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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퀴즈로 풀어보는 즐거운 교과공부(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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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은혜로사는이 작성일10-01-20 01:27 조회3,7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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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성령의 열매인 화평
1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5분)

기억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연구범위: 마 8:23~27 11:28~29, 롬 5:1~11, 12:9~21, 골 3:13~15, 히 12:14.

<금요일 밤에 다음 날 있을 질문내용을 미리 프린트해서 반생들에게 나눠주고 준비하게 하면 안식일 아침 보다 준비된 마음에서 충실한 안교 토의를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된 교과지도서는 가끔 주중에 전화를 걸어 반생들에게 발표를 부탁할 수도 있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찬미가> 찬미를 부를 수 있는 환경이면 찬미가를 시작하고 교과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지고 반생들이 교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548장 주 날개 밑>
1. 주 날개 밑 내가 편하게 있네 비바람 거세고 어두워도
주께서 나를 잘 지킬 줄아니 겁 없이 평안히 거하리라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내 슬픔 잊을 길 세상에 없되 주 안에 안위함 얻으리라
3. 주 날개 밑 귀한 희락이 있네 생전에 걱정 다 지나도록
그곳에 숨어 돌보심을 받고 주 안에 거하여 쉬리로다
<후렴>
주 날개 밑 즐겁도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편히 쉬며 영원히 거하겠네


<복습퀴즈>
1. 성령의 열매는 한 나무에 9개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과 같다.
(답) X
(해설) 총론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성령의 열매는 단수(單數)로서 한 나무에서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에 9가지의 맛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성령의 열매는(the fruit of the Spirit is)…”이라고 성경에 적혀있다. 위와 같이 열매(fruit)도 단수이고, be동사도 is로서 단수이다.

2. 하나의 열매에 여러 맛이 나는 과일이나 물건이 있을까요?
(답) 많은 반생들이 제주도에서 나는 오미자차를 일례로 들었다. ‘새콤달콤’, ‘매콤달콤’이란 말도 두 가지의 맛이 하나에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의 맛은 이런 맛보다 더 복잡해서 ‘새콤달콤매콤시콤...x 9.’이런 맛이라고 하겠다.

3. 성령의 열매 9가지 (맛)이 적혀있는 성경절 갈5:22-23을 암송해봅시다.
(갈 5: 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4. 성령의 열매가 한 가지이고 그 안에 9가지의 맛이 있다면, “성령으로 열매를 맺은 사람은 사랑은 있지만, 기쁨은 없거나, 화평은 있지만 인내가 없거나, 친절은 있지만 충성은 없는 일도 가능하다”
(답) X
(해설) 옛날에 9마리의 코끼리 인형을 매우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쭉 붙여놓은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중에 몇 개가 떨어져 나가 다섯 개 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보니 보기에도 좋지 않고 잃어버렸을 때 빨리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붙여놓았으면하는 후회가 생긴다. 성령의 열매는 단수이기 때문에 어쩌면 9개의 각기 다른 코끼리가 한 장소에 붙어서 한 작품을 이룬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맛으로 따지자면, 그 열매의 맛은 9개가 하나의 패케지로 나타난다. 9가지 중에 하나 혹은 그 이상 몇 개를 제외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9가지를 모두을 빠뜨리지 않고 패케지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면, 이 9가지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안식일 오후>
1. 사도바울은 평안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답) X
(해설1) ‘힘써’라는 표현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즉 평안을 위한 열심과 분투가 필요하다.
“평안의 챔피언이었던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기록했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는 명령형으로 어떤 수동성이나 ‘기다려 보자’는 태도를 배제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엘리너 루즈벨트(Eleaner Roosevelt) 여사는 ‘미국의 목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평안은 부단한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교재 안식일 소지)

2. (도입퀴즈) 성경에 ‘평화’를 불러오게 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1) 아비가일 (삼상25장): 남편의 음식거절로 대노하여 온 가문을 치러 온 다윗을 아름다운 말로써 화를 누그러 뜨린 여인임. 이에 대한 감화로 나중에 다윗의 아내가 된다.
“꽃 향기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여인의 마음에 거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부조 667)
(2) 그 외의 인물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일요일(1월 17일)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롬 5:1)

1. <도입퀴즈> 마태복음 5:9장의 팔복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________________”에서 빈칸에 알맞은 말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2)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3)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4)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답) (1)
(마5:7-1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해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사야 9장 6절)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장 1절).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된다.“ (보훈 27)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 (도입토의) 주님께서 주시는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있어야 할까요?
(참으로 많은 답이 나올 수 있으나 이 모든 대답이 오늘 토의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토의사례에 대한 내용을 가능한 하나씩 성경구절이나 예언의 신의 내용중 관련있는 것을 같이 게재합니다.)
(토의사례1) 구원의 확신을 통해
“최근에 출애굽기 12장을 ‘유월절’관련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월절 당일 밤, 여호와께서 각 가정의 장자를 치러 오셨는데 장자(長子)가 죽고 죽지 않고의 기준은 바로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제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한 어머니가 되어 우리 큰 아들을 꼭 안고 그날 밤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있는 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유월절 다음날 밤 애굽 전체에는 장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울음소리가 넘쳤지만 우리 집은 이 피 때문에 모두가 무사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도 다름아닌 예수님의 피로 받는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자, 구원을 어렵고 무겁게 생각했던 저에게 평안이 다가왔습니다.” (참조)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토의사례2) 회개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가 회개를 하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나타낸 시편이 바로 32편 아닙니까? (시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하지만 그가 죄를 회개하였을 때 그는 같은 장 5절에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 생각은 화평을 누리는 방법 중의 하나는 회개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실 때에 회개한 영혼에게서 새 노래가 터져 나온다. 이는 자신의 경험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그의 허물과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인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나타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롬 5:1) 얻었다.“ (행적 47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을 때이다. 어떻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가? 돈으로나 참회와 단식의 고통을 통해서는 안된다. 루터는 죄 용서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로마교황청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였다. 롬 5:1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여기에 비밀이 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누구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가질 수 없는데 오직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때에 변화가 된다. 그리고 참된 평안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조춘호 목사님)

(토의사례3) 남을 용서해줌으로써 화평을 누려야 한다.
“용서가 없다면 죄인인 우리들에게는 평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후회하고 회개한다고 하여도 용서가 없다면 회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를 제거하여 준다. 왜냐하면 분쟁을 완화시켜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과 같이 내릴 것이다.” (보훈 27)

(토의사례4) 근심 걱정을 주께 다 맡겨 버렸을 때 화평이 온다
“부모에게 있어 자녀가 항상 두려워하고 근심이 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한 목사님의 예화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한 자녀가 있었는데 밤에 자지 않고 끙끙 앓길래, 왜 그러니 하고 물으니 ‘내일 엄마가 나에게 밥을 주지 않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어이가 없는 엄마는 ‘아니 애야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가 왜 사랑하는 아들에게 밥을 안주니.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잠을 푹 자렴.’ 하지만 아이는 이 말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끙끙거리며 걱정을 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닌가? 오늘날 우리도 혹시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분명히 걱정을 하지 말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요14:27) 그런데도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걱정을 한다. 그렇다면 지금 말한 아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하루동안에 없어지는 단순한 꽃에게도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채로 단장하게 하셨거든 하물며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위하여서야 얼마나 더욱 크게 돌보실 것인가? 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염려하는 생각과 번민과 의심을 책하는 견책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행복되고 화평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삼상 7:12)으니 그는 또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 (정로 124)

(토의사례5)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쉼이 있다.
“잘 아시는 유명한 예화인데요, 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갔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시골길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다 지나가는 소 달구지를 얻어 탄 다음에도 할머니는 계속해서 머리에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마부는 의아해 생각하고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할머니 왜 짐을 안내려 놓습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달구지 얻어 타는 것도 미안한데 이 짐까지 내려놔서야 되겠능교?’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예화는 우리가 예수님께 짐은 내려놨다고는 하나, 완전히 내려 놓지 못한 모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100% 순종을 못하는 모습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시대의 소망, 34편 ‘초청’이라는 글에 보면 완전한 순종에는 완전한 쉼이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이기적인 일에 뜻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은 절대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예수의 보호하심에 영혼을 맡기고 또 그의 명령하심에 생애를 맡기는 자들은 평강과 평온함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임재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실 때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못한다. 완전한 순종에는 완전한 쉼이 있다. 주께서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생애가 복잡해 보일지 모르나 우리가 슬기로우신 대명장(大名匠)께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이 될 생애와 품성의 본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시소 331)

(토의사례6)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면 평안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려운 표현이다. 일생에 거쳐 우리가 곱씹어보아야 할 말씀이다.)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에 예수의 마음, 곧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겸비하게 하도록 이끈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 때에야 우리는 가장 높은 지위를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서 그를 배우려 할 것이다. 우리의 사업의 가치는, 과시하거나 유명하게되며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고 열성을 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업의 가치는 성령의 나누어 주심에 비례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심지(心志)를 더 거룩하게 하여 인내할 수 있게 한다. (소망 330)

3. 하나님과의 화목은 나무가 자라듯 조금씩 증대되는 것이다.
(답) X
(해설) 처음에는 단번에 이루어지나 일단 이루어진 다음에는 점차 증대되게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화평은 작게 시작하여 조금씩 커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은 점점 증대되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교재 일요일 소지)

4. 로마서 5장의 칭의-평화에 대한 문제
(1) (기초문제) 그러므로....화평을 누리자에서 그러므로라는 뜻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답) X
(해설1) "그러므로"라는 말은 이제까지 로마서 4장에서 말했던 칭의를 뜻하며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또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전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지만,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는 화해가 되었고 화목하게 되어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해설2)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골 1:21)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화목한 관계를 회복했음을 뜻한다.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불화하였고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교재 52 상단)

(2)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십자가에 못밖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셨는데(칭의), 이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답) O
(해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인 칭의를 우리가 받았는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하나님과 화평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함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사명이며 우리의 삶의 모습 중에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3) 바울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는 자는 평소에 즐거워하는 정도를 뛰어 넘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답) O
(해설) 환난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가져다주고 걱정을 주고, 불안하게 하는 것이지만 칭의로 의롭게 함을 얻은 우리는 환난이 와도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기 때문에 그환난은 인내를 길러주고 연단해서 오히려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전에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할 때는 그 모든 환난들을 자신이 감당해야 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환난과 그 환난을 일으키는 모든 주변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화목한 자인데 사탄이 우리를 해하거나 우리를 다치게 하고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떠한 환란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이며 그의 얼굴에는 늘 즐거움이 가득하고 그의 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된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합니다.

(4)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 중의 하나는 그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방황하는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켜 주신 것이다.
(답) O
(해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채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이의 속죄를 위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은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연약함으로 죄 가운데 있다는 인정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화평이 보장된다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할 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용서 못할 죄가 없으며 따라서 누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아야 한다.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월요일(1월 18일) 평안을 발견함 - 1 (마 11:28~29)

1. <도입퀴즈> 시대의 소망 34장 ‘초청’에서 뽑은 몇 가지 문제
(1)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만 제거할 수 있는 짐에 억눌려 있다.
(답) O
(해설) “모든 사람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피곤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만 제거할 수 있는 짐에 억눌려 있다. 우리가 진 가장 무거운 짐은 곧 죄의 짐이다. 우리가 이 짐을 지도록 그대로 버려진 바 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눌러 박살을 낼 것이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고단한 어깨에서 짐을 가져가실 것이다. 그리고 쉼을 주실 것이다. 그는 염려와 슬픔의 짐도 지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근심을 당신께 벗어 놓으라고 초청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를 기억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소 328)

(2)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약점과 필요를 경험을 통하여 아신다.
(답) O
(해설) “우리 인류의 맏형님께서는 영원한 보좌 곁에 계신다. 그는 구주가 되시는 당신께 얼굴을 돌이키는 각 사람을 바라보신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약점과 필요가 무엇이며 어디에 시험을 대항할 힘이 있는지를 경험을 통하여 아시는 바 이는 그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무서워 떠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대를 지켜보신다. 그대는 시험을 당하고 있는가?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 그대는 연약한가? 그가 힘을 주실 것이다. 그대는 무지한가? 그가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대는 상처를 입었는가? 예수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며 또한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 147:4, 3)신다. 그의 초청의 말씀은 “내게로 오라”는 것이다. (시소 328)

(3)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더욱 강하여질 것이다.
(답) O
(해설) “걱정과 시련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그대의 사정을 주님 앞에 내어 놓으라. 그대의 마음에 참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며 곤경과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자신이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대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더욱 강하여질 것이다. 그대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것을 짐지시는 그리스도에게 맡김으로써 더욱 편안한 안식의 축복을 얻을 것이다.” (시소 329)

(4) 예수께로 가면 우리는 전혀 멍에를 매지 않아도 된다.
(답) X
(해설) “예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는 봉사의 도구이다. 일하는 가축에게는 멍에를 메우는데 이 멍에는 가축이 효과적으로 일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실례를 들어 생명이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봉사를 위하여 부름을 입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예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하여 그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시소 329)

(5) 세상의 표준을 도달하려다 보면 품성은 훼손을 당하고 곤고할 수 있게 된다.
(답) O
(해설) “세상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애씀으로써 근심의 짐에 눌려 상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섬기기로 택하였고 세상의 괴로움을 받아들였으며 그 관습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품성은 훼손을 당하고 생애는 곤고하게 된다. 그들은 야망을 만족시키고 세속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양심을 상하게 하여 가책의 짐을 얹어 짊어진다. 끊임없는 근심은 생명력을 약화시킨다. 우리 주께서는 그들이 이 속박의 멍에를 벗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받으라고 그들을 초청하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시소 330)

2. 먼저 회개하여야 만이 그리스도에게 나갈 수 있다.
(답) X
(해설) 회개는 구주께 돌아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며 참된 회개는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그리스도께서 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저들은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회개는 저희 죄의 사유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가 죄의 사유보다 먼저 있을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구주의 필요성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만이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회개가 죄인과 구주 사이의 한 장애물이 되어야 할 것인가? 성경은 죄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려면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아니한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덕이다. 베드로는 다음에 기록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한 그의 말 가운데서 이상의 말의 뜻을 밝히 드러냈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 “25)

3.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서 쉬게 될 때 우리는 투쟁을 위한 힘을 얻게 되며 우리의 수고와 걱정을 감소시키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답) O
(해설) “우리는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아 2:3)다는 말의 의미를 더욱 완전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말들은 급한 변화의 모습을 우리의 마음에 주지 않고 조용한 안식을 준다. 걱정하며 억압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 바쁜 활동으로 너무도 꽉 짜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조용히 휴식할 시간을 찾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 마치 평안과 안정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다. 그런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초청하신다. 먼지나고 뜨거운 생애의 큰 길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그늘에서 쉬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투쟁을 위한 힘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수고와 걱정을 감소시키는 법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말하고 노래하는 법을 배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조용한 신뢰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분의 평화와 안식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그분의 그늘 아래 앉아야 한다. (7증언 69)

4. 사단은 우리의 죄를 들추며 참소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의 자리에 대신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답) O
(해설) “자기 심령의 처참한 빈곤을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의와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대의 궁핍을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과 바꾸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것은 물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도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현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의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소개 시키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간구하신다. 내가 대신 저 죄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하는 이 자녀를 보지 마시고 나를 보아 주십시오. 사단이 죄를 들추며 우리의 영혼을 크게 대적하고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의 보혈은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이사야 45장 24, 25절). (산상보훈 8)


화요일(1월 19일) 평안을 발견함 - 2 (요 14:27)

1. 시대의 소망 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에서 뽑은 몇 가지 문제들
(1) 제자들이 폭풍우 중에서 희망을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예수께서 배 안에 타고 계시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답) O
(해설)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님을 주무시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일생에서 부는 많은 폭풍우 속에서 예수님을 철저히 깨워서 그 분께 이 폭풍이 잠잠하게 되도록 부탁하여야 한다. 주님께 일을 맡겨야 하고 일을 드려야 한다.
“저희 생애를 그 호수에서 보낸 그 강인한 어부들은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그들의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올 수 있었으나 그러나 이번만은 그들의 능력과 기술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태풍에 붙들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고 배가 물에 차는 것을 보자 그들은 희망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데 열중한 그들은 예수께서 선상(船上)에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저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죽음만이 저들 앞에 놓인 것을 깨닫자 저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바다를 횡단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던가를 기억하였다. 그들의 유일의 소망은 예수에게 있었다. 무기력과 절망 속에서 그들은 “선생님이여, 선생님이여!?” 하고 부르짖었다. (소망 334)

(2)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드러나게 된다.
(답) O
(해설) 제자들의 당황스러움은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하늘 아버지께 그들을 위탁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 주위에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마치 무슨 큰 일이 날 것처럼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의 성경구절,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쉬신 것처럼 우리도 구주의 보호 안에서 쉬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를 의뢰하였다면 저들은 평강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당했을 때 저희의 두려움은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예수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자기 의뢰의 절망에서 예수께로 돌아갔을 때 뿐이었다.” (소망 336)

(3) 예수님은 폭풍속에서 깨어났을 때 예상치 못했던 폭풍우를 보고 다소 당황하셨다.
(답) X
(해설) 그 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 분을 요동케 할 수는 없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친 부모보다 더 간절히 돌보시고 계심을 굳건히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그 분은 요동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폭풍을 대하셨을 때 그는 극히 평온하셨다. 예수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말이나 표정에 두려워하시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는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그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소망 335)

(4)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파도와 폭풍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멈춰졌다.
(답) X
(해설) 얼마나 빨리 파도가 예수님의 말에 순종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라는 구절을 볼 때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이 최후의 노력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의 노를 붙잡았을 때 예수께서 일어나셨다. 태풍은 격노하고 파도는 그들을 덮쳤으며 번갯불은 그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예수께서는 자비의 봉사에 그토록 자주 쓰셨던 손을 드시고 성난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셨다. 폭풍은 그치고 큰 파도는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구름이 걷히고 별들은 반짝거렸다. 배는 고요한 바다 위에 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슬프신 듯 이렇게 물으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소망 335)

(5) 갈릴리에서의 파도를 예수만이 잠잠케 했듯이 인생의 폭풍도 예수님만이 잠잠케 할 수 있다.
(답) O
(해설) 사탄으로 말미암은 성난 폭풍을 해결하는 힘은 인간의 힘 밖의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으로 말미암은 인생의 폭풍도 주님의 ‘잠잠하라’라는 명령
“태풍을 잔잔하게 하신 이 이적 가운데는 또 하나의 영적 교훈이 있다. 각 사람의 경험은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57:20, 21)는 성경 말씀의 진리를 증거한다. 우리의 평화를 파괴한 것은 죄다. 자아가 정복되지 않을 때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마음을 지배하는 격정을 다스릴 수 없다. 제자들이 성난 폭풍을 잔잔하게 하는 데 무력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점에는 무력하다. (소망 336)

(6) 예수는 우리의 불신을 책망하셨을 때는 도움도 주지 아니하신다.
(답) X
(해설) “예수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자기 신뢰를 슬프게 책망하시지만 우리가 요청하는 도움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 육지건 바다건 우리가 구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께 대한 산 믿음이 인생의 바다를 잔잔하게 할 것이요,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내실 것이다. 태풍이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주여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으면서 예수께 돌아오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시107:29-30)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2. (토의) 우리 주위에 혹은 여러분의 경험으로 일반사람이 느끼기에 참으로 두려운 상황이지만 이것을 굳건한 믿음으로 이겼던 분들의 사례나 본인의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사례1) “우리 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두 아이가 영육간에 강건하고 안전하게 되길 기도드리옵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심이 확신되었다. 지금 대학생이 되었는데 간혹 그동안 연락도 없이 늦게 집에 들어온다거나 여행 중 연락이 안되었을 때 집사람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몹시나 두려워했지만 나는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이 되어 연락 안된 기간 중 일어난 일을 물어보면,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커다란 보호하심으로 무사하게 있었음이 증명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가 있는 한 다른 아이들도 함께 안전하다. 그러니 당시는 믿음을 굳게 가져라.’라고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흔히 제자들이 겪은 경험을 겪는가! 시험의 태풍이 점점 거세어지고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리며 파도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예수가 계심을 잊어버리고 홀로 폭풍과 싸운다. 우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멸망 직전에 빠질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뢰한다. 그 때에야 우리는 예수를 기억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구하시도록 예수께 요청한다면 우리의 부르짖음은 헛되지 아니할 것이다.” (소망 336)
(사례2) “우리 아이가 학교 캠프를 갔었는데 우리 아이가 속한 조(組)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밤이 되어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상황을 보고하고 기도를 요청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밤에 눈까지 왔다. 집사람은 마치 큰일이나 난 것처럼 무척이나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눈이 온 것은 하나의 커다란 축복이었다. 길을 잃은 조(組)는 교사의 인솔하에 숲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따뜻하고 안전하게 있었으며 모든 지역이 눈으로 덮힌 상황에서 모닥불을 핀 자리는 헬리콥터의 높은 위치에서도 쉽게 분간이 되어 헬리콥터로 쉽게 구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보호하심에도 우리는 왜 그렇듯 쉽게 요동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손을 믿지 못하는가?”
(사례3) “필리핀 AIIAS로 유학가려는 목사님이 계셨다. 요즈음은 필리핀 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나 당시에는 상당히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그 목사님이 필리핀 출발 당일까지도 돈이 마련되지가 않았다. 주위 사람은 무척이나 불안해했지만 하지만 이 목사님의 얼굴은 전혀 요동이 없었다. 결국, 출발 직전에 돈 문제가 해결되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불안해 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라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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