 있으며 복음이 의미 있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가 율법을 폐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는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전에 율법을 폐지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었다면, 이후에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다. 왜 인류가 범죄한 직후 율법을 폐지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십자가 이후가 아니라 십자가 이전에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사실 십자가처럼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율법이 변경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만약 율법이 변경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구약과 신약은 대립하지 않음
“구약시대에 제시된 의의 위대한 표준은 신약시대에서 낮춰지지 않는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다.”(믿음과 행함, 52)

<부가설명> 기독교의 독선 중에 하나가 바로 죄를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이 십계명에 없고 일반사회법으로만 있다면 도적질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만 도적질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인가? 법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든지 세상의 법이든지 그것을 범하면 죄가 된다. 그런데 세상의 도덕적 법을 어기면 세상의 법률에 따라 벌칙을 당할 것이다. 그는 벌을 받아 죄 값을 치르고 나면 도덕적으로 지은 죄에서 놓이게 되어 더 이상 전에 지은 죄로 죄인취급을 받지 않는다. 죄 값을 갚았기 때문이다. 비단 도덕적인 죄 뿐만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죄를 지은 사람이 법이 정하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전에 지은 죄가 더 이상 그를 주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도덕적 계명을 정말 지킬 수 없다는 말인가? 정말 마음을 다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위하지 않을 수 없는가? 우상을 만들지 않고 절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르지 못한다는 말인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에 너무 세뇌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부모에게 목숨을 다하여 효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물론 마음으로도 살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간음하지 않으며, 도적질 하지 않으면 사기하지 않으면 주려고 할지언정 탐내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무소유를 부르짖으며 자기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그들이 그렇게 세상의 도덕이나 성경의 십계명이나 정말 마음을 다하여 다 지키면 그는 죄인이 아닌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정직하게 냉정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도덕적 계명을 마음으로나 행동적으로나 완벽하게 지키면 죄인이 아닌가? 죄는 불법이니까 전혀 불법을 행하지 않으면 정말 죄인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죽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계명을 지키고, 예수께서 세상에 사실 때 행하신 것처럼 선을 행하였다고 해도 사람은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증거이다. 사형수라는 말이다. 사람이 죽게 된 그 상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율법에 대한 말을 하고 은혜에 대한 말을 하고 율법을 지켜도 의를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의미를 율법을 범하느냐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론에서 찾으면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두드리는 꼴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론을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변하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이미 죽은 자인데, 산 자라고 생각하고 이론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인간의 실상을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아담 안에서 다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타령만 하면 복음을 모르게 된다. 복음은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썩지 않는 산 행위를 할 수 없다. 죽은 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아무리 잘 지켜도 그것이 그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한다. 그의 죽음은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죽음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예수 안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자기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리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완전히 옮긴 것이다. 그는 이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새 생명으로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능력이다. 우리는 복음의 실상으로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변죽만 울리지 말자.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에 속지도 말자. 성경이 계시한 그것을 성경이 해석하는 대로 깨닫자.
교과의 저자는 로마 4장에 밝히고 있는 의의 정의를 간과하고 설명하지 않고 지나간다. 이 구절을 잃어버리면 의를 어디까지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수님이 완전히 지켜 이루신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우리에게 전가시킨다는 사실에 멈춘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는 의, 곧 하나님의 의, 믿음으로 얻는 의는 율법을 지켜 이룬 사실 이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부활로 드러낸 생명, 그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으면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고 그 생명으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화이다.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바로 의를 얻는 것임을 밝힌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부활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가 아무리 계명을 완전히 마음으로부터 순종해도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는 사망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를 예수님의 부활에 맞추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부활의 생명을 얻으면 곧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부활로 말미암는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교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율법을 폐지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금요일(7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388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125~127 “아브라함을 부르심”, 363~364 “율법과 언약”, 시대의 소망, 307~308 “산상수훈”, 608 “논쟁”, 762~763 “다 이루었다.”

“종종 인간의 권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던 계급 제도가 있던 그 시대에 바울은 인간의 형제 관계에 관한 대 진리를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선언하였다.”(사도행적, 238)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아시지 못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당신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0)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만약 사단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의와 공로의 가치를 부여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사단은 그 사람을 유혹을 통해서 정복하며, 자신의 포로와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리뷰 앤 헤럴드, 1889. 9. 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이해는 어떤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까? 이런 개념을 잃은 자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왜 죄인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까?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죄인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빚을 갚을 수 없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을 때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자기가 아직 살아 있자고 생각하고 오직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는 능력을 예수께 구하여 그 능력으로 선을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구원의 믿음도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확실한 답을 성경에서 얻어야 한다.

2. 율법과 그에 대한 순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다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망의 종이다. 그래서 순종할 생명이 없다. 그러나 그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으면 생명을 얻기 때문에 그 생명의 본성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계명을 지키게 된다. 그것은 마치 배고프면 음식을 찾는 것처럼 예수의 생명이 계명을 지키게 한다. 그것이 바로 생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호의를 베풀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은혜와 호의를 베풀어야 합니까?
*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직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도록 이끄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을 살리려는 성질이다. 사람을 살려주려는 정신으로 살지 않는 자는 아직 사망에 있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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