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과 사르밧 과부: 믿음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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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0-12-07 21:33 조회6,003회 댓글3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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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사르밧 과부: 믿음의 도약
12월 11일 일몰: 오후 5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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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완성된 믿음이 아니다. 그의 믿음은 풍랑에 시달리는 조각배처럼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믿음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다가 끝내는 모리야 산에서 완성되는 믿음이었다. 사르밧 과부의 신앙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신관에 대한 성장이 필요한 여인이었고 또한 그녀는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여인이었다. 이 연약한 한 여인의 삶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 기록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남기셨다. 힘없는 한 과부의 삶을 돌아보셨던 하나님께서 기근으로부터 그녀의 3년의 세월을 돌보셨다. 그녀는 이 기근을 돌보신 하나님에 대한 축복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항상 달콤하고 풍요로운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풀무불 같은 시련의 도가니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격을 다듬어 가신다. 엘리야의 삶은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런 풍요로움 속에 계속 머물게 하시지 않았다. 아무 탈 없이 지내던 한 가정에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친 것이다.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그녀와 엘리야의 신앙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들을 취하셨다 다시 그 아들의 생명을 되돌려 주심으로 여호와께서는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의 우리의 생명까지도 어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다. 단지 하나님의 이 땅의 물질적 축복의 기적만을 경험하는 신앙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정체되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우리의 생명의 부활이 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억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왕상 17장, 욥 38장, 42:4~6, 눅 4:24~28, 히 11:1, 계 1:17.
죽음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풀은 마르고, 나무는 시들었으며, 소들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염소는 가엾이 울고 있다. 혹시 구름 한 조각이라도 있을까, 비 한 방울이라도 내릴까 소원하며 매일 하늘을 응시한다. 그녀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쓰기 위해 밀가루와 기름을 아껴왔다. 둥글고 납작하게 구운 작은 떡 하나를 같지 않은 크기로 나눈다. 그리고 큰 쪽을 아들에게 준다. 힘을 잃고 야위어가는 아이를 볼 때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도 다 소용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얼마 후 둘 다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끼 먹을 양식만 남았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과부는 사르밧 마을을 떠나 마지막 식사를 지을 나무를 주워 모은다. 여기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 기사와 구원의 역사에 실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서서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한 이름 모를 과부의 삶 속에 펼쳐진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대쟁투를 보게 될 것이다.
일요일 12월 5일 사르밧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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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어떤 한 문을 닫으실 때는 또 다른 문을 열어 두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이 꽉 막힌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출구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더니 그 시냇가가 마르자 이제는 '시돈'이라 이름 하는 땅에 사르밧 동네에 가게 하셔서 그곳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의 먹을 것을 공궤 받게 했다. 요즘도 과부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는 시대라 참 조심스럽다. 요사이는 그렇지 않지만 엘리야 당시에는 가장 힘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과부와 고아'였다. 그 당시는 남성위주의 사회였다. 그러기에 남편 없는 과부,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 보면 그녀의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죽은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이 넉넉지 못 했던 것 같다. 엘리야가 도착한 그 시점에 그녀는 성 밖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왜 그토록 먼 거리를 가도록 하였을까? 더욱이 그곳은 이방 땅이며 또한 이방의 여인이었는데 그녀에게 가도록 하였을까? 비록 그녀가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부르짖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심이 없으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심을 아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는 큰 선지자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의 발단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바알숭배가 국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더 이상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심으로 폭풍의 신(바알)과 정면으로 맞섰다(왕상 17:1).
1. 하나님께서 폭풍의 신을 섬기고 있는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어떤 모순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이는 다른 권세와 비교하여 이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시 86:8, 렘 10:6, 히 1:1~3, 욥 38장 참조.
이스라엘 땅이 극심한 가뭄에 메말라 있을 때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다(왕상 17:3). 그릿 시내도 마르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방 땅인 사르밧으로 떠나도록 명하셨다(왕상 17:1 ~9).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악랄한 여왕 이세벨의 고국, 페니키아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페니키아의 국신은 바알이었다. 그래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고대 세계에서 신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도시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밧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이방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알 숭배의 중심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필요를 이용하여 먼 사르밧 땅의 한 여인에게 가까이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문제를 감추거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가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고생하며 상처받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의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세계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누구를 통해서든지 일하실 수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과부에게 보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 과부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엘리야도 그 시돈까지 걸어가면서 과연 그 과부가 이 긴 가뭄으로부터 자신을 공궤하고 보호해 줄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재력가도 있었을 터이고 하나님의 종들을 공궤하는 정치가나 실력자들이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힘없는 여인을 들어 쓰시려 하셨을까? 여기 오늘 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이 과부를 엘리야를 보내 구원케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당시에 가장 힘없는 계층의 한 사람이었다. 양식이 떨어져 이제 한끼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을 보면 정말 절망적인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힘없고 절망적인 한 여인! 무력하고 능력이 없는 그런 여성!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인 그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녀를 살리시려고 엘리야를 붙여 주셨다. 성경에는 그 여인이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당장 먹을 양식이 떨어져가고 흉년은 더 심해 가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을 아뢰어 부르짖었을 것이었다. 오! 하나님! 이제 우리의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한끼의 양식만이 남았습니다. 이 양식만 끊어지면 우리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라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부의 부르짖음을 듣고 바로 엘리야를 보내 주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의 삶이 가장 핍절할 때, 그리고 이제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여러분들은 우리의 탈출구가 되시고 비상구가 되실 하나님을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 주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종을 붙여주셨다. 바로 엘리야를 붙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사람을 붙여주신다. 그래서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월요일 12월 6일 의외의 도구(왕상 1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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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가 이 과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비가오지 않아 물을 구하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만나자마자 물을 달라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떡도 좀 달라고 하였다. 이 가난에 시달린 집에 심한 기근이 밀어닥쳐 비참하게도 하잘것없는 음식마저도 끊어질 지경이었다. 그 과부가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처해 있던 바로 그 날에 엘리야가 옴으로 자기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 여인의 신앙이 최대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었음을 시험 받는 시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서운 궁지에서라도 그 여인은 마지막 떡 한 조각을 나누어 먹자는 이 낯선 사람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과부는 음식과 물을 달라는 엘리야의 요구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오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 그럴듯한 음성이요 희망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이 당한 시험은 작은 시험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신앙의 시험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 낯선 나그네가 하는 말은 자신의 위급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얄팍한 속임수인지 그것을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이제까지 모든 나그네를 친절하고 너그럽게 접대하였던 것처럼 엘리야를 대접하였다.
최후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과부는 엘리야를 보자마자 여호와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경이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무언가에 의해서 그녀는 엘리야를 여호와 숭배자로 알게 되었다.
1. 왕상 17:12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이 그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 왕상 17:3~4과 17:8~9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지도하고 인도하셨다. 처음에는 엘리야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음식을 공급하도록 명하셨다. 그 다음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셨다(9절).
그녀는 의외의 도구였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나 권세도 없는 과부에 불과했다. 그녀야말로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대개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신다(고후 12:9).
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리적으로 제한받지 않음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제한받지 않음을 본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대쟁투 속에서 펼쳐지는 엘리야의 활약을 통해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우리는 죽음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해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닥칠지라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다(렘 29:11). 어차피 우리는 좋든 안 좋든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한다.
교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의외의 멋진 도구로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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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 힘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계속 당신의 자녀들의 길에 불행 중에 축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두시며 이 기회를 선용하는 자들은 큰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0, 11). 선지자 131p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충실한 종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이름으로 나타낸 친절한 행위는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가족 중에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자들까지도 똑같이 친절하게 인정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 곧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말씀하신다.
화요일 12월 7일 전적인 순복(왕상 17: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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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아이에게 이르러 올 고통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하여 "엘리야의 말대로"함으로 그 여인은 이 손님을 친절히 대접하라는 최고의 시험에 응했다. 이 페니키아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나타낸 후대는 놀라웠으며 그의 신앙과 관용은 놀라운 보상을 받았는데, 말씀 속에서 그 보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과부가 엘리야의 말을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14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어떻게 이런 약속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은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결과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오게 되었다.
1. 왕상 17:13~16을 읽으십시오. 엘리야는 과부에게 먼저 뭐라고 말했습니까? 왜 그것을 먼저 말했을까요? 그녀에게 어려운 일을 요구함으로써 엘리야는 어떤 큰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까?
성경에서 과부는 아무리 좋은 시대에 살았다할지라도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그들을 돌볼 장성한 자녀가 없는 경우라면 특히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쉬웠고, 법적인 권리도 제한되었다. 대기근의 시대라면 아마도 더 했을 것이다. 집마다 생존을 위해 다투는데 가난한 과부에게 돌아올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과부에게 선지자는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녀는 절대 부탁을 들어 줄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아사(餓死)로부터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단 한 줌의 밀가루과 기름 한 술이 전부였다.
2. 엘리야는 누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떤 믿음이 필요했습니까?
대개 다른 사람의 음식을 챙긴 다음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나눠 줄 여력이 없는 자에게 음식을 요구할 뿐 아니라,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식사를 요구함으로써 선지자는 그녀의 믿음을 끌어올리고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3.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복을 요구하신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창 22장 참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 우리는 결국 항상 더 많은 것을 받는다. 선지자에게 음식을 먼저 제공할 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신뢰하는 어린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싹텄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을 믿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닌가?(히 11:1 참조) 그런데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저급한 예배를 드리는 이방 여인이 경험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녀와 교통하셨고, 그녀는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어진 명령대로 행하였다.
교훈: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을 다 바치면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을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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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사건들은 인간의 과학이나 경험, 지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출애굽시에 홍해가 갈라진 사건, 요단강을 건너간 사건,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사건 등등...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사건들이다. 예수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게 한 서건, 풍랑을 명하여 잔잔케 한 사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어디 이뿐인가? 현대 과학으로는 입증 할 수 없는 기적들을 하나님은 능히 동원하시어 일을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약속을 단순히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수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믿고 안 되는 것은 안 믿는다면 어찌 그것을 믿음이라 할 것인가? 믿음의 최고의 방해물이 내 머리, 내 지식, 내 경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섣불리 똑똑하면 그것이 교만의 도구가 된다. 태권도 초단과 2단이 까분다. 3단 4단 5단 되면 겸손해지고 낮아진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약속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으시고 순종하시기를 바란다.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이 말은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라는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죽을 목숨이 살았다. 2. 3년 동안의 삶을 풍성함으로 누리게 되었다. 한 번의 순종으로 3년의 복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요일 12월 8일 자신의 죄를 기억함(왕상 1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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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했다. 이 말은 무조건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순종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눅5: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였던 것과 같은 구절이다. 이 말씀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순종이 능력이요, 순종이 우리 인생의 궁핍의 해결책임을 보여주고 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오늘날도 우리의 삶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과부가 최후의 떡을 엘리야에게 주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이적을 베푸셨다. 그녀와 아들은 기적적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었다.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한 번도 아니고 매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1.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은 무엇입니까? 욥 42:5~6, 사 6:5, 단 10:8, 눅 5:8, 계 1:17 참조. 왜 그런 반응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과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하는 순간, 우리의 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신다고 생각하게 된다. 왕상 17:18에서 과부는 자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선지자를 원망하였다.
2. 그녀의 사고방식을 보십시오. 왕상 17:18. 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아마도 그녀는 엘리야의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선지자의 삶을 대조해 보고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날마다 기적 속에서 살면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경험함으로 이전보다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극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임한 비극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난한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아이가 아픈 것일까? 무슨 죄 때문에 내 삶에 이런 재앙이 닥쳤을까? 물론 고통이 우리의 악한 선택에서 비롯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재난을 당하기도 한다. 욥을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한 그에게도 큰 불행이 닥쳤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비극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추측에 불과한 원인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훈: 가장 큰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알 수 없는 비극은 찾아온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가적용)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음을 앞에 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식사 분까지 제공한 사르밧 여인의 순종하는 모습은 가히 신앙인들의 본이 될만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람을 공궤하던 여인의 아들이 죽는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했을까? 가끔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를 지긋지긋하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출하셨는데, 그들의 앞에 홍해가 나타나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설상가상으로 뒤에는 애굽의 말을 탄 군사들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온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기껏 애굽에서 나오도록 해 놓고 왜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입니까?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 광야까지 끌고 와서 죽이는 겁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자꾸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자신에게 아들이 뒤늦게 태어난 기적이 일어났고, 그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주셔서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께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주시고자 계획했고 그 아들을 주셨는데, 이제 좀 장성하니까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을 주셨던 이유가 잘 키워서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까? 이렇게 만일 아브라함이 질문을 던졌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가끔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때가 많다.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데, 때로는 불신자들보다 더 험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말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님 앞에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그래도 우리의 가는 길이 조금은 평탄하고 형통하도록 뭔가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열심히 기도생활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정성으로 공궤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 훌륭한 여인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기대였던 이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이 여인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성경을 보면 이런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 때로는 우리가 만난 그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경우를 만날 때가 참 많다.
목요일 12월 9일 믿음을 시험함
도입)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남기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와서 하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8:18) 무슨 말인가? 이 여인은 엘리야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엘리야가 그 가정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스라엘에 이 시돈으로부터 우상이 들어오고 그 결과로 지금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도 설명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징계를 내리시고 있다는 것도 말을 했을 것이다. 그 사르밧 여인은 그 엘리야를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선지자의 삶을 보면서 자기가 잘못 살아온 죄가 생각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국 자기 아들을 하나님이 죽였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지금 그 여인은 아주 잘못된 신관, 곧 하나님을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이방인들의 신처럼 생각했다. 종종 우리들 가운데 여기 사르밧 여인처럼,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잘못된 신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르밧 여인의 아들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교정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 사건을 통해서 사르밧 여인은 신앙의 큰 성숙을 가져오도록 하신 것이다.
1. 과부와 엘리야의 믿음은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까? 왕상 17:17~24.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엘리야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아이를 되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도는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여인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선지자도 그런 일을 이해하기 위해 고뇌해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마 11:1~3).
상당 기간 과부와 엘리야는 그치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의 기적 속에 살았고 그런 경험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기적만큼이나 극적인 시련이 이르렀을 때, 그들의 믿음은 시험에 들고 말았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경험해야 했던가? 강력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일들도 있었지만, 훗날 주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원치 않는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기적이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지만, 믿음의 중심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엘리야는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칭호를 사용했습니까? 이는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보여줍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분과 매우 친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라 해서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아이의 죽음을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기적은 어떤 마법이나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는 선지자의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성경 기자는 아이를 되살린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엘리야 본인도 그 결과에 놀랬다. 아마도 그는 과부에게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외쳤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인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야의 믿음에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의 고백으로 과부의 반응은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붙드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훈: 기적은 믿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시련은 믿음을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가적용)
이방인들이 다 그렇듯이 이 여인에게 있어서도 신이라는 것은 징벌과 재앙만 주로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에 대해서는 가급적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 잘 대해 주시다가도 금세 토라져서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는 변덕스러운 신, 제사상에 있어야 할 것이 빠졌다고 트집을 잡고 복을 보류하는 신, 손발이 닳고 닳도록 빌면서 잘 달래주어야만 마음을 돌리는 그런 신, 나의 죄만 물고 늘어지는 악의 가득찬 신, 항상 나의 약점만을 들추고 내 허리끈을 조여 매는 잔인한 신, 그것이 이 사르밧 여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가졌던 신관이다. 오늘날의 성도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하는 것만 트집 잡아 가지고 벌만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말이다. 지옥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지옥으로 갖다가 집어넣는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 마치 사르밧 여인의 아들을 죽이듯이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불의를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정말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자녀된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계속 걸어가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기 사르밧 여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이방의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신이 아니시다. 무당들이 그러잖아요, 복채를 조금 내려놓으면 그 신이 진노한다고 말이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그런 트집이나 잡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단순히 그런 신이 아니시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오, 단순히 죽음으로 징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 사르밧 여인의 아들의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응답을 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전달하는 사자로 생각하고 말을 했다. 마치 심판 집행을 위해 보내진 사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단순히 그런 죽음의 사자만이 아니라, 생명의 사자라는 것, 복을 가져다주는 사자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34절에서 이 사르밧 여인이 신앙을 고백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 고백을 볼 때에 이 여인이 엘리야를 보면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의심도 했나 보다. 매일같이 나오는 가루와 기름을 보면서도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으로 성숙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이 사르밧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는 것으로 인해 자고하지 않도록 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수가 있는 인간들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 가하면 내가 선지자를 대접한 결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자기의 대접한 일, 자기의 순종했던 일,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여인은 교만해질 수가 없었다. 우리들에게 이 사르밧 여인에게 일어난 일처럼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할 때가 있다.
금요일12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눅 4:23~27).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의 의문에 응하셨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업을 위하여 택하신 종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허용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마음과 믿고자 하는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그들은 죄에 집착하고, 주의 사자들을 통하여 오는 성령의 경고를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이를 수 있었던 통로를 차단시키고 말았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가정들을 그냥 지나치시고 이방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지 않은 한 여인의 가정에서 당신의 종을 위한 피난처를 발견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받은 빛을 좇았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내신 더욱 큰 빛에 마음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은총을 입었었다.”(시대의 소망, 23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와 고난은 어떤 관계입니까? 자신의 죄의 결과 고통 받는 자들과 자신과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다르게 취급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자의적 판단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까?
2. 희귀한 유전적 결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십대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어떤 위로와 조언을 주어야 합니까?
3.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그는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에 휩싸일 수 있습니까? 이로 보건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2월 11일 일몰: 오후 5시 14분
도입)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완성된 믿음이 아니다. 그의 믿음은 풍랑에 시달리는 조각배처럼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믿음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다가 끝내는 모리야 산에서 완성되는 믿음이었다. 사르밧 과부의 신앙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신관에 대한 성장이 필요한 여인이었고 또한 그녀는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한 여인이었다. 이 연약한 한 여인의 삶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 기록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남기셨다. 힘없는 한 과부의 삶을 돌아보셨던 하나님께서 기근으로부터 그녀의 3년의 세월을 돌보셨다. 그녀는 이 기근을 돌보신 하나님에 대한 축복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항상 달콤하고 풍요로운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풀무불 같은 시련의 도가니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격을 다듬어 가신다. 엘리야의 삶은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이런 풍요로움 속에 계속 머물게 하시지 않았다. 아무 탈 없이 지내던 한 가정에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친 것이다.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그녀와 엘리야의 신앙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들을 취하셨다 다시 그 아들의 생명을 되돌려 주심으로 여호와께서는 현세뿐만 아니라 내세의 우리의 생명까지도 어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다. 단지 하나님의 이 땅의 물질적 축복의 기적만을 경험하는 신앙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정체되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우리의 생명의 부활이 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는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억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왕상 17장, 욥 38장, 42:4~6, 눅 4:24~28, 히 11:1, 계 1:17.
죽음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풀은 마르고, 나무는 시들었으며, 소들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염소는 가엾이 울고 있다. 혹시 구름 한 조각이라도 있을까, 비 한 방울이라도 내릴까 소원하며 매일 하늘을 응시한다. 그녀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쓰기 위해 밀가루와 기름을 아껴왔다. 둥글고 납작하게 구운 작은 떡 하나를 같지 않은 크기로 나눈다. 그리고 큰 쪽을 아들에게 준다. 힘을 잃고 야위어가는 아이를 볼 때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도 다 소용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얼마 후 둘 다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 끼 먹을 양식만 남았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과부는 사르밧 마을을 떠나 마지막 식사를 지을 나무를 주워 모은다. 여기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 기사와 구원의 역사에 실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주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서서히 믿음의 길을 걸었던 한 이름 모를 과부의 삶 속에 펼쳐진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대쟁투를 보게 될 것이다.
일요일 12월 5일 사르밧으로
도입)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문을 닫으실 때는 또 다른 문을 열어 두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이 꽉 막힌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출구가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더니 그 시냇가가 마르자 이제는 '시돈'이라 이름 하는 땅에 사르밧 동네에 가게 하셔서 그곳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의 먹을 것을 공궤 받게 했다. 요즘도 과부라는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는 시대라 참 조심스럽다. 요사이는 그렇지 않지만 엘리야 당시에는 가장 힘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과부와 고아'였다. 그 당시는 남성위주의 사회였다. 그러기에 남편 없는 과부,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 보면 그녀의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죽은 남편이 남겨놓은 재산이 넉넉지 못 했던 것 같다. 엘리야가 도착한 그 시점에 그녀는 성 밖에서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왜 그토록 먼 거리를 가도록 하였을까? 더욱이 그곳은 이방 땅이며 또한 이방의 여인이었는데 그녀에게 가도록 하였을까? 비록 그녀가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부르짖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심이 없으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심을 아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는 큰 선지자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의 발단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바알숭배가 국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더 이상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심으로 폭풍의 신(바알)과 정면으로 맞섰다(왕상 17:1).
1. 하나님께서 폭풍의 신을 섬기고 있는 나라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어떤 모순을 암시하고 있습니까? 이는 다른 권세와 비교하여 이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권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시 86:8, 렘 10:6, 히 1:1~3, 욥 38장 참조.
이스라엘 땅이 극심한 가뭄에 메말라 있을 때에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다(왕상 17:3). 그릿 시내도 마르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방 땅인 사르밧으로 떠나도록 명하셨다(왕상 17:1 ~9).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악랄한 여왕 이세벨의 고국, 페니키아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페니키아의 국신은 바알이었다. 그래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고대 세계에서 신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도시나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밧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이방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알 숭배의 중심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고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필요를 이용하여 먼 사르밧 땅의 한 여인에게 가까이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문제를 감추거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가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여전히 고생하며 상처받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의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세계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누구를 통해서든지 일하실 수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과부에게 보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 과부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엘리야도 그 시돈까지 걸어가면서 과연 그 과부가 이 긴 가뭄으로부터 자신을 공궤하고 보호해 줄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재력가도 있었을 터이고 하나님의 종들을 공궤하는 정치가나 실력자들이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힘없는 여인을 들어 쓰시려 하셨을까? 여기 오늘 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이 과부를 엘리야를 보내 구원케 하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당시에 가장 힘없는 계층의 한 사람이었다. 양식이 떨어져 이제 한끼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을 보면 정말 절망적인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힘없고 절망적인 한 여인! 무력하고 능력이 없는 그런 여성!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인 그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녀를 살리시려고 엘리야를 붙여 주셨다. 성경에는 그 여인이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당장 먹을 양식이 떨어져가고 흉년은 더 심해 가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을 아뢰어 부르짖었을 것이었다. 오! 하나님! 이제 우리의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한끼의 양식만이 남았습니다. 이 양식만 끊어지면 우리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라고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부의 부르짖음을 듣고 바로 엘리야를 보내 주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의 삶이 가장 핍절할 때, 그리고 이제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여러분들은 우리의 탈출구가 되시고 비상구가 되실 하나님을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 주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종을 붙여주셨다. 바로 엘리야를 붙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사람을 붙여주신다. 그래서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월요일 12월 6일 의외의 도구(왕상 1 7:7~12)
도입)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가 이 과부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비가오지 않아 물을 구하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만나자마자 물을 달라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떡도 좀 달라고 하였다. 이 가난에 시달린 집에 심한 기근이 밀어닥쳐 비참하게도 하잘것없는 음식마저도 끊어질 지경이었다. 그 과부가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처해 있던 바로 그 날에 엘리야가 옴으로 자기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 여인의 신앙이 최대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었음을 시험 받는 시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서운 궁지에서라도 그 여인은 마지막 떡 한 조각을 나누어 먹자는 이 낯선 사람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과부는 음식과 물을 달라는 엘리야의 요구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오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 그럴듯한 음성이요 희망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이 당한 시험은 작은 시험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신앙의 시험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 낯선 나그네가 하는 말은 자신의 위급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얄팍한 속임수인지 그것을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이제까지 모든 나그네를 친절하고 너그럽게 접대하였던 것처럼 엘리야를 대접하였다.
최후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과부는 엘리야를 보자마자 여호와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경이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무언가에 의해서 그녀는 엘리야를 여호와 숭배자로 알게 되었다.
1. 왕상 17:12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이 그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 왕상 17:3~4과 17:8~9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지도하고 인도하셨다. 처음에는 엘리야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음식을 공급하도록 명하셨다. 그 다음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셨다(9절).
그녀는 의외의 도구였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나 권세도 없는 과부에 불과했다. 그녀야말로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대개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신다(고후 12:9).
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리적으로 제한받지 않음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제한받지 않음을 본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대쟁투 속에서 펼쳐지는 엘리야의 활약을 통해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우리는 죽음도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해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닥칠지라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다(렘 29:11). 어차피 우리는 좋든 안 좋든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줄 알아야 한다.
교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의외의 멋진 도구로 사용하신다.
부가적용)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 힘이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계속 당신의 자녀들의 길에 불행 중에 축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두시며 이 기회를 선용하는 자들은 큰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0, 11). 선지자 131p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충실한 종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이름으로 나타낸 친절한 행위는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가족 중에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자들까지도 똑같이 친절하게 인정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 곧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고 말씀하신다.
화요일 12월 7일 전적인 순복(왕상 17:13~16)
도입)
자신과 아이에게 이르러 올 고통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하여 "엘리야의 말대로"함으로 그 여인은 이 손님을 친절히 대접하라는 최고의 시험에 응했다. 이 페니키아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나타낸 후대는 놀라웠으며 그의 신앙과 관용은 놀라운 보상을 받았는데, 말씀 속에서 그 보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과부가 엘리야의 말을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14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어떻게 이런 약속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은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결과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오게 되었다.
1. 왕상 17:13~16을 읽으십시오. 엘리야는 과부에게 먼저 뭐라고 말했습니까? 왜 그것을 먼저 말했을까요? 그녀에게 어려운 일을 요구함으로써 엘리야는 어떤 큰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까?
성경에서 과부는 아무리 좋은 시대에 살았다할지라도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그들을 돌볼 장성한 자녀가 없는 경우라면 특히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쉬웠고, 법적인 권리도 제한되었다. 대기근의 시대라면 아마도 더 했을 것이다. 집마다 생존을 위해 다투는데 가난한 과부에게 돌아올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과부에게 선지자는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녀는 절대 부탁을 들어 줄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아사(餓死)로부터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단 한 줌의 밀가루과 기름 한 술이 전부였다.
2. 엘리야는 누가 먼저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떤 믿음이 필요했습니까?
대개 다른 사람의 음식을 챙긴 다음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나눠 줄 여력이 없는 자에게 음식을 요구할 뿐 아니라,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식사를 요구함으로써 선지자는 그녀의 믿음을 끌어올리고 전적으로 굴복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3. 하나님께서 완전한 순복을 요구하신 다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창 22장 참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 우리는 결국 항상 더 많은 것을 받는다. 선지자에게 음식을 먼저 제공할 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신뢰하는 어린 믿음이 그녀의 마음속에 싹텄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란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을 믿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닌가?(히 11:1 참조) 그런데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저급한 예배를 드리는 이방 여인이 경험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그녀와 교통하셨고, 그녀는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세상의 관점에서 어리석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어진 명령대로 행하였다.
교훈: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을 다 바치면 하나님은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을 우리 손에 쥐어 주신다.
부가적용)
성경의 사건들은 인간의 과학이나 경험, 지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출애굽시에 홍해가 갈라진 사건, 요단강을 건너간 사건, 여리고 성이 무너진 사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사건 등등...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사건들이다. 예수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게 한 서건, 풍랑을 명하여 잔잔케 한 사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어디 이뿐인가? 현대 과학으로는 입증 할 수 없는 기적들을 하나님은 능히 동원하시어 일을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약속을 단순히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수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믿고 안 되는 것은 안 믿는다면 어찌 그것을 믿음이라 할 것인가? 믿음의 최고의 방해물이 내 머리, 내 지식, 내 경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섣불리 똑똑하면 그것이 교만의 도구가 된다. 태권도 초단과 2단이 까분다. 3단 4단 5단 되면 겸손해지고 낮아진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약속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으시고 순종하시기를 바란다.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이 말은 그대로 순종하였더니 라는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죽을 목숨이 살았다. 2. 3년 동안의 삶을 풍성함으로 누리게 되었다. 한 번의 순종으로 3년의 복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수요일 12월 8일 자신의 죄를 기억함(왕상 17:17~18)
도입)
*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했다. 이 말은 무조건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순종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되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눅5: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였던 것과 같은 구절이다. 이 말씀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순종이 능력이요, 순종이 우리 인생의 궁핍의 해결책임을 보여주고 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오늘날도 우리의 삶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과부가 최후의 떡을 엘리야에게 주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이적을 베푸셨다. 그녀와 아들은 기적적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었다.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한 번도 아니고 매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1.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의 자연스런 반응은 무엇입니까? 욥 42:5~6, 사 6:5, 단 10:8, 눅 5:8, 계 1:17 참조. 왜 그런 반응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과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하는 순간, 우리의 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신다고 생각하게 된다. 왕상 17:18에서 과부는 자신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선지자를 원망하였다.
2. 그녀의 사고방식을 보십시오. 왕상 17:18. 왜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아마도 그녀는 엘리야의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선지자의 삶을 대조해 보고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날마다 기적 속에서 살면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경험함으로 이전보다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극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임한 비극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비난한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아이가 아픈 것일까? 무슨 죄 때문에 내 삶에 이런 재앙이 닥쳤을까? 물론 고통이 우리의 악한 선택에서 비롯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재난을 당하기도 한다. 욥을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한 그에게도 큰 불행이 닥쳤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비극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추측에 불과한 원인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훈: 가장 큰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알 수 없는 비극은 찾아온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가적용)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음을 앞에 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식사 분까지 제공한 사르밧 여인의 순종하는 모습은 가히 신앙인들의 본이 될만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람을 공궤하던 여인의 아들이 죽는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했을까? 가끔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종살이를 지긋지긋하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출하셨는데, 그들의 앞에 홍해가 나타나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설상가상으로 뒤에는 애굽의 말을 탄 군사들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온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기껏 애굽에서 나오도록 해 놓고 왜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입니까?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 광야까지 끌고 와서 죽이는 겁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자꾸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자신에게 아들이 뒤늦게 태어난 기적이 일어났고, 그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주셔서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도 역시 하나님께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 하나님이 먼저 아들을 주시고자 계획했고 그 아들을 주셨는데, 이제 좀 장성하니까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들을 주셨던 이유가 잘 키워서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까? 이렇게 만일 아브라함이 질문을 던졌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정성껏 공궤하던 그 여인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가끔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때가 많다.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데, 때로는 불신자들보다 더 험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말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님 앞에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그래도 우리의 가는 길이 조금은 평탄하고 형통하도록 뭔가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열심히 기도생활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정성으로 공궤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 훌륭한 여인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기대였던 이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이 여인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성경을 보면 이런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 때로는 우리가 만난 그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경우를 만날 때가 참 많다.
목요일 12월 9일 믿음을 시험함
도입)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남기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와서 하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8:18) 무슨 말인가? 이 여인은 엘리야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엘리야가 그 가정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스라엘에 이 시돈으로부터 우상이 들어오고 그 결과로 지금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도 설명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징계를 내리시고 있다는 것도 말을 했을 것이다. 그 사르밧 여인은 그 엘리야를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선지자의 삶을 보면서 자기가 잘못 살아온 죄가 생각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국 자기 아들을 하나님이 죽였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지금 그 여인은 아주 잘못된 신관, 곧 하나님을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이방인들의 신처럼 생각했다. 종종 우리들 가운데 여기 사르밧 여인처럼,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잘못된 신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르밧 여인의 아들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교정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 사건을 통해서 사르밧 여인은 신앙의 큰 성숙을 가져오도록 하신 것이다.
1. 과부와 엘리야의 믿음은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까? 왕상 17:17~24.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엘리야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아이를 되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도는 아이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여인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선지자도 그런 일을 이해하기 위해 고뇌해야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마 11:1~3).
상당 기간 과부와 엘리야는 그치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의 기적 속에 살았고 그런 경험은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기적만큼이나 극적인 시련이 이르렀을 때, 그들의 믿음은 시험에 들고 말았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경험해야 했던가? 강력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일들도 있었지만, 훗날 주님께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원치 않는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기적이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지만, 믿음의 중심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 엘리야는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칭호를 사용했습니까? 이는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보여줍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분과 매우 친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라 해서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아이의 죽음을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기적은 어떤 마법이나 아이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는 선지자의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성경 기자는 아이를 되살린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엘리야 본인도 그 결과에 놀랬다. 아마도 그는 과부에게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외쳤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인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야의 믿음에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의 고백으로 과부의 반응은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붙드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훈: 기적은 믿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시련은 믿음을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가적용)
이방인들이 다 그렇듯이 이 여인에게 있어서도 신이라는 것은 징벌과 재앙만 주로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에 대해서는 가급적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 잘 대해 주시다가도 금세 토라져서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는 변덕스러운 신, 제사상에 있어야 할 것이 빠졌다고 트집을 잡고 복을 보류하는 신, 손발이 닳고 닳도록 빌면서 잘 달래주어야만 마음을 돌리는 그런 신, 나의 죄만 물고 늘어지는 악의 가득찬 신, 항상 나의 약점만을 들추고 내 허리끈을 조여 매는 잔인한 신, 그것이 이 사르밧 여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방인들이 가졌던 신관이다. 오늘날의 성도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하는 것만 트집 잡아 가지고 벌만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말이다. 지옥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 눈에 거슬리기만 하면 지옥으로 갖다가 집어넣는 무자비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 마치 사르밧 여인의 아들을 죽이듯이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불의를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정말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자녀된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계속 걸어가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기 사르밧 여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이방의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신이 아니시다. 무당들이 그러잖아요, 복채를 조금 내려놓으면 그 신이 진노한다고 말이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그런 트집이나 잡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단순히 그런 신이 아니시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오, 단순히 죽음으로 징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 사르밧 여인의 아들의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응답을 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전달하는 사자로 생각하고 말을 했다. 마치 심판 집행을 위해 보내진 사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단순히 그런 죽음의 사자만이 아니라, 생명의 사자라는 것, 복을 가져다주는 사자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34절에서 이 사르밧 여인이 신앙을 고백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 고백을 볼 때에 이 여인이 엘리야를 보면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의심도 했나 보다. 매일같이 나오는 가루와 기름을 보면서도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 사르밧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으로 성숙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는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이 사르밧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는 것으로 인해 자고하지 않도록 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수가 있는 인간들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 가하면 내가 선지자를 대접한 결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자기의 대접한 일, 자기의 순종했던 일,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여인은 교만해질 수가 없었다. 우리들에게 이 사르밧 여인에게 일어난 일처럼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할 때가 있다.
금요일12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눅 4:23~27). 예수께서는 선지자들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의 의문에 응하셨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업을 위하여 택하신 종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허용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느낄 줄 아는 마음과 믿고자 하는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그들은 죄에 집착하고, 주의 사자들을 통하여 오는 성령의 경고를 거절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이를 수 있었던 통로를 차단시키고 말았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가정들을 그냥 지나치시고 이방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지 않은 한 여인의 가정에서 당신의 종을 위한 피난처를 발견하셨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받은 빛을 좇았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내신 더욱 큰 빛에 마음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은총을 입었었다.”(시대의 소망, 23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죄와 고난은 어떤 관계입니까? 자신의 죄의 결과 고통 받는 자들과 자신과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우리는 다르게 취급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자의적 판단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까?
2. 희귀한 유전적 결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십대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어떤 위로와 조언을 주어야 합니까?
3.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그는 다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에 휩싸일 수 있습니까? 이로 보건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댓글목록
임영철님의 댓글
임영철 작성일
감사합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올 겨울에도 건강하십시요
윤선용님의 댓글
윤선용 작성일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박정님의 댓글
박정 작성일설명이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감사합니다.^&^