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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칭의와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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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7-22 11:25 조회4,9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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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칭의와 율법
7월 31일
일몰: 오후 7시 42분

도입)
미국 이민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게 쿠바사람들에게만은 전혀 다른 이민법을 적용하고 있다. 쿠바 이외의 나라 국민이 비자 없이 미국 땅을 밟으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또한 범법자가 되어 이민국직원에게 잡히면 추방될 수 있다. 그러나 쿠바인은 미국 땅을 밟기만 하면 미정부에 의해 영주권이 합법적으로 주어진다. 불법으로 입국한 그들에게만은 영주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급된다. 정치적인 이유를 다 말씀드릴 수 없겠지만 아주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들에게는 조건과 시간적 제약이 필요가 없다. 오직 미국 땅을 밟는 순간 영주권자이다. 바다에 떠 있으면 안된다. 반드시 미국 땅을 한 발이라도 밟고 있어야 한다. 칭의란 바로 이런 것과 같다. 성숙해서 주어지는 것이 칭의가 아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서 불려지는 것이 칭의가 아니다. '의롭다 여기심'이란 하나님 마음대로 이시다.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 나라가 미국 정부에 대해 왜 쿠바만 예외 입니까?라고 말할 수 없다. 영어를 한마디 못하더라도, 미국 역사를 전혀 모르더라도, 미국 지리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 분들에 대해 시비 걸사람 아무도 없다. 그 분들은 미국 땅 어느 구석, 어느 모퉁이만 밟아도 바로 그 순간, 영주권자이다. 쿠바는 아시는 대로 공산국가이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다. 미국 땅을 밟아 미국 영주권자로 되는 순간 사고의 시스템이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야 편안하다. 그래야 행복하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땅에 밟았으면서 쿠바에서 살던 대로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이상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남아있다.

기억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 반장은 친교와 선교를 위해 안교활동반을 꼭 실시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15:6, 삼하 11~12장, 롬 3:20~23, 31, 4:1~17, 갈 3:19, 요일 3:4.
로마서 4장은 여러 방식으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성서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바울은 경건과 덕행의 귀감이 되는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로마서 4장을 읽는 독자는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최고의 인물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의롭게 할 수 없었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아브라함이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면,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구원의 계획을 다음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혜), (2) 약속에 대한 인간의 반응(믿음), (3) 믿는 자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칭의).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바울은 누누이 구원은 은혜라고 강조한다. 구원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 우리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의무를 갖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빚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여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으로 선물이어야 한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바울은 곧장 창세기 15:6로 간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일요일
7월 25일
율법을 세움

도입)
시내 산에서 발해진 율법의 원칙이 얼마나 원대하게 미친다는 점을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교훈 중에 나타내 보이셨다. 그 율법의 원칙은 의의 큰 표준-곧 책들이 펼쳐지고 심판이 베풀어질 그 큰 날에 그 원칙에 의해 모든 것이 판단될 표준-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인류의 머리로서 의를 이루고, 또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는 일에 인간도 그분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이시려고 오셨다. 여호와의 율법은 나무이고 복음은 향기로운 꽃이요 열매이다. (1기별 211, 212)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다. 이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표시한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여있는 그 영광스러운 장래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만 실현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품성이 고상하게 되는 것이나 충만한 축복-곧 영과 혼과 몸에 대한 축복, 집과 밭에 대한 축복-은 오직 순종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실물 305)

❶ 롬 3:31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재림교인들에게 얼마나 중요 한 문제입니까?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구약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항상 일치 되어 있었다.

❷ 롬 4:1~8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구약에서도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었음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간주되었다. 구약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율법을 폐했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소의 모든 제사들은 죄인이 자신의 행위가 아닌, 대속물의 죽음으로 구원받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밧세바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후에 용서를 받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분명 그를 구원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율법의 여러 원칙들을 범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이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으려고 했다면, 그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다윗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한 사례로 제시하였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지만, 사실 유대교는 언제나 은혜의 종교였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왜곡된 형태였을 뿐, 율법의 기본 정신이 아니었다.

교훈: 구약은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다.

부가적용)
율법은 하나님께 제정하시고 인간에게 지키도록 주신 것이다. 더욱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 속에서도 내재되어 있도록 하시어 그 마음에 양심 속에서도 통제될 수 있는 법이 되도록 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며 그분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 성소 속의 지성소에 들어있던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십계명이 들어 있었다. 십계명은 모든 인간이 영원히 지켜야 하고 존중해야 할 구속력을 가진다. 이 십계명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모든 인간이 지키고 가져야 삶의 원칙이자 도덕률이며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할 참된 품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만,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본성적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기에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그 심령이 부패하여 있고 인간은 그 본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기에 매우 약화되었다. 인간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며 우리의 의의 표준이시며 우리의 의의 참 모습이시다. 십계명 즉 율법을 제정하시고 만드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그분의 높은 율법적 요구를 아무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포기와 죽음이 필요하다. 오직 우리의 의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는 절대적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바라보고 우리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바로 모든 인간은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에 대한 인식과 함께 우리 자신이 율법의 의를 이루려는 종교적 노력에 대한 포기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월요일
7월 26일
은혜인가? 빚인가?

도입)
우리는 일, 땀, 노력, 행동에 가치를 둔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일 윤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훌륭한 윤리이다. 그러나 단 하나, 이것이 유발할 수 있는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점을 적용하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도 원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실 때,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일로 또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의 윤리적인 잣대로 우리와 관계를 맺지 않으신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또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하시는 모든 것,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이 값없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얻지 않는다. 우리는 받을 자격도 없고, 또 우리가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해서 얻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일 뿐이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복 주신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 그 이상이다. 바울은 구원의 핵심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용납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하고자 한다면, 그는 칭의와 용서를 받기 이전에 어떤 표준에 도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과 내면만을 살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반면 공로가 없고 합당치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칭의를 선물로 주신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결국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품성을 온전하게 반영할 수 있겠는가? 구원을 얻고자 자신의 품성에 몰두한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초점을 맞춘 사람인가?

❶ 롬 4:6~8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어떻게 확대시키고 있 습니까?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5)
바울은 이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해당됨을 설명한다(롬 4:9~12).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이방인이었다(수 24:2). 그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조상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예를 들어 구원의 보편성을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히 2:9).

교훈: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가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죄는 첫 사람 아담을 통해 현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었다. 죄는 행위(works)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nature)의 문제이다. 삶의 문제가 아니라 태생의 문제이다. 율법주의자들의 오류중 하나는 죄를 단지 행위(act)에 한정하는 것이다. 죄는 행위의 문제 이전에 사람 자체, 본성, 태생의 문제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가 되셨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고후 5:21). 주님께서 우리의 죄들(sins)을 용서하시는 일은 십자가 이전에도 가능했다. 짐승의 피로도 용서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에서 율법 아래서는 ‘죄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죄의 용서만 있을 뿐 죄의 제거는 전혀 불가능했다. 죄는 주님의 죽으심과 피로만 가능한 것이다. 아담의 죄는 세상에 들어왔다. 예수님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죄 즉 “세상 죄를 제거”하러 오셨다(요 1:29). 죄가 태생, 본성, 본질 사람 자체의 문제란 점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계시되었다(시 51:5) 율법 아래 살았던 다윗은 죄가 태생의 문제요, 본성의 문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흔히 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만(요일 3:4) 죄는 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있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가 들어온지 2,500년이 지나서였다. 율법은 왜 셈이나 노아를 통해 주어지지 않고 모세를 통해 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주어진 것일까? 성경은 그 이유를 죄를 더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율법은 본래 있는 죄를 더욱 죄가 되고, 죄를 더해 주기 위해 주신 것이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롬 5:20).

화요일
7월 27일
언약과 율법

도입)
인간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다. 하나님의 품성은 변개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언약은 보증한다.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며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조건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르시기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눅 10:27, 28) (주석 932) 하나님의 율법은 당신의 친 손가락으로 돌배에 새겨졌기 때문에, 결코 변개되거나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영원한 세대를 통하여, 불변하는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으로서 보존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인간들이 진리를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힌 그분의 은혜의 능력이다. (부모 248, 249)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이 말씀에서 “언약”과 “율법”은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약적 배경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을 예로 선택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의롭게 여겨진 것은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라고 하시며 아브라함과 언약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다. 즉 그것이 요구하는 역할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용납하셨고, 그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 이것은 은혜가 구약시대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며, 바울이 아브라함을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은 예로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❶ 롬 4:14~17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구약의 핵심 주제라 는 논리를 어떻게 전개 시키고 있습니까?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이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다. 유대인 신자들은 구약의 율법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구원이 율법의 준수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 그것은 구약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기 전, 즉 모든 율법과 제사 제도가 수립되기 전에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음을 주장하였다.
설령 바울이 시내산 경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도덕법의 원칙까지 언급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려 하면 그것이 믿음의 용도를 폐기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강하게 자신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믿음은 구원하고 율법은 정죄한다.’ 바울은 우리를 정죄로 이끄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는 모두 율법을 어겼으며, 아브라함에게 필요했던 것, 즉 믿음으로 얻는 의,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교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하며 나라를 약속받았다. 따라서 구원의 약속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다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부가적용)
언약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다윗이 여호와의 율례를 범하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삼하 22장의 그의 노래에서 그는 여호와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된 고백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뢰하고 회개하고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는 자를 돌이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순종 때문에 열국이 복종하고 열방의 보화가 그 왕국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율법지킴 즉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 때문에 그 후손에게 여호와께서 인자를 베푸심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다윗 이후의 왕들은 다윗의 길로 갔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로 평가한다. 다윗의 길을 따른 자들은 율법을 순종하고 지킨 자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이며 의의 법이다. 율법은 폐할 수 없다. 다만 죄지은 인간이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의 용서의 언약이 있고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하실 언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서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를 순종치 아니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곧 그들은 저들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회개한 다윗의 길로 걷지 아니함으로 멸망한 것이다.(왕하17장)

수요일
7월 28일
율법과 믿음

도입)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법을 격하시키려고 애쓰는 다음과 같은 변론을 듣는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 이상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일까? 성경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인가? 이것에 관한 성경절이 로마서 6장14,15절에서 발견된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쉽게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까! 바울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라는 말이다. 그의 대답에 유의해 보면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오해함으로써,“은혜아래 있으니 율법을 범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였는데, 바울은 이를 심히 염려하였기 때문에 덧붙여서 설명하기를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가장 강력한 언어로 바울은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을 범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은 바울의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 만일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율법 아래 있지 않고”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 그는 로마서3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있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법을 범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그들은 법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법에 의해 정죄 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요 은혜의 능력 아래 있는 것이다. 계속 되는 그의 논증에서 바울은 은혜의 능력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진리를 지적한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케 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주는 죄책감과 그 정죄 아래 있지 않는 이유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인 것이다.

어제 살펴 본 것처럼 바울은 구원이 율법이 아닌 은혜의 약속을 통해서 이르러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메시야를 통해 성취된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신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는 모든 자들에게 해당된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원칙은 모든 이방인의 종교의 기초에 놓여 있다. . . . 이런 원칙이 신봉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은 죄를 막을 방벽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시대의 소망, 35~36)

❶ 위에 인용된 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자는 죄에 노출되는 것입니까?

❷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갈 3:21~23.

만약 생명을 줄 수 있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법도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율법을 어겼으며, 그것의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완전하게 드러난 믿음의 약속은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주었다. 여기서 율법의 얽매임이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노력함으로 율법의 저주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믿음과 은혜 없이 제시된 율법은 하나의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혜, 그리고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 없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은 곧 죄의 짐과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훈: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이 오히려 죄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율법 아래 있으면 죄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부가적용)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깨끗함을 받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법이 필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정결케 하는 예수의 십자가로 다시 인도해 주는 율법의 감시가 항상 필요한 것이다.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올바른 위치로 잡아주는 거울의 역할이 항상 필요로 느껴질 것이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경쟁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협력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해 준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 둘의 참다운 관계를 잘 배합시킨 아름다운 성경구절이 계시록 14장 12절 이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 믿음과 행함에 대한 얼마나 완전한 묘사인가? 믿음과 행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성도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목요일
7월 29일
율법과 죄

도입)
한국은 물론, 미국같이 풍요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마저 기본적인 도덕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떠날 수 있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오히려 어떤 비기독교 국가들이,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공언하는 국가들보다 훨씬 그 범죄율과 폭력들이 적은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 하게 된다. 워싱턴 D.C.에 하루 24시간 동안 보고되는 범죄들이 공산치하 당시의 모스크바에서 일 년 동안 보고되었던 범죄보다 많다고 한다. 물론 보고하는 방식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법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정신 자세가 종교의 영역에까지 침범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에 사는 교인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중에서 하나쯤이야 범하는 것이 어떠냐는 사고방식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 율법의 권위를 약화 시키려고 하는 은근한 가르침들이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신학에서 개발되어 왔다. 그러한 교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를 가볍게 보게 하며 죄를 별로 탓할 것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는 그 흉악성을 잃게 되었고, 젊은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할 것 없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의 흐름과 생활방식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을 피할 은혜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궤변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십계명을 조금이라도 변개하거나, 무효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놀라운 은혜는 구주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신다. 인간이 타락한 후라도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와 은혜는 분리할 수가 없다. 이 둘은 모든 면에 있어서 서로 밀접하다. (믿음으로 산다 89) 신약성경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 표준을 낮춘 구약성경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요구하신다. (6주석 1072)

우리는 종종 성경절까지 인용하며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그렇게 건전하거나 신학적이지 않다.

❶ 요일 2:3~6, 3:4 그리고 롬 3:20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들은 율법과 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 아일랜드인 조나단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만약 ‘음주’, ‘사기’, ‘절도’,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영어와 모든 사전에서 제하기로 의회에서 결의했다고 치자. 그러면 다음 날 아침 우리 모두가 온화하고, 정직하며, 의롭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깨어나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타당한 절차인가?”(Jonathan Swift, A Modest Proposal and Other Satires,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5, 205.)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어떻게 거짓과 살인과 절도를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의 법이 변경되었다면 죄의 정의도 변경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면 죄 역시 폐지되어야 하는데,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요일 1:7~10, 약 1:14~15 참조)
신약은 율법과 복음을 모두 다루고 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복음은 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약 법이 없다면 죄가 없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율법이 존재해야 구원이 효력이 있으며 복음이 의미 있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가 율법을 폐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는 율법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전에 율법을 폐지하거나 변경시킬 수 없었다면, 이후에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다. 왜 인류가 범죄한 직후 율법을 폐지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십자가 이후가 아니라 십자가 이전에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사실 십자가처럼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율법이 변경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만약 율법이 변경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교훈: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율법을 폐지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이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부가적용)
우리는 율법에 관한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많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은 행위의 시대이며,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구원하기 위한 완전하고 아름다운 한 가지 계획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하늘은 행위로 구원받은 자들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영혼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들일 것이다. 구약시대에 구원을 받은 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한 자들로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흠 없는 양을 성소로 가져가서 죽이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앞으로 있을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는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타락한 생애로 자기 영혼 속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혀 온자는 인간적인 노력으로써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인간은 복음에 제시된 계획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당신의 율법을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그 인간의 생애는 새로운 원칙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어린 양의 보혈로 품성의 두루마리를 씻고 죄를 멀리 해야 한다.”(4증언 294, 295)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하게 하는 것이 복음사업이 아니고 도리어 그 교훈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인류를 두는 것이 그 사업이다. (6주석 1073)

금요일
7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388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125~127 “아브라함을 부르심”, 363~364 “율법과 언약”, 시대의 소망, 307~308 “산상수훈”, 608 “논쟁”, 762~763 “다 이루었다.”

“종종 인간의 권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던 계급 제도가 있던 그 시대에 바울은 인간의 형제 관계에 관한 대진리를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선언하였다.”(사도행적, 238)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아시지 못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당신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40)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만약 사단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의와 공로의 가치를 부여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사단은 그 사람을 유혹을 통해서 정복하며, 자신의 포로와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엘렌 G. 화잇 언급, 리뷰 앤 헤럴드, 1889. 9. 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이해는 어떤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까? 이런 개념을 잃은 자에게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2. 율법과 그에 대한 순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 실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다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3.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호의를 베풀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함부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은혜와 호의를 베풀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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