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과 게하시: 과녁에서 벗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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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0-12-10 00:06 조회5,904회 댓글2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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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과 게하시: 과녁에서 벗어남
12월 18일 일몰: 오후 5시 16분
도입)
개미는 눈이 있지만 볼 수 없다고 한다. 설령 볼 수 있다고 해도, 땅 속에서 사는 개미에게는 그러한 눈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미에게는 눈 대신 눈의 역할을 하는 더듬이가 있다. 더듬이로써 어두운 땅 속에서 적인지 친구인지를 구별하고,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이 자기 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뱀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뱀은 귀 대신 혀를 날름거려 모든 상황을 판단하며 움직인다. 벌은 날개 짓을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여러 감각 기관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꿀을 찾으며, 그 일대의 꽃밭에 꿀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까지 알아낸다고 한다. 이처럼 짐승과 곤충들에게는 감각 기관이 있다. 그들은 혀나 귀나 더듬이를 통해서, 또는 날개 짓을 통해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고 느끼며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감각 기관은 짐승이나 곤충에게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 사람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아 상황을 판단을 한다. 그리고 혀로 맛을 느끼거나 피부의 촉감을 통해 여러 사실들을 감지하는데, 이런 감각 외에 순간적인 직감(直感)도 있다. 그런데 만약 감각 기관 중 일부가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캐나다의 어느 신문사에 근무하던 한 여자 속기사는 때어날 때부터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 없었는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살이 칼에 베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불에 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으며, 살이 얼어붙어도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언뜻 생각하면 그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참 편할 것 같지만, 그 아가씨는 늘 상처투성이로 지내며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부엌에서 칼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도마 위에 흐르는 피를 보고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고 상처를 찾아 싸매야 했고, 어떤 때는 난로에 몸이 닿아 살이 타는데도 냄새를 맡고서야 그 사실을 알고 몸을 치료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이 상실되어 버린 사람은, 아픔은 느끼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몸을 방치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 몸에 있는 감각 기관은, 몸에 위험이 있을 때 그것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의 세계에도 보이지 않는 감각 기관이 있다. 그래서 잘못된 삶을 살 때면 심령으로 느끼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올바른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우리의 삶에도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오늘 그 영적인 감각을 잃어 버렸던 게하시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억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신 13:4).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9:4~6, 왕하 4~5장, 8:1~6, 렘 9:23~24, 요 13:1~17, 딤전 6:10.
게하시는 종이었다. 그는 단순한 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엘리사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부르셔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필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도록 하셨다(왕상 19:16). 수년간 엘리사는 엘리야를 섬기며 선지자란 무엇인지 보고 배웠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고, 바야흐로 엘리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왕하 2:11). 그의 사역은 엘리야처럼 격정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감화력은 먼 곳까지 영향을 미쳤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 곁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선지자와 함께 일하는 세월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번 주에 그토록 많은 특권과 기회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실패자가 돼버린 게하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곁길로 감으로써 중요한 것과 지엽적인 것을 분간치 못하는 자들에게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일요일 12월 12일
종의 정신
도입)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있는 인생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 믿음의 기본이다. 기독교의 근본원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임의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예배다. 우리는 예배자로서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가져야 한다. 이 고백에서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란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될 수 없다. 잘못된 예배며 헛된 예배다. 교인들이 전도할 때 이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마치 보험 계약을 하면서 약관을 숨긴 채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일반 사회에서조차도 이런 사기성 다분한 계약은 무효다. 처음부터 이를 모른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교회에서는 종 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기에, 교회라는 공동체는 심각한 갈등과 반목, 분당과 파벌을 만들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실정이다. 자신이 종의 신분임을 충분히 각인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은 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군림하려 하여 갈등과 고통을 겪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미리 준비해야만 했을 마음의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그 대가는 바로 우리가 종이라는 각오다. 성경에서도 종이란 특별한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에게 사용된 용어이며 하나님과 의로운 신자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라 할 수 있다. 종이란 낮고 비천한 신분이라는 의미도 포함하지만 성경에서는 영예롭고 안전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1. 다음 성경절을 읽고 종들이 하는 일을 나열해 보십시오. 창 24:2~4, 39:4~6, 눅 14:17, 17:7~8, 행 2:18.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 소원, 안락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삶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은 주인의 계획과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주인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때로 종은 기별을 전하고, 누군가와 동행하며, 그 사람을 위해 일하고, 하찮은 일들을 처리한다. 또 어떤 때에는 재정과 집안일을 관리한다. 그러나 종은 항상 자신이 아닌 주인의 일에 치중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이었다. 선지자의 종이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특권이었다. 그것은 하찮은 노동 이상을 의미했으며 일종의 견습과정이었다. 엘리사도 종으로서 엘리야를 섬겼다(왕상 19:19~21). 선지자의 일이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존되어 있지만, 선지자와 함께 봉사하는 특별한 기간은 선지자 지망생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심을 발전시키는 데 유익하였다. 엘리야를 섬기는 동안 엘리사는 자아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미래의 사역을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자격은 없었다. 게하시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종의 정신은 구약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종이 되고자 하는 정신이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셨다(막 9:35).
2. 요 13:1~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지도력과 종의 정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분의 치료 사역에도 함께 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대사로 나아가 일하기에는 준비가 미비했다. 그들은 즐거이 이론을 배우고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했지만, 자아를 포기하고 겸손히 서로를 섬길 준비는 여전히 부족했다.
교훈: 크든 작든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아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마음을 주님께 배워야 한다.
부가적용)
어떤 마음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마음일까? 그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음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맹종하는 사람은 그 추종자를 본받아 타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매우 오만불손한 데 비해, 순종하는 사람은 주인뿐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겸손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도 순종할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종으로서의 예의와 품격을 갖추어 서로를 대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진실한 순종과 섬김을 찾아보기 심히 어렵다. 종처럼 조용히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주목하고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고집 부리는 모습에 더 익숙하다.
월요일 12월 13일
곁에서 배움
도입)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으로 열왕기하 4장 12절에 처음 등장한다. 열왕기상 20장 14절부터 15절에 보면 사환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 청년”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엘리사 옆에서 섬겼던 제자로 해석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역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데 특히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왕하 4:8∼37)과 “문둥병자 나아만의 치유”(왕하 5:20∼27)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게하시에 대하여 살펴보자. 엘리사가 사역했던 시기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였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바알 숭배를 국교화 하다시피 한 분위기 속에서(비록 그가 죽었고 그의 아들인 여호람이 대를 잇고 있었다 할지라도) 영적 분위기는 호전되지 않았다. 여호람은 비록 그 부모만큼은 악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왕하 3:1∼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암흑 속에서도 큰 자들이 여호와를 섬기고(수넴 여인의 경우) 여호와를 믿게 되었다(나아만의 경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도 두 사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 사건은 ‘보답과 거절’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수넴 여인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엘리사를 섬겼고(4:9),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가 거기에 대해 보답하려는 제안을 했을 때에(4:13) 그것을 정중히 거절한다. 수넴 여인이 대답한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4:13)라는 표현은 자신은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며 이미 보호를 잘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엘리사와 수넴 여인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중재 역할을 하는 인물이 게하시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고민하자 게하시가 그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게하시는 이 여인이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어서 자식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함’을 귀띔해 준다. 여기에서는 게하시의 중재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남을 볼 수 있다.
좋은 교사는 모본과 예를 통해 가르치며, 학생들로 하여금 배운 것들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엘리사는 바로 그런 유형의 교사였다.
1. 왕하 4:8~17을 읽으십시오. 이야기 속에서 게하시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수넴 여인의 이야기 앞에는 여인과 관련된 또 다른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왕하 3:1 ~7에서 엘리사는 한 과부의 부채를 해결하고 그녀의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런 다음 엘리사는 수넴으로 향한다. 성경 시대의 여인에게는 일반적인 지위가 주어졌을 텐데 기이하게도 성경 기자는 한 기혼녀를 “귀한 여인”이라 칭하였고, 그녀의 남편 이름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요청에 따라 손님방을 짓고, 나이가 많았지만 추수를 감독할 만큼은 건재했다는 정도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에 엘리사는 게하시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오도록 게하시를 보냈다. 그리고 게하시를 통해 감사를 표현했다. 게하시는 여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관찰하여 알아채는 수완을 발휘했다. 엘리사는 게하시가 이적을 주도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일 년 뒤에 기적의 아이가 태어났다.
2. 왕하 4:18~31을 읽으십시오. 이전 이야기에서 봤던 것과 비교해서 여기서 게하시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기적의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게하시는 여전히 엘리사의 종이었지만,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여인은 도착하자마자 그를 지나쳐 엘리사의 발을 붙들었다. 게하시는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는 수넴여인의 “무례함”만을 주목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25~27절). 그는 엘리사처럼 그녀의 깊은 절망감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교훈: 이타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주신다.
부가적용)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라고 되어있다(4:27). 이것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표현으로 그녀의 소원함이 얼마나 절박한 지를 보여 주는 겸손한 애청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하시에게는 이것이 무례하게 보였는지 가까이 와서 그녀를 물리치려고 한다. 이제까지의 수넴 여인과 엘리사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게하시의 행동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게하시가 전에 무시당한 은근한 반감의 표현이라면 너무 무리한 해석인가? 그런 게하시를 엘리사가 막으며 그녀의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건의 긴급성과 중요함을 파악한 엘리사가 게하시를 먼저 수넴 여인의 집으로 보낸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4:29)고 지시한다. 그 당시 문화권에서 인사도 하지 말고 인사도 받지 말라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감안한 것일 수도 있고, 선지자의 사명에 어떠한 사소한 산만함도 배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고, 또한 선지자로부터 받은 능력을 발산시킬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넴 여인은 엘리사 외에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4:30)라고 말하며 함께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단호히 한다. 이에 대하여 게하시를 먼저 보낸 엘리사는 여인을 쫓아 나선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그들보다 먼저 간 게하시가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으며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4:31)라고 보고한다. 지팡이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분분하다. 지팡이는 과거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예: 출 4:1∼4) 엘리사는 게하시와 함께 지팡이라도 먼저 보내서 아이의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자신의 도착을 준비시키는 역할로 생각한 것 같다. 게하시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유대전통의 해석에 따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지팡이가 기적을 일으키는 매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또 다른 해석에서도 게하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능력보다는 단지 지팡이만 갖다 놓는 의무만을 수행하고 쉽게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인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게하시의 실패는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의 성공과 대조를 이루며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참 선지자임을 입증하는 데에 기여한다.
화요일 12월 14일
믿음의 질문
도입)
나아만은 이 땅에서는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가장 성공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의 가는 길은 형통하고 왕 이하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가는 길에 엎드려 그에게 존경을 취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나아만이 이렇게 존귀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왕하5:1) 나아만이 그 정도 성공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아만은 그 자신이 잘나서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모르고 모두들 자신이 잘해서 그런 줄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착각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며 높일 자를 높이시고 낮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착각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나아만에게 있어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문둥병자 였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군대장관이요 왕 앞에서도 크고 존귀한 자요 용사지만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던 것이다. 마지막에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이 한마디가 앞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나아만이 총각이어서 결혼 상대자를 찾는다고 하자. 처음에 그의 이력을 듣다가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킹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고서도 그를 최고의 남편감으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앞에 것이 좋아도 마지막에 문둥병자 였더라는 말만 붙으면 정이 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영적으로는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나아만은 겉으로는 성공이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문둥병이라는 병이 퍼져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모를 때에는 존경도 가고 사랑도 가지만 그러한 이러한 실상을 알고도 존경이 가겠는가? 나아만은 성공을 하여 비단옷을 입고 손에는 금가락지를 끼고 목에도 금 사슬로 치장을 하였지만 그러나 문둥병자에게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금가락지도 성한 손에 끼워야 빛이 나는 것이다. 썩어서 고름이 흐르는 손에 금가락지를 끼면 오히려 그 손이 더 병들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썩었는데 세상의 것으로 치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기어져 있으니 그 겉만 보고 좋다고 하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문둥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비단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그 몸이 그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악에 물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요 물질이 아니라 영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만은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목숨을 건 전투나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가 이룬 모든 것도 문둥병자인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영적인 과정을 겪는다. 세상 적으로 성공을 하면 자신의 영혼도 만족해질 것이다 생각으로 정신없이 돈 벌고 남보다 앞서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하고 나서 그 자리에 서 보면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할 때에는 그 자리에 서면 있을 것 같은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영혼에 허망함이 심하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사치하고 방탕하고 즐겨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통하여 그들을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헛됨을 자각을 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 것에는 생명이나 소망이 없다. 이것을 얻어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리시기를 바란다.
1. 왕하 5:1~19을 읽고 다음의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 이스라엘 왕은 왜 그렇게 반응하셨습니까? 그의 반응은 이성적이었습니까? 비이성적이었습니까?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습니까?
․ 엘리사의 명령에 나아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그런 반응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그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편지를 보고 분노했던 이스라엘 왕의 반응과 유사합니까?
․ 12절을 읽으십시오. 나아만 장군이 사용하고 있는 논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까?
․ 기적이 일어난 뒤에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일컬었습니까?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까?
․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어떤 사례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아무 것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까?
․ 17~19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아만의 요청과 그에 대한 엘리사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교훈: 우리의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거둔다.
부가적용)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다시 돌아와서 불치의 병에서 치료받은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표하려 한다. 그가 엘리사에게 드리려고 하는 예물은 아람의 장군답게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엘리사나 그의 선지 생도들의 형편은 무척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나아만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도움을 좀 받는다 할지라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딱 잘라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이렇게 거절함으로서 엘리사 선지자는 이제 막 신앙이 자라나려 하는 나아만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손에 쥐어질 물질보다는 한 영혼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순간순간 힘써야 할 것이다. 문둥병 치유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게하시의 관심은 어느덧 나아만이 그대로 본국으로 가지고 가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왕하5:5)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약 340킬로그램의 은과 90킬로그램의 금에 해당되는 양으로 상당한 액수를 의미한다. 게하시의 ‘이 아람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는 나아만을 이방인으로 얕보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의 이러한 배타성은 엘리사의, 이방인도 고쳐 주는 포용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게하시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내용이 엘리사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내용(왕하5:16)과 상반됨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게하시의 “내가 저를 쫓아가서”라는 표현에서는 기필코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받아내야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나타난다. 선지자의 제자로서 게하시는 엉뚱한 일에 사명을 두고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게하시와 나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쫓아오는 게하시를 보고 나아만은 수레에 내려서 그를 맞이한다. ‘내린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떨어진다’라는 뜻으로 마치 떨어지듯이 수레에서 급히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나아만이 얼마나 겸손하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나아만은 더 이상 도도하고 교만한 이방인이 아닌 겸손하고, 은혜에 보답할 줄도 알며 감사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수레에서 떨어진 자(내려서)는 나아만이지만 진정으로 떨어진 자(죄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는 게하시였던 것이다.
수요일 12월 15일
게하시의 타락
도입)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켜서 온 것처럼 둘러대며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 나아만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청한다(5:22). 원래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값어치이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인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가르쳐 준 원칙을 임의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둥병을 치료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엘리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원리였다. 또한 엘리사 자신이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의 사제들과 구분됨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도 숨어 있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문둥병 치유를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원리를 게하시는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아만은 요청한 액수보다 두 배를 가져가도록 호의를 베풀며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워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도록 명한다. 여기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반복되어 강조된 것은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엘리사에게 요청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5:17). 그는 여호와만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흙을 자신의 나라로 가지고 가고 있었고 게하시는 여호와의 명예와 그의 선지자의 명예에 먹칠을 하며 요란스럽게 속임수를 써서 물질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토록 많은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의 인물들은 그런 짓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만 장군이 치료되는 믿지 못할 장면이 게하시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을 뿐 아니라, 어떤 사례도 거절하는 주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 정도면 게하시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질 법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1. 왕하 5:20~27을 읽으십시오. 게하시는 일단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켰습니까? 게하시의 생각 속에는 애국심이나 민족적 편견이 얼마나 내포되어 있습니까?
성경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땅의 소유는 위험하다는 경고로 가득하다. 이런 경고는 직접적으로 부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시 하는 것은 소유한 물질의 양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탐욕과 싸우려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유의 개념을 고치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맡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시간도 일관성 있게 바침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지켜야 한다. 물질을 사랑하면 삶의 진정한 사명과 목적을 보지 못해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만다.
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지만 자리를 뜨자마자 다른 말을 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이는 자신을 속일 정도로 우리의 심령이 부패했다는 강력한 예증이다.
반면 나아만은 게하시에게 아주 후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특히 그의 두 종이 돌아와 게하시에게 나타난 이상한 증상을 보고했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게하시의 탐욕은 엘리사가 새로운 회심자에게 심어주기를 원했던 증거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은 게하시가 어떤 짓을 했는지 엘리사에게 알려주셨다. 그로서 그의 사역과 생애는 쓸모없게 되었다.
교훈: 우리의 사역이 이기적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대가 없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헌신을 아끼지 않는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나아만의 신실함과 친절이 게하시의 불충함과 탐욕을 더욱 추하게 보이도록 두 사람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나아만이 게하시에게 물질을 받으라고 억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도 똑같이 한 것이다. 엘리사의 경우는 같은 단어가 “강권하되”(5:16)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엘리사나 게하시나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차이점은 전자는 물질을 거부했고 후자는 그것을 원했다는 점이다. 언덕에 이르러 게하시가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한번 ‘둘’이라는 숫자가 강조되며 게하시의 범죄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24절에 다섯 개의 동사가 게하시의 완전범죄를 위한 행동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언덕에) 이르러, (물건을) 취하여, (집에) 감추고, (사환들을) 보내어, (그들을) 가게 한 후.” 이제는 엘리사만 속이면 게하시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게하시가 들어가서 엘리사 앞에 서니 엘리사가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다. 게하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은 주로 죄 지은 자를 힐문할 때 많이 쓰였다(예: 창 3:9; 4:9). 게하시는 태연하게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답한다(5:25). 게하시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에 엘리사가 그 여인의 문제를 잘 몰랐던 것을 기억하고(4:27)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엘리사는 정확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의 심령(마음)이 감각(感覺)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심령이 범죄현장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미래의 계획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5:26). 여기에 언급된 목록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야기할 때도 쓰였고(신 6:11; 수 24:13) 인간의 욕심을 묘사할 때에도 쓰였다(삼상 8:14~17). 하나님이 주실 때만이 진정한 복이 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게하시의 꿈은 이렇게 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목요일 12월 16일
과거의 영광으로 살아감
도입)
결정적인 실패’가 있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실패이자 다른 것과 상쇄할 수 없는 실패다. 그래서 그 앞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또 다른 선택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런 실패가 있다.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하나도 없는 실패. 우린 그 전형을 게하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게하시는 엘리야와의 관계에서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별 문제없이 엘리사의 뒤를 이어 선지자로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야말로 ‘앗!’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옮겨왔고 그 가족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급전직하. 하루아침에 그의 신분이 바뀌었다.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몰골로 그는 한평생을 살아야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실수로 가족마저 사람들과 등져야하는 상황을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그에게 소망이라곤 없어 보였다. 이후 그의 이름조차 성경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선지자의 사환으로서 불순종은 자기 위치를 망각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나아만을 속여 빼앗은 옷가지들과 돈을 숨기긴 했어도 “어디 갔다 오느냐?”는 엘리사의 물음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에덴의 아담을 다시 마주한다. 게하시 역시 그 날의 아담과 같았다. 그리고 그 끝도 같았다. 끝없는 나락으로의 추락.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열왕기하 8장에 홀연히 나타난다. 그것도 왕의 조력자로서 눈부시게 복귀한 채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열왕기하 5장의 문둥병자 게하시와 열왕기하 8장의 왕의 조력자 게하시는 다른 인물일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죄인들과 함께 심판하지 않으신다.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7년이나 지속될 극심한 기근을 주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고 엘리사를 극진히 섬겼던 수넴 여인(4:8~37)을 생각하셨다. 그래서 미리 그 여인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징계 계획을 알려 주셔서 그 징계를 피하게 하셨다. 신실한 백성을 이방 땅 블레셋으로 피신하게까지 하신 것으로 보아 아주 극심한 기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블레셋은 큰 곡창 지대였다. 긴 기근이 끝나자 그 여인은 자신의 유업이 있는 땅으로 돌아왔다. 블레셋 땅에서 7년 동안 살았지만 아무 미련 없이 그 땅을 등지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서 약속받은 유업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수넴 여인은 자신의 집과 토지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한다. 고대 시대에는 집과 토지가 주인 없이 오랫동안 방치되면 유랑자들이 점유하거나 강한 자가 자신의 소유로 삼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재산과 토지에 대한 행정 관리가 허술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을 블레셋으로 피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의 돌아오는 길도 예비하셨다. 그 여인이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려고 왕에게 당도하는 그 순간, 왕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화 내용이 엘리사가 그 여인의 아들을 살린 내용이었다. 게하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한 왕은 그 여인이 모든 소유를 되찾도록, 게다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7년간의 소출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1. 왕하 8:1~6에서 우리는 게하시에 대한 마지막 기사를 봅니다. 이전에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수넴 여인의 아들을 되살렸던 큰 이적이 있은 지 수년이 흘렀다. 게하시의 문둥병은 그렇게 흉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왕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있다. 그는 엘리사와 그의 이적을 떠벌리며 자신이 엘리사와 일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시기와 맞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 기자는 수넴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자 게하시가 그녀의 아들이 되살아났던 이야기를 했던 시점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게하시의 떠벌림을 이용해서 수넴 여인을 돕게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 수넴 여인은 이제 과부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런 일 때문에 남자가 아닌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는 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아들이 장성하기까지 가문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년의 가뭄동안 그녀는 외국에서 거주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점이 많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다르다.
2. 어떤 관계가 정말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렘 9:23~24 참조.
이렇게 해서 게하시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아쉬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사에게 잘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뒤를 이을 만한 훌륭한 선지자가 되거나 선지자 학교의 지도자나 교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때 선지자와 함께 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게하시는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저 과거 속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교훈: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게하시에게 문둥병이 내린 심판 이후에 4명의 문둥병자가 등장하는 열왕기하 7장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5장의 게하시와 8장의 게하시를 이어주는 통로로 삼는다. 5장 이후 갑자기 사라진 게하시를 복원하는 가교 역할을 수리아의 진영에 찾아든 4명의 문둥병자 중 하나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게하시였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수많은 랍비들이 7장의 문둥병자들을 게하시와 그의 세 아들로 보고있다. 왕하 5장과 8장의 게하시를 동일인물로 추론하는 데 있어서 단서가 될만한 실마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수리아 진영에 다다른 문둥병자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은 후 서둘러 옷가지와 금은보화를 감추는 동작을 멈추고 그런 자신들의 행위가 옳지 않음을 깨닫는 장면은 예사롭지 않다. 문둥병을 고치지 않는 한 사마리아 성 사람들과 구별된 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수리아 군대가 음식과 온갖 보화를 진영에 버려두고 도망친 사실을 성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들이 그렇게 하고자 결심한 데는 피치 못할 곡절이 있을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로 수리아 장군인 나아만과 과거 엘리사 몰래 게하시가 숨긴 옷과 돈이다. 다른 장소이긴 하지만 문둥병이 발병한 7년 후 수리아 진영에서 옷과 돈을 약탈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게하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는 게하시가 굳이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설사 돌아가 본 사실을 그대로 알린다고 해도 문둥병자의 말을 들어 줄 사람들이 있을까 조차 의문인 상황에서 대담하게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은 그가 게하시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은 결정적으로 8장에서 밝혀진다. 7년 만에 돌아온 수넴 여인을 게하시가 정확히 알아 본 것이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나는 전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 바로 게하시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는데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둥병이 나았고, 전쟁 상황이 종결된 후 공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게하시의 역할이 밝혀졌을 것이며, 그 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왕실 관리 자리를 그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로 죄의 댓가를 받는 것이 마땅했다. 그리고 그렇게 벌을 받았고 성경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 자기가 지은 죄로 처벌받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실패에 안주하거나 그 실패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무리 결정적인 실수를 했을지라도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그가 일견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은 테스트를 거쳐 정말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으로 변모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실패한 사건을 넘지 않으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40년을 우회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안다. 건너야 할 강은 우회할 수 있다 해도 건너는 것이 좋다. 그래야 또 다른 세계로 성큼 들어설 수 있다. 게하시에게 닥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은 그에게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게하시는 멋지게 살렸다고 생각한다. 생각처럼 그 기회가 손쉬운 건 아니다. 그것은 문둥이 몸으로 성을 향해 돌아가야 하며 흉물 대하듯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단이 동반되는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엔 놀라운 능력이 준비되어 있다. 해가 지평선에 떠오르는 아침,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의 발걸음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말을 믿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 가던 도중 병이 나은 문둥병자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 베드로의 대답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게하시는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엘리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수넴 여인을 대변하여 선한 말을 왕에게 증거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엘리사의 뒤를 이어 훌륭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전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회개하였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요일 12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높고 거룩한 특권을 받았던 자가 겪은 이 경험이 가르치는 교훈은 실로 엄숙하다. 게하시의 행동은 경이로운 빛을 받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업에 호감을 나타냈던 나아만의 행로에 장애물을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하시가 행한 기만은 변명을 할 여지가 없다. 그는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가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그의 동료들로부터 격리되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잠 19:5). 사람들은 저희 악한 행위를 인간의 안목에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게하시는 엘리사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한 말과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장면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타내 보이셨다.”(선지자와 왕, 25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삶에서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징후는 무엇입니까?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미치는 재물의 지배력에 관하여 십일조와 헌금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2. 목요일 교과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교과반에서 나눠봅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쉽게 놓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게하시는 어떻게 자신의 속임수를 감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고 있었고, 대단한 기적들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인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숨겼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왕하 5:17~19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림몬의 신당에서 절하는 문제에 관하여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이해를 구했던 사실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 이 교훈을 핑계로 삼지 말아야 할까요?
5. 다른 이들을 섬기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12월 18일 일몰: 오후 5시 16분
도입)
개미는 눈이 있지만 볼 수 없다고 한다. 설령 볼 수 있다고 해도, 땅 속에서 사는 개미에게는 그러한 눈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미에게는 눈 대신 눈의 역할을 하는 더듬이가 있다. 더듬이로써 어두운 땅 속에서 적인지 친구인지를 구별하고,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이 자기 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뱀은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뱀은 귀 대신 혀를 날름거려 모든 상황을 판단하며 움직인다. 벌은 날개 짓을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여러 감각 기관을 사용하여 멀리 있는 꿀을 찾으며, 그 일대의 꽃밭에 꿀의 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까지 알아낸다고 한다. 이처럼 짐승과 곤충들에게는 감각 기관이 있다. 그들은 혀나 귀나 더듬이를 통해서, 또는 날개 짓을 통해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고 느끼며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감각 기관은 짐승이나 곤충에게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 사람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아 상황을 판단을 한다. 그리고 혀로 맛을 느끼거나 피부의 촉감을 통해 여러 사실들을 감지하는데, 이런 감각 외에 순간적인 직감(直感)도 있다. 그런데 만약 감각 기관 중 일부가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캐나다의 어느 신문사에 근무하던 한 여자 속기사는 때어날 때부터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 없었는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살이 칼에 베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불에 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으며, 살이 얼어붙어도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언뜻 생각하면 그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참 편할 것 같지만, 그 아가씨는 늘 상처투성이로 지내며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부엌에서 칼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여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도마 위에 흐르는 피를 보고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고 상처를 찾아 싸매야 했고, 어떤 때는 난로에 몸이 닿아 살이 타는데도 냄새를 맡고서야 그 사실을 알고 몸을 치료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이 상실되어 버린 사람은, 아픔은 느끼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몸을 방치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 몸에 있는 감각 기관은, 몸에 위험이 있을 때 그것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의 세계에도 보이지 않는 감각 기관이 있다. 그래서 잘못된 삶을 살 때면 심령으로 느끼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올바른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우리의 삶에도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오늘 그 영적인 감각을 잃어 버렸던 게하시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억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신 13:4).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9:4~6, 왕하 4~5장, 8:1~6, 렘 9:23~24, 요 13:1~17, 딤전 6:10.
게하시는 종이었다. 그는 단순한 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엘리사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부르셔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필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도록 하셨다(왕상 19:16). 수년간 엘리사는 엘리야를 섬기며 선지자란 무엇인지 보고 배웠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고, 바야흐로 엘리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왕하 2:11). 그의 사역은 엘리야처럼 격정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감화력은 먼 곳까지 영향을 미쳤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 곁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선지자와 함께 일하는 세월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번 주에 그토록 많은 특권과 기회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실패자가 돼버린 게하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곁길로 감으로써 중요한 것과 지엽적인 것을 분간치 못하는 자들에게 좋은 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일요일 12월 12일
종의 정신
도입)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 있는 인생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 믿음의 기본이다. 기독교의 근본원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임의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예배다. 우리는 예배자로서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가져야 한다. 이 고백에서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란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될 수 없다. 잘못된 예배며 헛된 예배다. 교인들이 전도할 때 이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마치 보험 계약을 하면서 약관을 숨긴 채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일반 사회에서조차도 이런 사기성 다분한 계약은 무효다. 처음부터 이를 모른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교회에서는 종 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기에, 교회라는 공동체는 심각한 갈등과 반목, 분당과 파벌을 만들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실정이다. 자신이 종의 신분임을 충분히 각인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은 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군림하려 하여 갈등과 고통을 겪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미리 준비해야만 했을 마음의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그 대가는 바로 우리가 종이라는 각오다. 성경에서도 종이란 특별한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에게 사용된 용어이며 하나님과 의로운 신자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라 할 수 있다. 종이란 낮고 비천한 신분이라는 의미도 포함하지만 성경에서는 영예롭고 안전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1. 다음 성경절을 읽고 종들이 하는 일을 나열해 보십시오. 창 24:2~4, 39:4~6, 눅 14:17, 17:7~8, 행 2:18.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 소원, 안락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삶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은 주인의 계획과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주인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때로 종은 기별을 전하고, 누군가와 동행하며, 그 사람을 위해 일하고, 하찮은 일들을 처리한다. 또 어떤 때에는 재정과 집안일을 관리한다. 그러나 종은 항상 자신이 아닌 주인의 일에 치중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이었다. 선지자의 종이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특권이었다. 그것은 하찮은 노동 이상을 의미했으며 일종의 견습과정이었다. 엘리사도 종으로서 엘리야를 섬겼다(왕상 19:19~21). 선지자의 일이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존되어 있지만, 선지자와 함께 봉사하는 특별한 기간은 선지자 지망생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심을 발전시키는 데 유익하였다. 엘리야를 섬기는 동안 엘리사는 자아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미래의 사역을 위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자격은 없었다. 게하시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종의 정신은 구약 시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종이 되고자 하는 정신이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셨다(막 9:35).
2. 요 13:1~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지도력과 종의 정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분의 치료 사역에도 함께 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대사로 나아가 일하기에는 준비가 미비했다. 그들은 즐거이 이론을 배우고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했지만, 자아를 포기하고 겸손히 서로를 섬길 준비는 여전히 부족했다.
교훈: 크든 작든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아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마음을 주님께 배워야 한다.
부가적용)
어떤 마음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마음일까? 그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마음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맹종하는 사람은 그 추종자를 본받아 타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매우 오만불손한 데 비해, 순종하는 사람은 주인뿐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겸손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도 순종할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종으로서의 예의와 품격을 갖추어 서로를 대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진실한 순종과 섬김을 찾아보기 심히 어렵다. 종처럼 조용히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주목하고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고집 부리는 모습에 더 익숙하다.
월요일 12월 13일
곁에서 배움
도입)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으로 열왕기하 4장 12절에 처음 등장한다. 열왕기상 20장 14절부터 15절에 보면 사환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 청년”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엘리사 옆에서 섬겼던 제자로 해석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역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데 특히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왕하 4:8∼37)과 “문둥병자 나아만의 치유”(왕하 5:20∼27)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게하시에 대하여 살펴보자. 엘리사가 사역했던 시기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였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바알 숭배를 국교화 하다시피 한 분위기 속에서(비록 그가 죽었고 그의 아들인 여호람이 대를 잇고 있었다 할지라도) 영적 분위기는 호전되지 않았다. 여호람은 비록 그 부모만큼은 악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왕하 3:1∼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암흑 속에서도 큰 자들이 여호와를 섬기고(수넴 여인의 경우) 여호와를 믿게 되었다(나아만의 경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도 두 사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 사건은 ‘보답과 거절’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수넴 여인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엘리사를 섬겼고(4:9),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가 거기에 대해 보답하려는 제안을 했을 때에(4:13) 그것을 정중히 거절한다. 수넴 여인이 대답한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4:13)라는 표현은 자신은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며 이미 보호를 잘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엘리사와 수넴 여인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중재 역할을 하는 인물이 게하시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고민하자 게하시가 그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게하시는 이 여인이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어서 자식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함’을 귀띔해 준다. 여기에서는 게하시의 중재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남을 볼 수 있다.
좋은 교사는 모본과 예를 통해 가르치며, 학생들로 하여금 배운 것들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엘리사는 바로 그런 유형의 교사였다.
1. 왕하 4:8~17을 읽으십시오. 이야기 속에서 게하시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수넴 여인의 이야기 앞에는 여인과 관련된 또 다른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 왕하 3:1 ~7에서 엘리사는 한 과부의 부채를 해결하고 그녀의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런 다음 엘리사는 수넴으로 향한다. 성경 시대의 여인에게는 일반적인 지위가 주어졌을 텐데 기이하게도 성경 기자는 한 기혼녀를 “귀한 여인”이라 칭하였고, 그녀의 남편 이름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요청에 따라 손님방을 짓고, 나이가 많았지만 추수를 감독할 만큼은 건재했다는 정도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에 엘리사는 게하시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오도록 게하시를 보냈다. 그리고 게하시를 통해 감사를 표현했다. 게하시는 여인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관찰하여 알아채는 수완을 발휘했다. 엘리사는 게하시가 이적을 주도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일 년 뒤에 기적의 아이가 태어났다.
2. 왕하 4:18~31을 읽으십시오. 이전 이야기에서 봤던 것과 비교해서 여기서 게하시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기적의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게하시는 여전히 엘리사의 종이었지만,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여인은 도착하자마자 그를 지나쳐 엘리사의 발을 붙들었다. 게하시는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는 수넴여인의 “무례함”만을 주목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25~27절). 그는 엘리사처럼 그녀의 깊은 절망감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교훈: 이타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주신다.
부가적용)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라고 되어있다(4:27). 이것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표현으로 그녀의 소원함이 얼마나 절박한 지를 보여 주는 겸손한 애청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하시에게는 이것이 무례하게 보였는지 가까이 와서 그녀를 물리치려고 한다. 이제까지의 수넴 여인과 엘리사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게하시의 행동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게하시가 전에 무시당한 은근한 반감의 표현이라면 너무 무리한 해석인가? 그런 게하시를 엘리사가 막으며 그녀의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건의 긴급성과 중요함을 파악한 엘리사가 게하시를 먼저 수넴 여인의 집으로 보낸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4:29)고 지시한다. 그 당시 문화권에서 인사도 하지 말고 인사도 받지 말라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감안한 것일 수도 있고, 선지자의 사명에 어떠한 사소한 산만함도 배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고, 또한 선지자로부터 받은 능력을 발산시킬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넴 여인은 엘리사 외에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4:30)라고 말하며 함께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단호히 한다. 이에 대하여 게하시를 먼저 보낸 엘리사는 여인을 쫓아 나선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그들보다 먼저 간 게하시가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으며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4:31)라고 보고한다. 지팡이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분분하다. 지팡이는 과거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예: 출 4:1∼4) 엘리사는 게하시와 함께 지팡이라도 먼저 보내서 아이의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자신의 도착을 준비시키는 역할로 생각한 것 같다. 게하시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유대전통의 해석에 따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지팡이가 기적을 일으키는 매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또 다른 해석에서도 게하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능력보다는 단지 지팡이만 갖다 놓는 의무만을 수행하고 쉽게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인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게하시의 실패는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의 성공과 대조를 이루며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참 선지자임을 입증하는 데에 기여한다.
화요일 12월 14일
믿음의 질문
도입)
나아만은 이 땅에서는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가장 성공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의 가는 길은 형통하고 왕 이하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가는 길에 엎드려 그에게 존경을 취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나아만이 이렇게 존귀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왕하5:1) 나아만이 그 정도 성공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아만은 그 자신이 잘나서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인생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모르고 모두들 자신이 잘해서 그런 줄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착각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며 높일 자를 높이시고 낮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인간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착각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나아만에게 있어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문둥병자 였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군대장관이요 왕 앞에서도 크고 존귀한 자요 용사지만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던 것이다. 마지막에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이 한마디가 앞에서 설명한 모든 것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나아만이 총각이어서 결혼 상대자를 찾는다고 하자. 처음에 그의 이력을 듣다가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킹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고서도 그를 최고의 남편감으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앞에 것이 좋아도 마지막에 문둥병자 였더라는 말만 붙으면 정이 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영적으로는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나아만은 겉으로는 성공이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문둥병이라는 병이 퍼져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모를 때에는 존경도 가고 사랑도 가지만 그러한 이러한 실상을 알고도 존경이 가겠는가? 나아만은 성공을 하여 비단옷을 입고 손에는 금가락지를 끼고 목에도 금 사슬로 치장을 하였지만 그러나 문둥병자에게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금가락지도 성한 손에 끼워야 빛이 나는 것이다. 썩어서 고름이 흐르는 손에 금가락지를 끼면 오히려 그 손이 더 병들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썩었는데 세상의 것으로 치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기어져 있으니 그 겉만 보고 좋다고 하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문둥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비단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그 몸이 그 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악에 물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요 물질이 아니라 영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만은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목숨을 건 전투나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가 이룬 모든 것도 문둥병자인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영적인 과정을 겪는다. 세상 적으로 성공을 하면 자신의 영혼도 만족해질 것이다 생각으로 정신없이 돈 벌고 남보다 앞서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하고 나서 그 자리에 서 보면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할 때에는 그 자리에 서면 있을 것 같은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영혼에 허망함이 심하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사치하고 방탕하고 즐겨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통하여 그들을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헛됨을 자각을 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 것에는 생명이나 소망이 없다. 이것을 얻어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리시기를 바란다.
1. 왕하 5:1~19을 읽고 다음의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 이스라엘 왕은 왜 그렇게 반응하셨습니까? 그의 반응은 이성적이었습니까? 비이성적이었습니까?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습니까?
․ 엘리사의 명령에 나아만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그런 반응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그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편지를 보고 분노했던 이스라엘 왕의 반응과 유사합니까?
․ 12절을 읽으십시오. 나아만 장군이 사용하고 있는 논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떤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까?
․ 기적이 일어난 뒤에 나아만은 엘리사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일컬었습니까?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까?
․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어떤 사례도 받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아무 것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까?
․ 17~19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아만의 요청과 그에 대한 엘리사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교훈: 우리의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거둔다.
부가적용)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다시 돌아와서 불치의 병에서 치료받은 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표하려 한다. 그가 엘리사에게 드리려고 하는 예물은 아람의 장군답게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엘리사나 그의 선지 생도들의 형편은 무척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나아만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도움을 좀 받는다 할지라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딱 잘라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이렇게 거절함으로서 엘리사 선지자는 이제 막 신앙이 자라나려 하는 나아만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손에 쥐어질 물질보다는 한 영혼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순간순간 힘써야 할 것이다. 문둥병 치유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게하시의 관심은 어느덧 나아만이 그대로 본국으로 가지고 가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왕하5:5)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약 340킬로그램의 은과 90킬로그램의 금에 해당되는 양으로 상당한 액수를 의미한다. 게하시의 ‘이 아람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는 나아만을 이방인으로 얕보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의 이러한 배타성은 엘리사의, 이방인도 고쳐 주는 포용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게하시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내용이 엘리사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내용(왕하5:16)과 상반됨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게하시의 “내가 저를 쫓아가서”라는 표현에서는 기필코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받아내야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나타난다. 선지자의 제자로서 게하시는 엉뚱한 일에 사명을 두고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게하시와 나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쫓아오는 게하시를 보고 나아만은 수레에 내려서 그를 맞이한다. ‘내린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떨어진다’라는 뜻으로 마치 떨어지듯이 수레에서 급히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나아만이 얼마나 겸손하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나아만은 더 이상 도도하고 교만한 이방인이 아닌 겸손하고, 은혜에 보답할 줄도 알며 감사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수레에서 떨어진 자(내려서)는 나아만이지만 진정으로 떨어진 자(죄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는 게하시였던 것이다.
수요일 12월 15일
게하시의 타락
도입)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켜서 온 것처럼 둘러대며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 나아만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청한다(5:22). 원래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값어치이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인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가르쳐 준 원칙을 임의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둥병을 치료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엘리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원리였다. 또한 엘리사 자신이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의 사제들과 구분됨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도 숨어 있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문둥병 치유를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원리를 게하시는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아만은 요청한 액수보다 두 배를 가져가도록 호의를 베풀며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워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도록 명한다. 여기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반복되어 강조된 것은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엘리사에게 요청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5:17). 그는 여호와만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흙을 자신의 나라로 가지고 가고 있었고 게하시는 여호와의 명예와 그의 선지자의 명예에 먹칠을 하며 요란스럽게 속임수를 써서 물질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토록 많은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의 인물들은 그런 짓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만 장군이 치료되는 믿지 못할 장면이 게하시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을 뿐 아니라, 어떤 사례도 거절하는 주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 정도면 게하시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질 법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1. 왕하 5:20~27을 읽으십시오. 게하시는 일단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시켰습니까? 게하시의 생각 속에는 애국심이나 민족적 편견이 얼마나 내포되어 있습니까?
성경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땅의 소유는 위험하다는 경고로 가득하다. 이런 경고는 직접적으로 부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시 하는 것은 소유한 물질의 양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탐욕과 싸우려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유의 개념을 고치고, 그것들을 하나님께 맡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뿐 아니라 시간도 일관성 있게 바침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지켜야 한다. 물질을 사랑하면 삶의 진정한 사명과 목적을 보지 못해 결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만다.
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지만 자리를 뜨자마자 다른 말을 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이는 자신을 속일 정도로 우리의 심령이 부패했다는 강력한 예증이다.
반면 나아만은 게하시에게 아주 후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가지고 돌아갔을 것이다. 특히 그의 두 종이 돌아와 게하시에게 나타난 이상한 증상을 보고했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게하시의 탐욕은 엘리사가 새로운 회심자에게 심어주기를 원했던 증거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은 게하시가 어떤 짓을 했는지 엘리사에게 알려주셨다. 그로서 그의 사역과 생애는 쓸모없게 되었다.
교훈: 우리의 사역이 이기적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 대가 없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헌신을 아끼지 않는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나아만의 신실함과 친절이 게하시의 불충함과 탐욕을 더욱 추하게 보이도록 두 사람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나아만이 게하시에게 물질을 받으라고 억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도 똑같이 한 것이다. 엘리사의 경우는 같은 단어가 “강권하되”(5:16)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엘리사나 게하시나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차이점은 전자는 물질을 거부했고 후자는 그것을 원했다는 점이다. 언덕에 이르러 게하시가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한번 ‘둘’이라는 숫자가 강조되며 게하시의 범죄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24절에 다섯 개의 동사가 게하시의 완전범죄를 위한 행동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언덕에) 이르러, (물건을) 취하여, (집에) 감추고, (사환들을) 보내어, (그들을) 가게 한 후.” 이제는 엘리사만 속이면 게하시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게하시가 들어가서 엘리사 앞에 서니 엘리사가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다. 게하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은 주로 죄 지은 자를 힐문할 때 많이 쓰였다(예: 창 3:9; 4:9). 게하시는 태연하게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답한다(5:25). 게하시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에 엘리사가 그 여인의 문제를 잘 몰랐던 것을 기억하고(4:27)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엘리사는 정확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의 심령(마음)이 감각(感覺)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심령이 범죄현장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미래의 계획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5:26). 여기에 언급된 목록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야기할 때도 쓰였고(신 6:11; 수 24:13) 인간의 욕심을 묘사할 때에도 쓰였다(삼상 8:14~17). 하나님이 주실 때만이 진정한 복이 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게하시의 꿈은 이렇게 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목요일 12월 16일
과거의 영광으로 살아감
도입)
결정적인 실패’가 있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실패이자 다른 것과 상쇄할 수 없는 실패다. 그래서 그 앞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또 다른 선택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런 실패가 있다.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하나도 없는 실패. 우린 그 전형을 게하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게하시는 엘리야와의 관계에서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별 문제없이 엘리사의 뒤를 이어 선지자로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그야말로 ‘앗!’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옮겨왔고 그 가족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급전직하. 하루아침에 그의 신분이 바뀌었다.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몰골로 그는 한평생을 살아야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실수로 가족마저 사람들과 등져야하는 상황을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그에게 소망이라곤 없어 보였다. 이후 그의 이름조차 성경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선지자의 사환으로서 불순종은 자기 위치를 망각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나아만을 속여 빼앗은 옷가지들과 돈을 숨기긴 했어도 “어디 갔다 오느냐?”는 엘리사의 물음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에덴의 아담을 다시 마주한다. 게하시 역시 그 날의 아담과 같았다. 그리고 그 끝도 같았다. 끝없는 나락으로의 추락.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열왕기하 8장에 홀연히 나타난다. 그것도 왕의 조력자로서 눈부시게 복귀한 채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열왕기하 5장의 문둥병자 게하시와 열왕기하 8장의 왕의 조력자 게하시는 다른 인물일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들을 죄인들과 함께 심판하지 않으신다.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7년이나 지속될 극심한 기근을 주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고 엘리사를 극진히 섬겼던 수넴 여인(4:8~37)을 생각하셨다. 그래서 미리 그 여인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징계 계획을 알려 주셔서 그 징계를 피하게 하셨다. 신실한 백성을 이방 땅 블레셋으로 피신하게까지 하신 것으로 보아 아주 극심한 기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블레셋은 큰 곡창 지대였다. 긴 기근이 끝나자 그 여인은 자신의 유업이 있는 땅으로 돌아왔다. 블레셋 땅에서 7년 동안 살았지만 아무 미련 없이 그 땅을 등지고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서 약속받은 유업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수넴 여인은 자신의 집과 토지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한다. 고대 시대에는 집과 토지가 주인 없이 오랫동안 방치되면 유랑자들이 점유하거나 강한 자가 자신의 소유로 삼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재산과 토지에 대한 행정 관리가 허술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을 블레셋으로 피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의 돌아오는 길도 예비하셨다. 그 여인이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려고 왕에게 당도하는 그 순간, 왕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화 내용이 엘리사가 그 여인의 아들을 살린 내용이었다. 게하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한 왕은 그 여인이 모든 소유를 되찾도록, 게다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7년간의 소출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1. 왕하 8:1~6에서 우리는 게하시에 대한 마지막 기사를 봅니다. 이전에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수넴 여인의 아들을 되살렸던 큰 이적이 있은 지 수년이 흘렀다. 게하시의 문둥병은 그렇게 흉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왕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있다. 그는 엘리사와 그의 이적을 떠벌리며 자신이 엘리사와 일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시기와 맞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 기자는 수넴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자 게하시가 그녀의 아들이 되살아났던 이야기를 했던 시점을 정확히 말하고 있다. 게하시의 떠벌림을 이용해서 수넴 여인을 돕게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 수넴 여인은 이제 과부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런 일 때문에 남자가 아닌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는 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아들이 장성하기까지 가문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년의 가뭄동안 그녀는 외국에서 거주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점이 많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다르다.
2. 어떤 관계가 정말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렘 9:23~24 참조.
이렇게 해서 게하시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아쉬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사에게 잘 배울 수 있었다. 그는 뒤를 이을 만한 훌륭한 선지자가 되거나 선지자 학교의 지도자나 교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때 선지자와 함께 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게하시는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저 과거 속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교훈: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게하시에게 문둥병이 내린 심판 이후에 4명의 문둥병자가 등장하는 열왕기하 7장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5장의 게하시와 8장의 게하시를 이어주는 통로로 삼는다. 5장 이후 갑자기 사라진 게하시를 복원하는 가교 역할을 수리아의 진영에 찾아든 4명의 문둥병자 중 하나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게하시였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수많은 랍비들이 7장의 문둥병자들을 게하시와 그의 세 아들로 보고있다. 왕하 5장과 8장의 게하시를 동일인물로 추론하는 데 있어서 단서가 될만한 실마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수리아 진영에 다다른 문둥병자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은 후 서둘러 옷가지와 금은보화를 감추는 동작을 멈추고 그런 자신들의 행위가 옳지 않음을 깨닫는 장면은 예사롭지 않다. 문둥병을 고치지 않는 한 사마리아 성 사람들과 구별된 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수리아 군대가 음식과 온갖 보화를 진영에 버려두고 도망친 사실을 성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들이 그렇게 하고자 결심한 데는 피치 못할 곡절이 있을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로 수리아 장군인 나아만과 과거 엘리사 몰래 게하시가 숨긴 옷과 돈이다. 다른 장소이긴 하지만 문둥병이 발병한 7년 후 수리아 진영에서 옷과 돈을 약탈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게하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는 게하시가 굳이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설사 돌아가 본 사실을 그대로 알린다고 해도 문둥병자의 말을 들어 줄 사람들이 있을까 조차 의문인 상황에서 대담하게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은 그가 게하시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은 결정적으로 8장에서 밝혀진다. 7년 만에 돌아온 수넴 여인을 게하시가 정확히 알아 본 것이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나는 전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 바로 게하시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는데 사마리아 성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둥병이 나았고, 전쟁 상황이 종결된 후 공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게하시의 역할이 밝혀졌을 것이며, 그 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왕실 관리 자리를 그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왕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로 죄의 댓가를 받는 것이 마땅했다. 그리고 그렇게 벌을 받았고 성경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아무 문제가 없다. 자기가 지은 죄로 처벌받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실패에 안주하거나 그 실패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무리 결정적인 실수를 했을지라도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그가 일견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은 테스트를 거쳐 정말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으로 변모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실패한 사건을 넘지 않으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40년을 우회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안다. 건너야 할 강은 우회할 수 있다 해도 건너는 것이 좋다. 그래야 또 다른 세계로 성큼 들어설 수 있다. 게하시에게 닥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은 그에게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게하시는 멋지게 살렸다고 생각한다. 생각처럼 그 기회가 손쉬운 건 아니다. 그것은 문둥이 몸으로 성을 향해 돌아가야 하며 흉물 대하듯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단이 동반되는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엔 놀라운 능력이 준비되어 있다. 해가 지평선에 떠오르는 아침,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의 발걸음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말을 믿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려 가던 도중 병이 나은 문둥병자의 그것과도 다르지 않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 베드로의 대답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게하시는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엘리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수넴 여인을 대변하여 선한 말을 왕에게 증거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엘리사의 뒤를 이어 훌륭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전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회개하였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요일 12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높고 거룩한 특권을 받았던 자가 겪은 이 경험이 가르치는 교훈은 실로 엄숙하다. 게하시의 행동은 경이로운 빛을 받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업에 호감을 나타냈던 나아만의 행로에 장애물을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하시가 행한 기만은 변명을 할 여지가 없다. 그는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가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그의 동료들로부터 격리되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잠 19:5). 사람들은 저희 악한 행위를 인간의 안목에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게하시는 엘리사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한 말과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장면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타내 보이셨다.”(선지자와 왕, 25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삶에서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징후는 무엇입니까?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미치는 재물의 지배력에 관하여 십일조와 헌금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2. 목요일 교과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교과반에서 나눠봅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쉽게 놓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게하시는 어떻게 자신의 속임수를 감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고 있었고, 대단한 기적들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주인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숨겼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왕하 5:17~19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림몬의 신당에서 절하는 문제에 관하여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이해를 구했던 사실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 이 교훈을 핑계로 삼지 말아야 할까요?
5. 다른 이들을 섬기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댓글목록
최용길님의 댓글
최용길 작성일많은 시간을 투자 하셔서 교과해설을 올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임영철님의 댓글
임영철 작성일깊이 있는 내용에 감사를 드립니다. 은혜넘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